증언 - 외교를 통해 본 김대중 대통령
김하중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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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대통령의 개방 의지는 확고했다. 한민족은 독창성을 가진 문화 민족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중국 문화권에 있으면서도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 문화를 우리 문화로 재창조했다고 하면서, 일본에 (대중) 문화를 개방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니 문화를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 p122: 5


민주 투사로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그 행적이나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널리 퍼져 있습니다만, 대통령 재임 시절 대외관계에서 어느 정도나 두드러진 행적을 남긴 분인지는 깊은 인상이 안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객관적 성과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와는 관계 없이, 우리 인식 용량에 한계가 있어서일 뿐이어서일 때가 많죠. 역대 대통령이라면 누구나 외교 분야에서 가시적인 족적을 남기려고 애를 썼고, 때로는 무리수를 둬 가며 (그저 기록에 남기는 과시를 위해) 실속 없는 프로젝트 발주를 남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주변의 정치적 지형이 급변하던 무렵이었으며, 특히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움직임을 갓 드러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둘러싸고 일-미-남북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수면위로 처음 떠오르던 시기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어땠을까요? 누구나 다 기억하시듯, 직전 정부에서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혼란을 빚은 대실책을 저지른 탓에,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인(당시 표현으로 "당선자") 시절부터, 나쁘게 말해서 "구제자금을 구걸하러" 해외를 순방해야 했습니다. 동행 기자들이나 해외 교민들도 이 표현("구걸")을 그대로 사용하며, "국운의 형세에 비통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심회를 토로하던 기억이 나네요. 정치적 스탠스의 차이를 떠나, 누가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불렀고 누가 이를 수습했는지는 국민 모두가 뇌리에 깊이 새겨야 할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튼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자 시기부터, 식물인간화한 현직 대통령을 제껴 두고 국가 살림, 대외 관계 수습의 총책임자로 등장했지만, 그의 여정은 등등한 위세나 화려한 빛깔로 채워지기보다는, 고달프고 처량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가치와는 무관하게, 준(準) 망국인의 신세란 그래서 참담한 것입니다. 위기가 극복이 되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 또 과거의 행태로 복귀하는 모습은, 그래서 개탄과 우려를 부릅니다.

이 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이 당선자 시절에 대해선 아주 심도 있는 회고가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저자 김하중 전 장관이, 이 시기 동안에는 지근거리에서 보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하중의 회고록"인 이 책에서 직접 언급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겠죠,. 그러나 저자분이 의전비서관으로 취임한 시기가 충분히 이르기 때문에 "국난 극복의 과정"에 대해서도 개략적 회고 사항을 이 책에 다루고는 있습니다.

저자가 의전비서관으로 재직하던 무렵,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청와대 면담 신청은 의전비서실을 통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종래 이런  일에 대해서는 별도의 "직행" 비선 라인이 있거나, 부속실, 정무수석실 등 비정상적 통로로 수상쩍은 접촉이 시도되기 일쑤였습니다. 김 대통령의 이런 지시는 국가 공무의 상궤를 바른 모습으로 북귀시켰을 뿐 아니라, (범위를 좀 좁혀서 보자면) 바로 이 책의 집필자가 이런 두꺼운 회고록을 집필할 수 있었던(다시 말해, 김 대통령의 중요 행보를 측근에서 지켜 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해외를 방문하면, 그 국가의 교민들이 "열렬한" 환영을 위해 거리에 대거 도열해 있고, 국기를 흔드면서 과장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흔히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이 행사가 끝나면, 교민들은 인근 호텔로 초청되어, 비싼 비용을 치르고 마련된 리셉션에서 소위 "환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이런 "관행"에 대해 전면 재고할 것을 지시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환영을 구태여 "동원 과정"을 거쳐 (현지인들에게 볼썽사납게) 치를 것이 무엇이며, 더군다나 국고 지출을 감내하며 호화 만찬장을 차리는 게 무슨 긴절한 필요가 있겠느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게다가 해당 시기가 국난 극복의 지난한 시련을 치르는 동안이었으니, 재외국민들에게건 외국인들에게건 뭔가 모범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게 대통령의 취지였습니다. 어떠신진요. 이런 일화는 마치 중국 고전 역사서에나 나올 법한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보이지 않으십니까. 큰 인물의 족적에는 이런 가슴 울컥하는 공통의 에센스가 반드시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김하중 씨가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은 의전비서관 시절/외교안보수석보좌관 시절로 나뉘어집니다. 전자와 후자는 각각 이 책의 1부/2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가 한국 현대사에서 워낙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굵직굵직한 사건과 (겉으로 보이지 않는) 중차대한 외교사(外交事) 역시 많이 처리되어야 했던 시기였는지라, 1부, 2부 가릴 것 없이 독자에게는 엄청난 비중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혁명 1세대들 중 마지막 최고실력자였던 덩샤오핑 사후, 차세대 중국을 영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장쩌민 주석과 같은 시기에 인접국의 국가 원수로 재임하였습니다. 장 주석은 특히 김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 큰 호감과 존경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책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장 주석은 1990년대 후반 일본 와세다 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학생들의 빗발치는 질문에 대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장면을 노출하여, 현장에 있던 이들과 TV 생중계로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시청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련하고 유능한 테크노크라트였지만, 세련되고 국제 감각 넘치는 지도자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지 않았느냐는 게 제 생각인데요. 김 대통령은 이분과 함께한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다 실수한 그에게 "한 옥타브만 낮춰서 부르시면 어떤가"라고 제의하여, 정말 자신의 지시대로 음을 낮춰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다시 살리고선 김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는 장 주석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김 대통령은, 자신도 노래 한 소절을 약간 매끄럽지 못한 솜씨로 부르고는, "노래 실력은 내가 장 주석에 못 미치는 것 같다"는 멘트로 끝까지 장 주석을 추어주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장 주석 같은 대국의 지도자보다 몇 수는 위였다는 느낌입니다.

정권 후기로 갈수록 김대중 정부에선 시련도 많이 겪게 되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 조지 W 부시가 취임하고 미국 외교 정첵이 보수화, 강경 드라이브 선회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외부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국무장관 콜린 파월을 눈짓으로, 대담장(정상 회담 장소)에서 급히 나가라는 의사를 전달하고, 파월이 이에 따랐다는 일화를 소개하는데요, 파월은 당시 정부(즉 부시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 무엇보다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성향이 달랐고, 몇 년 후 급작스러운 사임으로 큰 뉴스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에피소드는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외국 책에서도 잘 다루지 않았던 팩트인데, 외교사에 관심 많은 분들은 꼭 한번 챙겨 읽어 볼 만한 부분입니다. 볼륨이 두껍지만 폰트가 크기 때문에 완독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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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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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형사의 아이>라서 우리말로 그렇게 옮겼을 뿐일까 생각했는데, 원제도 똑같이 <刑事の子>더군요. 미미 여사의 초기작이라고 하는데, 현직 경찰을 존경스러운 아버지로 두고, 어설프게나마 탐정 흉내를 내 가며 처음에는 유희의 일환으로 시작하다.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사태의 진상 한복판으로 말려들어가는 진행이 흥미롭습니다. 말 그대로 "10대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주도적으로 추리를 하는 어린 주인공과, 그 옆에서 보조를 맞추고 도움도 주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 아둔한 소리도 늘어놓곤 하는 사이드킥 노릇의 친구도 한 명 나옵니다. 마치 코난과, 소년 탐정단의 관계 같습니다.

 

경찰뿐 아니라 검사, 판사라고 해도, 승진보다 현장에서의 사건 해결이라는 본분에 더 충실한 유형은, 문예의 캐릭터들 중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드물지만은 않게 발견됩니다. 야기사와 미치오(八木擇道雄) 씨가 바로 그런 타입으로서, 처음에 독자는 "이 나이에 아직 경감에게 존대를 해야 하는 처지인가." 같은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주인공의 친구인 신고가 독자들에게 "진정 존경스러운 경찰상"이라며 부정확한 선입견을 바로잡아 줍니다. 그리고 주인공 야기사와 준은, 지역에서 손꼽는 부호의 자제인 저 신고의 친구로서, 이 야기사와 경관이 홀로 키우는 아들인,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소년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이 그토록 사랑받으며 장수하는 비결은, 육체적으로 미성숙하고 완력이 부족해도, 빼어난 지력(과 정의감)만으로 흉악한 범죄를 해결하는 그 과정이 통쾌하며, 또한 이처럼 육체적으로 허약한 인물이 맹활약을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설정이, 재기와 지성을 겨루는 가상의 장(場)인 미스테리 장르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고작 중1인 야기사와 준에게 독자인 우리가 흔쾌히 신뢰를 보낼 수 있을지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침착한 품성,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사건의 실타래를 냉연한 눈으로 볼 줄 아는 그 지혜를, 이 소설 도입부의 여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문예에서(장르 불문) 자주 등장하는 유형이, 주위와 불화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고집스러운 예술가, 그 중에서도 화가입니다. 주변으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은 lonely wolf 타입이, 흉악한 범죄가 터졌을 때 제일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처음에 이 수상쩍은 화가, 재능은 탁월하나 동료와 평단으로부터 조금도 인정 받지 못하는 예술가에 대해, 어린 주인공이 대뜸 도서관부터 찾는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도서관이란, 모든 지혜 있는 영혼이, 탐색과 발견을 위해 제일 먼저(first), 그리고 제일 우선적으로(primarily) 의지하는 곳입니다. 준은 <올 더 프레지던트 멘>이라는 헐리웃 고전 한 장면을 원용하는데, 비단 그 영화뿐 아니라 탐정, 형사가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에서 사건 해결을 위한 첫 발을 떼는 장면은 보편적 설렘과 감동을 주는 단골 장치입니다.

 

주인공이 어린 소년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공권력 집행자인 부친에 기대어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다름 아닌 엘러리 퀸 시리즈에서 처음 제시되었죠. 부친 퀸 경감도, 관록이나 공헌에 비해선 고위직이 아닙니다. 아마츄어의 눈과 손길로, 사회의 가장 병든 단면을 직시하고 치유하는 설정은, 언제 어느 작품에서 접해도 매력적입니다. 이 미미 여사의 초기작은, 퀸 시리즈의 특징인 트릭의 정교함, <에밀 탐정단> 등의 고전에서 볼 수 있는 풋풋한 아마츄어들의 서툴러도 힘찬 발길, 도전적이고 사악한 범죄자와의 두뇌 싸움 등이 잘 어울어져, 낯익은 듯 편안하면서도 흔하게 진부하지 않은, 매력적인 장편을 잘 꾸려내고 있습니다. 미미 여사의 팬, 그리고 일본 추리 장르의 애호가라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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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브라이드
윌리엄 골드먼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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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으신 분들, 참 재밌었죠? 그런데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예전 영화는 더 재미있습니다. 보통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라고들 합니다. 이런 마구잡이식 일반 법칙은 듣기에만 멋있게 들릴 뿐 안 들어맞는 게 더 많으므로 일단 신뢰는 보내지 않습니다만, 저 말만큼은 맞을 때가 더 빈번합니다. 대체로는 소설을 먼저 보고 다음에 영화를 보는 게 안전합니다.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재미 정도는 (거의 언제나) 소설이 더 넉넉히 뽑아내고 있으니, 설사 두 매체 중 하나를 희생한다 해도, 고른 다른 하나(즉 활자매체)에서 우리가 건지는 게 더 많기 때문입니다. "본질적 장르우월성" 따위의 이유에서가 아닙니다(그런 게 어디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소설과,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날린(이제는 언제 그 부음이 들려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고령이지만), 헐리웃에서 첫손꼽히는 거물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그는 스티븐 킹의 여러 소설을 영화제작용으로 각색했고, 심지어 워터게이트 스캔들 폭로의 주역 두 기자의 논픽션도 손을 보아 훌륭한 극영화의 토대를 마련했을 만큼 빼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각색만 잘한 게 아니라 그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오리지널 각본을 단독 집필했고(이 소설 p434에도 프랭클린의 이중초점[바이포컬] 어쩌구 하면서 암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성취로 서른 여덟의 나이에 영예롭게 오스카 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가 창작한 소설이니, 그저 스토리라인만 충실히 따라가도 대단히 흥겨운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겠고,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소설이라 어찌 보면 스크린으로 옮겨진 모습까지를 다 봐야 작가의 의도가 완성된 꼴로 드러난다 하겠습니다.

 

소설 처음을 펴 보면 한국어판 편집측에서 "서문을 뛰어 넘고 91페이지부터 봐도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입장에서 봐도, 그럼 서문이 90쪽이나 차지한다는 말이구나 같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영미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번역된 말로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힘든 독자라면, 뭔가 재밌기는 한데 종잡을 수 없는 수다가 이어지는 서문만 보고 지레 실망, 책을 놓아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였을 것입니다(전 처음에 "뭐하러 이런 친절까지?"하고 의아해했었죠). 긴 서문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대본소용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황당무계하고 정신 없는 사랑, 모험, 좌절, 아슬아슬 트위스팅이 잔뜩 이어집니다. "반전"이다 뭐다 하면 현대의 트렌드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구성상의 짖궂은 비틂은 아주 예전, 대중들을 겨냥한 싸구려 상업물에서 필수 요소로 장착하던 본체적 부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확실히 B급 티가 줄줄 납니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B급은 B급입니다. 이 영화에서 잘생긴(두건으로 가렸을 때가 더 잘생겼습니다) 남주(즉! 웨슬리) 역을 맡은 캐리 엘위스는 15년 후 <쏘우>에서 화장실에 발목이 묶인 채 다른 한 남자와 죽음만 기다리던 시든 중년의 얼굴을 한 닥터 바로 그 사람이죠(세월의 힘이란 버터컵도 추레한 아줌마로 만드는 법이니...). 그러나 이 소설은, 물론 영화 못지 않게 재미있긴 하지만, 싸잡아 B급이라 쉬이 단정하기엔 많은 망설임이 앞섭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고급품이 아님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미리 선수를 치듯, 작가는 곳곳에서 현란하고 정신 없는 유머를 구사합니다. 책 p239에 보면 "한국의 주지쓰 챔피언, 인도의 가라테 챔피언.." 같은 게 "실제로는 실력 없는 자들과 (거인 페직이) 겨루었다는 걸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역자가 각주를 달고 있으나, 아무리 풍자적 희극이라곤 해도 스토리 안에서 페직이 천하무적의 괴력을 지녔고 격투 기술이 빼어난 건 사실입니다(여기서 작가가 그런 걸로 웃기려 들지는 않습니다). 이건 그냥 표현상의 위트일 뿐이죠. 페직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으나, 그가 제때 그 재능을 발휘 못하는 장면을 보고선 우리 독자들이 웃어 줘도 되겠네요.

 

이야기는 정말 만화처럼 재미있습니다. 이니고, 패직, 시칠리아의 꼽추 등이 나올 땐 피카레스크 구성처럼 샛길로 빠져 그들의 지난 내력도 느긋하게 들려 줍니다. 어려서 비열하고 잔인한 귀족에게 절세의 도검 장인(匠人)이었던 아버지를 살해당하고 열 살 나이의 자신은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얼굴에 입은 이니고. 아 진짜 이런 사연만으로도 그는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누가 천재 아니랄까봐(이들은 어이없이 너그럽다는 게 공통점이죠) 괜히 신사도를 발휘하여, 괴력과 집념을 지닌 듯 보이는 검은 두건을 살려 준 것만도 가상한데, 하필 이 긴박한 순간에 자신의 검술을 능가하는 지구 유일의 고수가 바로 그 사내였을 줄이야! 소설은 엉터리 검술 용어를 잔뜩 늘어놓고 있지만, 묘사가 워낙 생생하고 촘촘해서 눈 앞에 영화 한 편이 재생되는 듯 흥미롭습니다.

 

아무리 절절한 사연과 한을 가지며 성장했고, 또 신이 단 한 사람에게만 부여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해도, 외나무다리(아니, "광기의 절벽") 끝에서 만난 적수가 자신보다 더 강한 동기를 지녔고,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굳센 자였다니,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니고는 그저 복수와 설욕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이지만(물론 이런 그의 동기도 장난 아닌 진정성을 가졌죠. 이니고는 나중에 원수의 비겁한- 이자는 귀족인데도 모럴이라는 게 전무합니다- 흉계에 빠져 과다출혈로 다 죽어가면서도, 죽은 부친과 스코틀랜드의 그랜드마스터가 영적으로 독려하는 바에 따라 결국 ....할 정도로 독한 사내입니다), XXX는 사랑, 사랑에 의해 숨쉬고 생각하고 걸음을 떼는 영혼입니다. 불공대천의 원수를 죽이고 말겠다는 그 집념도, 여인을 향한 사랑보다 순도가 강할 수는 없다는 게 은근 진지한 작가의 암시이겠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결국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니고 역시 XXX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니고는 검술의 재능(다시 말하지만 신이 지상 단 한 사람만에게 부여한 재능입니다)만 지녔지만, XXX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배우겠다는 의지, 즉 "노력하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이니고가 결투 중 넘어진 건 기술과 체력도 딸렸지만, 그보다는 "세상에  나보다 칼을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었다니!" 같은 당혹감이 더 컸을 겁니다. 게다가 XXX는, 사랑이라는 동인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 아닙니까. 오, LOVE CONQUERS EVERYTHING! 사람이란 죽을 때까지 배우고, 그래서 바뀌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려는 고집은, 정체성(正體性)의 보존이 아닌, 정체(停滯)와 퇴행을 낳을 뿐입니다. XXX는 세상을 주유하며 검술 뿐 아니라, 처세와 학식,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까지, 모든 요령과 기술을 최고의 학습자가 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칠해의 지배자가 된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정신 없이 코믹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끊임 없이, "넌 아마 내가 이럴 줄 알았겠지만, 난 너의 그런 생각을 읽고 이런 대비를 했었다!" 같은, 가위바위보의 초절정 고수 같은 유치한 매너를 끝까지 잃지 않고 재롱을 (독자 앞에서) 피웁니다. "두 병 중 어느 것에 독약이..." 같은 트릭은 아주 역사가 오래되었죠(BBC <셜록> 첫 에피소드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셜록은 바보인지 그 농간에 넘어가 진짜 고르고 알약을 삼키려 듭니다). "천재만이 바른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뻥입니다. 확률의 구조적 교착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천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천재라면 풀 수 있다."를 계속 되뇐다? 이건 이 게임 전체가 사기라고 미리 (공정하게) 가르쳐 주는 거죠. 그런데도 시칠리아의 꼽추는 뭘 해보겠다고 답을 고른 후, 상대에게 속임수까지 부리다 죽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전혀 아니었나 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들만 봐도 해학적 느낌이 가득합니다. 처음부터 웃기려고 작정하고 쓴 소설이라서 그런데, 해적왕 로버츠만 해도 아이들 만화에서 해적의 단골 대사로 쓰이는 Arrrrrr.. 를 두문자로 가진 가장 흔한 "로버츠"고.. 여주 이름 버터컵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죠. "웨슬리"도,... 음, 혹시 Wesley가 아닐지 행여 착각하지 마십시오. Westley입니다, 저는 이 책 원서를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만, 영화를 보면 또렷이 t가 들리게 발음되는 "웨스틀리"라서, 이걸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t가 종종 blur된다고는 하나, 이 경우는 예외지요. 진짜 서문 건너 뛰고 소설만을 다 읽은 분들은, 이제 서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사실 서문은 서문이 아니라, 소설의 액자 연장입니다. 모겐스턴은 실존하는 작가가 아니고, 이 소설 역시 단축화 이전 원본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모겐스턴 부인의 원형은 골드먼 자신의 (이혼한) 부인인 헬렌일 뿐입니다. 이 한국어판은 원작 소설의 (무려) "30주년판"입니다. 이것 관련 번잡한 설정은 모조리 작가 골드먼의 페이크입니다. 어떤 작품이 자신의 30주년기념판을 가질 수 있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왜 이 작가가 이런 특이한 얼개를 짜고 있는지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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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사랑을 그리다
유광수 지음 / 한언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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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절 때 저희 어머니께서 이 책 표지를 보시더니 좀 오래 시선을 두시더군요. 이런 경우는 일단 "표지가 이뻐서" 처음 관심을 끈다는 뜻이고, 그 다음에 의레 기대했던 반응("예쁘네."라는 명시적 표현)은 안 나왔다는 점에서 뭔가 이 표지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저도 책을 처음 받았을때 그 매끄럽게 코팅된 겉면과 잘 조화를 이루는 표지 디자인이 한눈에 확 들어왔었는데, 그림을 찬찬히 보면 마냥 예쁘기만 한 선과 색이 아닙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색이야 예쁘지만, 이질감을 자아내는 요소는 그저 "선"이죠). 이 여인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고, 전통 미인상에 비해 목이 너무 길고 얼굴형이 갸름하며, 그 복식은 차라리 대륙과 열도의 퓨전형이라 할 만합니다. 조선에서 나고 자랐으며 살아 온 처지에 웬걸 다 커서 농익은 지금은 이 조선을 이탈하고 싶다는 결기까지 살짝 비치는 모습이랄까요.

다 읽고 난 느낌은, 텍스트와 일러스트가 조화를 멋지게 이뤘다는 생각입니다. 단아한 외관(그러나 속내는 더 들여다 봐야 합니다만)에 혹해서 책을 접어든 독자들은, 막상 안을 펼쳐 보면, 격의와 삼감 없는 말투로 툭툭 던지는, MT 자리에서 세상 물정에 은근 닳은 선배가 담배 한 대 꼬나 물고 "니들 그거 아냐?"로 시작하는, 그러나 배려와 진정은 듬뿍 담아 들려 주는 "썰"을 접하는 느낌에 좀 당혹할 수 있습니다. "고전에 대한 해설서인데 왜...?" 그러나 다루는 주제가 옛것이라 해서, 다루는 스타일과 다룬 후의 결론까지 옛투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 유광수 교수님은 서문에서 "우리는 고전이 천편일률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막상 고전들을 읽어 보면, 각자 다 다른 매력과 개성을 뿜고 있으며, 전달하려는 교훈-그런 게 있다면- 도 각양각색이다. 이런데도 천편일률이란 예단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개별 작품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천편일률적인 교훈, 의의를 억지로 도출할 수밖에 없었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는 고전의 왜곡으로 이어져 왔다."는 취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장화 홍련 설화, 지귀 설화, 운영전, 이생규장전 등을 보면, 그게 충효인의예지신 같은 유교적 덕목을 일률적으로 이식하려는 의도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설화나 문학의 창작 의도가 그것이면, 교훈 하나당 이야기 하나씩만 대표로 존재하면 됩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표현욕의 산물이라, 사람의 표현욕과 내용이 천차만별이듯 그 결과물 역시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천편일률적 문학"이란 그래서 애초에 형용 모순인지도 모릅



이 책은 과연, "전혀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않았던" 고전의 본 모습을, 아니면 최소한 그동안 우리가 주시하지 않았던 그 이면, 속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도록 도와 주는 책입니다. 워낙 "이 이야기들은 천편일률적이니 그리 알도록" 같은 세뇌를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으로 듣고 자라온 우리들이라서, 한국 설화만 들었다 하면 세세한 디테일은 전부 생략하고, 엄마 무릎맡에서 들어온 뼈대, 그리고 이후 학교에서 주입받아온 "레디메이드" 교훈만 부호화하여 머리 속에 넣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간혹 "잠깐, 뭔가 이 대목은 좀 이상한걸?" 같은 의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도, 그런 표준적이지 못한 반응은 꾹꾹 억눌러 왔죠. 이 책은 그런 우리들의 지난 의문을, 기억 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몽실몽실 피워가며, "너의 궁금증은 다 이유있고 건설적이었다."는 편안한 진실을 확인시켜 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실로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유 교수님이 이야기 한 건 당 자신의 소회를 하나하나 참 자세히 풀어주시는 편인데, 그렇게 두껍지만도 않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여전히 "이야기가 참 많았다"고 느껴지는 건, 우리가 몰랐던 고전이 이렇게도 많았던가 하는 새삼스런 각성 때문인 듯합니다. 내용은 갈등과 폐습의 통쾌한 해소와 구제로 끝나는 게 있는가 하면, 그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한심한 사연도 있습니다. 굳이 세어 보자면, "사랑"을 테마로 한 이 책 중 이야기 자체로 개운하고 맑은 전개, 귀결을 보이는 이야기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답답한 사연에, 오늘날의 관점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애정관과 인습이 배경과 테마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유 교수님은 배경에서는 전근대 요소를 속속 짚어내어 이를 통렬히 비판하고, 다만 극복해야 할 낡은 남녀관이란 배경과, 이야기가 담고 있는 본체적 교훈은 분명히 분간해야 한다는 점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 고전들은 천편일률적인 남존여비 관념이나 유교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어이없는 주인공들의 행태(시대의 인습이 개개인의 의식을 짓눌러 왜곡이 일어난 결과)를 비판함으로써, 남녀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랑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가치와 목적을 되레 독자에게 선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이야기에서는, "사랑은 이처럼이나 감미로운 것이니 당장 그 시원찮은 윤리란 가식을 벗어 던져버려!"를 (당연히)권하고, 그렇지 않고 아마 당대인이 읽어도 마음이 아득히 어두워지는, 주로 못되고 타락한 남자에게 농락당한 여성이 파멸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우리(고대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인성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풍자와 역설을 통해 깨우쳐 주고 있다는 거죠.

이덕무 의 책에서 뽑은 <은애전>은, 마치 조선판 테스를 연상시키는 비운의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여기서 악역은 노파입니다만, 이런 괴물 같은 인간형을 빚어낸 건 숨막힐 듯 여성을 억압한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였습니다. 억압의 위계질서는 여성을 여성의 적으로 만들고, 여성성을 거의 상실한 노파에게 그 최상위 서열로부터의 착취와 굴종을 가하는 대리역을 맡기는 셈인데, 전근대적 체제에서 홀로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닌 이들(어쩔 수 없이 남성이라야 합니다)이 선의, 이성, 지혜로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독자의 입장에서 관건입니다.



여성의 본성에 대해 육욕과 천한 본능으로 가득차 있다고 본 건, 심지어 본능적으로 신뢰와 애정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부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저자의 지적은 으레 "바람이 나 종적을 감추었겠거니"라고 체념하며 가려진 무서운 진상에 대해선 꿈조차 꾸지 못했던 그 밀양 부사(저는 현감으로 알고 있었는데, 밀양은 조선 시대 대부분을 "밀양부"인 채로 지냈더군요- 너무 고관이라 일개 통인에 대한 의심까지는 채 갖지 못했나 봅니다)에 대해서도, 저자는 시원시원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당연 아버지에게 먼저 호소하는 게 딸의 본능인데, 왜 아랑은 부임해 오는 지방관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소청을 넣으면서도, 그 부친에게의 직소만은 시도하지 않을 걸까?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저자는 나름대로 타당한 해석 하나를 꺼내고 있습니다만, 기왕 봉인의 문이 열린 이상 우리 독자들도 자기식의 대답 하나 정도는 이제 구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편일률이 아닌 걸로 드러난 이상, 설화에 대한 해석에 정답이 하나뿐일 순 없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주제가 남녀간 애정이라고 하지만, 그를 담은 설화를 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선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는 별개로 필수적입니다. 위인에 대한 존경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우리는 "무려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을 대단한 인재, 일등 신랑감, 엄친아로 보지만, 당나라 여인들의 입장에선 그 정도는 아니고 "그저 괜찮은 남자" 정도였으리라고, 저자는 아주 쿨한, 그리고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가 아니면. 감히(감히!),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지어진 <쌍녀분>에 대해, "마스터베이션 문학"이라는 대담하고 발칙한 규정은 시도되기 어려웠을 텝니다. 사실 이런 마스터베이션적 의도는, <구운몽> 등 정치와 문화의 주변부에서 생기를 잃어가고 만성적 좌절에 시달렸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거의 공통된 기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스터베이션 모티브는 그래서 그저 피식하고 웃어넘길 게 아닙니다. 남성이 제 기능을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던 반도 조공국의 숙명적 애환을 투영하고 있으며, 이 팩터는 다시 연쇄적으로 여성 억압으로 넘어가는 게 필연이니 말입니다.

며칠 전 간통죄가 폐지되어 아직도 사회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책 역시 애정사 중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중요 이슈일 "간통"에 대해 큰 비중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루어지는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은 1) 간통이라기보다는(사랑이긴커녕, 간통 축에도 끼지 못할) 추잡한 매춘에 가깝고, 2) 반대로 그저 간통에 그치지 않고, 애정의 정당성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대단히 능동적으로 항거하는 여인의 모습을 다룬 것도 있다는 점입니다(대조적으로, 상대 남성은 말할 수 없이 치사하고 비루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 저는, 그토록 현명한 여성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상대 남성의 추악하고 비정한 면모를 꿰뚫어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는 제 생각에, 자신의 출신 컴플렉스 때문에 어떤 프레임에 갇혀 버려, 마치 로렌츠 효과처럼 초기 각인으로 이상적 남성 하나를 작위적으로 만들고, 그 남성의 객관적 실체에 무관하게 여성 본인의 희구를 다 쏟아 부은 데서 파생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이 정도라면, 마치 종교적 순교와 크게 다를 바도 없습니다. 여튼 그녀로서는 목숨을 잃어도 후회가 남지 않았겠으나, 현대를 사는 여성이라면 보다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저항은 좋으나, 그 전단계의 인식과 판단은 그리 권장할 만한 게 못되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십시오, 저 뾰로퉁하게 내민 입은 여인 자신의 불만을 표시함과 더불어, 남과 여의 통성에 대한 불신을 상징한다고 이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남은 옵션은, 사랑 말고는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존재가 사멸하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고 또 사랑할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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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카이
키릴 본피글리올리 지음, 성경준.김동섭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정형적이고 반듯한 세계관을 가진 모범생과는 달리, 위선적이고 타락한 사회에 대해 반항과 배신을 일삼되,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적수들을 희롱하고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이며, 독자와 팬들을 열광시킵니다. 가상의 세계라곤 하나 일단 그에 정신의 일부를 몰입시킨 청중이 다시 현실로 복귀헸을 때, 통상의 가치관과 생활 감각에 혼선을 빚어서는 안 되기에, 픽션의 주인공은 일단 보편적인 독자가 쉽게, 기꺼이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유형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서 일탈과 규범 파괴를 사소하게나마 저지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에,  순진하고 충직하기만 한 성격으로는 전폭적인 공감을 내내 끌어낼 수 없습니다. 반영웅은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현실 또 다른 모습의 반영이요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아이돌입니다.

 

앵글로색슨 문학에서 정석적인 영웅 못지 않게 인기 있는 타입의 주인공은 바로 "반영웅(反英雄), 안티히어로"입니다. 프랑스어권 문예도 뤼팽이나 비독(실존인물이기도 합니다) 같은 예가 있지만, 이들은 포지션이 범죄자일 뿐 가치관이나 외모 면에서 표준적,  평면적 모범생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거나(뤼팽), 체제에 순응, 편입되는 모습을 보이며 반항아 고유의 매력을 순일하게 보존하지 못합니다. 반면 K. 본피그릴리오리가 창조한 이 모데카이는, 뤼팽과는 정반대로 1) 반기사도적 비열한 스타일에 2) 출생성분은 다소 미심쩍긴 하나 일단 고귀하고(그러나 내력이 뭔가 미심쩍은 것이어서, 예컨대 귀족다운 행동거지를 능숙히 보이지 못해 크램프의 장모에게 바로 대접을 낮추어 받기도 하는 장면이 이 소설에도 나오죠) 3) 자신의 말에 따르면 화려한 과거의 흔적이 살짝 연상될 정도로만 잘생긴 얼굴에, 평균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 뚱뚱한 체형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특히 대중이 열광을 보내려면 외모만큼은 훤칠한 스타일이어야 하는데, 이 모데카이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다만 과거 군 복무 경력의 산물인 "의외로 빼어난 격투술"이 있어서, 방심하던 상대를 혼내주는 모습을 가끔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의 행동 원칙은 귀족 출신 답지 않게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오히려 밑바닥 출신들이 어렵사리 사회에 적응하며 자신의 몸에 배게 한, 구질구질한 생존 기법 같은 게 대부분입니다. 자기 출신을 배반하는 격룰과 스타일(외모 포함)이라고 할까요. 대신 시종(이 번역본에서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조크 스트랩이 홀딱 반할 만한 재치, 지능, 순발력, 그리고 쿨한(그저 쿨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세계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랫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자신에게 반하게 하고 (그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대신 총알도 맞을 만한" 각오와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닙니다. 조크 스트랩은 머리가 둔하고 오로지 힘만 쓰는 타입이 아니라(진정 괴력의 소유자이긴 하죠), 위기에 닥쳐 비상한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세상사 어두운 구석을 훤히 꿰뚫는 나름 달인형의 인간입니다. 이런 그가, 완력 면에서 상대도 안 되는 모데카이에게 그처럼 충성을 바치는 건, 자신의 상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판세를 정확히 읽고, 최종적 위력을 지니는 전략을 짜내는 비상한 전략가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층민 정서를 격하게 감동시키는 "융통성(좋게 말해서)"이 있어, "저 양반은 귀하게 자란 분이 나보다 더한 사람일세!"같은 탄식 반 경탄 반 고백이 나오게 하는 거죠.

 

엄격하고 고상한 인격과 영혼을 가졌던 아버지에게 지리하게 훈육 받은 아들이 흔히 겪는 성장기의 갈등, 그리고 배태한 반감 같은 것이 이런 타입의 "성공적 악한"을 낳았다고도 보입니다. 모데카이는 가만히 보면 쉴새없이,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유쾌한 영혼이긴 하나, 사실 내면으로부터 행복한 타입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상속자 크램프 3세가 거침 없이 제 부친을 폄하하는 언사를 내뱉을 때, 그는 그 질나쁜 젊은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일부 보기도 하지만, "난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다"며 이내 선을 긋습니다(그리고선 바로 이자를 제압하는데, 그 날카로운 두뇌회전에 조크는 또다시 감탄하죠). 그는 수시로 자신이 악당임을 자인하며 소위 인지부조화가 초래하는 정신의 타락과 쇠약을 멀리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입니다("악당도 행동 원칙이 있어야 한다." 등등).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은근 자유롭게, 그리고 여러 대목에서 프로이트적 패러다임을 갖고 자신과 타인을 분석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모데카이의 직업인 미술품 딜러라는 신분부터가, 프로이트의 고향이기도 한 비엔나적 아우라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치명적 판단 실수와 탐욕 때문에, 정신 없이 위험한 모험에 던져진다는 점에서 모데카이- 조크 듀오는 오백 년 전 스페인의 돈 키호테- 산초 판자 커플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얄미울 만큼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고,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점이 차이이긴 합니다만... 이 소설 p279에 잠시 언급되기도 하는 P G 우드하우스의 작풍, 캐릭터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종종 듣는 본피글리올리(이탈리아계 영국인이므로 g를 빼고  "본필리올리"라고 읽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는, 이 소설에서 독자들의 혼을 빼놓는 위트와 풍자, 블랙 유머를 통해, 모데카이라는 캐릭터를 영상화 없이도 완벽하게 독자의 눈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데카이 역에는 잭 니콜슨(본피글리올리가 활동하던 시절의 그보다 좀 더 젊은 모습- 실제로 동안이라 그렇지 조니 뎁도 지금 적은 나이는 아닙니다)이나, 약간 과거로 돌아간 데이빗 서칫 같은 배우가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그리 뚱뚱하지는 않고 텍스트 속의 캐릭터에 비해 과분하게 매력적인 조니 뎁이 이번 영화에 캐스팅되었습니다. 소설의 풍미와 개성을 다 살릴 순 없지만, 플롯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미스테리, 사기극, 그리고 첩보물이므로, 영화화가 오히려 늦은 감마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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