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움직이는 100대 기업 - 삼성증권과 중국 차이나윈도우가 뽑은 중국.홍콩 대표 최강 주식 100
삼성증권.차이나윈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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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그랬었고, 한창 고도의 성장 추세를 보이는 개발도상국에서 단연 주목해야 할 곳은 그 나라의 주식시장입니다. 왜 최고조의 실물 경제 성장보다 주식 호황이 한 발짝 정도 늦게 출현하는가? 개발도상국에서 제조업, 여타의 산업 자체야 모방과 학습을 통해 발전시킬 수는 있어도, 증권시장의 발달 같은 고도의 시스템은 쉽사리 자국 토양에 안착시키기 힘들어서입니다. . 1980년 딱 한 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이래 줄곧 쾌속질주를 해 온 한국경제인데도, 놀랍게도 외국인 참여를 자유롭게 허용한 것조차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일 뿐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대중이 소위 "개미"의 모습으로 증시에 대거 참여한 건 1987년경(민주화 조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중산층, 아니 중상층 가문에서는, 아이들에게 돈 좀 쥐어 주고 주식 실전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감을 잡혀 놓지 않으면 어른 되어서 실력이 안 는다는 이유에서인데, 제가 지켜 봐 온 결과 망하는 사람은 매번 망하는 게 다 이것과 관련이 있더군요.

 



여튼 그래서 중국에서 적극적으로 외자 유치를, 이번에는 증시 제도 선진화를 통해 발벗고 나서는 모습은, 사실 늦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한국의 대중들이, 다소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 보니 이런 대세가 늦게 확산된 감마저 있습니다. 외국 증시에의 투자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과연 기업공개와 실사가 투명하고 신뢰성 있게 이뤄지고 있느냐 하는 제도적 문제입니다. 이 책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습니다. 말이 없다는 건, "이제 신뢰성 문제를 거론할 타이밍은 지나갔다. G2의 한 멤버인 중국이 아니냐" 같은 전제를 벌써 깔고 있는 것입니다.

1994년의 런던 금융시장 개혁(소위 "빅뱅")처럼, 이번 "후강퉁"도, 최근 침체에 빠진(우리는 중국 증시에 대해 워낙 관심도 없고 소식이 늦다 보니, 벌써 최활황을 지나고 지금 지수가 많이 빠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게 보통입니다) 중국 증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당국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겠습니다. "후강퉁"이란, 상하이의 별칭인 沪에서 앞 글자를, 그리고 "홍콩(香港)"의 뒷글자를 하나씩 따다 약칭, 혹은 신조어를 만든 것입니다. 沪(호)라는 글자는 예전부터 지명으로 쓰이던 글자인데, 沪라고만 쓰면 모르는 분들도 원자로 滬(호)라고 쓰면 눈에 익어하더군요.



사실, 이처럼 중국 증시를 해외에 소개하는 붐이 이는 것도, 최근 거품이 빠지는 듯(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보이는 증시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는 필사적 몸부림 중 하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국도 1992년 내수 침체와 중기(中企) 연쇄 부도 사태, 전반적 성장 동력 상실, 이로 인한 주가 대폭락 때문에 고생깨나 하다, 인위적 부양 정책과 반도체 특수(삼전이 원탑으로 올라서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라고 봐야 하는데, 진짜 원탑으로 자리를 굳힌 건 그로부터 10년 뒤나 되어서입니다. 아이러니라면 이제는 삼전의 전망이 심상찮은 모습으로 장기 하강 추세라는 것), 이동전화 시장 신규 창설이라는 거대한 출구로 숨통이 트이는가 했습니다만, 결국 외환위기로 치명타를 맞고 반 타의에 의해 시장을 열었죠. 중국이 이 분야에서 고전하는 모습도 지난 우리의 행적과 따지고보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 아니라도, 우리 독자들이 신뢰를 일단 보낼 수 있는 대목은, 이 책 필진의 면면입니다. 결국 이 정도 전문가들로 짜여진 진용의 말도 신뢰를 못 한다면, TV나 경제지에 나오는 어떤 애널리스트들의 진단도 못 믿을 것들입니다. 요즘 이런 책들의 편제 중 공통 요소로, 인포그래픽 포맷의 적극 활용을 들 수 있는데, 이 책 역시 다양한 수치와 자료를, 컬러풀하고 가독성 좋은 형식으로 최대한 독자 친화적 소통을 꾀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데다 보기까지 편한 편집이요 컨텐츠를 담은 책입니다.

예전에 나온 책들도, 비슷한 전망과 권고를 담은 것들이 제법 있었는데요, 이 책은 그 책들보다  1) 보기가 편하고, 2) 보다 다양한 종목을 망라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2)는 신뢰성 면에서도 중요한 덕목인데요. 애널리스트가 할 일은 고객에 선택의 POOL을 제시하고 권유를 하는 쪽이지, "사이비 족집게" 흉내를 내다 투자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입니다. 2)는 이 책이, 꼭 투자 포트폴리오 구상이 목적이 아니라도, 장기적으로 중국 거시 경제 전반이 어떤 양상으로 굴러갈 것인지에 대한 탐색 목적으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일단 예전부터 자주 화제가 되던 게, 중국 대륙 동서남북을 가로지를 고속철 사업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가 중국에 절절 매었던 것도, 이 고속철 사업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산을 놓고 텃밭 다툼을 벌이는 처지라 중국과 근본적 이해충돌을 빚는데도 사정이 이러했습니다. 확실히, 고속철이란 중국처럼 거대 영토를 단일 주권 하에 두고, 많은 유동인구를 보유하고, 그 인구가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은 나라, 더군다나 아직 항공교통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고, 국민 평균 소득이 국내선이라도 자유롭게 이용할 만큼 높지 않은 나라에서 최적으로 채택될 만한 수단입니다. 한국의 경우, 너무 많은 역을 통과하기에 이미 고속철 아닌 저속철로 전락했고, 비싼 로열티를 주고 사 온 기술을 자체 발전시킨 바도 별반 없기에, 이런 중국측의 건실한 약진을 부러운 시선으로 손 빨고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다들 알겠지만, 법인 형태로는 남차와 북차 두 군데가 여태 있었다가,  최근에 들어 합병이 이뤄졌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역시 다 아는 사실이지만, 흔히 "인수 합병"이라고 해도 어느 한쪽이 더 큰 비중으로 대세를 번갈아가며 타는 게 보통인데, 중국의 경우 "(외국 우량 기업의) 인수"와, 이처럼 "(자국 내 경쟁 기업의) 합병"이 동시다발적으로, 그것도 건실한 방향으로 이뤄지는 게 놀랍습니다. 이런 (자국내 기업들 간의) 합병이 자주 성사되는 건,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제살깎아먹기"의 회피가 주된 목적이죠. 그건 중국의 사정일 뿐이 아니라, 본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 모순 중 하나입니다. 경쟁보다는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독점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이런 독점을 시스템적으로 확고히 유지할 방안은 단일 법인으로의 합병뿐입니다. 중요한 건, 중국이란 나라가 일당 지배의 사회주의 시스템이다 보니, 이런 모습이 대단히 자연스럽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고속철 사업은 공익 목적을 지녀, 처음부터 국가 주도로 이뤄졌어도 별반 이상할 게 없는 성격이니 말입니다(예를 들면 한국처럼).

이 책에서 자주(정도가 아니라 거의 매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는) 용어로 股分(고분)이 있습니다. 중국어로는 "구펜"이라고 읽는데요. 이게 우리말로 "주식"입니다. 물론 몰라도 읽다보면 저절로 눈치가 채어지고, 내용 이해하는 데에 지장이 되지도 않습니다. p104에 보면 "은하오락집단 유한공사"가 소개되는데, 주의해야 할 건, 이때의 "유한공사"는 한국의 "유한회사"라든가, 최근 도입된 "유한책임회사"와도 다르며, 오히려 "주식회사"와 비슷합니다. 즉, "고분유한공사"와 실전에서 같이 취급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공사=회사"라고 해서, "유한공사=유한회사"가 절대로 아니라는 데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유한회사는 "유한책임공사"라고 중국에서 따로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지분 양도 요건이 엄격하여 증시에 상장을 못합니다(그 예로 "한국피자헛"). 유한공사와 고분유한공사가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으니 이런 책에서 함께 다뤄지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여튼, 이 회사에 대한 이 책의 전망은 대체로 낙관적이지만, 현재 마카오(마카우) 카지노 산업 전반은 시 주석의 최근 반부패 조치와 맞물려 위기라는 진단이 지배적이니, 읽는 분들은 최신 뉴스까지를 다 참고해야만 하겠습니다.

중국에서 새로이 부상하는 업종 중 하나가, 환경보호-쓰레기 소각 관련 분야입니다. 환경 오염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중국에서 이런 산업이 발전한다니 이상하게 들리지만, 환경 오염이 심각하니 이는 반대로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재벌(우리식 용어입니다만) 그룹인 광대(廣大)에서 거느리는 계열사, 그리고 다른 한 회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국도 최근 서울시 쓰레기매립장 부지 문제로 재활용 분류 방침 개정에 큰 물의가 빚어진 일도 있었습니다만, 과연 이 업종이 어떻게 글로벌 선도 양상으로 성장해 나갈지, 어찌 보면 성장의 내실을 측정하는 한 바로미터로 잡아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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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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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의 작품에 붙은 제목 <운수 좋은 날>이 지독한 반어(反語)이듯, 이 소설의 제목 <행복만을 보았다>도, 내용이 담고 있는 그 갑갑하고 암울하며 대단히 충격적으로 치닫는 일련의 심리 흐름, 행동, 사건, 파국을 고려하면 예사롭지 않은 명명상의 부조리입니다. 제목이 주는 착시 땜에 무슨 달달한 이야기나 기대하고 이 책을 펴신 독자-이를테면 저-라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삐질삐질 땀깨나 흘리셨을 것 같습니다.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연 내러티브는 "척 봐서 안 그럴 것 같은 외모인데, 알고 보니 지독한 찌질이"의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적인 반어는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이 제목은 진짜 반어법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작품 속에 흐르는 진짜 스토리를 못 읽었거나, 주인공 안토니오에 대해 지나치게 냉혹한 정서적 거리를 두었거나(이 혐의는 솔직히, 소설 완독이 끝난 지금도 제가 벗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와의 공감을 위해, 혹은 진정을 전달하기 위해 무지하게 애쓴) 작가의 본의 -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대체로) 취하면서도, 정말 독자에게 정확한 소통을 이루기 위해 작가는 애를 씁니다- 를 고의로 왜곡하는 셈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내내 진정 갑갑한 사연과 넋두리가 이어질망정) "행복을 보았고, 혹은 행복만을 보려 애 쓴" "수난 3대"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역사성과는 그닥 큰 관련이 없긴 해도 말입니다.

 

어렸을 때 무난하게 행복한 가정에서 적절한 사랑을 못 받고 컸다는 게, 다 자란 성인에게 이처럼 큰 상처를 남기는 걸까요. 후....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일의 사달은 일단 "자기 감정에 충실하려고만 했던" 화학자인 아버지 -즉 레옹과 조세핀의 할아버지- 에게 있습니다. 그의 처였던 주인공의 친어머니도, 그저 자기 생각만 했다는 점에서 큰 잘못이 있습니다. 이 세대에서 그나마 긍정할 수 있는 인간형은, 주인공의 의붓어머니이자, 친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간호하며 그 최후를 보살핀 콜레트입니다.  나름 의붓자식들에게 잘하려고 했던 그녀를 상당 기간 동안 미숙하게(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부한 주인공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격으로, 잘하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었다는 점에서 이때부터 벌써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아버지의 매력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았는지, 주인공은 (평균적인) 여성들에게는 꽤나 눈길을 끄는 타입이었나 봅니다. 멕시코의 해변에서 그저그런 이들에게, 이미 심신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게다가 나이는 40을 훌쩍 넘긴 주제에) 호감을 그토록 끈 걸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을 줍니다. 다만 주인공은 매력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루저입니다. 그가 루저가 된 까닭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기만 했지, 그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정적 시점에서 그 아버지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처럼 살기가 너무나 싫었던" 그는, "아버지가 살아 온 행보와는 정반대의 선택"만 좇습니다. 그런데 이는 그의 철저한 착각입니다. 아버지가 선택한 정반대만 골라 걷는다는 건, 방향만 반대일 뿐 결국 그 아버지란 사람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 아닙니까? 삐딱선은 극복이 아니라, 되레 집착이고 추종입니다. 나이 삼십을 넘기고도 그 간단한 이치를 못 깨달았으니, 나이 사십에 청소년도 안 치는 대형 사고를 친 게 아닙니까. 누구 탓을 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 친어머니라는 사람도 잘못입니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그 사랑의 산물로 낳은 아들에게, 왜 아버지를 깔보고 미워하게 가르친단 말입니까. 제 인생에서 지다 남은 짐을, 아이에게 지우는 몹쓸 부모나 할 짓입니다. 그렇게 못난 엄마 밑에, 아들이라고 못난 성정과 인격이 옮고 닮고 냄새가 배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기 마련이죠. 이래서 어떤 못난 늙은이의 말처럼(이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담던데, 참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식도 엄마 따라 그 모양이죠), 덜 떨어진 내력이 3대를 가는 겁니다. 당장 자신부터 각성한 후 그 못난 내력, 못난 입버릇에다 꼴에 겉멋만 좇고 허위의식으로 헛말만 일삼고 정작 머리에 든 거 배운 거 없고, 이런 유전적 악형질을 가뜩이나 방황하는 지 자식한테 안 물려 줄 궁리를 해야죠. 입방정 떠는 것 보니 벌써 글러먹은 일이구요.

 

1부는 이처럼 정신이 불안정한 중년 남자가 끝내 대형 사고를 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야기가 그렇게 치달을 줄이야 몰랐습니다. 억지가 가득 섞이고 유아적 불평이 이어지긴 했어도, 배울 만큼 배우고 겉모습도 멀쩡한 사람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1부는 그래서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부(저는 그저 독립된 별개의 단편인데, 내적 연관이 있으므로 형식상 2부라고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2부로 이어지더군요)에서, 이 사람이 정말 자기가 꿈꾸던 바로 그곳에 와 있더군요. 이건 이 양반의 환상인가, 아니면 탈옥이라도 한 것인가(그럴리야 물론 없습니다만- 탈옥을 할 주제가 못 되죠). 하지만 독자는 곧바로, 사태가 어떻게 그간 발전한(혹은 꼬인) 것인지 감을 잡습니다. 또, (더 중요한 건데) 수긍하고 동의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제 죄의 대가를 지독하게 치르고 반 송장이 된 인간을 더 이상 가두어 봐야 뭐하겠습니까. 그게 선진국의 교정 시스템이죠.

 

이 소설이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계속 풀고 있는 형식에 대해, 약간 짜증이 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나"와 "너"가 하도 자주 주객을 교차하니까, 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부에서만 그런 처리가 되어 있고, 대체로 텍스트를 차분히만 따라가도 해결은 되는 문제이며, 더 중요한 건 작가가 일부러 그런 형식을 취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주인공의 주관 안에, 객관적 현실이 "인지 혹은 왜곡"된다는 게 어느 정도 암시되는 거죠. 2부에서 여기자하고 인터뷰할 때는 직접 인용 표시가 분명히 살아납니다. 이때 주인공의 "찌질스러움"이, 여기자의 시선을 통해 아주 잠시 드러납니다. 아주 잠시일 뿐입니다.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는, 철저히 "내재적 접근법"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극악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내부의 타자, 외부의 독자로부터 예상가능한 저주와 비난에 대해서 소설은 철저히 "실드"를 쳐 주고 있습니다. 주제부터가 "극한의 찌질이에게도 한번쯤은 그 자신의 시선에서 전후를 살펴 봐 주자"이니,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게 당연합니다.

 

3부는..... 조세핀의 시선에서 쓰여진 기록입니다. 이게 작가가 칭찬받아 마땅한, 구성상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제 친딸에게 못난 아빠는 온갖 욕과 저주를 다 들어먹습니다. 어떤 부분은 -조세핀 입장에서야 그러고도 남겠다고 우리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어쨌든 자기를 낳아 준 부모한테 그런 막말을 한다는 점에서, 많이 불편합니다.  "암퇘지"라고 극한의 표현을 하는 대목에서는, 이 책을 펴 읽은 걸 잠시 후회했습니다. 누구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그냥 불편하고 더럽다 싶어, 외면하고만 싶은 남들의 사정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정말 불편하게 읽는 분은(이 소설은 애초에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입니다), 기왕 읽은 거 끝까지 읽으십시오. 아마 감정상의 반전을 결말에 가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1부 끝에 알튀세르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데, 제 손으로 제 아내를 살해해서 법정에 선 사람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는 흔적이죠. 알튀세르 이야기까지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사도 지난 1월,  서초동 사는 모 중년 남성-나이까지 비슷하죠?- 이, 이 책의 사건과 똑같은 패턴이라 할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이 주인공보다야 더 엘리트코스를 밟아왔고 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하는 말이나 행적, 범행 동기가 너무도 닮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거의 남은 인생 전부를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겁니다. 여긴 한국이고, 죄인에 대해 그리 너그러운 사법 시스템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사실 판단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왜 어떤 이들은, 좀 진즉에 만나서 서로 불필요한 상처 안 겪고 미리미리 좋은 사랑 하면서 유한한 시간을 채울 수 없는 운명일까요. 이 소설에 나오는 이들도, 인연이 좋아 나쁜 이들은 미리미리 거르거나 한참 후에 원나잇 인연 정도로만 스치고, 좋은 사람들은 일찍일찍 마주쳐 가연을 맺었다면, 인명 희생은커녕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순간으로 제 주변까지 뿌듯하게 만들었을 텝니다. 행복만을 보는 게 그토록 어려운 겁니다. 제발 내 옆지기 소중한 줄 알고, 자신 위해 줄 줄 아는 무난한 부모님 둔 걸 그저 감사하고, 당연한 게 결코 당연하지만은 줄 알고, 모든 일에 고마워하면서 살아갑시다. 그게 "행복만을 보는 길"이지 딴 게 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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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 - 어느 영화 소년의 80년대 중국영화 회고론 아시아 총서 14
류원빙 지음, 홍지영 옮김 / 산지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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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많은 느낌이 교차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책은 그 부제가 <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입니다. 이 문구만 보면 이 시기(즉 1980년대)에 엄청나게 많은, 양질의 중국 영화가 생산되었다는 뜻 같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양산된 중국 영화를, 마음의 눈이 열려 있는, 자격 있는 팬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제 가치를 평가한 시기라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제3국 출신의, 냉정한 태도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관찰자가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이는 저자분의 주관적 인식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1980년대는 중국이, 그 내세울 것 없는 국력과 빈약한 경제력으로, 다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 아래 문호를 개방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내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좋은 것들은 다 체험시켜 주겠다"는 의도로 문화 정책을 펴던 시기 같습니다. 개발도상국의 정책 당국이, 이런 순진하고 선한 방침으로 정책 목표를 구체화하는 사례, 특히 문화 분야에서 이런 발걸음을 떼어나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제가 아는 바로는 아예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그 당시의 중국이 이에 해당하는 유일한 표본이구나."라고 처음 알았습니다. 마치, 가난하지만 자식 교육 하나는 똑바로 시키려는 억척 같은 부모를 보는 감정이랄까요. 공학, 기술 관련 정책은 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문화 분야에서 그런 생각을 고위 정책 결정자가 갖고 유지하기란 정말 힘듭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것처럼, 외환 보유고가 빈약하니 민간(이라는 게 형성되지도 못한 시절이죠)이나 정부나 무슨 돈이 있어야 컨텐츠를 사 올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케케묵은 옛날 작품을 패키지로 사 오는 게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옛 작품들이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고전들이니, 감수성 풍부한 "될성부를 싹"들의 눈에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런 문화의 전범이라 할 명작을 애써 수입해 온 당국도 기특하지만(그저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일당 독재 체제로 여겨 온 선입견과는 너무도 다르더군요), 그런 명작의 우수한 면, 생산적 요소를 알아 보고 열심히 관람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팬들"의 태도도 정말 감탄스럽더군요.

 

한국에서도 소위 "헐리웃 키드"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던 세대, 시대가 있었습니다. 1950~60년대 즈음, 그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도 최신 미국 상업 영화가 불과 몇 년의 시차만 두고 수입되어, 구경거리에 목마른 눈과 귀를 극장으로 잔뜩 끌어대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정책의 계도적, 계획적 결과가 아니라, "아무 거나 들여와도 돈이 된다는 걸 알아차린" 민간 수입업자들의 상업적 계산 결과였습니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중국측 사정이, "당대 히트작 수입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싼 값에 구경할 수 있는 고전 꾸러민만 잔뜩 봐야 했던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굳이 대조를 하자면, 1) 차상위층 가정에서 입 짧은 애들이, 부모가 사다 주는 음식이나 구경거리를 "최신 유행이 아니라며" 퇴짜를 놓는 모습 2) 극빈층 가정에서 그래도 눈썰미 좋은 부모가, 값싼 양질의 물품을 애써 골라 준 걸 그 자녀들이 감사해하며 제 것으로 성실히 소화하는 모습,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1)은 그 이후 그 부모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돈을 벌고, 공부는 안 하고 눈높이만 높이던 애둘에게 억지로 과외를 시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보냈지만 별 열의 없이 현재를 사는 모습, 2)는 부모가 역시 경제적 대박을 치긴 했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이 그 집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들려 정직하게(있는 자원 없는 자원 다 그러모아가며) 학자로 대성한 결과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성장 과정이 2)가 더 건실할 뿐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라 전망도 더 밝습니다.

 

솔직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예산이 부족해서 그 대안으로 들여온" 볼거리에 대해, 그처럼 열광을 보낼 마음이 들었을까요?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대륙의 그 문화 소비자들은, 제한적으로 마련된 영화 저널(당시에는 중국 아니라 어디에도, 지면 매체 외에 독자가 참여할 공간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에 열광적으로 참여헸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기로는, 그저 감정적 호불호나 비생산적 꼬투리잡기가 아닌, 치열하고 성실한 학습자(문화 소비자라기보단 그 학구열 때문에 "학습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들이 펼치는 간접 토론(실시간 참여 매체가 발달하지 못했으니 순차적 투고 형식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죠)과 담론의 향연이, 국외자에겐 정말 대단하고 부러웠습니다. 이런 성숙한 문화는, 그들보다 앞서 PC 통신이라는 신매체가 생겼던 우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던 현상입니다. 당장 이 자랑스러운 걸음마 단계가  키워낸 지식인, 문화평론가로서 이 책의 저자 류원빙이 지금 도쿄 대 학술연구원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다양한 학술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우리의 PC 통신 세대들(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 인프라)은 국내용 담론 생산 외에 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영화 분석의 패러다임으로 바쟁의 이론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이들이 당시에 접하고 향유하며 소화할 수 있는 평론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당국에서 검열과 통제를 했다기보다(그런 사정도 있겠지만) 폐쇄적이고 가난한 나라다 보니 그런 문화 이론 포맷의 선진 문물 도입도 채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여튼 저자 류원빙을 비롯, 건전한 문화적 소비 욕구에 가득차 있던 그들은, 입에는 쓰나 몸에는 좋은 양식을 열광적으로 소화하였고, 이는 대륙의 O세대 예술가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양질의 작품을 생신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한국의 실정은, 21세기인 지금조차 착각과 유치한 자기애에 빠진 감독들, 그리고 예술보다는 정치투쟁의 프락치로 더 뿌듯한 자긍을 형성하는 저질 관람자들로 인해 그 내장이 곪고 있죠.

 

책은 그 서두의 추천사가 정말 좋습니다. 목포대 임춘성 교수님의 글인데, 이분이 다음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가 보십시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본문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읽으면서 정말 놀랐는데, 역자가 원 텍스트 곳곳에 각주로 삽입한 설명들은, 사실 각주가 아니라 독자적인 영화 이론 해설에 가깝습니다. 필자가 당연하다는 듯 꺼내고 적용하는 이론들은, (놀랍게도) 담론에 무지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 맥락에 대해 감이 안 잡힐 수 있다는 배려의 산물인 것 같습니다. 1990년대 홍대 등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펼쳐지던 X 세대의 활개 중 가장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가닥이 빚어낸 결과가, 지금 역자 홍지영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런 해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진짜, 역주만 읽어도 회고가 되고 공부가 됩니다. 대륙의 저자(현재는 일본에 기반을 잡고 있는) 류원빙에 거의 한 세대가 뒤지는(한 세대를 앞서도 뭐할 판에) 일군의 문화 평론가 중에 이런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서, 그나마 창피함이 덜해지는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책의 중심 테마로 조안 첸이 잡힌 것도, 저자 류원빙이 소년 시절 열광했던 아이돌이기도 했지만, 이 저자처럼 자신의 조국과 미묘한 스탠스가 잡혀 있는 현실에서도 공통점이 서로 존재합니다. 영화 공부도 될 뿐 아니라, 지식인과 조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가능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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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풋라이트
찰리 채플린.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전이라 쉽게 불리기엔 너무도 현대적인 그 고전 <라임라이트>를, 보지 않은 이들은 많아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 음악이, 관련 어느 정규 교양 프로그램의 시그널로 쓰인 것도, 한국에서의 현재 유명도에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름답고 감미로우면서도 뭔가 말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담은 애잔한 테마는, 그저 듣기에만 스산한 듯 달콤한 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내용, 주제, 분위기를 선율적으로 완전히 체화한 명곡인데요. 잘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이 주제곡은 감독, 각본,  기획 등 1인 8역을 소화한 걸로도 유명한, 채플린 본인이 작곡한 솜씨입니다.

이 책은 그 성격과 개성이 다소 묘할 뿐 아니라, 그 "의의"에 대해서도 한 차원으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이 책은 1) 채플린 본인이 쓴 소설을 담고 있고, 그것의 제목이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풋라이트>입니다. 2) 그러나 이 책은 채플린이란 복합적이고 위대하며 다층적인 성격의 거인을, 특히 어느 한 시기와 한 대표작(그는 한 손가락으로 무엇무엇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모든 성취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그런 예술가였지만)에 초점을 두어 분석한 평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3) 마지막으로, 이 책은 그의 가장 헌신적인 스탭이자 지근거리의 관찰자였던, 어느 노장의 "팬북"이기도 합니다. 팬이 쓴 헌사, 찬미자의 입으로부터 나온 회고에 대해서는 정확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모순과 논란으로 점철된 이 천재  예술가의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 대해 온당한 조명("라이트")를 비추려면, 발("풋")로 뛰어 사랑과 존경, 열정을 가득 담은 추적과 해명을 펴 나갈 수 있는 이의 재능과 경력과 통찰이 필요합니다.모든 팬북이 그런 것처럼, 이 책도 내용의 충실함 못지 않게, 예쁜 장정과 외관, 디자인을 갖고 있습니다. 솔직히, 채플린에 대해 무지하거나 별 감흥을 안 가진 무심한 독자가 봐도, 이 책 한 권 때문에 관심이 생길 만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예술가나 영화예술 장르 전체에 대해 아무 애착이 없는 이도, 그저 책이 예뻐서 갖고 싶고, 책 가진 김에 채플린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기회를 가질 것 같습니다.



문외한에게도 구미를 당기게 할 만큼 깔끔한 모습과 포맷으로 꾸려진 이 책은, 그러나 채플린에 대해 제법 많은 지식을 가진 이들도 아마 처음 접할 만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굴해 내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이 책은 동시대에 산 동년배(서로 생일도 얼마 차이 안 나는 진짜 동갑내기라고 하는군요)로서,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천재 예술가로 교류하였던, 러시아 출신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와의 오랜 인연에 대해 언급하는 걸로 그 시작을 삼습니다.



채플린은 자신의 소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어느 춤꾼과 그의 후원자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설정을 그 뼈대로 잡고 이야기를 꾸려 나갑니다. 훗날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완성된 모습으로 굳은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남성의 후원과 애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보란 듯 그 오랜 애정과 은혜를 배신하고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여배우, 다만 이를 진정한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며 '무대 뒤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남성"에 대한 테마는, 이후에 나온 많은 작품들에 크고 다양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면, 1950년대 헐리웃의 신성으로 떠오른 오드리 헵번도, 이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고, 얄궂게도 멜 퍼러와 그녀는 실제 인생에서 이와 매우 닮은 사연을 빚은 적도 있습니다. 도스토옙스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 뿐 아니라 실물의 모사품을 마법처럼 뽑아낸, 크고도 넉넉한 품의 외투"였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니진스키와 쇼 기획자이자 스폰서(이 단어의 부정적 의미까지 다 담은 뜻에서 그는 불멸의 "스폰서"였습니다)인 디아글레프에 대해서는, 천재 예술가의 삶과 성취를 파멸로 몰아넣은, 상업혼에 찌든 악마와도 같은 착취자요, 심지어 파렴치한 변태 성욕자로 치부하는 게 오늘날 우리 후대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신화적인 발레리노와, 그 발레리노를 무지한 세상 앞에 본연의 찬란한 면모로 소개했던 영민한 비즈니스맨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객관적인 태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도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니진스키는 채플린과 나이까지 똑 같은 친한 벗이었으며, 천재적 감성과 비전을 타고난 예술가답게 서로 공유하는 요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상 신랄하고 괴퍅하며 대책 없이 자기 중심적인 데가 있던 채플린은, 이 니진스키에 대해서도 자기 위주로 왜곡한 기술(記述)과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결코 다정하기만 하고 착하기만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아는 이들은, 이 논점에 대해서도 뻔한 허풍과 과장으로 쉽게 치부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적에 없었을 것만 같은 이 희극인에 대해 따뜻하고 풍요로우며 넉넉한 포용심을 가졌으리라 오해하는 수가 있지만(이런 선입견을 빚는 데엔 바로 <라임라이트>가 크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는 정반대로, 누구라도 쉽게 마음을 트고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괴짜에 가까웠죠. <라임라이트> 같은 남성의 순애보를 보고서도 참 역설적이다 싶은 게, 여성을 홀리는 데에 탁월한 재주까지 갖춘 이 희대의 바람둥이(대체 여자를 몇 명이나 갈아치웠는지요!)가 풀어내는 내러티브치곤 너무도 천연덕스러워, 알 것 다 아는 관측자에겐 아이러니하다는 느낌마저 주기 때문입니다("그가 과연 이런 이야기를 가꿔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책에는 눈길이 가는 자료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p27이 싣고 있는 이미지는, 놀랍게도 에릭 캠벨, 니진스키, 그리고 채플린이 한 컷에 다 담겨 있는데, 처음 보는 분들도 제법 될 것입니다. 이 사진은 채플린의 1917년작 단편 무성영화 <자립재정>을 제작 즈음에 촬영되었는데, 아래 자료에서 보듯 책의 사진은 그 일부의 크라핑입니다. 원본에는 보시는 것처럼 더 많은 인물들이 실려 있습니다. (자료출처: www.discoveringchaplin.com/2013/10/russian-dancer-vaslav-nijinsky-company.htmleasy street) 참고로, 한국 한정 번역 제목인 "자립재정"은 오역에 가까운데 여전히 널리 통용되고 있죠. easy street에 그런 뜻이 있기는 합니다만.

책의 설명에 에릭 캠벨의 위치를 "니진스키의 오른쪽"이라고 적혀 있는데, 원본이나 이 발췌본의 상황이나 "왼쪽"이 맞겠습니다(사진의 피사체인 니진스키 입장에선 "오른쪽"이었겠지만). 저자가 "키큰 사람"으로 표현하는 에릭 캠벨은 당대에 꽤 유명한 배우였으며, 실제 신장이 2m에 달했던, 당시 기준으로 거인에 속하는 편이었습니다(이 사진의 얼굴도 분장 탓도 있겠으나 제법 무서운 표정입니다). 니진스키는 제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무원의 순종적 짜증을 담은 이상한 얼굴(바로 뒤 페이지를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이 안 가는 고혹적 자태를 담은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이고, 채플린은 거의 아이콘화한 그 모습 그대로를 이 컷에서도 유지하고 있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채플린은 아주 단신으로 희화화한 자태가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그가 난쟁이나 아니었을까 오해하는 이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평범한 단신" 수준인 1m 65였습니다. 반면 워낙 비율이 좋다보니 꽤 장신이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니진스키는, 역시 우리 예상을 배반하고 채플린과 절친 아니랄까봐 키까지 같은 단신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이처럼, 채플린과 그의 주위 사람들, 나아가 그가 속한 시대에 대해서까지 참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합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도, 죽고 난 후 그 흔적을 정리하려 들고 보면,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많은 정보와 자취를 남기고 있을까요? 채플린은 본디 영국 태생인 이가 미국으로 건너가 완벽한 자아 실현에 성공한 케이스고, 다시 그 "제2의 고향"으로부터 얼김에 축출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볼 수만은 없는 "세무 관련 동기" 때문에 스위스에 거주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주가 잦다 보면 (후대의 저널리스트나 전기작가들에게 대단히 불리하게도) 그의 흔적이 잘 남아 있지 않는 수가 많으나, 그는 (이 책 저자의 표현대로) 거의 기적적이라 할 만큼, 특히 특정 시기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아무리 채플린의 위대함을 잘 아는 이라 해도, 이런 날것 그대로의 난장판을 보고 나면 신물과 환멸을 느끼기 쉬운데, 제가 이 서평 첫머리에 적었듯, 열렬한 찬미자, 혹은 수제자급 인물이 아니면 이들을 유의미한 질서와 맥락으로 정돈, 재창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작업은 따라서, 소설에 대한 총체적 주해서이며, 다큐멘터리성 리포트를, 그윽한 감성과 통찰로 예쁘게 짜 낸, 채플린을 위한 소(小) 우주라 불러 줘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긴 소개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올컬러 책장만 휘휘 넘겨도, 독자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책이리고 하면 아주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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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형제 동화전집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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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습니다.

이 책,

무려 210편을 담고 있습니다, 무려. 

200편의 기묘하고 개성적인 이야기에, 부록격으로 열 편이 더 붙어 있는, 실로 거대한 책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죠. 재질이 좋고 잘 빚어진 구슬이라면 단품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익히 봐 왔던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푼젤>, <빨간 두건> 등의 동화가, 다 이런 "혼자 놓여도 아름답게 빛나는 구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명편들 역시, 전(全) 체계(體系)가 오롯이 갖춰진 본 모습 속에서 더 아름답게, 제 가치를 발산하고 증명하는 법인지, 이 완결본 완역판을 다 읽고서야, 시대의 퇴행과 반동을 뼈속으로부터 경멸하고, 진흙 속에 파묻힌 채 스스로를 부정, 망각하고 살던 민중의 의기를 깨우치는 작업에 재능과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어느 형제의 정신, 소양, 사상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림 형제는 그저 동화 작가로서 활약한 이들이 아니라, 출중한 언어학적 자질과 투철한 계몽 사상으로 무장했던, 일세(一世)를 대표할 만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기층의 민속으로부터 다양한 민담과 설화를 채록, 정리한 건 그래서 단지 수집가적 습벽과 기호의 산물, 발로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이어오던 무가공의 풀뿌리 인문 정신의 재발견, 그리고 집대성을 위한 위대한 시도였고 그 찬연한 성과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백설 공주> 등도, 이 210편의 컬렉션 속에서야, 존재와 태생의 아름다움을 제 가치대로 비로소 증명하고 뽐냅니다. 동화는 이제 아이들이나 즐기고 구연하는 하품의 텍스트가 아니라, 성인들이 진지한 감성과 오성을 작동하여 음미하여야 할 인문으로 승급(昇級)합니다. 어쩌면 새삼스러운 엘리베이션이라기보다, 늦게 뜬 눈의 망막에 비로소 영사된,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던 사물의 진상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다른 출판사의 <..전집>울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만, 사실 책이 두꺼워서 소장 자체를 목적으로 사 두었을 뿐, "유치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읽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현대지성판 전집이 새로 번역, 출판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조 분석도 해 볼 겸 두 권을 같이 읽게 되었고, 종전에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분석이나 서평 쓰기를 목적으로 읽은 게 아니라, 읽다 보니 재미가 읽어서, 두 번, 세 번을 통독했습니다. 그만큼 재미가 있었기에, 여러 번 완독해서 텍스트를 (거의)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었습니다. "소화"라는 말을 굳이 쓰고 싶을 만큼, 이 동화 전집은 정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상 특징은, 1) 원저의 스타일에 따라 번호를 일일이 붙이고 있다는 점, 2) 그림 형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시대의 유명 삽화가인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 거의 전편(몇 편에는 해당 아티스트의 일러스트가 처음부터 시도되지 않았습니다)을 천연색도로 싣고 있다는 점, 3) 김열규 교수님 같은 거물이 번역 명의로 등재되어 있다는 점 등입니다. 이상은 출판사 편집측에서 내세우고 있는 장점인 듯하며, 제가 독자 입장에서 캐치하기로는 4) (속지의) 거의 매 에피소드마다 단색도의 일러스트를 실어 주고 있는 점(개인적으로 아서 래컴의 작품보다, 다양한 출처를 지닌 이 삽화들이 더 좋았다는 느낌입니다) 5) 역자 주가 상대적으로 많이 달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현대지성판

타 출판사판

1)

KHM 넘버링 표기

없음(목차에서 바로 찾아가기가 조금 불편)

2)

아서 래컴의 작품 상당수가 수록

이 책이 소속된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컬러 일러스트를 보통은 앞에 싣곤 하나, 유독 이 책은 그렇지 않음

3)

김열규 교수님(권위 있고 가독성 좋음)

김유경 선생님 (정확함)

4)

양질의 본문 부대 삽화

왼쪽 책과 다른 출처의 삽화(역시 무난함)

5)

역자 주 많음

역주는 없고 본문 안에서 해결

기타

1061쪽(종이질이 얇아서-사전용지- 더 볼륨이 작아 보임). 반양장

1008쪽. 종이질은 보통이며 양쟝판. 판형은 왼쪽 책과 같은 크라운판.


 

얼핏 보아 괴이쩍고 맥락이 없는 희화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깊은 의미를 담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34번 <영리한 엘제> 같은 걸 보십시오. 선반 이에 올려 놓은 물건이 언제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져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든 일을 중도작파하고 부엌에 주저앉아 우는 엘제, 백치의 극한을 치닫는 그녀의 지성에 조소를 보낼 분, 어느 독자가 이들 시골뜨기의 합창에 동조하여 그녀를 "영리한 엘제"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네의 운명이란, 혹은 행복이란, 예리한 지성과 강철 같은 의지로도, 개별 사건의 통제는 물론, 개략적인 향방의 지휘마저도 난감하기가 일쑤입니다. "영리한 엘제"란 호칭은 그저 반어(反語)가 아닙니다. 삶의 원초적 불안정성과 불가해성이 빚는 근원적 슬픔을, 일상에 찌들어 망각한 범인(凡人)들에게 경각하는, 본 질을 꿰뚫어 본 현자가 바로 엘제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의 나는 사실 내가 아닐지도 모르고, 내가 아는 나 자신인 엘제는 이미 저 따뜻한 집 안에 들어 와 있음"을 자각한 후, 어둠에 둘러싸인 미지의 지평선을 쫓아 달리고 달리기까지 합니다. "실존의 무상성에 대한 역겨움" 때문에 전위예술로서의 "구토"를 행하는 엘제는, 이미 장폴 사르트르의 개념적 선구였다고나 하겠습니다. 



59번 <프리더와 카터리제>를 보면, 역시 (상식의 눈으로 보아) 어리석기 짝이 없는 프리더의 아내 카터리제가 나와서, 일을 하다 항상적 자아를 잊고 해학적 기행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특히 이 에피소드에서 두 책의 태도가 많은 차이를 보여 면밀히 대조해 보았는데요. 한 책에서 빠진 내용이 다른 책에 들어간 것도 있고, 반대로 한 책에서 모호하게 옮기거나 원의의 맛이 잘 안 사는 번역에 그친 걸 다른 책에선 (그림 형제의) 의도가 두드러지게 처리한 것도 있었습니다(특히 목사의 밭에서 무를 뽑는 모습을 보고 악마라고 놀라서 달아나는 대목). 타 출판사 책에는 카터리제의 이름이 "카터리스헨"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습니다.



7번 <괜찮은 거래>는 동음(혹은 유사음)이의어를 이용한 소화(笑話)입니다. 이 책의 번역은, 개구리 우는 소리("아크")와, 8을 의미하는 독일어 acht("아흐트")가 서로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역주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타 출판사 책의 해당 대목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번역본만이 지닌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개 짖는 소리("")가 왜 "조금"이라는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선 분명한 설명이 없는데요, 원문에는 was("약간")이라고 되어 있어, 이것이 개짖는 소리의 의성어인 wau와 통하는 걸로 간주한 듯 보입니다.



43번 <트루데 부인>은 다소 소름끼치는 함축적 우화적 괴담입니다(타 출판사 책에는 <트루데 아주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무서운 건, 짧은 분량에다 그저 부조리하게만 느껴지는 "확정적 배드 엔딩"울 취한 까닭이 큰데요. 마지막 트루데 부인의 대사를 두고 이 책의 번역은 "그것 참 밝기도 하다."이며, 타 출판사 버전은 "그것 참 잘도 탄다."입니다. 둘 중 저는, 이 책의 옮김이 더 무서웠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전집에는 "소름 끼치는 법을 배우러" 넓은 세상을 향해 감연히 뛰쳐 나가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자신의 부모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이가 더 큰 무대 위에선 "최고의 대담성을 지닌 용자"로 밝혀지는, 일종의 성장 테마를 취한 그림 형제판 "미운오리새끼"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어떤 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고, 어떤 건 간단하고 창의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 이런 깊고 은근한 진실을 담았나 하는 감탄에 흐뭇한 웃음이 나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가볍게 때우고 싶을 때도 손에 잡고(하드커버가 아니라서 오히려 편합니다) 술술 페이지를 넘기기 좋은 책입니다. 아이들보다는 차라리, 머리 아플 일이 많을 어른들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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