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권도 그렇지만 이 2권 역시, 소설을 읽어나가는 재미란 게 있습니다. 3권 <기암성>에서 "철가면"의 설화가 잠시 언급되는데, 이 철가면을 모티브로 한 문예 중 가장 유명한 건 알렉산드르 뒤마의 작품일 것입니다. 르블랑의 소설은 어느 것이나, 이 뒤마적 전통, 스타일을 충실히 계승한, 독자를 정신없이 몰아가며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본격 문학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교양 수준이 높지 않은 당대 대중들에게 특별한 끌림을 제공하는 강점이지만, 동시에 통속 문학이 결국 맞이하게 되는 "짧은 유효기간"이라는 숙명을 피해갈 수 없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1권도 그렇지만 이 2권도, 내레이터의 수다스러움이 플롯과 분위기, 나아가 캐릭터까지 압도하는 모습입니다. 뤼팽도 말이 참 많은 편인데, 다만 그는 자신이 내뱉은 거의 모든말을 실천으로 일일이 (극악의 난도임에도 불구하고) 옮길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에, 그가 수다쟁이라는 인상은 우리 독자의 뇌리에 남지 않고 비껴갈 뿐입니다. 주인공인 뤼팽도 말이 많은데, 때로는 작중의 허구인 "나", 때로는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전지의 화자까지 끼어들어 인물의 내면과 사건 전개에 대한 설명을 쉬지 않고 (주관적 감상까지 보태어) 늘어 놓으니, 현대의 세련된 스타일에 익숙한(그리고 뤼팽에 애착을 가질 특별한 이유가 없는) 독자들이라면 그 일부는 짜증스러워할 만도 합니다. 우리가 한 세기 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신파극이나 변사 해설 포맷의 드라마를 도저히 참고 보지 못하는 그 기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요즘은 워낙 이런 낡은 스타일이 드물고(시대에 뒤떨어졌으니 당연), 유행은 돌고돈다고 좀처럼 못보던 게 "고전의 아우라"를 쓰고 (재)등장한데다, 여튼 독자란 스스로를 어떤 허위의식으로 기만하든 속은 그저 원초적 흥미만에 목마른 질 낮은 취향의 소유자인 까닭에, 이런 "구닥다리"도 재미있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우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범속한 독자들이니까요.

 

여튼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전이다!"라는 외경감을 갖고 보면 더 좋습니다. 기왕 속을 작정이라면 즐겁게 속는 게 그나마 더 현명한 선택이겠죠. 해협을 건너와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몰던, 얄미운 섬나라에서 개발된 신 장르물에 침식되어가는 독자들을 보고, 신성한 민족 감정에 의해 바른 길로 그 오염된 정서를 돌려 놓기 위해서라도 이런 "맞불"이 필요하다는 자못 캠페인적 동기에 르블랑이 크게 기울었다는 주장도 물론 유력합니다만, 저는 이 2권의 창작이 그보다는 "팬심"에 의해 더 많은 동력이 주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증거? 바로 이 2권입니다. 르블랑은 이 2권에서 셜록 홈즈(헐록 숌즈)를 참으로 공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숌즈의 추리는 도일 경의 "정전"에서 묘사되는 그 개성 그 엄정함 그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도일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지명 받은 작가들의 스핀오프보다, (소위 안티 홈즈였다는) 르블랑의 재현이 훨씬 더 오리지널에 근사한 모습입니다. 돋보기를 들고 사다리를 놓은 가짜 흔적의 간격을 재는 모습, 불한당과 맞닥뜨릴 때 지체 없이 주먹이 나가는 아마츄어 복서로서의 면모, 친구(왓슨. 혹은 윌슨)의 어리석음, 때로 자신의 조사를 (고의 아니게)훼방하고 오도하기까지하는 아둔함을 보고 죽여버리기라도 할 듯 화를 내는 천재 특유의 자기중심성을 보이다가도, "내 친구의 목숨에 위해가 가해졌다면 너도 바로 죽은 목숨이다!"를 외치며 돌진하는 절대 우정의 표현까지, 도일 경의 정전을 어지간히 철저히 연구한 이가 아니면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홈즈의 캐릭터는 이 2권에서 그저 뤼팽의 장식물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2권에서는 뤼팽이 찌질하게 나옵니다. 홈즈는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뿐인 친구 하나만 동행한 채, 범상치 않은 체력, 의지력과 더 범상치 않은 지성으로, 거의 혈혈단신으로 적수에 맞서고 의뢰받은 사건의 진상까지 풀어내어야 합니다. 반면 뤼팽은? 뤼팽 혹은 홈즈 그 누구의 편에 선 독자라도, 바로 동의하거나 동의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뤼팽은 "조직 폭력단의 두목"이라는 겁니다.  두 천재가 맞붙는데 한쪽은 그냥 맨몸의 개인이고, 한쪽은 중무장한 갱단이라면 이게 게임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뤼팽은 그저 문제를 출제할 뿐이고, 홈즈는 그 문제를 풀면서 동시에 신체에 가해지는 위해까지 일일이 방어해 내어야 합니다. 이런 원초적 불공정 게임은 홈즈가 져도 무승부요, 뤼팽이 이긴다 한들 그건 이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무대는 뤼팽의 홈그라운드인 프랑스가 아닙니까. "이 작자가 도전을 해 왔으니, 세계의 수도(파리를 가리킵니다)로 우리는 해협을 건너 가는 수밖에!"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렇게 영웅적인 면모로 소위 "홈즈, 나아가 영국적인 그 모든 것의 안티"라는 르블랑은, 남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가능한 최상의 예우를 가하며 이 2권에서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이 2권의 주인공은 홈즈라고 봐야 하며, 사건의 전개도 철저히 홈즈의 시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최후의 승자라는 영예까지 그의 몫으로 돌려 주는 건 아닙니다. 철저히 유치한 자기애에 빠진 전형적 프랑스인인 르블랑이 그럴 리가 없죠. 이 2권의 1부에서, 홈즈는 남의 나라에서 교란되고 훼손된 정의를 회복시키는 데 그럭저럭 성공적인 결과를 보입니다. 문제는 2부입니다. 수수께끼를 거의 다 풀고, 진범을 (다소의 삐걱거림 끝에) 밝혀 내나, 결국 그 지적이고 기계적이며 이성적인 노력은, 처음부터 안 기울이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융통성 없는, 일체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기계적 접근보다, 사태의 본질을 더 정확히 아우를 수 있는 변칙적 접근이 (한 가정의 평화 유지, 한 피용인의 생계 보전 등) 여러 목적을 위해 더 유용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프랑스적 가치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르블랑의 본의였을 텝니다. 처음부터 법질서의 반대편에 선, 불리한 스탠스에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뤼팽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근원적 정의"를 회복하는 데에 더 실용적인 해결사로 명탐정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애교어린 공존의 제스처일 뿐, 극복이나 능욕 같은 의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는 이 순간만까지만 해도 존경하는 선배를 향해 일종의 재롱을 부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B의 비용
유종일 외 지음,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엮음 / 알마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용"이라는 단어는 경제학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학술용어, jargon이라는 게, 언어를 일상의 용법대로 성실히 구사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언제나 혼란을 끼치곤 합니다만, 경제학에서 특별히 고안해 쓴 이후로 다른 영역에까지 널리 퍼진 "기회 비용"이라는 말은, 뻔한 현상의 이면에 가려진 무서운 진실, 혹은 거대한 비위를 제법 요긴한 쓸모로, 보이는 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아 왔던 우리 눈 앞에 들추어 내는 고마운 노릇을 해 왔습니다.



저는 이 책의 제목에 쓰인 "비용"이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1) 말 그대로, 전(前) 이명박 정부에서 헛되이 낭비된 엄청난 비용을 의미, 2) 이명박 정부가 그런 탕진, 혹은 착복 횡령(여기까지는 아직 짙은 혐의가 주어지는 단계일 뿐, 물증이나 확정 진단은 국정 조사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하겠습니다)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그 대신 우리 국가와 대중이 입었을 수도 있었던 갖가지 복리와 혜택이라고 말이죠. 전자는 구체적, 실물적 손해요, 후자는 무한한 가능성의 상실, 그 대신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유산(流産)된 희망을 뜻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손해를 입었을 때, 돈으로 측량 산정이 가능한 손해가 안기는 것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고는 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독자로서, 저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마치 이게 그저 꿈이었으면, 악몽에 지나지 않았으면 하고 소극적으로, 무기력하게 바랄 뿐입니다. 진위 여부는(이미 전망이 상당히 어둡습니다만) 그저 국정 조사에서, 명쾌하게, 그리고 모든 국민들에게 (헛된 쪽으로나마) 희망적인 결과를 안겨 주길 기대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각종 구체적인 자료와 수치, 연구 해석을 볼 때, 별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만.



책의 1부 대제목은 <탕진>이라고 달려 있습니다. "탕진"도 물론 그 자체로 비난 받아야 마땅할, 공무원(지위 고하를 막론하고)의 비위이며, 형법상 직무유기죄를 구성할 수 있는 범죄사실/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구체적인 착복이나 횡령의 사실, 단정까지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는 사실 검찰 수사, 그리고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확단할 수 없는 결론입니다. 다만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너무도 양적으로 방대하고 그 내용이 확연한 자료 앞에, 어느 누구도 한 가지 방향의 심증 말고는 떠올리기가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반대당사자가 앞으로 내어놓으리라 기대되는 해명도 들어는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자원외교, 4대강, 기업비리, 원전비리, 그리고 한식세계화사업 등 다섯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마지막에 붙은 김윤옥 여사 주도의 한식세계화사업을 다룬 대목은, 책에서의 비중이나 사건 자체의 중대성 면에서 다른 네 아젠다에 비해 좀 처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관심도로 놓고 볼 땐, 이 다섯 파트 중에서도 (사대강 부분과 함께) 단연 시선을 끌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또한, 가장 소박하고 대중친화적인 동기와 양상으로 발단,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실망도 유발하겠고요.


자원외교의 경우, 이미 중국은 2000년대 초반 장 주석 시절부터 일찌감치 그 중요성에 눈을 뜨고, 특히 아프리카(나중에는 중남미)를 중심으로 전개해 왔습니다. 우리 나라 같은 협소한 영토에 빈한한 자원만을 보유한 나라는 그 시론조차 전개되지 않고 있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비로소 초점이 부각되기 시작했죠. 이 대통령보다 먼저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거물 이상득 의원이, 책까지 써 가며 홍보한 자원외교에 대해서도, 저는 2009년 당시 그 저서 구입까지 생각해 가며, "세상이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구나."하는 자괴감까지 느껴 가며, 관심을 가졌더랬습니다. 물론 제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여러 고급 정보가, (마치 이 책 같은 매체에서 이제서야 알려 주는 내용과 비슷하게) 그 반대되는 내막 비슷한 걸 알려 주기도 했기에, 행동에 신중을 기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특히 저는, 두 가지가 인상에 남았습니다. 덩치 큰(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생각보다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더군요) 볼리비아를 다스리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덩치를 지닌 볼리비아 대통령이, 이상득 씨와 나눈 그 찐한 악수와 공동 회견이 끝난 후 1년여, 바로 리튬 광산 국유화를 단행하는 그 모습. 아마 지금도, 그 대통령은 이 씨와 인간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는 하고 있을까요? 민주화 여정 때문에 아련하고 막연하나마 동질감 유대감 비슷한 걸 갖고 있는 5천만 지구 반대편 국민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상의 벽을 쌓고도 말입니다. 책에 실린 사진은, 보면 볼수록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다른 하나는, 제발 TV나 신문에서 설레발 좀 치지 않았으면 하는 주문입니다. 이건 이명박 정부 때만의 일이 아닙니다. 그 예전 전두환 정부 당시 마두라 유전 개발 건도 그렇고, 성격은 많이 다르지만 노무현 정부 초기 국가보안법 폐지 이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설익은 정책을 홍보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지극히 올바르다 싶은 대의명분이 깃든 과제를 추진할 때도, 방송이나 신문이 여론몰이의 도구로 악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대중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경제활동이나 일상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그로 인한 신뢰의 배반, 구체적 손해는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4대강에 대해서는 그간 수해 상습 침수 지역이 많은 혜택을 보았다는 반론도 있고, 특정 지역은 (제가 직접 다녀 봐서도 압니다만) 교통 노선이 말끔히 정리되어 도시 순회에 소요되던 시간이 엄청 단축된 순작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새로운 팩트까지 추가되어, 신중론에 선 이들의 입지조차 용색하게 축소하는 주장을 펴고 있더군요. 홍수 방재 효과에 대해선, 4대강 사업 완료 후 실제로 발생한 국가, 지자체 작성 통계에 의한 손해액이, 이전보다 몇 배는 늘어났다는 팩트 제시 앞에, 다른 옹호나 변명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홍수라도 해결이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지도 못하다는 결과니 이 얼마나 아연할 일입니까?

다만 이 책의 기술 중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 부분이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의 "대단히 예외적인" 피해액을 기준으로, 사업 타당성을 부풀리고자 수치를 과다 계상했다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태풍은 우선 직전 5년에 집중적으로 몰려오다가, 당기 5년에 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5년, 그 다음 5년에는 또다시 무서운 강도로 한반도를 스쳐 간 후 끔찍한 피해를 안길 수 있는 재앙입니다. 이런 재앙은 10년, 아니 30년 주기로 찾아온다고 해도, 또 국민 중 소수가 입는 피해라 해도 상시적 변수로 간주하고, 국가적 차원의 위기 대비 시스템을 설계해야 합니다. 본문 중 "빈대 잡으려고 초가 삼간" 태운다는 말은, 물론 "초가 삼간"에 비중이 놓여 있기는 하나 자칫 태풍피해를 "빈대" 정도로 본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왜 MB 정부가 비판을 받습니까? 국민의 이익과 복리를 경시해서가 아닙니까? 하물며 그를 비판하는 논리 안에서, 행여 표현 하나의 사소한 구절이라도, 자신이 지금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반대편의 악덕에 기승하는 결과를 행여 낳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업비리.... 이 책에는 세 기업이 나오는데, 완전 사기업인 롯데와, 아직 공기업인 양 착시를 부르는 KT, 그리고 포스코(주제는, 포스코가 아닌 포스코 그룹이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가 나옵니다. 롯데는 사실 특혜 논란이, 이 정부 뿐 아니라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안 불거진 적이 없습니다. MB 정부를 비호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롯데를 까는 취지입니다. 롯데는 업종이 업종이다 보니, 부동산 요지 확보, 토지 용도 변경, 그리고 각종 사업 인허가 취득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보면 로비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까다로운 곡예를, 일생을 두고 벌여 온 신 회장의 수완에 대해서는, 공포와 감탄을 동시에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특히, "보수 정권에서 사기업의 이익을, 안보에 우선했다"는 지적은, 지지난 선거에서 어느 후보를 찍은 많은 이들이 대단히 아프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술과 출간이 시차가 좀 나다 보니, 최근 불거진 씽크홀 의혹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결을 짓는 논의가 좀 부족합니다만, 뭐 이 정도로도 경악을 안기는 데에는 충분하죠.



KT에 대한 논의도, 그저 중립적 입장에서 봐도 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다만 이석채 사장의 자격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한국에서 몇 손 안에 꼽은 최고 수준의 정통분야 전문가라는 점에서,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사외이사는 사실 핵심이해관계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양반이 KT에서 이해상반행위를 벌일 위험은 거의 0입니다. 오히려 융통성없는 법규정이 문제였다고 봐야 할 텐데... 문제는, 부임이 아니라 부임 이후 이분이 벌인 각종 행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야심차게 추진한 야구단 창단도, 해당 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자제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정치적 제스처일 수도 있고). 저는 이 책이, 취임시점보다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해 더 많은 비중을 두었어야 하지 않았나 봅니다. 현재 이분에 대해서는 공법상의 절차가 진행 중이므로, 귀추는 두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포스코가 그 우량기업이던 과거를 뒤로 하고 소위 "투자 주저 등급"으로까지 추락한 건, 정 회장 재임 당시의 결과이므로 사실 옹호가 힘듭니다, 누구라도요. 그런데 정준양씨는 낙하산은 아니고, 포스코에 거의 평생을 몸담아 온 정통 기업인입니다. 그 점은 오해가 없어야 하겠구요. 또, 아무래도 프레시안에 연재되던 시점과 지금이 차이 나니 벌어지는 문제인데, 현 회장은 정준양씨가 아니라 작년에 권회장이 새로 취임을 했습니다. 호칭은 그래서 "정 전 회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파이시티는 제가 양재역 터미널 부근을 자주 지나다 보니 이게 아주 개인적으로 밀접한 이슈이기도 한데, 이 대목은 읽을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파오는군요.



2부는 "실정'입니다. 이 파트는 주로 유종일 교수님, 그리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같은 (별 주제와 관련 없을 것도 같은) 거물급 전직 관료 등 전문가들이 나와 밀도 있는 대담을 나눕니다. 1부가 팩트의 제시라면, 2부는 비판과 분석이 주를 이룹니다. 최고 수준의 패널들이 나와서 벌이는 토의이니만치, 어느 입장에서도 경청할 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책이 왜 완독 후 뿌듯함을 주냐 하면, 정치적 화젯거리 말고도 읽는 이이에게 "공부가 되는 과제"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입니다. 주제는 MB의 패착에 대한 비판이지만, 부수적으로 한국이 처한 상황과 각종경제지표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권도 그렇지만, 이 1권도 단편집의 형식이긴 하나 각 단편이 서로 약한 연계를 가진 피카레스크식 구성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어쨌든 등장 인물이 악한이기도 하니 이중의 타당성을 지니네요). 첫째 단편 <뤼팽, 체포되다>에서 그에게 알쏭달쏭한 방법으로 연정, 동정, 애모 등이 뒤섞인 감정을 표시한 미스 넬리 언더다운이, 마지막 작품 <헐록 숌즈 한 발 늦다>에도 다시 등장하여, 수미쌍관의 구성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이 1편 수록 작품들에서 공유되는, (갓 데뷔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이미지나 개성을 마련함에 있어, 이 1권이 거의 부족할 것 없는 역할을, 여러 방향에서 고루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르블랑 자신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뷔시킨 이 작품집을 내놓을 무렵, 이 시리즈와 캐릭터가 그토록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줄은 몰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첫째 권에 벌써 뤼팽의 어린 시절, 도둑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라 할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이 마련되어 실려 있습니다. 시리즈가 확실한 대박을 치고, 작품집의 넘버링이 3, 4 정도에 이르렀을 때 마지못한 척 하며 내어 놓는 게 보통인데, 르블랑은 캐릭터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어지간했는지 "프리퀄"을 이렇게 이른 시점부터 (누가 궁금해할 거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선사하고 있네요. 저도 어렸을 때, 물론 르블랑이 엄청 예전에 죽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한참 후대에 다른 작가에 의해 스핀오프 정도로 나왔음직한, 이 유년 시절의 rising story가, 벌써 작가 본인의 솜씨로 "서둘러"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일 경이, 끝까지 홈즈의 어린 시절은 물론, 2,30대의 청장년기에 대해서도, 독립된 작품은커녕 지나가는 회고담 한 자락의 형식으로도 한 마디 언급조차 없는 것과 크게 대조됩니다. 아이를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게, 경우에 따라 익애, 과잉보호보다 낫다는 하나의 증명례일까요.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에 나오는 목걸이는, 마리 앙트와네트와 루이 16세 부처(이 책에서 루이 16세는 다른 두 작품에서 각각 언급되는데, 두 번 모두 독자에게 적절한 역사 지식을 마침 환기하고 있어서 바람직합니다)를 결국 파국으로 몰아넣은 스캔들의 핵심 동인이 된 바로 그 목걸이인 걸로 설정됩니다(지배층의 병적 허영과 왕실의 어리석음을 동시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의 도화선 쯤으로 아직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뤼팽이란 법의 보호 밖에 내동댕이쳐진, outlaw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불쌍한 신세의 범죄자입니다. 작가의 설정대로라면 이 목걸이야말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은 요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모친이 비참하게 운명을 마감한 것도, 결국 목걸이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받아서가 아닙니까. 뤼팽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 같지만, 오랜 세월 동안 양식 있는 이들로부터 확신과 정당성을 얻은 법을 배척하고 질서를 교란한다는 점에서, 그 출발이 잘못된 "슬픈" 주인공입니다. 드뢰 수비즈 백작부인(나이를 꽤 먹었겠죠?)이 지적하는 바대로, "어려서부터 나쁜 천성이 있어서" 그 길로 빠져든 거지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다 봐야 하고, 이 대목에서 말에 뼈가 있음을 느낀 뤼팽도, 보기 드물게 자격지심을 노출하는 게 눈에 띕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 1권은 뤼팽의 한심한 모습이 꽤 많이 드러나는데요. 제가 유치원도 다니기 전 맨 처음으로 (그것도, 성인판으로) 읽을 때에는 저 어린 라울의 이야기 <왕비의...>에서도 꽤 근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어려서부터 한을 품고 자라 커서 복수극을 펼치는 주인공!), 10년 전 성귀수 선생님 번역본을 읽을 때도 그저 아이돌을 바라보듯 조심스레 옛 전철을 짚을 뿐이었는데, 지금 냉정하게 다시 살피니 하나도 멋지지가 않습니다. 그저 기분 탓일까요? 이어지는 <엥배르 부인의 금고> 역시, 좀 더 뒤에 나왔으면 확실히 팬 서비스가 되었을 작품인데, 이처럼 이른 시기, 아직 뤼팽의 카리스마가 독자의 머리 안에 단단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나왔다는 점 역시 의외로 받아들여집니다(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일종의 내용 누설이 되므로 여기서 말할 수 없습니다). 엥베르 부부가 큰 부자도 아니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닌데(최소한 뤼팽은 그런 줄도 몰랐을 텐데), 자신에게 신뢰룰 준 사람들에게 그런 야비한 술수를 쓴다는 게 과연 뤼팽 자신의 도덕률에 비추어서도 용납될 수 있는 일일까요? 물론 뤼팽은 대가를 치릅니다. 아주 신랄하고 우스꽝스럽게. 하지만 문제는, 뤼팽이 자신의리즈 시절(!)을 회상하는 그 순간조차, 젊었을 적 자신(아직 무력하고 미숙한)을 회상하는 어투에서마저, 도덕적 회오가 안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멍청했던 자신을 조소는 하고 있을망정 말입니다.

 

<흑진주>에서 뤼팽은 진범을 밝혀 내는데, 이 역시 다소 찜찜한 구석을 남깁니다. 이 미스테리 사건은, 알고 보면 전혀 미스테리가 아닌 평범한 강도 사건인데(도일 경의 작품에서 많이 쓰이는 어구로는 "common burglary"), 뤼팽은 결국 사후 종범으로 악질 범죄에 가담한 셈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살인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이, 이 사건에서는 아주 위선적으로 왜곡되는 것 아닌지. 진범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와 "나"의 냉소 역시, 잘못된 법률 지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데, 이유는 "기존의 기소, 심리 단계에서 전혀 취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의 발견"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다름 아닌 뤼팽의 손에 의해). 

 

저작권법이 미비하여, 남의 캐릭터를 함부로 끌어다 쓰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법이 현실을 따라가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캐릭터라는 게 독립된 영역을 차지하지도 못한 시절이고, 이의 상업적 이용은 더군다나 생각 못 하던 때(뤼팽은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 따위보다 20년 정도 앞서 출현했고, 홈즈는 당연히 그보다 더 이전이죠)였으므로, 르블랑의 이런 행동은 타인의 경제적 권리의 침해라기보다, 신사도의 위반 정도로 평가될 뿐입니다. 물론 신사들 사이에선 이 역시 심각한 태도로 다뤄질 수 있습니다만, 이는 공공 질서의 교란이라기보다 사적 당사자 간의 다툼이죠. 실존 인물인 도일 경의 명예를 직접 훼손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1권에서까지만 해도, 홈즈(숌즈)는 제법 공정하고 무게 있게 다뤄집니다(이어지는 2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후의 작품인 <기암성>에서 홈즈가 완전 무능 찌질 악한으로 나오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르블랑이 저 해협 건너의 선배 격인 도일 경에게 (자기 딴엔) 예의를 차리면서 일종의 경의의 표시로 캐릭터를 차용(사실상 도용)했는데, 도일 경은 후배의 이런 행동을 전혀 애교어린 시선으로 봐 주지 않고 엄정대응한 데에서, 실망감 비슷한 게 악감정으로 전화한 소치 아닐까 셍각합니다. 자기 장난을 안 받아준다고 해서 그게 무례는 아니죠.

 

뤼팽은 변장의 명수입니다. 이 장기는 <탈옥하다>에서 무슨 파라핀 주사를 자기 얼굴에 놓았다느니 하는 대목이 아주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려서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완전히 넋이 나가서, 여기서 언급되는 화학 약품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런 변장의 명수가, 홈즈 같은 위인에게 걸리면 통하지 않는다는 뤼팽 자신의 고백, <헐록 숌즈 한 발 늦다>에서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죠. "그는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순간 나라는 인간 자체를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멋진 표현 아닙니까? 홈즈의 개성과 능력을 표현하는 데에, 이보다 멋진 요약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걸 보면 르블랑은 누구 못지 않은 정도로 도일 경의 예찬자 아니었을지. 무시당하고 나서 배신감이 극에 치달았을 만도 합니다.

 

2권에서도 어느 책상 하나를 고물상에서 산 후 딸에게 주려는 수학 교사에게, 유리한 가격을 제시하고도 차갑게 거절당하자 원망 어린 시선을 가득 보내는 청년이 나오죠. "그 적대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에는, 이처럼 강렬한 개성을 지닌 영혼이, 외모의 다른 부분이 아닌 "눈빛"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 드는 묘사가 자주 나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도대체 눈빛이 뭘 말한다는 건가?"가 몹시 궁금했는데, 그건 나이 들고 사람을 겪어 봐야 감이 오는 말이더군요. 뤼팽 같은 영혼이 현실애서 흔할 리 없으니, 어차피 적용 범위가 넓지 않은 교훈이기도 합니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 비정상의 시각으로 본 정상의 다른 얼굴
조던 스몰러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경계선 근방에 놓인 여러 표본은 인류 역사 오랜 초기 단계부터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니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이런 걸 두고 누가 시비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계(이것부터가 모호한 개념이지만)에서 멀리 떨어진 개체, 범주를 두고는, 우리는 그것(들)이 특히 현실에서 힘을 못 쓰는 열위의 권력속성을 지닐 때, "비정상"의 낙인을 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권의식의 향상과 휴머니티, 계몽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우리는 소위 "장애"라는 것에 대해서도 종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했고, "다양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점차 긴 스펙트럼의 바깥쪽에 위치한 "연장의 특수 지점" 정도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 "야만"으로 여겨지는 거나 마찬가지로, "신체 특정 부위의 이상 발현"에 대해서도, "우리와 이어져 있으며, 고립된 섬은 아님"에 동의를 보내는 이들이 점차 늘어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불순한 이익을 위해 과도한 합리화, 무리한 논리 비약을 일삼는 이들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최소한 "진화는 심지어 생존적합성의 목적도 갖지 않는, 그저 맹목의 변태"라는 관점도 힘을 얻음에 따라, (다소 맥빠지는 일이긴 하나) 신체나 정신의 이상행태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용이  부여되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맥빠진다"고 제가 표현한 건, 결국 이 책의 관점(과 비슷한 견해)에 따르면서 계속 (멀리) 나가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상(이 역시도 의미 없는 목표가 됩니다. 누구의 기준에 의한 향상이며, 그 이전에 "향해야 할 위[上]"가 있기나 하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죠)시키고 발전을 도모한다는, 뿌듯한 노력이 결국 무의미한 도로(徒勞)가 될테니 말입니다.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도, 사회적 승인이 철회된 채 "그저 비정상태의 일종"이라고 미지근한 규정만 이뤄진다면, 아마 보다 나은 생산성을 이루고자 하는 어떤 발버둥도 그 발판과 동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건 당사자뿐 아니라, 수월성을 지닌 분자들에 의해 어떤 혜택이라도 입을 수 있는 나머지 모두를 위해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정상/비정상의 사회학적 기준의 설정과 담론적 의의보다는(그런 것도 없지는 않지만), 과학적, 실험적, 혹은 연구의 기반이 마련된 범위 안에서, 대체로 우리 동시대인들의 합의가 가능할 어떤 인식틀을 마련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멘델이 "유전자"라는 개념을 창안해서 처음 세상에 알렸을 때만 해도, 무엇이 그 부모로부터 자식 개체에게 전달이 되긴 하는 줄로만 알았지, 어떤 구체적인 기제에 의해 이것이 이뤄지는지는 전적인 무지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러던 것이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왓슨, 크릭의 연구에 의해 나선형 구조를 지닌 어떤 DNA, 핵산의 본체를 띤 물리, 화학적 실체의 구명이 있었고, 밀레니엄의 전환에 즈음해서야 미흡하나마 지도 비슷한 걸 손에 넣게 되었죠. 책의 2장(본격 논의의 시작)은 특히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다양한 행태에 대해 지시의 직접 책임이 있는 "뇌"와, DNA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얽혀 있는지 자세한 해명을 시도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건, "성격"이란 게 과연 후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어느 정도나 그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유전적 형질, 즉 "운명"에 속박되어 있는지, 흉금을 터 놓은 여러 논의를 펼칩니다.

 

여기서 제가 "흉금을 터 놓았다"고 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저자 역시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선 확정적 결론을 유보하는 솔직한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입니다. 갈레노스 등의 고대 현인(오늘날의 관점에서 "의학자"라고 엄격히 정하기 힘든) 등이, 담즘 등의 분비에 따라 넷으로 가른 "성격론"에 대해, 계몽주의 이래 많은 이들은 "몽매한 과거의 유물"이라며 평가절하해 왔습니다(문학 작품에는 의외로 인기 있게 취급되는데, 그 비슷한 걸 A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볼 수 있죠). 그러나 이 책은 겸허한 마음으로, "어떻게 고대인들이 그만큼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가?" 같은 경이를 원용하는 쪽입니다. "성격, 기질"이라는 모호하고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현대 의학이 저 고대인들의 성과에다 의미 있게 추가시킨 증분은 거의 없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는 셈입니다. 이 "성격론"이야말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가르는 실익이 가장 날카롭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일 텐데도 말입니다. 당장 우리가 사회에서 정치적 다툼을 벌일 때, 누구 하나를 두고 "저건 성격이 비정상"이라는 규정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 쟁투는 이런 주장 중 어느 편이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농담과 위트가 매우 자주 발휘됩니다. 대중서(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서입니다)에서 영미권 저자들이 다 이런 식으로 캐주얼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건 아닙니다. 권위라든가, 어떤 확증적 진단을 (자신이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척척 내세우고 내어놓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대단히 친근히 다가섭니다. 벌써 "비정상/정상을 가르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지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주제부터가 그런 권위의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은 그런 주제를 전달하고 구체화하는 그 태도에서까지도 자신의 주제를 배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좀 희한한 (제2의) 쓸모를 지니고 있는데요, 저는 이 책이 육아서로 쓰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완독하면서 아주 자주 했습니다. 특히 3장, 5장, 7장, 8장이 그렇습니다. 2장에도 후생유전학에 대한 논의가 잠시 나오고, 어떤 인간 개체가 정규분포의 몇 시그마를 초과하는 구간에 존재하느냐 하는 게,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전제를 깔고 벌이는 주장이 많이 등장하며, (이 책의 주제와는 무관하게도) 우리 아이가 지능이나 매력만은 저 멀리 식스 시그마의 오른편에 존재하되, 체형의 결함이나 충동의 조절 능력에 있어서만은 한가운데의 폴(pole)에 꽁꽁 묶여 있었으면 하는, 모든 어머니들의 바람(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척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으로 돌변할 모든 젊은 여성들에게 다 해당될 희망사항!)을 (의도하지 않게?) 잘 대변하는 대목입니다. 잘 읽어 보시면 (물론 저자는 부정하는 스탠스입니다만) 육아에 도움될 만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자는 "특별히, 매력적으로 비정상적인 우월 개체를 키우기 위한 그 모든 몸부림"에 대해, 그 과학적 근거를 부정하면서도, 그 박약한 근거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싶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는 멋진 문장력(?)으로, 우리 독자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이 책 제목은 그저 <THE OTHER SIDE OF NORMAL>입니다. NORMAL 앞에 정관사 the가 빠졌다는 것만으로도, 이 "정상" 개념에 대해 취하는 작가의 회의적 스탠스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제목에 들어 있는 "과학"에 너무 짓눌리지 마십시오, 정상/비정상의 기준은 결국 "과학"도 모르겠더라는 게 결론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기준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건 저자의 "인문 사회학적" 결론이고 말입니다. 최근 뇌신경과학, 행태론 기반 여러 학문이 일궈 낸 여러 성과를, 이처럼 독특한 프레임 안에서 일별 조망하는 일은, 저자 뿐 아니라 우리 독자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체험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린 아픔
소피 칼 지음, 배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1985년 1월 25일 금요일.


이 날은, 당시 서른 두 살이 채 안 되었던 여인 소피가, douleur exquise, 칼로 찌르는 듯한 이별의 아픔을 겪은 날입니다. 가상의 날짜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대열에 끼인 시각들,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돌고 있던 흔적의, 뚜렷이 실존하는 물리적 일부분입니다. 생년생일이 저 날짜 근처이신 분들은 특히, 이 서늘하게 시려 오는 아픔을 담은 기록이, 픽션이 아닌 현실의 호흡으로, 그 요일과 날짜의 돌이킬 수 없는 만남까지가 실감될 것입니다.



소피 칼은, 수필가, 설치 미술가, 사진작가이며, 물론 현재도 활동 중인 예술가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실연의 모진 슬픔을 겪었던 "그날"을 중심으로 삼고, 그 전의 92일, 그리고 그 후의 99일을, 다이어리 형식으로 써 간 책입니다. 192일 중 빠진 날도 있고, 이별의 그 날은 이미지 하나로 처리되어 있으며, 이별 후의 99일은 좀 빠른 템포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 "기록"을 보았을 때, "이런 책도 다 있구나," "책이 아니라 다른 분의 다이어리를 훔쳐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텍스트의 양적 비중이 매우 적고,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사진으로만 채워진 책 같습니다. 말투와 포맷이 지극히 사적(私的)이라,  공개적으로 출판된 책이 아니라 자유롭게 쓰여진 누군가의 일기장을, 별 죄의식 없이 구경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분명히 사진인데도 손으로 그린 화첩을 보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에 이런저런 기법이 많이 가해진 이유가 있겠고, 색감이 꽤 다채로운, 그러면서도 원색적이지는 않은 이유도 있겠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날짜에 자신이 느낀 감정의 색채, 상흔의 입체감을, 잘 어울리는, 잘 대변하는 사진 한 컷(혹은 여러 컷)을 내세워, 몇십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용한 그녀의 솜씨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미지가 독자를 압도하는 책이지만(확실히 이런 예를 보면, 사진은 아무나 찍는 게 아닙니다), 텍스트 역시 평범한 심상이 아닙니다. 일본의 어느 곳, 중국의 어느 곳(아직 1980년대 중반인데도요),인도의 어느 곳들을 들렀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았다 같은, 일상의 직서만 남겼다고 생각되는 페이지에서도, 그녀의 남다른 느낌, 깊은 감상이 짙게 배어납니다. 절제된 스타일의 모더니즘 산문시(詩)를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이별을 겪기 전- 정확하게는 "그"가 약속한 장소, 시각에 나타나지 않고, 호텔 프런트를 통해 전달된 전보로, 비루하고 간접적으로 "현장에의 반(半) 고의적 부재"를 알려 온 그날, 소피(가끔 "안나"로도 둘러서 일컬어지는)가 거의 인생의 분기점으로 지각할 만한 그날로부터, 자신도 모른 채 D-Day를 슬금슬금 맞이하고 있던 그 시간들의 태평스러움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태평스럽다고는 하나, 여인 특유의 예리한 직감으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방향에서 이 타격과 이 붕괴점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음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선명하게 직관하지 못했다는 데에 대해, 그녀는 무려 이십여 년 가까이 회한을 가득 품어 오다, 2004년 마침내 책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책은 그 작품을, 10년 가까이 지나서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입니다. 이 쓰라린 아픔의 기억은, 책뿐 아니라 사진전, 그리고 행위예술로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책은 마치, 복수 여권에 visa 스탬프가 소인(消印)으로 찍혀 나가듯, 파국을 향해 속절없이 지워져 나가는 날들, 날들이, D-Day를 향해 속절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정말로 텍스트와 사진 위에 -인쇄이지만- 빨간 스탬프가 찍혀 있고, 이 빨간 색은 책의 옆면 전체에 코팅된 붉은 색과 손 잡듯 이어지며 여러 느낌을 전달합니다). D-Day는 말 그대로의 뜻일 수도 있고, 여기서는 douleur의 d를 특별히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열차편으로 모스크바와 시베리아를 경유, 베이징을 지나 뉴델리까지 왔습니다. 지구 거죽 둘레 1/4에 가까운 거리를 육로로 거쳤습니다. 막상 도달해 보니, "그"는 무성의한 전보 한 장을 보내왔을 뿐입니다. 여인이라면 -그녀와 같은 섬세한 타입이 아니라도- 이 엽기적이고 악랄한(의도는 아니었다 해도) "바라맞힘"에 대해, 일생을 두고 치를 떨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쓰라린 체험, 감정상의 격동을 속으로 숨겨둬야 한다고 일단 여기는 건 지구 어디서나 여자에게 공통인 심리일까요. 소피 칼의 이런 절절한 표백과 공포는, 우선 선행하는, 선행하였던, 수치심, 망설임, 자기 보호 본능에서 유래한 바쁜 심리의 가닥들이 가슴 속에 무수히 스쳐갔음을 (역설적이게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안에 다른 시점 다른 맥락의 텍스트, 로그도 실려 있습니다. p76~79에는 에르베 기베르, 당시 르몽드紙 소속 기자로서 그녀 소피 칼을 인터뷰했던 이가, 유력지에다 그렇게 큰 비중으로 정성들여 소개한 기사를 실어 주고도, 본인 사진 원본을 제때 돌려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소동을 다 부린 일에 대해, 기베르의 시점으로 적은 기록 일부가 발췌되어 있습니다. 이런 변칙 편집을 통해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사정을 객관화하여 전달도 하고, 아마도 먼저 세상에 알려졌을 그 사건의 "기베르 버전"에 대해 해명과 (어쩌면) 사과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역주를 통해 기베르의 자전 소설에서 pp. 122~125를 인용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나도 끔찍한 실연의 악몽은 여인의 영혼 한 구석을 점유한 채 쉬이 놔 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을 더욱 몸서리치게 하는 건, 그 실연이 전혀 예기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엄습했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는, 지독한 감상과 자기 연민으로 텍스트와 화면이 채워져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은근한 유머와 의연한 태도, 혹은 여태 살면서 소피 자신이 남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도 회고하는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감성과 회고가, 겉으로만 봐서는 건조한 일상을 기록한 일기처럼 겉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게 특이합니다. 담담한 기록 속에, 여백, 그리고 (느닷 단절된) 맥락이, 이 여인의 아픔과 당혹을, 구구절절한 말의 연속보다 더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D-Day 당일의 페이지는, 호텔 객실의 전화를 찍은 사진(수채화 같습니다. 왜 제가 묵는 호텔 방은 이런 색감이 안 피어나죠?)와, "이런이런 전보가 왔다."는 진술뿐입니다. 자제된 언어 속에, 천 가닥 심회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행위예술로까지 승화되어 타인과 공유하는, 버려진, 버려졌던 어느 여인의 아픔은, 개인의 마음풀이를 넘어 불특정 다수에게 공공 백신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인이 아닌 독자에게도, 여인들의 상처와 그 마음 가는 길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서평에 사진을 더 많이 담아야 하는데, 잘 나온 사진 찍으려고 책을 넓게 벌릴 엄두가 안 나는 애서가라서 요 정도만 업로드함을 양해해 주세요. 온-오프라인에서 래핑되어 유통되는 게 보통인데, 책을 처음 받아 들고 비닐을 뜯는 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