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 파편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7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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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은 본래 뤼팽이 등장하지 않은 장편입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독자라도 이 작품을 읽어 가다 보면, 뤼팽이 괜히 끼어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올 것입니다. 처음 발표시에는 없었다가, 5, 6년 후 개작하면서 처남에게 지난 일을 폴이 이야기하는 장면에 "뤼팽의 도움"을 끼워 넣었다고 합니다. 흔히 이를 두고 뤼팽과 르블랑을 폄하하는 근거로 쓰기도 하는데, 이야기가 재미있고 (통속적으로) 감동적이므로 독자들이 그런 외부 사정에 구애받을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랬든 말았든 간에, 이 장편은 우수합니다. 오히려, 용감하고 두뇌 회전도 빠른 편이긴 하나 사태의 입체적 재구성을 위한 상상력은 부족한 듯 보이는 주인공 폴이, 그런 내력을 자기 힘으로 다 알아내었다면  그게 더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뤼팽은 우리가 공인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므로, 마구 끼어든다 해도 그게 다 용서가 됩니다.

 

이 작품은 충격적인 게,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그 양반"이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자리에 떡하니 (미복 차림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뤼팽이 보고 싶어서 국경을 (또) 넘기라도 한 걸까요? 여튼 상식으론 "그분"이 나타났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사건이라, 어린 폴은 그 끔찍한 일을 겪고도 주위에서 믿음을 얻지 못한 채 방치됩니다. 인성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는 비극을 체험하고도, 용케 건전한 판단력과 인성을 유지하며 자라난 폴은, 어느 여인-지체도 높고 용모 또한 아름다운-과 운명적인 사랑에 (르블랑의 다른 모든 작품에서처럼)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어머니(즉, 죽었다고 알려진 자신의 장모)가 바로 자신의 부친을 죽이고, 같은 현장 같은 시각에 자신에게까지 위해를 가한 그 여인과 똑같은 용모를 하고 있음이 어느 초상화에서 확인되었으니... 여기까지는 통속소설의 전형적인 갈등 확대 패턴을 밟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이 터집니다. 대전 초기에는 프랑스가 수세에 몰렸으나, 양면 전선의 부담을 독일이 감당하지 못한 채 서서히 위기에 몰리기 시작하고, 이 소설은 그 변곡점적 전황에서 주인공 폴을 중심으로 벌어진 개인적, 국가적, 역사적 미스테리와 모험담이 르블랑 특유의 솜씨로 실제 역사와 교묘한 교차를 이루면서 펼쳐집니다. 이 소설이 집필될 때만 해도 아직 전쟁의 승패 향방이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물량 면에서 우위에 있던 연합국 측의 승기가 그나마 더 뚜렷했다고들 합니다. 르블랑 역시 다분히 낙관적 전망 위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로 나오는 콘라트 왕자는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후사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미인을 낳는 문화권이 더 우위에 선다는 오랜 통속적 믿음을 르블랑은 이 소설 안에서도 여러 번 확인하고 있는데요. 제국의 귀한 신분인 콘라트가 일개 귀족 부인에게 반해서 첩으로 데리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는 모습, 결국 부황과 국가에 엄청난 폐를 끼치는 결과 등이, 적국을 제대로 비하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잘 드러냅니다. 이 소설 종반에는 "...독일인들이란 우리가 전쟁으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문명을 가졌군!'이란 폴의 대사가 나와, 웬일로 바른말(...)을 하나 싶었는데 더 뒤로 가 보면 술에 취한 독일 병사들을 가리키면서 "역시 독일 문명이란...!"하고 비꼬는 게 나오죠. 그냥 반어적 조롱이 그 의도였습니다.

 

실제로 1차 대전 중 파리가 함락된 적은 없습니다. 소설에서 두 번 이 언급이 나오는데,  픽션화의 일부이거나 르블랑의 착각인 것 같습니다. 폴은 전쟁의 그 급박한 와중에서 유효한 작전을 세우고 이를 과단성 있게 실행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대단한 정신적 자질을 보유한 청년인데, 어째서 그런, 근거도 부족한 최악의 시나리오(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한)에 집착하여,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고(덕분에 조국 프랑스는 그의 활약으로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만), 장인과 그 결정적 순간에 싸움까지 벌이는 건지.... 콘라트 왕자를 납치한 건 물론 개인 자격으로 벌인 행동이지만, 개인적 협상을 통해 전황 전체를 좌우할 적국 요인을 풀어 준 건 이적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20인의 포로 명단을 만들어 줄 것을 장군에게 요청한 거죠. 만약의 경우 사면을 받기 위한 카드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몇 수 앞을 내다 보고 플롯을 짠 르블랑의 능력을 칭찬해 줘야 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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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마개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5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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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정체가 작품 처음부터 뚜렷이 제시됩니다. 독자가 신경 써야 할 건 그래서 이 악당이 자신의 힘 그 원천으로 삼는, 우연히 제 손에 넣었댜 할 그 "문서"를 어디에 숨겨 놓았나 하는 점, 그리고 이 무서운 악당과 뤼팽의 승부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후자에 대해선, "어차피 뤼팽이 이길 텐데 그게 뭐가 궁금한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텐데, 르블랑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결과만 제외하고 본다면(응?) 그게 그리 또 뻔하게 돌아가지만은 않습니다.

 

악당과의 본 승부 외에, 파생적으로 뤼팽은 자기 부하 둘을 사형 집행으로부터 구해 내는 미션까지 떠안았습니다. 이 점이 평범한(common) 갱단 두목과 뤼팽이 차별화되는 점인데요. 일단 뤼팽은 1) 둘 다 모두 자기 부하라서(이 시리즈는 유독 "수하"라는 표현을 자주 쓰더군요), 이들을 구해 내어야 대외적으로 자기 위신이 살고(이기적인 동기이긴 하나, 본디 폭력조직 두목이 이런 데까지 신경 쓸 정신적 사치를 못 부리죠), 2) 둘 중의 하나는 "죄가 없음"을 알기에 정의의 실현 차원에서 살려 내어야만 하며, 3) 특히 그 하나는 지금 뤼팽이 각별히 끌리는 여성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더 구해내어야 할 이유가 강해지고, 4) 얘들까지 완전히(정 안 되면 둘 중 하나만이라도) 도로 수중에 넣어야 악당과의 승부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짜 동기는 위의 1)~4) 뭐 다 필요 없고, 5) 오로지 독자 앞에서 잘난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 걸 보면 미국에서 조금 뒤의 시기에 출현한 하드보일드 장르가 얼마나 반(反) 낭만주의 기조를 띠고 있는지, 이런 뤼팽 류에 대한 철저한 안티테제로서 출범하지나 않았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이 악당은 작품 안에서 형상화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뤼팽과 전지적 화자가 내리는 끊임 없는 평가를 통해 "역대 최고의 악당"으로 명시적 위상을 차지합니다. <813>에 나온 알텐하임이 1) 출신 성분 더 좋고, 2) 납치 등 큰 위험에도 안 빠지는 등뭔가 수완이 더 좋아보이고(조직도 거느림), 3) 외모 더 괜찮고 4) 나이 젊고 5) 머리 뿐 아니라 완력도 제법 쓸 줄 안다는 점 등에서 이 <수정마개>의 악당 도브레크보다 더 나아 보이는데.... 뤼팽의 말에 의하면 알텐하임은 "멍청하고, 두는 수가 뻔하고, 뭔 짓을 해도 자신에게 상대가 안 되는" 하수에 불과합니다. 대신 1) 밑바닥 출신이고, 2) 자칫하다 고문당해 죽을 뻔했고, 원맨 조직으로만 움직이는데다 동료들에게 왕따 신세이며 3) 얼굴에 개X XX으며(스포일러) 4) 대놓고 늙었고 5) 늙어서 힘 못 쓴다는 점에서 영...... 제가 어려서 읽은 책에는 삽화에다 이 사람을 외알 안경, 멋진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그려 놔서 그 이미지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본문의 (더 정통성 있는)묘사에 의하면 "머리 숱이 거의 없고, 유인원 같은 야만적 모습"이라고 하는군요.

 

어려서 읽은 책 중, 그저 도둑놈, 강도, 이런 밑바닥 직종(?) 아닌, 버젓한 고위직인 국회의원 신분으로 악역을 맡은 게 이 도브레크가 최초 캐릭터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원칙에 의해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저는 가니마르 등이 등장하는 단편보다 이 장편을 먼저 읽었는데, 따라서 개인적으로 제가 읽은 최초의 뤼팽 등장작이 바로 이 소설입니다. 작품 후반, 공개처형장 멀리서 날아오는 뤼팽의 탄환에, "감사해요 두목(이 코너스톤 판에는 "대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두대에서 목을 안 날리고 대장 손에 죽게 해 줘서요."라는 대사가, 어린 마음에는 너무도 진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patron이라는 말이, 보슈레이와 질베르에게서 나올 땐 "대장"으로 옮겨졌고, 아실이 말할 때는 "주인님"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보슈레이와 질베르 역시 여태 못 보던, 구체적인 얼굴과 성격을 띤 최초의 부하 캐릭터인데요. 저는 마치 예수의 십자가 양 옆에 묶여 죽어가던 두 도둑, 사형수들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둑이라는 직업도 같고(?), 둘 다 사형수고, 한 명은 구원을 받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운명도 같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뤼팽이 상당한 능욕을 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렇게 뤼팽을 시종일관 곤경에 몰아넣고, 뤼팽이 두는 수 거의 모두를 사전에 읽어 내어 손을 쓴다는 점에서 도브레크가 여태 없던 놀라운 적수이긴 합니다. 그러나 1) 처음부터 유리한 패를 쥐고 있었고, 2) 구체적으로 큰 그림을 그려가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행보를 훼방하는 잔머리에만 능하다는 점에서 그리 스케일 있는 악당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이에 비하면 <813>의 알텐하임은 국가 규모의 사기극을 (따로따로)구상한 3인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상력도 풍부하죠. 상상력에서 뤼팽과 맞먹기가 어디 쉽습니까. 상성이 잘 맞는다, 서로 유독 상극인 관계가 따로 있듯, 도브레크는 뤼팽에 특화하여 솜씨를 잘 발휘하는 예외적 케이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장 신경 썼어야 할 변수는 뤼팽이라기보다 자신이 협박대상으로 삼은 그 거물들 중 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떤 행보에 나서는 경우였습니다. 알뷔펙스 후작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래서 이 작품에 상당한 리얼리티로 기여합니다. 이 <수정마개>는 그래서, 종래의 판타지에서 벗어나 현실감 있는 활극성이 부각된, 전환점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려서 읽은 판본에선, 이 도브레크가 지닌 "명단"이, "연판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프랑스어 원문을 찾아 보니 그저 liste더군요. 이게 왜냐하면 일어판 대부분이 이 "명단"을 "연판장(連版狀)"으로, 의역보다는 일종의 "각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판장은 일어이기만 한 건 아니고,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입니다(물론 강점기 이후에 이식된 어휘일 가능성이 크지만). 여기서 版이라는 형태소는, 우리말이나 중국어에서나 "인쇄"의 뜻으로 쓰이지, 개인 도장을 찍는 경우에 저 말을 사용하지 않죠. 그런 건 오직 일본어에서의 쓰임새 뿐입니다. 개인들이 도장을 이어서(連) 찍었으니(版), 의사와 행동을 통일시키겠다는 대단한 맹세의 증거서류가 이 연판장입니다. 이 정도 서류가 남아 있으면, 꼼짝없이 유죄 증거로 기능하며, 정치생명이 끝장나는 건 물론 한 개인으로서도 재기가 불가능할 만한 신세로 떨어질 것입니다, 과거 김영삼이 청년 국회의원 시절, 자유당 소속 동료들과 함께 사사오입 개헌에 찬의를 표시할 때 이 연판장 형식을 써서, 한때 정치 생명에 문제가 온 적도 있었죠. 이 건은 물론 범죄의 정도에까지 이르진 않습니다만. .

 

그런데... 소설에서 과연 그 문서가 "연판장" 수준에까지 가는 증거인가요? 그저 그 문제의 회사(실제 19세기말에 있었던 파나마 스캔들을 소재로 했다고 누구나 다 지적합니다)의 "사주"가, 회사 공인 용지에다 이름을 죽 적고 자기 서명을 했다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주 개인의 (죽기 전) 진술일 뿐, 아무 결정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르블랑도 이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뤼팽의 입을 빌려 "그 문서가 그리 큰 중요성을 가지나요?"라고 의문을 표시하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 클라리스의 말은, "그것 말고도 다른 정황 증거-편지라든가-들이 있어서, 다 합치면 도무지 발뺌 못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저 명단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설명이랍시고 늘어놓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뗀, 어차피 존재가 구린 도브레크가 무슨 폭로를 하든 내버려 두고, 그 문서의 진정성을 다투든지 해서 법률 공방으로 가는 게 훨씬 수월한 대응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일단 명단을 까고 나면, 도브레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구린 인물이니만치 캐면 뭐가 나와도 나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 협상을 다시 하든지, 아니면 물타기나 맞불을 놓든지 하는 게 훨씬 낫죠.

 

만약에 일어판의 "각색"처럼 그게 연판장이라면, 그러나 이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 그대로 문서 한 장으로 27인을 "보낼" 수 있는 거죠. 설사 이런 경우라 해도 서명이 위조되었다 문서 자체가 가짜다 등등 별의별 디펜스가 다 나올 수 있는데, 고작 문서 하나 때문에 국가 전체가 존립의 위기에 놓였다는 건 큰 믿음이 안 갑니다. 이런 설정만큼이나 도브레크라는 악당의 위험성 또한 과장된 바 없지 않습니다. 여튼 이 모든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뤼팽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멋진 엎치락뒤치락 활극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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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스캔들 - 은밀하고 달콤 살벌한 집의 역사
루시 워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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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은 우리 존재의 은밀하고 아늑하고 자랑스러우며 소름끼치게 하는 기억과 자아의 외-내면을 모두 담은 곳입니다. 집은 "나" 뿐 아니라 나와 가장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가까운 타인들(가족이라는 이름의)과 감정, 추억을 형성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집은 사적(私的)인 흔적일 뿐 아니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나 이상의 거대한 자아(공동체, 민족 등)가 내게 소통을 꾀한 사적(史的) 자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은, 그 거주한 개인의 내력을 들출 수 있는 유력한 증거집합일 뿐 아니라, 역사를 추적하는 최초 출발점으로 쓸모있게 기능하는 좌표입니다.

이 책은 그런 "집"의 생활사, 발전사를 재미있게 요약, 혹은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또, 이 "집"이 살아온 궤적과, 문명사(대체로 동시대인이 공감하는 스토리의)이 서로 교차한 지점을 훑음으로써, 세계사 전체에 대한 회고와 조망을 시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집"이 어떠어떠한 경로로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게 되었으며, 거대한 역사가 결국 나라는 작은 존재에 미치고 간 영향을, "집"이라는 공적(公的)이면서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프레임 삼아 추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입니다. 읽기에 쉬우면서도 그 담고 있는 깊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을 자랑합니다. 프랑스어권 저자들에 의해서는 이런 시도가 종종 행해졌으나, 대개 지나친 형이상학, 주관적 요설로 빠졌다는 게 큰 아쉬움이었습니다. 이 책은 영국 학자답게, 현학적이지 않고 실용적, 일상적 용어로 "당신들의 집, 나의 집"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집"이라는 미시사와, 정치적 이벤트, 경제적 격변을 두루 포괄할 거시사, 그리고 평범한 독자의 심리까지 넉넉히, 오밀조밀히 꿰고 있어야 이런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양인들이 흔히 타 문명권에 대해 갖는 오만과 우월감의 근거가, 청결한 신체 유지를 위해 개인 목욕 시설을 집에 일찍부터 들여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만 해도, 현대식 주택에 샤워 시설, 터브가 갖춰진 역사가 극히 짧고, 별도의 설비를 따로 애써 구축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닭장집에 불과한" 저소득층 거주의 상징이라 해야 할 아파트가 기이하게도 대중의 선망이 되었다는 게 이를 반증합니다. 그러나 최근 서양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여러 대중서들에서 일부를 접할 수 있었듯,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이 오물에 의복이 더럽혀지지 않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게 바로 저들의 생활사이며,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그토록 많은 전염병이 창궐했던 게(그뿐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인구가 희생되었는지요), 저들 스스로 부끄러이 고백하고 있는 지난 역사입니다. 이 책은 "목욕의 몰락"이라는 제목 하에 이 역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목욕, 아니 샤워라고 해도, 구석구석 씻는 버릇을 들이는 게 세련된 사회인, 부지런한 경제인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식입니다. 그들이 구어에서 흔히 쓰는 말로 "귀 뒤까지 싹싹 씻는" 같은 말이 이를 잘 드러내죠. 그러나 각종 애널에서 드러나는 진상의 기록들은, 지난 역사에서 그들이 얼마나 더럽게 일상을 영위했는지 잘 폭로하고 있습니다. 너무 깨끗하게 씻는 습관(이라고 해 봐야 우리가 현재 평균적으로 시도하는 정도)은 터부시되었고, 심지어 종교적 우려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목욕은 대체로 공공 장소에서 이뤄졌는데, 옷을 벗는다는 그 과정에 불순하게 얽힌 채 매매춘의 편한 집결지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욕하러 간다는 말은 곧 "추잡하고 떳떳지 못한 재미 좀 보러 간다"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아마 미시사보다는 본격 역사(부당한 표현입니다만)에만 관심이 있음을 자부(근거 없는 허영입니다만)하는 독자들도, 이 책의 12장 "왕과의 동침"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흥미를 감출 수 없을 것 같네요. 역사서를 읽다 보면 자주도 접하는 게, 해산하는 왕비의 모습을 "증인"으로 지켜 보기 위해 그 개인적 공간에 버젓이 입실해 있는 늙은 중신들의 모습입니다. 요즘처럼 DNA 검사를 자유롭게 행할 수 없던 시절,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사항과 권위는, 유력한 이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이 토픽은 2장 "출생"에서도 다른 각도로 조명됩니다). 왕과 왕후의 침실에, 그런 드문 이벤트가 아니라도 드나들 수 있는 위치는, 바로 그 사람의 권력과 위상을 드러내는 최우선 표징이었습니다. 그 점유자의 가장 가식없고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침실, 그것이 최고 권력자의 소유일 때 역사는 어떤 방법으로 거칠거나 유약한 면모를 우리 현대에게 속삭이거나 목청 높여 폭로하고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럽게 읽어낸 부분이었습니다.

성(性)에 대한 탐구는 제법 여러 군데에서 이뤄지는데, 7장은 아예 제목부터가 "성"입니다. 9장은 (성의) 비정상적 패턴과 자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은 (꼭 성적인 것에 한하지 않고 예컨대 수유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지나) 유방, 가슴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과 평가이며, 4장은 우리의 치부 중 가장 은밀한 곳을 감싸는 "속바지" 이야기입니다. 24장은 "월경"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집 자체"와 무슨 상관인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은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하십시오. 에두아르트 푹스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접한 저인데도, 이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남다른 덕인지 정말 재미있고 "신선하게" 읽혔습니다. 아마도 "성"을 정면에서 다루기보다, 짐승이 아닌 이상 오픈된 공간에서 성을 향유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진 건조물, 그 중에서도 "나의 배타적 공간"이라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욕의 해소를 시도하는 우리 인간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저자의 안목이 탁월했다는 바로 그 이유가 작용해서 아닐까 생각합니다.

집은 꼭 무슨 욕구를 푸는 공간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활력의 재충전을 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 안에서, 어떤 "자세"를 반드시 취하며 지냅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 "꼿꼿한 자세"와 "편안한 자세"를 별개의 장으로 설정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거실의 역사>라는 상위 단위로 묶여서 제시됩니다. 이어지는 부분은 <부엌의 역사>인데, 익히 예상할 수 있듯 요리 과정과 그  뒤처리에 대한 갖가지 상상할 수 있는 상황과 촌극이 거의 다 다뤄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위 "먹방"을 보며 "음식 포르노"라는 극단적 평가를 하기도 하던데, "食"과 "性"이 결코 동일 시간에 양립할 수는 없지만(그런 분이 있을까요?), 동일 공간에서 병존하는 건 거의 당연한 사리라는 점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예전 이야기만 다루는 게 아닙니다. 집은 화석이 아니라, 현재상과 현실태에 대한 생생한 연속체이므로, 이 책은 당연히 20세기의 여러 생활사를 커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부터가 집을 의식(意識)의 확장으로 삼는 묘한 버릇이 있으므로, 집을 모르고 인간을 알 수 없고, 인간을 알면 반드시 그 집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 그리고 "나"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동화를 들려 주듯 가르쳐 준 이 책은, 1회독 후에도 한동안은 제 책상에서 곁에 머물 것 같습니다. 그림과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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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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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Huit Cent Treize>이므로, 우리말로 읽을 때는 "팔백 십 삼"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팔일삼"이라고 발음하면, 여튼 뭔가 좀 더 내용 누설을 하는 셈이 되겠는데,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고지식하게 십진법대로 읽으면, 진상이 좀 더 감춰지는 느낌도 듭니다. 어차피 독자가 풀 수 없기로는 매한가지고, 르블랑도 이걸 의식했는지 "만약 답을 알고 나면, 세상에 그런 시시한 속임수를 쓰냐며 비난이 폭주할 것"이란 말을, 다른 맥락 속에 슬쩍 끼워 넣는 방법으로 부담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미스테리 작가라면 멋진 암호물 하나 정도는 세상에 척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르블랑은 심혈을 기울여 이 작품을 썼겠으나, 냉정히 말해 이 작품 역시 <기암성>, 혹은 전작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암호 트릭 자체는 볼 것이 없습니다. 익히 보던 "또 그 장치"가 그대로 나옵니다.

 

르블랑의 최대 장기는 역시, 휘몰아치듯 독자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박진감에 있습니다. 개연성의 부족을 탓할 수는 있으나 우연의 지나친 개입은 그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데, 뤼팽의 존재 자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이죠. 어려서 제가 읽었을 때도 어렴풋이나마 이야기가 중간에서 한 번 툭 끊어지더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데(약간 무서운 삽화와 함께), 지금 읽어도 르노르망 국장의 안타까운 실종과 그 "뒤처리"는 다소 무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연작을 읽는 독자는 전적으로 뤼팽의 팬이 되어 그가 모는 쾌속의 사두마차에 합승하는 것이므로,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암성> 뿐 아니라 뤼팽 시리즈 중 장편은 거의 모두 (좋게 말해서) 엄청나게 큰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이 작품도, 상테 교도소에 다시 수감된 뤼팽은, 탈옥을 이룰 마땅한 방도가 없어, 거의 공매도 수준의 언플을 세계구급으로 펼치는데, 낚시에 걸려 든 사람은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후예"입니다. "카이사르의 후예"라는 표현에 민감할 건 없습니다. 이로부터 200여년 전, 루이 15세는 합스부르크 가와 역사적인 국혼을 맺으며(이를 "동맹의 반전", 혹은 외교 혁명이라 일컬었죠), "내가 시저의 딸을 며느리로 맞다니.,.."라고 그 감회를 표현한 바 있습니다. 황제 칭호를 쓰는 군주에게 으레 베풀어주는 수식어입니다. 민감한 독자는 이 부분을 읽어 가면서 뤼팽이 자꾸 좀처럼 내비치지 않던 긴장감을 내색하며, 기적, 기적을 되뇌는게 무슨 이유인가 궁금해할 만합니다. 뤼팽(르블랑)이 수다스럽기는 해도, 이런 강도 높은 표현을 여태 잘 쓰지 않았기 때문이죠.

 

과거 판본이나 성귀수 선생님 책엔 그 군주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OOO가 그대로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는 그 말을 쓰지 않고 그저 일반명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스포일러라서 이 정도밖에 못 적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독자라면 "그"가 느닷 OO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헉!"하고 몸에 전율이 일어야 합니다(저는 이 서평을 쓰는 순간에도 다시 소름이 돋네요). 그런데 이런 효과는, OOO라고 원어 그대로를 쓰면 몇 배로 증폭되던데, 그냥 저런 평범한 말을 써서 그게 좀 아쉬웠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대개는 제목을 그저 <813>이라고 하지 않고, "~의 수수께끼" 등등 해서 뒤에 뭘 붙여도 붙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원어대로 그냥 <813>이라고만 하고 마는데, 다른 D출판사 책도 이런 태도입니다.

 

여기서 모 재상의 제자였으며, 등극 후에는 안면을 바꾸고 그 재상을 숙청해 버린 어느 분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태도와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말로 살짝 띄워주다가, 문제의 현장에 도착하자 "예의는 다 걷어버리고 아랫사람 막대하듯하는" 본색이 드러났다는 둥 좀 민망한 폄하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외국의 이 정도 고위 인사(?)를 등장시키는 것도 큰 결례인데(이렇게 막나가는 사람이니 고작 이웃 섬나라의 캐릭터를 두고 개 취급한 정도야 놀랄 것도 없죠), 그 묘사조차 무엄한 구석이 많으니,... 허나 이후의 작품에서 이분에 대고 "일국의 지존치고는 그에 걸맞는 품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같은 막말까지 한 것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이 당시 불-독 양국의 적대감정이 극단에 치달은 걸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긴 하지만(모로코 인시던트 같은 건 본문에 그대로 언급이 됩니다).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 소설은 프랑스의 국무총리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당적이 급진당 운운하는 걸로 보아, 그 무렵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가 그 모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물론 밋밋한 캐릭터라 모델 운운하는 게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만. 뤼팽이 대체 무슨 이유로 개인적 한까지 저리 절절히 품을까 싶은 알사스-로렌 문제에 대해, 이 클레망소가 이로부터 4년 뒤에 발발하고 8년 뒤에 승전으로 마무리된 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프랑스측 전권 대표로 참석하여 당당히 재병합을 이뤄낸 점을 생각하면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죠. "급진당"은 당명이 어떤 착각을 부르기 쉽지만, 그렇게 과격한 무리들이 이룬 정파는 아닙니다. 그냥 중도좌파보다 더 색깔이 선명한 팩션 정도로 생각하면 되고, 아직도 이 이름과 법통을 이은 정당이 현존합니다.

 

뤼팽은 여러 장면에서 우스운 대사와 모습을 많이 드러내죠. 2권 마지막에 보면 구멍이 뚫린 배 안에서, 멀리 포위해 오는 경찰들을 향해 "그 사격 솜씨로 어디 나를 맞추겠어?"라며 조롱하다가, 정작 자신은 별 겨냥도 하지 않고 멋지게 명중시켜 버리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경탄과 폭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 장편에서도 루돌프 케셀바흐의 권총에 미리 손을 써 놓고는, "선생의 총에는 아마 공기와 적막이 장전되어 있나 보죠?"라고 그를 놀리는 대사가 너무도 우스웠습니다. "나는 세계의 그 어떤 부자보다 부유하니, 그자의 재산이 이미 내 재산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과연 월드클라스 도둑놈 아니면 칠 수 없는 멋진 허풍이요 개드립입니다. 그 뒤에 이 앞 어구와 병치를 이루는 다른 말도 덧붙이는데, 이 부분에서는 헛소리지 싶었다가도, 나중에 가서는 일종의 복선 노릇을 하는 걸로도 해석이 되어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네요.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에 대해 제법 은근한 암시가 (르블랑의 타 작품에 비해) 군데군데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크게 칭찬할 건 못 되고, 그저 다른 작품에 비해선 독자에게 친절한 장난을 좀 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이 작품은 범인이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한번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정체가 머리에서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전에 읽은 후의 다시 만남이라 해도, 마치 간격 없는 재독 삼독의 경우처럼, 소설의 복기가 매우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특징이 있죠. 아마 처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제법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르노르망이 지하에 고립되어 익사 직전의 위기에 몰릴 무렵, "너무 고통스러워 원인이 뭘까 생각해 봤더니 배가 고팠던 것이었다"는 (과연 노인네 입에서나 나올 만한 대사를 담은) 문장에선 실소가 폭소로 바뀌었는데, 결국 이것도 일종의 서술 트릭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다른 많은 독자들처럼) 이 <813>을 뤼팽 등장작 중 최고로 꼽습니다. 여기 나오는 주느비에브는 제가 독서 이력 중 처음으로 만난 그 이름의 캐릭터이고, 이 이름이 보통 연상하는 바 그대로 한없이 청순하고 아름다우며 선량한 여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나나 무스쿠리가 부른 샹송 <pardonne moi>에도 이 여성형 이름 Genevieve가 나오는 걸로 착각했었는데, 가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Je viens 라 하고 있더군요.... 여튼, 처음에 뤼팽이 그 가난한 시인에게 왜 그리 잔혹하게 구나 싶었는데(사실 그런 게으르고 나약한 자는 당해도 싸죠), 알고보니 뤼팽은 OO감을 고르고 있었으니.... 물론 신분 사기극을 벌이기 위한 괴뢰를 찾고 있던 것이긴 하나(이 역시 독자로선 처음에 이해가 안 가죠. 구태여 가짜 상속인을 내세울 필요는 없을 텐데... 허나 뤼팽은 차원이 다른, 국가 규모의 사기를 이미 이때부터 칠 요량이었다는...), 좀 심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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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한때는 "음모론"이 숨겨진 정의를 대변한다는 믿음도 꽤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이 (당연히 실존 인물인) 짐 개리슨과 협력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배후에 당대 기득권층이 총체적으로 합작,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영화 흥행의 성공은 물론 스톤이란 인물 자신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인문, 사회, 심지어 실정법상 중대한 파장을 미국 전체에 몰고 왔습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스톤 하면 그저 음모론자"라는 편한 범주화, 나아가 주장 제기 전체에 대한 피로감이 더 지배적 반응으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음모론에 대해 부정적인 전제를 깔고, 음모론이 왜 사회에서 지지를 얻는가, 음모론이 어떤 경로로 구체적 실체를 형성하는가, 음모론으로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음모론의 불건강한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가, 음모론이 쉽사리 침투하는 계층이나 유형의 의식 구조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등의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원 제목도 <Conspiracy Theories and Other Dangerous Ideas>이지만, 사실 이 책이 취급하는 논의는 "음모론"의 범주를 제법 벗어나,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 국내, 또는 국제정치학적 현상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1장은 총괄 서론입니다. 왜 이 책이 쓰여졌는가. 음모론은 왜 사회를 불길하게 감싸고 돌며, 그 무익함과 유해함이 드러난 후에도 왜 사멸하지 않고 끊임 없이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깔끔한 조망과 개설을 펼치고 있습니다. 2장부터 8장까지는 (저자의 판단으로) 소모적 논쟁이라 생각되는 몇 가지 토픽에 대한 중립적 틀 안에서의 메타적 분석(이 역시 저자의 견해일 뿐이고,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이 이뤄지거나, 미국 전체를 양분하며 치열한 논쟁(꼭 소모적이라고 할 수 없는)에 대해, 역시 저자가 마련한 프레임을 통해, 감정과 정치적 이견 다툼이 말끔히 제거된 상태에서 바라본, "사실 겉보기보다 대단히 단순한 구조를 지녔던 뜨거운 감자"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9장부터 11장까지는 일종의 "토론 규칙을 마련하기 위한 반성과 제안"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진보주의"라고 명명한 일련의 입장에 대해, "그들은 중도파가 아니"라는 출발점에서 여러 각도의 비판을 시도합니다. 다만 저자의 이런 주장이 반대 팩션으로부터의 공박이라기보다, 논의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메타적 트리밍으로 보입니다(이 역시 그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당신이야말로 중도파가 아니다!"는 반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최소주의와 중간주의에 대한 여러 설명과 정리는, 건전한 시민의식을 지닌 참여자로서 그저 논쟁에서의 승리(나아가, 어떤 숨겨진 정치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공동체에 어떤 형태로든 공동선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접근 방법과 시야에 대해 저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는 바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법학자, 그리고 행동경제학자로서의 이력을 대변하듯, 책은 깔끔하고 논리적인 태도로, 다양한 사회학적, 법학적 개념등을 동원하여 논의를 전개합니다. 저자 고유의 논리만 도구로 쓰이는 책보다는, 이처럼 이미 확립된 타인의 분석틀이나 명제가 (간명하게) 인용되어 핵심을 그때그때 정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법학자들의 저술이나 태도에서 곧잘 보이는 미덕이죠. 법학에서의 주요 방법론 중 하나가 케이스 스터디인데, 이 책 역시 2장부터 8장까지는 논의의 발전적 전개라기보다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 사례에 대입한 결과를 예시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 토픽과 직접 연관은 그리 깊지 않다고도 여겨질 수 있죠.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하자면(이 역시, 저자가 제안한 최소주의 방법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모든 음모론이 다 "음모론"이라는 범주에 묶여 도매금으로 비판받을 것은 아니러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절름발이 인식"이라는 컨셉으로, 개인이 감성적으로 선호하는 어떤 지향에 어긋나는 바가 출현할 때, 인지적 거부의 방식으로 이런 음모론이 생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회에서 음모론이 곧 힘을 잃는 건, 그 음모론이 "다른 상황적 인식의 집합"과 곧 충돌하므로, 인지적 균형을 이루려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 곧 버림을 받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데 어떤 "여타의 인식 집합"이 더 바람직하고 더 열등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랍권에서 "911자작극론"이 더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그 사실 하나만을 놓고, 그들의 인식이 영미권의 그것보다 더 결핍되고 일탈된 성격이라 바로 규정할 수는 업습니다(그럴 가능성이 설사 높긴 하다 해도). 저자의 입장에 아주 충실히 따른다 해도, 이는 역시 미제의 과제로서 겸손하게 확정 진단을 미루는 게 바람직할 뿐입니다. 또, 음모론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주장들에 대해, 역시 개별적 접근으로 그 타당성을 판단하는 게 저자의 입장에서조차 일관된 태도입니다. 최소주의로 접근해도, JFK의 죽음 경위에서는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들이, 보편 논리에 입각한 분석을 통해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책은 재미있고, 상식에 입각한 사고 과정에 의해 전개되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의 명료한 스타일 덕분이지는 모르겠으나 번역 역시 막히는 대목 없이 무난하게 읽혀져 나갑니다. 치열하게 정치적 논쟁이 달아오를 때, 그저 내 생각이 무작정 맞는 건데 상대는 왜 나의 말귀를 못 알아먹는가 하고 분통만 터뜨릴 건 아닙니다. 사실 내 주장만 관철하겠다고, 그저 패거리만 모아 파쟁을 벌이는 사람이라면 논쟁에 참여할 자격도, 애국심이나 공동선을 명분으로 내세울 자격도 없습니다. 어떤 입장이나 세계관을 떠나 이 책이 타당성을 가지는 점은, 나 자신을 메타적 시각에서 냉정히 바라볼 기회를 정중하고 지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바로 그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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