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개의 관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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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쯤 <천둥꽃>이란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 시스템에 편입된 지방인 브레타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신 이상 증세를 앓았던 끔찍한 여성 연쇄 살인마(실존 인물)를 다루고 있었죠. 그 작품 뿐 아니라, 브레타뉴는 켈트 족이 마지막까지 문화적, 종족적 독자성을지키려, 크리스트 교 세력의 동화 노력에 완강히 저항했던 지역이라, 여러 문학 작품에서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역헐로 오랜 동안 소재로 애용되어 왔습니다. 라틴 인, 게르만 인의 눈으로 봤을 때 무지몽매, 미신, 야만의 풍습이 최후까지 남아 있는 암흑의 땅 비슷한 곳으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고, 다른 작품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이 코너스톤 시리즈 제6권에도, 최후까지 까페 왕조가 내리는 귀족 작위를 받지 않고 거부한 토착 가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체로 주류 프랑스인들에게서는 비웃음거리로 여겨지지만, 지금이야 뭐 옛 흔적이 거의 안 느껴질 만큼 변화한 모습이죠.

소수 민족의 강제 동화, 차별 이슈는 예나 지금이나 "핫 포테이토"이겠으며, 정치인들이나 일반 민중들 모두에게 참 난감한 문제입니다. 미지의 대상이다, 이질감이다 하는 막연한 인식, 감정은 타자에게 괴물의 더께를 씌우는 쪽으로 귀착이 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작품에서도 브레타뉴인들은 드루이드 교를 믿니, 흑마술을 쓰니 하는 식으로 왜곡, 사갈시 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하는 대목은, 이 오지에서 각종 괴수, 마법, 초자연적 술책이 횡행하는 걸로 과장되이 묘사하는데, 연의가 판타지 색채를 가장 짙게, 노골적으로 띠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기도 하죠. 그런데 정말 특정 변경 지역이 그런 오묘한 술수를 부릴 줄 안다면, 애써 "왕화(王化)"의 혜택을 베풀 게 아니라, 그대로 양성해서 비밀 병기로 간직하는 편이 나을 텐데요. 농담이 아니라, 이 작품은 "신의 돌(la Pierre-Dieu)"에 대해서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상 사기에 불과하지만 마법 비슷한 기술로 생계를 잇는 세 여인(겉모습으로 보아 영낙없는 마녀들인데, 오랜 전통을 잇느라고 그랬는지 머릿수도 정확히 세 명을 맞추었네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네 여자(이 지방의 반 기독교 정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의 돌에 손을 대었다 화상을 입고 제 손을 도끼로 잘라버린 노인, 손자를 납치하다 손자와 함께 목숨을 잃은(혹은 그렇게 알려진) 귀족 노인,.... 제가 여러 번 지적하는 대로, 뤼팽은 어떤 이미지의 형상화에 상당히 능한 편입니다. 여느 호러물 전문 작가에 못지 않게, 이 장편에서 뤼팽은 끔찍한 이교적(heretic) 심상을 기막히게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미스테리가 좀 약하다 싶어도 다른 훌륭한 장점들에 의해 깔끔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보완이 되고, 독자는 괜히 속물 심리에서 까탈을 떠는 게 아니라면 정직하게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 중에, "뭐만 좀 막혔다 싶으면 비밀 공간, 지하 통로를 등장시켜 난관을 피해간다"는 게 있는데, 부당한 비판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점부터 세련된 문명을 이루고 살아 온 이들이 프랑스인들이라, 그들의 건축물이나 유적은 (픽션이 아닌) 진짜 비밀스럽고 비의적 구조를 지닌 게 많습니다. 르블랑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나라 작가들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으레 지하 통로를 등장시킵니다. 게다가 르블랑의 필치는, 이런 장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3, 4, 5 권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도일 경의 작품과 소략한 문장에서 결코 볼 수 없는 디테일드 묘사가 펼쳐지고, 독자에게는 그 자체로 선물이고 향연입니다. 장르물의 공식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공식만 앙상하게 머리 속에 넣고 자기 만족을 하면 되지, 개별 작품들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르블랑의 진짜 문제는, 악당의 동기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냥 편하게 "정신 이상"으로 몰고 가는 데에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보르스키는 뭐하러 이런 개고생 노가다를 하는 걸까요? 답은 그냥 "미쳐서"입니다. 게다가 이런 설정 배경에는, 비이성적(전쟁 직후라 참작이 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반독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 터라, 더욱 큰 아쉬움을 줍니다. 물론 도일 경도(이분 역시 문학을 문학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중요한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 정도로 경시했다는 공통점이 있죠) 홈즈 시리즈 후기작들에서 애국심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만, 르블랑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전혀  자제하는 모습 없이 "전범국이자 조국의 원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브레타뉴가 그 과거가 어찌되었든, 르블랑의 시대 이미 훨씬 전부터 위대한 조국 프랑스의 본체적(integrative) 구성 요소입니다. 이런 브레타뉴에서, 흑마술과 범죄를 저지르는 악마 역을 토착인(이들은 자랑스러운 프랑스인입니다!)에게 맡길 수는 없죠. 그래서 전혀 엉뚱하게 끌어들인 게 "또 독일놈"인데, 이 책도 그렇고 성귀수 선생님 책도 그렇고 Superboche라는 원어(신조어입니다. boche라는 비칭에 super를 붙인 거죠)를 "슈퍼 독일놈"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만큼 반독 감정이 우려되는 대목들입니다. 이 작품은 그 출간이 1920년에 이뤄졌는데, 작품 완성 시점을 조금 이르게 잡는다 해도 전황이 완전히 연합국 측에 기울거나, 이미 독일 제국이 패망한 후(1918)일 것입니다. 전쟁도 끝나고 했으니 이제 대놓고 독일을 비방하겠다는 르블랑의 비뚤어진(?) 사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비판, 저주 중에는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도 많더군요. p333을 보시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영심과 잔혹, 냉소와 신비주의가 멋들어지게(반어법입니다) 섞여 있다니까! 네놈들은 항상 이루어야 할 임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고작 하는 짓이라곤 약탈과 살인 말고 뭐가 있냐 말이다!"라는 말이 뤼팽의 입에서 나오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맞지 않습니까? 특히 이 작품이 나오고 20년 후에,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떠올려 보십시오. 심지어 이 작품에는 칼자루에 새겨진 만(卍)자 무늬를 언급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 시절이면 히틀러가 맥주홀 폭동을 일으키기 몇 년 전이고, 나치 당이란 얼개를 갖추지도 못했을 때입니다. 진짜 예언은 드루이드 교의 미신적이고 근거도 없는 예언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르블랑이 뤼팽의 입을 빌려 하고 있는 셈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독자는 이 작품에 "핵무기"가 나온다면서 경이를 표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그 정도까진 아니고,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망명하여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퀴리 부인에 의해, 라듐이나 우라늄 등의 속성에 대해서는 르블랑의 시대에도 웬만큼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마침 보르스키가 사칭한 신분이 애꿎게도 "폴란드 귀족"이긴 합니다만). 르블랑의 놀라운 점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천연 상태에서 사람의 손을 데게 할 정도로 순도 높은 광석이 생성될 수 있느냐?"라는, 지극히 타당한 의문을 가정교사 스테판의 입에서 나오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수긍을 못할 수 있으나, "들판에 핀 꽃이야말로 알고 보면 더 놀라운 기적"이란 뤼팽(즉 르블랑)의 설명은, 문제의 호도가 아니라 오히려 근본이치에 대한 심오하고 차분한 설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프리카 가봉의 오클로라는 마을에, 실제로 "천연 핵분열"이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이 있습니다. 여기 클릭해 보십시오.

이 작품에는 8권에서 우리에게 친숙했던 벨발 대위가 잠시, 그 상이용사 친구들은 동반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뤼팽(아니, 르브랑)은 여기서 대단히 우습게 작품 외적 개입을 시도하는데, "분위기가 너무 음산해서 이야기를 좀 재미있게 만들려고, 자고 있는 보르스키를 바로 박살내서 프랑수아를 구하지 않고(켁), 드루이드 교 노사제로 둔갑해서 놈을 좀 갖고 놀았다"는 말까지 합니다. 독자의 재미를 위해(자기 입으로 이러고 있습니다), 아이가 지금 어디서 배를 쫄쫄 굶고 있는 사정은 잠시 뒤로 밀린 겁니다! 도일 경과는 달리, 르블랑은 문학에의 직접 공로로 레종 도뇌르를 수훈한 사람인데... 여튼 그는 대단히 구식이긴 해도, 현란한 말빨과 탁월한 형상력으로, 거진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한국 독자를 이처럼 매혹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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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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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이렇게 슬프며, 막판에 반전까지 마련된 소설을 읽은 게 진짜 행운처럼 느껴지네요.

 

제목만 봤을 때 무슨 통속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쓴 편지, 그 겉봉투에 "내가 죽거든 읽어 봐"라고 쓰여져 있다면, 아내인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겠습니까? 훌륭한 문학 작품은 이처럼, 보편적인 독자가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며, "나라면 어떻게 할까?"의 물음을 작중 인물들과 함께 풀어가게 해 줍니다. 미리 답을 말하자면, 문제의 아내 세실리아는 결국 편지를 열어 봅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세요?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세실리아는 남편 존 폴을 원망합니다. "대체 날 뭘로 봤기에 이런 편지를 써 놓았지? 지옥은 당신 혼자 겪어야지, 왜 이 문제를 내 것으로 만든거야?"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을 저지른 남편도 어리석고, 그 후에 한 행동은 더 어리석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문제도 자기 것으로 오롯이 떠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존 폴이란 남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요.

 

아마 평균적인 한국인에게라면 답은 하나일 것 같습니다. 아내는 그저 함구할 뿐입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어찌되었든 내 가정은 지켜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동서들에게 언제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시어머니(즉 존 폴의 어머니)가 뭔 낌새를 챘는지 그날따라 찾아와서, "가정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을 뭔 생각에서인지 남깁니다. 멍청한 아들이 뭘 감추려 들어도, 어머니는 다 눈치를 채나 봅니다. 세실리아는 존 폴이 자기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는지 궁금해하는데, 자신도 아이 어머니면서 그만한 사정도 짐작을 못할까 싶었습니다. 1등 며느리, 1등 아내, 1등 엄마에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정이 닥치면 이런 빈 구석이 드러나나 봅니다.

 

제목인 <허스번드 시크릿>엔 일단 이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닙니다. 편지에 쓰여진 내용은 누구에게도, 또 어느 공동체에서도 결코 소홀히 다뤄지지 않을 중대한 사건이지만, 소설은 그 밖에도 두 여인이 더 나옵니다. 한 명은 테스, 다른 한 명은 (결국 세실리아 부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걸로 드러나는) 레이첼입니다. 테스는 세실리아와 비슷한 또래이며, 레이첼은 20여년 전 두 여인과 같은 또래이자 같은 학교를 다녔던 딸을 (끔찍한 사고로) 여읜 후, 지금은 손자를 본 할머니입니다. 이 세 여인의 사연이 기묘하게 얽히면서, 독자는 과연 어떤 결말로 이 악연의 실타래가 풀릴지, 혹은 더 꼬일지 가슴을 졸이게 됩니다.

 

세실리아는 남편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미래에 그들에게 닥칠 지 모르는 끔찍한 불행에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세실리아와 비슷한 또래인 테스(토머스 하디의 작품 여주인공과 같습니다)는, 어려서 자매처럼 자라던 사촌(읽어 보니 외사촌이더군요. 서양은 구분을 하지 않죠) 펠리시티("행운"이란 뜻이죠)가, 자기 남편 윌과 바람이 나는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그녀로선 남편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벗(이자 혈육)을 동시에 잃은 건데요. 남편과 사이에 아들까지 있는 그녀로선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끔찍한 운명을 직시하게 됩니다. 10대때 의문의 죽음을 당한 딸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이 두 여인과 비슷한 또래가 될 할머니 레이첼은,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던 아들 롭은, 잘나가는 아내(즉 레이첼의 며느리)의 진로를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예정입니다.

 

이처럼 세 여인은 각각 미래, 현재, 과거의 불행과 상실감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 세 여인의 불안과 고뇌는, 공교롭게도 기독교의 사순 마지막 고난 주간에 "저 문제의 편지" 발견을 계기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교차로의 동일 지점으로 질주합니다. 세 여인의 인생에 있어 이 고난 일주간은 말 그대로 운명의 전환점이 되는 셈인데요..... 결말은 실로 장엄한 화해와 용서, 모든 갈등의 승화로 채워집니다. 읽는 분에 따라 조금 작위적이지 않나 생각도 드실 수 있는데(특히 베를린 장벽의 잦은 언급), 소설의 배경은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부터 가톨릭적 요소와 분위기가 복선처럼 깔리고 있습니다.

 

호주에서 로마 가톨릭은 소수파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호주를 대표할 만한 이런 명작들은 이 종교를 배경색으로 집어 넣는 걸 자주 본다는 게 흥미롭습니다(다른 예로는 칼린 매컬로 여사의 <가시나무새>). 처음에 "부활절인데 왜 가을이라고 하지?" 같은 의문이 들었는데, 계속 읽어가면서야 "아 배경이 호주라서..." 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치정 드라마도 아니요, 범죄 미스테리도 아닌,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의 세심하고 가녀린 심성과 복잡한 감정의 갈래를 어쩌면 이렇게도 잘 표현하고 있는지 그저 놀라웠습니다. 드라마만 장중한 게 아니라,  평균적인 독자의 공감대를 정확히 자극하고, 가식 없는 진솔한 느낌을 절묘히 표현하면서도 천박한 막장 요소는 전무한, 정말 감동적이면서 깨끗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이었네요. 이렇게 세심한 심리를 표현한 문장은, 번역에서 통사 구조가 꼬이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런 구석도 없더군요. 여느 한국 소설보다 더 쉽게 술술 읽혀서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실수는 인간이 저지르나, 용서는 신이 행하는 바"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명언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야무지건 멍청하건, 냉정하건 온화하건 간에 다 한 번씩 싥수를 저지릅니다. 어떤 건 제법 큰 실수이고, 어떤 건 그 자체론 사소한데 나중에 여파가 커집니다. 뜻하지 않은 비극, 혹은 감당 못할 파국을 앞두고, 이 보통 사람들은 더럽고 이기적이며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저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결정적 대목에서, 신이 아니기에 고귀할 수만은 없는 평범한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단들을 다들 내립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첼 할머니는 범인을 용서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던 며느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화해를 시도합니다. 고부 둘 다 점잖은 사람들이라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으나, 사실 지옥과도 같은 냉전을 치르고 있었기에, 너무도 의외의 순간에 뜻밖의 전갈을 받은 며느리는 잠시 감회를 추스르느라 말을 잇지 못합니다. 저는 사실 이 "부수적으로 치러지는 작은 화해"가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큰 일은 큰 일대로, 최종의 심판은 신에 맡긴 채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고, 내가 매조지할 수 있는 작은 일, 진즉에 어루만질 수 있었던 작은 다툼부터 해결하겠다는 레이첼의 결정-사실은 본인도 외로움과 번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건 전화였습니다만-이, 책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게 다인줄 알았더니, 이건 웬걸, 에필로그에선 전지적 화자가 더 엄청난 반전을 예비하고 있더군요. 우리 인간은 먼 곳을 볼 줄 모르고, 자신의 이해만 돌볼 줄 아는 구제 불능의 속물들입니다. 프레임 밖에서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지, 제아무리 현명하고 명철한 이라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자칫 경솔한 겳정과 감정의 폭발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혹시 저 멀리서, 저 높은 곳에서 누가 연민의 정 가득한 눈길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켜 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고 또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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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삼각형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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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p de fleurs, madame, n’en jetez plus!
(꽃이 너무 많아요 부인, 더 이상 던지지 마세요!)

 

 

이 장편은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이 배경입니다. 도입부가 꽤나 충격적인데, 마치  007 시리즈 첫째 편인 "닥터 노"의 인트로를 보는 듯합니다. 전쟁에서 조국을 지키려 싸우다 불구가 되었다고는 하나, 멋쟁이들만 활보하는 파리 시내에서, 한쪽 팔이 없는 사람,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 얼굴 일부가 날아가버린 사람 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으면, 그 모습은 참 그로테스크할 것입니다. 착한 독자인 우리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 만약 한국국적이기라도 하면 "저분들 아니셨으면 우리는...." 같은 경외어린 시선을 갖고 그들을 보았겠지만, 경박한 프랑스인들, 그 중에서도 파리의 아가씨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참에, 어느 미인, 차림새는 수수하나 동작과 실루엣으로 미루어 꽤나 미인일 것 같은 어느 여성이, 괴한들에게 자동차로 납치를 당합니다. 더 놀라운 건, 저 상이군인들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재빠르게 행동에 들어가, 그 여인을 구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전직 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 몸놀림이 성치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기민한 반응이 나오며, 이런 일사불란한 작전을 지휘하는 이는 또 누구일까요? 백주 대로상에서 여인을 납치하려 했던 자들은 그 정체가 또 무엇이며 말이죠. bunch of wonders라 부를 이런 빼어난 테크닉은, 이후 같은 장르의 여러 작품들에서 후배들에 의해 되풀이되겠죠.

 

이런 기이한 장면을 잘도 시각화하는 르블랑의 재주는 이미 앞 작품들에서 여러 번 본 바 있습니다. 6권의 세번째 단편 <그림자...>가 그 좋은 예입니다. 너덜너덜 옷을 기워입은 사람, 그나마 멋 좀 낸 사람, 늙은이, 꼬마, 아가씨,.. 도저히 같은 동아리로 엮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해마다 같은 날, 폐쇄된 어느 부지에 모여 우물을 들여다 보거나, 땅을 헤집거나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날이 저물기 전 한탄을 쏟아내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젊은 여인이 일장 연설을 해댑니다. 사연을 모르면 이보다 더 괴이쩍은 풍경이 없습니다. 르블랑은 이처럼,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이미지들을 모아 극적으로 모자이크하여, 독자들 앞에 이야기의 서두로 척 꺼내어 놓는 기막힌 장기가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파트리스 벨발을 꼽아야겠습니다만, 처음에 단단히 한몫 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코랄리 엄마"가, 1부 이후로는 무대에서 모습이 뜸해지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입니다. 물론 힘 없는 여인의 몸이고, 간악한 악당의 손에 납치되고 감금되느라 그렇긴 합니다만... "엄마"는 물론 누군가의 모친이라는 뜻이 아니라, 젊은 간호사 코랄리를 친근하게 부르는 환자, 병사들로부터의 애칭입니다. 만약 나이 지긋한 간호사라면 mere라고 불렀을 텐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maman이라고 한 겁니다. 코랄리는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 정도인 것 같고, 병사들도 대개 그 또래거나 더 많은 게 보통이죠. 주인공 파트리스는 서른이 넘었지만 그를 maman이라 부르는데, 우리말 "엄마"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이건 성귀수 선생님도 이 표현을 쓰고 있던데, 느낌이 어색해서 좀 다른 대안이 없을지 번역가들이 연구를 좀 했으면 합니다.

 

아무튼 파트리스 벨발은 애국심 강하고 투지와 열정에 불타는 사람입니다. 한쪽 다리를 완전히 잃고 의족을 단 사람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코랄리에게 구애를 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너무 자신감 넘치게 코랄리에게 수다스러울 만큼 들이대는 모습은 약간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코랄리는 알고 보니 유부녀였고, 그 남편이란 자는 나이도 많은 데가 인상이 아주 고약한 자였습니다. 게다가, 그 착한 코랄리는 그 남편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고도 별반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습니다. 파트리스는 이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자 그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동선과 심리를 ㄸ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같은 느낌입니다. 이야기를 이처럼 뒷부분이 자꾸 궁금해져서 페이지를 놓지 못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야말로 정말 경탄스럽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 전개도 물론 재미있습니다. 결국 이 장편도 뤼팽이 나와서 해결해 주는 구조인데요. 재미있는 건 둘째치고, 사실 에사레스란 자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부터 이미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측이 되었습니다. 이 트릭은 전에 한번 나오기도 했고, 뤼팽의 열렬한 팬이라면 대체로 이야기가 어떤 모양으로 흘러가는지 감이 잡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골육상잔이라는 끔찍한 패륜이 절대 작품에서 용납 안 된다는 건 6권의 <배회하는 죽음>에서도 보여진 바 있습니다. 시계의 트릭 역시 처음 보는 속임수는 아닙니다.

 

이 작품의 악당으로는 에사레스라는 터키인이 제시됩니다. 투르크는 1차 대전 당시 동맹국 편을 들었는데요. 책에서 반독 요소는 현저히 줄어든 반면, (아마 프랑스 입장에선 예상치 못했던) 이 동방의 늙은 대국이 취한 선택에, 애국심 넘치는 작가 역시 어지간히 분개한 것 같습니다. 반면 그리스에 대해서는, 시대착오적 낭만주의를 가슴 가득 간직한 르블랑이어서인지, 꽤나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바이런 경 등을 떠올려 보십시오). 소설 중에 나오는 배 이름 중에 "벨 엘렌"이 있는데, 이게 바로 Belle Helene,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미녀입니다. 그리스풍 조각상도 소설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스포일러라 여기 적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 예비역 군인이 나와서 저는 이 사람도 뤼팽의 분신일까 생각했는데, 아무렴 다리 하나를 자르고 그런 변장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겠죠. 6권에 보면 "퇴역 군인 자니오"란 이름으로 뤼팽이 나오는데, 애써 도와 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이래서 하층민 따위에게 함부로 선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암시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작품 읽은 분들 중에, 어째서 뤼팽이 그리 순순히 물러났는지 의아했을 수도 있는데요(뤼팽이 아직 유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 시절인데). 아무리 공증인이 개입해서 작성된 계약이라고 해도, 이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원고, 피고 모두 실존 인물이어야 합니다. 소송이 유지되기 위한 대 전제입니다. 실존 인물이 당사자가 아닌 소송을 "허무인 소송"이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일련번호가 개개인에게 발급되는 우리 나라에서는 교과서 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이슈지만, 다른 나라라면 사정이 그렇지 않죠. 계약 내용이 진정성을 갖추어도, 원고가 실재하지 않는 이라면 그 소송은 원천 무효입니다.

 

뤼팽도 여기서, 진짜 예비역 장교에게 "배신행위"를 당합니다. 그러나 뤼팽이 누굽니까. 아마 이 작품은, 읽는 독자들에게 결말에서 가장 후련하고 통쾌한 방법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체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처럼 도중에 진상을 다 짐작한 독자도, 대단원에서는 그냥 뭐 묵은 체증이 다 가시는 느낌이었으니... 청춘 남녀(남자가 약간 나이가 많긴 하지만)도 부모대부터 못 이룬 사랑을 이루고, 전황은 우리 모두의 조국(뤼팽을 읽는 동안에는 모든 독자는 프랑스인이 됩니다!)을 위해 유리하게 돌아가니 말입니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프랑스 수상 "발랑글레"는, 아마 제 생각에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아주 유능한 수완가이고,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체결한 인물이기도 하며, 노벨 평화상도 받았지요. "유럽 최강대국"이 연합국 대열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는 서술이 있는데(이 나라가 돈을 조건으로 흥정한다는 야비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가 양해하건 안하건 무관하게 참전은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으나,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오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문은 la dernire des grandes puissances europennes인데, "유럽의 마지막(=최후로 남은) 강대국"이지 "최강대국"은 아닙니다. 최강대국은 당연 영불독 외에 누가 있습니까? 일찌감치 그들은 교전 당사자였고요. 여기서 이름이 안 나온 채 은근 암시만 되고 있는 이 나라는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는 "열강"이기는 하나 최강대국은 아니죠. 1915년에 삼국 동맹을 깨고 독-오의 뒤통수를 쳤으니 이 점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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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스 실종 사건 - 누구나 가졌지만 아무도 찾지 못한 열정
우종민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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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부하직원들에게 면박이나 주고 들들 볶고 무시한 당신이야말로, 세상에 다시 없는 무능한 상사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있긴 합니다. 문제는, 중간관리자로서 해내야 할 일이란 게, 빈약한 가용자원을 가지고 최대한 많은 성과를 뽑아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없는 능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정신의학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하네요. 바로 "티모스"를 통해서입니다. "티모스"란 그럼 무엇이냐. 어떤 어려움 속애서도 자아를 지탱할 수 있고, 재기의 의욕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자기만의 긍지, 인정 욕구라고 합니다. 돈이나 세속적 명예와는 꼭 관련을 맺지 않는, 오직 자신만이 그것으로부터 뿌듯한 긍지를 느끼게 도와 주는, 정신적 활력의 원천입니다. 이 소설 등장인물 중 한 명이자, 사실상 주제를 창조하고 내러티브를 이끄는 유인정 원장의 말이자, 그를 페르소나로 삼은 저자 우종민 교수의 주장입니다.



유능한 팀장, 나아가 CEO는 직원들의 숨겨진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본인의 능력도 뛰어나면 물론 금상첨화이겠으나,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저력을 끌어내어, 팀의  실력을 있는 한껏 발휘하게 만드는 게 보다 우선시되는 사명입니다. 주인공 나상준은 그 별명이 "나혈한"일만큼, 자기 잘난 줄만 알고 부하직원들에게 인정사정 없이 성과만을 재촉하는, 재수없는 타입이자 등 뒤에서 이를 갈게 만드는 악질이었습니다. 선배들에게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이지만, 최종 결정권을 지닌 사장에게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속물이기도 했죠. 일도 잘하고 사내정치에도 나름 능했지만, 한계에 부딪히고 배신을 당한 후로는, 좌천된 자리에서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정신과원장 유인정이 이때 나상준을 돕습니다. 그는 나상준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 주고, 누구라도 벗어나기 힘들 좌절의 지점에서 오뚜기처럼 몸을 일으킬 수 있게 할 조언을, 정확히 맥을 짚어 이 젊은 광고인에게 들려 줍니다. 나상준은 여태 제 능력을 어디서나 발휘해 온 엘리트이며, 어느 도전이나 시험에 맞닥뜨려서도 좌절이란 걸 별로 모르고 살아왔습니다(그런데 왜 광고회사 같은 데밖에 못 들어갔을까요? ㅎㅎ). 이런 그가, 자기 회사 사장 이화승에게 이용만 당한 후 사실상 폐기처분된 후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커리어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의기소침해 진 겁니다. 그가 맡은 팀은, 자신처럼 버려진 낙오분자, 문제사원들로만 이뤄진 일종의 "외인부대"였습니다. 미팅에서의 폭탄 제거반처럼, 그냥 팀 단위로 알아서 죽어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인, 잘나가던 직장인에게 최악의 모멸이었죠.

사장의 의도가 그랬으니, 팀원 개개인의 사기로나 주어진 조건으로나 이들은 꼼짝없이 정리해고 1순위로 그저 명시적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였는데, 역시 능력자였던 나상준은 이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만듭니다. 먼저 자신부터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거듭난 나상준은, 잉여 아이템에도 못 끼던 이들 막장웨어들을 하나하나 만나, 그들만의 티모스를 자극하고 일깨우려 듭니다. 사내 최악의 상사요 재수떡이었던 나상준이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솔선하니, 좀비같이 처져있던 팀원들도 여태 없던 매너로 분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몇 번 또 뒤뚱거리고 넘어지다가, 오직 팀 케미의 산물로만 평가될 수 있는 성과를 내고, 그들은 여태 없던 성취감을 맛봅니다.



이 무렵 박 본부장과 노혁재(나상준의 원수이자 간신배들)는 큰 사고를 치고 회사를 망하기 직전으로 몰아갑니다. 이 사장은 사업적 타격도 타격이지만, 자신이 사람을 치명적으로 잘못 봐서 일어난 결과라는 자책감에 거의 재기불능으로 좌절하고 맙니다만.. 한번 티모스가 살아나 의기충천한  나상준 이하 4팀 전원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형 거래를 성사시켜 회사 전체를 회생시키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합니다. 그것도 월급 루팡 1호로 꼽히던 만년 과장 홍태만의 포텐(일본어 구사 능력)을 제때 터뜨리는, 거의 기적이라 할 만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책장을 넘겼는데, 직장생활의 애환과 풍속도를 실감나게 다룬데다, 제가 처했던 상황과 딱 들어맞는 얘기만 정확하게 풀고 있어서, 정말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들더군요. 결론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분들은 한번 읽고, 나만의 티모스가 무엇이어야할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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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의 고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6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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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10년 전 성귀수 선생님 번역으로 이 단편집을 처음 읽었고, <수정마개>나 <813>처럼 어려서 읽었던 장편들은 (두번째 만남인)당시 대충대충 넘기거나 아예 안 읽은 반면, 정말 처녀독(讀)으로 만나는 이 작품집은 그때 아주 집중해서 정독했더랬습니다. 그래서 10년만에 다시 읽어도, 구체적인 부분까지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더군요. 물론 그래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거울 놀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상이 정반대라는, 도일 경 이래 추리 장르 단편에서 아주 즐겨 쓰이는, 고전적인 설정트릭이 잘 활용된 작품입니다. 다만 거울로 보내는 신호(그닥 참신하지 않은......) 타령과 약간 억지스럽게 결합되었다는 게 아쉽죠. <수정마개>에서 에드가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서의 트릭을 오마쥬했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창의를 끼워 넣었던 데 비해, 이 단편은 선배 거장들의 솜씨를 뤼팽 버전으로 "번역"한 데에 그쳤다는 게 찜찜하게 남습니다. 요 구조는 이 책의 일곱 번째 단편 <백조 목의 에디트>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 변주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결혼반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살이 찌면 반지가 잘 안 빠지기 때문에, 기술자를 불러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부정(不貞)을 저지른 걸로 치명적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그저 부부 사이의 사소한 다툼(당사자에겐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겠지만)에 불과한 사정에도 뤼팽은 성심을 다해 개입, 가장 말끔한 솜씨로 일을 처리해 냅니다. 트릭의 정교함으로 따지자면 어이없어할 독자들도 많겠으나, 저는 이 단편이 "뤼팽다운 솜씨"가 간단하면서도 극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숙녀의 곤경은 어떤 때라도 모른체하지 않는다는 뤼팽만의 매력, 신사도가 잘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아르센 뤼팽의 결혼>은 미스테리 단편으로 뻬어나다기보다,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뤼팽의 면이 잘 드러난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특히, 못생긴 노처녀도 기꺼이 사랑해 줄 수 있고, 그녀의 착한 마음 앞에 도둑으로서 크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그의 태도가 약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포탄 파편>에 "드 호엔촐러른(de라니! 세상에...)"이 나오듯, 이 단편의 주인공은 구 프랑스 왕가 방계 혈족의 초 고위급 신분들입니다. "바렌의 도주"란 위트 넘치는 명명은 그래서 이중의 의미를 환기합니다.

 

뤼팽의 설정은 결코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기는 패륜적 설정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배회하는 죽음>은 그래서 으시시하면서도, 결말에 가서 독자들을 (르블랑 자신이 익히 써 오던 방법으로) 안심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 착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집은 전작과 달리 배경이 다시 파리로부터 시골로 옮겨 왔다는 게 또 하나의 특징인데요. 소속이 지방 경찰청이 아닌데도 시골이 무대가 되면 으레 모습을 드러내는 가니마르가 2, 3권에 이어 또 등장합니다. <붉은 실크 스카프>는 이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시골이 아닌 도시가 무대로 되어 있는데(일어난 범죄도 지극히 도회적 성격을 띱니다), 가니마르는 상관으로부터 "자네 경력 중 최고로 멋진 해결 아닌가!"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습니다. 사실은 뤼팽이 다 처리해 주었으니, 갖고 놀린 거나 마찬가지인 가니마르로서는 치욕에 불과하지만, 시민의 공복으로서 본분에 충실한 그는 여튼 까다로운 범죄 하나가 해결되어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악랄한 함정>은 그들이 판 함정이 악랄하다기보다, 시시한 악당을 타깃으로 삼고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뤼팽의 한심한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이 단편뿐 아니라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기암성> 이전 뤼팽의, 아직은 서툴렀던 리즈 시절에 벌어진 것들이라고 뤼팽 자신이 "나"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인적이고 시원시원한 활약상보다, 팬 입장에서 뭔가 안타까운 느낌을 조금은 들게 하는, 시행 착오적 성장기의 모험담 같은 인상도 적지 않게 줍니다. 물론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느낌은 대단히 옅어집니다만. 특히 이 단편은, 마지막에 밝혀지는 수수께끼의 진상이 너무 어이없어서, 독자들이 다소 얼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장르의 규칙에 지나치게 속박받지 않고 주인공의 매력(?)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이 작 역시 마음에 듭니다.

 

성(性) 구분의 모호성 모티브는 뤼팽 시리즈 중 처음으로(아니구나.. 두번째지만 그 얘길 구체적으로 하면 안되겠습니다) 나오는 건데요. 정작 뤼팽이야말로 그리 장신도 아니고 호리호리한 체격이라는 점에서 여장이 제격인 조건이지만, 한 번도 여태 그런 모습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미남의 팔자란...!" 같은 자부심 넘치는 개탄(?)은, 성귀수 선생님 책에서 더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확실히 이 코너스톤 판이 깔끔한 텍스트에 휴대하기 좋은 외장이라면, 성귀수 선생님 책은 역자만의 구수한 문장 그 맛이 느껴지고, 소장 가치가 있는 제본이라는 점이 좋습니다.

 

<허수아비>는 제목이 스포일러죠? 하긴 스포일러를 스포일러라고 떠든다는 자체가 스포일링이기도 합니다만... 제목도 스포일러지만 범인(...)이 도피 중 가장 절실한 난관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 트릭까지 다 밝힌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적인 내용 누설입니다. ftu de paille에는, 이 두 가지 뜻이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영어의 straw와 같습니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르블랑 자신이 이미 실수를 한 것입니다. 아 작품에는 번역어가 약간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gendarmes는 성귀수 선생님 책부터 대개 "군경"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시골에서 치안 행정을 맡기기에는 민간 경찰 조직이 아직 미비했던 시절이라, 군대가 경찰 기능까지 겸하는 제도입니다. 이걸 한국어로 "국가 헌병대"라고도 옮기는데, 그건 표현이 대단히 부정확할 뿐 아니라(그럼 헌병대가 다 국가 헌병대지 민간 헌병대도 있습니까?), 이 뤼팽의 작품이 쓰여지던 시절 일제 강점 체제 하에서 헌병 경찰의 무단 통치를 받았던 우리의 실정이 떠오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gendarmes는 군내 범죄와 기강을 다루는 "헌병"과는 다른 제도요 개념입니다. 이 책에서는 중반까지 "헌병"이라고 계속 옮기다가, 종반 들어서 다시 "군경"으로 갈아타고 있습니다. 2,3권 내내 이 코너스톤의 태도는 "군경"이었구요. 참고로, 이 "군경"도 무슨 무장 공비 침투시 군-경 합동 수색 같은 용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이때는 별개 조직이었던 군과 경이 joint를 이룬다는 뜻이지, 군이 경을 겸한다는 게 아닙니다). 마땅한 용어가 개발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한국은 영토의 어떤 일부도 군대가 그 치안을 유지했던 역사가 없습니다. 계엄령 선포시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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