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의 혁명 - 우리는 누구를 위한 국가에 살고 있는가
존 미클스웨이트 외 지음, 이진원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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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자 두 분의 경력만 보면, 이런 주제를 놓고 이뤄지는 담론에 썩 잘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저널리스트들은 보통 거대 담론을 두고 논의를 펴 나가는 일이 드물며, 그보다는 구체적이고 시사적인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각론(各論)을 전개하는 편에 능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예상을 뒤집고, 방대한 예시를 들고 세계사적 호흡으로 주제를 조망하는 내용으로 독자를 압도했습니다.

 

제목 <제4의 혁명>은 두 가지 고민과 모색으로 "어떤 정부여야 살아남을 수 있고, 유용하게 기능하며, 국민을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제4의 혁명이 있다면(혹은, 있어야 한다면), 제1~제3의 혁명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저자(들)의 정의(定義)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주들에 의해 지배되던 소규모 분립 공국을 넘어서, 강력한 군주, 정부가 통제하는 중앙 집권 체제의 등장 2) 이런 강하고 큰 정부에 대한 염증과 반감으로 들어선, 작고 자유방임적인 정부 3)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시혜적이고 폭 넓은 간여를 사명으로 하는 "복지국가"를 위한 정부. 이렇게 세 단계가, 앞에서 맞이한 세 차례의 "혁명"을 통해 들어선 정부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 단계에는 각각, 그 "혁명"을 이끈 사상적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1혁명에서의 토머스 홉스, 2혁명에서의 존 스튜어트 밀, 3혁명에서의 베버리지, 그 외 복지국가의 이론적 옹호자들... 아마 저자들은, 앞으로 필연 도래할 제4혁명에서, 능률적이고 주어진 소임을 보다 잘 수행할 신개념 정부의 이데올로그이자 선구적 주창자로서 본인들을 자랑스럽게 상정하고 있지 않았을까 저는 추측합니다.

 

혁명의 도래는, 그 혁명을 필연적으로 부른 기존 체제의 비능룰성과 모순성을 전제로 합니다. 기존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유혈사태와 혼란이 필수 수반될 혁명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저자들의 진단은, 지금의 정부가 중병(重病)에 걸려 있으며, 혁명 아니고서는 이 병폐가 치유될 가망이 없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 혁명이란 게, 반드시 폭력적 수단을 통해 일어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부 기능의 담지자들이 알아서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감수하고 혁신을 수행한 결과이든, 혹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책에선 이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국민들이 전복을 추구한 결과이든, 이 "제4의 혁명"은 그 도래가 필연적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이 책에는 대단히 방대한 사례의 예시가 나옵니다. 일단 우리도 뉴스 외신란을 통해 자주 접했듯이, 사천만 인구가 거주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파산, 정부 기능 정지 사태는, "(현)정부의 실패"의 확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로서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한때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하던, "작으면서도 강한 정부"의 모범적 예였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들의 미려하고 적확한 문장은 이 점을 더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는데요. "초기 전체 상원의원이 대표하던 인구 수보다, 지금 1명의 상원의원이 대표하는 인구 수가 더 많다"는 문장이 그 좋은 예입니다. 쓰는 비용의 규모는 큰데, 수행하는 기능은 비효율적이고, 과거 업무의 잔재만을 반영하여 쓸모도 없는 기구만 잔뜩 유지한 정부가, 국민(주민)과의 소통도 제때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EU의 거대한 실험 역시 도마 위에 오릅니다. 금융 정책을 규제하는 당국은 나라마다 제각각인데, 이 거대한 권역이 단일 통화를 쓴다는 게 "광기" 아니면 뭐냐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저자들은 현재의 EU 집행부야말로, 관료주의의 병폐와 퍼주기식 복지를 동시에 수행하는 실패의 표상이라고 진단합니다.

 

저자들의 객관성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은, 얼마나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지"의 능력입니다. 서구권 저자들이, 자신들의 지난 발전사를 스스로의 역량 덕분으로 돌리지 않고, 중국이나 터키(오스만 제국)의 잘 정비된 관료제에서 그 입은 혜택을 상기할 수 있다면, 이는 독자에게 충분한 객관성을 그 저술이 담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 반대의 예라면, 마치 뚱녀가 터질 듯한 뱃살을 거울 앞에 비추고서도, "내 몸무게가 어때서?"라고 어이 없는 강변을 일삼는다든가, 학력과 직업 경력 등 아무것도 내세울 바 없는 초라한 자신에 깊고 절망적인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자격증, 증명서까지 실재하는 남의 아이덴티티를 "이건 사기야!"라고 중상모략 절규하는 촌극에나 비길 수 있겠습니다. 지가 구리면 남도 구린 줄 아는가 보죠. 그렇게 살면 피곤하고 상처 투성이인 현실에 당장 싸구려 위안을 줄 수는 있겠죠.

 

저자들은, 서구권이 제1의 혁명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관료제를 중국에서 차용해 왔음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신분제의 고착화를 막기 위해, 과거 제도를 통해 가장 우수한 인재를 준별해 왔고,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끊임 없는 독서와 진정한 자기 계발에 힘쓰도록 촉진하는 동인이 되었다는 거죠. 저자들은 지금 제4의 혁명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시행하고 있는 인재 양성 제도와 당원 선발 시스템이, 정부에 얼마나 활력과 높은 효율을 불어넣고 있는지에 대해 강조합니다. 저자들은 이어, 얼마 전 타계한 헨리 리(리콴유)가 싱가포르라는 성공적인 도시국가에 대해 남긴 치적에 대해서도 상세한 리뷰를 행하고 있습니다.

 

제4의 혁명이 불러 올 정부는 그러나 딜레마 역시 안고 있습니다. 정부 조직을 채워 나갈 조직원들에게는 항상적 지위 보장이라는 급부가 주어져야 소신껏 일을 해 나갈 텐데, 부단한 혁신 요구(이에는 수시 조직 개편을 위한 내외부적 개입, "수술"이 필수적입니다)를 어떻게 만족시켜 나갈 것인지, 작으면서도 강한 정부라는 상충적 목표를 어떻게 동시 수행해 나갈 것인지의 문제가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각론을 전개해 나갈 저자들의 다음 저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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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제 대한민국 스토리DNA 6
백시종 지음 / 새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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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여 년 전, 실존 재벌의 비사, 흑막을 가득 담은 폭로 소설이라고 해서 큰 이슈가 되고,  일반 독자들이 서점에서 구해 볼 수 없게 회수 조치가 취해지는 등 논란의 한복판에 있던 소설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한참 후 제가 대학에 진학하고선 중앙도서관에서 찾아 보려고 했으나, 거의 언제나 대출 중이라서 손에 넣기가 어려웠었는데요. 아마 이 책은 그동안 대학 도서관 아니면 열람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국회도서관, 국립 중앙도서관 등에서의 이용은 더욱 기회가 희박하죠). 서점에 깔리자마자 알 수 없는 압력에 의해 자취를 감춘 책을, 일반 지역도서관이 소장할 기회가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요. 25년 전이라면, 지금처럼 자치구마다 여러 도서관이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을 테며, 하물며 당시 기준으로 "준 불온도서"에 가까웠던 이 책을 비치했을 여지는 더욱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전설 비슷하게만 전해져 오던 작품을, 이제 새움출판사에서 "대한민국 스토리 DNA" 시리즈의 일환으로 복간해 낸 덕에, 당시 나이가 어렸던 독자도 읽을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순간, 마음은 상당히 착잡해 오더군요. 어느 나라나 자본주의 체제가 그 토양에 안착할 무렵엔, 소위 "총질, 칼질"을 통해 자원과 부, 토지를 뺏고 다니던 자본가들 중 최종의 승자들이 크게 한몫챙기고, 이들이 구축한 시스템의 토대 위에서 그 흉한 과거는 전혀 모른다는 듯, 세련되고 평화로운 새 방식이 발전하기 마련이란 점, 학교에서 배운 우리들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그 근접한 과거에, 이처럼 수치스럽고 죄악으로 가득찬 "자본의 축적사"가, 개발 독재라는 당시의 체제적 특성에 걸맞게, 압축적이고 농밀하게 자리하고 있었을 줄은 아마 많은 분들, 심지어 그 시대를 산 분들도 잘 모르고 있었을 텝니다. 미국에서는 업톤 싱클레어의 <정글>, 마크 트웨인의 <The Gilded Age> 같은 것이 이런 사회성 짙은 고발 문학의 모범으로 꼽힙니다만, 우리 한국에선 이 백시종 선생의 작품이 그에 비견될 만한 위상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미도 있고, 글로벌 경제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다고 해야 할 거대 재벌의 치부를 들추었으니, 문학 내외적 가치를 따져도 그들에 못 미칠 바 별로 없습니다.

 

이 소설은 요즘 베스트셀러들과는 스타일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고발 문학이라고 하면 간결하고 꾸밈 없는 문체에, 사건과 대화 위주의 빠른 전개로 일관할 것 같지만, 작품에는 의외로 작가의 깊은 사색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문체도 고풍스런 어휘가 자주 사용되며, 문장의 평균 길이도 제법 긴 편입니다(예컨대 우리 시대 가장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메이커라 할 김진명 작가의 문장들과 대조해 본다면 그 차이가 상당하죠). 그런가 하면 이 시절 문인들의 작품에서 종종 보이는 해학적 특징으로, 질펀한 음담(淫談)을 슬슬 돌려서 전하는 그 유머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 예라면 pp.76~77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한 번 보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어 두 번을 읽어야 했습니다. 짖궂은 패설투는 차치하고라도, 백시종 선생은 여기서 캐릭터(실존 인물을 염두에 두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캐릭터라고만 하겠습니다)의 깊은 심리를 정확히 포착해 내는 놀라운 저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장애인이 장애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배려를 받는 건 전혀 달가워하지 않듯, 이 왕득구 회장도 자신을 대한민국 최고 재벌이라고 가식적인 존경과 아첨이 퍼부어지는 걸 내켜하지 않는 편인데, 자신을 진심으로 (잠자리에서) 섬긴 나머지, "특정 생리 현상이 정상치의 정도를 훨씬 넘어서 발생하는" 그 여인에게 각별한 총애를 주었다.. 고 하는 대목은, 표현의 절묘함도 절묘함이지만, 결국 대통령도 안 부러운 권세를 자랑하는 최고 재벌을 일개 장애인의 처지나 마찬가지라고 비꼬는 셈 아니겠습니까. 대놓고 "너 병X"이라고 원색적인 욕을 퍼붓는 것보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우회하여 꾸민 수사(修辭)적 공격이, 당사자에게는 더 큰 타격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실제로 여기 나오는 왕득구 회장은, 정규 교육을 길게 받지 못한 열등감이 있어서인지, 애써 문인들과 교제를 하려 들고(그런 그들에게 "진짜 천생문인"이라 할 노동자 김능길 은 신랄한 비난을 쏟아내고, 작가의 페르소나라 할 권도혁 차장은 이를 무마하느라 진땀을 뻬죠), 틈만 나면 "기업가 아니었으면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며 이상한 자기 과시에 여념이 없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왕 회장으로서는 시구(詩句) 몇 개쯤 즉석에서 외우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지적 열등감을 평생 떨치지 못하고 살았던 그로서는 일종의 남근 우월주의를 동시에 관철하는 수단으로, 대한민국 최고 여류 문인의 작품 몇 소절을 줄줄 암기하며 "작업"을 걸기도 합니다. 이런 걸 보면, 과도한 색욕과 상처받은 자아의 자구 치료 노력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돈.jpg


왕득구 회장이 그토록 병적인 여성 편력을 보였다는 것, 아홉 아들의 어머니가 다 다르다는 사실, 첩실을 두지 않는 대신 그 비운의 여성들에게 아이를 다 뺏어 왔다는 충격적 진상, 이 사실을 술이 취한 채 명광그룹 중역 부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실수로 다 털어놓고 만 회장부인 오 여사.... 일반 독자로서는 정말 갈수록 산이라는 격으로 당혹감과 경악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게 과연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 현실에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단 건지요. 왕 회장은 자기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느 아들을,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쳐, 반 불구자, 정신이상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 아들 역시 어느 여인(전직 영어 교사라고 합니다)에게서 낳아 뺏어 온 아이입니다. 그 생모도 아이를 뺏긴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 아이가 그꼴이 되었으니 제정신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모자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 아니 감금되는 신세로 떨어집니다.

 

이런 지극히 파행적인 개인사 외에도, 이 소설 후반부는 노조 탄압에 얽힌 긴 사연이 들어가 있습니다. 노동자, 노조를 "뇌동자. 뇌조"로 발음하는 왕 회장, 별로 발음이 어눌하거나 부정확한 편이 아닌데도 유독 이 단어들에서는 변형된 발성을 하고야 마는 그는, 노조 지도자(정확하게는 노조 조직 준비위원장) 한광필을 납치하여, 불량배들을 시켜 그의 목숨을 앗으려 들기까지 합니다. 이 사건은 아마 1988년경에 실제로 있었던 서정의씨 납치 사건을 염두에 두시고 픽션화하신 듯합니다. 현대 직원들마저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송두리째 버리게 했다고 표현되는 이 에피소드는, 확실히 지금 읽어도 충격적인 테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좀 뒤로 가면, 위에 언급한 노동자 문인 김능길이, 울산 현지에서 큰 규모로 노조를 조직하려 들던 양재봉으로 오인되어, 온몸을 회칼로 난자당한 채 죽음에 이르는 끔찍한 사건도 묘사됩니다. 이 일은 최평국이라는 이름을 지닌, 미국 출신 경제학 교수라는 배경을 가진 어느 "해결사"에 의해 주도된 걸로 나옵니다. 이 역시 완전 픽션은 아니고, 당시 현대그룹에서 "구사대"를 이끌었던 인사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미국식 이름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나오지만,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은 건 OOO라는 미국식 이름 때문이기도 했죠.

 

마지막에는 어느 구로공단 여직원이, 출처가 불분명한 거금을 고향의 아버지에게 송금하여, 씀씀이가 갑자기 커진 그를 질시한 동네 주민이 경찰서에 "간첩"이라고 신고하는 바람에 일이 커지는 촌극이 소개됩니다. 이 여직원은 예쁘장한 생김새 때문에 왕득구의  눈에 바로 들어, 그날부로 회장을 모시게 되는 걸로 이야기는 꾸려지는데요.... 일반 범죄 사건도 아니고 대공 사건이니, 경찰도 수사를 마무리짓고 넘어가지 않으면 위에서 문초를 당할 것인데.... 결국 명광 측은 거액이 든 봉투를 돌려 이들을 구워삶습니다. 이뿐 아니라, 노조 관련 각종 잡음과 추문이 일어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의 입을 막고 유리한 기사를 작성하게 하려는 명광의 책동은 참으로 집요합니다. 안되면 육탄으로라도 막으라는 특유의 기조는 과연 어디애서 나온 걸까요? 한국 천민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창업주 왕득구의 신조 외에 다른 출처는 없습니다.

 

소설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됩니다. "이전 각하" 시절 잘나가던 어느 장군이, 신군부로 권력 주체가 바뀌고 나서 출세의 가망이 줄어들자 예편한 후, 이 명광에 영입되지만... 강직한 군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판단으로)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왕득구와 도저히 호흡을 맞출 수 없어서 그만 두고 나오게 됩니다. 이 소설은 권도혁이 과연 어떻게 회사에서 진퇴를 결정했는지는 분명하게 적고 있지 않으나, 이 "최 장군"의 선명한 처신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이 당시의 암울하고 처참하기까지 한 모순의 실상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재벌 기업은 지금 사실상 대한민국을 할거 점령하는 사실상의 공동 소유권자들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로 인한 각종 "갑질"의 횡포와 폐단이 오늘도 여러 중년 가장과 그 식솔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 재벌의 비위(非違)를 고발하는 작품을 쓴다는 건 요즘 같은 깨인 세상에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돈보다 펜을 선택"했다는 이 소설이 늦게나마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된 건,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큰 행운이라는 점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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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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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정과 열의는 우리들 성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것들을 없애면 기본 자체가 없어져요."
"그런 건 믿지도 않습니다. 불치의 증상이냐구요? 아뇨. 치료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요? .... 하, 그건 다 개소리란 말이요!"
-프란츠 그린바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인재들을 찾아내라고 했지만,
자네가 내 그 말을 그렇게 축어적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윈스턴 처칠

"군(軍)에서 천재들을 모두 모았다...라...
혹시, 그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디지털 기계, 그게 뭐지? '디지'는 숫자를 의미하고, 디기투스는 손가락을 꼽아 센다는 의미이기는 해.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 실력이 아직은 쓸만하군. 하지만 '디지털'이라니,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스포츠맨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튜링은 좋은 사람이다. 게다가 튜링은 죽기까지 하지 않았나. de mortuis nihil nisi bene! 죽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
-레오나드 코렐

"수학자가 기계에 관심을 가지다니 대단하구나. 보통 수학자들은 공학을 경멸하거든. 수학을 '무용(無用)의 예술'이라고 부르면서 말야. 예술 지상주의자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밤에는 일식을 제대로 볼 수 없지 않겠니?"
-빅토리아 카슨(한 번도 결혼하지 않아 처녓적 성(姓)을 늙어서까지 유지한, 레오나드 코렐의 이모)

"호모들은 모조리 빨갱이라고 생각하면 돼. 남자하고 같이 잘 정도로 타락했는데 뭔 짓인들 더 못하겠나? 당연히 적과도 그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 찰스 해머즐리

"진실은 우리에게도 어려운 과제야. 진실을 밝혀내어야 할 뿐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다뤄야 하니까."
"코민테른은 호모민테른이라고. 누가 스탈린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더 호의적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나 보지."
- 로버트 서머셋

"수학자는 쉽게 나이를 먹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어."
"앨런은 예리했어. 끈질기게 비트겐슈타인에게 도발했지. 나중에는 그 늙은 제왕도 그를 좋아하기는 하더군."
-프레데릭 크라우스


"모순 없는 남자는 믿을 수도 없는 남자다."
-제임스 코렐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빅토리아 카슨, 그리고 자기 이모의 말을 무단 도용하는, 어려서부터 남의 명언 끌어대기를 즐긴 레오나드 코렐

"기계는 영혼 없이 철컥거리지만, 영혼 있는 내용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제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절대적인 게 아니었으니... 아무리 오랜 동안 진리로 믿어져 오던 것도, 진리가 더 이상 아니거나 진리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로빈 갠디

"저자들 전문가들, 학자들이란 자들이 하는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단다, 얘야."
-(또) 제임스 코렐



" 미스테리는 그 해답보다 위대하다"는 명언에 작가분이 충실히 공감한 탓인지, 이 소설 끝까지 읽어 가 봐도, 튜링이 왜 마지막 순간 청산가리가 가득 발라진 사과를 먹고 죽었는지, 그 경위에 대한 해답은 시원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결론의 명확성 여부와 무관하게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에필로그에서.튜링의 죽음으로부터 32년 후, 육십을 넘긴 노인이 된 레오나드 코렐이, 기념 세미나에 참석하여 그의 최후를 수사한 경관으로서의 체험을 술회하고, 애플 社의 로고 창시에 얽힌 "전설"을 가당찮다는 듯 통박하는 장면은 눈가를 시큰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 직전 장면, 혈기 왕성한 청년 경장으로서, 경찰 총수의 위선과 무지몽매함에 한없는 거부감을 느끼고, 소중한 자신의 경력이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 직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후련함과 통쾌함을 안겼을 줄 압니다.



소설은 매혹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소설의 제재가 된 어느 수학자의 생애 자체가 그러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사고 기계"를 처음으로 창안한 앨런 튜링의 천재성, 그 천재의 비극적 생애에 담겨 현대에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담론의 빌미를 제공하는 "동성애 스캔들", 현재까지도 숱한 음모론의 발단이 되고 있는, 그 죽음의 미심쩍은 경위.... 사실 튜링의 2차 대전 당시 공헌은 세계 역사 전체를 바꿔 놓았으며, 제아무리 대영 제국과 미국의 물량이 좋았다 해도, (이 책에 나오는 대로) 함대가 바다에 나가는 족족 U-보트의 공격에 침몰된다면 무슨 수로 버텼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두고, 단지 "신뢰 불능"이란 이유만으로 전후 포상에서 푸대접하고, (그 무수한 음모론의 발원이 되었듯) 국가 안보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일 만큼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한 그. 사실 JFK 사건 수사를 맡은 짐 개리슨도 어느 화장실에서 동성애자 누명을 쓰고 매장당할 뻔했고, 파솔리니 역시 10대 소년에게 수작을 건 게 빌미가 되어 집단 구타를 당하고 죽었죠. 체제에 위험이 된다 싶은 인물들이 의문사, 혹은 그럴 뻔한 위험에 처한 건 역사가 제법 오래된 사실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튜링이 아닙니다. 튜링이 후반부에 지인들 회고 형식으로 잠시 나오기는 하나, 소설의 시선과 화법을 이끌어가는 이는 20대 후반의 젊은 경관 레오나드 코렐입니다. 튜링을 제재로 삼은 소설들이 보통 취하는 태도인데, 튜링의 일부를 닮은 분신이다 싶은 젊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이 소설도 예외가 아니더군요. 레오나드 코렐은 튜링과 많이 닮았지만, 다른 점도 많습니다. 튜링처럼 그도 번듯한 가문 출신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체제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권위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감추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태도를 무척 경멸하며 자신의 양심과 감정에 충실합니다. 반면 다른 점도 많은데, 수학을 좋아하고 똑똑하긴 하나 튜링처럼 천재가 아닙니다(이런 쓸데없는 소릴... 대체 누가 튜링처럼 천재일 수가 있을까요). 결정적으로 코렐은 동성애자가 아니고, 못된 남편을 만나 불운한 처지에 빠져 딸 하나를 어렵게 키우고 사는 줄리 매시라는 혼혈 미녀를 사랑하는 이성애자입니다. 튜링과 다른 또 하나의 사실은, 그리 미남이라 보기 힘들었던 튜링과 달리, 주인공 레오나드는 손눈썹이 길고 팔다리가 가늘며(본인은 이게 콤플렉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겼다는 점입니다(이 말은 전혀 암시가 없다가 비밀 요원 뮬런드에게 구타당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물런드는 그저 레오나드가 잘생기고 젊고 머리숱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직무를 빙자하여 개인적인 증오심을 불태우는데, 이 설정은 권력의 맹목성과 폭압성을 상징합니다).



레오나드의 상관들은 동성애에 대해 지독한 경멸과 적개심을 지니지만, 마땅한 근거를 갖고 그런 행동과 감정을 갖는 건 아닙니다. "거 생긴 거만 봐도 딱 느낌이 오지 않아?" "그러면 해머즐리 총경님은 어떠신가요? 그분도 외모가 여성스럽지 않습니까?" 권력 관계의 냉혹한 기제 앞에 무한히 비겁해져야 하는 로스는 이 한 마디에 소신(?)을 바꿉니다. "아하하, 하긴 그렇기도 하지 뭐." 상관의 입을 단 한 마디로 다물게 하는 이 재주에, 레오나드 코렐은 진정 자신이 천생 이야기꾼 제임스 코렐의 의심할 바 없는 아들임을 확신하지만, 자괴감과 열패감은 더욱 커집니다.

레오나드 코렐은 수학적 소양이 상당했기에, 수사를 진행해 가며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핵심을 놓치지 않고 이해합니다. 크게 두 가지, 즉 "자기 지시(self-reference)의 역설"과 "모든 메시지의 정연한 부호화, 알고리즘화"의 이슈가 관심 대상입니다. 스스로의 진리치를 부정하는 명제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이를 기계로 만들면 그 기계는 연산 오류의 무한 반복에 지쳐 자폭을 하고 말 것인데... 이런 자기 부정 역설의 서글픈 운명은 레오나드 코렐을 오랜 시간 괴롭혀 온 문제, 그리고 상처 투성이인 그의 내면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남자치고 볼륨이 큰 엉덩이 때문에 "계집애 같다"며 놀림감이 되었기에,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남성성을 세상을 향해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왔습니다. 말은 번드르르했으나 실천이 전혀 따르지 않았던 부친 탓으로, 대대로 물려 받은 재산과 가문의 위신이 사멸해가는 과정을 어린 시절 지켜 봐야 했던 악몽 때문에, 그는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허풍과 가식을 누구보다 혐오합니다. 여기에, 자신에게 냉정히 굴었던 어머니에 대한 살갑지 않은 기억까지 있어, 전문가들이 흔히 범주화하는 (이 "범주"라는 게 얼마나 토대가 허술한 허상인지요! 책에는 버트란드 러셀의 일화, 그리고 쿠르트 괴델의 업적 소개를 통해 잘 나와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될 조건"들을 모조리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동성애자가 되지 않았는데, 아마 여기는 누구보다 진취적이었고 교양 넘쳤으며, 거침 없는 행동주의자였지만 다정다감하기까지 했던 비키 이모의 도움이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남성성을 최종적으로 확정 체화하는지는 이 소설의 결말에 잘 나옵니다.

이 소설엔 안 나와 있으나,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에니그마>(이 책도 한국어판을 조영학씨가 번역했습니다)에 잘 나와 있는 게, 독일군(특히 독일 해군)에서 운용했던 가공할 암호 체계(혹은 그 단말기)의 결정적 허점이, 바로 "어떤 키도 자기 자신(의 참값)을 찍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은, "자기 지시의 역설"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 줍니다. 소설에서 아버지 제임스 코렐이, 용의 입 안에 손을 넣고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는 그 말은 (비키 이모와 레오나드가 실컷 비웃는 것처럼) 물론 제임스 코렐이 고안한 게 아닙니다. 논리학 교과서나 대중서에 보면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악어" 혹은 "사형수를 처형하려는 왕" 등으로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가진 유명한 이야기죠. 튜링은 자신의 기계 설계에 의도적으로 난수 체계를 삽입했다는 말도 나오는데, 아무리 무결점이고 정연한 궤도라도 그 정해진 코스만 반복하면 결국 시스템이 부패, 퇴화한다는 생각에서라고 합니다. 때로는 돌출 분자, 파격이 있어야, 발전이 있고 진화가 있다는 건데요. 이는 뭐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조국을 패전의 위험으로부터 구한 자신 같은 천재가 웅변으로 입증하는 실례라 하겠습니다. 배비지, 홀러리스, 노버트 위너 등 개론 수준의 전산학 책에서 자주 접하는 인명들이, 이 소설에선 고유의 맥락 속에 자리를 잡아 독자들에게 생생한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매카시즘 관련 잠시 언급되는 "라벤더 스케어"에 대해선 이 링크를 참조하십시오. 시스템을 지키려는 자가 결국 가장 앞서 시스템을 파괴하고 만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정신적 대모로 등장하는 비키 이모는, 틈이 날 때마다 그런 말을 합니다. "제임스 코렐은 언제나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대했다. 제임스 코렐의 아들인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오늘날 아이들조차 일상의 장난감처럼 갖고 놀게 된 사고기계, 동시대인이 그 개념조차 찹지 못했던 시절 선구적 안목으로 이를 창조한 어느 천재, 사실 그도 학창 시절 크리스토퍼라는 어느 아름다운 소년, 육안으로 대낮에 금성을 볼 수 있었다는 신비로운 천재에 의해 일생의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소년 자신은 10대 때 요절). 사랑과 이해가 없는, 돌출 분자에게 냉혹한 퇴장을 명하는 단색의 자연계는, 언제나 그 자신 역시 반드시 자살로 끌리게 되어 있다는 결론을, 이 유려한 소설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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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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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추리물치곤 서두가 정말 독특하게 시작되는 편이라서, 뭔가 기막히게 박진감 넘치는 사연이 펼쳐질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성 넘치고 강렬한 프롤로그 이후엔, 그저 "평범한 미제 살인 사건"의 진행, 그리고 두 형사 듀오의 가망 없어 보이는 추격이 밋밋하게 이어지더군요. 제가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건, 이 남부 알비(중세 기독교 한 이단의 발생지로도 유명하죠) 출신의 로랑스 서장이 왜 근거 없는 "직감"에만 의존해서,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볼품 없고 소심한 유부남 자크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격도 없는 남자가 외람되게 차지하고 있는 그 부인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모습, 추리물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더군요. 그와 듀오를 이루고 있는 실비오는, 그나마 사냥개처럼 치밀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자그마한 가능성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직했습니다만(그리고 참 부지런하더군요. 해협을 멀다 않고 양안을 오가며 사소한 증인도 찾아 다니는 그 철두철미함이란), 이 사람은 자기 상관이 가지고 있는 영감 수용 능력, 전체를 한 눈에 꿰뚫을 줄 아는 통찰이 대신 부족했습니다.



세네갈 출신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데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입담과 재치, 타락한 영혼을 가진 수수께끼의 미술 중개상이자 전문 감정인 아마두 캉디가 그렇게나 칭찬한 것처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메워 줄 수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마을 지베르니 토박이였던 안과 의사가, 칼에 찔리고, 머리가 으깨지고, 물에 빠져 질식해 죽은 사건에 대해 그저 미로를 헤맬 뿐입니다. 다섯 명의 정부(情婦)가 시선에 들어오지만, 사건의 내막은 시원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더 꼬이고 꼬여 종적을 짙은 안개 속에 감추는 것 같습니다. 검은 피부색에 세상 악덕의 흔적을 다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캉디가, 소설 중반께 모습을 드러냈을 땐, 클로드 모네의 숨겨진 대작이 이 모든 혼란과  범죄를 부른 요인이 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검은 수련".... <검은 수련>이란,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유작으로 설정된 <희극론>처럼, 지베르니 마을 어느 한 구석에서(혹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건) 발견만 되었다 하면 미술품 시장이 사정과 몇몇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전설의 아이템입니다. "그런 건 절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소견이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런 멋진 환상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기만하려는 건지, 아니면 타지 사람들에게 조직적인 장난을 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속셈으로, 대를 이어 이 미심쩍인 이야기를 퍼뜨립니다. 하지만 검은 수련은 비단 자연계에만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맑았던" 모네가 생전 어느 시점에도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결국 드러나는 거죠.



책을 다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독자도(쇼크 안 먹은 분이 없을 줄 압니다), "대체 모네는 그럼 왜 나온 건가?"하고 의문을 가질 만합니다. 그가 마네, 드가 등과 함께 창시한 것이나 다름 없던 인상파는, 사물의 객관적, 정태적 형태를 화폭에 담은 게 아니라, 오브제가 "시간(이 키워드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과 함께 변화해 온 양상, 파동을 "인상"으로 포착하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한, 그래서 이후 현대 추상 미술로 향하는 물꼬를 활짝 열어젖힌 크나큰 공로가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그림이 2차원에 지나지 않았다면,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시간 차원 하나를 더 지니게 된 것입니다. 또,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이 과연 실체에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근본적 고민을 유도한 기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검정색은 그래서 모네에게 "색의 부재요 색의 혼융(이 빚은 지옥)"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인상파 기법으로 쓴 미스테리 소설이라 불러도 됩니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한 마디도 꺼내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바로 이 인상파의 지향이야말로 소설의 트릭을 푸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보통의 추리물에서 독자와 탐정은 서로 누가 먼저 진상을 발견하느냐를 두고 겨루는 입장이지만, 이 작품에서 로랑스-실비오 콤비는 우리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입니다. 로랑스가 치정에 눈이 멀고, 실비오가 그저 자료만 들이파는 고지식한 유형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2차원 세계에 박제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젤 바깥"에서 진상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처럼 독자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모든 독자는 그 유리한 판세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지고 맙니다. 왜? 로랑스 들과 함께 "착각된" 저차원으로 같이 휩쓸려 들어가기 때문이죠. 우리는 따지고 보면 언제나 (이 소설의 경우뿐 아니라) 전지의 신처럼 높은 지평선에서 전체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처지였는데, (스테파니 선생처럼) 키 작은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다 보니 같이 실패하거나, 아니면 경주에서 뒤처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그런 우리에게, "당신은 높은 언덕에서, 단일 지평선 아닌 교차하는 소실선을 다 볼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가르쳐 주고 있던 셈입니다.



모네라는 모티브 외에도 이 소설은 곳곳에서 범인의 정체, 혹은 그를 알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남겨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루하게 읽으시면 본인만 손해입니다. 아주 공정한 퍼즐이므로, 내가 반드시 풀어내겠다는 각오로 쫓아 가십시오. 로랑스는 "그녀와 관련된 세 사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은 거짓이야"라고 하는데, 근거는 딱히 없었으나 결국 이 직감은 옳았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는, 마을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음에 대해 내내 작은 회한을 표시하는데, 저 같은 독자는 "할머니도 이런 감정을 갖긴 하나 보다"고 넘어갈 뿐입니다(그러나 이 사소한 표백에 엄청난 복선이 깔려 있었다니!!!!). 마지막으로, 이 한국어 번역판에서만 드러나는(다시 말해, 프랑스어 원 텍스트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힌트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빈센트"란 이름의 표기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프랑스어 소설에 프랑스 국적의 인물 이름인데, 왜 "뱅상"이 아니고 "빈센트"인지요? 처음에는 그저 역자 혹은 편집진의 무성의로만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난 후에야 그게 엄청난 의미를 가진 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분의 전작 <그림자 소녀>도 진정 예측 못할 반전에다 시공간 구조를 교묘히도 비틀어 놓은 그 서술 트릭에 탄복했었는데, 이 작품은 그를 뛰어넘어 이 장르의 진화 새 단계를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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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이빨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0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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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dans mon potager foisonne le lupin.
(그리고 나의 텃밭에는 루핀 꽃이 만발하다네)

조제마리아 드 에레디아의 시 한 소절로써 이 아주 긴 장편은 마무리됩니다. 이 시인은 19세기에 활동한 프랑스 고답파에 속하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 사람으로부터 (자신은 비록 산문가였지만) 스타일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 큰 영향을 받습니다. Lupin(뤼팽)이란 캐릭터 이름은 물론 그가 존경했던 에드가 앨런 포우의 피조물 "오귀스트 뒤팽(A. Dupin)"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 <호랑이 이빨>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어원 한 구석에 다른 사연도 있었음을 알게 되네요. (루피너스[=루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감상하시려면 여길 클릭하십시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여태 나온 중 뤼팽이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한 여인과의 항구적 결합으로 이 작품은 마무리됩니다만, 그런 지어낸 듯한 감상적 결말이 애써 독자에게 주려는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전체 줄거리는 뭔가 비극적이고 애상적인 느낌을 기어이 어느 한 구석에 남기고 맙니다. 참 이상합니다.

뤼팽은 참 유쾌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니 성취한 일도 많고, 가공할 적수들을 통쾌하게도 사지에 몰아넣거나 법의 심판을 받게 헸으니 즐거울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에 비해 그가 차지한 부의 크기나 영토는 너무나도 좁고, 잔인한 악당들, 무능한 경찰들 등 너나 할 것 없이 이 뤼팽의 명철함과 우월함을 시기, 질투하기에 바빠, 세상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평판의 지극히 적은 부분을 그에게 허용합니다. 거기까지는 뭐 괜찮은데, 이 뤼팽은 그 보상을 엉뚱한 데서 취하려 듭니다.

이 작품 결말부에는 뤼팽이 총리 발랑글레(이분 <황금삼각형>에 이어 또 나옵니다)와 협상하여 자유를 얻어 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개척, 정복했다는" 모리타니 왕국을 프랑스 정부에 넘겨 주겠다는 제안이 나오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설정은 물론 미스테리 본 줄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베베르 부국장의 흉계에 넘어가 교도소에 갇혔으니,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최고 권력자와의 협상을 통해 감옥 문을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건데, 이 수법은 이미 <813>에서 한 번 써먹은 터라 식상하고, 이런 최후의 카드는 한 번 이상 쓰이는 게 매우 곤란합니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 뤼팽은 평소보다도 몇 배 더 즐겁고, 그 달성한 위업은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앨런 쿼터메인의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큽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 유독 자주, 위기에, 그것도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고, 판단 착오를 빈번히 범하며, 사건의 진상도 (종전과는 달리) 두 번에 걸쳐 더듬거리며 알아냅니다. 그렇다고 적수가 이전의 그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냐면 그것도 아니고... 제스처는 더 요란해졌지만, 내실은 많이 빈곤해졌습니다. 아마 르블랑이 이 작품의 구상을 깔끔히, 치밀한 사전 작업 통해 설계한 게 아니라, 도중에 여러 번 변덕을 부린 끝에 간신히 마무리지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시작은 정말 거창했는데, 그렇게까지 꼬인 미스테리라면 천하에 없는 작가라도 연착륙시키기 힘들 것입니다.

뤼팽이 그토록 판단을 그르칠 만한 여자라면 대단한 매력과 미모를 지닌 재원일텐데, 왠지 모르게 전작의 베로니크만큼도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007에게 본드걸이 있듯, 이 협객에게도 매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다양한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이 르바셰르만은 선명한 이미지가 남지 않더군요. 그토록 똑똑하고 착한 여인이, 왜 늙은 괴짜 가스통 소브랑이나, OOO 같은 인간에게 아무 쓸데없는 헌신과 애정을 보인 건지... 제가 언제나 지적하는 바대로, 행동의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정신이상" 따위로 마무리되고 만다는 게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Levasseur는 국립국어원이 정한 원칙대로라면 "르바쇠르"가 맞지 않을까요? 이 이름은 장 자크 루소가 여러 사생아를 낳게 한 어느 여성 세탁부의 이름과 같아서 특별히 좀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그저 범작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가스통 소브랑이 뤼팽의 거소까지 감연히 찾아들어와(원래 그 자리에는 르바셰르가 있기로 기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하나도 없지만, 진실이라는 가장 확실한 무기에 기대어 당신과 의논을 하려 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뤼팽의 입장엑서, 자신을 포함한 무고한 이들을 여럿 해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나중에 드러나지만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남자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특유의 통찰력과 직관(여러 번 이 덕목을 강조하더군요)을 발휘하여 소브랑의 말이 참임을 알게 됩니다. 소브랑 역시, 상대인 뤼팽이 자신의 말을 곡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도 명석한 판단력으로 진실은 진실대로 인정해 줄 줄 아는 뤼팽에 크게 감복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캐릭터들 사이에 대단히 깊이 있는 소통 모습을 창조해 낸 것으로서, 르블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 주어야 마땅한 대목들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뤼팽의 그 다음 결정이었습니다. 소브랑의 말을 믿건 안 믿건, 그들을 유치장에 보내는 게 자신의 행동 반경도 넓히고, 두 사람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며, 마주르 반장의 입지도 배려해 주늕동시에 공권력과의 상호 협력을 더 튼튼히 하는 선택 아니었을까요? 고의로 사람을 해치는 대신 교묘한 배후 조종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한다는 건, 크리스티 여사, 퀸의 작품에서도 이후에 등장합니다만, 이 작품이 그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회의적입니다. 이 작품이 그런 컨셉을 효과적으로 완성하지 못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와 행적 역시 말끔히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다만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더 이상 적지는 않겠습니다.

마치 관객들을 앞에 두고 실시간으로 벌이는 통속극처럼, 플롯의 전개에 일관된 원칙이 없고 너무 들쭉날쭉인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물론 읽어나가는 중에는 재미있는데, 다 읽고 나면 참 허전합니다. 마지막 순간의 (la derniere minute) 뜬금없는 변덕, "사람 살려!"를 처량하게 외치다가 무대에서 "나는 그 자를 고발합니다(Je l’accuse)"를 화려하게 되뇌는 배우가 되는 뤼팽, 도대체 거부할 수 없는 제안(choses qu’on ne refuse pas)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면서도, 한순간에 헌신짝처럼 버리고 "간지"를 택해 버리는 쾌남. 여튼 그의 매력은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지만, "아프리카의 왕"을 자칭하는 그의 모습은 뭔가 슬프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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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5-03-24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에 쓰려다가 깜빡 잊었는데, 이 소설에서 르블랑은 캐릭터 작명에서 우스운 센스를 보여 줍니다. 마즈로의 본명은 ˝알렉상드르˝인데, 물론 아버지 뒤마의 이름이죠. 이폴리트의 아들 이름은 ˝에드몽˝인데, 이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본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뤼팽은 호텔에 묵을 때 ˝르코크˝라는 가명으로 예약을 하는데, 이는 포우의 뒤팽보다 조금 뒤에 출현했고, 홈즈보다 앞서 나온 에밀 가보리우의 캐릭터와 이름이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