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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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을 할 때 "말린다, 말려서 졌다"라는 표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의 "말리다"는 그저 동사 "말다"의 수동형이 아니라, "남의 수작에 말려들다"를 속되게 일컫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근거와 정당성이 객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쪽이, 반대로 기세 좋고 치밀하게 덫을 놓고 상대를 몰아붙이다 보니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방어만 하다, 초기의 승세를 놓치고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이런 말을 씁니다. 이런 식으로 싸움에서 이기는 쪽은 정말 기술이 노련하다고 봐야 하는데, 미국에선 조지 W 부시를 두 번이나 당선시킨 선거전문가 칼 로브에게 이런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죠.

 

저는 조지 레이코프의 저술을 읽을 때마다, 반 세기 전 혜성처럼 등장해서 세상을 보는 새 시야 하나를 마련해 준 경제학자 케인즈가 떠오르곤 합니다. 정치적 성향은,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케인즈가 대단히 귀족적 리버럴이었다는 점에서 레이코프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세상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절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고 지시하는 데에 정면으로, 최초로, 그리고 가장 명징한 언어를 통해 반박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지적 의미에서의 프로메테우스들"이라고 불려져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체제는 더 이상 억압의 기제를 통해 사고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달콤하거나 휩쓸리기 편안한 "프레임"하나를 던져 주고, 그 색칠된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게 유도합니다. 영어 동사 frame에는, "사람, 대상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왜곡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대중들에게 "반유태주의. 인종주의"를 그저 강요나 폭력에 의해 퍼뜨린 게 아닙니다. 그는 세계사상 최초로 "프레임"을 활용할 줄 알았던 독재자였습니다. 대중은 이 노련한 정치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기 이해와 복리, 그리고 양심을 포기하며 불의에 봉사하려 들었죠.

 

우리는 보통 눈에 의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빛이 망막에 조영하는 대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매우 다릅니다. 유명한 사이먼스-채브리스 실험에서 잘 입증된 것처럼, 사람은 눈 앞에 고릴라가 지나가도 딴데 정신이 팔려 있으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두드러질 수 없을 만큼 뚜렷한 존재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시각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사고와 정신이 고릴라를 "당분간 미미한 변수"로 미리 설정해 놓았기에, 오관은 이 대뇌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어 뜬눈으로 거대 객체 포착을 포기하고 만 겁니다. "방금 뭐였지?"도 아니라, "아예 없었음"이 되고 만다는 게 마치 마법 같습니다.

 

칼 로브가 그리 승산 없어 보이던(지적으로나 외견상으로나 앨 고어가 더 매력적이었죠) 선거를 이긴 건 그의 탁월한 프레임 설정 능력 덕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번 선거는 사상 최초로 성 (性) 간 선호가 극명히 갈리는 승부다"란 프레임까지 만들어 내어 언론에 흘렸습니다. 아무래도 여성들에게 고어 후보가 더 어필하는 외모(이는 부시 측에게 불리한 요소죠)인 점을 감안해, 남성 레드넥의 질투심을 자극한 겁니다. 나아가 "고어는 여자들이나 찍는 후보!"란 인식을 퍼뜨려, 머릿수에서 앞서는 남성 유권자의 표 결집을 유도했는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런 전법이 2000년 선거 당시에는 먹혔다는 게 정말 신기합니다. 고릴라가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마법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의 위력인데, 그게 프레임인지 뭔지 대중들은 레이코프가 인터넷에서(나중에는 이 책 초판을 비롯한 그의 저술에서) 부지런히 설파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에 어떤 고정된 틀이 여유공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머리는 그 프레임이 보고 싶은 대로 사물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복잡한 사회, 정치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프레임 없이는 제대로 정리조차 할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인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듭니다. "뭔지 혼란스럽지? 이렇게 봐야 하는 거야!" 이때 미리 설정된 프레임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교활하게 짜여진 프레임은 결국 원래 뜻한 대로 판국을 몰고 가는 데에 성공합니다. 성공적인 프레임은 설사 논쟁에서 패배해도 설정자를 사이비 순교자로 만들기 때문에, 선동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결과에서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기면 이기는 거고, 져도 이기는 겁니다. 이게 프레임의 마력이죠.

 

저는 케인즈나 레이코프 같은 이가 제시한 이런 획기적인 비전을, 저런 사악한 프레임에 대비되는 "고마운 프레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차피 우리 뇌와 감정은 모든 광학 작용을 남김 없이 쓸어담는 방대한 필름 같은 게 아닙니다. 가이드 없이는 어떤 인지도 불가능합니다. 나의 생존, 나의 의지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내가 내 노력으로 타인 아닌 나의 복리에 이바지하게 도와 주는 프레임은, 선하고 고마운 프레임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라고 할 때 그 각성을 도와 주는 삼각대 하나를 마련해 준 이 기념비적 저작에 대한 경탄으로 독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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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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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주로 내 뜻한대로 뭐가 잘 안 이뤄질 때 그런 느낌을 갖곤 하지만, 애도 아니고 내 일 안 풀린다고 해서 그런 마음을 품으면 남 보기도 창피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별로 떳떳하질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이치가 원망스럽다 싶을 때 남 핑계를 곧잘 갖다 댑니다. "저 불쌍한 사람이 대체 뭔 잘못이 있다고 저런 불행을 겪어야 하나요?" 그게 사실 그 사람을 딱히 동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실패를 묘하게 명백한 불합리에다 끼워팔기하려는 이기적 속셈이기 쉽습니다.

 

존엄한 신이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방기하고 있으니, 이제는 어디서 악마의 도움이라도 빌려 와야 하겠습니다. 악마한테 영혼을 파는 그 찜찜한 죄의식도 이렇게 해서 무마되고 달래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파우스트>에 나오는, 빌려준 원본 몇 백 배로 이자를 쳐서 받아가는 무시무시한 채권자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덩치도 크고(?) 말도 잘하고 빈틈도 없는(빈틈이 있으면 그게 과연 악마인가요?) 그런 진성 사탄이 아니라, 몸도 쬐그맣고 아첨에 잘 넘어가고 정서적 약점도 있고 허술함 투성이인데 능력만 전능에 가까운(전지까지는 아닌가 봅니다. 모르는 게 많더라구요) 그런 악마가 있다면, 그건 가까이에 두면 왠지 재미도 있고 여기저기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존재는 사실 그냥 고마운 친구지 악마까지 가지도 않아서 나중에 된통 당하겠다는 우려도 없고요.

 

괴테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천재들의 성취 비결을, "데몬(디먼)의 장난"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천재나 위인의 관찰자가 아니라 본인 자신이 천재였으니만치 이 말에는 그저 "영감(inspiration)"의 문학적 비유라든가, 장난, 희언 비슷한 게 아닌 어느 정도 진정어린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몬"이 그 일을, 알고보면 대신 해 줘서 그렇다는 겁니다. 괴테는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보수적이고 종교적으로 완고했던 골수 가톨릭을 신봉한 고장에서 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사람인데도, 이런 이교적인 믿음에 기울길 별로 꺼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건 짖궂은 장난도 치지만 이처럼 인간에게 친숙한 존재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고지식하고 광신적이며 융통성 없는 태도는 이런 것들을 싸잡아 "이단"으로 몰 수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이런 일체의 초자연적 존재(혹은 개념)에다 "악마"라는 부정확한 범주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겠죠. 아자젤이 "악마"라는 부당한 이름을 지닌 건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아자젤은 못 하는 게 없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수괴 노릇을 하는 더 큰 악마에게 무슨 능력의 일부를 빌려 온다든가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좀 귀찮고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자기 힘, 정상적인 능력 발휘로, 우리 인간계의 꼼짝 않는 질서를 변동, 교란시킵니다. 이 역시 물리법칙(이게 아자젤의 그 세계도 지배하나 보죠?)의 한계와 예산에서 벗어나지 않아, 요술방망이로 뚝딱 해치우는 식이 아니라 과학적 계산을 통해 조지(주인공입니다) 아저씨(이런 악마를 믿거나 들고 다니기엔 나이를 엄청 먹은 할배입니다)의 얼토당토않은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자젤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지만 재능의 행사에 까탈을 안 부리는 걸로 보아, 자기가 속한 세상에선 그게 별것도 아닌 형편인가 봅니다. 그 말은 우리 인간(가장 평범한 수준이나 평균 이하)도 그쪽 동네에 가면 뭔가 톡톡한 쓰임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안기지만, 아자젤이 감정에 치우쳐 판단을 그르치는 모습이 한 번도 안 나오는 걸로 보아, 우리 인간은 이놈의 감정 조절 무능력 때문에 결국 저쪽에 가서도 별 힘을 못 쓰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이 18편의 이야기 속에서도, 아자젤이 애써 이뤄준 "기적들"은, 결국 은혜를 입은 인간들의 배은망덕이나 감정적 오용 때문에 실패나 재앙으로 끝나고 맙니다. 요는,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 해 봐야 인간 존재 자체에 내재한 모순과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은 "도루묵"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신랄한 냉소나 블랙 유머는 이 주제의 생생한 구현에 이렇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아시모프는 SF를 쓸 때 미사여구나 문학적 기교를 엄청 자제하는 편입니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문장, 아니 초등학생이나 읽으라고 쓴 듯한 문장 때문에 처음에는 그 위대한 고전의 수준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빚어질 정도죠. 그러나 이 소설은 거의 서거를 몇 년 앞둔 시점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뇌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했는지 증거라도 보여 주겠다는 듯, 미칠 듯한 유머와 해박한 지식을 동원한 말장난으로 가득합니다. 아자젤 이야기보다 1인칭 화자와 조지 영감 사이의 대화가 너무 웃겨서 책 진도가 안 나갈 지경입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알고보면 그 방대한 지식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즉, 재미가 없습니다) 동원하는 반면,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 뻬어난 두뇌로 일생 동안 섭취한 지적 자산을 갖고 유쾌하게도, 어린아이처럼 즐기고 놀고 있습니다. 에코의 저술에서 은근 반유대주의 냄새가 나는 건 이 선배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탓도 있다고 저는 짐작합니다.

 

아시모프는 뭔 이유인지 주인공 조지를 통해 셀프 디스 개그를 이 단편들에서 쉴 새 없이 구사합니다. "한 번 강연에 몇 천 달러를 대가로 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미적지근하죠? 공짜로 시작한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에게 당신이 '이제 몇 천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이 강연을 계속 이어가버리겠어!'라고 협박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폴로 13호가 사실은 여행 중독자 한 사람을 태우고 달나라로 그대로 가 버렸다는 미친듯 웃기는 이야기는, 마지막에 "원더링 쥬(방황하는 유태인)"까지 슬쩍 끼워넣고 있습니다. 만약 아시모프가 유태인이 아닌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엄청난 물의가 빚어질 소지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가 하면 웬 할아버지가 Y담을 이렇게 좋아하나 싶게, 성적인 코드가 물씬 묻어나는 제법 위험 수위에 도달한 개그도 많이 나옵니다. 처음 절반은 다분히 교훈적이고 소프트 SF스러운 이야기가 많은데, 나중에 가면 작정하고 개그를 치겠다는 듯 아무도 못 말릴 난장판(그러나 지적인)으로 흐릅니다. 특히 <갈라테아>편은 읽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면 내용 이해를 못 한 것이니 다시 잘 살펴 보십시오.

 

살다보면 짜증이 날 때가 많습니다. "이 빌어먹을 신호등은 내가 오기만 하면 full로 빨간불이야!" 그래서 내 주위의 엔트로피를 일괄적으로 낮춰 놓았더니, 그 정연한 질서 때문에 삶에 분노할 일이 없어 자극이 없고, 자극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 결국 두뇌가 퇴화하더라는 겁니다. 무질서에 감사할 줄 알고, 빈곤에 고마운 줄 알아야 제 인생이 풍요와 보람으로 가득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박식할 뿐 아니라 세상 이치에 달통한 노인 아시모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그래서 전능하지만 전지하지 못한 말썽꾸러기 아자젤보다, 혹은 도라에몽보다, 부족한 우리네에게 더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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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에 기름붓기 열정에 기름붓기
이재선.표시형.박수빈.김강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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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란 양날의 칼과도 같습니다. 바람만 잘 맞게 불어 주고, 그 향하는 시선만 올곧게 뻗어 준다면, 이 열정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도 도움을 줍니다. 둘 중에 어느 한 목표만 이룬다면, 쾌락과 공리(功利) 중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할 수도 있는데, 열정은 두 토끼를 모두 손 안에 쥐게 도와 주기도 합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열정은 진정 소중히 여겨야 할 게 그걸 가진 자신도 자신이지만, 보고 있는 타인들도 "이거 괜찮겠다" 싶으면 옆에서 부채질을 살살 해 줘야 합니다. 그게 영리한 선택이자 일종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청춘들의 딱한 모습을 보고, 어느 시대보다 소중한 열정을 불사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시대에 태어난 그들을 위해, 제발 활활 좀 불타오르라고 부채질을 하기 위해 모인 분들이 이재선, 표시형, 박수빈, 김강은 네 분입니다. 부채질을 하는 손, 팔이 피곤할까봐, 혹은 부채질 받는 쪽에서 미적지근해할까봐, 양, 질 면에서 무시무시한 화력을 지닌 기름통도 피처링해 왔습니다. 정여울, 진중권, 고병권, 장석주 네 분입니다. 이 정도면 참, 설사 냄새 나고 여기저기 썩은 사회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가진 열정을 다 던져 버리고 메마른 먼지가 되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조차 남기기 싫었던 청춘들이, "아, 이럴 게 아니었어!"라며 심지에 재 점화를 시도하기 충분합니다.




하긴 어느 시대 청준들인들 열정 없는 쭉정이로 살았겠습니까. 평균 수명의 소장(消長)에 따라 중노년이야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었지만, 청춘은 어느 시절 사람들이나 열여섯에 피어나 십여 년 개화하다 봉우리를 서서히 닫지 않습니까. 청춘은 그래서 신이 빚었던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 온 선물입니다. 길어야 할 것은 인생 자체가 아니라 청춘입니다. 청춘이 아직 우리 의사대로 길어질 순 없기에, 그 대용물로 우리는 열정이라도 키우려고 합니다. "젊음은 그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의식, 의도하는 만큼만 정해진다."는 말도 있지만, 청춘이 우리의 의도에 따라 뭐가 좌우되는 바가 있다면, 통제 가능한 유일 변수는 바로 이 열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열정이 있는 한 그는 청춘"이란 말은, 정말 열정이 남아 있는 이상 초라한 자위는 결코 아닙니다.



 


한 마리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 다른 무리들도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레밍이라는 쥣과 동물이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참 자연이란 랜덤의 허수아비극을 자주 펼치고, 적자 생존이니 뭐니 하는 진화의 원칙(?)이 아무 의미 없이 빈 것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거릿 대처는 "아니다 싶어도 네 갈길을 가라. 남들 따라 무작정 죽을 길을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습니다. 사실 정말 무서운 생각은, "내가 가는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란 자각이 아닙니다. "나만 빼고 어떻게 저들은 모조리 죽을 길로 돌진하고 있을까?"란 생각, 이 세상이 저주 받은 곳 아니냐는 느낌입니다. 노인들 하는 말 중에 "모두가 겪는 난리는 난리가 아니다"는 게 있죠. 물론 여럿이 합심하면 한국전 같은 큰 재앙도 쉽사리 패닉에 빠지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그 세대에는 "그저 대세를 따라가는 게 장땡"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후자의 의미가 더 지배적입니다. 자소서를 써도, 스펙을 쌓아도, 남들 하는 대로만 그대로 따라하니, "할 만큼 했어"라며 마음은 편할 수 있지만, 과연 인사담당자의 눈에 찰 확률이 높아지겠습니까? 그건 "회사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아니라, "회사에 떨어지고 나서 마음이 덜 아프려는 노력"입니다. 할 만큼 했는데 안 되었으니, 그저 운이 나빴다고 값싼 위로를 삼으려는 동기 뿐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설사 입사에 성공해도, 그게 좋은 직장이 되기 힘들 뿐 아니라,  회사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받은 채 승진도 안 되고 매일매일 간신히 연명이나 하며 독서로 현실도피나 하는 루저밖에 못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여튼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창의적 방향으로 "튀어야"만 남들이 봐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 자신이기만 하면 되는 분위기"를 강력히 방해하는 게 있습니다. 이미 사회에 팽배한(저자들의 표현입니다) "성과주의"가 그것입니다. 성과주의는 남들의 시각으로 나를 판단하게 만들며, 그 남들 역시 다른 남들의 시각에 의해 판단하게 하는 무서운 감시, 소외의 기제입니다. "이러니 누가 밤에 불안해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책 저자들이 내리는 진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저자들은,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기준점을 나 자신으로 잡는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사회에 반항하고 부정하라는 주문도 아니고, 근거도 없이 자기만족적 행보로 날뛰라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왔다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기에 충분히 자격 있는 인생 아니냐, 이런 뜻에서 저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종착 없는 레이스에 지친 당신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30개의 아포리즘과, 그 아포리즘을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한 사진, 아포리즘만 갖고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 못할 독자들을 위해, 아포리즘 못지 않게 아름답고 호소력 강한 언명들로, 각 챕터들은 채워져 있습니다. "피처링된" 네 분은 (좀 더 작은 글씨로) 잔잔한 에세이, 그러나 마음의 공명을 강력히 타종하는 격려와 충고로, 슬슬 불꽃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는 열정의 요람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어쩌면 딱히 목적과 지향이 없다 해도,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게 열정과 불꽃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물며 그에게 뚜렷한 비전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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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경제학 - 불황 10년, 가정부터 지켜라!
김준성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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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상승률 0%가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요즘이지만, 대한민국 어디서나 가계의 주름살은 깊어만 갑니다. 이 책에도 나와 있는 말처럼, "저축 안 하면 아이스크림 하나도 못 사 먹는 때"가 언제 우리 곁에 와 닥칠지 모릅니다. 신흥국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라도 물가(하락)와 경제성장(호조)이라는 두 가지 과실을 동시에 따 먹을 수 없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대한민국의 경제는 두 가지 과실을 동시에 맛보기는커녕, 손 안에 쥐고 있던 수확도 동시에 다 빠져나가는 듯한 불길함과 걱정이 앞서는 요즘입니다.

 

특히 중장년층은 땀흘려 일 하면 손에 뭐라도 들어 왔던 과거 호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제 곧 경기가 좋아지면...."의 희망을 웬만해선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써 낙관적 전망(즉 물가 상승이라도 당분간은 주춤할 것)을 앞세운다 해도, 이 "예전 수준의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속한 경제 구조의 속성을 감안할 때, 이제는 접어야 할 시점입니다. 지금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갓 진입하려는 세대라면, 오히려 현실적이라서 자기 눈 높이를 알아서들 낮추더군요. 그러나 그들 역시, 절약과 노후 설계(아직 젊으니 까마득한 남 일이죠)에 대해선 개념이 없고, 이를 가르쳐 줄 세대도 없습니다. 너무 나이가 많은 분들은 그저 안 쓰고 안 먹는 것 말고는 해 줄 이야기가 없고, 그들의 부모 세대는 호황에 익숙한지라 실질적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이 안 쌓여 있으니, 새로 배워야 하는 처지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언론에서 떠들듯 지나치게 공포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간전기와 같은 대공황이 휩쓸어, 모두가 거리에 나앉게 될 위기는 현재로선 도래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풍요롭지 못하다는 것"과 "보릿고개 수준의 기아"는 성질이 다릅니다. 보편적 궁핍(누가 뭘 해도 소용이 없음)과, 그저 상대적 수준에서의 빈곤의 만연은 차원이 다릅니다. 후자는 적절한 내핍, 그리고 지혜로운 생활 습관과 개인적 장기 계획의 도입으로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고, 남들이 호주머니 사정으로 쩔쩔맬 때, 나만의 영리한 대비책으로 상대적 여유를 즐긴다 함은, 그게 비난 받을 이기적 쾌감은 아닙니다. 이런 이유에서, 머리 쓰고 적절히 슬기를 발휘한 사람이 남들 못 누리는 윤택을 향유하게 된 상황은, 오히려 누구에게나(노력을 했건 안 했건) 혜택이 주어지는 것보다 더 즐겁고(?) 정의로운(!) 구석마저 있습니다. 이 책은, 앞으로 더욱 팍팍한 살림살이로 보편적 고민을 헤야 할 세상에서, 그런 적절한 노력을 행한 이들에게 응분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전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지혜"가 무엇인지만 검토하고 실천에 옮기면 됩니다.

 

제가 역사책을 읽으면서 아찔해지는 순간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 먼 땅에서의 약탈에 성공, 감당할 수도 없는 부를 손에 거머쥐는 그 장면을 접할 때입니다. 직접 정복/약탈을 감행한 자들 중 상당수는 현지의 지배층으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까지도 오랜 계급 갈등의 원인이 되는 자산 소유 계급으로서의 기득권을 고수하려 들고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덩달아 부자가 된 스페인 본토의 많은 이들은, 그러나 이 보난자가 처음부터 없었던 만 못한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17세기가 끝나기 전, 이미 스페인은 유럽에서 형편이 가장 어려운 나라의 대열에 슬그머니 끼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세계를 호령하던 최강의 부국이, 생존을 걱정해야 할 지경까지 떨어지고 말았을까요? 그들은 1) 손에 들어온 돈의 덩치를 굴리는 법을 몰랐고(이것만으로도 위험한데), 특유의 감정적 기질로 화끈한 삶만 추구하다 보니 들어오는 수입에 무관하게, 2) 최상의 벌이가 되던 수준에만 맞춰 써 대고 써 대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1)과 2)의 위험을 함께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은, 성장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 아직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드물고, 사실 깊이 들어가다 보면 돈 버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며, 아니 그 자체가 돈 버는 방법의 일종입니다. 2)는 노인분들처럼 무조건 내핍을 시도하는 식으로는, 젊은 세대나 중년 어느 쪽도 실천하기 어렵고, 혹여 그런다 해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입니다. 1)을 모면하는 지식은 원래부터 귀한 지식이고, 2)에 대해서는....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전혀 모르다시피한 지식입니다.

 

흔해빠진 금융상품 투자만도 그렇습니다. 부동산 뿐 아니라 주식도, 그저 사 두기만 하면 무한정 가격이 올라가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현 시점에서 대장주라 꼽히는 블루칩-예전에는 그저 사 놓고 방구들에 묻어두라고만 했습니다-도 사정이 예측 불허입니다. 포스코나 삼전도 단기 위험 전망을 논해야 하는 시절이 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을까요. 많은 분들은 그저 호시절만 기억에 담고 있다 보니, 요즘 도무지 증권회사에 돈을 맡길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공부해 가면서, 혹은 합리적인 증권맨의 조언을 들어가면서, 숨어 있는 노다지를 찾아 나설 땝니다. 이 노다지는 과거처럼 폭풍 수익을 안겨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햄스터 눈물보다 알량한 제도권 보장 금리와 비교할 수 없으며, 그 투자가 안기는 적정 위험을 감안하면 산타클로스의 선물과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적정 위험"의 개념을 모르는데, 수익이 낮아 보여도 위험이 그에 상응할 만큼 높지 않다면, 합리적 의사 결정자는 이런 선택안을 "대박"으로 간주합니다. "오, 이거 좋은데?" "난 모르겠는걸, 더 생각해 보고." 유리한 투자안을 (카너먼 식으로 표현하면) "패스트 씽킹"으로 바로 알아 보는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의 승자로 남을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부터, 위험과 수익 사이의 운명적 상충 관계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도 풍요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아직도 "왜 아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있는 집 자식들은 안 가르쳐 줘도 알아서 구두쇠짓이 몸에 배어 있고, 오히려 없는 집 애들이 돈 더 잘 쓰고 다닙니다. 장기계획이란 정말 노후 대비를 위해서도 중요하고, 절약(이라기보다 합리적 소비)를 당장 지금부터 몸에 익힌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가장 달콤한 행복을 맛 봐야 할 신혼에, 인생의 장기 계획을 잡으라는 조언은 다소 별나게 들릴 수 있습니다만, "가계"야말로 계획과 구체적 행동의 주체가 될 새로운 단위입니다. 지금까지 개인 단위로 경제 계획을 꾸린 사람은, 이제 배우자와 함께 좀 다른 계획을 새로 짜야 합니다. 만약 배우자가 계획 없이 살아온 사람이라면, 나는 그 배우자에게 "앞으로 우리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계획 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둘 다 자기만의 플랜을 잡고 살아왔다면, 같이 통합, 수정하고 개선하는 작업이 둘만의 행복을 더해 줄 것입니다. 결국 경졔계획은, 물질 뿐 아니라 사랑의 노하우이기도 한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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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파노라마 - 피타고라스에서 57차원까지 수학의 역사를 만든 250개의 아이디어
클리퍼드 픽오버 지음, 김지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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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클릭 ) 이 책 제목 일부에 붙어 있는 의미가 아마 2번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애써 보려면 못 볼 건 없는데, 한 눈에 보기는 힘이 들 때, 불리한 조망 위치에서도 멋진 광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사방을 둘러 가며 입체감 있게 보여 준다는 의미로 우리는 보통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이야말로 그런 이름을 달고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데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비의는 우리 인간의 유한한 인지 능력으로 쉽게 더듬기 힘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분명한 사고를 한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그 순간에도, 그저 번잡한 말로 추측만 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숨겨진 비밀을 가르쳐 주는 언어가 바로 "수학"입니다. 우리가 쓰는 일상의 언어에는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것도 많고(비트겐슈타인 등이 이런 쪽으로 노력을 하려다 실패했죠), 감정이나 기타 긴하지 않은 요소가 많이 끼어들어가기 때문에, 일상어를 도구로만 써서는 진리의 핵심에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이런 힘든 시도를 하는 분야가 철학이고, 그 한계를 일찍 깨달은 현인들에 의해 역시 넉넉히 오래 전부터 개발된 도구가 "수학"입니다. 우리 현생 인류는 부지런히, 이 두 도구를 모두 사용하여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때로는 그 이상의) 발견과 발명을 해 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학의 경우 다루기가 몹시 어려운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공부 잘하고 부지런한 아이들도, 벌써 중학교 1학년만 들어가도 (-) 부호를 다루는 연산을 어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 고비를 넘긴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입학해도, 제곱해서 음수가 나온다는 허수를 버거워합니다. 뿐만 아니라. 칸토어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수학자들(일반인이 아니라 수학자들입니다)도 채 이해하지 못했던 "무한"의 개념은 또 어떻습니까. 제가 문제를 하나 내어 보겠습니다. "모든 소수(프라임 넘버)를 다 곱한 것은 짝수입니까?" 2가 끼어 있으니, 2의 배수는 모두 짝수이므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예"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답은 "알 수 없다"입니다. 왜? 가장 큰 소수가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으므로, 그 소수들을 다 모아 놓고 곱한 것 역시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의 기우(짝홀)을 어떻게 판정하겠습니까. 이 문제는,
2, 4, 6, ... 2n, ....
이 수열이 어디에 수렴하느냐에 대한 답과 같습니다. 답은 "수렴하지 않는다"일 뿐입니다. 모든 항이 짝수라도, 그 최종항이 짝수라는 말은 못 합니다. 최종항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일반항이 짝수인데 어떻게 최종항이 짝수가 아닐 수 있는가? 이게 역설(패러독스)이라고 느끼는 분은, 그분 저기 그... 수학 못 하는 분입니다. "역설이 다 뭐야? 당연한 소릴" 이렇게 나와야 그게 수학 마인드 쬐끔 갖춘 이의 반응이죠. 



 

이처럼 우리는, 일상 언어로만 문제를 내고 문제를 풀려다 보니, 우리가 뻔히 아는(알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틀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수학으로만 문제를 표현하고, 수학적 언어로만 그 답을 내다 보면, 그런 오류에 빠지지는 않습니다(답이 꼭 나온다는 말은 아닙니다. 수학을 동원해도 안 풀리는 문제는 얼마든지 있죠). 그런데 다시, 문제는 수학이 너무 어려운 도구라서, 아무나 다 이 도구를 들고 논의의 장에 참여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수학이 어려운가? 우리의 감각과 수학의 구조(혹은 요소, 언어)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보통 수학을 두고. 불만 많은 이들은 "추상적"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어느 일상 언어보다도, 수학은 구체적이었으면 구체적이었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숫자가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있을까요? 일확천금은 추상적이지만 천만 달러는 아주 구체적입니다). 한때 칸토어, 코시 이후 발전된 여러 분야를 두고 "현대대수학", 혹은 "추상대수학"이란 이름이 붙기도 했지만, 이 명칭은 잘못된 거죠. 더 이상 "현대적"이지도 않고, "추상적"이지는 더더욱 않으니까요(요 표현은 제 말이 아니라, 제가 학교 다닐 때 어느 권위있는 교수님 말씀이고 그분 저서에도 나옵니다).



 

그래도, 수학은 추상적입니다. "뭔지 잘 모르겠다"는 의미에서만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합니다. 가뜩 채워진 수식이 과연 뭘 의미하느냐? n차원 벡터, 아니 n차원이란 말 자체를 모르겠다. 3차원에 차원이 하나 더 붙으면, 비슷한 그림이 연속으로 죽 붙어 있는 그런 걸 상상하면 되느냐? 그럼 5차원이면 이걸 평면(혹은 입체)에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어차피 그림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최대한 비슷하게라도 그려 주면, 아이들이나 (이미 수학에 실패, 쓰디쓴 실패를 맛본) 어른들도, "눈 앞에 그려지는 그림 덕분에", 그 추상적이었던(사실 아니지만) 수학에 대한 "희망 있는 두번째 만남"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라서 아직 "수학과 쓰디쓴 첫번째 만남"을 안 겪은 처지라면, 마음과 두뇌에 상처 안 입게 이 책으로 "달콤한 첫 키스"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 때 누구에게 거절당하고, 좌절하고 뭐 이런 아픈 경험을 하면, 항구적 뇌손상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요 책을 살포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갖다 펼쳐 주면, 공연한 소모적 상처로 성장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낑낑거리는 일이 없을 줄 압니다.

아이들이 (싫어하지는 않더라도) 과연 좋아할까요? 정말 첫키스처럼 달콤할까요? 네, 물론입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잘생긴 사람 얼굴을 보게 되면, 한동안 시선을 거기에만 고정시키고 빤히 보죠. 우리는 선입견 때문에, 혹은 체면 때문에 그러지 않습니다만, 아이들은 눈이 오염되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있는 그대로 볼 줄을 압니다. 수학이 그 방정식 뒤에, 숨겨 놓고 내처 말하지 않았던 그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구조는, 이 책에서 보시듯 인간의 상상 범위를 넘어 저처럼이나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 이런 구상들은, 이미 어느 소프트웨어(매스매티카 같은)의 도움을 얻어 컴퓨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식을 입력하고 엔터를 치기 전에 PC가 알아서 서빙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그런 멋진, 가능한 아름다운 모습들 중에 가장 유용하고 근사한 것들을, "주문하기 전에 먼저 알아서" 우리 눈 앞에 파노라마로 척 펼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중고등학생들에게 읽힐 때엔, 특히 "극좌표계"가 무엇인지 미리 알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구과학 시간에 이걸 다루기 때문에 알고 있는 개념인데, 수학 책에 그 이름으로 안 나오고 연습 문제도 이를 정면으로 다룬 게 없어서인지 모르는 애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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