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분실물센터
브룩 데이비스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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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예전에는 질병으로 고통을 겪거나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체가, 어떤 죗값이나 치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고도 하죠.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아픈 게 환자의 책임은 아닌데, 예를 들어 나병환자 같은 이들은 천형(天刑)을 받은 이들이라 해서 일반인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학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엔 의학과 사회 안전망이 발달하여 이런 무지몽매한 말썽이 일어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학대와 비인도적 처사가 사회에서 아주 없어진 건 아닙니다.

질병이야 혹시 당사자의 부주의, 부덕(不德)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육체가 늙고 쇠약해져 생산에 참여할 수 없고, 정신 능력이 감퇴하는 건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노인들이 사회에서 괄시를 받고, 심지어 제 친자식들에게도 버림 받는 모습은, 양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게 설사 나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분들의 사정이라도 보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편, 이제 갓 취학을 준비할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라면 어떨까요. 아이들이야 아주 예쁘거나 덜 예쁜 차이만 있을 뿐, 어린 것만으로도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별 걱정이 없지 싶지만, 그 아이가 예컨대 고아라든지, 혹은 범죄의 피해자라든지 하는 뒷사정이 알려지면 쓰다듬던 손을 괜히 치우는 게 보통 어른들의 심리 아닐까요. 그래선 안 되는 거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아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정을 두고 유형 무형의 불이익을 주는 건, 그게 어른으로서, 또 양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닙니다.



이 소설에는 이처럼, 딱히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여러 이유로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덧나고, 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온갖 소동과 낭패스런 말썽이 벌어지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흉진 자리를 봉합하게 되는 긴 사연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신이 성치 못하며 그 부작용으로 성깔이 아주 괄괄해진 할머니(애거서), 정신은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더 말짱한 듯하나 깊은 상처 때문에 노망의 가장을, 반 강제로 행하게 되는 할아버지(칼), 철없고 엉뚱한(그 또래들보다 더)데다 연이은 이별, 상실, 죽음을 접하고 지금 극히 혼란스런 지경에 빠진 여자아이(밀리), 이 셋의 "탈출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탈출"이라 함은 탈주자의 의지와 주체성의 산물인데, 이들이 행하는 탈주는 사실상 "정상인들로부터 떠밀려나는 축출"에 가깝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감정과 양심, 진정에 따를 뿐인데, 얽히고설킨 여러 오해와 갈등이 그들을 자꾸 주변, 경계 밖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아픔에 대처하겠다는 최소한의 바람조차 사회에 의해 기각되어, 급기야 범죄 수배자 신세로까지 전락하는 웃지 못할 풍경에까지 끌어들여지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뜻하지 않게 공동으로 나서게 된 기이한 여행은, 이 책 표지에 나온 대로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읽기로는, 이 세 명은 "우연한 상실"에 의해서만 아픔을 겪게 된 게 아닙니다. 칼은 아내를 잃고, 비정한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혹은, 버림을 받기 직전 자발적으로 집을 나왔죠). 늙은 과부 애거서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미친 노파 취급을 받았습니다. 밀리는... 책을 몇 십 페이지 넘기고 나서야 명시적으로 경위가 밝혀지니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역시 "잇단 상실 이후, 상실을 넘어서는 큰 시련"을, 사려 밝지 못한 "누구"에 의해 겪게 된 피동적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까놓고 말해, 이 셋은 "무엇인가를 잃은 이들"일 뿐 아니라, "누구에게서 버려진 이들"이란 뜻입니다.

원제목을 보면 "LOST, FOUND"입니다. 영어의 lost는 뜻이 모호한데, 1) 누군가에 의해 잃어버려지고 다시 찾아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missed) 경우가 있겠고, 2) 그냥 유기된(abandoned) 경우가 따로 있겠습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3) "갈 곳을 잃은 채 헤매는"의 뜻을 언제나 가지겠고요. 이 소설의 "3인조"는 2)+ 3) 입니다. 소설 종반쯤에 가면 밀리(밀리선트 버드)의 입에서 "유기"라는 말이 그대로 나옵니다. found는 그럼 무엇인가, 이들이 참된 가족, 혹은 동반자를 따로 구하기라도 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3인조 개개인은 너무도 취약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라, 심지어 서로가 서로에게조차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찾아진 건", 매니(이게 뭔지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를 저 해안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리고, 고독과 상실, 소외의 공포를 정면으로 바라보겠다는 달관의 마음가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외되고 핍박받아온 그들에게 온전한 보상과 희망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의는 소설 결말에 가서도 실현된 건 아닙니다.



상처는 과연 "힐링"될 수 있을까요? 크게 흉이 진 피부에 세월이 많이 지나도 웬만해선 옅은 자국이라도 남는 것처럼, 마음의 상흔은 말끔히 치유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힐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망각이 그를 대신할 뿐입니다. 우리 잘못이든 아니든, 상처는 일생을 통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 상처가 영혼의 다른 부위에 건강한 자극을 주어 성장시켰다면, 그 상처는 인격의 개성으로 승화될 수는 있습니다.그렇지 못하다면, 그 상처는 유기체 전체를 괴사시키는 겁니다. 흔히 쓰는 비유로 "껍질이 깨지는 아픔"이라든가, "조개가 진주를 품기 위해선..." 같은 것들이 다 이런 피치 못할 우회적 성장 경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3인조" 역시, 상실과 소외를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뿐 어떤 대체품을 필사적으로 구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구할 수 없는 걸 구하려 해 봐야 자기 상처만 도질 뿐입니다.

캘굴리(중학교 사회 시간에 금 산지로 유명한 도시라고 우리가 배운)로 가는 도중 우연히 만난 착한 버스 운전수 스텔라가 이 세 사람을 도우려 듭니다. 하지만 셋은 우연찮게도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사실상 거부하고 또다시 작은 엑소더스를 벌입니다. 스텔라 아니라 그 누구도 이들을 도울 수는 없었던 것이며, 이는 자신의 시련은 결국 스스로의 노력 말고는 어떤 외부의 힘도 기댈 수 없다는 걸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다닌 학교가 공부 말고 자신의 개성을 키워주는 시스템이었다면', "내가 다니는 회사가 애플처럼 직원을 존중하는 조직이었다면.." 다 남탓, 환경탓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능자들의 현실 도피 주문에 불과합니다. 이 책에는 애거사의 입을 빌려, "우리 때에는 (방황과 탈선의 시기라는) 틴에이저란 말이 없었지! 네 살 이후면 요람을 박차고 나와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 법이거든!"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물론 웃자고 삽입한 대사이겠습니다만, 속보이는 언사로 자기 합리화를 하려 드는 불성실분자들에게는 경종을 따금히 울리는 의의가 충분합니다.

개인적으로 요즘 호주 출신 작가들의 역작을 많이 읽게 됩니다. 중견작가 리언 모리아티의 <허즈번드 시크릿>과 이 소설(젊은 여성 신예의 데뷔작입니다)은 두 군데 닮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성 버스 운전수가 조역으로 등장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결말에서 전지적 작가가 주인공들의 미래 사정을, 느닷, 주루룩, 후다닥, 그리고 묵시적으로, 읊어 준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시련이 있고 장애가 발을 밟아도 "삶은 계속되기 마련"입니다. 한국어 번역제목은 보시다시피 <밀리의 분실물센터>인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이렇게 옮겨진 데 대해 다소 코믹한 느낌마저 듭니다. 인생을 어떻게 달관하고 조망할 것인지, 천진한 눈, 노망한(...)눈이 교차하며 리사이트하는 긴 여행기, 한번쯤은 주목하고 넘어가야 할 인생의 이면 그 (의외로) 진지한 진단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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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이라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시리즈 (원앤원북스)
김경준 지음 / 원앤원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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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공서열로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직급을 하나하나 밟아나가던 시절과는 달리, 오직 능력과 실적에 따라 직원의 가치가 평가되는 기업 문화가 자리잡고부터는, 이전 세대는 알지 못하던 "팀장"이란 새로운 리더가 어느 직장 구조에나 등장해서 부서 소속원들이 무사안일주의에 빠지지 않고 기업 효율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습니다. 조직이 정체(停滯)와 무기력에 빠지는 건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경직되면서 (어찌 보면)필연적으로 겪는 과정인데, 이병철 창업주가 아직 대권을 쥐고 있던 시기의 말엽의 삼성도 그랬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반발과 부작용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조짐을 경계하여, 누구도 예상 못하던 과단성과 단호함을 발휘하여 조직의 둔화와 낙후화를 막았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팀장의 자리란, 한국 기업에 도입된 지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으면서도, 개별 기업이 험난한 외부 변수의 도전에 잘 대응하고 극복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가장 액티한 관리직"이며, 한 직원이 이사나 중역, 나아가 CEO로 성장할 만한 재목이 되는지를 최초 검증할 수 있는 시험장과 같습니다. 연대장, 대대장급 지휘관이 유능하고 기민해야 군대가 강력해질 수 있듯, 팀장들이 강한 회사라야 경쟁사들을 제치고 승승장구하는 장수 우량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에도 이런 "최일선 지휘관"의 중요성이 기업주들에게 인식되어서인지, 군에서 장교로 오래 복무한 인재들을 수출기업에서 스카웃해 오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낭만적(?) 아웃소싱이란 상상도 못하며, 직원들 스스로가 알아서 독종 만능 특무대장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본인의 좌천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체 자체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힙니다. 그렇게 사내에서 한번 굳어진 평판은 회복이 어렵고(사회는 한 번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고과 기록이 계속 남기에 이직 전직시에도 (타 기업) 고위급들이 돌려 보는 자료에서 반드시 참고가 되므로 커리어 관리에 지독한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요즘은, "성공하는 팀장이 되는 비결"을 다룬 책이 여러 권 나오는 추세이며 저도 이들 중 두어 권 정도를 완독하고 생각을 정리한 적 있습니다. 꼭 대리급들만 이런 책을 읽는 게 아니라,과장 부장 나아가 이사들도 초심을 찾기 위해 back to the basic한다는 의미에서 내용을 반추하는 모습, 많이 보이곤 하죠. 이 책과 다른 책이 확실히 차별화되는 점은, 1) 철저히 현실주의적 백그라운드에서 다소 냉혹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팁을 제공하며, 2) 다른 나라의 실정보다는 우리 한국 기업들의 살벌하고 비정한 상황을 더 많이 반영한 내용이라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우리는 이런 책을 읽을 때 흔한 "힐링"이나 마음의 값싼 위안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므로, 독한 예방약과 따끔한 주사를 맞는 기분으로, 하드 멤버십 트레이닝의 일종이라 여기고 책의 내용을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이런 책을 읽고도 "다들 하는 이야기 아냐?" 정도의 반응이 나온다면, 직장에서 자신의 "임전 태세"가 화석화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한 자기점검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당장은 무감각해지는 게 대증요법일 수 있으나,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유기체는 죽음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팀장은 어떤 권위나 자격에 기반한 직책이 아니라, 실적을 내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라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 가지 목표에만 전심 집중해야 하지, 이런저런 혜택과 부대적 수익에 좌고우면하다가는 자신뿐 아니라 팀 전체를 망칩니다. 이사, 부장도 그러할진대(요즘은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도 파트너 변호사가 일감을 물어 와야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물며....) 팀장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단기 프로젝트 수행에 있어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 다. 하나뿐인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다른 일체의 곁가지는 무시하는 게 팀장의 소임입니다. 이 책에서는 따로 말이 없지만(이 책은 팀장의 직분을 논하는 책인데 다른 이야기를 않는 건 당연하죠), 고위 관리직으로 올라갈수록 여타의 사정들을 두루  고려하는 능력, 원모심려의 수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팀장은? "미안하지만 그런 거 없다" 입니다. 그런 걱정은 부장 달고 별 단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은 최근 부상하는 소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2년 전쯤에 필립 코틀러가 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요. "앞으로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CSR은 필수 수행 과제 중 하나로 편입해야 한다"'는 게 그 책의 요지였습니다. 그런데 김경준 소장님이 쓰신 이 책은, 그런 입장에 대해 아주 호되게 비판하는 쪽입니다. 심지어 "일부 학자의 왜곡 과장"이라는 표현도 쓰십니다. 혹시 그런 권위자의 주장을 함부로 폄훼한다는 반응을 우려하셨는지(?) 베인앤컴퍼니 CEO의 말도 인용하시면서 "사회적 책임을 우선시,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 과감히 무시하라. 기업은 본래의 목적인 가치 창출 외에 전념하면 그만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김경준 소장님의 책도 여태 여러 권 읽었기 때문에 이런 기조는 사실 뜻밖은 아니지만, 문맥적 추론의 고리들이 어느 지점에서 부딪히는 것과, 이처럼 핵심 주장 사이의 정면 충돌하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입는 충격의 정도가 다르죠. 저는 "여튼 팀장 수준에서는 주제넘게 CSR에 개의할 필요는 없다" 정도로 정리했습니다. 다만 이 책의 해당 챕터는 "투명경영" 자체에도 회의적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 책임의 부차화"를 넘어 "반사회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맥락으로까지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팀장의 지식은 "지식인적 지식"이어서는 안 되고, 현장에서 척척 쓸모를 발휘하는 "상인적 지식"이라야 한 다는 게 예전부터 공병호 박사가 주장해 온 바고, 김경준 소장님도 이 책에서(이분의 다른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토픽입니다) 재인용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머리 속에 든 지식이라는 게 전자쪽에 아무래도 더 무게중심이 놓여 있다 보니, 습관적으로도 후자 지향을 이루려고 평소에 대단히 노력하는 편입니다. 어설프게 상황에 맞지도 않는 인문 잠언을 현장에서 설파하면, 그게 PT 서른 번에 어쩌다 양념으로 한 번 들어갈까 말까아야지, 그 이상이 되면 "아이디어와 감각 부재를 모호한 선문답으로 때운다"며 윗사람들 반응이 매우 안 좋아집니다. 이게 현실이고, 위에서 말한 대로 기업은 "가치 창출"에 본연의 소명을 다하는 게 최우선의 의무일 뿐이지 교육 기관, NGO가 할 일까지 맡을 이유는 없다는 점에서입니다. 자신이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면 일단은 조직이 주는 보수에 대한 반대급부를 충실히 이행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인문하기(?)"는 회사 나온 후에 해도 됩니다. 일하라고 다니는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딴 걸 하면 안 되죠.

엘리트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을 김 소장님은 냉철히, 직설적으로 찔러 줍니다. 자신이 아무리 유능해도, 팀장으로서의 능력은 자신이 거느린 "팀의 성과"로 평가받을 뿐이 라는 겁니다. "거,... 팀장은 잘하는데 팀이 별로야, 그치?" 라고 말을 건네는 부장님 말에 "그러게요... 흑흑 어케 제 마음 아시군,..."라고 했다간, 부장님 다이어리에서 이름 지워집니다. "부끄럽습니다. 못하는 팀은 곧 못하는 팀장입니다. 두 말 없이 이번에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이게 정답이죠. 팀장은 그래서 가장 빠릿빠릿한 일선 세일즈맨일 뿐 아니라, 그런 말단 직원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매니저입니다. 인생의 이처럼 젊은 시기에 너무 어려운 직분이 주어진 것이나 아닐지요. 하지만 경제인으로서 한창 체력도 좋고 센스도 충만할 지금 제 능력을 발휘 못하면 언제 해볼까요? 나이 서른 넘어서 전교1등, 수능수석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게 김 소장님의 말씀입니다. 고집쟁이들은 토론을 하지않고, 어설픈 독단이든 오랜 사고의 열매이든 무조건 제 입장만 고집하는 게 고질병이고, 설사 그가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 한들 다른 팀원(하위직)들이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주장합니다. 원래 머리에 든 것 없는 사람들이 "근거 없이, 이유 불문"으로 동어반복만 하게 마련이지만, 김 소장님은 아마 평소에 그런 사람은 상대해 본 적 없으실 겁니다. 저자 김 소장님이 지적하는 바는, "당신이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 해도, 여튼 팀에서는 타인을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소통을 못하면 결국 그런 무식꾼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당신이 맞는 말을 하고 있을진대, 왜 그걸 쉽게 다른 이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하는가? 최소한, 틀린 말을 우기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이 아닌가? 이 뜻이죠. 소신과 고집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은 게 우리 나라입니다. 피드백 사고가 되어 있지 않은 구성원들이야말로 회사에서 암적인 존재들입니다.

평가/인기/평판 중에서, 평판을 좋게 얻는 팀장이 되라고 합니다. 평가는 하위직일 때 개별 업무에서 얼마나 꼼꼼한 일처리를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기는 조직의 건강, 건전성과는 무관하게 (주로 부하직원들 사이에서) 얼마나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냐 하는 척도입니다. 팀장이 염두에 두어야 할 건, 이 두 범주의 중용이자 핵심 교집합이라 할 "평판(reputation)"을 얼마나 좋게 유지하느냐라고 김 소장님은 말합니다. 이런 평판을 잘 관리하려면, "나의 상사가 보는 시선과 관점에 항상 서 볼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역지사지의 태도는 자신과 상황의 객관화이지, 등뼈 없는 아부나 영합과는 크게 다릅니다.

반드시 승진이다 출세다 따위를 염두에 두고 학습해야 할 사항은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고 성과를 내는 건, 타산적이고 속물적인 선택이 아니라 "월급을 받는 피용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격입니다. 그뿐 아니죠. 개인보다 큰 단위인 조직을 생각하라, 나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사물을 통찰하라, 타인과 소통하며 더 큰 자아를 형성하라,.. 이런 것들은 출세의 방편이 아니라, 수백 년 간 동양에서 군자의 미덕으로 간주되어 온 사항이 아니겠습니까? 인문 실력을 발휘하려면 이처럼 지행일체, 무실역행의 차원에서 찾아야, 인문의 관점에서도 떳떳하고 온당한 선택일 것입니다. 훌륭한 팀장은, 한 인간으로서도 빠질 것 없이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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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종말 - 다른 세상의 시작
모이제스 나임 지음, 김병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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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의 종말" 같은 테제, 선언에서, 만약 subject가 "권력"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독재 권력', "부패 권력", 혹은 "무능한 권력" 등 부가 수식어가 따로 붙어 줘야 하지 않나 같은 느낌을 조건반사처럼 갖게 됩니다. 그런 느낌의 이면에는, "나쁜 권력은 없어져야 한다 쳐도, 권력 일반, 혹은 권력 일체가 사라진대서야 인간이 어떻게 질서 있는 삶을 살까?" 하는 우려가 서려 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권력의 종말"이라고 하면, 그건 정치/사회학의 테마라기보다는 형이상학의 논제만 같습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지상에서는, 정부니 권력(권력은 심지어-당연히- 정부보다도 더 상위의 개념입니다)이니 하는 것이 소멸할 일이 없을 것 같고, 또 없어야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건전한 상식의 범주에 드는 것 아닐까요. 링컨의 그 유명한 말, "국민의, 국민에 의한... "도, 문장의 술어는 "결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will never perish)로 끝납니다.


물론 일부 독자(저 포함)의 괜한 우려와는 달리, 모이제스 나임의 이 책은 "권력이란 한때의 공룡처럼 멸종하게 되어 있다!"를 외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의 성향대로, 무정부주의에 온정적이고, 패권적 권력을 혐오하며, 중앙집권을 우려하고, 소수로서 버티고 저항하며 그 모든 권위에 침을 뱉는 투사들을 옹호합니다. 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수사를 동원하면서도 의미의 명징성과 가치지향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평선 멀리를 응시하면서도 신중히 발 아래를 살피는 스칼라십으로 비전과 훈고(訓故)를 동시에 좇습니다. 어언 육십줄에 접어든 그가 학자적 권위와 관료적 유능함으로 평판을 받는 외에 대중들 사이에서 락스타적 인기를 누리는 데에는 글과 저서로 표현하는 이런 탁월한 재능과 관록 덕분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권력의 종말"은, "권력"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환과, (사후적이라고 해야겠으나 사실상 사전적이 되어 버린) 현상으로서의 권력이 보여 주(고 있)는 확연한 규모적 퇴조를 가리킵니다. 크면 클수록 좋았고, 피치자의 동의만 구한다면 더 확실하고 더 강력한 행사가 가능한 모습이 선호되었던 권력,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빚어낸 피조물이 더 이상 아니라 오히려 저를 빚은 인간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 들었던 금송아지 우상과 같았던 권력이, 이제 진짜 주인들의 자각과 필요에 의해, 줄어들고, 능멸당하고, 나눠지고, 심지어 폐기까지 고려되는 처지로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산업화 시대를 풍미했던 거대조직 지상주의는, 이제 산업계건 정부부처이건 자치공동체이건, 심지어 문화, 스포츠, 예술계에서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장을 과점하고 진입장벽을 높다랗게 쌓아 올리며, 철조망을 넘는 이들에게 사정없는 총질을 해댔던 타이쿤들은, 내부 활력을 잃거나 외부 게릴라의 간헐적인(그러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 더 이상 제 자리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1984년 슈퍼보울 결승전에서 만장(滿場)의 관중과 TV 시청자들에 선보였던 애플의 전위적인 디스토피아 컨셉 광고는, 이 책에서 "권력의 종말"을 의미심장하게 예언했던 묵시적 퍼포먼스로 저자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는 각국의 정치계를 조망하며, 도대체 한 번 뽑혀 나라를 다스리라는 위임을 받은 총리, 대통령들이, 정당성에 일점의 하자도 없는 상황에서, 안정감 있게 리더십을 행사할 여유조차 없이, 스캔들과 능력 폄하에 시달리며, 기소와 탄핵, 정쟁과 압력(시민사회나 로비단체)에서 벗어나질 못하다가, 임기도 못 채우고 낙마하는 일이 잦음을 지적합니다. 대통령이 헌법에 보장된 권한으로 지명한 각료들의 취임에조차, 상원의 인준을 통과하려면 6개월이 넘는 일이 다반사니, 행정부의 4년 임기 중 1/8을 허송하는 이 같은 풍경이 지난 세기 중반만 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는 지적은 우리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개인"이라는 미국 대통령이 이 정도이니, 전통적으로 내각의 수명이 짧았던 유럽 여러 나라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사실 21세기 들어 한국의 대통령들이 줄곧 맞고 있는 운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죠(여담인데, 이 책에서 한국 관련 토픽은, 기존 차산업계의 굴지의 거인으로서 행세하던 유명 메이커 외에, 최근 크게 약진한 글로벌 중규모 업체로서 현대자동차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위 문단에 적은, 산업계에서의 거대 권력 붕괴를 예증할 좋은 케이스죠).



이 책의 도입부는, 평소 그의 문장이 보여준 날렵한 스타일답게, 세계 체스 리그의 판세 변화를 예증으로, 그리고 하나의 비유로 끌어대고 있습니다. 그가 새삼스럽게 지적하는 것처럼(언급 안 하면 독자가 못 알아들을 걸로 생각했나 봅니다), 체스는 권력현상을 설명할 때 구조에 대한 직유 수단으로 쓰이거나, 문학적 수사의 일부로 자주 인용되는 범주입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체스라는 프로스포츠의 판도에서도, 나이 어린 고수들이 (종전과는 달리) 훨씬 어린 나이에 훈련을 마치고 데뷔하거나, 그랜드마스터의 자리에 오르는 기간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정도 성취를 이뤘으니, 얼마나 오랜 동안 지존의 신분을 유지할까... 이전의 패러다임에 젖은 이들은 이렇게 예상하지만, 천만의 말씀, 일찍 오른 만큼 퇴장, 퇴위 시점도 그만큼 빠르고, 정상에 군림하는 기간은 정말 순간이라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카스파로프 같은 "체스 차르"는 더 이상 나오기 어렵고, 이 체스판의 요동치는 구도는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실물 그대로의 정치판 사정과도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과거 전쟁은, 압도적 전력을 갖춘 편이 이기게 되어 있었습니다(사실 여기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편이지만, 책의 의도가 이 부분 진위 판명에 있지 않으므로 사소한 딴지를 걸 필요는 없겠죠). 현대전은 그렇지 않아서, 설사 열세에 있는 쪽이 이길 수는 없다 해도, 패퇴하거나 궤멸당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강자측에 천문학적인 비용 지출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그 큰 덩치를 갖고도 피로스의 승리만이 가능하다면, 마치 테르모필라이의 전투에서 이기고도 결국 퇴각해야 했던 페르시아 제국처럼, 이긴 게 이긴 게 아니게 되는 모호한 형국에서, 결국 거대권력은 쇠망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취지입니다.

1장에서 그는 이안 맥밀런의 유명한 2x2 도식을 인용해 권력과 영향력의 본질을 저자 본인의 해석과 관점으로 다시 해명합니다. 이 서론이 굳이 필요한 이유는, "권력은 이미 태동기부터 본질적으로 자기 모순을 품고 있었으니,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는 주장에 대한 기반을 치밀하게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언제나 그의 저서가 그렇듯 쉽고 재미있게 푸는 설명이 독자를 전심 집중하게 도와 줍니다. 아무튼, 권력은 이제 쪼개지고, 서로 대립하며, 어느 한 쪽의절대 우위를 끊임 없이 부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게 책을 관통하는 기조입니다.

WTO가 창설된 계기가 뭔지 아십니까?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대세가 된 미국의 "일방주의"였습니다. 무역 현안을 논의함에 있어 하도 미국이 고압적 태도를 보이니, 그러지 말고 다자간 대화의 창구를 공식화, 기구화하여 작건 크건 각 주권국가들의 조화로운 이해를 도모하자는 취지였습니다(일단은 말이죠). 이때 화두가 된 게 유니래터럴리즘(일방주의)에 대치되는 다자주의(멀티래터럴리즘)입니다. 이 시기를 회고하며 저자 역시, "세계 역사상 문화, 국방력, 경제력, 정치적 권위 등 모든 면에서 타국들에 우위를 누린 패권 국가는 미국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여태 적은 대로입니다.

여기서 저자의 제안은, 미시화하고 자치적이며 전문적이고 직접민주적인 세분화한 권력 주체가 각각 자기 영역에서 경쟁하고, 협력하고, 참여하고, 주도하며 양보하는 틀을 가리켜, "미니래터럴리즘"으로 부르자는 것입니다. 다만 저자는 여기서 사려 깊은 걱정 하나를 따로 개념분석하여 제시합니다. 폭압적인 권력이 자유와 인권의 억압을 부른다면, 지나치게 원심화한 권력(해체나 종말을 맞이하는 듯한)은 구성원의 소외를 부른다는 거죠. 그는 다소 특이하게도, 오바마 이후에 등장한 자발적 정치 성향 압력단체인 티파티가, 보수적 시민과 부유층의 소외(내지는 위기 의식- 그의 용어를 이렇게 풀어도 될 것 같습니다)를 대변한 실체라고 봅니다. 기존 정당의 구조와 기능이 더 이상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역시 권력의 퇴조에 있어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해당 정당의 지지자들이 느끼는 "소외"를 해소할 다른 통로가 필요하던 시점에 용케 실체화한 예로 이것을 들고 있습니다. 반대로는, 미국 노동계가 보이는 현저한 조합 가입률 하락 현상을 거론합니다.

사실 저도 일을 하면서 기존 분석틀에 지나치게 매이다 보니, 사모펀드 같은 신종 유력 투자 실체에 대해 개운한 긍정을 못하고 유보적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저자는 고령이면서도 훨씬 유연한 시각으로(그는 본디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격변하는 금융시장과 산업계의 현상을 일관된 모형으로 단순화한 후 효과적 해명에 성공합니다. 다만 그가 해외 정세, 종교계의 각종 사건 사태에까지 적용을 확대하는 건 다소 억지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권력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것도 실천할 수 없고, 심지어 '사고'조차 할 수 없던" 우리들에게 냉수 한 사발 시원하게 끼얹는 각성제 노릇만은 잘 해 준 것 같습니다. 권말의 후주는 문헌 출처를 밝혀 놓은 외에 저자의 단평과 코멘트가 많이 들어 있으니 꼭 읽어 보셔야겠고, 뒤집어 놓은 U자 곡선은 이 책이 어려웠던 독자에게 "한 줄 요약" 기능을 해 주니 설사 시원하게 완독한 분이라도 클로징 미디어로 쓰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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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역사 - 현대판 노예노동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예지(Wisdom)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8년 전에 타계한 철학자-인문학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명저가 한 권 더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학부 과정 교양교재로 널리 쓰이는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 그리고 몇 년 전 웹과 미디어에서 작지 않은 화제에 올랐던 <인종차별의 역사> 덕분에, 인문 쪽에 별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은 않은 울림을 남깁니다. 그를 존경하는 독자들에게 "전작"으로 인식되는 <인종차별의 ..>과 같은 역자분, 같은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네요. 하정희 선생님의 매끄럽고 정확한 번역은 정평이 나 있는데,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가 내용과 모습이 너무너무 맘에 들어 구입, 소장한 <마지막 대부>(마리오 푸조의 장편)을 통해 이분의 솜씨를 처음 접하게 되었더랬죠.



우리 동양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선하니 악하니 하는 오랜, 그리고 치열한 논쟁이 이미 2300여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책은 대개 청동기 문명과 도시 문명의 본격 정착기로 그 시발을 잡지만, 노예 제도야말로 "영혼을 지닌 인류의 수치"이며 누대를 이어오고도 영원히 씻을 수 없을 것 같은 본질적 죄의식의 한 근원이 된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점과 거의 기원을 같이하는 이 노예제는, 들라캉파뉴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시발을 우루크 도시 문명의 발생기 정도로 잡는 데에 의견을 같이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핵심에 자리한 이 도시의 명칭은, 오늘날 "이라크"라는 나라 그 이름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그 이른 시점에 남겨 요행히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기록의 잔해 중 가장 앞선 것들에 벌써 노예, 노예제에 대한 언급이 나오니, 노예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는 언명이 그리 과장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들라캉파뉴를 비롯, 많은 서양 학자들이 큰 윤리적 회의감과 이론 구성의 난점에 빠져드는 대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철학의 토대를 놓은 헬라 인문의 거인들이, 거의 한결같이 노예제에 대해서만은 뚜렷한 언급이 없거나, 되레 지지, 옹호에 가까운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의 경우 이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 고국 아테네 아닌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 등으로 후대의 독자, 학습자에게 당혹을 안기는 인물인데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처우, 냉담한 정서를 노예(헤일로타이)와 외국인에 대해 유지했던 스파르타의 여러 현황과 정치 사회 제도가 그토록 플라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계몽과 인본의 확고한 토대로만 여겨졌던 헬라 사상 체계가 기실 대단히 취약한 내실을 지니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를 서술하며, 당시의 이 시스템이 "인종차별적 요소"와 어떤 교차, 종속, 상호 영향 관계를 가지는지 잠시 짚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가 큰 반향을 일반독자와 학계에 불러일으킨 <인종차별의...>의 저자이기도 하기에 우리에게 큰 설득력과 매력을 풍기는 서술이기도 합니다. 결론에서 다시 언급되지만, 노예제는 결국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경멸→증오→노예화"의 기제를 밟아 정착된다는 게 이 저서를 일관하는 저자의 관점이요 "가설(이는 저자 자신의 표현입니다)"이 되고, 우리는 이를 기초 인식틀로 삼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 노예 시스템을 다룬 다큐나 이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항상 궁금한 게, 왜 저들은 그 지옥 같은 억압에 정면으로 대항, 봉기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의 경우 수적(數的)으로 얼마 정도의 지배층-노예소유자가, 얼마나 되는 노예를 재산으로 간수했는지에 대해 명확한 통계, 혹은 비슷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아테나이오스의 한 저술은 1:33 정도로 적고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다는 게 저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평가입니다. 오히려 미국 남부 노예제처럼 대략 2:1 정도의 우위를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게 통설적 추론이죠. 로마인들의 메인 오락 중 하나인였던 검투사 시합 산업에 소속된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대해서도 상세한 서술이 베풀어져 있는데, 다만 저자는 "계급 해방 투쟁의 선구"로까지 이 사람을 평가하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래된) 태도에 대해 회의어린 시선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기록은 고대 로마 귀족이 보유했던 많은 노예들 중 상당수는 가재관리, 회계, 자녀교육(그리스 출신 노예에 한정) 등 가혹한 육체 노동이 아닌 고상한 영역에 다수가 종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해방노예"가 발생했으며, 이들은 제국의 역사에서 미미하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을 두고 이뤄진 다소 무리하다 할 현대의 일부 해석은, 이 시기의 노예상에 대해 "목가(牧歌)적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일각의 큰 비판을 받고 있는데("노예제는 그 당시에도 역시 극단적 비인도성을 띤 시스템이었다!"), 물론 저자 역시 이런 스탠스를 견지하는 편입니다. 결론에서 다시 강조되듯, "노예제에 대해서는 제로 톨러런스라야 한다."는 게 이분의 일관된 주창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등이 확립한 도그마 때문에, 이념적으로 어떤 경향이건 무관하게 널리 지니고 있는 잘못된 상식이, "중세에는 노예가 없었다"입니다. 노예 대신에 장원이나 영지에는 "농노"가 그 기능적 신분을 차지했다는 게, 일반인뿐 아니라 학자들에게도 널리 퍼진 인식인데, 이를 최초로 교정한 업적은 마르크 블로흐의 몫으로 돌려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입니다. 중세 유럽에는 노예 역시 분명히 존재했으며, 우리는 사실 우리 세기에 쏟아져 나온 (비교적 고퀄의) 역사 팩션물이나, 심지어는 <데카메론> 같은 고전을 통해 파편적으로는 이 인식에 아주 어둡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공식적인 질문에 대한 정형화한 응답으로는 "노예는 없었음"을 내놓는데, 이는 어쩌면 "원죄적 수치심"이 심층 심리에서 기만 기제를 활성화한 소치가 아닐까 하는 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저의 추측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고대와 근세(자본주의 태동기 직전)에 엄연히 서양에 만연한 채였던 노예가 유독 그 "암흑기"에만 부재했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죠. 다만 보편적으로 "가난했던" 유럽이 노예까지 부려가면서 영위할 산업이 없었다거나, 가사노동에 활용할 여유가 없었다는 정도의 해석이 가능하겠구요. (다수 후대인들의 낙천적 기대를 배반하게도) 당시 지배이념이었던 "기독교적 박애주의"가 여기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았다는 정도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노예제와 노예무역의 르네상스(!)는 유럽인들의 상업활동, 군사모험의 활기가 살아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때에 일어납니다. 고대 로마 이전까지만 해도 "피부색"은, 특정인에 노예 신분을 부여함에 있어 결정적 요소가 되지 못했습니다(저자가 지닌 "인종차별"에 대한 고유의 관점 때문에, 저 토픽은 이 책 내내 주요 논제, 준거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의 공격적 모험상인들이 식민지 개척 후 노예의 "수입"을 중요 수입원으로 간주하고부터는, "노예=유색인종"의 공식은 노예경제와 직접 연관을 맺지 않은 유럽인에게조차 "상식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통렬히 비판하는 점은, 소위 계몽사상의 선구자, 대가들 중에, 부인할 수 없는 반계몽 반휴머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예제에 대해, 명시적 비판이나 반성을 드러낸 이가 한 명도 없다시피했다는 거죠. 오히려 대가들(로크,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왕성히 활동하던 기간은, 노예무역이 극성을 이뤄 막대한 수입을 창출하는 산업 구도의 확고한 일부로 자리한 시기이기도 했다는 거죠. 로크의 경우 "노예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항구적 전쟁상태의 연장, 부산물"이라는 게 그의 인식인데, "정당한 전쟁"에서 패배를 겪은 이가 노예로 사는 건, 패전국이 전쟁배상금을 물고 그 지도자가 전범으로 처벌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는 취지이니, 오늘날의 우리는 그 황막하고 냉정한 논리의 기조에 전율할 만합니다.

인도의 카스트를 짚으며 저자는 "인종차별"의 문제를 다시 환기합니다. 초기 카스트 성립 당시 "바르나"는 분명 피부색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체계였습니다("카스트"는 포르투갈어일 뿐이며 현지에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던 것이 점차 인종적 색채가 옅어지고 사회 제도와 종교의 요소가 개입하며 "자티"로 대체되었다는 건데, 인도뿐 아니라 동양권 전체에서 노예는 세습신분, 혹은 범죄에 대한 응보와 관련이 있을 뿐 인종차별과는 거의 무관하죠. 하긴 근세 이후 상대적으로 문물 교류가 부진했던 이들 권역에서 "차별할 외부 인종" 자체와 만날 기회부터가 적었겠지만.

저자는 특히 동시대의 국지적 "노예 실상"을 짚으며, 발전된 서구에서는 "인식과 정서 속에 인종차별이라는 다른 형태로 잔존"하며, 그렇지 못한 권역에서는 아직도 고대적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강제노동"의 악습으로 남아 있는 게 이 노예제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양심과 품위를 뿌리에서부터 갉아먹는 이 "노예제라는 해악"에 대해서, 인류는 "무관용"이라는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하며, 그 구체적 전략은 "즉시 행동에 옮김"이라는 결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이에 앞선 마지막 챕터에선 (다소 소략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벌어지는 수요집회에 대해 사진과 간단한 언급 등으로 자신의 담론 체계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편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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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 1 - 눈썹달
윤이수 지음, 김희경 그림 / 열림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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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제목은 "초월(初月)"로 붙어 있는데, 작가님은 이걸 "눈썹달"로 운치 있게 다시 고유어로 풀고 있습니다. 달이 삭(朔) 즈음에 살포시, 흐릿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듯 감추듯 자태를 보이는 광경에다 이 권의 내용을 비긴 거겠죠. 주인공은 17세의 소년인데, 사내면서도 여자아이처럼 자태가 곱고 영리하며 "문장을 잘하는" 센스를 갖춘, 운종가(현재의 종로 일대)에서 복덩어리로 통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름은 홍.라.온.인데... "라온"이란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가 "즐겁게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줬다고는 하나 왜 그 음소에 그 뜻이 대응되어야 하는지는 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해 보면 뭔가 긍정적인 주문처럼 발랄하게 들리긴 합니다. 사실 중요한 건 그의 성씨가 "홍"이란 사실인데, 여기에 담긴 내력은 2권에서 거의 완전히 드러나더군요.

 

판타지 로설과 본격 역사소설의 차이점은, 다른 캐릭터들은 몰라도 최소한 주인공(특히 여주)은 철저히 현대의 틴에이저들이 갖는 개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사가 고어투이건 아니건 간에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윤이수 작가님은 사료를 통해 시대 어휘를 많이 연구하신 분인지, 적절한 용어들이 문장과 대화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고 있습니다. 고어를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고 처음에 밝히고 있는데, 너무 현대어화하면 "궁중로맨스"만의 맛이 떨어집니다. 반대로 고어를 요령 없이 문장 안에 편입하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느낌을 전달할 때 아주 어색해질 수 있는데요. 작가님은 이 딜레마를 참 쉽게 해결하고 있어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옛 어휘에 대한 공부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홍라온은 우리 동시대의 소년(...)이 갖는 감성 그대로를 갖고 2백년 전 조선에 태어난 별종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예쁘장한 외모, 싹싹한 태도와 밝은 심성, 민첩한 판단 등 어른들에게 이쁨 받을 장점을 많이 갖고 태어난 인생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는 그 나름대로 많은 아픔을 지니고 누구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역경을 헤치고 살아와야 했던 처지인데... 이 사정을 알고 나면 주변의 어른들은 더 그를 기특히 여기고 도움을 주려 들게 됩니다. 자기 걱정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고 나이까지 어린데도, 그는 주변의 어른들이 가진 고민을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노숙한 솜씨로 척척 해결해 주는 걸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가 장기를 보이는 건 연애 상담입니다.

 

여동생의 병 때문에 그는 궁궐에 들어가 3년 정도 일을 해 주고 대신 큰 돈을 미리 빌려 쓸 수 있는 계약을 맺습니다. 헌데 우리가 잘 알듯, 사내가 왕궁에 고용직 신분으로 드나들 방법은 없습니다. 남성이 왕의 거처 부근에서 시중을 들고 기거하려면, 생식 기관이 먼저 제거된 상태라야 자격이 주어지고,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당시 "내시, 환관"이라고 불렀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내시의 자격을 갖추는 시술은 아주 끔찍하고 원시적인데, 책에는 두 가지 방법이 "내관 만드는 장인, 마스터"의 입을 통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무시무시한 작업장에 들어온 소년 홍라온은 그러나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니 마음대로가 아니므로" 엄공 채천수의 시술을 받아야만 할 처지입니다. 라온의 빼어난 요량으로 까짓 탈출 정도야 당장 못 할 바 없지만, 문제는 계약(속아서 맺었다 해도)을 어길 때 병든 여동생의 치료와 늙은 어머니의 형편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라온은 이 기회에 궁정에 들어가서 3년을 버텨야 합니다. 아직도 더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는데, 라온과 그의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로, 사실은 라온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는 겁니다. 장비를 들고 다가오는 채천수는 이제, 그가 시술을 베풀어야 할 신체 부위가 라온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할 수 있겠는데... 늙은이가 놀라건 당황하건 그게 중요하지는 않겠으나, 라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시로서 궁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앞에서 말한 사정 때문이죠.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요.

 

이 일이 있기 전 라온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어떤 옥골선풍의 귀공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쪽으로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치가 전혀 없는 라온은, 이 사람이 그저 돈 많은 한량이거나 행세깨나 하는 양반 댁 자제인 줄로만 알지, 그 엄청난 신분상의 비밀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합니다. 라온이 "화초서생(온실 안 화초처럼 곱게만 자란 서생)"이라 부르는 이 귀공자는, 영리한 라온만 까맣게 모를 뿐 조선 나라님의 아들, 세자 신분의 지존인 몸입니다. 독자들은 다 아는 걸 주인공만 모른 채로 귀여운 삽질을 하게 하는 패턴은 뭐 이 장르의 정해진 공식 중 하나겠습니다.

 

궁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희한한 기남자를 또 한 명 만나는데, 알고보니 이 사람은 저 "화초서생"의 친한 벗이라고 합니다. 라온은 그를 "김 형"이라고 부르는데, 이 "김 형"은 라온을 "성가신 녀석"으로 즐겨 호칭합니다. "김 형"은 철저히 마음을 숨기는 타입이고, 구체적으로 뭔진 모르겠으나(1권 끝에 대충 나옵니다) 웅대한 뜻을 속에 품은 지사형 인물로 등장합니다. 잘생긴 외모는 로설의 필수 요소라 이 사람 역시 "화초서생"에 별로 처지지 않는 풍신인데, 우리의 주인공 라온도 짐짓 이런 사태에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보여 독자 앞에서 속보이는 뻔한 쇼(?)를 하고 있습니다. 로설의 정해진 공식이라 해도 될, "아주 높은 신분의 남성이 여주를 좋아하고, 여주는 그를 알면서도 팅기면서 그보다는 낮은 지위(보통 친구 같은 측근으로 설정)의 또다른 남성을 더 좋아하는" 삼각 관계 패턴이 깔리는 게 이 작품 속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화초서생"의 이름은 이영(李旲)인데, 이 이름은 순조의 적장자였던 효명세자의 휘와 같습니다. 즉 누가 뭐래도 이 소설의 남주는 조선 24대 임금이 될 뻔했던 실존 인물, 능력과 자태가 공히 뻬어나 만약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국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그 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김 형"의 이름은 김병연인데, 이는 우리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본명입니다. 실제 두 사람은 두 살밖에 나이 차가 나지 않는 같은 또래였으나, 물론 두 사람이 역사상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단 한 번이라도 조우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보통은 이 둘이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텐데, 기발하게도 이 점에 착안하여 가공의 여인 하나를 두고 연적 아닌 연적이 되는 설정을 꾸린 작가분의 착상이 놀랍습니다. 1권 끝무렵에 라온이 "김 형"에게 이게 어울린다며 어디서 삿갓을 구해 와 씌워 주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 장면은 또한, 세자 이영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라온의 태도가 이영의 심기를 자극하고, 동시에 라온의 본심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 독자에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긴요한 장치입니다.

 

저는 처음에 전혀 의식 않고 읽어내려가다가, 중반 쯤에 세도정치가인 장김의 김조순이 갑자기 등장하기에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가 세자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 중에서도 명시적으로 그런 언급이 나오지만, 조선조의 왕세자 중 정실 소생의 장자로 보위에 오른 이도 드물고, 아예 세자 시절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된 이도 제법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출생상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보기 드문 예였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회화 솜씨나 구사하는 필체 역시 출중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삿갓은 대중의 통념상, 홍경래의 난 당시 적도에 붙어 일신의 안위를 구차하게 도모한 조상을 힐난하는 답안을 써서 급제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속세를 등지며 풍자시인으로 산 인물인데(다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작가는 여기서 반체제-혁신의 코드를 짚어 내어, 리버럴 성향(이 역시 작가의 상상입니다만)의 효명세자와 사회 변혁에 한 뜻을 모으는 동지 정도로 꾸며 내려 하는 것 같습니다(마치 합스부르크가의 모 황태자를 연상시키는). 이 정도 깊이라면 종래의 로설의 구성, 밀도 수준을 조금 넘어서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궁중을 배경으로 삼은 한국 문예에서 언제나 그렇듯, 여기서도 못된 상궁 대신 교활하고 사악하며 가학성향의 내시 몇이 등장하여 신참 라온을 괴롭힙니다. "신래침학"의 악습은 비단 내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킬 만큼 횡행했는데, 우리의 라온이 이 난관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지켜 볼 일입니다. 말미에 이영의 친여동생 명온공주가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도도하지만 매우 단순한 기질과 사고의 소유자로 보이는 이 여성이 향후 극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도 주목할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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