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라오스 - 순수의 땅에서 건져 올린 101가지 이야기
한명규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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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여년 전부터 베트남 중심으로 부동산 투자 붐(그리고 이에 부대한 다른 경기 호황)이 크게 일어서, 동남아시아 중 옛 인도차이나 지역도 더이상 한국인에게 낯선 땅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오랜 내전으로 정정과 치안이 불안했던 게 큰 장벽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 문제는 예전같은 난맥상은 더 이상 아닙니다. 베트남 전쟁의 승자답게(?) 통 큰 행보를 "도이모이"라는 간판 아래 1980년대말부터 보여 왔던 베트남엔 이미 많은 한국 사업가들이 진출해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인도차이나 3국(그리고 아세안 가입 10개국 중) 중 유일한 내륙국인 라오스입니다.

 

라오스는 한국인에게만 낯선 나라가 아니라, 미국이나 국제정치 무대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런 책이 쓰여진 건, 국토 넓이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소하여 개발의 잠재력을 넉넉히 품고 있다는 사정이 알려진 후, 한국을 포함한 여러 선진국에서 투자와 사업의 기회를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 역시, "라오스의 가장 큰 매력은 넓은 땅이다"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라오스의 영토 넓이가 대체 얼마이기에 그럴까요? 책에 나와 있듯이, 수치상으로 약 23만㎢으로서, 한반도 전체 면적에 경기도 면적 하나 정도가 더 붙은 정도입니다. "그게 뭐가 넓다는 것?" 지구상의 어떤 땅이건, 넓다 혹은 협소하다라는 건 상대적 개념입니다. 라오스 정도의 영토를 보유한 나라에 인구가 그리 많지 않고, 그 거주자들조차 개발의 욕구, 능력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면, 그 나라는 상대적으로 넓은 땅을 지닌 나라입니다. 철저히 외부 투자자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고, 현재 외국 자본이 활발히 유입되어 GDP를 올려 주길 기대하는 그 나라 정부의 시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 라오스가 "넓은 영토"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다른 관점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미국처럼 광대한 영토를 지닌 나라도, 이미 한 뼘 땅에조차 적법한 사적(私的) 소유자가 일일히 정해져 있는 경우라면, 그 나라는 외부 투자자가 보기에 "넓은 땅"을 지닌 나라가 아닙니다. 반면 라오스는 헌법상, 그리고 현실 정치상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원칙적으로 모든 영토는 국가 소유입니다. 중국도 명목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라곤 하나 사실상 전 영역이 사유화한 지 오래이며, 땅이 넓다곤 하나 부양 인구가 너무도 많기에 오히려 인접국들이 피로, 경계를 느낄 만큼 팽창욕이 강한 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은 전혀 "땅이 넓은 나라"가 아닙니다.

 

 

라오스 역시 상당수 토지에 현주 점유자가 있고, 그 점유자들이 그 땅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그들이 "소유권자"는 아니기에, 약간의 보상 외에는 수용이나 협의 취득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게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소 야박할 지는 모르나) 개발 비용의 부담에 신경 쓰는 사업가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일단 다가오는 겁니다. 한국에서 일단의 토지개발에, 원 거주자들과의 협상 과정에 얼마나 어려운 (양쪽 모두 마찬가집니다) 절차, 트러블이 끼어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냉전 시절 공산국가였던 이들에겐, 역설적으로 "볼륨 존" 안에서 이런 메리트가 새로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라오스의 면적이 23만여㎢라는 사실은, 저 개인적으로는 좀 놀라움으로 다가왔는데요. 우리가 보통 참조하는 지도는 메르카토르(마케이터) 도법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적도 부근이 축소왜곡되어 실상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막연하게마나 남한보다 작겠거니 하는 정도였는데, 웬걸 한반도 전체보다 더 큰 면적이라니 크게 의외였습니다. 이 비슷한 예로, 라오스 바로 왼쪽에 붙은 태국이, 일본에다 북한 영토를 합쳐 놓은 넓이라고 하면 다들 믿지 않습니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상당히 큰 나라인 줄로만 알지만, 일본에서 규슈와 시코쿠가 떨어져 나간 정도에 그칩니다. 반도와 보르네오 섬 양쪽에 걸쳐 있는 국토의 형상에, 다민족 다종교 연방체인 시스템이 그런 착시를 부르는 거죠.

 

기회의 땅 라오스에서 사업을 펼치고 싶다면, 일단 어느 나라에서나 같은 사정이지만 그 나라의 문화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은 분석용 보고서처럼 형식이 짜여져 있지 않고, 마치 맘 편하게 배낭 여행을 다녀 온 수필가가 독자의 편의와 감상을 위해 꾸려 놓은 듯, 널찍널찍한 레이아웃에 컬러 사진에 큼직한 활자로 편집되어 있고, 문장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단문체로 끊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시 라오스에 투자를 준비하는 사업가라면 뭐가 궁금할까?"를 고민한 듯, 실용적 정보로 가득 차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라오스를 그저 사업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와 비슷하게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피침의 설움을 겪었고, 오랜 세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서양화한 시간관념이나 합리적 의사 표현 등에 미숙할망정 동양 특유의 인간적 진정성을 간직하고 있는 라오스인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공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현지인들의 특성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다면, 그들의 반감이나 비효율적 소통을 초래하여 사업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이 책은 올컬러 편집이고, 라오스의 정치 체제, 고대사, 현대사, 풍습, 문화에 대해 매우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내용 전개를 취하고 있어서, 두꺼운 분량이 언제 다 읽혔는지 모르게 지나가며, 다 읽고 나면 라오스란 나라에 대해 대강의 개념이 잡히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면, 미국이 닉슨 행정부 당시 왜 라오스를 집중 폭격했는지 의문이 생기곤 했는데, 이 책에선 라오스를 통과하는 소위 호치민 루트가 베트콩 보급선 노릇을 했음이 명확히 적혀 있습니다. 해서 아직도 불발탄 제거 문제가 큰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군산복합체의 탐욕이 필요 이상의 재고 정리를 위해 이 가난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그토록 많은 폭탄 세례를 받게 했을 것이다." 같은 저자의 통찰도 있는데, 사실 이게 남의 나라 사정만은 결코 아닙니다. 한국인(저자와 독자들 모두)이 라오스인과 라오스 역사에 대해 이처럼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겨레가 살아온 내력이 무척이나 닮았다는 이유도 있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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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물리학 - 빅뱅에서 양자 부활까지, 물리학을 만든 250가지 아이디어 한 권으로 보는 교양과학 시리즈
클리퍼드 픽오버 지음, 최가영 옮김 / 프리렉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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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물리 때문에 엄청 고생하셨다구요? 흠. 그럴 만도 하죠. 물리는 수학이란 언어가 아니고서는, 그 기술(記述)이 불가능한 영역이니까 말이죠. 수학도 하기 싫어 죽겠는데, 수학 기호만 잔뜩 써 놓은 채 무슨 법칙 어쩌구를, 내가 관심도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필요하답시고, 그냥 외우라는 건지, 아니면 이해를 하라고 나름 열심히 풀어 주는 건지, 가뜩이나 싫은 수학에다 다른 공식까지 들이대고 있으니(수학만 해도 외울 공식이 얼마나 많나요), 이건 성질과 손버릇이 모두 나쁜 일진이 얼굴까지 못 생기고 입에서 냄새까지 풍기는 꼴 아닐까요? 물리 공부하다가 수학책 펼치면 그래서 차라리 무거운 짐 들었다 내려놓고 바로 가벼운 짐 진 것처럼 당장은 마음이 편하기까지 했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약발은 5분이 채 안 가죠.


 


근데 어떤 학생은, 수학에선 몇 문제를 틀려도, 물리는 한 문항도 오답을 안 내는 친구도 있습니다. 물리 시험만 쳤다 하면, "호구 왔능가?"를 반가워서 외치는 거죠. 그런  애들을 보면, 물리란 과목을 정말로 우리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운동 현상을 설명해 주는 비결, 귀한 정보로 알고, 열심히 이해하며 소중히 여기고 나중에는 감정적으로 밀착하게 됩니다. 이 마지막 단계가 중요해요. 운동 중독 일 중독 되는 분들도 다른 사람 보기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어도, 그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대상에 몰입하는 거거든요. 물리를 마지못한 동기(대학 진학을 위해, 점수 따기 위해)가 아니라 감정상으로 애정하게 되면, 그때부턴 확신이 생겨 (따지고 보면 몇 개 되지도 않는- 오히려 그 수가 부족해서 문제죠) 공식들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어떤 경우에 무엇을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단계에서도 소위 "분별의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자발적인 흥미를 갖게 되고 나서부터는 만사가 편한데, 어떻게 그 흥미를 이식(?)하는가가 많은 이들의 경우에 문제가 되죠.

이 책은 좀 특이한 책입니다. 보통 물리를 대중에게 소프트한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려는 책은, 1) 퀴즈 형식을 띠거나 2) 수학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말로만 풀어 주려 하거나 3) 역사책의 포맷을 빌려 "물리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시계열적 발전을 이뤄 왔음"을 강조, 두려움이나 막연한 경외감을 없애려 듭니다. 그런 책들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는 하나, 독자 입장에서는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다.



1)은 결국 그 문제만을 "상식 Q&A, 교리문답"식으로 알게 될 뿐, 다른 이슈에 대해 적용, 응용이 안 됩니다. 학문은 어떤 경우에도 "팁"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특히 물리는 자연 현상, 물체의 운동, 정지에 대한 "해명"의 동기에서 태동한 학문이므로, 종교 도그마처럼 고정된 형식을 띤다는 게 극심한 자체 모순을 드러내는 거죠. 마치 피겨스케이팅, 백발백중 사격술을 책만 읽고 마스터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2)는 그런 시도를 하는 저술가가 아인슈타인과 폴 디랙, 세익스피어를 합친 초능력자라야, 물리의 전 영역에 대해 그런 태도로 일관 서술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파인만 같은 천재도 결국 중도 포기한 것입니다(할 수 있었다 해도, 들인 노력에 비해 결국 성과가 무의미하다 판단). 일반 독자도, 십만 원도 안 내고 구입한 책에 대고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받는 이백만원도 안 되는 월급만으로 사우디 항만 공사 수주를 모레 안으로 따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장에게 무슨 생각이 들까요.



3)은 결국, 과학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인문 설교"를 하고 마는 부작용을 적지 않게 드러냅니다. 과학의 매력은 결국 그 어느 영역보다 "정치 중립, 가치 중립성"을 띤다는 데에 있습니다. 미트 롬니가 믿는 조셉 스미스의 무덤 위를 운행하는 천체나, 탈레반 광신도들이 장악한 아프간 산악 위에 느닷 떨어지는 운석이나, 뉴턴이 발견한 법칙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편협한 독자는, 취향대로 골라잡은 인문 설교 책을 읽고 "나는 과학을 마스터했다"는 지극히 의도적이고 속 보이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책이 지닌 가장 빼어난 메리트는, 1), 2), 3)이 지녀 왔던 장점, 1), 2), 3)이 빠지기 쉬웠던 단점에 대해 숙려를 거듭하여, 독자에게 거짓말 하지 않고 물리학의 본령적 매력을 전달하며, 동시에 이후 심화 단계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독자 자신의 힘만으로 전진할 수 있는 든든한 지적 발판을 마련해 준다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쉬운 설명만 해 주는 책을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그 책을 읽는 동안에만 느낄 수 있는 불건강한 쾌감이, 막상 다른 영역에 지식을 적용해 보려 들 때 드는 "여전히 안 되는걸?"의 막막함, 좌절을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의 서술은, 초심자들에게 아주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다음 심화 단계"로 결국 발을 디디려는 진지한 독자에게, 이 책의 설명은, 영양과 풍미를 고루 갖춘 일류 레스토랑의 프라임 메뉴처럼 황홀감을 안깁니다.



"연대순으로 책을 엮은 이유"에 대해, 저자는 구태여 무슨 해명이 필요할까 싶은데도 서문에서 길게 독자를 향한 겸손한 설명을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의도는 "물리학이 무엇인지, 현대 물리학이 자연에 대해 설명하는 단계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대중에게 밝히는 데에 있습니다. 첨단의 단면을 선명히 노출하려는 노력에서, 다시 그 일부나마 시계열로 재편성하려는 시도는 괜한 혼란을 주거나, 앞에서 말한 3)의 병폐를 재현할 수 있습니다. 되풀이하지만 이 책은 "지금 인류의 이해가 어느 수준인지"를 한 눈에 정리하게 돕는 책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진리의 이해"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지성의 거인과 불세출의 천재들도 얼마나 어이없는 시행착오, 억단을 여태 되풀이했는지, 그런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싼 대가를 치르고 여기까지씩이나 도달했는지, 건조한 부호의 더미를 넘어 역시 인간의 피와 땀이 밴 이정표가 바로 물리학임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아무것도 모르지 않고, 무엇인가 극히 일부나마 우리는 알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은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신기해하는 게 부메랑인데, 어른들은 다른 이유에서 이를 신기해합니다. "어떻게 해서 저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이 이런 도구를 가질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값싼 사이비 문화인류학이 도출하여 판매하는 "모두는 평등" 같은 위선적 팻 앤서(pat answer)가 아닙니다. 저자가 구태에 이것에 대해 한 꼭지를 할당해서 책에 끼워 넣은 이유는, 1) 물리학은,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 경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기술적 설명을 내놓기 위한 학문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고(근거 없는 자아류의 도취적 형이상학 설교가 아님), 2) 어떤 발견도 무슨 지적 설계 같은 게 미리 예상, 설계를 마친 데서 나온 소산이 아니라는 것, 다만, 우연이 빚어 준 귀한 만남을 영리한 정신이 놓치지 않고 그 해명을 시도한 결과가 모이고 모인 것, 그 체계가 물리학임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만 있으면 이용하는 항공 교통 수단인 비행기도, 그 "하늘을 나는 원리"를 학문적으로 명쾌히 설명하라고 하면 의외로 어렵다고 합니다. 이론이 먼저 생기고 그 결과물로 기계가 생긴 것보다, 일단 필요에 의해 이것저것 시도하며 뭘 만들고 난 후, 알맞은 해명이 그에 뒤따르는 게 더 보편적이란 거죠.

푸리에 분석은 수학의 테마인데 이 물리학 책에 왜 나왔는가. 그래서 2)가 잘못이라는 겁니다. 수학이 없으면 물리는 (전혀 불가능할 건 없겠으나)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막대한 노동과 가망 없는 성과를 요구하는 무의미에 그칩니다.  "분석"은 사실 어느 정도는 오역이며, 수학에선 현상의 수식적 설명을 두고 "해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이 역시 딱 들어서 분명한 의미가 팍 와 닿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오역입니다만 여튼 한국에선 그렇게 쓰죠). anaysis는 오직 물리와 수학에서, 이치와 현상을 정연한 기호쳬계로 일괄 치환해 보겠다는, 데카르트 이래 가장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중 눈부시고도 유용한 결과를 낸 이가 푸리에이며, 그는 수학적 소양도 매우 빼어났던 황제 나폴레옹에 의해 발탁되어 제자리에 쓰일 수 있었던 인재입니다.

미터의 탄생은 하찮은 것 같아도, 측정의 이슈가 어떤 물리학책(학부 교과서 수준 이상의)이건 맨 앞에 설명되는 걸 고려하면, 물리학 인식의 토대이자 시발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프랑스를 위시한 세계의 지성들이 미터법을 국제 합의로 제정했을 때만 해도, 이 공통적 프로토콜로 언젠가는 세계의 모든 비의가 해명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차 있었는데(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후만 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 서문에 나오는 윌리엄 톰슨의 호언장담을 떠올려 보십시오, 할 일이 없으면 종말을 맞는 겁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지긴커녕.....), 20세기 초 느닷 등장한 양자역학 혁명 때문에 도로 제자리에 돌아온 걸 생각하면 지독히 짖궂은 아이러니입니다. 측정으로 시작한 물리학책이, "측정은 불가능하다"라는 저주로 끝나니 이런 배드 엔딩이 또 있겠습니까.

해왕성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아마 뉴턴 법칙이 태양계 끝자락에서는 적용이 안 되든가, 혹은 그 자리에 무엇(그게 바로 해왕성)이 놓여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한 말에서, 우리는 뉴턴 법칙이 과학자들에게 얼마나 중차대하고 양가적 위상을 지니는지 알 수 있습니다(저 말 자체는 수사법의 장난 혹은 농담입니다). 무너질 수가 없는 철칙, 그러나 언젠가는 무너졌으면 하는 오만의 장벽, 이것이 지난 절반 밀레니엄 동안, 인간의 입과 손 끝에서 나온 유일하다 할 절대 진리가 가져 온 체계의 위상이었습니다. 푸코의 진자, 갈릴레오의 진자는 들어봤어도 뉴턴의 진자는 처음 듣는다고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일반에게 알기 쉽게 설명할 때도, 가장 편하게 동원되는 예는 "뉴턴의 회전하는 물통"입니다. 뉴턴의 위대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의심하고 그의 허점을 공격하는 예리한 지성들의 날카로운 공성(攻城)의 순간에도, 동원되는 무기는 바로 그 자신이 창안한 사고의 틀이자 프레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은 양자역학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이 이론의 근본 전제는, 지금까지 뉴턴적 지성이 확고부동 유지했던 모든 이론 체계의 정합성을 부정하려 들고, 최소한 그 파생물로서 "진리 탐구는 이러이러해야 하며, 그 최종 목적의 전망은 이러할 것이다"는 공통된 기대, 태도를 허물어뜨려 놓았습니다. "완벽한 동물원에선 특정 종(種)들과 다른 동물군과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으며, 동물원 관리인의 존재조차 모른다." 일관된 질서나 원리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주관을 투사, 반영한 허상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역으로 "무엇인가 저 먼 배후에 그래도 있기에 우리가 이렇게, 이만큼이라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알고 있음이 무엇인가의 존재 증명인지, 아니면 랜덤 파핑의 쳇바퀴, 야바위에 인류가 집단 자가 최면을 건 것인지, 판단은 이 매혹적인 책을 읽고서 우리 개개 독자가 내린다 해도, 설령 무지의 부끄러움을 느낄망정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건 아닐 텝니다. 가장 무지한 독자라도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거짓과 독단을 삼가게 하는 정연성, 진지함이야말로, 친절하고 똑똑한 이 책의 최대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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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 - 350만원 들고 떠난 141일간의 고군분투 여행기
안시내 지음 / 처음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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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350만원으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리라 마음먹은 소녀, 이제 스물 두 살,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감행할 만한 결단임에 분명합니다. 설령 타인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뭔가 실패라든가 볼썽 사나운 면이 있다 해도, 가장 아름다운 젊은 시기에 저지르는 실수이니 어느 정도는 용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외부로부터의 자극, 아름다운 풍광,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추태, 착하고 때 안 묻은 이들이 베푸는 선의, 터무니없는 악인들의 범죄 시도까지, 모든 영향으로부터 좋은 것만 섭취하고 나쁜 걸 걸러내는 능력이 최고치에 이르는 것도 아마 그 나이에 가능할 것입니다. 나이 들어 신기한 풍물을 보아도, 이미 감성이 찌들어서인지 못난 기성 관념만 재확인하고 끝내는 경우도 주변에서 많이 봤습니다. 체험이란 그래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려서 치르어야 합니다.



세계 일주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그 적은 돈으로 여러 군데를 잘도 순회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인도에 대한 기행담으로 채워져 있는데, 저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대세 중 하나가 그 너른 아대륙 곳곳을 살피며, 그 특유의 기후나 풍경, 사람들의 습속, 혹은 문화 유산을 속속 즐기다 오는 건데요. 인도란 곳이 말이야 한 마디로 인도일 뿐, 같은 나라라고 보기 힘들 만큼 다양성이 존재, 분포하는 동네입니다. 가중치를 주려면 인도에다 많이 주고 일정을 잡아야 공평(?)하겠지요. 어린 학생답게, 인도인들과의 소통과 교류에서 받은 인상, 효과, 소득이 아주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본 사람은 알지만, 소박하고 꾸밈 없고 문명 세계 일반이 지향하는 바와 아주 다른 양식의 삶을 영위하는 그들이라, 한번 마음이 통하면 많은 기쁨을 나눠 주고 속을 틉니다. 반면, 이슬람 정복자나 영국 제국주의자들(혹은 그 훨씬 이전부터 아리아인의 재앙과도 같았던 침략)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입었기에, 어이없는 속임수를 부린다든가 생각지도 못할 한심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치는 일, 여성을 우습게 알고 때로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그들 특유의 풍속이랄까 습성이, 여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다각도로 남깁니다.



공항 출발시 세 시간 정도 무서워서 막 울었다는 토로가, 솔직히 독자 입장에선 "이런 약한 나를 좀 봐 달라"는 식의 내숭 비슷한 태도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진 돈이 넉넉지 않아 이런 위험천만(!)한 반(半) 무전여행을 어거지로 시도하는 형편에 대해, 일종의 서러움이랄까 자기 연민의 표현으로도 느껴져 한편으로 마음이 짠했습니다. 이 책 처음(그리고 본문 중간중간)에도 나오듯, "도대체 350만원으로 비행기삯이나 치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이렇게 최소의 비용만 들인 채로, 영리 숙박 업소를 이용하지 않고 현지인들의 호의에 기대어 무료 홈스테이만을 시도하는 패턴을 "카우치 서핑"이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가 아니고선 거의 시도하기 힘든 여행양식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가? 이 역시 모바일 시대라서 가능한 일입니다만, 프로모션을 알려주는 실시간 정보를, 요즘 같으면 항공사 앱을 깔았다면 바로 받을 수 있죠. 제주도 코스 같은 인기 상품이야 시즌 아니라도 바로 매진되겠지만, 안시내씨의 계획 안에서처럼 비수기 비인기 지역들이 그 타깃이라면 조금 부지런을 떨었을 때  티켓의 연쇄 확보가 일정 맞춰 가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이런 거대(?) 기획을 이루려면 여간 열정과 성의가 들어가지 않겠지요.



혼자 힘으로는 어렵고, 아무래도 경험자의 조언이 있어야 했겠으며, 유명한 저자들, 전문가들에게 일일이 메일도 보내면서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 이름이 종종 나오는 "대진오빠"는, 카우치 서핑에 일가견이 있는 국내 전문가인(책도 다수 쓴) 김대진씨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런 패턴의 여행에 관심 있는 분들은 그의 블로그 등을 참조해 보십시오.



해맑은 미소는 언제나, 낯선 환경의 위험으로부터 저자를 지켜 주었다고 합니다. 약한 여성의 몸으로(상투어구가 아니라 이 책의 저자는 정말로 160cm도 안되는 신장에 가냘픈 체구의 여성)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지구반대편에서, 견문을 넓히고 사람을 사귀겠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절로 돕고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도 인간 사는 세상에, 나쁜 놈들보다는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증거, 선의를 확인하고 온 거죠. 물론 당찬 마음도 먹어야 합니다. 책 표지 사진을 보면 티없이 맑은 표정으로 현지의 풍미를 감상하는 저자의 모습도 나오지만(이 사진에 반해서 책을 고른 독자도 많을 거에요), 책장을 잘 넘기면 가늘게 뜬 눈에 단호한 표정을 지은 샷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구촌의 어느 세상이건, 호의나 선의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때로는 독기를 품고, 악의의 시도에 대해 표독스런 거부를 표시해야 합니다.

이런 힘든 여행이 어린 몸에 얼마나 고단했겠습니까. 아마도 책을 읽으신 분들은, 버스 안 "독수리 3형제"가 치한을 퇴치해 주는 그 장면이 가장 통쾌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정작 당사자는 버스 안에서 존다고 무슨 위해가 가해지는 줄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지구촌 어디서나, 생긴 모습과 풍습은 달라도, 사람 사는 이치와 연대의식, 정의감은 공통되는 바 있음을 확인했기에, 이 스토리가 풍부한 여행서의 독해는 읽은 이들에게 정보 이상의 많은 걸 남겼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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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신화로 말하다
현경미 글.사진 / 도래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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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가 광대할 뿐 아니라 정확한 집계가 곤란할 만큼 많은 인구를 지닌 인도는,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하나의 세계"로 파악하는 게 온당할 것 같습니다. 엄청난 인구와 방대한 국토, 다양한 풍습과 기후를 지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또다른 신흥강대국인 중국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힌두교"라는 엄청난 규모의, 문화, 사상 체계, 우주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12억 인구 중 대다수가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와는 달리, 이 힌두교는 일상과 신교(信敎)가 거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독특한데요. 이래서 다른 거대 종교, 세계 종교와는 달리 "성직"과 "세속"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다른 종교가 "세속화"의 경향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것과 달리, 힌두교는 평신도(?)들이 사제 계급(....)의 특별한 독려 없이도 자발적으로 신앙을 생활 속에서 굳혀 가는 사실도 독특합니다.



우리뿐 아니라 서양인, 나아가 지구촌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인도인들이 생활하고 사는 방식은 너무도 다릅니다. 그래서 책에서 보는 인도, 학교나 사회 교육기관에서 접한 인도와, 실제로 현지에서 몇 년, 혹은 그 이상 살다 오신 분들이 겪어 보고 전하는 인도는,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 더 큰 괴리가 느껴지더군요. 중견 사진작가 현경미 선생님이, 본인의 작품과 경험담, 세계관, 철학을 곁들여 예쁘게 짜 내신 이 책은, 쉽고 피부에 와 닿는 설명으로, 인도란 나라가 대체 어떤 문화와 풍습으로 물들여진 곳인지, 친근하게 술술 풀어 주고 계십니다. 



저자께서는 일단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인도, 힌두이즘 특유의 설화적 세계관에 대해 크게 공명하고 계신 듯합니다. 사실 힌두이즘은 우리 정서와도 아주 동떨어진 체계가 아닙니다. 브라만 교에서 계급 준별 요소를 제외하고 보편성을 강조한 게 불교이며, 불교의 도전으로 교세가 위축된 브라만 신앙이 대중(특히 농민)과 타협하여 새로 토착성을 강화하여 거듭난 게 힌두교입니다. 자연히 세계관과 설화 체계가 불교와 대부분을 공유할 수밖에 없고, 불교를 근 1500년 전부터 수용한 우리 민족이 이런 문화에 마냥 낯설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장 이 책에서 소개된 바로도, "나락"이 지옥을 뜻하는 "나라카"에서 직접 연유한 단어이며, 그 외에도 "아수라장"이니 "야단법석"이니 하는 게 힌두이즘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불교 용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저자께서 힌두교에 대해 지닌 태도는, 애증과 호오가 묘하게 교차하는 복합적 성격인 것 같습니다. 일단 힌두교는, 추상적이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인간 처세의 원리에 대해 직접적인 가르침을 많이 전합니다. 힌두 신화의 토대를 처음 창안한 이가, 생물의 기원과 발생, 혹은 진화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한 덕인지, 비슈누의 첫째 화신(아바타)이 물고기 마츠야, 두번째 화신이 거북 쿠르마라는 건 오늘날 생물학자들이 거의 의견 일치를 이루는 척추동물의 발생 순서와 일치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비슈누의 아내인 락슈미가 부(富)와 번영을 관장하기에, 아내가 그를 떠나면 당장 할 수 있는 권능이 사라진다는 구조도, "부자 되려면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우리네삶의 이치를 잘 설파한다는 게 저자분의 애교 섞인 해설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악한 두료다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대결에서, 마냥 싸움의 규칙을 미생지신격으로 준수하는 게 상수가 아니고, 때로는 상대의 선(先) 위반을 빌미로 반칙도 일삼아야 한다는 크리슈나의 조언은, 인간사의 융통성이랄까 권모술수의 이용을 "인도인에게 환영 받는 방식으로" 권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윤리(혹은 칸트식의 정언 명법)에 회의를 느끼는 평균적 인간 심리에 더 부합하는 면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또한, 저자분이 힌두이즘에서 가장 깊은 공감을 갖는 대목은, "사후 세계"에 대한 자세하고 체계화한 가르침입니다. 사실 이 요소는 특히 우리 한국인에게는 힌두이즘이라기보다 불교적 교훈,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스티븐 호킹의 말을 잠시 인용하며, "아무리 대석학의 말이지만 언제나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며, 70여년만이라도 이 다채로운 빛깔이 삼라만상을 물들이는 물리계에서 육신을 갖고 뛰놀던 정신이, 이제 육신이 쇠했다 해서 영혼까지 사라지는 무(無)로 화할 수가 있겠냐는 취지로, "사후 세계"의 존재를 강하게 긍정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평균적인 한국인들도, 생전의 업보에 따라 내세에서 보다 나은 존재, 신분으로 거듭나거나, 아니면 그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지거나 하는 연기의 사상에, 거의 태생적으로 친밀감을 느낍니다. 한번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한국인, 나아가 동아시아인들은, 내세를 믿는다 해도 아주 편의적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일단 현세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고, 한 시간이라도 아껴 일하는 게 인생의 최우선 사명입니다. 바쁘게 살다가 혹시 무고한 생명을 죽일까 저어하는 심리란 아예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도 강남역 진입 골목길에서 차에 치어 죽은 고양이 사체를 보았죠. 고양이가 문제가 아니죠. 바쁘게 달리다 사람까지 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한국인에게는 다른 생명을 돌보지 않는 게 죄가 아니라, 한가하게 다른 생명을 돌보다 바쁜 사람 길 가로막는 게 더 큰 죄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 별로 없을 겁니다.



인도에서는 마구 자란 나무가 도로를 가로막아도(현지 기후 특성상 이런 괴물 같은 나무가 많다고 하십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행여 나무가 다치지 않게 배려까지 합니다.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가 도로를 거닐어도 차가 피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온갖 종류의 새떼들이 아파트 단지를 어지럽게 날며 민폐(일단 이런 걸 인도인들은 민폐라고 생각지를 않죠)를 끼쳐도, "구청"에다 민원 넣어대는 주민은 없습니다. 이처럼 자연과 생물을 내 이웃처럼, 아니 내생(來生)의 나나 내 형제, 가족처럼 여기는 게 인도인들입니다. 따님이 한국에 돌아와선, "왜 한국엔 새가 없어?"라고 물었다는데, 사실 도심에 부족한 건 새뿐이 아니죠. 농민 상경 시위 현장이나 동물원 아니고선 어디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게 타 생명체입니다.



이렇게 좋은 점도 있지만, 안 좋은 습성도 많이 가진 게 인도인들입니다. "처음에는 격의 없는 이웃으로 접근, 친해지면 내 것을 가져 가려 들고, 마지막엔 자기들 내키는 대로 하려 드는" 경향, 이것이 수 년 동안 인도에 거주하면서 저자가 느낀 바입니다. 델리 근처인 발달된 도심에서도 사람들 근성이 이런데, 더 외진 곳으로 내려가면 사정이 어떨지는 짐작이 됩니다. 남편이 죽으면 여자를 화장터에 떠밀어, 그냥 순장도 아니고 불에 태워 죽이는 풍습인 사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야만적인 폐습이죠. 아이들 기저귀 갈아 입히는 것도 "자기 카스트에선 할 수 없는 일(대변을 만지므로)"이라 해서 유아원 보모가 직무를 방기하는 사태도, 한국에서라면 어느 어머니도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경제 성장과 고루한 계급 의식은 결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실업(實業)에 종사하는 걸 천시했던 반상 준별의 관념이 지금껏 남아 있었다면 한국이 과연 무역 10대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저자께서는 그래도 하급 카스트 출신이 총리직에까지 오르는 등 발전과 변화가 있다며 인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시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아직 그들은 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갠지스(강게스, 혹은 강가)는 단지 자연지형으로서의 강 이상으로, 인도인들에게는 신성한 의미를 지닙니다. 1902년 이 강에서 물을 떠 간 "자이푸르의 마하라자"는 아마도 당시 라자스탄을 (영국의 후견 하에) 다스린 마도 싱 2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특히 암흑 미지의 사후 세계) 모를 여정이라는 관념을 담은 "야트라"의 설명에서, 목적도 없이 재화 취득의 레이스에만 몰두하는 우리네 삶의 덧없음에 대해서도 깊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책은 3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는 신화, 2부는 생활, 3부는 저자분의 주거지 말고 자신만의 여행지로 즐겨 방문했던 인도의 명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부가 신화 소개로 짜여진 건, 신화, 혹은 종교 설화를 모르고선 인도인의 생활이나 역사 유적이 갖는 의미가 전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 한 권으로 그 복잡한 인도 신화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최소한으로 알아 둘 필요가 있는 대목만 잘 짚어서 정리해 주신 것 같습니다.

여성 저자의 입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 군주였으면서도 여성에 대해 폭력적 수단을 쓰려 들지 않고, 인품과 매력으로 이성을 대한 두 황제를 특히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악바르(아크바르) 대제이며, 다른 한 사람은 뭄타즈마할의 부군이자 아크바르의 손자 샤 자한입니다. 타지마할 묘당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경탄하는 저자지만, 그런 완벽한 건조물 구축에 동원된 인력과 자원의 희생이 얼마나 엄청났을지에 대한 차분한 성찰도 잊지 말자고 하시네요. 거대한 대륙에서 현세와 내세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여타 민족이 흉내 못 낼 방식으로 체계화한 그들에 대해, 이 쉽고 재미있는 책, 작가분의 사진 작품까지 가득 실린 예쁜 책으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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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미 2015-05-3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photobada.com/220375087677

사진전 합니다.^**^
 
HRC 힐러리 로댐 클린턴
조너선 앨런.에이미 판즈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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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저술 명의가 큼지막하게 박힌 책을 출판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저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는 의외로 크게 어필하는가 봅니다. ("저 사람은 책도 쓴 사람이야." "대단한걸?") 하지만 책의 외관만 지녔다 해서 그 종이와 잉크의 더미가 다 (책이 마땅히 품어야 할 평균적) 가치를 보장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정치인에게 매번 똑같은 방법으로 속는 유권자가, 책의 가치라 한들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회의주의가 어쩌면 세상을 보다 정확히 바라보는 시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 시즌인가 보군"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출판 러시에 끼인 상품이라면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정치인의 홍보책자가 아닙니다. 어떤 정치 진영을 지지하면서, 골수 팬이 아이돌스타를 바라보듯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민주당 지지자라면, 여태 간직해 오던 환상이 깨끗이 사라질 수도 있는, 두 노련한 저널리스트가 공동으로 기록한 "리얼리즘 연대기"입니다. 연대기가 다루고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아서, "두 대선 사이에 낀 4년"이 그 전부입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게 어디 보통 중요성을 지닌 이벤트이겠습니까. 프라이머리-전당대회-대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만 다뤄도 대하소설 한 질 분량이 나올 것입니다. 이 책은 용케도, 얽히고설킨 요지경 같은 비화와 일화 중에,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여성 정치인, 그냥 여성 정치인이라고만 말하기엔 너무도 거물인 그녀에게 초점을 잘 맞추어(사진 찍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초점 맞추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정치 비사를 풀어 놓는 와중에 절묘하게도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구심점을 결코 비껴가지 않는 기교를 선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힐러리 클린턴의 홍보 책자도 아니고, 아무래도 과장이나 미화가 낄 수밖에 없는 자서전류는 더더욱 아닙니다.

 

7년 전(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누구나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을 점치고 있었을 때, 버락 오바마라는 신성(新星)이 등장, 기존의 모든 판도와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가 인기 있고 장래성이 충분하며 자격을 널리 갖춘 정치인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탄탄한 커리어와 관록을 갖춘 거물을 대신하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닌가, 그에게는 다음이란 기약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클린턴 여사는 이번을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없지 않을까. "지나친 노욕"이라는 평판도 평판이고, 그 이전에 무리적 연령도 높고, 새파란 정치신인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면 과연 위신이 남아날 바가 있을까 하는 전망에 거의 다들 일치를 보았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전망은 그대로 "예언의 자기 실현력"을 발휘하여,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화제를 모은 지 불과 4년밖에 안 지난 초년생 오바마는 마침내 클린턴 여사를 꺾고 말았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저지른 대형 실책, 파국이 몰고 온 여파가 엄청났었기에, 공화당에서는 거물급 인사들이 출마를 회피했고, 따라서 민주당 전대의 승자는 차기 대통령으로 뽑히는 게 거의 확실시되었습니다.

 

이 책의 1장은 대통령 취임 직전의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과 어떻게 협력하고 지지를 얻었으며, 지지를 대가로 약속한 바를 어떻게 일일이 다 실행에 옮겼는지, 양 진영의 기라성 같은 참모와 책사, 실무가들의 포진한 면면을 자세히 일러 주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2,30대의 젊은 수재들도 상당수이며, 앞으로 미국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개성에 의해 물든 스토리를 펼쳐 갈지는, 일찌감치 이 챕터를 참조하고 관전하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거물의 미미했던 시작을 조기에 발견, 주목하는 건 뒤늦게 판에 낀 관전자가 채 누리지 못하는 기쁨을 안겨다 주기 때문이죠. 단언컨대 2, 30년 뒤의 대권주자 중(민주당에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에도 수시로 나오지만 당적 변경이 미국이라고 해서 그리 금기시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므로) 대여섯 명은, 이 책에 언급된 양 후보의 젊은 브레인들 중에 있을 겁니다. 책읽기의 재미는 이런 데서도 찾아야 하며, 편협한 정치 광신도의 자기도취 신앙고백은 순수한 독서인의 기분만 망칠 뿐입니다.

 

오바마가 비록 일반 유권자 사이에서 지지는 높았지만, 전당대회 대의원을 확보하는 레이스에서는 당내 기반이 몹시 중요했으며, 이 점에서 정치신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 못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측의 적시 양보는 이래서 중요했으며, 미국 전당대회 관행에 비추어 이 해에 클린턴 측은 패배 선언을 몹시도 미루는 편이었습니다. 더 이상 지연되면 당내 갈등이 심화되어, 축제로서 마무리되어야 할 전당대회가 앙금을 남긴 채 끝이 나게 되고, 이 경우 클린턴 지지층은 대선에서 오바마의 표로 결집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컸죠. 이 책 중간에도 나오는 푸마(PUMA. "당의 단합은 개뿔"의 약자) 그룹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바마는 먼저 민주당 내부의 의견일치를 이끌어내야만 했고, 이는 정권 지분의 대거 양보로 이어집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려한 연설가로는 빌 클린턴, 콜린 파월 같은 인사가 손꼽힙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1990년대 8년기 동안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그 실세였다는 말도 있지만, 민주당 성향의 일반 유권자를 상대로, 인기나 지지도 면에서 빌 클린턴을 능가할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놓치면, 빌 클린턴을 놓치는 거고, 이 경우 오바마의 역량과 성향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던 전통적 민주당원들의 지지가 표로 연결될지는 완전한 미궁에 빠져듭니다. 이 경우 선거전에서 집중적 관심을 모으다 정작 본선에서 패배하는 희귀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었습니다.

 

간발의 차로 교통사고를 모면하여 귀가한 아이에게, "잘 됐네." 하고 어깨만 토닥거려 주고 끝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혹시 현실이 될 수도 있었던 악몽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만전을 기하는 부모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2008년의 오바마는  젊고 미숙한 정치인이고 설사 패배한다 해도 이후 4년 내내 대통령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정계에서 20년을 누벼 온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현실적이었고, 더 노련한 처신을 할 줄 알았습니다. 이 책은, 오바마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오바마의 그런 "어른스러운" 면을 보고 크게 각성할 줄 알았던 그녀, 그리고 종전과는 다른 컬러로 거듭날 줄 알았던 그녀의 "후일담"이자 "리부트(?) 시퀄"입니다.

 

이 책에 보면 오바마 1기 집권기간 중, 국무장관이던 그녀가 대통령보다 더 높은 지지도를 기록하기도 했던 사실의 언급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우리식 표현을 빌리자면 "안티", 혹은 "비토 세력"이 많았는데, 이는 화려한 락스타식 행보를 영부인 시절, 뉴욕 상원의원 시절부터 즐겼던 그녀에 대한 반감이 남긴 흔적이죠. 이들을 모두 성차별주의자라 부를 수도 없는 게, 여성 중에서도 그녀의 퍼스낼리티에 깊은 반감을 지닌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래의 스타일을 거두고, 실무자로서 조용히 외교 업무에 종사하며 세계를 순방하고 다니는 그녀의 선택을 지켜 보며,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 같은 반응이 점차 대세를 형성했기 때문에 저런 여론조사 결과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빌 클린턴이 1992년 대선에 나왔을 때도, 많은 이들은 "외교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맞상대였던 조지 H W 부시에 비해). 2008년에도 똑같은 지적이, 아내인 그녀에게도 행해졌다는 건, 여러 복잡한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4년 간의 국무장관 경험이야말로, "백의종군(사실 국무장관 같은 초고위직이 "백의"로 은유될 건 아니겠습니다만)", "외교 경력" 의 이미지를 그녀의 종전 약점위에 완벽히 커버해 주는 회심의 한 수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보면, 4년의 국무 장관 역임이 그리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습니다(이런 솔직함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입니다). 콩고의 어느 여대생이, 이슈에 대한 남편(빌 클린턴)의 의견을 묻자 크게 역정을 낸 것도 국무장관으로서의 온당한 처신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솔직히 그녀의 강점은 미국 국내 문제의 개혁과 정비 쪽에 식견이 풍부하다는 쪽이지, 외교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그녀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일반 대중에 남겨진 이미지랄까 우려를, 이런 "자세를 낮춘 행보", 혹은 "성실한 동선"을 통해 크게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오바마는 민감한 정치 문제에 대해 일일이 총대를 메고 전선에 나서다(물론 이게 대통령의 본분이니 당연한 선택입니다만) 이미지를 많이  깎아먹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오바마 집권 1기의 최대 승자는 힐러리 클린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누차 말하지만 이 책은 힐러리 이야기만 담은 게 아닙니다. 힐러리를 주(主) 피사체로 삼되, 그녀 주위의 모든 유의미한 풍경을 가능한 한 사실 그대로 전달하려 애쓴 멋진 책입니다. 백악관 의전장은 실세 중 실세인데, 이의 지명권을 가진 힐러리(이런 약속도 안 지키면 그만인 게 정치판입니다)가, 자신의 극렬 지지자인 핵심 참모를 불쑥 카드로 내민 것도, 오바마 측에선 충분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지켰고, 이에 대한 답례는 2012년 힘든 승부에서 빌 클린턴의 전적인 지원으로 갚아졌습니다. 미국이라고 해서 추악한 술수와 배신이 난무하는 건 정치판의 공통 속성인데, 두 대인의 멋진 거래(그러나 결코 화합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를 지켜 보는 마음이 뿌듯해 오더군요.

 

이름이 이니셜로 불리는 건 정치인들의 로망입니다. 인기만 있다고 다 그랬던 게 아니라, 예컨대 로널드 레이건은 RR 등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친근하고, 뭔가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분위기라야 이런 애칭이 붙여졌습니다. 앞서 말했듯 클린턴 여사는 기껏해야 존경의 대상이었지, 그녀가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거나 친근한 이미지였다거나 한 적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것이며, 적잖은 계층, 집단은 그녀를 경원,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얼핏 Her Royal... 같은 착시마저 일으키는 저 이니셜 HRC는, 아직까지는 그녀의 견고한 지지층에서나 통하는 애칭일 것입니다. 이 구호, 이 울림이 만인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는 신뢰감, 우호감, 친근감의 형성이야말로 그녀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사실 그녀는 리버럴의 챔피언도 아니고 소외계층의 후원자도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도 나오듯 그녀는 뉴욕 상원의원 시절 지나치게 유태인 부자들의 눈치를 본다 해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빈축을 사기도 했고, 그녀의 살아온 생애란 한 점 흠도 없는 엘리트의 전형적인 궤도였습니다.

 

2016년의 선거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진부하고 낡아빠진 프레임으로는 절대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승리는커녕, 2008년에 그녀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런 안이한 스탠스에 있었습니다(오바마가 만일 "최초의 흑인 대통령" 컨셉에 기대었다면 역시 패자가 되었을 겁니다)바보가 아닌 이상 또 같은 전략에 기대다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프레임은 이미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 시절에 충분히 소비되어서, 더 이상 뽑을 카드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16년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바라는 건, 미국을 단합시키고 번영으로 이끌 능력 있는 대통령이고, 그 판단에 남녀의 성별은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클린턴 여사는 "덕망 있는 능력자"임을 유권자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게 과제이며, 이 객관적인 르포는 미심쩍어 하는 많은 이들에게, 최소한 비토의 스탠스로부터는 한 발 물러서게 도와 줄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에건 국민들이 원하는 건 원색적 진영논리나 선명성이 아니라, 국가를 당당히 "앞에서 이끄는" 소신 있는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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