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의 연인 1 - 개정판
유오디아 지음 / 시간여행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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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출생하여 발달된 문명의 온갖 이기가 주는 혜택을 받고, 기본적인 생존 조건의 결핍이 주는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온한 환경에서 감성의 건전한 계발과 감각의 세련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건 참으로 큰 행운입니다. 주인공(그것도 여주)에게 이런 말을 꺼내서 좀 안됐긴 합니다만, 18세 소녀 김경민이, 시간 여행이라는 특출한 능력을 타고나서 서기 환산 1597년에 가 꽂힌 게 아니라, 그저 당대인으로 태어난 후 여차저차한 곡절로 궁궐 무수리가 되었다면, 과연 지존의 몸 조선 세자와 말을 트고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요? 치도곤을 맞고 당일로 목숨을 잃을 중죄인 신세나 면하면 천행이겠습니다.

 

김경민은 21세기(2013년)에도 그 자유로운 영혼을 주체하지 못해서, 또래들 다 다니는 정규교육도 변변히 이수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나 준비하는 신세입니다. 이런 소녀가, 시대상 근 500년을 거슬러가, 반상의 구별과 신분제의 차별이 엄존하던 조선 시대 한복판에 불시착한다면, 단 하루도 온전히 체제와 사회에 적응 못하고 비참한 신세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당대 만인이 존숭하는 지존의 몸으로부터, 존중, 친밀감, 우정, 나아가 사랑 비슷한 감정을 얻어,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딱한 처지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는 건, 제 생각에 현대인으로서 어느 신분적 굴레, 사회적 폐습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은 채 자신의 영혼 그 순수성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랄 수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우리의 경민이는 용모가 예쁜 편입니다(안 봐서 모르긴 하나, 그런 것 같습니다). 키가 크다는 말은 아직 이 1권에서 분명히 표현되고 있지 않은데, 제 생각에는 "현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매력 요소인 장신까지 갖추었으면 좋았을 텐데, 영양상태로나 섹시함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버프를 받아서나 중세인은 이 점에서 상대가 안 될 겁니다. 그런 설정이 빠진 건 아마도 자신보다 키 큰 여자를 광해군,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이 과연 좋아할 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정원군은 특히. "그 나라는 대개 다 여성들이 기가 센 모양이죠?"하며, 이복 형에게 전언으로만 듣고 상상으로만 떠올리는 모습으로도 김경민과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광해군처럼 강단이 있는 사내는 몰라도, 정원군처럼 우유부단한 구석이 많고 로맨티스트 기질이 다분한 남자라면 장신 여성에 끌릴 만도 한데... 그러나 경민이가 저런 모습을 한 데에는 모르긴 해도 작가님의 원모심려가 다 있었겠죠.

 

소설이 아닌 실존인물로서의 정원군은 거의 실록 전체를 통틀어 왕족 출신 악당 랭킹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말종에 가까운 방탕아였습니다. 그 아들 이종- 여기서 네 살짜리 꼬마로. 보모 상궁 김경민의 보살핌을 잠시 받기도 하는 - 역시, 군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는 도무지 보기 힘든 변변치 못한 왕족 정도로 평판이 난 사람인데, 어찌어찌해서 시운을 잘 탄 끝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까지 되고 말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정원군은, 광해군 못지 않게 정이 많고 선량하며(광해군도 그리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는데... ), 우리의 주인공인 김경민에게 깊은 정을 주는 남성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려 "보지도 않고" 사랑에 빠졌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이 정원군의 사랑이야말로 광해군의 그것보다 순도가 높은 것 아닌지 하는,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사에 빠져 들기도 합니다.

 

정원군의 어린 아들 이종 역시, 아이치고는 순하고 눈치도 빠른 영특한 개성으로 묘사됩니다. 역사를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원군은 물론 그 아들까지, 광해군과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정치적으로나 개인 간 감정으로나 지속적으로 대립하던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1권에서의 정원군은, 이복 형을 무척이나 따르고, 혹시 자신의 제안으로 형이 정치적 곤경에 빠질까 염려하여 상당한 배려까지, 왕족으로서 사소한 거동과 행사를 두고서도 일일이 베푸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린 아들 이종은 아직 광해군과는 컨택이 없습니다만, 주인공 경민이를 (비록 친어머니와 친할머니의 방해로 오래는 같이 못 지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만의 인연으로도 무척이나 따르는, 실존인물로서의 말로와 성격, 인생을 낱낱이 아는 우리들로서는 기겁할 만하게, "아주 귀여운"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실감이 안 나는 분들은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작가 정하연 선생이 틀을 짜고 배우 이덕화가 열연한 그 찌질한 군주 인조를 떠올려 보십시오. 애가 그 사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커서 저렇게 되어 버렸다는 걸까요..

 

이런 의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직 1권까지밖에 안 읽었지만, 김경민이 시간을 거슬러간 1597년과, 인조반정이 일어난 1523년,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건대" 그 좋았던 사람들이 저리 변해 버린 걸까요. 사람이 변한 건 정원군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이 1권에서도 경민이가 염려하듯,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에게 사형을 선고한 건 여간 잔혹한 심성이 아니고선 저지를 수 없는, 도덕적으로 떳떳지 못한 행동입니다. 자기가 아는 광해군은 그럴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경민이가 그 과거의 시간대에서 혹시 뭔가 "사고를 쳐서" 두 청년의 인격과 퍼스낼리티에 심대한 영향을 남긴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문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저 "아 그래서 역사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군"하는 통속적 감동을 예비하거나, 혹은 (속으로는 뻔히 다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짐짓 놀라움을 가장하는 장르 문학 애독자의 관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소설은, "시간 여행자는 결코 역사의 정해진 흐름에 간여할 수 없다."는, 작품 자신이 마련한 자체 규칙에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대로라면, 경민이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착한 두 왕자, 서로 우애가 좋았던 형제를, 악귀로 바꿔 놓는) 큰 실책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건 작품 내의 완결 우주를 붕괴시킬 뿐 아니라, 독자와 맺은 약속(우리가 먼저 청한 바 없다 해도)을 어기는 과오입니다. 이 구조적 갈등을 어떻게 무마하면서(혹은 멋지게 승화시키면서) 이야기가 발전해 나갈지 지켜보는 게 미학적(그리고 통속적 관람의) 포인트입니다.

 

멋진 표현이 많더군요. 특히 정원군이, 경민이와 광해군이 가까워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경민이의 다소 궁색해 보이는 변명을 듣고는 "남녀 사이에는 친구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핵심을 찌르는 한 마디를 단호하게 던진 뒤, "설령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 전혀 (이성으로서) 마음에 없는 여성을, 남자가 친구로 두지는 않죠."라고 덧붙이는 장면은, 독자의 뺨에 한 줄 소름을 쫙 돋게 하더군요. 저 말 자체가 얼마나 맞고 틀리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설령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라면서, 정원군이 자기 확신에 한 뼘 유보를 남기는, 여성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 신사다운 매너와 심성이 저 말 한 마디에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설령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라! 캬, 21세기를 사는 남성이라 해도, 자신의 여자에게조차 소위 mansplain을 하려 들고, 일장 설교나 늘어 놓으면서 우월감을 과시하는 자기 중심적인 모습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물며, 조선 시대 왕의 아들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 (자기 안마당에서야) 일개 나인에 불과한 여자의 의사 따위야 그저 무시하고, 폭력을 써서라도 잠자리에 끌어들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런 강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이, 저 정도라도 은근한 언사를 구사하며, 여성을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 마음을 사고 싶어하는 뜻을 표현하는 게 어딥니까. 이런 모습으로 보아 이 소설 속의 정원군은 정말로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이랬던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나 단단히 탈이 난다면, 그건 정말로 큰일이 또한 아닐 수 없겠구 말이죠.

 

판타지 소설이 자체적으로 엄격한 규칙을 마련하고, 앞으로 전개되는 행보에 있어 스스로 설정한 그 룰에 철저히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유분방한 상상력까지 마음껏 발휘한다면, 독자로서는 그 이상 고맙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남은 2, 3권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보겠으나, 왠지 이 장르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끔찍한 비극이나 결말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도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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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증언
오정은 지음 / 디아망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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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특검"이란 용어는 아주 드물지만은 않게 세인들의 귓전을 울립니다. 통상적인 수사로 진상이 명쾌히 밝혀지지 못하거나 그럴 전망이 농후할 때, 어떤 사회적 압력이나 잇속에도 구애받지 않으리라 기대되는, 법률적 소양을 갖춘 이를 뽑아 그런 "특검"의 직분을 맡깁니다. 성격은 아주 다르지만, 조선 시대에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나 봅니다. 소설에서의 "특검"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의 "이능자"가 그 대상이라는 점,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는 달리 "묘령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행동이 민첩하고 무예가 빼어나며, 웬만한 위협적, 파국적 사태가 벌어져도 전혀 심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선 가장 밑바닥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결국 운명의 장난이 몸을 비틀 때, 이들도 어쩔 수 없는 여인이라서인지 왈칵 눈물을 쏟는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 (현대의 독자들)은 기분 사납게 하는 괴물딱지들로 그녀들을 보지 않고,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되 우리가 얼마든지 공감을 보낼 수 있는, 인간적이고 매혹적인 영혼으로 다루며 마음 한 구석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이능자란 미모가 빼어나다든가, 위에 적은 대로 범죄 수사에 탁월한 면모를 지녔다든가 하는 정도를 넘어, 어느 정도 초자연적인 능력의 보유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판타지의 경계 쪽으로 많이 넘어드는 면을 보입니다. 이런 젊고 아리따운 여성 이능자 뿐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혀끝으로 빚는 묘사만 듣고서 정확한 용모파기를 붓끝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놀라운 그림 솜씨를 지닌 "신체적으로 눈먼(이게 중요하죠)", 나이 지긋한 남성 화공도 한 사람 나옵니다. 본디 뛰어난 화가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솜씨가 아니라(사실 이것도 보통 재주가 아닌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정확히, 자유자재로 표현하여,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소경이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에게 선명하고 생생한 선, 면, 색으로 보여 주는 능력이 더 본질적입니다. 미켈란젤로나 루벤스가 그저 기막힌 모사 능력으로 불후의 명성을 얻은 건 아닙니다. 이 역사사의 거장들처럼, 소설 속의 화공도 신화의 테이레시아스처럼 진정한 심안(心眼)을 갖추고 있었기에, 장삼이사가 지껄이는 어설프기 짝이 없을 몇 마디 말로도 사태의 진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거죠. 이능자란 캐릭터들의 등장에선 차라리 뭐 그러려니 정도의 심드렁한 반응도 나올 수 있습니다만, 이처럼 깊이 있는 성격과 운명의 설정을 접하는 독자로선, 소설 자체의 넉넉한 주제의식, 치열한 고민을, 앞으로 읽어 나가며 기대할 수 있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런 기대는 여러 면에서 배반당하지 않고 풍족히 갈증을 채우게 됩니다.

소설 제목에 나오는 "경계"의 의미는, 망자가 이승의 삶을 잃고 나서 죄를 씻는 공간인 연옥, 아니면 림보와도 살짝 비슷하지만, 죄벌의 개념이 없고, 육(肉)과 영(靈)의 중간 지대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이 완전한 영적 세계에 진입해 버렸다면, 이능자들로서도 그(들)에게 대화를 시도할 수 없습니다. 영화 <엑소시스트 3>에서 킨더만 형사가 범죄 피해자들의 망령을 수수께끼의 기차역(어디로부턴가에서 어딘가에로 떠나는 공간이기에 분명 일종의 "경계"였습니다)에서 만나는 장면과 비슷하고, 그보다 더 대중적으로는 "전설의 고향" 류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원귀, 혼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이능자 특검관들은 여타의 정상인처럼 혼비백산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를 노출하지 않고, 태연하게 일상 대화를 그들과 나누며 자기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정보를 능숙히 취득한다는 점에서 다만 크게 다를 뿐입니다.



이능 특검관의 존재는 범죄를 전제로 하고, 그 범죄가 소소한 낙오자, 반사회분자, 부적응자 따위에 의해 저질러진대서야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엔 부족합니다. 사회 질서와 안녕을 해치고, 떳떳지 못하게 그 더러운 야욕을 추구하려는 덩치 큰 거물이 전면 혹은 배후에 자리해야 "이거 예삿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긴장과 전율을 유발할 수 있죠. 배경이 조선시대다 보니, 거물급 악당은 신분적으로 화려한 배경까지를 지녀야 이런 자격을 논할 수 있습니다. 그윽한 풍취를 나긋하게 발산하는 품격 넘치는 봉호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야망의 크기나 사회적 지위로나 큼직한 비중을 차지하는 악당은 "나이도 많고 자질도 범상치 않으나" 적통인 이복 동생에게 보위 승계에서 밀려야만 했던 서장자 하월군입니다. 방계 왕손도 아니고, 선왕의 직계 혈족이며 한창 왕성한 혈기를 보일 나이이니, 어린 임금과 (생모로 보이는) 대비에게 이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질서와 사회 안정, 누대를 이어온 왕실 법통까지를 수호해야 하는 사법관으로서, 서은우는 그의 음모를 저지해야만 합니다. 헌데, 그녀 역시 여인의 몸인지라, 풍채 좋고 남성적 포부로 가득한 왕자를 보며, 이성으로서 두근거리는 심사를 마냥 억누를 수가 없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이승의 애환과 사연이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억겁의 연과 기에 비하면 티끌처럼 가볍고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덧없습니다. 서은우는 경계에서 헤매는 무수한 넋들과 대화를 나눠 보았기에, 인간사 영욕과 오욕칠정의 동요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제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한 인식에 도달해 있습니다. 소설은 "비밀스런 조직과 불온한 사상 간의 운명적 조우, 충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주인공 서은우의 이런 갈등과 마음씀의 미묘한 동선 역시, 독자들의 동조와 안타까움, 그리고 보다 먼 곳으로의 그윽한 눈길줌을 잘 끌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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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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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라는 정치단위가 주는 감흥, 동경, 위엄이란 실로 남다른 바 있는 듯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임했다가 상대가 저지른 뜻밖의 전술적 실책에  힘입어 광대한 소(小) 아시아 영토를 만지케르트에서 확보했을 때, 이들은 이곳에 룸  술탄국(國)이라는 경계를 새로 설정해서 다스렸습니다. 천 년을 지중해에서 패권자로 군림해 온 실체에 대해, 이름의 잔해라도 그대로 보존해 주는 게 자신들의 자존에 그리 해 되 것은 없다 여긴 소이입니다. 이로부터 다시 수백 년이 지나서야, 부족 시조를 달리하는 별개의 제국이 나서서, 최종적으로 "로마"란 이름을 지닌 제국의 심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현지의 신앙, 풍습, 언어에 대해 일단은 원상의 존중이란 관용적 정책을 취했습니다. 인종과 사고, 기질이 판이한 종족을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그 정도의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덕입니다. 여튼 과거의 늙고 쇠잔한 제국을 정복한 젊은 제국은, 인수한 유산과 그 유산이 뿜어내는 영광을 가능하면 본 모습 그대로 후대에 전하려고 애썼고(쉽지 않은 결단이었겠죠), 그 결과가 우리 현대인들이 목도하는 대로, 그저 평범해 보이는 공화국 터키에 그토록 많은 "인류 문화 유산"이 분포해 있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터키 정복자들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태에 대한 평판에 그 표현, 그 글자 하나마다 신뢰를 준다면, 이는 대단한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지에 가서 보아야, 투르크 제국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긴밀하고 따뜻한 호흡을 교차하고 있었는지 그 확인이 가능할 테니까요.



이 책은 한국에서 터키사 연구, 현대 터키 정세 연구에 권위자이신 이희수 교수님이, 천연색 사진 자료와 인문적 통찰, 지론을 복합해서, 현재 터키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이해가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지, 일반 독자 입장에서 편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돕는 내용입니다. 터키는 최근 IS의 발호로 다시 국경 일부가 정세 불안에 빠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서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치안 유지, 건전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당장 여행자들의 안전이 위협되는 수준은 아니죠. 이 서평이 작성된 5월 31일 현재, 터키는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교부에서 발동한 어느 주의단계(여행 자제 등)에도 해당되지 않은 국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다방면의 교류를 해방 직후부터 이뤄 오기도 했죠.

책에는 "서양이 터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신적 빚을 졌는지"에 잦은 언급이 나옵니다. 이 논의의 배경을 알려면, 서양이 터키에 대해 얼마나 나쁜 선입견, 편견을 지녔는지부터 먼저 살펴야 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소위 "성지"를 점령하고, 동시에 동서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한 후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부터, 서유럽인들은 터키에 대한 경계와 증오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십자군의 원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실상 현지인들에게 피해를 준 건 우리가 잘 알듯 기독교들의 과오가 더 큽니다. 종교를 표지로 한 두 진영의 대립이 이처럼 첨예해지고 나서는, 보다 격렬한 양상으로 군사적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잔혹한 만행이 자주 빚어졌죠. 어느 싸움이건 가해자가 피해자가 분명히 구별되는 건 아니고, 대개 자신이 도발한 범위에 대해선 쉽게 잊는 게 상례입니다. 중근세사 전체를 통해 투르크는 기독교 세력에 대해 공세적 태도를 유지했고, 서구 국가들은 자연 과장, 왜곡된 인식을 그들에 대해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술탄의 일인 전제정이 통치 전반에 걸쳐 불러온 해악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해소, 극복되지 않고 이어졌기에, 터키에 대한 나쁜 인식이 더욱 고착된 건 일부 그들이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에서 그들이 저지른 제노사이드 역시, 비슷한 시기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한 만행을 잊을 수 없는 처지에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소행입니다.

여튼 터키, 투르크는, 근 오백 년(그 이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에 걸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 만나는 접점 일대의 광대한 영토를 호령하던, 세계사적으로 겨우 중화 제국 정도나 그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강성한 제국이었고, 통치 시스템의 지속성과 세련됨 면에서 몽골 제국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원칙과 일관성, 독특한 신조에 의해 피지배 종족 다수를 다스렸기에, 문화 유산은 지배자 고유의 것이 성취한 수준을 훨씬 넘은 기존의 유산을 넉넉히 아우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 이희수 교수님이 지적하는바 "서양이 터키에 크게 빚진 사실"입니다. 투르크는 그때까지 현지에 내려오던 소중한 유산을 제국의 이름으로 끌어안아 품위 있는 컬렉션을 만들다시피했고, 이를 제국이 망해갈 무렵에도 사방에 흩뜨리지 않은 채 비교적 잘 보존하여 현대인이 온전히 감상하고 그로부터 정신적 효익을 얻을 수 있게 도왔다는 것입니다.

성 소피아 성당의 사연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처음으로 이 도시에 이슬람의 깃발을 꽂았을 때, 정복자의 관용 덕에 대대적인 약탈이 이 성스러운 건물에서 행해진 바는 그닥 크지 않았습니다. 이 유적이 큰 시련을 겪은 건, 그보다 이백 년 앞서 라틴인(프랑스인, 베네치아 인 등)들이 "못 받은 빚을 받아내려 자력 구제를 시도했을" 그 시점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토록 대대적인 약탈, 파괴, 신앙에 대한 능욕이 행해진 적은 없었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토록 어이없는 만행이 이뤄진 점과 대조하면, 터키(투르크) 정복자들이 어느 정도 여유와 관용으로 제국을 다스렸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이스탄불 현지에는 1453 파노라마 박물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터키인들로서는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이룬 이 정복이 자랑스럽기도 하겠으나, 패배한 그리스인들에게도 지존의 황제까지 그 목숨을 바쳐 가며 마지막 투혼과 애국심, 신앙심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장엄한 긍지를 갖는 대목이죠. 저도 구경한 적 있습니다만, 이 당시에 벌어진 양측의 대접전은 인류 역사상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극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이곳을 둘러보고 온 한국의 모 전직국회의장이, 그 관람의 감흥을 살려 책 한권을 지어 내었을 정도죠. 터키 당국의 훌륭한 정책적 안목이 돋보이는 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또 그 조상들은 타 민족으로부터 인수한 바를 잘 보존한) 유산만으로 관광객을 끄는 게 아니라, 이처럼 지난 역사의 현대적 재현을 통해서도 볼거리를 제작하여 웅대한 과거의 위용을 외부인들에게 상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터키는 공화국을 수립하고 수십 년 동안의 노력으로 재건에 성공하여 현재는 인구 대국, (전성기에야 턱없이 부족하나) 영토 대국, 지역 강국의 위상인데도, 제국의 해체 몰라기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아직도 외국인들 사이에 그닥 존경받는 이미지를 쌓지 못하는 게 유감이긴 합니다.


문화 유산은 곧 지난 풍속의 자취를 더듬어, 옛 사람들이 어떤 의식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영위했는지를 짐작게 하는 좋은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혼사를 앞두고 시어머니 될 이가 며느리 후보자와 알몸으로 대면하며 서로의 인격과 됨됨이를 살핀 목욕탕 문화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고부 갈등이 심한 당사자가 같이 대중탕에 다니면서 서로에 대해 한 꺼풀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눈길을 끕니다. 아무래도 기원이 같은 동아시아다 보니, 현지 혼혈과 기후 적응을 통해 크게 달라진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터키에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이, 그리스 본토보다 더 양적 질적으로 풍부하다면 많은 이들이 놀랄 만합니다. 실상은 이 소아시아 반도부터가, 특히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농경, 무역 등 여러 경제활동으로 터전을 삼던 주무대였습니다. 서양 문명의 태반 구실을 했던 그리스인들의 본향 중 한 군데를 그토록 오랜 동안 지배한 게 터키였으니, 이처럼이나 많은 박물관이 자리하여 귀한 유산을 품고 있음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터키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물게, 동과 서를 자기 한 몸에 아우른 적이 있고, 오늘날까지 인류 문화의 연속성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큰 공적이 있습니다. 책은 올컬러 편집에 백상지 인쇄이고, 휴대하기에 가벼워 현지로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가이드북으로 삼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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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셰프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셰프의 24시간
마이클 기브니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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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란 "먹는 존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활 수 없습니다. 짐승과 만물의 영장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면, 의식이나 비가시적 지표 등 막연한 기준들을 일단 제외할 때, 먹을 것을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먹느냐, 아니면 정해진 조리 방식을 거친 후 섭취하느냐 하는 잣대로, 누구의 눈에도 객관적인 판정이 가능한 게 바로 "요리 문화"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프랑스인들이 그처럼 자문화 중심주의에 마음 놓고 빠져들 수 있는 것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정교하며 인간 보편의 미각을 효과적으로 공략,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 강력한 무기인, "프랑스식 요리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확고한 자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어느 미국인 요리장의 회고담을 이야기의 본 줄기로 삼고, 직업인으로서의 철학을 틈틈이 요약한 에세이집입니다. 요리사라는 직업이 아직 한국에서야 확고한 평판과 존경을 얻은 편은 아니지만, 자라나는 세대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에 따라 요리장이란 직업이 얼마나 큰 성취감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지 충분히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기에, 일생을 두고  영위할 기능인으로서 셰프의 삶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독자가 곁에 놓고 읽으면서, 소중한 꿈을 가꿀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비단 요리장이 꿈인 이들만 읽으라는 내용, 기획은 물론 아닙니다. 일류 요리사이자 이처럼 멋진 책 한 권을 써서 세상에 내 놓을 실력이 되는, 미국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굵직굵직한 경력을 두루 거친 저자 마이클 기브니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체험을 소재로 하여, "요리장으로서 한 사내가 세상과 소통, 교류, 사랑, 때로는 충돌하는 지점이 어디어디이며, 그가 직업인으로서 큰 성취감을 느끼고, 때로는 패퇴하여 상처를 입는 때가 언제인지", 본분이 이야기꾼 아닌가 싶게 재미있는 말투, 다채롭고 격조 있는 표현으로 독자에게 들려 주고 있습니다. 요리를 안 접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가 접하는(사람마다 빈도수에 차이는 있겠으나) 일류 요리가 어떤 과정, 어떤 절차를 통해 "창조"되는지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진진한 흥미를 안겨 줍니다.
꼭 명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일류 요리가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솜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사람이 그 존엄을 일상에서 가장 쉽게,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절차인 요리의 음미,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인의 마음가짐이 어떤 모습인지를 엿보는 재미란, 이 가깝고도 먼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충족시킬 수 있게 해 주니 말이죠.

요리라는 인간 정신의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이 작동하여 빚는 문화행위, 이 비결과 내력, 애환이 모두 담긴 이 책을 읽고 제가 느낀 건, "요리장, 요리사란 직업이 예사 각오, 집념, 스태미너가 아니고선 누가 함부로 넘볼 수가 없는 영역이구나."하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고객으로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 사업 구조(설령 일류 레스토랑, 호텔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상, 비록 정해진 메뉴 안에서 주문을 받는다고는 하나, (일류일수록 당연히 메뉴의 제공 폭이 넓을 것이므로) 그때그때 손님의 요청에 기민히 응해 최상의 맛을 내게, 자신의 마인드세팅을 기민히 해 낸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리란 그 정신의 엄청난 집중과 고강도의 육체 노동이 수반되는 창조 행위란 점입니다. 셋째로, 요리는 그 과정에 대한 존중 감정의 밀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그 결과물에 대해선 잔혹할 정도로 까다로운 심미적 기준이 적용되는 기예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소홀하면서, 그 일의 최종 성과를 놓고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이상형만 염두에 둔 "미학자"들이 몰려 와, 인정사정 없는 품평을 해 대는 그런 냉혹한 환경에 노출된 "예술가의 처량한 처지'라면 그건 오로지 이 셰프들뿐이라는 게 저자의 인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리란 전쟁과도 같습니다. 영어에서 captain이란 단어는 이 프랑스어 chef와 조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유효하게 활동할 수 있는 중 가장 액티브한 단위를 이끄는 게 캡틴입니다(우리 한국 직장에서 흔히 팀장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정확한 판단으로, 한정된 시간 자원을 최대한 "영양가 있게" 사용하면서, 마침내 손님의 까다로운 미각을 "자발적으로 굴복하게 할 만한" 매혹, 압도를 이끌어내는 게 셰프라는, 주방의 대대장이 이뤄내야 할 책무입니다. 부(副)주방장을 프랑스어로 수셰프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lieutenant라고 표현합니다. lieutenant가 본디 부관이라는 뜻이므로, 셰프와 수셰프의 관계가 captain과 lieutenant의 그것과 일대일대응을 이룸을 아주 잘 보여주는 멋진 명명이자 메타포어죠. 우리 한국어 번역본에는 이를 "중위"라고 옮겼는데, 그러면 일단 일차적 문맥 의미가 잘 안 통한다는 게 단점이겠습니다.

요리장들의 애환도 많습니다. 일류요리장(匠)으로서 익힐 기능을 다 익히고 나면, 제아무리 재주가 좋고 수완이 빼어나 고속 승진을 해도(경쟁이 아주 치열해서 일반 기업 못지 않게 라이벌을 멀리 떨구기 위한 무자비한 레이스가 펼쳐진다는군요. 초심자는 주방의 가장 힘든 직책부터 다 거쳐야 하는, 고된 사다리오르기가 기다리고 있음은 당연하고요. 허드렛일 하는 게 한이 맺혀서 반드시 셰프가 되고 말겠다고 결심한 이가 다 있으니 말 다했죠), 일단 정상에 오르면 그때부턴 내리막길 타는 게 다반사랍니다. 이유는, 고객의 입맛 트렌드가 워낙 빠르게 변해서이고, 나이가 들면 이 변화를 추겨격하는 자체가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죠. 밑에서는 더 기민하게 트렌드를 좇을 수 있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에 대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그 자체가 고역입니다.

게다가 요리장들의 개성은, 대개 독불장군 타입. 자기만의 개성을 타 취향, 가치와 타협하려 들지 않는 고독한 예술가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세에 뒤처지지 말라는 위아래의 압력에 부대낀다는 자체가 힘든 노릇일 텝니다. 이 책에 나오는 브루클린 출신 셰프 브라이언의 경우, 키가 2m에 육박하는 거인에 다혈질입니다. 경력도 화려하고 아직 퇴물 취급 받을 나이도 아닙니다. 근데도 보수도 박한 외진 식당에서 고군분투하는 곡절이란, 바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는, 작은 보스로서의 포부, 주인되는 삶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다는 그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위, 셰프! 영어로 말하면 yes, sir! 이란 힘찬 응답이 주는 그 느낌과 비슷합니다. 주방에서는 당신이, 군림하는 유일한 지도자이니 그저 분부만 내리십시오!. 혹은 과연 당신이 빚은 솜씨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군요! 하는 감탄과 비슷합니다. 요리장은 그 작은 주방이란 공간을, 독특한 질서가 지배하는 소(小) 우주로 탈바꿈시키는 창조주입니다. 이 책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요리장, 셰프의 긍지와 자부에 대해 일반인이 잘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는, 멋진 문학적 풍미까지 겸비한 책이었습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용어 해설집은, 이 분야에 문외한인 독자가 다른 분야에도 지식을 적용할 수 있게 잘 편집된, 유용한 참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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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꿈결 클래식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민수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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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의 모든 작품이 10대 청소년들에게 필독서로 꼽히는 건 아니지만, 이 <변신>만큼은 어느 권장 목록에서도 예외 없이 그 전체를 빛내는 필수 요소로 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 시절 유수의 출판사들에서 찍어낸 세계 문학 전집에도, 이 "변신"뿐 아니라 <성채>, <선고> 등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내 몸이 벌레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내게 베풀어 주던 따듯한 정과 사랑은, 하루아침에 냉대와 멸시, 적대감으로 돌변했다... 너무도 유명한 설정이라, 카프카를 설령 모르는 이라 해도 이 대목만은 반드시 어디애서 한 번은 들어 보았을 겁니다. 사실 카프카의 최초 창작 이후 실로 많은 작가, 예술가 들에 영향을 주어, 21세기를 사는 이라면 어느 다른 문예 영역에서 어떻게 "변신"한 형태로든 저 모티브를 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책의 표지에는 카프카의 사진이 큼직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모습 역시, 마치 앤디 워홀이 작품으로 빚어 놓은 그 표정의 마릴린 먼로 얼굴이 하나의 아이콘으로 대중 사이에 확고부동한 자리를 잡았듯, 우리들에게는 (개별 작품은 물론) 작가로서 카프카 본인의 명성보다 더 널리 퍼진, 실로 유례가 드물 정도로 유명한 이미지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선고>에 나오는, 캐릭터 "아버지"의 한 대사처럼, "그래, 넌 본질적으로 순진한 아이지, 하지만 넌 동시에 악마와도 같은 녀석이었어!"(아니, 이 얼마나 기막힌 형용모순일까요)에서 구현하는 실상의 인물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 사진의 카프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 선하고 티없는 성품을 드러내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뾰족 솟은 귀의 모양은, 정말 악마의 전형적 심상을 부분 대변하고도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한 "작품적 표상"이 저 사진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전혀 안 그런 듯하면서도(이야기 자체는 시원시원하고 해학적인 게 많죠) 난해합니다. 과거 일본어 중역 성인본을 읽었을 때에는, 워낙 작품의 형식도 파격적인 데다(이 책에서도 그 점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번역한 문장이 명료하지 못해서, 다가서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 박민수 선생님의 옮김은, 마치 1920년대 한국문학 초기의 단편을 읽는 것처럼, 우리말로 읽어내기에 전혀 장벽이나 어색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문장이라 좋습니다. 한국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이시니만큼, 우리 독자는 전적인 신뢰와 함께, 그 번역에 속속들이 용해되고 침투해 있을 "해석"을 영접해도 될 것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매우 상쾌해졌다는 그 개인적 느낌에 두고 있습니다. 예전에 카프카를 두고는, 읽고 나면 저는 (감정이 아닌 생리적 반응의 일종으로서)머리가 아파 왔습니다. 카프카의 작품뿐 아니라, (당연히, 다른 사람이 쓴)그의 평전을 읽고서도 마찬가지였죠. 종래의 카프카는 제게 골칫덩이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장의 의미가 명료하게 들어와서, 독자가 텍스트 자체에만 마음 놓고 빠져 들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은, 사실 어떤 언어로 옮겨져도 본연의 의미가(최소한 그 주제의식의 요체만은) 다이렉트로 독자의 의식에 전달이 되어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게으른 독자가 흔히 즐기는 게 번역의 핑계지만, 번역도 독자를 도울 수 있는 범위까지는 최대한 돕는 게 그 본분일 것입니다.



<변신>. 저는 전에, 어제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믿음직한 청년 가장에게, 그 쓸모가 완전히 제거되고 혐오감만을 부추기는 외모로 바뀌고 나서, 냉정히 등을 돌리는 가족들의 비정함, 몰인정, 이중인격 등을 비판하며, 인간 본성의 간사함과 잔인함(자기 귀책 전혀 없이 그런 흉측한 운명을 맞은 그레고르는 그들의 혈육입니다)을 풍자하는 소설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산뜻한 번역으로 맞은 <변신>은, 그런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이 책을 읽고 제가 처음 받은 충격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일단 시점이, 젊은 외판사원 그레고르 잠자 중심이긴 합니다. 그러나 잠자의 오감을 통해 관측된 바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고 있어, 독자는 그레고르 외에 다른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도 세부적 추측이 가능합니다. 결정적으로, 소설 후반부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에도, 그 "남은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중계가 끊이지 않은 방송 사고처럼" 독자에게 이어져 기록되고 있습니다. 소설의 어조가 그레고르 편향이나 동정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그레고르에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할 필요가 없고, 그걸 오히려 막는 게 작가의 의도에 가깝더군요. 물론 그레고르는 비난할 구석이 한 점도 없는 착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몸이 벌레로 변한 그날 아침에도, 그레고르는 출근 기차 발차 시각에 늦을 걱정, 출근 후 관계자들에게 뭐라고 해명(변명이 아니라 해명입니다)할지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재변을 맞이했다면,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을 텐데 말이죠(내 몸이 괴물로 변했는데, 지금 회사나 가족이 문제인가요!). 그레고르는 일상과 생계 활동에 찌든 나머지, 개념 원형적으로 "돈 벌어 오는 기계"로 이미 오래 전부터 바뀌어 있었던 겁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 집에서 아무도 경제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그의 세 식구(양친, 누이)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며, 그 다음이 각박한 사회 풍조입니다만, 일단 이건 논외입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바뀐 후에도 의식은 여전히 사람의 그것이기에, 직립 자세를 시도하니 하반신이 찌르는 듯 아파 왔다. 다리를 접으려 하니(두뇌의 명령) 오히려 펴졌고(신체의 반응), 다리를 바라보니 저렇게 가느다란 것으로 어떻게 몸을 지탱할지 걱정이 밀려 왔다 등, 정말 벌레로 바뀌어 본 사람이 진술하는 것처럼 실감이 뚝뚝 흐릅니다. 요즘 문학에서야 이런 기교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작품이 쓰여진 게 근 한 세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겠죠.

그런데, 그레고르에게도 큰 잘못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게 뭐냐고요? 벌레로 바뀐 후, 그 벌레로서의 삶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는 인간으로서 존재규정이 이뤄졌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새로운 현실을 외면한 채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려 들었습니다. 그레고르의 운명이 급변한 최대의 실수가 뭘까요?(물론 그 실수를 하든 안 하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겠으나) 제 방에서 기어나와 여동생의 연주회(?)에 참석하려 든 겁니다. "나는 인간이다. 이런 음악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자가 벌레일 수 있겠는가?" 진짜 인간이었다면(이미 부질없는 희망입니다만)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파장을 생각해서 자제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모습을 하숙인(한때나마 실적이 좋았던 시절의 잔재로, 그레고르의 집은 중류층의 거소치곤 큰 편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르가 실직을 한 후, 식구들은 하숙을 치기로 결정했죠)들에게 드러내어 상황을 재앙으로 만들었으니.....



그레고르가 가장 사랑했던 혈육은 누이동생이었습니다.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최근 외판원으로서의 실적 감소, 기본적으로 지고 있는 빚) 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할 게 거의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정반대로, 따로 날을 잡아 동생을 음악 학교에 진학시키겠다는 확정적 결의를 발표할 작정이었습니다. 이 점을 동생도 알기에, 오빠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고, 적어도 벌레로 변한 초기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우리 독자는 이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轉機)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 자신이 취업을 하고나서부터입니다(당장 생계가 곤란하니 달리 방법이 없죠).

특히 이 누이동생은, 자기 일자리를 잡고나서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오빠의 방을 청소하되, 벌레가 서식하는 장소에 어울릴 만큼만 청소하고, 사람이었을 시절 쓰던 가구를 방에서 다 들어내자고 합니다(그래야 벌레답게 마구 돌아다닐 수 있으니). 엄마가 대청소를 하러 오빠 방에 들어가면, 막 울면서 말리기까지 하는데, 이게 오빠 모습을 보고 놀란 엄마가 충격으로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사회 생활을 해 보니, 어느 존재든 그 생존(이 생존을 두고, 후에 사르트르는 "실존"으로 의미의 격상을 이룬 겁니다)에 어울리는 의식이 따로 존재한다는 거죠. 사람은 사람으로서, 벌레는 벌레로서. 우리도 저 벌레("변신"은 불가역입니다)에게 가져야 할 태도가 어느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 딸은 어머니에게 가르쳐 주려 했던 것입니다.



하숙인들 앞에서 사고를 친 후, 누이동생은 어머니에게 절규합니다. "저건 이제 나의 오빠, 그리고 엄마 아들이 아니에요. 저건 그냥 벌레라구요! 인간이라면 배려하는 마음에서라도 이렇게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겠어요?" 그레고르는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었고, 그의 식구들은 그 점 때문에 그를 벌레로 단죄합니다. 묘한 모순이나, 이 행동의 책임은 그레고르가 다 지게 됩니다. "존재,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는 명제는 여기서 확인됩니다. 그레고르의 죄는? 엄연한 실존을 부인하고 자신이 인간이라는(이었다는) 허위의식을 앞세운 죄입니다.

누이동생은 계속 비탄에 젖어 오빠를 봉양하고, "내가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라며 현실을 한 치도 직시하지 않으려는 고집을 부리며 퇴행에 머물 수도 있었을 겁니다(아주 고집이 센 성격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현실을 긍인하고, 사환 비슷한 자리나마 직장을 잡아 사회에서 단 몇 푼이라도 돈을 버는 쪽을 택합니다(엄청 하숙인들이 지루해했다는 걸로 봐서 설사 진학을 했더라도 이미 나이가 늦었을 뿐 아니라 재능 부족 탓에 연주인으로서 큰 성공을 못했을 가능성이 크죠).

아버지의 모습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레고르는 그 운명의 저녁 밖으로 나와서 자신에게 사과를 던지려는(유명한 장면이죠) 아버지를 보고, "우리 아버지가 저처럼이나 꼿꼿한 자세로 늠름해진 적이 있었나?"는 놀라움에 빠집니다. 그의 부친은 생의 전성기에도 언제나 루저처럼 움츠려든 모습이었는데, 아들의 실직 후 좋은 자리 하나를 잡더니 눈빛이고 태도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새 되어 있었던 겁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활력을 무엇으로부턴가 얻은 후 참된 행복과 원기에 가득찬 거죠. 그레고르는 이에 그만 체념하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또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아버지가 대단히 영악한 인간이란 점입니다. 그는 어느 사업가에게 큰 돈을 빌리고 변제하지 못해, 채무 이행 대신으로 아들을 그 사업가의 직장에 취업시킨 건데, 급료를 받고 생활비를 쓴 나머지를 모두 빛 청산에 쓰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자기 가족들도 모름) 비상금 조로 저축을 해 놓았던 거죠. 그레고르는 따라서 이 식구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혜택을 준 셈이고, 보통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대목이죠.

결론적으로,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에는 가족들이 그레고르 한 사람에만 의존하는 기생충들, 벌레였고, 그레고르의 변신 후 가족들은 "내 앞가림은 내가 건사해야 한다"는 각성으로 비로소 인간이 된 겁니다(대신 그레고르는 벌레로 남음). 한 사람이 희생하고 세 사람이 거듭나게 된 결과랄까요. 보통 이 작품의 줄거리를 두고 그레고르가 골방에서 죽은 후 가족들이 크게 안도하는 걸로 이해되는데, 그 전 이미 일자리를 잡고부터 이 가족들은 "기생 생활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다만 그레고르의 존재 때문에 그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죠.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 이 가족들은 비로소 "왜 자신들이 구원받았는지" 알아차린 겁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건 마지막으로 고용되어 들어온 파출부입니다. 그녀는 체격이 좋고 배짱 가득하면서도 눈치가 매우 빠른 타입인데, 밑바닥에서 오래 부대끼며 무엇이 생존 비결인지 훤히 터득한 소치입니다. 카프카는 아마, 잠자 씨네  세 식구가 지금처럼 열심히 계속 살면, 언젠가는 이 파출부의 상태에 수렴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파출부는 벌레 그레고르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훤히 파악한 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처합니다. 그레고르의 죽음을 알린 후 고용인 잠자 씨 식구들에게 "제가 그 죽은 찌꺼기를 치웠어요. 잘했죠?"라고 물었을 때, 이 파출부는 실로 놀라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통찰과 기민성을 발휘한 겁니다. 그러나 하필, 잠자 씨네 세 식구는 그때 하필, 그 의식이 인간으로 잠시 돌아와 있었던 거였거든요. "우리의 해방이 그레고르의 변신 덕"이라는 깨달음만큼,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이 순간 그레고르-벌레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금기시해야 마땅했습니다. 파출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을 못 받은 건 이 때문이고요. 이 작품에서 실존의 모범생 파출부는 따라서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카프카는 여기서, 인간이란 벌레나 마찬가지로, 그 의식이나 정신에 아무 존엄도 없이, 날마다 열심히 생체 작용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뿐인 신세임을 말하는 겁니다. 몸은 비록 벌레이나 인간다운(?) 두려움, 망설임, 죄의식, 당황함 등으로 가득한 그레고르는 벌레 취급을 당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민이나 동정 따윈 싹 잊은 채 일상에 충실한 모든 이들은 부지런한 인간으로 존중받습니다. 박 교수님이 후반부 해제에서 억압자/피치자 이대별 구조로 분석하시는 부분은, 상기의 이유로 제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해 반대하는 편입니다. 

나머지 단편들은 아주 분량이 짧거나, 너무도 기발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어서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선고>에 대해서는 이 번역본의 명료한 문장 덕에, 한 순간에 어떤 느낌이 오는 바 있었으나(카프카는 법학 박사답게 아주 치밀하고 논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는 사실 다시 확인했습니다. 힌트는 곳곳에 숨겨 두고 있더군요. 공정하게도요), 서평이 너무 길어져서 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이 아이디어는 제가 박사 코스 밟을 때 논문에 쓰려고요). 현대적이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는 남동훈님의 컬러 일러스트, 그리고 박 교수님이 직접 그리신 "잠자씨네 저택 평면도"도 다른 번역본에서 볼 수 없는 멋진 소품들이었습니다. 제가 접한 중 "가장 예쁘고 명쾌한 카프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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