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선데이 - 테겔 감옥에서 쓴 자전적 소설 Echo Book 4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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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신학박사이자 목회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드러내어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인재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그의 면모는, 나치가 아직 서슬퍼런 칼날을 세계에 향해 휘두르던 때, 대담하게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체포되고, 끝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행적, "행동하는 양심"이란 유명한 어구의 eponym이 되다시피한 그 결단과 이미지입니다. 그의 거룩한 생애에 대해 알고 나면, 사실 "행동하는 양심"이란 찬사도 그를 설명하는 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성이나 영성 어느 면에서도 그는 완벽에 가까운 타의 모범이었고,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버젓이 양심을 속이고 일 분 일 초라도 구차한 생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와 같은 확신으로, 지상의 악마로 현현한 독재자를 처단하는 게 신의 지상 명령이라 여겼던 그입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십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며, 가급적이면 평화적 수단으로... "운운하며 온갖 구차한 핑계를 대어 가며 결행을 미뤘을 겁니다. 그는 그러나 범속한 위선자, 비겁자들과는 달리, "신이, 악에 부역하고 비루한 현실과 타협하라고 귀한 목숨을 준 게 아니다"라고 하듯, 양심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망설임이란 없었습니다. 그의 빼어난 지성, 순결한 양심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이런 결단에 주저함이 없었을 텐데, 둘 다를 갖춘 분이었으니 그 결과야 불문가지 아니겠습니까.

 

목차와 소설이 시작되기 전, 그가 남긴 유명한 시 <나는 누구인가>가 소개됩니다. 처음은 ".... 수인의 제복을 입고 감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의 城에서 나오는 영주와도 같다고 한다. 간수들과 나란히 선 나를 두고, 사람들은 마치 그들을 지휘하고 교화하는 것 같다고 한다..... "로 시작하는데, 약간 지나친 자부의 표현이 아닌지 해서 고개가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반전이 있더군요. 막상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내면에서는 쉼 없이 회의가 몰아닥치는데, 도대체 어떤 내가 참다운 나인지, 저 시의 제목은 그런 자문(自問)에서 붙여진 겁니다. 

 

이 소설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그닥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여태 구해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신학 이론을 엿보는 것과, 그가 지은 (본질적으로 이야깃거리인) 소설의 감상한다는 건 전혀 다른 시도, 경험이니까요. 그런데 저 앞에 인용된 시에서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듯, 그는 읽는 이의 감흥을 자극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문학적 재능도 빼어난 분이었습니다. 타인의 평가가 아닌, 바로 이 "소설"의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통해서, 독자 본인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역애서 평판 높은 가문인 블레이크 씨네 노부인이, 여느때처럼 지루하고 문제 많은 설교가 낀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합니다. 맞손자 프란츠(프란쯔)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할머니에게 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너무 뻔한 말만 늘어 놓는 설교 때문에 교회에 가기 싫어졌어요. 다 외울 정도라니까요." "얘야, 중요한 건 새롭고 아니고가 아니라, 올바르냐 그렇지 않냐란다." 하지만 이는 교육상 손자 앞에서 목사의 험담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배려의 발로이며, 실상 노부인도 심각한 문제점을 느낀 나머지 공식 이의를 제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블레이크 가문의 법도는 실로 빈틈없고 엄숙하지만, 그 까다로운 규율은 타인보다 자신들에게 먼저 적용하는, 옛 우리 조선에서도 양반 가문이 누대로 유지해 오던 그런 귀족적 기품이 넘치는 가풍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서양의 교양 있고 품격 높은 신사 계층의 예법을 형성함에 있어, 기독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문의 존경 받는 어른들의 초상을 그림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위엄을 강조하는 건 "졸부들이나 하는 짓"임을 깨우치는 장면에서, 영국의 청교도 윤리, 독일의 루터파 교리가 이들 사회의 건강성에  어느 정도나 큰 기여를 했는지, 새삼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부엌은 그냥 부엌일 뿐, 괜한 위세를 보이기 위해 "응접실(parlor)"라고 부르지 말라는 지도에서, 독일 민족 특유의 건강하고 질박한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기도 했구요.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적 색채는 생각보다 짙지 않습니다. 이 정도 컬러는 비기독교인 출신이면서, 본회퍼와 동시대에 활약한 어느 유럽작가에게서도 드러나는 정도입니다. 마치 저는,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 사람들>에서처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짜는 수직 수평의 에피소드와 인연을 통해, 진지한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토로, 소통, 해결하는 서사 구조가 대단히 재미있었습니다. 진지하고 선하며 위대한 인품을 갖추기만 한(혹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들의 대화가 죽 이어지는 구성 아닐까 했는데, 시냇가에서 (사유지인 줄 모르고) 놀이를 즐기다 숲지기와 큰 마찰을 빚을 뻔한 블레이크네 아이들이, 헤럴드 브레머 소령과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오랜 가문 차원의 정겨운 교류를 극적으로 이어가는 장면은, 드라마가 살아 있어 독자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여기서 "작가로서의" 본회퍼는 거의 예언자적 지력을 드러냅니다. 프란츠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보일 듯 그 표정이 울적한 걸 보고, 소령은 "그딴 촌뜨기, 자신의 비열하고 사악하며 천한 면모가 자신만의 자랑스러운 개성인 줄 아는 구제불능의 영혼이 어떻게 널 모욕할 수 있겠느냐? 쓸데없는 고민은 어여 정리하고 자신을 아껴라." 며 조언하자(이때 소령은 프란츠 소년과 완벽한 공감을 이룹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헤럴드 삼촌(그 부친과 형제와 같은 사이라며 소령이 이 호칭을 미리 허락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블레이크 씨네 자녀들이 아니었다면, 그 악한에게 꼼짝없이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이처럼 불의한 자들로 가득차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우울해 지는 걸요."

 

이를 듣고 소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평에서 제가 본문인용 잘 안 하는데 너무 멋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그놈도 아마 제가 속한 집단에서는 겸손하고 제 할 일 잘 하는 분자였을지 모른다. 작은 완장이 안겨 준 권력이, 그놈을 미치게 한 것이다. 이런 놈들은 약자를 골라 그 희생양의 에너지를 빨아먹으며, 세상을 그들만의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채우려 한다. 이들에게는 자비를 보여서는 안 되고, 그를 향해 주저 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려면 너는 강해져야 하고, 너의 건강한 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히틀러가 만약 이 소설을 지옥에서라도 읽을 기회가 있다면, 자신을 향한 듯한 이 준엄한 단죄에 그 자리에서 소변을 지렸을 만합니다.

 

본회퍼는 자신의 주전공인 신학과 직접적로는 무관한 이런 문예작품에서도, 밝고 도덕적인 세계관을 곳곳에 스며들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신의 고양을 체험하게 합니다. 시골 자연의 묘사도 대단히 생동감 넘치고 구체적이라서, 어떤 대목은 마치 한국의 이효석이나 김유정의 솜씨처럼 선명한 풍경화를 독자에게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런 문학적 표현의 예술가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의 모든 악덕은 바로 생명의 원초적 원리에 반하기도 한다는 점을, 섬세한 문장 속에 독자에게 깨우치고 있어 더욱 숙연한 감회를 불러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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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사랑
김홍신 지음 / 해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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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내어서 읽어 보면 참 예쁘게 조음되는 게 "시울"이란 이름이네요. 한국을 대표하는 (작중 캐릭터) 강시울의 본명은 따로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첫 연인이 속 깊은 사연을 담아 새로 지어준 이름이, 연예인으로 채 데뷔도 하지 않을 때라 예명도 아닌 채로 저것입니다. 시인이 지어 주는 이름이라 당연히 좋은 감각이 스몄다기보다, 그녀를 향한 홍시진의 사랑이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겠죠.

"단 한 번의 사랑". 운명적으로 만난 남녀. 이승은 물론 저세상에 가서도 구천의 혼백으로 떠돌망정 서로에 대한 지향과 끌림을 잊지 못하는, 우주와 의식계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연분으로만 존재 가능한 사랑. 누가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흔쾌히 "말이라고!"가 대답으로 나올 수 있는 영혼이라야,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고, 또 독자로서 눈물 흘려가며 감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큰 줄기만 따라가면 스릴러처럼도 보입니다. 우선 조진구라는 악당이 등장하는데, 3대를 이어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정치 거물로 군림해 왔으며, 현재도 연예계, 언론계, 검찰, 경찰, 청와대 비서실에 이르기까지 두루 손을 뻗고 있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나이도 젊고 이처럼 집안의 배경이 막강한데도 당장 의원 배지 하나를 걸머쥐고 양지에서 뚜렷이 행세하지 않는 건, 본인의 자질이 여러 모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조진구가, 홍시진의 운명적 연인 강시울에게 느닷 반해서(일단 처음에는 그렇게 설명합니다), 청혼한 후, 대중의 시선이 한곳에 쏠릴 만한 "세기의 결혼"을 이룹니다.

홍시진의 입장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죠. 한번 만나기라도 해서 진짜 사정이 무엇이었는지 본인에게 들어 보고 싶은데,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이에게 접근도 불가능하고(어디 예사 유력자의 배필이라야죠), 게다가 장차 장모가 될 뻔했던 시울의 어머니도 시진을 꺼리며 못 볼 꼴을 본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예전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시절부터 익히 봐 오던 테마, 부쩍 커버린 터라 자신의 새 눈높이에 맞는 짝, 인생을 물색하는 여자, 열패감과 불안, 질투에 치를 떠는 남자, 이런 전통적인 비극의 줄기가 대뜸 떠오르지만, 이 작품 중 시진은 출세한 연인에게 느닷 버림 받은 불쌍한 남자라는 점에서 그와는 또 상황이 다릅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시진은 이런 믿음을 놓지 않으나,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이런 태도는 대부분은 전혀 근거를 갖지 못한, 필사적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진이 대책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라, 그저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데 불과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죠. 시진은 그래서 먼 사찰에서 은거 수도하는 스님을 찾아갑니다. 물론 다 지난 일이라 시진은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고, 새 애인(시진이 인물도 잘생기고, 시인이 괜히 시인이 아니라서 말빨도 좋습니다 ㅎㅎ 게다가 시진은 대학교수직까지 어떻게 해서[이게 복선입니다. 독자들은 유념하시길] 얻은 터라..... ) 서다정이라는 또 괜찮은 여성 한 명을 만나 잘 사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스님을 찾아가느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져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강시울이 시진과 다정 두 사람을 찾아온 겁니다. 자신은 조진구와 이혼했으며(이미 기자회견까지 해서, 전국민이 다 알다시피합니다), 말기암 환자라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 시진과 함께 보내게 해 달라, 특히 시울은 다정에게 간청합니다. 서다정이나 독자나 어이가 없습니다. 악녀가 천벌을 받아 부당하게 누려온 호사를 고스란히 반납당하고, 최악의 신세로 떨어진 후 옛 애인을 찾아와서 의지를 호소한다..... 근데 여기서 독자는 두 갈래로 생각이 나뉩니다.

- 이건 고려할 가치가 없고, 당장 내쳐야 한다. (작중 서다정의 생각이나 강시울 본인의 말처럼) 죽으려면 혼자 곱게 죽지 이미 자리가 잡힌 남녀 사이에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이나마) 끼어들겠다는 게 대체 무슨 심뽀냐.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그래도 죽기 전에 착한 마음이 돌아온 게 어디인가.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봐 전 남친의 현재 애인 앞에서 저토록 진정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게다가 서다정 본인도 자인하듯) 기가 막힌 미인이 저처럼 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 까짓것 한번 못 봐 줄 이유도 없다는,....

서다정은 그러나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평균적 독자라고 해도 "예, 사정은 딱하신데, 그래도 이렇게 나오시는 건 대단히 무립니다." 에서 크게 안 벗어날 겁니다. 서다정 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참는데, 지금 자신의 입장으로나 연인이 과거에 당했던 처사의 부당함으로나, 격한 감정에 입을 열면 무슨 거친 말이 나올지 몰라서입니다. 그런 상대의 태도를 보고, 강시울은 "다정씨는 정말 좋은 분이군요." 라고 한 마디를 더 합니다.

불가의 수도 중에는 "연비(燃臂)"라는 게 있습니다. 신체 중 일부를 기름에 잔뜩 절인 후, 불에 태워(...) 떠 내는(주로 팔뚝 일부 - 저 臂라는 글자가 팔뚝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 공양함을 일컫는데, 이게 극한(全身을 다 태움)으로 가면 "소신 공양"이 되는 거죠. 시진과 시울 모두 잘 알고 지내 온 무상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중 넷을 "연비"하고, 지극한 경지에 이미 들어선 고승입니다. 이 스님과 시진이 주고받는 대화가 소설 중에서 놓칠 수 없는 백미입니다. 대략 전체 분량 중 1/6 정도더군요. 노장 김홍신 선생이 자주 쓰는 기교이자, 쉬운 말로 어려운 진리를 잘 풀어 주는 그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김홍신 선생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선한 인물들입니다. 시진 같은 사람과 그렇게 잘 지낸 여인이, 돈과 권세에 팔려 한순간에 사랑을 버릴 가능성이 과연 클까요? 시울이 문제가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되면 시진부터가 뭔가 주인공답지 못한, 최소한 김홍신의 주인공답지 못한 데가 있는 거죠.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과연 무슨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사정이.... 시울의 결혼에는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무서운 음모가 자리했고, 다만 옛 애인을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대뜸 "그게 아니었어요..."를 말하지 못한 건(더군다나 서다정에게 그런 오해를 받고 어디 참을 일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연인을 향한 진한 애정이 동기로 작용했던 겁니다(이 이상은 스포일러라 적을 수가 없네요).

이후 후반에 들어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급격한 퇴장이 이어지며, 소설은 스릴러 분위기로 치닫습니다. 진상을 알고 난 독자는 전율, 분개, 좌절합니다. 정의는 실현될 기미가 안 보이고, 악인은 최종적으로 승리할 전망이며, 시울은 다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의지와 집념으로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의 불꽃을 이어갑니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먼 구천에서나 최종의 결실을 보는 걸까요.

독자는 아무래도 어느 작품이건 그 후반이 기억에 강렬히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읽고 난 직후에는 "이렇게 해서 스릴러가 마무리되는군."의 느낌이 지배적이었는데(잠시 저는, 강시울이 병마에서 완전 회복되는 결말도 예상했습니다. 물론 그랬으면 작품의 격이 떨어지죠), 서다정을 통해 구현되는 작가의 마지막 한 수가 그런 생각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들을 영원히 같이 있게 해 주세요...."

결국 소설의 주제는, 영계(靈界)건 물리계건 바탕을 이루고 붕괴를 막는 유일한 동력은, 설사 그게 단 한 쌍의 단 한 번 뿐인 사연이라 해도, 답은 사랑이라는 결론입니다. 음모와 부조리, 거짓과 악을 분쇄하는 것도 사랑이요, 결국 그 잔해와 쓰레기를 포용하는(쓰레기나 장미나 결국 한가지라는 작중 지견 스님의 말처럼) 것도 사랑이라는 겁니다. 책을 덮으며 김홍신이란 거장의 감성과 주제는 세월이 지나도 참 한결같다는 감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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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딸 - 가깝고도 먼 사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심리학
이우경 지음 / 휴(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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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그러더군요. "아버지도 아니고 '딸'은 더더욱 아니면서 왜 봐?" 그런데, 언젠가는 누군가의 귀한 따님을 반려로 맞을 테고, 혹시 어떤 딸의 아버지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역시 제게 해당 사항이 있는 책입니다. 다 읽고 보니 정말 좋은 책이었고, 설사 남성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산다 해도(따라서 누군가에게서 딸을 볼 일도 없다 해도), 사회 생활을 하며 여러 여성들과 부대끼고 소통하는 한, 이런 책은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책들을 보면 권위자, 사회 저명 인사들의 추천사가 책 표지 혹은 권두에 길게 적혀 있기도 합니다. 이 중 어떤 경우는 신뢰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건 그냥 안면 봐서, 혹은 인맥의 힘으로 확보한 공치사나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한국 정신과 전문의들 중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인지도를 지니신다 할 이시형 박사님의 추천사가 나와 있는데요. 분량이 길기도 하거니와 정말 글쓴 분의 진정성이 문장마다 그대로 묻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읽고 나서 머리가 꽉 차는 느낌이 들고, 내가 개인적으로 겪어 온 여성들의 이러이러한 행동 패턴이나 기질이 이런 이유에서 연유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파노라마처럼 지면 위에 떠오르는 신기한 체험도 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딸이라는 인격체에게 그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치는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그럼 딸의 모든 영혼, 성격적 특질은 그저 아버지라는 거대 변수 하나가 좌우한다는 뜻인가?" 같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의 위력은, 그것대로 그냥 인정하는 게 정직한 독자의 자세라고 결국 정리하게 되었구요.

"아버지의 딸"이란 어구는, 심리학 전문용어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영혼, 성격, 기질적 특징, 혹은 정신적 결함 요소를 뚜렷하게 받은 여성"이란 의미 정도입니다. 딸 아니라 아들 역시, 부모의 성격적 영향에서 운명적으로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의 경험, 혹은 주위 지인들의 예를 봐도, 아들의 경우 그 부모님의 유전적 인자, 혹은 부모님이 베푼 양육 환경과는 거의 무관하게, 자신이 독립적으로 겪은 경험 요소(학교, 군대, 직장, 혹은 우연히 어울리게 된 친구들 등)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고, 자신만의 길을 신나게(혹은 비참하게) 걷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 혹은 어머니의 아들(후자의 경우 마마보이라고 하죠)"이라고만 규정할 수 없는 성인들이 더 많습니다. 어려서 환경이 불우했다고 해도 멀쩡하게 사업 크게 벌이며 잘사는 녀석도 있고, 반대로 그렇게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어도 성격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본전도 못 챙기는 인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딸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의 설명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의 많은 딸들은  성장 환경의 압도적 영향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분이 참 많이 보입니다. 이런 분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 아닌, "누구의 아내" 나아가 "누구의 엄마"로 성장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그늘, 족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거죠. 물론 악영향과 성격 장애가 지나칠 경우, 잘 맞는 반려를 만나기도 어렵고, 결혼 생활을 원만히 영위하는 첫걸음을 떼기가 일단 힘듭니다. 딸의  인생 각 단계에서 아버지가 끼치는 영향은 그만큼이나 큰데, 이 이유로는 저자가 정리, 제시하는 유력한 가설이 있습니다.

융의 비전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생물학적 성(性)에 관계 없이, 아미누스, 아니마, 즉 남성성, 여성성이, 그 정신의 구조를 내부 공존 양상으로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반대로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아직도 남성 위주의 질서가 지배하는 상황이고, "딸"에게 있어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남성은 바로 아버지이며, 처음 만나는 남성상에 따라 딸의 정신에 지리한 남성성이 형성되기 시작되며, 이 남성성의 성숙도에 따라 그 딸의 향후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원활히 형성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가설은 이 책 전체의 전제로 기능하기 때문에, 책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언제나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이 책 중에선, 앞부분에선 이를 암묵적으로만 전제하며 내용이 전개되다, 명료한 명제 형식으로는 중반 쯤에 처음 소개됩니다). 책의각 챕터가 자체 완결적으로 잘 짜여져 있고, 가명으로 보호된 실제 인물들이 사례가 흥미롭기 때문에, 독자가 특별히 학구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전혀 없이 잘 읽힙니다만, 내용 전체를 유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전제를 유념해야겠고요.

아버지가 딸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 부정 양면으로 작용합니다. 긍정적 측면, 즉 아버지가 최고의 롤모델로 기능하여, 향후 그 딸이 아무 하자 없는 멋지고 유능한 사회인으로 활약하게 되는 케이스는, 이 책에서 별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정이야 딸의 양육에 있어 부모들이 품는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이니, 주로 "병리적 문제"를 다루는 이 책에서 비중이 높을 이유는 없겠죠(다만 말 그대로 한국형 알파 걸, 즉 명문대 졸업, 고등고시 패스, 공기업 중역 등 실로 화려한 커리어 우먼의 행보를 보여 온 어느 여성이, 우등생 강박, 해피 페이스 신드롬 때문에,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전화한 사례는 하나 나옵니다). 지난 세대 여성들의 경우, 지나치게 엄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아들에 비해 딸을 차별하거나, 같은 딸을 놓고도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홀대하거나 하던 아버지가, 이후 딸의 인생 내내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일차 원흉으로 종종 작용하곤 합니다.

책임감이 없이 몽상에만 잠기는 스타일로,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는 (발달장애형) 아버지를 둔 딸은, 구타의 습벽이 있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딸 못지 않게, 이후 남성 일반을 적대하는 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스스로 장벽을 치는 부정적 행보를 걸어가게 됩니다. 구세대에는 이런 유형이, 특히 한국에서라면 제법 높은 빈도로 등장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딸도, 성장 기간 동안 부재(不在)한 아버지에 대해, 과도한 기대와 환상을 투사하여, 이후 "이런 아버지에 못 미치는 남자와는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퇴행에서 벗어날 줄 모르면서, 정상적으로 이성과 소통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전자의 경우 어머니에 대해 과도한 충성, 집착을 보이다가, 기대 하나가 틀어지면 배신감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는, 극과 극의 행보를 걷기 쉽고, 후자의 경우 어머니와는 피상적인 소통, 이기적인 일방 이익 추구 쪽으로 흐르는 게 보통이죠.

반면, 요즘처럼 "프렌디형 아빠", 혹은 "딸바보형 아빠"가 미디어를 통해 보편적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요즘도, 사랑만 듬뿍 받고 자라는 "신세대 딸"들에게 적잖은 문제를 남길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른바 "파파걸"의 문제, 즉 언제까지나 아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질 거부하는, 영원한 딸로만 머무려는 여성도, 결국 사회로 원활히 편입되는 데에는 큰 한계를 겪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특히 폭군형, 독재자형 못지 않게,  이런 한없이 좋은 아빠 역시, 딸이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는 데에 장애 요소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합니다.

딸에게 익애를 퍼붓는 아빠 중에는 은근 딸에게 과도한 의존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저자는 주목합니다. 저자는 틱낫한 스님의 책을 인용하며, "딸을 보살피며 동시에 딸에게 보살핌을 받는 아빠"는, "자신을 스스로 잘 돌보면서, 딸도 스스로를 잘 챙기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키우는 아빠"보다 훨씬 못하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대목에서 인용하는 이야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는데, 저자 역시 "이런 말을 하는 딸은 대단히 잔인하게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현명한 딸"이라고 정리합니다. 사랑을 주는 건 물론 중요하나, 딸은 언젠가 자신의 곁을 떠나 다른 짝에게 맺어져야 할 "여성"으로 길러져야 함을, 아버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렇게 감상적이고 의존적인 아빠 밑에서, 어떻게 저런 단호하고 지혜로운 딸이 길러졌는지 의문이 들었는데(어찌 보면 책의 취지와는 반대니까요),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책이 쓰여진 의도도, "지나간 아픈 과거를 되씹기보다, 내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분연히, 독기를 품고 일어서는 편이 낫다"라는 교훈을, 모든 불행한 "아버지의 딸"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데 있으니 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코델리아, 그리고 근원을 같이하는 동양의 설화 역시, 아빠가 과도한 기대를 품고 여성상을 투사하는 딸은, 그 아버지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딸도 문제지만, 반대로 아버지에게 과도한 죄의식을 품고 "내가 아빠를 떠나면 누가 보살펴 드릴까?" 같은 강박에서 평생 못 헤어나는 딸도 문제입니다. 문제 있는 딸을 길러내는 건, 그 아버지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은 결국, "무엇을 받고 태어났는가 보다, (변변치 못한 것이라도) 그 받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인용구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아버지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산 딸들이 사례로 많이 나오고, 반대로 활달하고 진취적인 아버지 덕분에 세상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은(물론 정치적으로 극심한 반발도 산) 마거릿 대처의 예도 들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을 읽은 여성 독자들이, 나의 경우는 어느 사례에 해당할지 파악하여,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 큰 지표로 삼는 독후 활동입니다. 책은 심리학 용어를 일일이 원어(영어)로 병기하고 있어서, 개념을 정확히 (타 출처로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 독자가 참조하기 좋게 편집하고 있습니다(저는 이 점이 무엇보다 편하게 다가오더군요). 저자 역시,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모의 등장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키 크고 서구적인 용모를 한, 이른나이에 가족의 곁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남겼는지, 심지어 전공인 심리학을 택하게 된 것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서였다는 고백도 적어 놓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솔직한 공감이야말로, 저ㅏ신이 이 책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게 스스로 돕는 태도겠습니다.

혹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다룬, 후속작도 저술할 계획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어머니에게 방치되었다고 매사에 푸념하면서도, 자신이 자녀를 낳으면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일종의 복수?), 발달장애형 퇴행 심리에 빠진 노처녀의 사례라든가, 우리 주변에는 어머니와의 소통이 원만치 못해 힘들어하는 딸들도 많습니다. 위에 인용한 마거릿 대처 역시, 결국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는 실패한 딸입니다(이건 이 책에 잘 나오죠). p119: 5에 perentification → parentification 오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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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텔분양 투자로 평생 월세를 받는다 - 25살, 내가 명동호텔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
백승우 지음 / 오투오(O2O)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나이 스물 다섯에 명동 한복판 입지의 호텔 지분권자가 되어, 월 수백대의 수익을 챙긴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청년입니다. 금액이 설사 수십만에 그친다 해도, 자신이 투자에 들인 노력을 보상하고 남는 수준이라면 그게 어디겠습니까. 이 수익은 본업도 아니고 부수입인데 말입니다. 더군다나 또래들이 9~10시간 뼈빠지게 일해서 버는 돈이 월 100이 채 안 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요.

저자의 "스펙"을 보면 맨 아랫줄에 "삼성전기 입사 예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학교는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군복무는 이 책에도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만, 학군 장교 복무로 해결한 분이네요. 저자의 장점이랄까, 자계서 집필자로서 확실한 메리트를 들자면, 무엇으로부터든, 무슨 경험으로부터든, 무엇이라도 배우고 나온다는 그 성실성이라고,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로서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는 장교로서 사실 고달프거나 따분했을 수도 있을 복무 시간을, 그 업무로부터 배워 나올 수 있는 모든 걸 챙기면서 귀한 경험으로 채운 분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학군단 상급자들에 의한 언급이 곳곳에 나오는데, 훌륭한 분과의 만남은 결코 그 인연을 소홀히하지 않고, 이후의 인맥으로 다져 두는 꼼꼼한 습관이 몸에 밴 분입니다. 성공하려면 정말 이런 점이 체질로 스며들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다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아 이런 분이 호텔 투자로 성공했으니 나도, 우리들도 다 같이 따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습니다. 그런 기회가 누구한테나 올지도 극히 의문이거니와, 어쩌면 요 사이클을 지나고 난 후 명동호텔 경기는 식을지도 모릅니다. 꼭 메르스 한파와 요즘 중국에 일고 있는 이상열기의 혐한 바람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떤 섹터가 일시 성황을 이루었다 해도, 그 활황이 금세 잦아드는 건 특히 한국처럼 성장 동력 자체가 꺼져 있는 나라에선 흔한 움직임이기 때문이죠.

이 책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이런 투자처가 좋다"는 정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근거 없는 소문과 이미 피크를 지난 정보에 속지 말고, 냉정히 그 실속을 따져서 판단하고, 판단이 섰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는 그 교훈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주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엔 말은 쉬워도 책에 적어 놓은 그 하나하나를 실제로 해 보기가, 엄청 어렵지 않았을까 짐작되었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부동산 투기, 펀드 탐색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 에서 보고 배운 가락이 있다면, 커서 자신도 몸에 밴 대로 따라하는 게 그리 무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 저자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 자제입니다(제가 책 곳곳에서 느끼기로는, 좁은 의미의 "중산층"이라기보다 그저 중류층 출신이 아닐까 정도). 그런 분이, 어디서 "호텔 투자"가 유망하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한들, 거기다가 (애써 구한) 목돈을 심어 둘 생각이 쉽게 들겠습니까? 내 주위에서 못 들어본 정보, 지식은, 따져 볼 것도 없이 틀렸다는 게 보통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나중에서야 "아 그 사람 대박 쳤다더라" 같은 소문이 나면, 그제서야 이제 진리라는 듯 너도나도 묻지마로 줄을 섭니다. 투자의 핵심은, 정확한 정보로 냉철한 계산 하에 이익이라는 판단이 섰으면, 누가 주변에서 뭐라 하든 과감한 결행에 주저가 없는 태도입니다. 이 책 저자분은, 책에서 느껴지는 말투로 봐선 대단히 신중한 타입 같은데, 주위에서 아무도 안 할 것 같은 호텔 투자로 이처럼 재미를 보고 있다니 참 대단합니다.

스펙을 보면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입니다. 적당히 좋은 학벌이고, 이렇게 성실한 분이 10대 시절이라고 놀았을 리 없으니 갖출 만한 스펙이죠. 그 밑에 보면(이 서평 저 위에 적었듯) 삼성전기 입사 예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분 아버지 뻘 되는 세대 상당수와는 정반대되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삼성전기 퇴사 예정. 퇴직금으로 투자처 여러 군데 물색 중. 마땅한 곳 없어 치킨집 개업 예정" 그런데 이분 말이, "진짜 스펙은 (요즘 세상이라면) 통장 스펙이다"라고 합니다. 대학을 어디 나왔든, 집안이 어디든 간에,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 잔고가 없으면 그게 바로 하층민이라는 냉혹한 평가입니다. 이 말은 어설픈 우월의식이 아니라, 실속을 챙기며 사는 빠릿빠릿한 인생이 아니면, 남은 인생 전체가 좌절과 불만으로 물들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분이 투자처를 찾아볼 때, 처음에는 상가, 오피스텔 쪽으로 생각했답니다. 누구나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보통이고, 늦게 잡아도 6, 7년은 된 트렌드입니다. 그런데 이분 생각이, 투자 대상에 일단 공실률이 높으면 안 된다는 거였는데 뭐 당연하죠. 생돈을 박아 넣고 손가락만 빠는 그것처럼 조바심, 자괴감 느껴지는 시간이 있을까요. 주상복합 투자는 이래서 일단 대세를 이미 지난 겁니다. 그러니 투자자를 못 구해 다들 안달이죠. 오피스텔은 일단 세입자가 고소득자라는 안정감이 있으나,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5년이면 시설상 외관상 매력이 떨어진다는 게 문제라고 (그 스스로) 판단했다고 합니다(이렇게 되면 사실상 "레몬"이 되어, 괜찮은 고객이 외면합니다). 제가 책 읽으면서 감탄한 게, 이분은 이처럼 "카더라"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만의 정확한 기준을 세워서 그에 의거한 후회없는 결단을 내린다는 것. 이게 참 쉽지 않거든요.

이분은 역시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한 분이라서인지, 용어를 정확히 구분해서 쓰는 게 돋보였습니다. 자신은 명도 하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오피스텔 투자를) 포기했다는데, 이분 말이 "명도는 법률상 용어는 아니며, 정식으로는 인도라고 할 뿐이다."라네요. 정확합니다. 명도는 우리 착각과는 달리, 실무나 시장에서 쓰는 말에 불과하죠. 그런데, 판례를 통해 확립된 것도 있어서, 판결문에도 "가옥은 명도, 토지는 인도"라고 이미 사용례가 정해져 있습니다. 현직 판사님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이므로 믿어도 됩니다. 여튼 이렇게, (순전히 투자 관점에선) 사소한 사항도, 법대 출신 아닌 경제학과 출신이 이렇게 정확히 (일단은) 가리고 드는 태도가 참 돋보였습니다. 이런 사소한 데서 이렇게 야무지게 하는 분이, 자기 큰 돈이 걸린 투자에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처리하겠습니까.

이분이 목돈 손에 쥐고 뭘 할까 고민할 때, "선배" 한 사람이 찾아와 다단계를 권하더랍니다. 다단계라고 하면 아주 바보 아닌 이상 누가 그런 걸 하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제 주위에도 (이 저자분보다 더 상위권대 출신에)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 출신이 하는 분 있었습니다. 아직 높은 순번이라면서, 이런이런 메리트가 있으니 하자는 말에, 일단 수긍이 가더랍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 보니, 이미 그 업체는 탑 랭크가 다 찼다면서(책에 이런 말은 없지만 제 해석으로) 당장 그만두라고 단칼에 자르더라네요. 여기서 이 저자가 하는 말이 걸작인데, "여튼 투자는 인맥으로 한다. 그 선배도 뭔가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 권했을 것이다."에요. 저 같으면 누가 다단계를 권한다. 이러면 선배고 뭐고 없습니다. 나한테 사기치려는 인간한테, 싸움이 아니라, 행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살벌한 응징을 했을 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아 이분 참 착한 분인가 보다 하고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저자가 하는 말은, 투자는 여튼 인맥에 의존 안 할 수 없다"인데, 저는 읽으면서 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선 저자 본인은 객관적 정보를 참 중시하는 편이고, 이 이야기도 결국은 "좋은 인맥"이 나쁜 인맥으로부터 자신을 세이브했다는 결론으로 받아들여도 되거든요.

왜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 시장이 커지는가에 대해 저자는 자기 나름대로 쉽고 시원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보긴 이 대목 한정으로 선대인 소장 책보다 나은 구석도 있더군요. 하지만 여러 리스크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이곳이 퓨처라고 장담하긴 힘들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근래 화제가 되었던 <부의 추월 차선>에서 여러 대목을 인용하며, 결국 남들 잘 눈 안 돌리는 블루 오션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여유 있는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실속과 알짜 교훈으로 가득찬 멋진 책이었고, 호텔 투자에 관심 없는 분들도 읽어 볼 만한 재테크 책입니다. 이런 책까지 써서, 소의 잡뼈 하나까지 알뜰하게 이용한다는 자세로, 자신이 일단 투자처 물색에 들인 비용은 그 본전까지 뽑는다는 듯, 살뜰하게 출판 수익까지 올리니, 얼마나 이분이 야무진 분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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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언제나 남쪽이었다
이종화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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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럽게 날마다 철마다 방향을 바꾸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그를 맞는 사람의 마음이 변덕스러운 것일 뿐, 바람은 일관되이 남으로 불고 있었다..... 시인의 깊은 시심을 정확히 알 요량은 없으나, 이 시집을 다 읽고 난 독자의 소회는 그런 쪽으로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시집은 총 4부로 짜여져 있는데, 시상이 아닌 시적 화자의 어조에서 제가 주관적으로 받은 인상만으로, 좀 억지스럽게 끼워 맞추자면 춘-하-추-동 의 구성처럼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각 부의 초반에는, 반드시 "겨울"을 언급하는 시 한 편이 꼭 낍니다. 이울어가는 인생의 열기 그 자취를 석양의 낙조를 받아 조용히 바라보며, 지난 봄, 지난 여름, 그리고 멀지 않은 기억의 막 지난 가을을 돌이키며, 생의 고비에서 불었던 바람은 과연 어떤 지향을 품고 있었는지, 시인은 차분히 반추하고 환기합니다.

제목의 연원이 된 시는 책 맨처음에 실린 <남풍>입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나는 곳)도, (무상히 바뀌는 얼굴,) 얼굴이 (결국은) 향하던 곳도 남쪽이었다." 북반구에 사는 우리들은 언제나, 북풍의 사나운 손매가 우리 살결을 엘 재간이 없는 훈훈한 낙원을 "남쪽"과 동일시합니다. 임금의 지위를 "남면하는 자리"라고 대유하는 관습에서도 그러나 알 수 있듯, 일상의 팍팍함에 치어 살아가는 우리네들은, 한가로이, 사치스럽게, 남쪽만 해바라기하는 자세를 그나마 금기시하며, 남방을 희구하는 마음가짐에서 은연 죄의식마저 느낍니다(혹은 그렇게 사회화됩니다). 알고 보면 인생의 정직한 눈뜸이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는 순간, 물리학의 이치가 그러하듯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이 우주의 중심이요, 적어도 나 아닌 누구에게는 내 지금 선 자리가 곧 남쪽입니다. 어디가 남쪽인지를 애써 찾으려 할 게 아니라, 그저 바람이 절로 가르쳐 주는 방향이 곧 진실의 근원임을, 얼마나 더 헛된 세월을 보내야 우리는 깨닫게 되는 걸까요.

호떡은 본디 우리 겨레가 즐기던 간식이 아니라, 삭풍이 계절에 따라 매섭게 몰아치는 북중국에서, 고칼로리를 제공받으며 간단한 레시피와 구하기 쉬운 재료로 즐길수 있게 태어난 먹거리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한국 골목 노점의 명물 중 하나가 되었고, 이국적 음식이라며 맛나게 먹어 보는 벽안의 이방인들도 특정 거리에 가면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조용하고 정적인 풍경에서, 민첩히 움직이며 시각적 정적(靜寂)을 깨는, "귀화한 지 오래된" 고양이 한 마리를 주목합니다(<북촌>). 호떡이나 보이차나 고양이나, 너무도 익숙해서 우리 것인 줄로만 착각해도, 사실 좁은 반도에 오래 전 흘러들어온 "귀화자 출신"들이죠. "저문 역사의 홍등가에 일렁이는 무통의 경련"은, 나와 나 아닌 것의 가름을 애써 고집하는 일체의 몸부림도, 공연한 허공에의 손짓이 주는 무해의 피로와 인식의 혼란만을 야기할 뿐이라는 시적 화자의 고백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자도 없고, 나를 본 자도 없다." 제법무아의 경지를 법열 속에 노래하는 듯한  이 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칼 가는 이"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칼 가는 자의 노래>). 그는 그저 칼을 가는 게 아니라, 삶을 가는[摩] 사람이며, 삶을 가는 방식은 "꿈에서 별빛을 잘라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꿈도 탁한 바탕이 고갱이를 휩싸고 있을 수 있고, 꿈이 꿈 그대로의 원재료로는 쓸모가 없을 터입니다. 광석에서 펄펄 끓는 물로 핵심만 추려 제련을 하듯, 원석에서 용케 별빛만 솎아 아름답게 벼리고 강철같이 다듬는 작업이야말로, 어지러운 세상을 보다 많은 이들이 살만한 곳으로 가꾸는보람된 장인의 이바지이겠습니다.

아기새가 첫 비행을 하는 날은 그저 설렘으로만 가득한 소풍이 아닙니다. 아직 서투르고 못미더운 날갯짓 말고는 세상에 보여 줄 게 없는 그는, "뼛속까지 비워야만(<아기 새>)" 처 푸른 하늘을 날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띄우는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위험한 여정을 감행하는 걸까요?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내 삶을 인증받기 위해서" 누구로부터요? 어디서나 피할 방법 없이 나를 가로막고 갈구며 과업을 독촉하는 상사(<상사 죽이기>)? 반 백제 반 신라 사투리를 요란히 섞어가며 제 나름의 진실을 설파하는 술자리의 노가다 십장(<노가다 십장 1, 2, 3>)? 아니면 오늘 저녁도 들녘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주워 담는 아가씨들(<사마르칸드 가는 길>)?. 그 모든 것이, 태몽처럼 길하고 설레게 다가왔다가, 겨울이면 딸내미 용돈 달라는 소리처럼 범상하게 울리며 언젠가는 멀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유치한 겸손, 미화된 침묵을 멀리하고, 오늘만큼 부질없을 내일에도 남쪽을 바라며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아득한 의식의 근원만이,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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