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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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 장편은, 서사적 흥미를 충분히 갖추었으면서도, 원숙한 그의 사상과 완성도 높은 문학적 기교(특히 상징)를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포섭한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예컨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어내려갈 때처럼의 가독성을 독자로서 기대해서는 당연히 안 되며, 카뮈 같은 거장의 작품은 독자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선사하려는 게 의도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에 대해 같이 진지한 고민을 해 보자는 제의에서 창작된 겁니다. 그런 작품이 이 정도씩의 "서사적 배려"를 베풀고 있습니다(텍스트에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으니 맨땅에 헤딩 식의 "공부"는 면할 수 있지요). 작가가(그것도 카뮈 같은 거장이) 최소한 형이상학 담론 그 날것의 육질을 감당해야 하는 노고를 극히 일부라도 덜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르트르는 문예적 방법으로 잘난 척 하고 싶을 때나 특별한 변덕이 문득 "실존적으로" 그의 영혼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곤, 독자들을 향해 이런 수고를 들인 적도 일생을 통해 별로 없습니다.

저자(작가)가 카뮈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장편 소설은 무지하게 재미있습니다. 뜻밖에 닥친 재난의 현장 한가운데서, (특히 실존의 무대가 아닌 가공의 배경이라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필사적으로 제 한 목숨 건져 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만큼 흥미로운 게 없습니다. "싸움 구경 불구경" 같은 말도 그런 속된 심리를 반영하는 거고, 잘 만들어진 재난영화가 언제나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흔히, 위기에 처해 봐야 인간 본성이 나오고 그 그릇이 가늠된다고들 하죠. 숱한 인간 군상들이 절망적 상황에 맞닥뜨린 후, 온갖 직업, 연령, 인종, 계급 등의 배경을 지닌 그들이, 그 조건과 지위로부터 사회가 기대하는 품격, 직무 수행의 수월성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며, 일상의 한계를 훌쩍 넘나드는 극한의 교란 상태에 빠져 들거나, 혹은 초인적인 침착성으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 독자들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차피 인간 자체가 부조리의 한복판에 던져진 것이요, 그의 가치는 자신의 시련에 각각 대처하는 방식으로부터 판별, 증명될 수 있을 뿐이다."

배경이 된 "오랑"은 알제리에 위치한 상업 도시이며, 별다른 개성이 없어 작중 화자가 "대체 무엇으로 이 도시를 규정해야 할지 난감할 뿐인" 그런 고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식민체제의 한복판에서 백인 수혜자로서의 지위를 "그저 일상처럼" 누리고 있을 뿐인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고, 객관적으로 오랑은 (책의 역주에도 나오듯) 무역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리던 상업 지구였고, 숨 막힐 듯 부가가치 쟁탈의 각축 속에 어디로부턴가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던 본토 프랑스인들이 (현지인의 희생 위에) 마음껏 경제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던 신천지로 자리매김한 지 근 백 년(이 소설의 설정 기준으로)이 되던 활기 넘치는 타운(이라기보단 거진 대도시)이었습니다. 캐릭터 타루가 자신의 기록에서 고백하듯, "모든 질서가 그저 상업적 편의라는 일원적 기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신기함"과 합리성을 지닌, 아마도 파농 같은 트리컨티넨털리스트가 보기엔 지옥과도 같은 모순과 탐욕의 결집체일, 이 오랑은 프랑코포니가 총애하는 지중해 건너편의 성실한 공장이자 납세원천이었습니다.

세상이 부조리하니 페스트 역시 그 부조리의 공식을 따르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전과도 없는 이곳 오랑을, 진정 뜬금없이 날벼락처럼 덮칩니다. 재앙이 왜 성질 고약한 녀석인가 하면, 차라리 사람(들)을 노상 강도처럼 습격하여 "왜 죽는지,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생명을 앗으면 나을 텐데, 전조(前兆)를 잔뜩 띄워 사람 속을 썩게 한 후, 희망고문을 한 후에 고통을 안긴다는 점에서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라면, 페스트란 재앙(이자 부조리의 사자[使者] 역시, 사람들을 최대 효율로 괴롭힐 수 있는 공식은 언제나 준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작위"라는 부조리의 주요 본질에선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죠. 다만 인간 입장에서, "그런 악질적인 공식(더 나아가 "질서")"은 "부존재"보다 감당 못할 끔찍한 지옥의 법도이기에, 인식의 역치를 넘어 가까스로 부존재의 이웃 범주에 넣고  마는 것입니다. "패닉"이란 인간의 리액션은 이런 심리적 기제의 산물입니다.

"공식"이라는 화제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 카뮈는 소위 "재난 드라마"의 (이후 영화 등의 장르에서 정착한) 극적 기법을 거의 처음으로 창안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을 만합니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준범 노릇을 하지만, 특히 의사 리유가 갑자기 조젭 그랑(시청 말단 서기)의 호출을 받고 왕진길에 나서는 장면을 보십시오. 여기서 당사자인 리유 뿐 아니라, 우리 독자들 모두 "드디어 페스트의 첫 희생양이 나오려나 보다." 같은 불안이 내심으로부터 고조됩니다. 하지만 현장에 당도하니, 그가 진료해야 할 대상은 심약한 자살 미수자인 코타르였습니다. 여기서 독자는 일시 고조되었던 서스펜스가 가라앉고, 특별한 재난과 무관하게 인생 본연의 루트에서 언제나 매복하고 있는, 좌절, 분노, 우울, 체념 등과 같은 상수(常數)적 장애요소를, 이 긴박한 시국에서도 피해갈 수는 없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불안은 일시 잦아들었으나, 대신 우리 영혼이 언제나 등에 지고 있던 "불편"이 그를 대신하여 수면 위로 솟습니다.

바로 이때, 소설의 서두부터 (피흘리는 쥐 사체를 가지고 놀며)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수위 미셸이, 그 과정도 섬뜩하게("장기가 조여드는 것 같고, 목에서 가래톳이 터질 듯 부풀며, 사타구니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 첫 희생자로 숨을 거둡니다. 이 장면 전환이 제법 급박하다는 점에서, 잠시 안도한 독자(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노련하고 효과적인 극적 충격을 카뮈는 유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새삼 미소(?)가 나온 건, 이분 참 심각한 사상가일 뿐 아니라 능숙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르트르를 두고 같은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힘들죠. 그것도 많이.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자나 사상가(이기만 한 위인)들은, 알고 보면 기질이나 스타일은 단순하고 무구한 이들이 많지만, 이야기꾼들은 그  자체로 의뭉스럽고 능청맞은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이런 "기교적 서사, 플로팅"을 보고, 다시 앞표지에 나온 인상 찌그러뜨리고 측방 주시 중인 카뮈 사진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눈이 사시라서 의도와 무관하게 옆을 볼 수밖에 없었던 사르트르를 무슨 조롱이라도 하는 듯한(저의 왜곡일 뿐이지만) 제스처로도 해석되어서 말입니다.

진정 공식을 확립한 역사적 작품인 것이, 이후 파늘루 신부의 그 장엄한 설교(강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한번 보십시오. 카뮈의 부조리계(界)에서도 신이란 역시 무대의 중심에 자리할 수 없습니다만, 그나마 "부조리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사이드킥"으로서의 단역은 맡겨집니다(사르트르는 아예 모든 무대에서 말살하고 있지만). 또한 카뮈는 이 신부를 희화화하진 않고, 부조리의 오의를 진정으로 깨닫기 직전, 진지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충분히 긍정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후 대중 영화 제작자들이 이 탁월한 장치를 어떻게 축소 활용, 오마쥬, 패러디(?) 했는지야 후대인들인 우리가 잘 아는 바고요.

여기서 진주인공 중 하나로 평가받아야 할 캐릭터는 타루입니다. 소속과 정체감, 지향이 극중 내내 오리무중인 이 사내는, 무대에서 극에 서사적 팩터를 부여하느라 분주한 다른 인물들과 달리, (물적)실존과 (인간적)실존이 충돌하며 격렬한 비극을 생산하는 와중 그 부산물, 혹은 결실을 자신 개인의 삶에 편입시켜 가며, 외계 창조주의 카뮈의 심경을, 장문의 고백록(장치) 속에서 대변하고 있습니다. 조금 순화된 버전의 뫼르소라 해도 되고, 도스토옙스끼적 주인공이 잠시 북아프리카로 이민을 왔다고 봐도 됩니다. 그는 이 재난 현장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부모, 자신의 유년 성장 배경이, 이후 그의 방랑과 성숙, 퇴행, 저항에 어떤 식으로 상흔과 영전을 남겼는지, 담담하면서도 격정을 감추지 않은 서한 속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타루의 기록은 <까라마조프...>에서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처럼, 서사 중 서사의 형식으로 작가의 의도를 보다 선명히 언술하고 있습니다.

오랑은 실제로 콜레라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작중 시간 배경이 1941년이므로 근 백 년의 시차가 있으며, 이 작품이 실제 발표된 1949년에는 나치 독일의 마수로 프랑스 본토와 식민지가 한 차례 큰 홍역을 치르고 가까스로 진정된 시점이죠. 리유와 신출내기 기자 레이몽 랑베르의 대화에서도 나오듯, "원주민들의 처우" 문제가 아주 잠깐 지나가듯 언급은 되고, 이 이슈에 충분한 도덕적 의의는 (아주 겉치레로나마) 부여는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페스트가 "나치 독일의 침략"이라든가, 반대로 무슨 현지 아프리카인들의 반란 등 불길한 움직임의 징후 그 은유라든가 하는 해석은, 근거가 빈약하고 전혀 환영 받지 못하는 시도입니다(무엇보다 여전히 입김이 강한 카뮈의 유족, 그 남은 지인들이 극력 반대하겠죠). 다만 저는, 이후 카뮈가 보여 준 정치적 스탠스의 변화로 미루어, 본격 해석론의 단초로 삼기까지는 못 한다 해도 어느 정도 저런 주장들을 참고는 할 필요가 있지 않을지 생각도 해 봤습니다. 특히 첫번째 희생양인 미셸 노인의 (보수층에서 특히 환영 받을 만한) 태도라든가("이 건물에서 쥐가 발견된다는 건 내게 수치스러운 일" 운운), 서사의 중심에서 중립적 무색무취의 캐스터 노릇에 열심인 리유의 개성 등을 보아, 왠지 막 그 근간을 위협당하기 시작하는 북아프리카 식민 체제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작품 곳곳에서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페스트야. 페스트였다고. 우리가 페스트를 견뎌냈다니까."

"페스트가 뭐냐고요? 그건 바로 인생이죠."

척박하고 비루한 실존 앞에서 존재의 사치를 부리지 말라. 파늘루 신부가 그 의미심장한 강론을 하기 전후에도, 등장인물들은 "공연히 종교적인 내용을 담아 시민들에게 죄의식을 자극하는 신중치 못한 결과"에 대해 많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재앙은 누군가의 죄 때문에 우리 머리에 닥치는 게 아니라, 조물주(그런 게 있다면)의 랜덤 게임으로 그저 벽력처럼 지상을 휩쓸 뿐이라고, 작품 말미에서 (이미 성숙해 있었지만 한층 더) 성숙해지고 달관에 접어든 이들은 입을 모읍니다. 그래도 시쉬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듯,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본 후 꺼멓게 탄 시체로 떨어져도 떨어져야 한다는 게 이 실존주의자의 힘 있는 결론이죠.

카뮈의 문장은 개별 요소가 어렵지는 않은데, 맥락 연결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반면 사르트르는 개별 문장도 어렵고, 실존주의 이름값을 하느라 저작 각각의 해석도 상위 프레임 하나로 싸잡기가 매우 어려운 자유분방 개개약진입니다. 이 소설은 다시 강조하지만 카뮈의 작품 중에선 매우 뚜렷하고 흥미로운 서사 매력을 지녔고, 독자를 비교적 친절한 손길로 심오한 사유에 이끌고 있습니다. "페스트"와 음절 구조("ㅔㅡ ㅡ")가 (물론 우리 한국어 한정으로만) 비슷한 "메르스"가 여전히 한국인들을 공포에 떨고 있는 현 시국에서, 철학과 서사의 롤러코스터로 땀 좀 뻬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페스트> 중에서는 번역 가독성이 가장 좋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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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러시아로 떠난 네 남자의 트래블로그 러시아 여행자 클럽
서양수.정준오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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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면, 흔히 우리는 일본을 떠올립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객관적 현실) 감정적으로 멀게(주관적 적대) 느껴지는 상대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밀착해 있으면서도, 역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게 가능한 표현일까요? 지구상 육지 비중의 1/6을 차지하고, 동서로 한 없이 길게 뻗어 있어, 머리는 유럽에 두고 긴 꼬리의 끝을 극동에 걸치고 있어, 머나먼 한국과도 두만강 한 자락을 경계로 접하는 러시아가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소련 시절 포함하여 지금의 러시아 공화국까지, 그 이름을 한 번 못 들어 보았다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 나라를 직접 찾아본 경험이 있거나, 문화나 역사에 대해 한 가지 사항이라도 즉시 들어 보라고 하면, 이게 가능한 사람이 또한 드물 것 같네요. 이국적인 풍물과 개성적인 사람들(특히 아름다운 여인들)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러시아 관광을 꿈꾸는 이들이 많을 텐데, 정작 그 나라로 향발하려면 (이 책의 저자님들처럼) 스킨헤드 족이 무서워 "거기 갔다가 큰 봉변이라도 당하는 것 아님?" 같은 기우에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게 보통이겠어요.



이 책은 네 분, 이제 청춘의 경계에선 제법 멀찍이 떨어진 나이의, 그렇다고 중노년이라 부르기도 뭣한, 여전히 아이들의 영혼을 간직하고 사는 네 남자들이, 평소의 우정과 인문적 사명감(?)에 없는 시간 쪼개어 가며(...) 드디어 러시아 탐방에 의기투합, 현지에 체류하며 업무에 열심인 다섯 번째 엄친아 친구분의 도움을 받아, 저 춥고 아름다우며 살짝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은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을, 러시아라는 나라를 속속들이(주로 우랄 서부이긴 하지만) 돌아보고 온 유쾌한 기행문입니다.



만약 혼자서 다녀온 러시아라면 이처럼 재미있는 글은 나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책은 5부로 나뉘어 있고, 마흔 개 가까이의 개별 주제를 가진 글들로 짜여져 있니다. 네 분이 모여 각각의 글을 공동 집필한 게 아니라, 꼭지마다 저자가 따로 있습니다(그래서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에 시점이 다를 수 있으니 - 앞에서 객체였던 수스키 님이 뒷 글에선 "나"로 등장한다든가 - 독자가 괜히 당황할 필요는 없구요). 네 분은 정말 절친 사이인데, 그 감수성이라든가 스타일은 서로 제법 차이가 납니다. 독자는 그래서 책 한 권에서 네 가지 컬러를 엿볼 수 있어서 좋기도 합니다.


혼자서 다녀 온 러시아 기행문 중에 제일 유명한 건 아마 대문호 앙드레 지드의 작품일 겁니다. 그 책의 인문적 (혹은 정치사적) 가치는 둘째치고라도, 러시아란 나라는 어렵고 심각하게 접근하면 할수록, 당사자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노답의 수렁에 빠져 들게 하는, 거대한 덩치와 배배 꼬인 사연, 깊이를 알 수 없는 과거와 불확실성으로 꽉 찬 미래를 지닌 나라란 사실을 독자들에게 죠. 전 그런 나라를 이해할 때,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듯 가장 가성비 효율적인 접근 방법이, 바로 이 네 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러시아야 우리가 왔다!"며 그저 유쾌하게 다가서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실린 사진도 많으면서 집필자들의 수다도 장난 아니게 많은 이 책은, 제가 접한 책 중에 한국인이 쓴 걸로는 가장 부담 없이, 러시아란 나라를 실물 그대로 포착했으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읽을거리였습니다. 아마 저자분들의 인간적 컬러와 개성이 크게 작용한 이유 아닐까 생각합니다


"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걸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 싸우어(사워)크림을 소스 삼아 한입에 깨물고 두번 세번 혀와 입천장으로 눌러 마지막 풍미까지 빨아먹는 샤슬릭은, 이거 안 먹어 본 사람은 맛을 안다고 어디 가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수스키(서양수)님은 이 요릴 두고 "러시아판 케이팝스타"라고 평하는데, 제일 쎈 자들만 살아남은, 문명 간의 혼전에서 온갖 신산을 다 맛보았던 러시아인들(결국 몽골도 물리치고 오스만, 페르시아도 제압한)이 빚어내고 즐길 만한 요리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요리의 근원엔(양고기를 주재료로 쓰는 것만 봐도 알듯) 중앙아 유목 민족의 자취가 강하게 남아 있거든요. "그저 한인 식당을 즐기기로 결론을 낸" 주재원 "이노"님은 이 1부 다른 파트에서도 활약이 대단하시더군요.

여성들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남성들이 추레하단 느낌은 이 저자들뿐 아니라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 곳곳으로부터 찾아 들어온 외국 방문자들에게 정평이 난 사항인가 봅니다. 저는 사실 딱히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여성들은 아름답고(수스키님 표현으로는 "<보그>誌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 흔히 쓰는 말이긴 하나 마스크바 젊은 여성들에게 잘 들어맞죠), 그렇다고 도도하지도 않은 것이 저 미모에 왜 저리 겸손할까 하는 사랑스러움(혹은 생경함)마저 발산하는 그런 오브제들이죠. 그런데 남자들은... 사실 동유럽 전체를 통틀어 경제가 침체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화끈하게 건설한 경험이 부족한지라, 생기가 그리 안 느껴집니다. 성인남성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하고, 여성-어린이들은 어느 나라건 간에 천진하게 순간을 즐기는 경향이기 때문에, 그런 성별 구분적 평가에는 동의하기 좀 힘듭니다.

러시아어에 정통한(광장에서 재잘대는 처녀들의 수다까지 다 번역해 줄 수 있는) 현지 주재원 이노 님의 도움을 받아 "붉은 광장"이 사실은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임을 알고(러시아 古語에서 의미가 변천. 현재는 "아름답다"가 "끄라시바"로 별개의 단어죠), 다시 한 번 네 분은 러시아인의 정신 세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의 시선을 주게 됩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 "왜 러시아인은 '빨갛다'를 '아름답다'와 같은 범주에 넣을까?"라는 의문을 갖기보다, 거꾸로 "러시아인들은 '빨갛다'를 '아름답다'와 같은 범주에 넣는 민족"이란 사실로부터, 귀납적으로 러시아인들의 정신 세계 그 정체를 추론하는 편이 더 실용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왜 너는 밤에 알몸으로 자지?"라고 묻기보다, "밤에 알몸으로 자는 게 너라는 아이구나."라고 이해의 첫걸음을 떼는 게 서로의 소통에 더 기여하는 태도겠죠.

안 어울리는 직업에 종사하다 "때려치운 후" 현재 할랑한 프리랜서로 백수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장래를 모색하는 분들답게, 차이콥스키니 체홉이니 하는 본연의 재능을 좇아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친 위인, 그 사적들과 기념물들을 현지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음악 한다고 다 차이콥스키면 연예기획사 연습생들은 다 비욘세 됐겠다." 이러면서 "맥주나 까는" 그들을 보며, 독자는 편안한 아저씨들 특유의, 이국 땅에서도 변함 없이 시전되는 한국적 달관의 제스처에 웃음을 픽 짓게 됩니다.

이분들도 성장 과정에서 러시아 문학의 그 압도적 세례가 끼친 영향이 대단한 듯,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어울리게?) "언제나 세월은 그렇게? 잦은 잊음을 만들지만"을 노래하면서도(나이가 나오죠?), 광장 한켠에서 조우한 아이에게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알료샤!"란 대답을 듣고 "어, <카라마조프> 셋째 아들 아냐?"란 반응이 바로 나올 정도죠. 이런 문호의 힘이란, 결국 세계로부터 "여전히 시들지 않는 인문학에의 꿈"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 숱한 영혼들을 관광객으로 흡인하는 현대 러시아 경제의 한 축을 든든히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면 고려인 출신 락커 "빅토르 최"의 얼굴이 그려진 그 벽화를 안 찾을 수 없죠. 저는 언제나 저 그림 볼 때마다 묘한 인상을 받는데, 락커 특유의 심각하거나 거친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전형적 표정이 아니라, "내 말 한 번 들어 보지 않을래요?"라고 뭘 권하듯 유혹적(..) 눈빛을 하고 있단 느낌. 표정도 참 옛날 사람 같지 않고 모던하단 말이죠. 외국만 나갔다 하면 한국 공관 욕을 하는 이들이 많은데, 외무공무원들이 질책을 받아 마땅한 경우도 있으나, 어떤 분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한다는 인상입니다. 네 분은 "상트(쌍뜨페테레스부르크를 말합니다)"에서 현지 총영사관의 도움을 적절히 입은 경험담도 끝무렵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 중간쯤에서 모스크바 우주 박물관을 다소 무리를 범해 가며 찾은 저자들(특히 준스키님)은, 한국 최초 우주인 후보 최종 2인 중 한 명인 고산 박사와의 예전 인연도 잠시 풀어 주는데요. 본인이 훌륭하고 매력이 있어야 좋은 선배와의 네트웍도 형성되는 것이며, 역시 사회적 교분이란 철저히 유유상종이다 싶은 대목이었습니다.



상트 다음의 행선지가, 발트 해 저편의 핀란드 헬싱키더군요. 이곳으로 가려면 물론 육로편 교통도 있지만 여러 모로 애로가 있죠. 사실 핀란드란 나라는 국제정치상 아주 미묘한 위상입니다.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후 소련은 말도 안되는 구실로 이 나라를 침략했는데, 현지인들의 저항 태세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큰 피해를 입고 국제망신을 당했습니다. 히틀러가 이 한심한 꼴을 보고 "아무 걱정 없이 쳐들어가도 되겠군"하고 독소 개전 결의를 굳혔다는 설도 있죠. 전승 후 소련은 핀란드를 공산화하진 않았으나, 해당국 내부 정치에 큰 입김을 불어 넣으며 간섭을 해 왔습니다. 수스키님 표현("내게 핀란드는 좀 뜬금없는 곳)대로, 러시아와 핀란드는 이처럼 묘한 관계에 놓여 있는데, 스타벅스 (현지판) 텀블러를 결국 못 구해서 좌절하는 장면은, 처음 모스크바 마트에서 10시 데드라인에 재수 없이 걸려 결국 술을 못 사 온 첫번째 "좌절"과 데자뷰를 이룹니다. 지난 역사야 어찌되었건, 현지인들이 물정 모르고 좌충우돌하며 머리와 가슴에 남긴 그 첫인상이야말로 당사자들에게는 레알 쌩얼의 진정성을 가집니다.

이 책의 결론을 딱 한 마디로만 요약하자면, "러시아는 예쁜 나라"라는 거죠. 러시아가 이쁜 줄은 이런 가볍고 유쾌한, 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여행자들 눈에만딱 보이는 진실입니다. 마음만 품고 행동을 미뤄 온 많은 후보자들에게 구체적 계획으로 한 걸음 더 재촉해 주는 게 이 여행서의 최고 매력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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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 43일간의 묵언으로 얻은 단순한 삶
편석환 지음 / 가디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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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광고업 종사자이자, 현직 대학교수의 직분을 지닌 분이라면, 아마 본연의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시기 위해서라도 말을 안 하고 지내시기가 힘들 듯합니다. 그런데 저자인 편석환 선생님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면서도 말을 안 하고 지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결심에 어떤 배경이 있을지요.

예전 연산군은 "입[口]은 만 가지 화의 근원"이라면서 신하들에게 이를 잊지 않게 글귀를 새긴 패를 차고 다니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남더러 침묵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발언을 독점하겠다는 전횡의 표방이므로, 우리에게 참고될 바가 전혀 없는 망언입니다. 효과적인 소통의 미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요즘, 소통의 전문가께서 본인 스스로 "묵언(默言)의 수행(修行)을 공언하심은, 말을 안 하고 살 수 없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리고 자신을 돌아 보게 함에 충분합니다.

이 책은 제목과 책의 실질이 서로 잘 부합합니다. 제목부터가 "나는...."이란 주어로 시작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저자)"의 결행과 의지를 내세우고 있는데, 책 내용도 그렇습니다. 말을 아끼시겠다면서 책 내용은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는 하나) 텍스트로 가득 메워져 있다면, 그것도 어딘가 모순이 낀 구성일 텝니다. 그런데 이 책은, 1) 일단 개인의 결심, 실천을 체크할 수 있게 스케줄러 형식을 띠고 2) 일단 저자 자신이 장장 42일에 걸쳐 결국 한 쾌를 마무리지은 묵언 수행의 개인 log이며, 3) (제목에 잘 어울리게도) 텍스트에 비해 여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구성, 레이아웃입니다.

임석규 전 한겨레 논설위원님은 "(저자) 편 교수는 여백이 많은 사람"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여백이란, 진득한 질감에다 사후(事後) 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말만을 입에 담은 후, 정신의 여력은 신중함과 진지한 고민의 자리에 배정하겠다는 의지를, 과언(寡言)으로 외부에 표방하는 태도를 일컬음 아닐까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 거, 말은 아끼지만 믿음직한 사람."과 동의어죠.

p24에서 잠시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
헐, 휴지가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나 일상에서 한 번은 체험해 봤을 경험입니다.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배에 급한 신호가 올 때, 요즘은 가까운 전철역으로 서두르면 큰 걱정은 없습니다. 화장실이 근처 상가 건물에 하나 열려 있기만 해도 사실 안심입니다. 휴지 걱정은 그 다음이죠. 그런데 편 교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묵언 중이니 누구를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없다.
막막하다.

입니다.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휴지가 없음을 뒤늦게 발견함도 (남 일이라면) 우스운데, 지금 본인만의 특수한 다짐, 계획이란 조건 때문에 더 난감한 상황(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을 못 함)에 빠진다면, 이야말로 (죄송하지만) 보는 입장에서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편 저자님의 마무리는,

(그러나) 나는 묵언 중이다.

로 이뤄집니다. (괄호 안의 말은 서평자인 저의 해석을 반영하기 위해 임의로 넣었습니다) 여튼, 현실의 난감함이 두 번 세 번 편의를 가로막고 (누가 보기라도 할 때)희극적인 장면이 펼쳐져도, 나는 나의 묵언계를 지키고 말겠다는, 그 진지함과 절박함을, 극히 짧은 몇 마디 안에 표현하는 서술입니다. 정신 내부의 치열한 갈등과 충돌을 묵묵히 치러 내고 그 잔해를 소화할망정, 바깥 세상을 향해서는 차분하고 동요 없는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묵언 수행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왜 묵언인가? p140에 나오는 30일째의 기록을 보십시오. "이렇게 오래 할 줄 모몰랐다." "내가 말할 기회만 상대와의 대화에서 노리고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에게도 내 말 중 (그가) 진짜 듣고 싶은 건 많지 않다." 결국 우리 삶에서 이뤄지는 많은 사회적 "소통" 중, 상당수는 공해이자 민폐, 더 지독한 표현을 쓰자면 "쓰레기"란 겁니다. 말이 말을 낳고, 연쇄 순환 고리를 이어가면 갈수록 본의는 곡해되고 충돌은 격화되니, 아예 입을 닫고 상대의 진의, 혹은 나의 참 모습을 캐고 들어가는 게 더 나은 합의 아닌가, 책을 여기까지 읽고 저는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이런 거창한 각성에서만, 장장 42일 간의 묵언 실천이 이어졌다면 오히려 범속한 우리 독자들의 기를 죽이기나 할 뿐입니다. 교수님으로서는 그보다는, 병원을 방문하여 받은 검진 결과가 "성대 종양 발견"이라는, 심각하긴 하나 개인 신상, 건강에 더 밀접 연관된 동기가 작용했을 뿐이었습니다. 일단은 말이죠. "어쨌든 말로 먹고 살아야 할 처지에" 걱정이 덜컥 앞섰다는 고백은 솔직해서 독자의 동조를 쉬이 부릅니다.

수미쌍관의 형식미를 추구함인지, 에필로그 역시 소박하고 털털한 고백이십니다. "묵언을 계속하고 싶은데" "먹고는 살아야 해서" 개강과 더불어 긴 장정을 일단은 멈추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말을 건네고 싶었다"는 첨언이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고요. 몸에 군살과 독소가 가득할 때, 단식과 디톡스 요법으로, 일단의 몸의 잉여 요소를 털어 내듯, 말을 일절 멈춘다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말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모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나라는 정거에서부터 끊어 내겠다는 결심, 그리고 그 작은 결실이 가져 온 뿌듯함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소극적이라고 비판,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번에는 나댄다고 험담" 과연 세상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난맥상입니다. 42일 간의 수행 동안(그 동기가 자의였건 타의였건 무관하게), 저자는 많은 상념과 각성, 그리고 영혼의 정화를 체험했습니다. 짧지만 길고, 비어 있으나 속이 꽉찬 그 기록을 통해, 나의 말은 어떤 실속과 보람을 품었는지 반성할 일입니다. 아울러, 여백이 비교적 많은 이 책의 페이지에다, 언젠가 적당한 시간을 끌어서, 나 자신의 묵언 수행 여정을 겹쳐 써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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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힙합 1 - 닥터드레에서 드레이크까지 아메리칸 힙합 1
힙합엘이 지음 / 휴먼카인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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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라고 하면 대뜸 제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란 기성 사회 구조, 체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든지 하는, 거창하고 정치적인 맥락에서의 자유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예쁘고 날씬하고 말쑥하게 보여야 한다는, 속물적 미의식이나, 자본이 조직적으로, 주기적으로 창출해 내는 "인위적 유행"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미 대륙의 트렌드에 언제나 민감했던 한반도 남쪽의 거주민들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그 저변에 깔린 정신을 제대로 소화도 못 했으면서) 열심히 따라하고 있었을 때, 원타임이나 허니 패밀리 같은 연예인들을 롤 모델로 삼던 젊은 세대를 두고 "똥싼 바지나 입고 다닌다"며 어른들이 얼마나 눈꼴사납게 봤는지 모릅니다. 겉모습만 따라했을지 모르지만 은연중에 힙합 정신을 (컨벤션 일체를 거부하고 나선다는 소극적 범위에서) 구현한 게 당시의 젊은이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띠지를 보면,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한 줄로 책의 가치를 평한 말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나마 선명해지게 돕는다" 우리는 힙합 음악이나 패션, 그리고 그 이면에 덧붙은, 때론 끔찍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각종 스토리에 대해선, 어느 정도 들은 풍월로 익숙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힙합 뮤지션과 프로듀서,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지배한 출신 배경, 공유 가치, 전통 등 인적(人的) 요소에 대해선 과연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요? 물론 아이스큐브(이 사람은 혐한 발언으로 일찍부터 한국에도 유명해졌습니다), 닥터 드레 같은 이름은 한 번 정도야 들어본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에미넴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비교적" 최근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험악한 아우라에 딸려 오는 왠지 불쾌하고 반사회적 이미지만 막연히 재생될 뿐, 이들 "사람들"이 보여 준 음악적 개성과 철학, "경제적 성공" 혹은 그들 상호간의 사연과 네트워크, 대립 구도에 대해선 잘 아는 바 없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해당 챕터 담당 집필자가 "나만의 아이돌"로 표현한) 나스와, 그의 영원한 라이벌 제이지(Jay Z) 사이의 운명적 대결을 여러 시기에 나눠 분석한 대목입니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만, 꼭 누구 보는 눈이 신경쓰여서라기보다, 나스 같은 이를 "우상"으로 고백하면 좀 어울리지도 않고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이 듭니다(필자께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그러나 "아이돌"이라고 하면, 선호와 애정(때로는 애증?)의 대상으로 삼을지언정 "도덕적 평가"나 "롤 모델"로의 승격까지는 고려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아이돌이되 우상은 아니"라는 서술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네요.

 

담당 집필자분은 "나스는 일찍 알아도 제이지는 늦게 알았다. 하지만 일찍 알아서 들었다고 음악이 닳는 것도 아닌 만큼, 늦게나마 (특정 앨범을 계기로) 열심히 들었고 그 가치를 이해하니 충분하다고 여긴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 하나 공감가는 서술은 "어렸을 때 나스를 좋아한 팬으로서 그의 라이벌 제이지는 그만큼 미워했는데, 어린 나이에 어울리는 충성심의 표현"운운한 부분입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 배우, 야구팀에 대해 같은 태도를 가졌거든요. 그러다가 해당 영역, 장르 전체를 보는 눈이 떠지면, 그때부턴 성숙하게 두루 애정을 주고(물론 첫사랑과 비길 수는 없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애가 어른이 되는 겁니다. 이 책은 이처럼, 힙합이란 전문 주제를 넘어 인생사 일반에 대한 폭 넓은 소회와 성찰이 간혹 비쳐져서, 힙합 뮤지션들이라는 "사람들" 못지 않게 "육성을 통해 개성이 느껴지는" 저자들의 면면을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 책은 힙합 뿐 아니라, 시대상과 유리되지 않고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 표현, 재생산한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해, 그 사회적 맥락까지 소개하고 있어 깊이를 지닙니다. 예컨대 제이지는 2001년, 진정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는 음반 <블루프린트>를 발매, 평단과 팬들로부터 열광적 호응을 얻었는데, 물론 제이지 같은 사람(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나 심지어 비평가들도) 911테러에 대한 어떤 역사적 인식 등을 (내심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음악에 집어넣는다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 준 그 서술, 힙합 뮤지션과 역사적 사건 간의 상관 관계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그 설명의 관점이, 독자로서는 깊은 성찰이랄까,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받게 되죠.

 

힙합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닥터 드레, 나스, 제이지 등이 이 책에서 차지하는 서술 비중이 워낙 크고, 다른 주제를 거론한 장에서도 이 이름들이 빠질 수가 없어서, 얼핏 보면 이들 거물들만 다룬 책 같지만, 집필진은 세심하게 다른 뮤지션도 적절한 장소에서 일일이 커버하고 있습니다. 힙합 장르는 인적 연계(협동 뿐 아닌 대립 역시)의 파악이 중요한데, 이 책은 인물 열전식이 아닌(열전 성격도 없지는 않으나), 주제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결국 힙합, 아니 그 어떤 음악, 예술 영역도, 정해진 공식이나 자본적 추동력이 아닌, "사람들"이 이뤄내는 작업이요 결과물입니다. 이 책은 분량이 아주 많지는 않고, 다루는 기간도 21세기에 (대체로) 한정하고 있음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독자, 일반 팬이 더 깊은 이해를 다질 수 있었던 게 큰 보람으로 남습니다. 저자들께서 다음 기회에 "힙합 전사(全史)"를 커버하는 대백과 기획으로 독자의 갈증을 채워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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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 최고의 강의
최준식 지음 / 시공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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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정신 영역의 일부입니다. 이성과, 이성에 기반하여 인간의 모든 정신, 행동, 선택, 결단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합리주의가 서구의 사조를 휩쓸 때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이 사람들이 무의식에 대해 취한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애써 무시하거나, 분별력이 부족한 이들만이 집착하는 미성숙한 "태도"의 일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하지만 S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이란 엄연히 우리 정신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며, 해당 영혼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하는 주체라는 데에 의견이 거의 모아졌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오히려 기라성 같은 현인들에 의해, 무의식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된 바 있습니다. 다만, 저자 최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대로, "집단 무의식 외 개인 무의식이 주목되지 못한 탓에" 프로이트 같은 선각자 한 사람의 기여만도 못한 진도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인간이 주위와 잘 융화하고, 내면의 자아와도 불화하지 않으며(이것이 잘못되면 온갖 정신질환과 신경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아가 언제나 맑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이 무의식의 균형을 잘 잡는 게 필수적입니다. 다만 그 무의식이, 불건전한 집단 동조 현상과만 밀접한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마치 좀비와도 같이, 양심 실종, 죄의식 부재, 타인에의 책임 전가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무의식적 동조(confirmity)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예증하기 위해, 한국 일각에 만연한 사이비 종교 집단과,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의 악행을 들고 있습니다. 사이비종교 집단이라고 해서, 저학력, 저소득, 취약 계층 출신만 모인 건 아닙니다. 직장에서 멀쩡히 제 기능 잘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일상의 일을 처리할 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이도 있죠. 사이비 신념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은 반사회성향이 강할 듯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수가 더 많습니다. 이들 신도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는, 자기들 종교 집단끼리만 모여 있을 때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그것도 조직을 갗춘 상태의) 다수인들이 전부 특정 방향의 행동을 취하니, 그게 보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무작정 따라하고 봅니다. 오히려 이런 특수 집단도 소(小) 사회라고 보았을 때, 이들은 지극히 "사회적 성향이 강한" 성원들이 되어 "질서"를 충실히 따릅니다.

 

나치 독일도 마찬가지죠. 공감무능력은커녕, 이들은 자신이 속한 소집단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인류 보편의 대의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밀접 관계를 맺고 있는 네트웍에 대해 맹목적 충성을 바쳤다는 데에 연원합니다. 이들도 아마, 기독교적 양심에 입각하여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려는 자국 내 소수자(본회퍼 목사님 등)에 대해서는, "공감무능력자"라며 마녀사냥을 일삼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소위 "대세"라는 것에 대해 이를 진정한 권위로 착각하여, 그 앞에서 아무 도덕성이나 이성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인간이 무의식보다 의식에 의해 자신을 매 순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런 역사적 우행을 저지르는 함정에서 얼마든지 벗어났을 것입니다.

 

저자는 한국전 당시 미국포로들이 플랭카드까지 들고서 "북침으로 벌어진 6.25"라고 주장하게 세뇌되었던 사례를 들며, 인간 정신 작용에서 의식,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낮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세뇌가 되었다 해도, 이를 "디프로그래밍"한 후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엄청난 강도로 혹사를 당한 후 이른바 "demonic angel"에 의해 달콤한 어조로 주입된 생각, 사상, 아이디어는, 이후 이 사람의 의식 깊숙한 곳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어렵다고 합니다., 강철 같은 의지로 영악하게 자신의 행동과 신념을 일일이 통제하는 "이성적 인간"의 관념은, 이런 뚜렷한 실증 앞에 허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인간이 건전한 행복을 추구하며 가능한 한 최고 수위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면,  자신의 행동과 기호, 생각을 일일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 어느 사무라이와 사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집단 무의식의 수레에 끌려가며 썩은 의식으로 정체(停滯)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라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 행동이 남의 행동을 무턱대고 모방하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분명한 가치관과 준칙에 의해 이뤄지는 건지, 언제나 반성해 보는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아이를 과도하게 지배하여 자신의 (좌절된) 이상을 투사하려 드는 부모의 engulfment 심리/증상도, 결국 부모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지 못한 여한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려는 비극적인 시도입니다.

 

이런 자기 성찰 습관이 몸에 밴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유연하게 자신의 방침을 수정해 가면서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인간일수록 마지막 자존이나 되는 양(혹은 누릴 걸 못 누린 불우한 처지라 이런 데서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듯) 자기 스타일을 조금도 고치지 않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오히려 양보를 하고, 전혀 타의 기준 노릇을 못할 사람은 자기 영향권을 더 늘려 가니,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퇴보를 거듭하는 게 다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무의식의 세계로 첫발을 디디게 된 프로이트, 그리고 그의 직계 제자이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던 융의 입장을 재미있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개인 무의식"의 세계를 이론적으로 처음 해명하여, 인류가 무지의 장막 뒤에 불안스럽게 감추고 있던 거대한 영역을 우리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성욕 일원론적인 프로이트 패러다임에 반대하는 편이며, 오히려 (개인 영역이건 집단성이건) 무의식을 "지혜의 보고(저자의 규정입니다.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되더군요)"로 규정한 융의 세계관이 더 너른 효용성을 지닌다고 간주합니다.

 

이미 미국에선 의학협회, 이후 정신과 의사 단체에서 요법 중 하나로 공식 인정한 "최면"에 대해, 저자는 여러 챕터에 걸쳐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점 중 첫번째 것은,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최면술사 한 마디에 바로 최면에 빠져들어, 무려 "전생"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는 연예인들의 "쇼"가 일반인들에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따라 최면에 절대 안 빠지는 이도 있고, 반대로 유명한 허버트 스피겔이 마주한 어느 군인처럼 단 한 마디로 최면에 죽은 듯 빠져드는 아주 드문 타입도 있다는 거죠. 주문 한 마디에 줄줄이 표준 체질의 성인이 최면에 빠져들 수는 없으며, 하물며 최면에 걸린 채 무의식이 털어놓는 스토리가 "전생 사연"이라니 터무니없다고 지적합니다. 전생을 믿고 안 믿고, 또 그것이 실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최면 중 발화와 전생(의 기억)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여튼 "꿈"은, 분명 인간 의식과 무의식이 대화를 나누는 장(場)입니다. 이런 채널을 적절히만 활용하면, 개인의 무의식과 의식이 균형을 잡게 도우므로 아주 유익하다는 지적인데요. 한 예로 말레이의 세노이 족은, 범죄 발생률이나 정신질환자 유병률이 거의 0에 가까워서, 많은 학자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선 아이들이 꿈을 꿀 때, 원로들이 자상하게 상담해 주며 "다음 번 꿈을 꿀 때는 이러이러하게 (꿈 속에서 과감히)행동해 보라"고 조언해 주는 게 오랜 관행이라는군요. 이렇게 어려서부터 "정신 요법"을 생활처럼 받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정서를 유지한다는 게 저자의 소개입니다. 참 귀가 솔깃해지는 토픽이 아닐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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