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 - 전략이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조유 지음, 문이원 옮김, 김근 감수 / 동아일보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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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중에는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칭인지가 헷갈릴 만큼 기이한 이름을 달고 있는 게 많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이탁오로 잘 알려진 거사의 저술 <분서>가 그러합니다. 불을 싸질러 버려야 마땅하다는 뜻의 반어적 명명인 그 책은, 당대 지식인들이 보았을 때 "소지나 일독만으로 반역자 처단을 받을 수 있는" 불온하고 발칙한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책 <반경>도 얼핏 보아 그런 인상을 줍니다. 기존의 경전들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잔뜩 반(反)하는 내용만을 담은, 삐딱한 가르침만 한껏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렇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반(反)은 오히려 자신을 반성, 성찰한다는 의미도 적잖이 담고 있었으며(수기치인이라는 유가의 정통 스탠스입니다), 사물의 이면을 애써 통찰한다는 격물치지의 원리까지 바탕에 깔고 있었으니, 우리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넉넉히 정통파 교리에 포함됩니다. 중국 고전이 언제나 그런 태도를견지하지만,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고 현세의 구복과 입신 영달에의 길이 무엇인지 적시하되, 사회를 규율하는 지배층이 합의한 모럴이 무엇인지 수시로 환기하며, 영리하게 처신하되 소인배로 떨어지는 평판을 받지 않게 하라는, 균형 감각의 묘도 함께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만 이 <반경>만의 개성이라면, 경과 사가 절묘히 어우러져, 이른바 도(道)와 처세의 양 대척 영역에서 도그마를, 좀 마성이다 싶을 만큼 묘한 호흡으로 이 저자가 체계 속에 잘 버무리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 물과 기름처럼 안 어울리는 컨텐츠를, 저자의 입답 하나만으로 "그들이 하나의 이치 속에 유영하고 있었던가?"를 깨치게 하는, 보기 드문 컬러의 내공을 선뵈고 있다고나 할까요. 대개 우리가 살며 절실히 겪는 문제를 텍스트 속에 저며 내고 있으므로, 중국 고전은 주희 류의 지독한 형이상학 논변이 아니라면 읽기에 재미있습니다(참고로 주희는 이 책 저자 조유보다 몇 백 년 뒤에 나온 후대인입니다). 이 책은 특히나, <반경>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형식과 격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써 내려간 터라, 경이니 사니 하는 포맷에 얽매임 없이 현대인들이 마음껏 저자와의 교분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역사적 어카운트나 성현의 가르침 뿐 아니라, 심지어 골상학, 관상학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저자는 예를 들어 십진 분류법 같은 구태의연한 할거주의적 진용 논리와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붕새처럼 훨훨 나는, 주제와 관념의 족쇄를 넉넉히 타파하고, "내가 지혜의 요체라고 파악하는 바를 내 책 한 권에 다 담겠다"는, 지극히 호방한 포부와 스킴으로 책을 써내려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이 작고 몸통이 큰 게 첫째 가는 천한 골상이요, 허리가 짧고 다리가 긴 게 천하기로는 다섯 째 간다." 정말 이 대목에서는 뒤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빈, 정우성, 강동원 등은 이분의 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은 원본 자체의 완성도나 흥미도 뻬어나지만, 번역진의 성의가 실로 놀라웠습니다. 어떤 번역자의 내공이나 실력이 과연 당해 원전을 다룰 깜냥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몇 장만 읽어 봐도 눈 밝은 독자의 눈에는 훤히 보입니다. 예 하나만 들겠습니다. 본문 중 강태공이 언급된 대목에 역주가 달려 있는데, 물론 강태공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도 다 압니다. 그러나 본명이 여상이고 이후 제(齊)나라를 봉지로 받은 그 대 경세가가, 왜 별칭이 강태공인지 내력을 정확히 적은 곳이, 이 방대한 한국어 웹 망 중 어느 한 사이트라도 있는지 확해 보십시오. 다들 한 마디씩은 하고 있는데, 결정적인 대목에서 다 틀려 있습니다.


본명

관계

여상(呂尙)은 이들에게...?

고공단보(조부)

선군의 태공(아버지)

꿈꾸던(望) 인물

계력(부친)

선군

서백 창(희창).

곧 주 문왕(본인)

금상

우연히 만나 재상으로 초빙

太公望


이 책의 해당 역주는, 독자가 디테일에서 미심쩍어 하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 다른 책에서 해결하지 못하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긁어 주고 있습니다(위 제가 도식화한 것 참조). 할아버지인 고공단보를 주 문왕 창이 왜 "태공"이라 부를까요? "(문왕 자신의 아버지인) 계력이 태공으로 부른 분"이란 의미입니다. 나중에는 여상 역시 존경의 의미에서 뭇 사람들에게 "태공"으로 불리니, "강태공"이라고 할 때의 "태공"과 "태공망"이라고 할 때의 "태공"은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강태공"과 "태공망"이 서로 같은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그렇게나 잘 알려진 사람의 통칭 내역 하나도, 정확하게 설명하는 출처가 이처럼 드문데, 이 책은 역주에서 이처럼 정확히, 소상히 밝혀 주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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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러 속의 우주 - 대칭으로 읽는 현대 물리학
데이브 골드버그 지음, 박병철 옮김 / 해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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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에 이를 관통하는 법칙이, 그것도 지극히 단순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소박하고, 유치하며, 무모하거나 만용에 가까운 기대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뉴턴이 중력을 G와 두 개의 질량변수, 두 물체 사이의 거리라는 팩터만을 사용하여 도식화하였을 때, 유럽의 지성은 그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인류는, 다섯 세기가 지나도록 이 기본적인 힘(중력)에 대해 더 이상의 상위 법칙, 원리에로의 포섭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보편적이긴 하나 보이지도 않는 양상으로 작용하거나(전자기력), 아예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없는(장비를 쓴 후에도 여전히 그 관측이 까다로운) 나머지 세 힘(force)에 대해서는 제법 인식의 진전을 이룬 형편인데도 말입니다.

반물질 역시, 처음 이 가설이 제창되었을 때는 그저 만인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습니다. 사물을 양과 음으로 일일이 나누는 것부터가 원시 신앙의 흔적이고, 설사  그런 시도를 벌인다 한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하나하나에 그에 대응하는 반(反) 실체가 대기하며, 다만 우리의 세계와는 접촉, 관측이 불가한 다른 영역에 머물 뿐이라는 말이, 황당무계하게 받아들여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에 대해, 주류 입장에 속한 물리학자라면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일단 긍정한 후 이론 전개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공자 이래 동양의 철학자들이 한 번도 그 견지와 탐구를 중단한 적 없는 영원한 도그마인 음양(陰陽)이기설 역시, 서세동점의 험악한 시대상에서 일거에 폐기되었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 오늘날에 와서 다시 한 번 열렬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론상의 이런 신 조류의 반영 결과 중 하나입니다.

표준모형? 한때는 아인슈타인이 통일장 이론을 구상할 때만 해도 이를 두고 미친 시도라며, 그의 위명이 버젓이 살아 있던 시점에조차 세인(이라기보다 학자, 지성인)들은 조소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입자론 분야에서 점점 발군의 성과를 이루고, "만물의 이론"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는 데에 다시금 합의가 이뤄지자, 이 표준 모형이라는 얼기설기 사상누각 구조가 조심스레 복수의 학자들에 의해 도식화되었습니다. 처음 제창된 이래 유의미한 진전이 많지 않았음에도, 아직도 학자들은 이 가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최근 신의 입자 발견(이 책 저자 데이브 골드버그는 이 인기 있는 별칭 사용에 대해 반대합니다)에 의해 이 표준모형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금과옥조로서의 위상을 한층 더 굳힌 모습입니다.

이름이 거창하게도 표준모형이라고 붙은 공식조차 모습이 저처럼 번잡하니, 이를 지지하고 이에 집착하는 해당 분야 학자들의 주관적 의욕과 개인적 신조의 강도가 어떠하든, 우리 인류가 "세상 만사를 꿰뚫을 이치"를 한 큐에 장악하기란 여전히 갈 길이 멀리 남은, 어쩌면 무망한 과업처럼 보입니다. 20세기 중반 아인슈타인이 망집에 빠져 호기를 부린다고 비난하던 당시의 보수적이고(?) 겸허했던(...) 그의 후배 과학자들의 태도가 온당했는지도 모릅니다. 과학은 더 이상 단순화에의 예찬, 근거 없는 숭배를 중단하고, "현상의 정확한 기술"에 만족해야 할지 모릅니다. 실제로 인문과학 중 언어학 같은 경우 이런 트렌드가 최근의 주류입니다.

데이브 골드버그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야심만만한 성격과 정신의 특질을 갖춘 저자, 갑갑하고 굴곡 많은 구조적 제약에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지각적으로 감당 못 할 만큼 큰 스케일을 지닌 이 물리계를 "말 몇 마디로 후려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우리 독자들에게 록스타적 열광을 부르기에 충분한 엔터테이너입니다. 아름다운 비주얼과 조화로운 음율로, 우리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픽션 내러티브를 구수히 오싹오싹하게 들려 주는 전기수도 요긴한 직분이지만, 그에 대한 무지가 인간 존재에 근원적 불안감을 드리우는 "세상 돌아가는 근본 이치"를 두고서, 시원하고 통쾌하게 해명해 줌으로써, 지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이런 이야기꾼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소중한 동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잖아도 복잡하게 꼬인 논의 구조에서 만인이 지쳐가고 있을 때, 다 필요 없으니 이거 하나면 된다면서 들고 나온 게, 연식은 제법 된 뇌터의 이론입니다. 지금까지 그 숱한 단순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끝에, 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하듯 더 단순한 걸 펄럭이는 기치로 내세운 당돌함이란.... 그는 정말로, 이거 하나면 다 된다고, 실현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초단순 원리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건 아니지만, 어떤 이론이 그 끝장을 보겠다며 강력한 추동력까지를 부착하는 건 주장자의 인문적 상상의 저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저자는 현역 물리학 담당 교수이지만, 동시에 풍부한 인문적 통찰 능력까지 지니고 있는 터에, 신명 나는 미학적 리듬과 통섭적 시야로, 물리학에 무지한 일반 독자들의 의욕까지 성공적으로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아마 공간구조적 대칭성은 많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개념일 겁니다. 당장 저만 해도 정규 초등과정에서 점대칭 선대칭 개념을 배우며 경시대회 대비를 위해 온갖 난해도형을 이리 뒤집고 저리 꼬는 연습을 숱하게 수행하고 자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대칭은 어떨까요? 저자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상기시키며, 시간보다 더 일방통행인 개념은 아마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을 거라며 어리석은 독자들을 도닥인 후, 본격 황야와도 같이 거친 이 생소한 개념 속으로의 탐사를 독려합니다.

왜 시간의 대칭이 낯설 수밖에 없냐면, 일견 엔트로피 제2법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엔트로피 법칙이나 그 중핵을 이루는 개념은 말만 거창할 뿐, 그 내용이 우리 일반인의 직관에 그처럼 잘 부합하는 것도 없습니다. 사물의 질서란 어질러지기가 쉽지, 그 반대로 알아서 정돈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겁니다(책 중에서 골드버그 교수-왠지 이름으로 데이브라고 막 불러도 될듯한 - 는, "혼란의 극에 일단 달한 후 그보다는 쬐끔 나은 상태로 잠시 회귀할 수는 있다면서, 이 법칙의 예외를 인정하죠. 하지만 이미 유일 상태에 가까운 극점에 도달하는 자체가 확률적으로 극히 어렵습니다). 여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설마 있을까요? 시간이 만약 역방향으로 흐른다면, 엔트로피 진행의 불가역성이 깨진다는 뜻이니까요.

그전부터 학자들은,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시간의 역설(인과가 뒤집히고 기 발생 실체가 무[無]로 돌아감) 때문에 장벽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꼭 단서를 달기를, "이것이 시간여행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라고 합니다. 즉 귀류법의 판정 범주에 이걸 포함시키면 안 된다고 유보 조항을 단 건데, 저는 예전부터 그 이유, 근거가 참 궁금했습니다. 왜 이 영역에서만은, 유클리드가 수천 년 전 확립한 수학적 증명이 통하지 않는 걸까요? 물리학과 수학이 전혀 별개의 왕국에서 놀고 있다 착각하는(대중서만 읽으면 그렇게 되죠) 백치는 이해 못할 수 있으나, 수학 없는 물리는 교각 없는 금문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는 공법이 발달하여 교각없이 구조를 세우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성이 없거나 먼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저자 역시 개념상의 난점을 몇 들며,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가상의 추가 차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며 확언은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독자들은, 과감한 시간 대칭 방법론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중에, 심지어 이중 나선 구조조차 뇌터의 이론으로 모두 일원적 설명이 가능할 수 있는, 전인미답의 신세계로 발을 한 걸음 들여 놓을 수 있을 겁니다. 중력만 여태 통일장 포섭의 달콤한 제의를 회피하고 있고, 시간 차원만이 여러 역설의 덫에서 시원하게 발을 못 뻬고 있다면,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계가 있는 것 아닌지, 가장 단순하나 가장 꾀까다로워 보이는 대칭성이란 처방으로 일거에 난제가 풀리는 건 아닌지, 데이브 골드버그 박사의 이 책은 개그콘서트처럼 직설적이고 재치 있는 화법을 통해, 대중들의 "물리 울렁증" 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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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다시 직장이 필요할 때 - 경단녀 1년 만에 남편 연봉 따라잡기 프로젝트
이정미 지음 / 라온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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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단녀"라고 하면 아직도 그 말 뜻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맞벌이"라는 패턴 자체를 보기 힘들었고, 남자 혼자 버는 수입으로 가족 부양이 힘든 경우에나 볼 수 있는 "사정이 딱한 집" 정도로 인식되는 게 고작이었다고 할까요. 허나 지금은 남편과 아내 모두 생계의 전선에 나서고, 여성 역시 자영업 운영이나 남편 업무의 보조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기업의 정직원 신분으로 경제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을 흔히(혹은, 절박하게) 관측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취업"이 보편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여성이 일정 연령에 달하거나 기혼자 신분을 얻을 경우 당연히 퇴직하겠거니 같은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조성하는 고용주는 부당노동행위 사유로 처벌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경단녀"라는 말이 있다는 자체가, 정규직(그저 "생업" 정도가 아니라 regular job이란, 더 강한 의미입니다) 신분을 상당 기간 유지하는 게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보유되는 권리이겠다는 의식이 확산된 결과입니다.

어떤 정책적(혹은 도덕적) 주장을 할 때, 듣기에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꺼내는 자체야 누구에게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 발언자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냐 아니냐는 데에 있죠. 예를 들어 "경단"도 아니고 "녀"도 아닌 일개 독자인 저 역시도, 이 책에 나오는 말을 적절히 인용, 편집하여 누군가에게 근엄한 투로 "이래야 하느니라"면서 일장 설교를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주장이 담은 내용의 맥락단절적 개별 타당성보다 훨씬 긴절한 사항은, 말하는 사람과 발화되는 내용 서로가 상호 지지, 조화를 이룬 일체적 설득력, 입체적 정당성입니다. 이 책의 저자 이정미 선생님은 여러 근거와 이유에서,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여성", "경력 단절로 물리적, 심리적 장애를 겪으며 자책, 번민,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 독자에게, 정말 필요한 조언을 베풀어 주고 있으며, 또한 강력한 설득력으로 독자를 inspire 해 주는 능력자 작가입니다.



저자는 본인 자신이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인데다, 현재 주로 여성 청중들을 상대로 동기 부여라는 과업을 멋지게 수행하고 있는 이름난 강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1)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후 바로 취업에 성공, 2) 결혼 후 일정 시련을 거친 뒤 소위 "경단" 시기를 거쳐 이처럼 재기했다는 점에서, 일반 여성들에게 괜한 위화감만 부르는 특출 케이스가 아니라, 오히려 모두에게 공감형 롤 모델로 위상을 잡은, 진정 여러 이유에서 "이런 책 쓰시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적 자격을 갖춘" 저자입니다.

저자는 여러 시대상의 변화를 언급하며, 1) 기대수명이 증가한 현실에서 정년은 조금도 늘지 않은 상황에선, 과거처럼 퇴직 수당만으로 노후를 지탱할 수 없다는 점 2) 전반적으로 고용 불안도가 증가하고 육아비용이 상승하는 추세에서 어차피 남편 수입만으로 가계 운영이 어렵다는 점 3) 결혼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는 청년 남성층이 점차 싱글로 평생을 보내려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여성들에게 현실을 피곤하게 여기지 말고 내가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함이 환경적 필연이자 자아실현임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라고 일단 조언합니다.

문제는 이미 그런 확신, 현실적 절박함을 느끼고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처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결정하며 이를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 하는 점이죠. 저자는 자신을 거듭 소개하기를, "현재 나이 서른 아홉이며 지독한 생활고를 겪어 봤고, 싱글맘으로 홀로 선 이래 지난 10년 동안 안 해 본 일이 없는 여자"라고 털어 놓으십니다. 인테리어업을 영위한 부친의 영향으로 학교 졸업 후 동종업계에 뛰어들어 만족스러운 성취를 쌓고 있던 저자는, 결혼에 대한 환상(저자 자신의 표현입니다) 때문에 소중한 커리어를 중단하고, 전업 주부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성실한 육아, 가사관리 중 틈틈히 문센 수강으로 자아실현의 꿈도 가꾸려던 그녀의 소박한 희망은 철저히 좌절됩니다.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자란 귀한 댁 따님이 어느새 아빠의 도움을 못 받는 어린 아이와 함께 "막막한 생계"를 오늘 내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진 거죠.

저자가 우리 시대의 경단녀들에게 우선 강조하는 바는, "스펙, 학벌, 나이"에 스스로 위축되지 말라는 겁니다. 전 몰랐는데 저자께선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지 않다시는 군요. 하긴 이 나이 또래 분들이면 현역 고3의 1/4도 안 되는 수효만이 대학 진학이 가능했던 시절이었습니다(그러니 스카이 들어가기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지나고 생각하니 정말 꿈만 같군요 ㅋ). 대개 자수성가형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그 양친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지만, 사람의 실제 능력이 중요하지 서류상의 번듯한 자격 증명 사항이 뭔 대수냐는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 역시 영락없는 경단녀 처지로 이곳저곳에 지원을 시도할 때, "대학 졸업란"을 기재하는 단계에서 많은 좌절감을 느끼셨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건, 책에 기술된 저자의 그 태도였습니다. "아, 여기서 나는 안 되는 거구나." 보통 경단녀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고졸 학력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평판이 높지 않은 4년제 출신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저자의 (책에 나온) 반응은, "아니 내가 일하겠다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하냐고?"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저자 역시 "무대뽀로" 고졸 스펙을 밀어붙인 건 아닙니다. 이후 "대졸" 결격 사항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학위 취득으로 공란을 채웠습니다. 사실 저 상태로 너무 일관하면 고용주가 딱히 학력 차별을 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은 구직 과정에서 최소 성의를 안 갖추는 무례한 인성이거나, 사회의 실정을 너무 모르는군." 같은 생각으로 커트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건 지혜와 열정이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심지어, "당신이 성실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 왔다면, 가사와 육아 과정에서조차 남달리 배우고 터득한 바가 있을 것이다." 면서, "그 지혜를 일에다 얼마든지 결합시켜서" 나만의 업무 성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절절한 사연으로 인생을 물들인 저자만이 할 수 있는 힘있는 조언입니다. 심지어 나이조차 경단녀에게 결정적 장애가 아니라고 합니다. "먹은 나이가 있으면 원숙함이 같이 있을 것 아니냐?"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책으로만 읽고 마는 것보다, 저자의 강연장에 직접 찾아가서 기(氣)를 받고 오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냥 의욕과 정열만을 무기로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요즘 저도  인터넷 서핑 중 "민간자격증"이란 말을 자주 접하는데, 저자 역시 경단녀들이 아무 자격 증명 사항 없이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다는 전제로 이 화제를 꺼내고 있습니다. 미래의 고수익이란 표현은 다소 막연하게 들리고, 솔직히 제가 보는 바에서는 "이거다!" 싶은 유망자격증이 눈에 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처한 환경과 적성이 다 다르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한 분이라면 리스트를 보는 즉시 뭔가 확연한 친화력으로 다가오는 분야가 있을 겁니다. 저자는 경단녀 탈출의 지름길이 "부지런한 정보 탐색"에 있음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나하고 있어 줄 수가 없어요?" 딸 시연이에게 이런 말을 듣자 저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엄마는 시연이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일하는 거야. 그리고 엄마는 능력이 있잖니? 능력 없으면 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라고." 며칠 후 딸은 손수 그린 그림에다 응원문구를 같이 써서 엄마에게 보여주는데, 뭐 전 잘 모르지만 맘들은 이런 일에 엄청 감동하시지 싶습니다(엄마라는 말 외에 실명도 같이 사용하는데, 철이 없어서라기보다 미국식 사고방식, 즉 관계, 신분 외에도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부모를 대하는 소이가 아닌지 생각했어요). 근데 전 이 저자분의 말에서 다른 점에 주목했습니다. "능력 없으면 일도 못한다."

여기서 능력이란 뭘 말할까요? 스펙은 능력이 아닙니다. 보통 보면, 경단녀, 아니면 취준생분들은, 능력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스펙, 나이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백이면 백 답니다. 이 책의 저자 이정미 선생님은, 고졸자에다 (출발 당시) 서른을 넘긴 나이에다 애까지 딸린 처지였습니다. 이 정도면 재도약을 위해선 여자로서 아무 가망이 없는 현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죠.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당신이 능력계발에 그토록 절실한 인생이라면, 사회는 결코 당신의 몸짓을 외면하지 않는다"입니다. 능력 있는 여성을, 사회가 한가하게도 학벌을 핑계 삼아 거절하겠습니까? 문제는 당신이, 서 푼 짜리 자아가 상처 입을까봐 몸을 던져 능력을 키울 생각, 일에 뛰어들 생각은 않고, 손쉽게 겉치장 스펙만 채우려는 안이한 마음만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알아주는 스펙은 명문대 졸업장 뿐인데 그건 당신에겐 이미 10대때 지나가버린 사항 아닙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능력 계발에 헌신해서 스펙의 공백을 채우는 거고, 사회 생활이 장난이 아닌 이상 몸을 던지고 영혼을 바쳐서 해결할 과제죠. "당신에게 부족한 건 차라리 스펙이 아니라 능력이었다."

책의 본지와는 무관하지만, 한국이란 시스템 자체가 빨리 정상으로 회복궤도에 들어서야 합니다. 여자는 집에서 살림만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남자도 버티기 힘든 생업 전선으로 언제까지 여자를 내몰겠습니까? 와이프가 무슨 번듯한 기업에서 밑에 남직원 부려가며 과장님 대접 받는 거라면 또 모를까, 외간남자인 사장 밑에서 이거해라 저거해라 지시 받는 모습을 그거 남편된 입장에서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한국 같은 나라는, 여자가 그저 수입만 바라보고 직장 생활 꾸역꾸역 이어가는 거지, 자아실현 이런 건 턱도 없는 소립니다. 이게 남자 입장에서 응당 가져야 할 자세고, 여자가 경단녀니 뭐니 가외의 걱정을 하지 않게 더 정신차려서 열심히 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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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2015-07-2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 감사 합니다 ^^
 
페이스 오프 밀리언셀러 클럽 139
데이비드 발다치 엮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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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소설, 미스테리, 그리고 스릴러 장르는 지난 백 년에 걸쳐 각각 매혹적인 캐릭터, 주인공 들을 세상에 탄생시켜, 독자를 매혹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모두의 마음에 품게 도와 줬습니다. 그저 주인공 한 명만의 활약으로도 우리 독자들은 그의 동선을 눈과 심장으로 좇으며, 정의의 구현과 악의 패퇴라는 모두의 이상이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구현되길, 한편으로 두 손에 땀을 쥐어가며, 한편으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장르 향유자의 특권과 함께 즐거운 기원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좋아하는 한 명의 캐릭터 활약으로도 우리 독자의 가슴은 그 맥박이 가속되고 동공의 그 넓이란 확장된 게 사실었습니다.

 

스릴러 장르는 아닙니다만, 탐정 모험 소설 영역에서 모리스 르블랑이 한 세기 전에, "캐릭터 한 명이 아닌, 만인의 사랑을 받는(혹은 그럴 전망인) 두 명의 주인공을 함께 출연시킨 장편, 단편"을 세상에 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도의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곤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둘 중 한 캐릭터인 셜록 홈즈의 팬들로부터는 항의가 쇄도했고, 해당 컨텐츠의 저작권자라 할 도일 경은 여러 경로로 불쾌감을 표시했으므로, 이 (일방적) 합동 경연은 축복을 가득 받은 무대에서 이뤄진 게 아닌, 절반의 실패에 가까웠습니다.

 

이 책은 스릴러 장르에서 활약해 왔고 아직 팔팔한 현역이라 할 22인의 유명 캐릭터들이, 11편의 날씬한 단편들에서 둘씩 짝을 이뤄 콜라보의 향연을 보이는 멋진 컬렉션입니다. 백 년 전의 저 사례에서 보았듯,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 지명도를 얻은 복수(複數)의 캐릭터들이, 단일 작품에 함께 얼굴을 내비치는 것 자체가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며, 법적, 기술적인 여러 문제가 뒤따릅니다. 1) 어느 작가가 집필을 주도하겠으며, 2) 두 작가의 구상이 상충할 경우 누구의 의견을 존중할 것이고, 3) 해당 작품의 판매 수익은 어떤 비율로 배분할지가 매 단계에서 일일이 난제로 부상합니다.

 

이 책은 위 세 가지 애로사항 하나하나를, 기획의 총괄자 격인 데이비드 발다치의 놀라운 수완으로 해결한 결실입니다. 독자의 상식으로는, 이런 책 한 권 안에서 다수의 작가가 자신의 피조물들을 흔쾌히 무대에 풀어 주고, 개성과 지향이 상이한 그들이 용케 두 명씩 짝을 맞춰 조화롭고 유쾌하게 완성도 높은 공연을 펼치게 한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발다치의 서문에도 나오지만, 위에 적은 장애 외에도 4) 현대에는 인기 캐릭터의 경우 출판사가 계약 기간 중에는 핵심 이해 당사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영리 목적으로는 작가 본인도 그 처분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 소개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제3자 위치의 평론가가 캐릭터 논평을 한 글들을 모은 책이거나, 기 발표 단편 중 서로 어을릴 만한 걸 앤솔로지로 엮은 내용인 줄 착각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책은 상식적으로 나올 수가 없는 성격이거든요. "기적"이라고까지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말입니다.

 

"국제 스릴러 작가 협회"라고, 유력 인기 스릴러 작가들이 그들만의 연맹체를 구성한 실체가 있는가 봅니다. 스릴러란 장르가 미스테리물, 추리 소설과 언제나 선명하게만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작가 한 사람이 강고한 폐쇄적 경계를 형성한 영역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 단체가 실제 존재하여 어느 정도 지속적인 결속을 이루고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 단체 안에서 각 작가들이 제법 신사적인 친분도 그간 도모해 왔기에, 이렇게나 유명한 저자들이 일시 듀오를 이뤄 사적(私的)으로 통신을 주고받으며 작품 하나씩을 완성할 수 있었겠습니다. 두 명이 작품 하나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일은 고사하고, 제 생각엔 이런 인기 작가들을 일단 둘씩 짝지우는 것부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독자들의 눈길을 가장 강렬하게 끈 건, 작품집 첫머리에 수록된, 마이클 코넬리와 데니스 루헤인이 공동 창작한 단편 <야간 비행>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꿈도 아니고요), 정말 "해리-히에로니무스-보슈", 그리고 패트릭 켄지 두 캐릭터가 동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물론 두 사람 다 범인 잡는 신분(디텍티브)이니, 각자의 사건에서 우연히 공통으로 걸린 문제의 인물 한 사람을 두고 체류지 현장에서 서로 조우하는 내용입니다(이 자는 정말 운이 없습니다. 한 명의 추적자로도 버거웠을 판에...) 전 우스웠던 게, 실제 두 캐릭터가 동일 무대에서 만나고 보니 서로 나이도 따지고, 그 날카로운 눈에 상대의 강렬한 개성과 범상치 않은 기(氣)가 감지되지 않을 리 없으니 제법 신경전도 펼칠 만한데, 두 작가 역시 그 점 감안하여 두 인물의 첫 대면을 다분히 희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런 콜라보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공동 창작이 이뤄질지는 독자로서 실로 궁금한 점인데, 각 단편 앞에는 편집자가 간단하게나마 캐릭터들의 연혁, 개성, 그리고 아주 짧은 작가론을 적어 둔 글이 있습니다. <야간 비행>앞에는 이 단편이 어떤 경위로 완성에 이르렀는지 알려 주고 있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두 작가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므로, 스릴러 팬들은 읽으면서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전 사실 패트릭 켄지가 범인으로 (억울하게) 몰리는 상황을 예상했고, 책에도 나오지만 두 캐릭터가 워낙 극과 극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다 보니 콜라보에 진심 무리가 따를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더랬습니다. 그들다운 방법으로 독자의 이런 우려를 불식하는 노련한 작가들입니다.

 

스릴러도 법정을 배경으로, 법조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들이 제법 많죠. 미국인들이 법정물에 얼마나 열광하는지를 알면 이는 사실 놀랍지도 않습니다. <팬더를 찾아>는 냉철한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 폴 마드리아니와 열혈 여검사 알렉스 쿠퍼가 같이 나오는 (역시 놀라운) 단편인데, 극중 알렉스가 "내 일도 아니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게 나의 직무이기도 하니 이 정보를 알려 주고 당신을 돕는다", 혹은 "법정에서 당신과 여태 맞붙지 않은 게 행운이다(너무 닭살이죠?)" 같은 멘트를 날리며, 이 작품집 중 최고의 케미를 자랑합니다. 이 단편은 1) 콜라보 치고, 2) 단편 치고 제법 큰 스케일과 묵직한 시사성을 자랑해서 두 번 놀랐습니다.

 

편집자는 "현실vs몽환"이란 컨셉으로 이 작품을 요약하고 있지만, 제 생각에는 "남vs여", "선vs악", "과거vs현실"이라는 다차원 대립 구조가 펼쳐지고 있는 게 <웃는 부처>입니다(생각해 보니 "동vs서"도 있습니다). 정신분석 전문의 말라카이(책에는 "말라차이"라고 적고 있는데, "말라카이"가 올바른 현지 발음입니다) 새뮤얼과, 팔팔한 기질의 여형사 D D 워런이 협연하는 완성도 높은 단편 스릴러인데요. 음과 양을 각각 대변한다 할 이 극단적으로 불협화를 이루는 두 명의 캐릭터가, 전혀 협업 아닌 협업으로 범인을 검거하는(사실 새뮤얼은 범인 스탠스에 가깝지 누굴 잡는 입장이 아닙니다) 스토리가 볼만합니다. DD가 제 할 일 마치고 퇴장한 후, 말라카이는 불상을 뒤집으며 일생 동안 추적해 온 비전을 드디어 만난다는 기대에 전율합니다. "말라기", "사무엘" 이름과 성 모두 기독교 구약 예언자 이름에서 따온 캐릭터가, 이 단편에선 불상에 울고 불상에 웃게 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했습니다.

 

과연 이런 기획, 캐릭터 듀오 콜라보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는 트렌드로 자리잡을까요? 독자 입장에선 상상만으로도 심쿵이지만, 냉정히 현실을 따지고 보면 가능성이 크지 못합니다. 작가가 재벌도 아니고, 아무리 인기를 누려도 재능의 투입 그 상당 비중을 이번처럼 내내 "기부"에 쓸 수는 없습니다(그러고 보니 진짜 재벌이라고 해도 불가능하겠네요.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은 앞으로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스릴러의 익스프레스 갈라 쇼라 부를 만합니다. 이런 책을 무심히 지나치고도 밤에 잠이 잘 오는 독자라면 그저 그 무신경함에다 대고 뭐라 해 줄 말이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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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힙합 2 - 닥터드레에서 드레이크까지 아메리칸 힙합 2
힙합엘이 지음 / 휴먼카인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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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필진 참여자분들은 스포츠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1권에서도 닥터 드레와 작업을 함께하거나 그가 양성하거나, 혹은 프로듀싱에 깊이 관여한 뮤지션들을 두고, "믿고 쓰는 레알산"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최고 명문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출신 선수들이라면 따로 검증 절차를 거칠 것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 국내 축구팬들끼리 널리 쓰는 우스개 관용어죠. 이 2권에서도 DTD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가 길다며 "내팀내"로 쓰던 걸 그예 더 줄여 DTD라고까지 압축한 유행어죠. 여기에 다른 모듈까지 붙여 "DTD는 과학입니다."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저 본의를 전달하는 것 외에, 특정 감독(최초 발언자로 잘못 알려진 분)을 조롱하는 의도로도 크게 퍼져서 마구 응용하긴 좀 조심스러운데, 마침 이 책은 "디스질을 그 핵심 팩터로 삼는" 힙합 음악에 대한 책이기도 하니, (저자들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제와 잘 어울리는 느낌도 들긴 합니다.

이 2권의 첫 챕터 제목을 어구 DTD를 넣어서 잡은 건, 아마도, 뮤지션으로서 뜨기 위해 기본기를 얼마나 연마해야 하고, 타고난 재능의 조건이 어느 정도 중요한지의 문제가, 힙합 음악이라고 해서 전혀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걸 저자들이 강조하기 위한 의도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지만, 한국에서는 그닥 기량이 출중하지 못한 데도 어쩌다 대중들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고, 이후 예능 출연 등을 통해 이미지 관리를 잘해서 롱런하는 연예인들이 왕왕 있죠. "실력으로 봐선 벌써 내려갔어야 할 이들이 안 내려가고 버티는 개탄스러운 현실"이, 이 힙합 씬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힙합 장르가 그만큼 예인(藝人)으로서 진입 장벽이 높은 바닥이라는 뜻도 됩니다.

이 챕터에서는 일곱 명의 "반면교사, 혹은 실패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그 중 주목해서 읽은 건, 1990년대 초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어 "검고 귀여운 아이돌"로 자리를 굳혔던 크리스크로스의 사례입니다. 히트 곡 하나 내고빤짝하다 잊혀진 스타를 영어로는 "원 히트 원더"라고 합니다. seven-day wonder라고 해서, 수명이 길지 못하고 금세 활력이 시드는 현상을 비꼬는 말로예전부터 쓰던 표현을 변형 응용한 거죠. 크리스크로스는 흑인이지만 흑인의 발성을 내지 않고, 요새 에미넴이 10대로 어려진 듯 유쾌하고 감각적인 랩을 즐겨구사하던 "아이돌의 전형"이었습니다. 근데 힙합이야말로 아이돌의 설 자리를 용납하지 않는, 오로지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는 분야임을 증명하듯, 정말 그 초기 음반 몇 이후로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그들 듀오의 짧은 후일담도 참 씁쓸한 내용이라, 한때 좋아했던 팬으로서 마음이 영 그렇더군요. 다른 음악 장르를 다룬 분석서나 역사서는 보통 성공한 뮤지션들의 화려한 퍼레이드만 명예의 전당처럼 꾸미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Hall of Shame도 이처럼 공간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는 점이 특이했어요. 덕분에(?) 그들의 근황도 알게 되고 말이죠.

남부 힙합이라니 이건 뭐 얼핏 듣기만 해도 형용 모순 같고(왜인지는 미국 역사의 배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웨스트/이스트 코스트가 있을망정 거기에 타 방위를 하나 더 끼워 넣는 건 마치 서편제/동편제 외에 남편제라는 듣보잡 장르를 들이대는 꼴입니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힙합이 메인스트림에 포함된 이후(심지어 커머셜 힙합이 따로 생긴 마당에), 남부 힙합은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확고하게 정착시켜, 이제는 시장의 첨단 유행을 선도하는 귀한 손님으로 이 바닥에서 대접 받는 위상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170년 전 남북 전쟁 당시 중앙정부에 항거한 반란군 남부 세력이 독립하며 내건 깃발 "남부연합기"가 최근 인종 테러 사건 관련 새삼 주목을 받게 되어, 나치 문양처럼 그 사용이 법적 제재 대상으로 추락할 듯한 움직임을 상기해 보십시오. 이건 그만큼 남부에서 (종래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흑인들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이 성숙기에 접어 들어, 어느 정도 보편성까지 획득해 가고 있다는 증좌입니다. 여기에 히스패닉 인구의 폭발적 증가도 크게 기여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의외로 대학까지 졸업한 고학력자"라고 재밌게 소개된 릴 웨인의 음악 역정이 담긴 p116 이하 10장의 내용을 보십시오, 그 제목은 "남부 꼬맹이의 3차 성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의 매력이, 이런 인문적 스타일, 레토릭이 서술 맥락 곳곳에 자연스럽고 적확히 끼어들고 있는 그런 여유, 필력, 너른 시야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자평대로 어딘가 G드래곤을 연상케도 하는 그의 부상과 롱런 과정은, 역시 실력과 대체 불가능한 감각(feel)이야말로 장르 불문하고 뮤지션의 성공 비결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다시 내리게 돕더군요. 아울러, "전혀 아닌 것 같았던" 남부 힙합도 결국 저렇게 장사가 되는데, 그렇게나 기능도 빼어나고 열의도 엄청난 "코리언 힙합"은 왜 (비보이 경연대회 등을 제외하면) 본바닥에서 대우가 그 모양인가? 이런 의문이 다시 들었습니다. 결론은, 특히 예술에선, 모방보다는 창의가 중요하다는 것. 우리 색깔(어느 방향이 되었든)이 이제는 나올 시점이 되었다는 것.(.....)

이 책(특히 1권)에서 비프음(?)으로 가려진 ni**az (with attitude) 등은 (NWA로 꽤 유명하지만 한국에선 도통 모르는 분도 많죠), 원어가 nigga입니다. 비하적 표현이고 강도가 그 중에서도 좀 쎄기 때문에 아예 저 표기로 굳었습니다(당사자들이 자청헤서 저 표현을 쓰면 그만큼 더 반항적 느낌을 풍깁니다). "씬"도 참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구태여 옮기면 "(이) 바닥" 정도가 되겠습니다. "디스"는 diss라고 아예 독립적 표기를 쓰는 게 더 낫고, disrespect보다 disparage가 그 어원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게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저자들의 느낌과 개성이 잘 드러나서 더 매혹적인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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