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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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호승 시인의 이 산문집은 모습을 조금 달리해서 이미 세상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 언급이 낀 글도 보이는 점으로 봐서 최근에 쓰신 글 여러 편이 업데이트되었음은 눈에 바로 들어옵니다. 구판에서 어느 글들이 빠지기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객체로서 텍스트상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시인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 내 자신이 그간 얼마나 변했는지 더 실감할 수 있었던 독서였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이미 우리 셈법으로 예순 다섯. 넉넉히 노인으로 대접받으실 만한 연세입니다. 시인께서 예전에 쓰신 글 중에는, 성철 스님을 지척에서 뵙고 말씀을 나눈 기록도 있습니다. "큰스님이 열반하신 지 십 년...."이란 대목에서, 당해 기록의 연대를 우리는 어림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꽤 이른 나이에 등단하신 편이고, 시인 스스로도 고백한 적 있지만 "특별히 시대를 앞서가거나 하진 않은", 치열한 현실참여와는 조금 거리를 두신 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대표 산문을 엮은 이 책의 내용 곳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그 유명한 안치환의 노래 가사 한 구절인 이 책 제목(시인이 직접 작사)만 봐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알게모르게 시대의 아픔을 느낀 흔적을 그의 활동 자취 곳곳에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 이 책 구판을 읽을 때에는 "시인은 산문을 써도 이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쓰는구나." 같은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잖게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시인은 당신의 생에서 의외로 아픔이 많으셨고, 그 아픔을 글에다 가감없이, 부끄러워할 것 없이 절절하게 표현을 하셨더랬구나, 이런 생각이 더 먼저 들더군요. 시대의 어둠과 모순에 아파할 줄 아셨던 시인(시인이란 직분의 본 정체성 중 하나겠죠)이었지만, 개인사 곳곳에서 마주친 그 모든 일상의 더러움, 한심함, 그리고 인간 존재 본질에서 빚어지는 악함에 대해, 시인은 우리 평범한 독자들과 다를 바도 없는 여리디여림으로 그 느낌을 털어놓고, 애써 강한 척할 것 없이 영혼의 비명을 그대로 지르고 있었습니다.

 

독자로서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시인은 가톨릭 신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희생, 깨달음, 순명,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을 마치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 인간 예수의 삶에 대해, (한때의 사정이지만)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대목은, 성인(聖人) 비슷하게 저자를 대해 왔던 그의 팬에게는 참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이 글도 예전 판에 수록되어 있었을 텐데 왜 그땐 보지 못했을까요). 이 책에 쓰인 대로, "예수는 성자(聖子) 이전, 사람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그 길지 않은 생애 동안 확실히 보여 주고 떠난" 분. 그런데 그 모범이라는 게, 남아 있는 우리들이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실천이란 말입니다. 이러니 어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이처럼, 인간으로서 발가벗은 정직한 고뇌를 한때 가졌었고, 그 생각한 바 아파했던 바를 지면에다 독자를 향해 적나라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따라못할 바를 과제로 잔뜩 안기고 떠난 인간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신으로서 섭리한 바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십자가라는 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 십자가만 이렇게 무거워야 합니까? 왜 내가 처한 환경만 이렇게 가혹해야 합니까? 아마 해당 신앙을 간직한 많은 신자분들도, 이런 못된 반항을 단지 입 안으로나마라도 되뇌고 퍼붓고 울부짖은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으실 겁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도 몇 배 늘려 느낄 수 있는 시인이기에, 시인 자신의 운명그 부조리에 대해서만 담담하길 기대하는 건, 어쩌면 십자가에 달린 동안 예수에게 조금도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길 요구하는 바나 진배없는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지극히 이기적인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영혼 그 안식을 구하는, 범속한 우리들이나 즐겨 찾을 법할 도피적, 편법적 힐링을 꾀하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게 없고 가난하다 여길 때, 역사(驛舍) 주변에 모여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맹인들의 모습을 보라고 합니다. 어떤 맹인은 상점에서 파는 굵기의 두 배나 되는 김밥(시인의 짐작으로는 그 아내가 말아 준)을 먹으며, 그 고달프고 모욕적인 현실 중에서 잠시나마 아픔을 잊습니다. 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저렇게 극한의 궁핍과 불편 속에서 생의 연명을 도모하는 이도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소한 기쁨과 일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경이로운 신의 축복인가?

 

두 다리가 없는 걸인도,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 유난히 많이 모인 참배객들이 그날따라 후하게 베푼 선심 덕에, 평소의 몇 달치 벌이를 구걸함에 성공하고 행복한 미소를 띱니다. 대각 성인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통해, 우리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자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인생이 다 그런 바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걸인은 남들과 달리 자신의 하반신에 달리지 않은 두 다리에 대한 아쉬움을 까맣게 잊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상대적 궁핍 같은 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하게 떠들며 나누는 환담 속에 어느새 완전 망각의 영역으로 던져 버립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그토록 불편해하고 못 견뎌하는 물질적 결핍은, 우리 자신이 영혼에다 근원적으로 떠안고 있는 정신적 결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진대, 우리가 일상에서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잊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자신의 과실로 수도관을 터뜨려 놓고는, 도리어 샘퉁한 얼굴로 "피해가 있으면 배상청구하세요."라며 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어느 이기적인 아줌마. 아마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적반하장"과 "역지사지"가 뒤섞여 "역반하장"이란 실언을 하고, 그 실수를 이 후안무치한 이웃에게 교정받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자기 책이 모두 젖어 못 쓰게 된 봉변과 함께, 인간으로서 최소 공감대까지 말살해 버린 듯한 사람과의 이 황당한 체험이 이후까지 얼마나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또 인생입니다. 돈이 없어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고, 돈이 없어서 마음에 안 맞는 자와 벽을 사이에 두고 참아 내며 살아야 합니다. 시인의 이 두껍고 아름다운 산문집에는, 소재로서 비루하고 구차한 우리네들의 일상이 가감 없이 녹아들어 있는지라,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삶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들에게, 그 짊어진 십자가를 경건한 일곱 빛으로 채색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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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3, 암의 비밀을 풀어낸 유전자
수 암스트롱 지음, 조미라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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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권 저자들의 과학 관련 주제를 잡은 대중서를 보면, 건조한 화제 외에 "인간, 인간들의 활약"을 항상 그 서술의 중심에 배치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 저자들의 사려깊음에 대해 언제나 감탄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버트 쿡 디건의 명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그렇습니다. 자끄 모노의 <우연과 필연> 같은 세기의 걸작 역시, 과학으로부터 인간을 먼 거리에 떨어뜨려 놓고 보지 않으려는 그 심원하고도 도덕적인, 오랜 전통의 인문적 사고가 낳은 아름다운 옥동자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 역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인류를 괴롭혀 온, 가장 무서운 질병인 암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 - 빼어난 두뇌, 성실한 품성 모두를 갖춘 모범적이기까지 한 - 이, 사투를 벌이며 감동적인 릴레이 투쟁(그  외관이야 학문적 연구라는 우아한 모습입니다만)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저 책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읽은 과학 대중 르뽀 그 명예의 전당에 기꺼이 올려 놓고 싶습니다.

 

이 책 7장에 나오는, 한때 거의 p53 유전자의 세계 최초 발견자로 공식 인정될 뻔했던 바르다 로터 박사(여성입니다)의 경우, 그 어린 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집에는 (엄마 말고) 아빠, 그리고 p53이 있어요." p53의 연구에 전 일생을 걸고, 청춘의 정열, 장년의 노숙함 그 모두를 바친 어느 과학자의 개인사가 어떠했는지, 단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워렌 말츠만 같은, 젊은 나이에 너무 시대를 앞서가 동시대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학문적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묵살된 비운의 청년은 또 어떻습니까. 어떤 주제에 대해 당대 최고 수준으로 통달하려면, 그 주제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주어서는 안 되는, 거의 전면적이라 할 헌신과 봉사가 필요합니다. 그런 후에도 그에 합당한 보상(명예, 평판, 부귀)이 주어지라는 보장이야 또 없습니다. 오히려 질시와 폄하에시달려, 탄탄한 커리어가 꺾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뿐입니다.

 

p53이 뭐냐면, 처음에 세포에 기생하는 어설픈 작은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 본격적으로 악성 종양, 암덩어리로 자라나, 우리 인간이 "암"으로 인식하게 되는 실체로 그 흉악한 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 무렵, 이 녀석의 암으로서 완성된 생장을 척 하고 나타나 가로막는 걸로 알려진, 우리 인간에게는 흑기사와도 같이 고마운 체내 단백질, 혹은 고유의 유전자입니다(인간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즈, 페스트를 비롯한 온갖 치명적 질병은, 그 원인이 바이러스나 세균 등 외부 생명체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미 퇴치가 이뤄졌거나 그 정복이 눈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러나 암은, 이 병들보다 역사상 그 등장이 훨씬 오래 전부터 관측되었고, 그 무엇보다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원흉임에도 불구, 그 정체를 도무지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p53이 암 정복을 돕는 데에 핵심 인자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우리 선입견과 달리 훨씬 이전부터 과학자, 연구자들에게 아이디어로서 떠올라 있었습니다. 분명, 유의미한 다수 환자들의 개별 사례에서 이 p53은, 암 발현단계에서 그 억제의 청신호적 공통 분모로서 어느 경우에나 눈에 띄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만 해도 분자생물학적 기반, 인간 DNA 구조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대단히 취약하여, 이것이 종양억제자라는 생각을 연구자 다수가 지지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암이 유전"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콧방귀를 뀌던 시절이었다는 거죠. 이래서 p53은 성배, 총아와, 천덕꾸러기, 맥거핀의 두 극단을 지난 반 세기 동안 오간 것입니다.

 

이 책에는 p53이라는 고지, 혹은 원군인 프레스터 존을 찾아, 가망 없어 보이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실낱 같은 가능성만을 붙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사명감과 열정만으로 그 우수한 두뇌의 모든 자원을 한 분야에 쏟아 넣은,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의 열전이 감동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암 정복이란 오랜 난제가 이제 그 완수를 카운트다운만 남겨 놓았다 할 지금, 우리는 "1등만을 기억하는 속물적 천박함"을 버리고, 우리 인류가 지금처럼 안온한 복지를 누릴 수 있게, 무대 뒤에서 분투한 그 숱한 연구자들의 희생과 감투 정신을 기릴 여지를, 우리 마음 속 기념관의 중앙부에 반드시, 겸허한 자세로 마련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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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 2 - 시크릿 스피치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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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롭 스미스는 자신의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는 독자를 내내 확실하게 고생시키다가(까다로운 문장으로가 아닌, 주인공의 혹사를 통해서),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의 기대를 역시 저버리지 않는 정의로운 영혼"으로 복권하는 재주를 통해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슬픈 쾌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 2편에서는 역시 충격적인 인트로를 통해, 러시아 민중의 정신 세계를 오래 지탱해 오던 종교란 요소를 끌어들여, 공산주의 체제가 얼마나 반인도적 방식으로 민중의 해방이 아닌 그 철저한 예속을 꾀했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연작이 21세기 아닌 직전 시대에 출간되었다면, 일방적으로 상대 진영을 비난, 폄하하는 블공정한 반공물이라며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겁니다.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수십 년이 지난 시점, 그에 대해서라면 마치 나치 독일처럼 이미 철저한 단죄가 이뤄지고 난 후의 사정이라, 이제 마음놓고 "던전"의 배경대유로 이처럼 쓰일 뿐 이념적 함의가 작품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음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서두는 지난 1편보다 더 충격적 삽화로 채워집니다. 여기서 사제가 왜 반려자를 두고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러시아 정교는 본래 대처를 허용합니다(장려하지는 않지만). 제자(...) 막심을 인간적으로 무척이나 아낄 뿐 아니라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신심, 헌신도도 지극히 깊은,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모범적 인격자형 사제 라자르는, 그러나 그 제자에게 이중의 배신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이 막심에게 아내 아니샤를 유혹당하고, 나중에는..... 그렇죠. 이 막심은 MGB의 끄나풀이었던 겁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던 장면, "너희들, 조국과 인민의 배신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면서 비밀 경찰이 들이닥치고 무지막지한 구타, 구금이 이어지는 그런 소동이, 이 작은 아지트에서도 재연됩니다. 악질적인 배신자가 그 사이에 끼어, 배신도 모자라 체제의 주구로서 극악스런 언동까지 희생양에 대해 추가로 저지르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독자는 마음이 무한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 같습니다. "막심"이라는 (러시아에서) 흔한 이름을 가진, 외모도 잘생긴(이게 힌트였습니다) 청년이 스승과 상급자에게 이런 저열하고 패륜적이며 인간 사는 세상에서 지극히 예외적이라 할 추악한 배신을 행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청년은 젊은 시절의 레오 데미도프였습니다. 독자를 엿먹이는 진짜 반전은 바로 여기죠.

레오 데미도프는 1권 <차일드 44>에서도, 유능할지는 모르나 질이 아주 나쁘게 보이는 방식으로 체제에 충성하는 공무원으로 인트로에 등장합니다. 체제가 나쁘지 그 부속품인 사람이 나쁜 건 아니라고 변호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감싸 주기엔 그가 상황 속에서 저지른 개별 행동이 너무도 잔인하고 집요하며 반인도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의 어린 두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깁니다. 타인의 어린 시절에 입힌 정신적 상흔이, 이후 당사자가 성인으로 자라난 후 그가 속한 사회에 어떤 식으로 잔혹한 복수를 행하며 그 근본의 응보율이 실행되는지는 1권 전체의 핵심 서사로서, 우리 독자가 이미 충격적으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이 2권은 그보다 훨씬 전, 아마도 2차 대전(즉 소위 "대조국전쟁")이 종료된 후 국가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레오 데미도프가 공명심과 부풀려진 자아에 도취되느라 아마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무렵일 겁니다. 이런 자가, 또 한 번 영웅의 연단에 높이 세워질 수만 있다면, 그 친부모인들 당국에 고발하여 그 불건강한 허영을 충족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이 시절 레오는 그처럼, 젊은 혈기와 광기어린 국가관이 서로 섞여, 그 눈에 뵈는 게 없는 완장질 중독 괴물이었던 형편이었습니다. 한때마나 이런 썩은 영혼에게 지배받은 자를 두고, 우리 독자는 계속 주인공으로서 신뢰를 보내야 할지 여부를 놓고 심각한 갈등에 빠지는 게 당연합니다. 지지해 줄 가치가 없는 캐릭터에 대고 애정을 퍼붓다 (라자르처럼) 나중에 무슨 배신을 당하게요.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 새삼 생각나기도 합니다.

1권에서도 숱한 과오를 저지르다 마침내 바른 길로 (다소 영악한 방법을 써서) 접어드는 레오는, 이 2권에서 그의 원죄 중 하나를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1권에서 두 아이의 부모를 앗은 죄에 대해 마음 속 깊이 통회하던 그는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일뿐입니다. 국가의 명령에 의해 행한 결과를 두고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건 바로 당성(黨性)의 결핍 증명이요 반역행위이기 때문이죠) 두 아이를 입양하여 친부모처럼 사랑을 베풀려고 합니다. 허나 이도 여의치 않아서, 그와 처 라이사는 은밀하고 끔찍한 개인적 시련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1권에서 "아 왜 레오는 자살하지 않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주인공을 죽일 수 없는 상업적 고려에다, 독자에게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안기려는 미학적 고려가 함께 작용한 덕입니다) 이 2권에서는 레오 외에 다른 인물들이, 주로 과거의 행적에 대한 죄의식을 못 이겨 속속 자살하는 설정이 나옵니다. 마치 셜록 홈즈처럼, 레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상을, 증거와 논리로서 시원하게 밝혀내는 활약상을 짧고 강력하게 초반에 보여 주는데, 이 역시 1권의 장치와 일관성을 유지하는 부분입니다.

레오는 명철한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인물이라,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사태의 비극적 진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다 하는 확신이 (논리적으로) 다가오면, 망설임 없이 전면 수용하는 게 레오입니다. 아내 라이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러나 레오는 말을 아끼고 또 아낍니다. 저 위 아니샤의 유혹은 아마도 이런 라이사를 만나기 한참 전에 이뤄진, 젊디젊었던 시절 또 하나의 과오일 뿐입니다.

이 2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속죄"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주인공을 끼고 살 필요 있나?"하는 회의감을, 이 2권에서 레오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그리고 가혹한 실천에 기반하여, 더 이상 독자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지 않게, 자신의 죄과와 함께 말끔히 씻어 줍니다. 혹 1권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감정이 남아 있던 분들은, 이 2권까지 마저 읽어 보십시오. 레오 데미도프 시리즈가 단순히 상업적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는 각성이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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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 1 - 차일드 44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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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유를 단 한 번도 누려 본적이 없는 영혼이라면, 모든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야 하는 극한 상황 속이라 해도, 그 가혹한 조건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긴 이는 모든 상황적 제약이 풀린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사치스럽게 행하는 자기 기만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만약 수양제 시절의 농민 신분으로 살게 된 우리라면, 대운하 건설 노역장에 동원된 처지에서 물에 잠긴 내 다리에 구더기가 들끓은 채 썩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과연 현장에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권력에 반항이라도 한번 해 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분연히 봉기의 대열에 가담할지, 아니면 당장 눈 앞의 채찍이 무서워 그저 타성대로 묵묵히 벽돌을 나르게 될지, "사고 실험"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이니까요. 그 상황에 실제 처해 보지 않고서 나오는 모든 "의지의 표명"은, 그게 아마도 타인과 자신을 기만하는 언사일 확률이 매우 높으니 말입니다.

구판으로 처음 읽을 때는 현대 스릴러의 공식에 맞춰, 전체주의 국가 체제가 발동할 수 있는 최악의 감시, 탄압 조치 속에서, 정의롭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레오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중 가장 영리하게 돌아가는 그의 두뇌 작용 등이 결합한, 영웅적 투쟁의 서사로 이 작품을 이해했습니다. 국가는 이미 충성스러운 국민의 신뢰를 철저히 배신한 바 있기에, 앞으로는 그에 대한 람보 식의 복수만 남았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이 신판으로 다시 읽어 보니, 그런 고독한 영웅의 투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큰 억지나 무리도 아니고, 또 그런 모럴에 입각한 독해라야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겠지만, 마냥 그렇게 읽기에는 레오 데미도프가 너무 나가는 면이 없잖아 있더군요.

레오가 고비를 맞닥뜨릴 때마다 취하는 결단과 결행은, 사실 아무리 그것이 타협적인 성격이라 해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현실화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아내를 두 번 배신하고, 한 번 (그런 결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제약 속에서) 지켜 줍니다. 후자에서 독자는 "과연 주인공이 될 자격이있었군!" 하며 감탄하나, 전자에서 "이런 사람도 사람 구실을 포기하며, 구질구질한 연명을 택할 정돈데!"하며 (순서대로) 절망하게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저는 제 방식대로 조국 소비에트에 충성하겠습니다!"를 외치는 레오의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기막히게 영리한 체제 반역(동시에 보편적 휴머니티에 대한 충성)을 꾀하는구나 싶었는데, 지금 제2권 <시크릿 스피치>를 다 읽은 시점에서 보기에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그 역시 확고부동한 스탠스를 고수하는 게 아니라, 가혹한 외부 조건의 칼날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겁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지난 구판 리뷰에서 "어린이 살인마"의 정체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며 작품 감상을 적었지만, 이 작품 <차일드44>는 탐정(?)과 범인 모두, 명확하게 비인도적인 환경의 희생양이며, 두 사람 다 그런 외적 조건에 맞서 정면 타파를 위해 투쟁을 전개하기보다는, 타협이나 자기 파괴를 시도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 독자의 마음을 내내 불편하게 합니다. 연작에서 계속 출현을 이어가는 레오 존재의 개연성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으나, 아마도 이 작품(시리즈)은 전통적인 영웅담의 성격만이 아닌 "잔혹 리얼리티 쇼"의 스타일도 같이 곁들여 꾸려진 듯 보입니다. 마흔 네 명의 어린이들 목숨을 앗은 범죄자뿐 아니라, 이런 체제 속에서 누구에게 고발당해 당국에 끌려갈 지 모르는 불안이 그 영혼을 좀먹어들어가는 평범한 시민, 그 강력하고 굳센 의지가 매 순간 모욕당해야 하는 주인공 레오 모두, 이미 존엄히 지켜져야 할 내적 세계가 치명적으로 파괴된 채 기껏해야 가망 없는 저항을 생물학적 충동에 의해 이어갈 뿐입니다. 이건 물론, 진부하고 통속적인 영웅담의 공식에서 벗어나, 이 작품만의 핍진한 개성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비결임에 분명하긴 하지만 말이죠....

이런 주인공의 행보를 지켜 보기 위해 연작 소설을 다 구해 읽어야만 하나? 깊은 회의가 밀려오는 분들은 일단 재미로 이 1권을 펼쳐 보십시오. 결말에 가서 피로와 극한 감동이 동시에 찾아오는 통에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될 겁니다. "이 작품은 대체 상업적 흥미, 영혼의 건전한 고양, 그 어느 쪽을 추구하는 의도였나?" 여전히 미심쩍으면 2권도 이어 읽어 보십시오. 그런 시도는 기껏해야 한 번으로 족할 것 같은데, 작가는 2권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더럽혀지고 추악해졌던 주인공을 다시 끌어내어 "영웅적인 채무 변제"를 수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채무란 도덕적 채무를 뜻합니다. 아동 살인마 스토리와 반인도적 체제 고발이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은 두 요소를 이처럼 성공적으로 결합하였으나,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두 번이 가능할까? 바로 그게 작가의 의도입니다. 두 번 세 번도 나에겐 이런 곡예가 가능하다는 걸 독자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 우리 독자들은 진정 임자를 만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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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
마이클 돕스 지음, 김시현 옮김 / 푸른숲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의 흑막은 세계 어디에서나 사정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의원 내각제라는 헌정 시스템을 확립한 나라죠. 형식적으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 직위에 머물러 있는 군주를 두고서도, 선거를 통해 뽑힌 다수당의 리더가 국가 살림의 실권을 쥐게 한 건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이었습니다. 이런 체제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고 근 한 세기가 지나서도 예컨대 대륙의 오스트리아 같은 곳은 여전히 전제정의 성격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며, 실세였던 메테르니히 재상 같은 이도 황실의 이익과 구체제 수호에 충성을 바치는 범위 안에서만 권력자였죠. 얼핏 보아 취약하기 짝이 없는 곡예와도 같은 의원내각제를 오랜 시간 동안 발전시켜 온 영국 헌정사는, 복잡다단한 이해 관계로 대립하는 제 세력 사이에서 막후 조율과 타협을 이뤄낼 수 있는 수완 좋은 리더들의 자취를 필연적으로 그 만신전에다 봉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벤저민 디즈레일리,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등이 그 예입니다(아무래도 시점이 보수당 인사들 쪽에만 위치하기 때문인지 역대 반대당의 당수들은 잘 거론되지 않더군요).

대처 전 수상(이 책에서 유일하게 실명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이 민심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보수당은 그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집권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이 집필 당시 시점에서 근미래를 설정했다고도 보지만, 여러 정황상 이 작품은 1992년에 치러진 영국 총선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맞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에선 선거 당일 며칠 전부터도 집권당의 승리가 점쳐졌고, 방송사 주관의 출구 조사에서는 3,40여 석 정도의 차이로 이기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걸로 설정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투표가 종료되고서야 보수당의 승리 결과가 알려져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지요. 의석 수가 종전 140석 차이에서 60여석 차이로 급격히 감소한 것도 소설 속의 가상 세계와 비슷합니다. 소설에서는 프랜시스 어카트 원내 총무(이제는 원내 대표라는 번역어가 더 좋을 것  같지만)가 서리 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선 존 메이저 총리가 서리 출신이기도 합니다.

존 메이저 총리를 모델로 삼은 듯한 작중 캐릭터는 헨리(할) 콜링리지입니다. 화자인 어카트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의 규칙을 바꿔 나가기보단 교활하고 좀스럽게 순응해 가며" 그 자리에 오른, 별반 평가해 줄 것 없는 그릇 작은 인물에 불과합니다. 요즘처럼 매스미디어가 비정상적 권력을 행사하는 현실 속에선, 콜링리지처럼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이 수상 자리에 번갈아 오를 뿐, 나라의 틀을 건강한 방향으로 과단성 있게 몰고갈 만한 걸물들은 그 전 단계에서 번번히 좌절할 뿐이라는 거죠. 처칠이나 로이드 조지는, 요즘 같았으면 신문과 방송의 집요한 공세에  벌써 낙마하여 야인 신세에 평생 머물렀으리라는 게 그의 전망입니다.

콜링리지를 두고 "대단히 재미없는 인물이라 그의 부인도 아마 다른 데 찍었을 것"이라는 게, 대중의 평판을 대변하는 눈치 빠르고 화통한 스타일의 여기자 매티 스토린의 신랄한 단평의 형식으로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존 메이저 총리를 두고 세간에서 찧어대던 입방아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곡마단 곡예사의 아들인 메이저 총리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자신과 아주 다른 길을 걸으며 가업을 이으려 노력했으나 성과가 좋지 못했던 무능한 형을 둔 점도 콜링리지가 메이저 총리와 닮아 있는 대목입니다. 성품이 악하지는 않으나 룸펜처럼 인생을 허송하던 형의 존재라는 약점을 냉큼 잡아, 이후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패로 활용하려는 어카트 총무지만, 당장은 실세인 총리에게 그 명백한 실책을 두고서도 직언을 삼가며 꼬리를 내리는 모습은 독자의 고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언플"이란 말이 요즘은 주로 연예기획사의 행태를 두고 쓰이지만, 과거에는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특히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씨의 장기였죠) 주로 정계에서 널리 구사되던 술수를 두고 비꼬는 용어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에도 언론사는 정치 게임의 유력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정치인과의 오프 더 레코드 회동을 통해 다음날 기사의 핵심 소재를 잡고, 웨스트민스터 街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는 모습은 이미 플레이어 레벨을 넘어섰다고나 해야겠습니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교과서적 평가가 무색할 정도죠.

어카트는 민간 홍보 회사 대표 오닐을 통해, 그의 오랜 지기이자 반대당 의원인 켄드릭에게, 집권 내각에 치명적일 수 있는 정보를 고의적으로 흘리게끔 공작을 벌입니다. 어카트는 원내 대표라기보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구 안기부장에나 해당할 만큼 자당 의원들에 대한 각종 약점을 잡고 전선 이탈을 막는 데에 노련한 술수를 구사하는데, 오닐은 민간인이지만 보수당의 하청 업체로 사실상 오닐은 당내인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마약 상용이 약점으로 잡혀 어카트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되는데, 이미 예순을 넘겨 정치적 야망이 조바심으로 변한 어카트는 마지막 용틀임으로 대권을 넘보는 터라, 수단의 청탁을 가리지 않고 휘두를 만큼 코너에 몰려 있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야당이라고 상황이 다를 바 없어서, 결국 이해관계의 궁합 여부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모습은 당의 경계를 따지지 않습니다. 출구 조사 결과 발표 후 웨일즈어로 욕설을 내뱉는 반대당 당수는, 실제로 웨일즈 출신에다 거침 없는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던 닐 키녹을 모델로 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실제 영국의 정당사와 숱한 추문을 알고 읽으면 재미가 몇 배로 늘어나는 멋진 풍자소설이며, 현재 미국 넷플릭스 신디케이트로 방송되는 케빈 스페이시 주연 미니시리즈는 배경과 설정을 미국식으로 통째 번안한 작품입니다.

 

처칠은 이런 명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체제다. 하지만 현존하는 그 어느 정치 체제보다도 나은 제도이다." 이 책 뒤표지에는 "민주주의는 과대평가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21세기에 접어들고도 우리는, 가장 안락하게, 건전하게 의존해야 할 정치시스템을 두고서도 최소한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한심한 정치 모사꾼들의 부패한 행태가 보기 싫어서라도, 이제는 다른 대안 모색에 나서야만 하는 전환점에 도달한 걸까요? 히틀러의 변덕에 국민의 생사가 좌우되는 폭압 행태에 비하면, 그래도 이런 "소인배"들의 잔머리 굴리기 게임이란, 차라리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는 것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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