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사춘기 고민 상담소 - 성장욕구와 매너리즘 사이에 낀 직장인들을 위한
최현정 지음 / 팜파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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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라는 게,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 할 상황에서 그렇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는 현상을 두루 가리키는 대유입니다. 평생 직장의 신화가 무너지고, 임원으로 승진하여 느긋한 관리직으로서의 여유를 누리기는커녕, 당장 내일의 자리 보전도 걱정해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린 직장인들에게, "사춘기"는 10대 시절에도 겪어 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당사자를 괴롭히는 갈등과 불안정의 근원으로 작용합니다. 봄 춘(春)이란 단어가 주는 한편의 희망과 낭만과는 전혀 무관하게, 좌불안석 직장인들이 오늘도 마음에 두는[思] 바는 살벌하게도 진퇴의 여부이며, 스잔한 인생의 가을[秋]에 버려지는[捨] 걱정입니다. "버틸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을 때, "아직 내 나이가 이 정도로 젊은데 어딜 가서 뭘 못하겠어!"라며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는 상상은, 때로 안 먹어도 사람 배를 부르게 하는 낭만과 흥분을 부릅니다. 하지만 거리에 빈 몸으로 던져진 후엔, 후회와 미련이 당사자를 엄습하리라는 게 저자의 의견입니다. 구체적인 퇴사 후 계획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표는 그저 마음 속으로만 쓰고 간직하는 게, 경우를 가리지 않고 온당한 선택이라는 게 거의 확정된 결론입니다.

일 못한다고 다그치기만 할 게 아니라, 그럼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 업무 수행인지 구체적으로 지시해 줬으면 좋겠다는 게 많은 부하직원들이 현장에서 깨지고 난 뒤 갖는 마음이겠습니다. 어떤 상사는 이처럼 무력화된 부하의 심리에 파고들어, 이후 뭘 하든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 드는, 일종의 소시오패스 기질을 발휘하곤 하는데, 이게 물론 아랫사람을 키워 준다거나 건전한 인맥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여튼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런이런 시도를 해야한다"며 다소 야멸찬 팁을 제시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하면 "상황이 이러이러하지 않아요?"하고 독자를 말 없이 다독이는 쪽입니다. "희망쌤"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솔직히 답이 없는 상황을 무리해서라도 타개하려 들기보다, 의욕을 북돋워 주면서 주위와 원만하게 타협해 나가라는 취지로 해석됩니다.

저자의 현실적인 이런 기조는 책 한참 뒤인 p142에서도 이어집니다. "한번 열외가 되면 일종의 주홍글씨가 찍히는 셈인데, 프로스포츠에서 2군으로 밀려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규정합니다. 못하는 선수를 후보군으로 보내면 그 선수를 며칠 간은 콜업하지 못합니다. 이때 선수에게 자신감마저 떨어지고 나면, 사실상 그는 거의 영원히 응달에 머물러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결국 낙오하면 당신 손해!"같이 매몰찬 독촉을 하기보다, 문장 어딘가에서 묻어나는 따스한 도닥임을 베풀어주는 게 특징입니다. 하긴 코너에 몰린 이들에게 살벌한 콜드 터키 요법을 강행하기보다, 이처럼 따스한 말 한 마디로 어깨를 풀어주는 게 훨씬 현실적인 처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당신은 괜찮아!"를 주입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냉정하게 자신을 객관화해서 관찰하고 점검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올 뿐이라고 지적하는 건, 이 희망쌤의 태도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p184를 보십시오. 일단 다니던 회사 밖으로 나와 재취업을 시도할 때, 지원자는 철저히 "그 회사의 채용담당자" 입장에 서서(역지사지) 전략을 짜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대의 입장과 질문을 가상 설정하여 자신에게 던졌을 때, 그 나오는 대답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뭔가 시원시원하지 못하고 부정적이면, 현실적으로 그 분야 구직은 단념하라는 겁니다. (구인) 시장이 냉정히 평가하는 바에 거슬러 무리한 대시를 해 봐야, 결국 상처입는 건 자신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다시 처음의 충고("사표는 마음 속에만!")로 돌아가는 거죠. 희망쌤의 조언은 이렇게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말투가 다정하다는 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입니다.

협상의 정석적 스킬을 다 발휘해서 상대하는 데도 끊임없이 갑질만 일삼으며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이런 경우 그 사람 자체와 일을 분리해서 다루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흔히 하는 말투로 "Not personal."이라는 거죠. 이때 무력감과 패배감이 자신을 휩싸게 방치하지 말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이런 걸 보면, 현실적으로 직장인 대다수를 차지할 "일 못하는 대리들"을 저자가 얼마나 많이 상담해 오셨고, 그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힐링의 대가라고 하겠습니다.

"스트레스는 해소하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것." 이런 말도 참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어느 정도 불변 상황인데, 받는 스트레스가 설사 일시 해소되었다 한들, 다음날이면 또 같은 프레셔가 당사자를 짓눌러 오지 않겠습니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만, 스트레스와 싸우려 드는 것만큼 가망 없는 계획도 없다는 게 저자의 입장입니다.

멀티맨이란 말이 좋아 멀티맨일 뿐, 사실 처량하고 고달픈 처지입니다. "감초 같은 조연" 역시 능력과 수고에 비해 제 대접 못 받는 현실을,  그 말 안에 스스로 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겠고 말입니다. 저자는 명성 "희망쌤"답게, 조연으로 부지런히 뛰다 보면 언젠가는 주연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어깨를 토닥이고 있군요. 그 말씀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얼마나 위력을 발휘하건, 이런 따뜻한 조언이 많은 회사원들에게 추운 어깨를 감싸 주는 바람막이 구실을 해 줄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찬바람을 헤치고 험한 거리를 개척해 나가는건 결국 당사자 본인의 몫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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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이야기 - 천 가지 역사를 품은 살아 있는 도시
미셸 리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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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처럼 제목이 <런던 이야기>라고 붙었을 때, 독자는 정말 런던에 대해서만 장대하고 두툼한 서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런 책이란, 1) 시간적으로는 이 도시가 터를 닦은 먼 고유의 태초부터 지금까지를 커버하며, 2) 특히 공간적으로는 주제에서 일탈함 없이 엄격히 런던과 그 위성구역들이 이루는 벨트만을 공전하며, 이심률을 최소화한 채 서술의 기조가 유지되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책이 쓰여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1)지난 역사를 신나게 설명하다 보면 서술의 관성에 의해 현재로 급선회하기 어려워, 결국 과거의 회고에 머물게 되고 2)그러다보면 주제는 결국 "런던의 역사"란 탈을 쓴 "(흔한)영국의 역사"가 되어 지금까지 나온 숱한 유서(類書)의 틀을 답습하기 십상입니다. 그렇다 한들, 독자는 어떤 책이 달고 있는 제목만 보고, 부모에게 장난감을 조르는 어린이처럼 자신이 기대한 모든 바가 해당 도서 안에서 그 해결을 보리라는 식의 무리한 희망을 가져선 곤란합니다.  대개 그런 경우, 아닌 줄 뻔히 알면서 의도적으로 기대치를 높이 잡아, "내 기준에는 못 미침" 같은 블랙 컨슈머 형의 불순한 트집을 잡거나, 중국집에서 파스타를 주문하는 식의 비뚤어진 속물 심리가 작용하는 까닭이 크죠.



그런데 이 책은, 설령 그런 기대를 품고 접근한 독자라고 해도, 책이 달성한 성취 앞에 압도되어 정직한 만족을 표시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는, 재미있으면서도 속이 꽉 찬 그런 책이었습니다. 어떤 책이 재미가 있다 보면, 대개는 깊이가 부족하거나 부정확하고 빈약한 서술이 이어지기가 쉽습니다. 제대로 정석에 맞춰 역사를 쓰면 이번에는 아주 따분한 litany로 떨어지고 말거나, 인내를 시험하는 까다로운 형식 논증으로 돌변하는 게 또 골칩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그만큼 어렵고, 책 쓰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닐 터입니다. 헌데 이 책은, 정말로 두 마리 토끼를 (다소 이상한 신명의 장단에 맞춰) 잡아내고 있더군요! 이 분야 책을 적잖게 읽어온 독자로서 이는 드물고도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사실 비전문가, 비전공자, 게다가 한국인 저자의 솜씨라고 해서, 처음에는 오랜 체류의 경험에 바탕을 둔 "애정과 열정으로 전문성과 진지함을 대체한 책"으로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런 책도 저자의 열정이 바른 방향만 지키고 있으면 읽어 줄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아니라, 웬만한 전공자가 쓴 역사서보다 훨씬 가독성 높고, 속속들이 디테일을 이해한 깊이가 있으며, 무엇보다 저자가 "강렬한 집필 충동"에 끌려 시원시원 천의무봉으로 써내려간 게 확 눈에 띄는 책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의 논점으로 돌아가서, 이 책 제목은 <런던 이야기>입니다. 1) 런던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의 실상에 유기적으로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 그렇습니다. 2) 과연 "공간적으로" 런던에 초점을 넉넉히 두고, 할 말 없을 때 적당히 영국사 일반으로 우회, 퇴각하는 꼼수를 쓰진 않는가? -이 역시 '그렇습니다. '란 답이 바로 나옵니다. 솔직히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부정적이라도, 3) 읽는 재미만 있으면 용서가 됩니다. 어차피 대중서 아닙니까. 그런데 이 책은 1), 2), 3) 모든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었습니다. 독자로서 저는 그 점이 참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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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잉글랜드가 서로 구별되는 단위, 개념이듯, 잉글랜드의 심장이 언제나 런던이었을지언정 두 영역의 정체성이 언제나 한 방향, 같은 본질을 지니진 않았습니다. 예컨대 이 책에서, "거절 컴플렉스"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십시오. 색슨 족이 대거 침략해 들어왔을 때, 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는 "너희 살 길은 스스로 찾으라."며 런던 체류 제국 속민들의 안위를 보장하길 거부, 아니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설명이 "이때 버림을 받았다는 그 트라우마가 면면히 이어져, 근세에 이르기까지 反로마, 反 대륙의 정서가 이곳 주민을 지배하는 근원이 되었다는 설명. 물론 이게 저자 고유의 학설은 아니고, 역사심리학적으로 꽤 인기도 있고 연혁도 긴 입장입니다. 재밌는 건 침략자 색슨 족에 대해 품어야 할 원한이 엉뚱하게 종래의 종주권자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건데, 여튼 유독 반 가톨릭, 반 라틴 성향이 정치적 보수주의와 함께 (민족주의 자체보다 더) 깊은 뿌리를 내린 데 대한 재미있는 설명은 됩니다. 난립하는 학설들 중 용케도 이런 "매력적인 가설"을 뽑아내어 유효적절히 제 자리에 삽입한 저자의 센스가 돋보이며, (앞서 말했듯) 런던의 과거와 현재가 이처럼 매 장에서 긴밀히 대화를 나누게 하는 솜씨, 배려, 긴장도 마음에 듭니다.



유럽의 역사는 그 어느 나라의 사정이라도, 로마나 파리와 연계를 짓지 않고는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탈리아나, (왕권이 속속 미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프랑스 같은 게 아닌 , 로마와 파리(그리고 좀 지나서 빈) 같은 도시 단위가 그들 역사를 파악하는 데에 핵심 축을 이룹니다. 잉글랜드 아닌 (그 중심지) 런던은 이들(로마, 파리 등)과 같은 도시 자격으로 균형을 이루고, 그들과는 또다른 기류와 성향의 정치적 거점이었기에, 확실히 유럽사(영국사라고 해도)의 설명에 있어 든든한 발판 구실을 합니다. 이 책은, 앙주 제국 성립 이래 내내 서유럽 국제 정치의 유력한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확실하고 탄탄하게 그 족보의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완독한 후 "영국의 역사"로 넘어감은 물론, 서유럽사 개관을 도모하는 데 든든한 밑천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이 영국에서 노예로 잡혀 온 소년들을 두고 그 아랫사람과 Angle, angel 로 말장난(pun)을 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죠. 근데 이 시대에 영어가 유럽의 통용어(lingua franca)도 아니었고, 교황이 영어를 알지도 못했을 듯한데 신빙성이 클까? 이런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겁니다. 이 일화의 진위 판정은 별론으로 하고, 저 단어 둘 다 라틴어, 혹은 이탈리아 모처의 방언상으로도 발음이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모순이나 문제점을 드러내는 바는 없으며, 정황상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1999년작 미국 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에 이 소재를 활용한 장면이 있습니다.

가이 포크스란 인물의 평가는 언제나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할 위험을 안은 화제이기 때문에, 이를 거론할 땐 누구나 조심스러워져야 합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을 때도 신기하게 생각된 게, BBC 조사를 인용하며 이 인물이 30위권에 들었다는 이유로, 그 복권 혹은 재평가를 아주 자연스럽게(혹은 당연하다는 듯) 다루고 있으신데, 사실 상황에 따라선 분위기를 아주 싸하게 만들 수도 있고, 런던 외 지역에선 아직도 보수적 기풍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은 <런던 이야기>, 런던의 현 거주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는지에 더 초점을 두어야죠. 한때 비열한 반역자의 표상처럼 여겨진 가이 포크스가, 그래픽 노블 혹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화려하게 재조명된 것처럼, 이 책 역시 그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도 역시, 이 책의 장기로 (런던의) 과거와 현재가 밀접한 소통을 유지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영국 영화를 보다 보면 2차 대전 당시 이 나라 국민이 고강도의 내핍 생활을 견뎌야 했던 사정이 자주 나옵니다. 한국도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가 민생을 휘몰아치는 바람에 큰 고초를 겪었지만, 나치 독일의 공군이 시도때도 없이 도심, 부심을 폭격하던 런던 역시 사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독일의 전격전을 가리켜 반 고유명사로 "블리츠크릭(독일어입니다)"이라 부르는데, 이 당시 독일의 매서운 공격을 견뎌낸 런던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블리츠 스피릿(영어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 심각한 정치적 어조를 띠거나 사회학 담론 설교를 않으면서, 저자는 당시 생포된 독일군 군인에게 런던 시민들이 린치를 가하거나 하지 않은, 성숙한 정신의 발현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며 넘어가시는 이 모양새가 참 자연스러운 맥락을 형성해서 속으로 "이야기꾼이다" 싶었습니다. 어느 도시건 지하철 시설이 전시엔 일종의 방공 대피소 구실을 하게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BBC 영드 <셜록>이 다음 시즌에서 이 장소를 잘 활용해 줄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이 책은, (본디 재밌는 구석이 많긴 한) 영국사(런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를 두고, 단 한 대목도 심드렁하게 넘어가질 않고 활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사는 본디 정복과 피침으로 인한 격변이 빈번했고, 역사의 주체라 할 nation이 노르만 왕조의 도래 후에야 그 틀이 잡히는 등,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혼 중심" 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히 11세기 이전 역사는 초심자에게 전달하기 대단히 까다로운데, 이 책은 마술처럼 호흡이 매끄럽더군요. 그 이후 과정도 복잡한 정정 혼란기는 대표 인물 하나를 잡아내서 중심을 잡고, 안정기나 발전기는 반대로 시점에 변화를 줘 가며 공정성을 확보하고, 전공자도 아닌 분이 노련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감탄스러웠습니다.

책 말미에는 책 기획과  집필의 초심을 잊지 않으려는 듯, 런던 관광 명소 8곳을 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토종의 피가 흐르는 저자 그 영혼을 오롯이 뺏고 장악한 그 매혹의 도시, 세계의 한 수도 런던은, 아마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으로 웬만큼 미련 없이 독자의 마음과 머리에 담아 두고 넘기며 애무하고 음미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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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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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입니다. 물론 홍보대로 소설의 작가는 데니스 루헤인이고, 그의 평소 컬러대로 잔인하고 현실감 나는 묘사에다 보스턴 슬럼가의 약육강식 살풍경이 잘도 재현되어 있어, 이런 소재에 거부감 있는 독자를 제외한다면, 소설의 흡인력은 상당한 편이라 여겨집니다. 말미에 적당한 반전까지 있으니 끝까지 읽어나간 이들에겐 합당한 지적 보상도 부족하지 않게 주어지고요.

영화에서는 밥, 나디아 두 주인공 외에  커즌 마브의 비중이 큰 편이었는데, 소설을 보니 에릭 디즈가 마브보다 더 짙은 인상을 남기는 구조더군요. 밥은 우리가 잘 아는, 특히 한국인들이 좋아라하는 <인셉션>에서 강렬한 연기를 펼친 톰 하디가 맡았습니다. 만약 영화를 안 보고 이 원작을 펼친 독자라면, 밥에 대해 다소 흐릿한(물론 결말을 접하고 나선 전혀 그런 채로 남을 수가 없겠으나) 이미지만 중반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썩고 칙칙한 뒷골목에서 평생 살을 부비다 생을 마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교도소 복역 경력까지 있는 건달치고는, 그 매너가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고분고분한 것 아닌가, 뭐 이런 느낌이 소설 종반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나디아.. 작중 에릭이 평한 대로, 보스턴에서 흔한 이름은 아닐 것 같습니다. 쿨한 듯 사려 깊은 듯하면서도 한순간의 광기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무책임함, 역시 사악한 환경적 굴레로부터 몸을 빼겠다는 결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될대로 되라 식의 생활 태도.... 이런 그녀에게 밥은 숙녀에게 베풀 수 있는 최상의 예의를 (자기 딴엔) 갖추려 합니다. 동기는... 쉽게 말하자면 "마음을 동하게 하는 이성"을 보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뭔가 먼 과거로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는 부채 의식, 강박이 슬쩍 끼어들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나디아 역은 요 몇 년 간 이런저런 영화에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잘 팔리는 북구의 여인 누미 라파스가 맡았습니다. 둘 다 각자의 역에 근사하게 어울립니다.

에릭 디즈는 스스로 인정했듯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살인과 강도, 갈취로 생계를 잇고 도박으로 한탕을 노리는 구제불능의 악당입니다. 이 자가 이 더럽고 부패한 뒷골목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가뜩이나 불안정하고 한순간에 피비린내가 온 도시의 공기를 훅 감쌀 것 같은 분위기를 더욱 질 나쁜 단계로 몰아간다는 뜻입니다.

이 슬럼은 현재 체첸계 갱스터가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입니다. 소설 속에 그런 언급은 전혀 없지만, 몇 년 전 벌어졌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 테러 사건의 발생 경위와도 간접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체첸 인들이 기질 사납고 잔혹한 폭력을 불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소설은(그리고 영화도) 이 점을 유감 없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 읽은 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다분히 아이러니한 결말 때문에 이 스토리는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어울리는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헤인은 본디 <애니멀 레스큐>란 제목으로 단편을 발표했었고, 이후 보스턴 슬럼의 음울한 색조를 배경으로 강화하여 제목도 바꾸고 확대 개작한 겁니다. 이 장편 1장 소제목이 "강아지 구조"인 것도 그런 내력이 있어서구요. "드롭"의 의미는 여럿이 있겠으나 일단 이 소설에선 "드롭 바"가 첫째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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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평

, 개선점

- p259  밑에서 다섯째 줄의 10할

원문에는 10%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1할 이 바릅니다.

내용상으로도, 이 이자율이 로마 상류층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라고 뒤에서 부연하고 있습니다. 10할 이면 100%인데, 그런 가혹한 조건을 상류층에게 은행업자 따위가 적용할 수는 없죠. 제가 이상해서 원서를 뒤져 봤습니다.

 

- 이 1권에는 서한문 직접 인용이 자주 나옵니다. 단조로운 구성을 피하고, 우아한 만연투의 대사를 등장인물의 입에서 직접 나오게 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교유서가의 이번 판은, 서간문 내용에 대해 한 줄 들여쓰기 체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어가면, 들여쓰기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편지가 다시 서사로 전환되기 전에는요.

 

예전 한국어 번역본(대략 20년 전에 출간됨)에서는, 폰트를 아예 다르게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도 CTS 제작 시스템이 도입되었던 터라 가능했습니다.

 

-p348 맨 마지막 줄 울릭세스

저는 이 용어는  오디세우스로 바꾸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인들은 물론 울릭세스라고 불렀고, 아프로디테가 아닌 베누스, 그리고 제우스가 아닌 유피테르로 부르듯, 로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라틴어식 표기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격(deity)은 치환 과정을 거치고, 인명이나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즉, 둘은 경우가 다릅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이타카) 사람(물론 가공의 캐릭터이지만) 사람이므로, 한국 독자에게 친숙한 오디세우스로 적는 게 좋다는 게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  p 176 하단에 히페르보레오이 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우리식의 서방 정토(靜土)처럼 대유적 보편 명사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원어 그대로를 노출하고 그치는 건 좀 읽기에 껄끄럽습니다.

 

보밀카르 (아니면 전지적 화자)가 구태여 이 말을 쓴 의도가 뭔지, 역주를 통해 설명이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 의도는, 이 무지한 자에게 마우레타니아에서 왔든 아니면 저승에서 왔다고 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정도를 포함하고 있거든요. 참고로, 요즘 한국인이 많이 진출해 있는 모리타니가 저 고대의 마우레타니아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도 독자가 알면 더 흥미로울 겁니다.

 

- p285: 10 에서 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란 인명.

여기서 딱히 제가 이의를 제기한다기보다,

Gnaeus는 고전 라틴어 발음상 그나이우스에 가깝습니다.

어두의 g가 묵음이 되지 않죠.

 

나이우스는 영어식 발음이겠는데, 엄밀히 말하면 나이어스이겠으므로, 사실 저 표기는 이도저도 아닌 절충형에 불과합니다.

 

여기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어도, 나중에 3부 <행운의 총아들>에선 폼페이우스가 본격 등장할 텐데, 그때도 나이우스라고 하실까요? 한국인들에게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꽤 익은 표기인데요.

 

- p38 맨 위를 보십시오.

일 년이 지나면 왜 나이를 십 년씩 먹을까요?

노년에 접어들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주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마흔 일곱 이후에는 1년이 지났나 했는데 어언 10년이 흘렀더군,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 듣기에는 문맥상 보조 표현이 그 주위에 없어 일부 독자들이 혼란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원문도 Next Year이라고만 되어 있어, 이게 오역은 아닙니다.

다만,

그 윗 줄 진부한, 원서에는 the same old라고 나옵니다.

이걸 진부한이 아니라, 좀 다르게 번역하면, 왜 1년이 어느새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만 10년이 되어버리는지, 독자들이 좀 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똥돼지는 원어가 piggle-wiggle인데, 이 말은 작가가 창조해 낸 표현으로, 뒹굴거리는 돼지란 정도의 의미겠습니다. 똥돼지,메텔루스가 돼지 우리의 똥더미에서 뒹굴었으니 어느 정도는 원어와 통하겠지만, 그래도 좀 유치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 구판도 똥돼지라고 해서 거슬렸는데, 이 교유서가판도 같은 태도라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 교유서가 신판만의 멋진 점

-아무래도 더 깔끔하고 윤문이 잘 되어 가독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는 구판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다만……

저는 책 앞부분 등장인물소개코너가 활자를 좀 키우고 독자들(특히 로마식의 긴 이름에 안 익숙한 이들) 이 수시로 찾아 볼 마음이 들게끔 편집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한테 구판이 남아 있지 않아 장담을 드릴 수는 없어도,

제 기억으로는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더 적었고,

가문 구별도 한 눈에 들어오게 하는 처리를 했던 것 같아요.

 

- 이건 꼭 지적하고 싶었는데, 예를 들어 메트로비오스 같은 이름은 이 자가 그리스출신이니, -오스라는 어미를 취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거죠.

원서에는 분명 ius 거든요. 이건 그리스 인명 표기를 영어식 고유 맞춤법(일단 라티나이즈한 후 다시 영어식변형)으로 지키는 거라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거고, 다만 우리는 구애 받을 전통이 없기에, 얼마든지 그리스식으로 다시 고쳐 쓸 수 있죠.

구판에는 메트로비우스였습니다. 구판이 잘못이고, 교유서가판은 섬세하게 영어 원문의 오류(까지는 아니고 한계)를 바로잡은 거라 정말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 원작 자체의 장점 (제가 생각하는)

문장력과 내용적 깊이가 탁월합니다.

보밀카르가 살인 청부를 시도하며, 살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다짐을 주자, 장님 이발사에게 윙크든 고갯짓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되묻죠.

염려 놓으세요, 히힛. 이런 상투적인 처리보다, 얼마나 캐릭터의 개성이 잘 전달되는 표현인지 모릅니다, 끝에 가서 수부루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라고 덧붙여 주면서, 약속한 바는 확실히 이행한다능 다짐까지 두는 장면.

나중에 어린 카이사르의  어머니가 수부루에서 임대업 하는 이야기도 나오죠. 체면 따지지 말고 재테크(!)를 해야 아들을 출세시킬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요.


 

 

 

이 수부루는 현대 미국의 브루클린 같은 빈민가를 상징합니다. 돈만 주면 빵을 사듯 사람을 살 (매수할) 수 있는 나라 역시, 현대 미국을 비꼬는 표현이고, 1년에 한 번 두 사람이 뽑히는 집정관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도, 겉으로 내세워지는 대표자가 누구든 간에, 숨어 있는 실세, 구조는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미국을 풍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69 바윗돌처럼 차갑고 파르티아의 태수처럼 교묘한

이런 표현은 너무나 멋진, 매컬로 여사의 문장에서만 볼 수 있는

절묘한 수사입니다.

대분열 시대 로마 황제가 어느 편지에서 구사한

고트 족의 눈처럼 차가운 네 마음으로는.과 맞먹는, 로마 풍의 레토릭의 멋이 뭔지 안 매컬로 여사만의 장기입니다.

 

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지근거리에서 보고 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 한 건,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의 고사를 연상케 합니다. 비록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예수의 시대보다 한 세기도 넘게 앞서지만.

 

(3) 매력 있는 캐릭터와 그 이유

1권에서는 아직 가이우스 마리우스 (2부 넘어가면 그는 노환과 정치적 불운 때문에 광인이 되어 버립니다) 가 매력 있습니다.

타고난 천재이지만 현실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선을 넘지 않는 자제력을 보이고. 훌륭한 상대방이라면 그 참뜻을 바로 알아 주는 안목과 선의를 지닌, 나무랄 데 없는 인격자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家長) 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마치 동양이나 조선의 유서 깊은 가문의 양반처럼, 금도와 예절, 체면과 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결단할 때 결단할 줄 아는 모습.

그 매너라든가, 둘째 딸을 키울 때 엄격한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네 양반 가문의 절도와 미덕이 그대로 연상됩니다.

 

 

(4)

가장 몰입도 높은 부분은

술라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며 자신의 알리바이, 무혐의를 완벽하게 조작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건 본격 추리 장르에 써먹어도 될 만큼, 작가가 공을 들여 구성한 솜씨입니다.


사실 전 이 소설에 완전히 빠진 마니아라서, 저거뿐 아니라 모든 장면에 다 몰입했다고 해도 됩니다.

 

(5)

위에 다 적었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딱 시오노 나나미 수준에 맞추어 로마를 정리하고 말았기 때문에, 좀 복합적인 내용이 나온다 싶으면 이 정도 수준까지는 내게 필요 없어.라고 외면할 지도 모릅니다. 수준 높은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지못한 시황에 비추어 이 책의 강점이 바로 약점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설 주인공 하나하나가 (일단 정만 붙이기 시작하면) 바로 몰입할 수 있는, 훨씬 깊이 있는 피조물이란 걸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등장 인물 소개란을  더 개선해야 한다고 앞에 적은 겁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위대한 작품이, 20년 동안 한국에서는 외면 받아 왔다는 게 진정 개탄스럽고요.

 

사실 한국인에게 로마는 인기가 없습니다. 1959년 헐리웃 영화 <벤허>, 그리고 동인녀, 부녀자 할머니의 어이없는 "대하 일기장"이 일으킨 1990년대의 붐 말고는, 한국인에겐 로마를 가까이할 매체 자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미드 <로마>, <스파르타쿠스>도 한국에선 시청률이 높지 않았죠.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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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1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빙혈님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읽으며 느낀 점들인데 10할과 울릭세스는 몰랐네요. 모리타니와 마우레타니아의 연관성도 덕분에 알게되었어요, 감사합니다. 10년 후, 이 부분은 여러번 읽고 영문으로 고쳐 이해했고요 똥돼지도 처음엔 마리우스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젊은 시절을 생각하니 적당히 상스럽고 좋더라고요. 아마 팬심으로 극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가이드북에 참고되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 공부중인데 참 매력적이고 체제 자체의 완성도가 꽤 높더군요.. 매컬로 여사의 작품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빙혈님 글도 로마사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빙혈 2015-07-10 14:38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안녕하세요^^ 로마사와 이 소설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신, 내공 깊으신 분을 만나게 되어 제가 기쁩니다. ㅎㅎ 말씀 하신 대로, 팬심으로 극복해야 했던 여러 부분도 있었지만, 이런 책이 다시 산뜻한 번역과 고증을 거쳐 한국어판으로 나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기쁠 뿐입니다.

여러 번 읽고 영문으로 고쳐 이해하셨다는 말씀에서, 진지한 독자로서의 고충과 애로가 확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텍스트 외적 장애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당분간은 극복이 어려운 현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출간되는 가이드북은 이런 모든 우려를 일거에 날릴 수 있는 예쁜 동반자로 우리에게 다가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덧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답방 드릴게요^^

비로자나 2015-07-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정오표로군요. 감사합니다.

이하 생략~ 이하에 생략된 부분이 혹시나 더 있으면 보고 싶군요 ^^

namudle3 2015-08-1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꼼꼼하게 읽고 책에 표시해두면서 다시 한번 새겨봤습니다.
로마에 대한 공부도 없이 책을 읽고 있는데 저자의 식견과 글 구성력에 매 장마다 감탄하며 읽는 중이랍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것도 기대하게 됩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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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중 등장인물 미란다의 한 대사에서 따온 이 유명한 제목은, 요정계에서 더 근사하고 더 도덕적으로 완결된 세상을 접해 왔을 그녀 입장에서 내뱉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감정 표시입니다. new할지언정, 뭐가 brave하다는 걸까요? 이 소담출판사 판의 번역자 안정효 선생은, 저 영단어 brave의 뜻에 대해, 각주로 부연하고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비천하고 한심한 모럴을 지녔으며 질서 전반을 위협하는 "불안정성" 요소가 상주하고 있어도, 감정을 지닌 필멸의 존재들이 아둥바둥하면서 엮어가는 이 인간 세상만큼, 위대하고 멋진 세상도 다시 없다는 취지의, 더 우월한 존재로부터 나온 찬탄이기에, 이 대사가 그토록 명대사로 평가받는 것이겠습니다.

마법사 프로스페로의 착하고 아름다운 딸 미란다는 그 위대한 희극 속에서, 자신의 눈 앞에 희망적인 양상으로 가득 펼쳐진 미래를 두고 저 감탄사를 터뜨리지만, 20세기에 다다라 물질 문명 발달의 불길한 양상만을 지켜 보고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창조해 낸 A. 헉슬리는, "우리가 목도하는 이 현상이야말로 진정 멋진 신세계로구나!" "미란다 눈에 그토록 아름답게 비친 누리를 어쩌다가 우리들이 이토록 망쳐 놓았던가!" 같은 소회로부터 저런 작명을 했을 법합니다.

작중 "야만인 선생"은 이런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여, 두 번에 걸쳐 멋진 신세계란 표현을 토해 놓습니다. 한 번은 야만인 유보 구역(reservation)으로부터 인간 세상에 막 귀환했을 때, 다른 한 번은 이 문명 세상에서 이방인인 자신이나 원 주인인 소위 "현대인"들에게나 아무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고 비탄에 젖을 때입니다.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원작 <템페스트>에서도 혹여 우리 미란다에게, 아버지의 본향 인간계(그녀 자신은 한 번도 접하지 못한)로 귀환한 후, 어떤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인 환멸, 각성이 이후 그녀를 덮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멋진 신세계>는 "다시 찾아 본 템페스트"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이 안정효 선생 번역본은, 기존 텍스트들과 많은 차별점을 보입니다. 원작부터 사실 아주 가독성 좋게 독자를 흡입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비범한 두뇌와 초인적 통찰력을 지녔던 최고 지성인의 음울한 예언적 계시가 문학의 몸을 빌린 것이니만치, (이미 당대에도 유행했던) 소프트 SF장르의 접근용이성을 현대 독자들이 기대해선 곤란하겠습니다. 내용이 워낙 기발하고 소름끼치는 영감을 제시해서, 준비 안 된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 뿐이지, 본래부터가 술술 읽히는 포맷은 전혀 아닙니다.

안정효 선생은 최대한 많은 어휘와 표현들을 두고, 우리 말로 읽어서 의미가 바로 와닿게 텍스트상 세심한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타 번역본에서 다른 분이 그저 '"오르지, 포지"라고 원문을 노출했던 걸, 이 책에서는 "흥겹고도 흥겹구나"라고 고쳐 놓고 있습니다. "새비지"를 "야만인"이라고 일일이 의역하는 점도 이런 태도와 궤를 같이합니다. 이는 번역가로서 그가 일관되게 유지해 온 원칙의 실천이기도 하겠습니다.

소설은 "포드님", "포드 기원" 같은 지극히 냉소적인 어구에서 알 수 있듯, 효율성과 정연한 질서야말로 문명화한 인간이 추구,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비극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지만, 불멸의 영혼보다 더 아름답고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홀딱 반한 미란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극한의 합리성이 지배, 통제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장점을 모두 잃어버린 비극을 목도한 채, 절망 속에 울부짖는 "야만인 선생"을 통해 헉슬리는 셰익스피어가 시작한 희망의 노래를 이제 자신의 손을 통해 처절한 만가로  바꿔 놓겠다며 지옥 아닌 지옥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냉철하고 침착한 영국인에 비해, 아일랜드인이니 스페인인이니 하는 부류들은 "피 속에 알콜 함량이 높아 어리석고 감정적"이라는 식의 평가, 통념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통제와 인위적 조절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제 분수에 충실하여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고유 기능만 수행하게 하는 시스템은, 이처럼 시끄럽고 불안정한 사회보다 오히려 발전한 면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최하 등급의 구성원 역시, 자신들만의 거리낌없는 쾌락의 시간이 주어져 고된 노동의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 비록 존엄이 뿌리채 박탈되었을망정 본인들은 전혀 인식을 못한 채 행복할 뿐 오히려 현대의 노동계급보다 나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위도 아래도 다 만족이며, 기초적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일절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그 누리는 효용도 훨씬 높은 수준이니, "멋진 신세계"가 맞긴 합니다. 보카노프스키 그룹에 편성되어도 좋으니 당장 그리 보내달라는 이들이, 지금 우리 중에도 없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가장 흉칙하고 야만적으로 들리는 세상, 누구나 다 무부, 무모의 존재로 세상에 던져져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 아래서 부속품처럼 소모되다 세상을 마치는 모습, 괴로울 것도 없고 일견 완벽한 감각적 만족, 흠 없는 자기기만이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얹혀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이게 사람 사는 양상이 결코 아님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야만인 선생은 이런 더럽고 구원 못 받을 타락한 세상에 잠시나마 몸 담고 더렵혀진 영혼를 씻어내려는 뜻에서, 중세의 편타 고행자처럼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이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서커스 관람 이상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여러 대목에서 수위 높은 성적 묘사를 시도하고도 있는데, 그게 오늘날 일부 엔터테인먼트 문학에서 꾀하는 의도와는 아무 관계 없는, 오히려 은밀한 쾌감을 기대하는 독자를 꾸짖으려는 계산이었음을 안다면,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요. 이 소설을 읽고도 남 이야긴 줄로만 아는 우리들이야말로 "소마 1그램"에 취해 고귀한 존재의 본분을 망각한 "멋진 신세계"의 멍청이들에 다름 아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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