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증언록 1~2 세트 - 전2권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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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탁월한 족적을 남기고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도 사람 자체를 놓고 "역사"라 일컫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 인물에 대해 찬반과 호오가 치열하게 엇갈리는 실정이라면 어떤 중립적인 규정을 시도한다는 것부터가 지난한 작업입니다. 이런 사정들을 모르지 않지만, 왠지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 그리고 근엄한 평자까지 겸하는 중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서는 "그가 곧 역사였다"라는 비유적 평언을, 좀 다른 의미에서 허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역사(일단 자유당 집권기를 제외하면)의 결정적 전환점에는 그가 항상 자리해 있었습니다. 5.16 군사정변의 한 주역(이때 그는 실제로 예비역이었으므로 병력 동원의 중심에 서 있지는 않았죠)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3선개헌(처음에 그는 반대 입장이었고, 여당 내에서 집중적으로 반대했던 인물들은 바로 그를 옹립하려는 의도였죠), 유신, 신군부의 등장, 여소야대 정국의 캐스팅 보트, 3당 합당, 그리고 마지막 DJP 연합까지, 한 개인이 이처럼이나 정계에 오래 머물고 그 머문 기간 동안 현대사의 전환점적 사건들에 모조리 개입할 수도 있는 건지, 이 두꺼운 책 페이지를 넘기고 쓰다듬을수록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 개탄스럽다는 감회, 이 양가의 상념이 동시에 머리 속을 교차합니다.

얼마 전 타계한 YS의 경우 심한 고초와 격렬한 투쟁의 시기를 겪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치욕, 몰락의 쓴맛을 인생에서 다신 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JP는 "영욕의 인생"이라는 말이 잘 걸맞을 만큼, 영화로울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가였고, YS나 DJ와 결별할 때는 노년에 참으로 수치스러운 곤경에 몰린다는 느낌을, 그에게 공감할 아무 이유가 없는 입장에서도 지울 수가 없었고요. 이 거대한 생은 언제나 공적 인생이었고, 그의 부상과 몰락 모두가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던 중대한 사건들과 긴밀히 엮여 있었습니다.

이 책은 케이스입으로 1권, 2권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회고록을 1,2권으로 나눠 내는 게 보통인데, YS나 이종찬씨, 박철언씨 같은 경우는 케이스입도 아니고 하드커버도 아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은 이 책처럼 하드커판 2권 묶음이었고요. 이 회고록들을 저는 일일이 구입해서 꼼꼼히 읽어 본 독자지만, 이 책은 그런 기록들과는 또다른 개성을 풍긴다는 느낌이 지금 정리됩니다. 솔직히 그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렴풋이나마 한 문장으로 적어 보자면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보다 솔직한 태도로 털어 놓았다" 정도겠습니다.

얼마 전(이 책 출판 기념회 말고, 그의 구순 잔치 때), 그는 대단히 격노한 어조로 5.17 특별조치 당시 신군부의 재산 환수 처분에 대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그는 당시의 그 참담한 처지에 대해, 독자가 처연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히 술회합니다. YS에 의해 문민정부에서 축출당했을 때, (이 증언록에는 안 나와 있으나) "이것보다 더 힘든 일도  다 겪어 봤다."고 결기를 다지기도 했죠. 이 증언록에서 그는 YS의 회고록 일부를 인용하며, "김종필을 붙들어 두지 못한 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한 말을 문언 그대로 믿고 싶다며 담담한 심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잘 읽어 보면 저자는 "믿고 싶다"고만 했지 그 말이 틀림없겠다거나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취지가 아닙니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아전인수격 왜곡이나 미화, 윤색이 최대한 절제된 게 특징입니다. 이런 말까지 다 털어놓는다는 게 자존심이나 감정적 이유에서도 쉽지 않을 텐데 싶은 대목이 참 많았습니다. 워낙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다 보니 회고록에 그런 말이 당연히 들어가지 않겠나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치부나 좌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저런 가감없는 태도를 취하기란, 유명인이 아닌 우리들 대중의 입장에서도 결코 쉬운 게 아니죠. 공산주의식 강제 자아비판이 아닌 이상, 당사자 본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 중에는 가장 솔직한 한계까지 가지 않았나는 생각입니다.

역사의 결정적 순간 근접 거리에서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르포도 시중에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법 묵직한 평론과 일차사료에 가까운 중요성을 담은 것도 있고, 잡담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런 저널리즘의 충실한 "증언"들을 균형감각 있게 읽고 취사선택을 하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조감도를 머리 속에 그리는 게 보통이죠. 이런 기록들과, 정치인의 "회고록"은 대체로 내용이 크게 상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양식 있는 독자라면, 그래도 중립적인 위치겠다 싶은 저널 쪽을 더 크게 의존하는 게 보통이죠. 그러나 이 책은, 거물급, 아니 그 정도 말로는 올바른 형용이 어려운 초거물급 인사 본인의 입으로 털어 놓은 증언을 정리한 내용인데도, 시선이 담담하고 초연하며 공정합니다.

그는 김대중 정부, 박정희 정부에서 모두 국무총리를 역임한, 어떻게 보면 한 개인이 지니기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력을 갖춘 진귀한 케이스입니다. 성향이 전혀 상반되고 화해가 불가능한 정적 둘과 차례로 손을 잡고, 두 권력자들로부터 모두 견제를 받았으며, 그러면서도 두 권력자 모두 그의 힘을 어느 순간에는 절실히 필요로 하며 자세를 낮추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로 많은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이 긴 책을 읽으면서 끝까지 뇌리에 머문 느낌은, 이분이 박, 김 양 진영으로부터 비교적 비슷한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읽어 보면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 업무 능력과 추진력 등에 대해서만 높은 평가를 하고 있을 뿐, 자신의 처삼촌이기도 한 그에 대해 가슴이 사무칠 만큼 감정적 접착을 보이지는 않습니다(기념관 건립 건은 그저 의리의 발로로 보이기도 하고요). "유신 정권 치하에서 겪은 일은 살아 있는 내가 대신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는 대목에선, 정계를 누빈 그 수많은 실력자들 중에 진짜 인간의 가슴을 지니고 사내다운 낭만과 진심을 유지한 이가 이분뿐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회고록"이 아닌 증언록입니다. 책을 JP가 직접 쓰지 않고 기자들한테 들려 준 이야기를 다른 필진이 정리한 까닭도 있지만, "회고록"에서 흔히 드러나는 아전인수식의 위증 없이, 역사의 법정 앞에 선 증인의 겸손된 자세로 담담히 들려 주는 "자신과 매듭매듭 결부된, 상처 많은 한국사"의 진술 자체라는 점에서, 이 제목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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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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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작 <스코치 트라이얼>이 곧 개봉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프리퀄 <킬 오더>를 포함해서 모든 "메이즈 러너" 시리즈 영화에 대응하는 원작 소설들이 이미 출간 되어 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책 사이에 낀 리플렛에 인쇄된 사진을 보니 구매 충동이 일더군요. 내용 전개도 상당히 스피디해서, 운 좋게도 데모 필름을 미리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프리퀄에선 "지구가 왜 그꼴이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나옵니다. 사실 프리퀄이란, 작품 내적으로야 기 출간작들보다 앞선 시간대의 사건을 다루지만, 최소한 대외적 발표는 이후에 이뤄집니다. 따라서 작가가 성실하고 꼼꼼하게 준비하지 않은 이상, 보통은 어딘가 억지스러운 구석이 나온다든가 설정 충돌을 빚기가 쉽습니다(상업적 성공을 노리고 무리하게 구상, 출간한다든지). 이 <킬 오더>는 그렇지 않아서, 등장 인물이나 배경의 차림에 있어, 전작(내용적으론 이후)과 아귀가 대체로 잘 맞는다는 게 특징입니다.

 

바이러스가 묻은 화살을 쏘아, 그 맞은 이의 두뇌 부분에 이상을 일으키게 해서 인류의 절멸을 꾀한다는 설정은 독자의 공포를 절로 불러일으킵니다. 1) 본디 화살이란 무기는 서양인들이 능숙히 잘 다루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활과 화살을 잘 다루는 종족은 동아시아쪽 유목 부족이며,  그 중에서도 몽골인들이어서, 먼 곳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도 목표를 백발백중하는 솜씨는 상대를 공포에 떨게 했죠. 이 소설에서도, "화살을 주무기로 쓰는 외계 종족(?)"에 대한 설정은, 대체로 이 화살이 타자화한(나아가 적대적인) 영역에 속한 걸로 여겨 왔던 저들 백인종의 원초적 공포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가 색슨 족의 로빈 훗 설화라든가, 상업 영화 <람보 2>에서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입니다.

 

지구는 분명 인간에 친화적인 환경이기에 우리 종이 이처럼이나 우아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진화하게 도와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구라 해도 원 상태 자체가 낙원은 아닙니다. 한 예로 보다 자연에 밀착하여 살아가는 정글의 동물들도, 한시만 딴눈을 팔면 포식자에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피식자를 먹이로 확보하지 못하여 굶주리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인류는 자신의 생리에 조화롭게 구축된 문명권 안에 터잡고 사는 걸 최상의 이상으로 여겨 왔으며, 외부로부터의 침략으로 그 기반이 붕괴되는 게 가장 끔찍한 악몽 중 하나였습니다. H G 웰즈의 <우주 전쟁> 이래 모든 재난 SF,  판타지 장르가 비슷한 구조를 취하는 것도, 이런 독자의 오랜 감성 반응기제나 무의식에 의존하는 바 큽니다.

 

네 살 먹은 소녀 디디의 표현처럼, "화살을 맞고 머리를 감싸 쥐며 무섭게 죽어가는" 방식으로 최후를 겪는 인간들. 한때 자연의 정복자로 자칭했건만 지금은 개체의 생존조차 담보하지 못하고 비열하게도 멀쩡히 잘 사는 동족을 해적처럼 습격해야 하루의 연명이 가능한 모습. 사실 다른 어떤 재난상의 묘사보다, 인간끼리 동족 상잔을 벌이는 이 질서의 붕괴를 그린 대목이 독자에게 불쾌한 인상을 남깁니다. 최악의 막장이란 언제나 진영 내 자체 분열상이 아니겠습니까. 이 디디 같은 상징적 장치는, 영화 <에일리언 2>에서도 꼬마 뉴트 같은 배역(Carrie Henn 분)으로 나오곤 했습니다.

 

뭐 그렇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강도(칼만 안 들었지 바로 강도죠) 셋 정도는 너끈히 맨손으로 처리하는, (자신이 누누이 강조하듯) 전직 군인 출신 알렉이 마크와 트리나 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독자들은 예상하겠지만, 이들 주인공 crew는 원래 그들이 목적했던 곳에 무사히 모두 도달하지 못합니다. 동료들 중 일부, 상당수는 반드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고, 프리퀄이니만치 진짜 그 핵심은 생존이 보장되어 있긴 합니다만(안 그러면 설정 충돌 발생- 프랜차이즈 단절), 여튼 우리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워낙 극한이다 보니 보는 내내 마음을 졸입니다.

 

알렉은 자신의 표현대로 "정글의 냉혹한 야수가 씹다 버린 것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 끝까지 지켜야 할 존엄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전 대원의 안위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와 같은 부대 소속인 라나 역시, 경력에 어울리는 냉철한 현실 판단으로(더 이상은 스포일러라 언급 자제) 아직은 미숙하고 어린 다른 대원(주인공들)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 시리즈의 두드러진 특징은, 극단적인 문명 절멸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주인공들이 사투를 벌이며 종의 재생을 모색하는 모습인데요. 아무래도 재번식의 주도는 어린 개체가 맡아야 그 건강성이 담보되겠지만, 문명의 재건은 경험 부족의 개체가 맡기엔 다소 버겁다는 점에서 다른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이 시리즈가 주로 어린 독자, 관객(영 애덜트)을 타깃으로 삼긴 했어도, 성인들에게까지 폭 넓은 공감을 안기는 건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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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다이어 1
미셸 호드킨 지음, 이혜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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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설의 흔한 패턴은 1)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 더 완벽한 집안 배경과 함께 느닷 나타나서 2) 당돌하고 유니크한 매력은 있지만 왠지 남주에겐 좀 부족한 듯한 여자 주인공에게 벼락처럼 사랑에 빠지며 3) 둘은 밀당을 벌이다(여자 쪽이 더 튕김) 결국 서로의 거짓 없는 마음을 이해하고 결합에 성공한다는 식입니다. 이 책 역시 중간까지만 읽으면 이런 영 애덜트 공식에서 별로 벗어나는 것 같지 않다고 독자는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렇게 착각한 후 딱 거기까지만 읽고 책을 덮는다 해도 별 실망은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으니까 말입니다. 1) 일단 여고생 마라 다이어의 입담, 특유의 블랙 유머와 반어법이 듣기만 해도 유쾌합니다. 2) 그런데 이 여고생이 그냥 걱정 없이 사는 애가 아닙니다. 물론 집안이야 물질적으로 유복한 편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끔찍한 사고를 겪은 후 일종의 PTSD를 앓고 있죠. 이런 애가 "곧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지만 여튼 현재까진 난 아무렇지도 않아."라고나 하듯, 천연스레 농담 반 독설 반 현실과 악몽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1인칭 시점에서 풀고 있습니다. 가끔 "이상한 체험"에 대해 말하는데, 아직 어리고 여자애니까 신경과민이려니 하며 독자는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중반을 확실히 넘기고 나면, 그렇게 안이하게 판단했던 독자는, 슬슬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히 드러나는 진상을 목격해 가며, 자신이 확실하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아이, 마라 다이어라는 아이는 뭔가 초자연적 현상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 여태 벌어졌던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자신도 모르게 유발한 원인이었던 겁니다! 독자는 그제서야 "어, 어, 이거 봐라....?" 하며 긴장의 끈을 확 당기며, '로설이 다 그렇지 뭐' 하던 심드렁함에서 후다닥 각성하게 되는 거죠. 작가가 제법 큰 이야기 꾸러미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독자는 비로소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여고생이라 심사가 복잡하고 감성이 예민해서 저리 말이 많았나 보다 싶었어도, 이제부터는 '처음부터 특별한 아이라서 무심결에 흘리는 말 같았던 게 사실은 심각했었구나' 정도로 인식이 바뀌게 됩니다.

 

여고생 마라 다이어가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겪게 되는 소동도, 뻔한 듯하면서도 사실 심각한 사건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라를 찍은 학교 최고의 킹카이자 명문가 출신의 황태자인 노아 쇼 때문에, 그녀는 교내 모든 여학생의 질시를 한몸에 받게 되고, 사실상 일진이나 마찬가지인 안나 패거리의 집요한 공작으로 여러 번 곤경에 몰립니다. 스페인어 교사 모랄레스는 개인적 감정으로 그녀에게 심히 불공정한 처분을 일삼는데(후반에 가서 결국 큰 사건이 터집니다), 부호의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고등학교(짬짬이 언급되는 내용을 보니 교과 과정이 매우 수준 높더군요)에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사로 재직할 수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이름과 인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라는 수학이 타 과목에 비해 약한 편인데, 제이미라는 흑인 동급생(나이는 어리지만 두뇌가 우수하여 월반)이 여러 모로 도와 줘서 그럭저럭 성적을 올립니다. 이 제이미가, 예의 킹카인 노아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심어 주는 바람에 마라가 괜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은 셋 사이의 오해만큼은 이 1부의 끝에서 다 해결됩니다. 제이미가 마라와 노아에게 필요 이상으로 동조해 주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결과가 생기긴 하지만 말입니다(사실 노아 쇼도 이 여친 마라 때문에, 귀한 몸에 위협이나 상처가 남을 뻔한 게 여러 번이더군요. 하지만 사랑이란 본디...).

 

이 책은 전체 3부작 중 첫째 권입니다. 아직 엄청난 이야기가 갓 시작되려 자세만 잡았을 뿐이고, 마지막 장면 충격적인 총격 사건의 발생 때문에 독자는 깜짝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음 권에 이어질 사연을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건, 순결한 도덕성을 간직한 여고생 주인공 마라 다이어가, 자신이 책임지거나 통제할 수 없는(없었던) 일련의 비극에 대해 지나치게 자책하다가, 정말 다른 사람(인격체)이 되어 버리거나 미치는 것 아닌지 하는 거에요(바꿔 말하면, 아직까지는 그 부모와 오빠의 우려완 달리 정신이 말짱하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녀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노아 쇼라는 남고생(우수한 두뇌, 우월한 혈통, 강인한 체력, 퍼펙트 외모를 모두 갖춘)의 장래와 영혼마저도 이 마라의 그것과 연동하여 움직이는 형편이라, 이 기괴한 사연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내가 정말 데쓰노트 같은 수단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적 개입, 실행 없이도 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면, 나의 귀책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요? 법학에서 밝혀낸 바로는, 어떤 행위는 결과에 대해 그 원인으로서의 자격이 부인되거나, 대단히 약한 정도로만 인과에 기여한 걸로 판정됩니다. 마라는 이 복잡미묘한 연쇄 작용에 대해, 지나칠 만큼 자기 부죄(負罪)를 시도하고 있어서, 이를 지켜 보는 우리 독자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법률 전문가인 부친 다이어 씨에게 자문하면 명쾌한 답이 나올 테지만, 이런 이야기를 대체 누구더러 믿으라고, 그 이치와 논리의 세계에 사는 분에게 꺼낼 수나 있겠습니까.

 

"마라, 그들은 그런 꼴이 되게 자초한 거라구."

 

우리도 이 노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무튼 여고생 마라는 죄의식과는 별개로, 자신이 과연 무슨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심각한 공포에 빠지는데, 이를 도와 줄 수 있는 이도 "운명의 남친" 노아 쇼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빠져 눈이 먼 남자 외에, 누가 이런 미친 사연을 곧이 들어 주겠습니까.

노아 쇼의 의붓어머니(그리고 죽은 친어머니)가 가담한 "동물 해방 전선"은, 공교롭게도 바로 며칠 전 밍크를 대량 방사했다고 해서 뉴스를 탄 바로 그 단체입니다. 소설에서의 설명대로, 이 단체의 이런 행동은 이제 일종의 테러로서, 실정법상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p288:14의 문장 주어 "제이미가"는 "노아가"로 바뀌어야 문맥이 통합니다. 한스미디어의 책들이 언제나 그렇지만, 번역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외국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뮤지컬 <애니>와 영화 <스타워즈>에서 사용된 맥락 원용에 대해 친절한 역주가 적절히 삽입된 점도 독자로서 고마운 부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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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교수가 제자들에게 주는 쓴소리 -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 줄 독한 충고
이토 모토시게 지음, 전선영 옮김 / 갤리온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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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라는 건 나와 별 관계 없는 이, 혹은 권력 서열상 내가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한 이가, 얼핏 들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할 때, 공교롭게도 그 말이 핵심을 지적하고 나의 아픈 점을 제대로 짚고 있을 때를 두고 보통은 이르는 거죠, 따라서 만인의 스승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분이 입 밖에 내시는 "쓴소리"는 이미 쓴소리가 아니라, 달게 보약으로 섭취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동경대생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사표로 꼽히는 이토 모토시게 교수가 마치 강연 녹취록처럼 저술한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귀기울여야 할 고언과 충언으로 가득합니다.

 

같은 최고 명문대를 졸업했는데, 왜 어떤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하고,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헤어나질 못하는가? 사실 일본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이런 문제는 더 실감나는 방식으로, 많은 이들을 열등감과 자괴감에 떨게 만들 것 같습니다. 특히 "쟤나 나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같은 평등주의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풍조가 강한 우리 나라의 사정은 더 심각하죠. 유난히 자살률이 높은 것도 "출발점이 같았으나 현재가 달라진 모습"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지부조화 심리가 끼치는 영향이 큽니다.

 

이토 교수는 동경대생(졸업생)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이 이슈에 대해, "자기 계발과 냉정한 현실 인식"의 차이가 가장 결정적 변수였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재능만 믿은 나머지 후천적 연마를 게을리하고, 어떤 이는 아예 노력 자체를 아낍니다. 이유는 "어차피 모든 노력이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닌데 확실한 전망이 보이면 그때서야 전력 투구" 같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도쿄대생 특유의 몸사림이라는 거죠. 오랜 세월 일본 최고의 엘리트들을 숱하게 다뤄 온 분 답게, 그 심리를 훤히 꿰고 계신 소이입니다. (무조건 남탓 세상 탓을 하며 허송세월하는 썩은 백수는 물론 동경대에 적을 둘 가능성조차 없으므로 아예 논외입니다만)

 

이토 교수는 "나이 서른 다섯까지는 모든 노력이 자신의 기초 체질을 강화하는 의의가 있는 만큼, 단기 효과에 연연하지 말고 무조건 투자하고 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여름에 먹는 보양식이, 신체 기관 어느 부위를 특별히 좋아지게 한다거나, 특정 질병을 완치하는 효과가 있는 게 아님에도 누구나 그 섭취를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노력이건, 생각하는 방식과 세계관을 다듬고 개선하는 데에 투자된 것은, 반드시 보답으로 돌아오며, 특히 인생에서 수시로 닥치는 위기를 효과적으로 넘기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는 게 이토 교수님의 주장입니다.

 

사실 이토 교수는 대다수의 동경대 출신/재직 학자들과는 컬러가 좀 다른 분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에서 손 꼽는 학문의 전당인 동경대에서 교수 노릇을 하려면, 어려서부터 천재이거나 학창 시절 내내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라야 이런 경력 축적이 가능합니다. 헌데 이토 교수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학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많은 노력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극복해 온 스타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천재, 수재들만 모여 드는 동경대에서, 실력이 시원찮아 제자들의 미심쩍어하는 시선이나 비웃음을 받기라도 하면, 교수 된 입장에서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죠. 그러나 이토 교수는 후천적 노력을 통해 이를 극복한 드문 타입. 아마도 그래서 제자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으시나 봅니다.

 

이런 교수님도, 자신의 고향 시즈오카에는 자신보다 더, 공부에 뜻이 없던 둔재형 친구가 있었다며, 아마도 강연 실시간에 웃음깨나 유발했을 법한 사연도 책 속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튼 비결은 공부, 쉼 없는 공부, 끝이 없는 공부,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공부, 어떤 구체적 효용을 바라지 않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모든 공부를, 마치 보약처럼 정신에 축적하는 길만이 진정한 자기계발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틀에 박힌 공부가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가 형성될 수 있는 공부를 해 오신 분이기에, 남들이 못 보던 사각을 캐치하고 창의적 관점으로 능란히 전환하는 면을 여러 상황에서 보이시기도 합니다. 한 예로, 편의점에서 부분 금융업무 수납을 대행하는 아이디어에, 소위 전문가들은 코웃음을 쳤으나, 작금의 핀테크 열풍은 기존의 경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음은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토 교수가 말하는 "인생 공부"란 곧 창의요 혁신의 발판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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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은행에는 이자가 없다
해리스 이르판 지음, 강찬구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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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행을 비롯 모든 금융제도는 채무자에게 대여한 자금 원본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의 수취를 기반으로 유지됩니다. 이자를 받지 않고 수요자에게 돈을 빌려 주는 시스템은, "자선 사업"이라 불릴 수는 있을망정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본격 산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슬람권의 은행은 그렇지가 않다고 하네요?

 

최근 최경환 부총리가 주택구입자금 대출 요건(DTI 비율 등)을 다시 강화하고, 거치 기간을 대폭 축소한 후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모색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빚을 내어 집 사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확정 금리의 이익까지 줄이겠다는 건가." 같은 반발이 거셌는데요. 사실 자본 차입의 시간기반 기회비용인 이자는, 많은 경우 경제적 약자로 시작한 이들의 입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핵심 팩터 중 하나입니다.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지역에서건,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는 이미 고대부터, 무슬림 사이에 수수되는 이자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예언자 모하마드의 가르침을 따르고 유일신 알라의 권능에 대한 복종을 맹세한 이는 피부색과 혈통을 막론하고 모두 형제라는 공감대에 따라, 인간 대 인간의 교류와 소통을 막는, 오로지 시간의 경과라는 자연적 현상에 의거한 이자 발생에 대해, 원천적 정당성을 부인하고 든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이들에게 고리를 수취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차이가 없어지고 풍요의 혜택을 고루 나눠 가지는 사회가 도래할까요? 예언자 무함마드는 그런 이상향을 꿈꾸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이슬람 사회는 그렇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문명권보다 더 나쁜 구시대적 한계에 봉착한 면마저 있습니다. 이자 제도의 부인만으로는 사해평등 만민형제의 이념 실현에 아무래도 미흡한 바 있나 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진짜 하려는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저자는 비 이슬람권 일반인이 듣기에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을 소개하고, 그 사실 이면에 어떤 원리와 비결이 작동하는지를  책 전체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돈"의 수요와 공급 섹터 사이에 이해의 조율, 혹은 win - win 을 시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경험했습니다.

 

우선 이슬람권에서 이자를 부인하는 건, 반드시 샤리아의 강제에 따른다는 배경 없이도, 세속적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는 비교적 오랜 관습이라는 겁니다. 1950년대 이집트에서 일종의 투자은행(1990년대 후반까지 미국 등에서 엄격한 틀을 유지하던 그 투자은행 포맷과 대단히 유사합니다)으로, 수에즈 국유화 단행 이후 나세르 정권에서 시행되었던 시스템은, 역시 이자를 일절 금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럼 채권자는 무슨 동기에서 사업에 참여하는가? 자신이 돈을 투자한 사업에서 발생한 수익을 배분 받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결국 이자가 다른 이름으로 탈바꿈만 한 것이군." 혹은 "교묘하게 율법의 규제를 우회하는 수법인데?" 같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아주 틀린 시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고 마는 사람들은,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겁니다.

 

사업의 수익 일부를 배분 받는 시스템이다 보니, 채권자 역시 자신의 돈이 쓰이는 사업의 구조와 내실을 꼼꼼히 살피고, 공동 운명체로서의 절박함이 있다 보니 그저 빚 독촉에 그치지 않고 아이디어나 기술적 기여를 함께 진행하게 됩니다. 채무자는 일단 눈 먼 돈 빌려 쓰고 보자는 식의 모럴 해저드가 줄어들고, 중개 기관 역시 그저 기계적 중개인으로서 형식적 계약 의무만 이행하고 끝이라는 식의 무책임함이 줄어듭니다. 신용의 심사나 사업 타당성의 실사가 다분히 내실을 기하게 된다는 점에서, 개별 프로젝트의 성공적 진행 확률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이는 단지 사태의 긍정적 측면만 부각하려는 일방적 주장이 아닙니다. 2009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금융 산업은 전 세계 규모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슬람 금융으로, 타 권역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높은 수익률을 기록, 많은 관측자들로부터 대안으로서의 기대까지 품게 만들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이는 이슬람 금융의 구조를 보면 간단히 해명이 되는 현상입니다. 경기 활황- 기준 금리 인하 같은 일률적,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사업자가 추진하는 개별 건수의 전망에 따르는 금융이니, 신용 경색이나 연쇄 도산의 여파를 맞을 확률이 낮은 게 사실입니다.

 

대출금 원본 상환 보장을 위한 제도적 수단은,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민사법상의 저당권 제도와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만, 원본(원금) 변제의 큰 비중을 담보물 환매수로 해결한다는 데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걸 구태여 우리 식으로 따지면 소위 "강한 의미의 양도담보"와도 유사한데, 일단 채권자에게 확정적 소유권이 넘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은행이 대출 희망자에게 무조건 소유 부동산에 저당권부터 설정할 것을 강요하고 보는 천편일률적 관행과는 다르더군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게 이슬람 율법의 정신을 꼭 반영하는 취지도 아니라는 게 더 놀랍습니다. 오히려 성공적인 투자 은행의 활동을 위해선 이슬람 색채를 애써 내세우지 않으려 한다는 건데요. 특정 종교의 원리주의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별 프로젝트에서 채권-채무자 간의 협업이 더 강조되기 위함임을, 그들은 외부에 표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1970년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은, 무리하게 "무이자 계정 전환"을 통해 금융기관의 샤리아식 통제를 강요함으로써, 그나마 잘 돌아가던 경제를 경색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자 없는 은행"이란 착상은, 물론 종교적 명분의 도움을 거부하진 않지만, 종교색을 벗을 때 더 높은 실용성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저자의 통찰은 인류 문명사 3000년에 두루 미치고 있어서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대도시에서, 고리대 때문에 저소득층은 지속적으로 노예 계급의 창출원 노릇을 했고(디폴트 시 노예로 떨어짐), 이 때문에 인간 이하의 처지로 떨어져 심각한 사회 부조리의 근원을 만들거나, 반대로 노예 상태에서 탈출, 외부에서 힘을 키워 무력 침입, 문명 파괴를 통해 오히려 신 지배계급으로 대두하기도 하는 악순환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 어지러운 문명사의 흥망 부침에, 가혹한 이자 수취 제도가 원인으로 기능했기에, 율법이 이를 금지했을 뿐 그 반대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신약성서에도 나오는 예수의 일갈, "너희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더러운 돈놀이를 하느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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