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16 -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6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현대인은 참으로 나약하고 미덥지 못한 존재입니다. 아니, 자신만의 기풍과 지조를 유지하고 떳떳이 생활을 영위하면 될 것을, 왜 "트렌드"라는 변화무쌍하고 기복 심한 녀석을, 그것도 애써 개념화하는 수고까지 들여 물신 숭배나 하듯 끌려간다는 건지요. 우리의 선조님들께서 보셨으면 "그 녀석들 참 주견없다"며 호통깨나 내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내면을 알찬 실속으로 다지는 동시에, 나와 같은 시대, 공간을 호흡하는 동료들이 무슨 생각과 지향을 갖고 살아가는지 면밀히 살펴야 하는 의무를 동시에 이행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처지입니다. 내 생각만 갖고 그게 제일이라는 양 독단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마저 관철시킬 수 없는 고립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트렌드는 첫째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크고 작은 유행, 흐름을 선호하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이며, 둘째 이런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중요 참고 자료가 되는 인식의 틀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타자와 환경과의 유효한 소통을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한 꼴로 변했는데, 트렌드에 눈 감고 세상을 산다 함은 눈을 가리고 스포츠카를 모는 무모한 망동이나 진배 없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오늘의 트렌드가 무엇인지 진단을 받는 단계야말로, 가장 명석하고 현명하며 균형 잡힌 세계관을 지닌 석학을 거친 후에야, 소비자로서, 독자로서, 직장인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인격을 지닌 개인으로서 바른 처신을 할 수 있다며 안심할 수 있는 지경입니다. 아무에게나 "이것이 트렌드요"라고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나의 기본 인식틀을 허술하게 다루는 소이입니다. 김난도 교수님처럼 해박하시고 빈틈 없고 동시에 자신의 주장에 대해 집요할 만큼 책임을 지는 분이 내린 진단이라야, 우리 독자들이 안심하고 인식의 요람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이 시리즈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책의 절반은 작년판의 예측과 전망이 얼마나 적중했는지 그 반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며 호언하는 건 누구의 입으로부터나 쉽게 나오지만, 자기 반성을 흔쾌하며 거침 없이 공개된 장에서 공평무사한 기준으로 검증 받기란 참으로 고통스럽고도 감내하기 어렵습니다. 책의 절반이 이런자기 반성의 기조로 채워지고, 다음 해의 전망이 이 리뷰의 기반에서 시작한다는 것부터가 책의 신빙성을 확고히하는 근원이 됩니다. 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는 막연하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트렌드"를, 매우 섬세하고도 치밀한 사례를 들어 "예측"한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과하다 싶은 핸디캡을 지우고 시작하는 편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예측은, 시간이 지난 후 매우 혹독하고도 사항천착적인 비판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이 시리즈는 검증에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낼 뿐 아니라, 엄격한 검증 절차까지 (독자를 대신하여) 자청, 집행하고 있으니 차라리 독자가 그 성실성에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1인 미디어 전성시대에 대한 논의는 이미 4, 5년전부터 세대를 불문하고 향유와 생산이 보편화된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이 2016년판에서 또다시 취급함은(이미 이 시리즈의 지난 권들이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런 트렌드가 종전과는 양상과 색채를 달리하여 "진화"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작년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심드렁하게 읽어내려간 편이었으나, 최근 미디어에서 이 토픽 관련 각종 말썽과 사고, 우려가 다뤄지는 걸 보고 집필진의 혜안과 빼어난 센스에 감탄하게 되었네요.

Ethics on the Stage 역시 7, 8년 전부터 소비자 섹터의 자발적인 추동력을 확보한 트렌드입니다만(한국 기준으로도요), 최근의 소비자들이 개별 소비행위- 지극히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 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의 진화적 발전 양상을 볼 때 이 책 올해판에서 다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기획이 "너무 12간지의 두문자 맞추기에만 집착하는 것 아닌가" 같은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나, 제가 간접으로 전해 들은 제작 경로에 의하면 정반대입니다. 먼저 개념을 잡고, 이를 추리고 정제하여 대(大) 트렌드를 구체화하고, 중복되는 사항을 최소화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애크로님으로 이를 보기 좋게, 혹은 인문적 무게를 가미하여 제목을 정할 뿐이죠. 뿐만 아니라 이 Ethics on the Stage와 같은 논의야말로, 기업이 아닌 소비자의 지평에서 "트렌드"를 연구하고 정의하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는 유력한 예증에 가깝습니다.

All’s Well That Trends Well 은 물론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대사(이자 작품 제목)를 멋지게 패러디한 문장입니다만, 트렌드의 물적 지향을 넘어 정신적 구조를 절묘하게 짚어낸 챕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게 유행한다 저게 뜬다 같은 저널리즘식 서술은 사실 유효기간도 짧을 뿐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정신적 성장을 유도하기도 어렵습니다. 흔한 의미에서 트렌드가 무엇인지는 TV만 봐도, 친구만 부지런히 만나고 다녀도 감을 다 잡습니다. 표피적 현상을 넘어 사회의 생산, 소비 이면에 무슨 철학과 욕망이 숨겨져 있는지를 공부하는 것이, 이런 책을 독자가 읽는 이유입니다. 이런 장은 트렌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진단과 예측을 넘어 교과서적 인식 틀을 제공해 주는 멋진 서술이었습니다. 시리즈가 해가 갈수록 학문적 의미에서 알차지는 것도 애독자들이 해마다 이 신간을 기다리게 되는 중요한 보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패 DNA 비밀 - 실패퇴치 Knowhow 비법노트
한효신 지음 / 롱테일 오딧세이(Longtail Odyssey)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어떤 때는 크게 성공하는 사람보다 사소한 경우에도 실패를 잘 피해가는 사람이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저 사람 하나가 우리 팀 전체를 구했다고 할 만큼 한때 환호를 보내다가도, 그 성공보다 훨씬 경미한 실수 하나를 저지르면 몇 년 전의 그 큰 성과는 금세 잊힌 채 만인의 지탄을 받습니다. 성공 열 번을 단 한 번의 실수가 묻어 버립니다. 성공한 사람, 잘나가는 사람을 무조건 끌어내리려 드는 못난 속물들의 문제도 있고, 결국 조직의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흐르면 저급한 정치, 보신주의가 전체에 팽배하게 되어 회사의 장래는 물론 당장 현재를 위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의 걱정은 일차로 오너의 몫이며, 힘 없는 조직원은 일단 나 자신의 처세와 커리어 관리가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debacle, 즉 치명적인 실수, 실패를 어찌 해서든 피해 가는 게 중요한 처신의 요령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책의 처음부터 링컨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링컨이란 인물은 출생 시점부터 실패한 인물이었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게 진짜 능력"이라는 자조 섞인 진단도 요즘 많이 입에 오르내립니다만, 링컨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에도 그리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인생의 고비에서 굵직굵직한 결정에 임해서는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대표적인 게 바로 "결혼"입니다. 어쩌면 배경 좋고 무서운 아내(그의 장래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던)를 만난 덕에, 대통령이란 至上의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링컨은 실패를 똑똑하게 한 덕에, 빈도는 적으나 의미 깊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자잘한 성공은 많이 거두었지만, 인생의 큰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싸움에서 실패한 이들은, 결국 최후의 승자로 남지를 못했습니다. 이 책 2장에서는 링컨과 반대로 "필요한 상황에서 하필 실패"한 이들의 사례를, 미션의 실패, 목표의 실패, 가치의 실패로 분류합니다. 저는 이 중 거대 목표의 설정과 관련된 "가치의 실패"에 보다 집중하여 숙독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실패의 DNA가 따로 있다는 가정 하에 논의를 전개합니다. 확률의 법칙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려면, 모든 이가 일생에 절반 정도는 성공을 거둬야 맞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엄정한 수학의 원리에 조소를 보내는데요.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 안 되는 사람은 매번 안 되고, 잘 풀리는 사람은 언제나 행운이 따릅니다. 저자는 이런 얄궂은 결과를 놓고, 성공의 법칙은 일단 논의를 미룬 후, "왜 안 되는 사람은 운명적으로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매우 재미 있는 이야기를 풀어 줍니다.

KBS N SPORTS 채널에서 제작한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를 보면, 김재박씨 편의 경우 "선배 감독들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영리하게 얻었다"는 그의 술회가 나옵니다. 그라운드의 여우라는 별명 답게, 1, 2년도 채 못 가고 매번 경질되는 거물들의 행보를 보며, "나는 저런 식으로 하지 말아야 장수하는 지도자가 되겠구나" 같은 가르침을 얻은 거죠. 또다른 레전드인 한대화 씨의 경우,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 되어 온 후 언제나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선수들에게 "지는 것도 버릇이 된다"며 호되게 정신교육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언제나 지는 게 편한 사람들"의 예를 보며, 단 한 번의 실수로 저런 실패자들의 대열에 끼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잘나가는 지금 과연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깊은 숙고의 시간을 갖기를 권합니다. 일은 터지기 전에 막아야 하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
이원희 지음 / 주류성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이 자신의 근본을 바르게 아는 단계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뿌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인생은, 조상을 욕보이지 않기 위해서도 그 행동거지가반듯하고 도의에 어긋난 행동이 없습니다. 반면, 본바탕을 모르고 제 핏줄에 무슨 정신이 흐르는 지 깨달음이 없거나 부족한 이는, 언제나 경거망동을 일삼게 마련입니다.

이 책은 고대 법대를 졸업하신 전직 검사님이 집필하신 책이지만, 내용은 일본 고문헌, 구체적으로는 <고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만엽집> 일부에 등장하는 여러 어휘의 분석을 통해, 일본 상층 문화의 뿌리가 바로 우리 민족, 구체적으로 백제인임을 명쾌히 규명하는 논증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아 그거 어려운 책이겠구나.'라든가, '우리 민족 우월주의에 빠진 독단적 주장이 들어 있겠구나' 같은 선입견을 대뜸 떠올릴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근거 없는 선입견일 뿐입니다. 이 책은 깔끔하고 과학적인 편집을 취하며, 언어학적으로 타당한 논증을 펴고 있어 읽기가 쉽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은 언어학 주제를 넘어 우리 민족의 뿌리, 나아가 인접국 일본 민족의 근원이 어디인지, 역사적으로 심원한 통찰까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완독하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용이 난해하고 깊은 소양을 요해서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남도(전라, 경상) 쪽이 고향인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겠고요. 꼭 그쪽 방언에 익숙지 않더라도 우리말에 대해 기본적인 감각만 지니고 있다면 웬만해서는 흥미를 잃지 않을 만큼 피부에 와 닿고 쉬운 분석이 이뤄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완독이 오래 걸렸는가? 그것은 저자분에 대한, 독자로서 일종의 경쟁심이 작용해서입니다. 저자분은 중견 법조인으로서, 초보 수준의 일본어에조차 이해가 없으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 와중 간단한 일어 회화가 필요한 자리에 참석하실 일이 있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일어 공부를 시작하고, 어휘 학습을 하다 보니 어느덧 고어에까지 손을 대게 되시고, (저자 자신의 말씀을 빌리면) 직업에까지 변화가 생기셨다고 하는군요. 이 책을 펼쳐 보면 알 수 있지만, 언어학에 여간 소양이 있지 않고서야 이 같은 깊이의 내용을 저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자에게는 쉽게 읽힙니다(저자의 천착이 확고한 바탕과 일관성을 가진 덕분이죠). 과연 나라면 늦은 나이에 이런 성취를 보일 수 있을까. 그것도 초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직역인 법조인의 커리어를 지닌 처지라면, 이처럼이나 생소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학문의이해를 다질 수 있을까 하는 낙담, 자괴감 같은 심리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더욱 집중하여, 어딘가 허점이 있겠거니 한번 발견해 보자는 일종의 집착으로 더 열독을 하게도 되었구요.

이 책이 재미있는 건 일단 저자의 논증과 연구가 매우 치밀해서입니다.그저 이 분야의 명망 있는 권위서 몇 권을 독파했다고 해서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분명 기존의 연구가 닿지 못한 상당히 깊은 부분, 나아가 여태 명쾌히 해명되지 못한 여러 의문이 매우 설득력 있게 풀어헤쳐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네비" 같은 지명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현지의 석학들도 합리적인 해의가 이뤄지지 못한 판에, 저자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상식과 직관에 비추어 타당하기 이를 데 없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보이는 그 과정도, 전형적인 천재가 영감을 얻어 바른 길에 도달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저자의 희열이 지면을 타고 독자의 심중에 그대로 닿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책이 유익한 건 오히려 3부의 논증 덕택입니다. <일본서기>가 위조와 첨삭, 왜곡과 과장으로 점철되었다는 건 현지의 일부 양심 있는 학자와 우리 측의 태도였습니다만, 솔직히 독자로서 저는 그간 이 학설의 엄정한 중립성에 대해 그닥 자신이 없는 태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편할 대로 이 소리를 하고, 저 사람은 또 제 이익에 맞는 대로 저 소리를 떠드는 형국이 아닐지, 제3자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 특히 3부를 읽고 나서, 기본적으로 그들의 고사서가 후대의 사악한 손길에 의해 제멋대로의(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솜씨도 서툴게") 조작되었다는 쪽으로 심증을 완전히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론을 그들 고루하고 편협하며 정직하지도 못한 학계 인사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리야 물론 만무합니다만,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평범한 독자로서 저는 오랜 동안 풀리지 않거나 마음 속에 찜찜히 남던 짐이 말끔히 덜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자께서는 법조인 특유의 냉철하고 논리적이며 다각도로부터의 접근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그들 미개한 열도에 문화의 씨앗을 틔운 자랑스런 선구자요 지배자들임을 거의 의심 없이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 설득에 설복됨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평균적인 상식과 지능을 갖춘 "보편적 인간"이라는 조건으로 충분합니다.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해피 엔딩도 해피 엔딩이지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탐구 과정을 밟아 나가니 결국 우리의 자랑스런 뿌리가 나오더라는 그 결론이 너무나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저들 일본인들이 끝까지 과거를 반성치 않고 무도한 짓을 일삼는 것도, 다 제 과거에 대해 대단히 그릇된 인식에 머물러 있는 탓이 커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정 그 일부를 알고 난 후에야, 광명되고 축복된 미래를 정직하고 건실하게 설계할 수 있음도 또한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교과 과정의 일부로 이런 내용을 교육하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발랄하면서도 날카로운 논지 전개(그의 예리한 논리 동원 실력을 보면 의외로 이분 정통파구나 하는 평가가 나오죠)에만 익숙했던 나머지, 그가 우리 시대의 직면 과제에 대해 열심히 분석하고 던져 주는 실천적 해답에 정작 주의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는 순수 이론가로서의 면모 외에, 이처럼 저널리즘적 스탠스를 진지하게 유지하는 논객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인문과학" 저술로보다는, "정책 제안" 기조로 간주하고 읽었습니다.

"죽은 경제학자"에게서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끄집어 낼 수 있음은 "그 고인"들이 진정 석학이요 현인이었던 까닭이지 우리 독자들이 딱히 현명하고 눈밝아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현재를 버젓이 사는 그 고명한 이론가, 교수님, 이데올로그들이 정작 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 놓는다면 그건 소명을 포기한 소이일 뿐 아니라, 망자, 고인에 부끄러운 처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진보된, 혹은 그저 최신이기만 해도 그 자체가 축복인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시대의 질문에 답을 못 한다면 지식인이 못 됨 이전에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못함이나 같습니다. 지젝의 글은 그래서 읽기에 재밌을 뿐 아니라, 질문인지도 몰랐던 물음을 먼저 떠올려 주고 그에 대한 답(물론 모든 독자로부터 동의를 받을 내용은 아닙니다- 달리 "논쟁적인 지젝"이겠습니까?)까지, 창의적으로, 신랄하게, 그리고 명징한 틀에 담아 제시받는 그런 쾌감이 있습니다.


타자로서의 이슬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유럽은 현재 오랜 타자, 숙적, 이웃, 그리고 자아를 비춰 볼 거울인 이슬람과 전면적 접촉을 겪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오스만 제국의 침공, 서구 제국주의의 동점 등이 교차한 시기에도, 이 "타자"와의 접촉은 부분적이었을망정 전면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들과의 만남은, "대체, 오랜동안 반은 적대감으로 반은 낯섦으로 대해 온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근본적 자문을 제기하는 국면입니다. 아래로부터는 난민을 만납니다. 권력의 심각한 진공기를 겪고 있는 그들의 영토로부터, 임시로 상층부를 지배하는 팩션으로부터는 "테러"를 선사받습니다. 한편으로 유럽인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새롭게 "자신과 타자"에 대한 각성의 눈을 뜨게 된 "셈 혈통의 시민권자, 혹은 불법 이민자"들과 다른 성격의 소통을 요구 받습니다. 위에서, 아래에서, 안에서, 밖에서, 사방에서 밀려오는 이슬람의 물결에 유럽은 지금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지젝은 두 방면의 대처에 공히 눈을 돌립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열혈 좌파인 그가 대뜸 내는 일성은 "배타적 우월주의"에 대한 맹렬한 경계입니다. 그가 예시하는 여러 지난 역사의 사건들은, 그의 애독자라면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게 부르지만, 역시 날카로운 그의 개성이 스민 논리 속에 여전한 "뜨끔함"을 낳습니다. 다음으로 관점(과 상상력)의 한계가 역력하나 인문학자의 성실함과 공평성을 견지해야 할 그는, "규제적 이념"의 장벽을 넘지 못할망정 열심히 무슬림의 내밀한 정신 영역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 일 것이다. 그들이라면 아마...라고 생각/선택할 것이다."

쉽게 요약해서 그가 내놓은 해법은 소박한 연대의 대안입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소속된 지근 거리의 집단, 혹은 초고위급 준거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언제나처럼 지젝 특유의 편한 해법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타인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그 모든 전통, 개성, 장벽 따위는 (내면과의 정직한 대화만을 통해서도) 무의미해지는 그 놀라운 인식을 겪어 볼 것을 조언하는 식으로, 논의의 소결을 내립니다. 이 역시 서양 철학의 오랜 동안 생사를 걸고 논쟁해 온,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구체와 추상의 모순, 종개념과 유개념의 존재론적 길항 등이 그대로 환기됩니다.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이 먼저인가, 아니면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해야 하는 이스라엘 군인으로서의 의무가 먼저인가?" 지젝 역시 겸손하게 자신의 논변 한계를 털어 놓습니다. "어디까지가 일반화의 한계일지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결론을 두부 자르듯 내 놓아서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 활화산 같은 논쟁점을 즐거이 독자가 어질러 놓게 부추기는, 모범생 집에 놀러와 청솟거리만 잔뜩 만들어 놓고 가는 말썽쟁이 친구를 전송하는 느낌으로 책을 덮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지엔은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다 - 프랑스 여자들의 사랑, 패션, 그리고 나쁜 습관까지
캐롤린 드 메그레 외 지음, 허봉금 옮김 / 민음인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렌치 시크는 자신을 당당하게 여기는 애티튜드에서 시작된다." ㅎㅎ 벌써 이 문장부터가 보그체의 위화감을 풍기고 시작합니다만, 해당 문체의 효용이 여러 차원에서 대체 불가능함을 우리가 잘 알듯, 이 문장으로 상징되는 책의 스타일, 이미지 환기, 상념의 구체화 효과 등도 사실 다른 수단으로 달성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어떤 분위기는, 어떤 만족과 쾌감은, 특정 매개를 통해 맛 보는 게 유일한 옵션입니다.

타자나 오브제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이 어떤 선택을 통해 자아를 표현하거나("표현"이라는 단어 속에 벌써 타자화에의 웅크림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요) 자각하려 할 때, 그 주요 미디엄이 패션이라고 단언함은 성차별적 뉘앙스를 품음인가. 혹은 이 역시 의식의 과잉과 담론의 폭주인가.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해 이 책은 가장 소박하고, 알기 쉽고,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해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이 책을 패션 레퍼런스로 받아들일 건지, 인문 에세이로 읽을 건지, (정말 드물겠지만) 철학의 미세한 귀퉁이 한 자락을 포착한 게시록으로 읽을 건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입니다. 두 가지 이상의 스탠스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독자는 축복을 받은 거고요.

우선 어떤 패션의 코드를 잡기 위해, 일일이 귀납적으로 구체의 끝을 잡는 체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들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녀들의 마인드가 어떤 꼴로 세팅되었는지만 감을 잡았다면, 나머지는 본인의 창의에 의해 펼쳐 나갈 수 있고, 알고 보면 이런 자세야말로 파리지엔의 패션 본체의 연기, 아니 발현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하죠. 모방하는 파리지엔이란 형용의 모순입니다. 파리는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혹은 무엇이라도)를 입는 계집애보다, "짭"을 더 경멸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말도 이미 낡았습니다. 물은 도도히 초 단위의 분할적 관측을 허용하지 않고 흐를 뿐인데, 어느 낡은 개념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영혼의 날갯짓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게 자기 검열입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싸게 보이지 않을까? 이런 옷 속에서 나의 끈끈한 욕구가 엿보이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닌다고 해서 누가 나의 해방된 영혼을 인식해 줄까?(=차라리 관습에 편안히 굴복) 이 모두가 피곤하고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굴레입니다. "파리지엔의 패션"은 이 모두에 내리는 고르디우스의 칼날입니다. "이 옷을 입고 니가 온전히 만족할 때 비로소 정직한, 자연스럽게 뻐길 수 있는 파리지엔이 된다." 전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철학적으로건 역사적으로건 현실에서의 선택 기준 마련이건 왜 끝까지 "프랑스적인 것"이 확고한 참고로 기능하는지 비로소 실감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