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은 죽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희재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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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미국은 그 출발은 미미하였으나 스스로의 손으로 일군 거대한 제국 위에 발을 딛고 세계를 향해 호령하는 비즈니스의 타이쿤들을 실제로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Kane Bendigo 역시, 실존의 여러 사업가들을 요것조것 믹스한 듯 매력적인 실감을 풍기는 캐릭터입니다. 돈, 혹은 여타의 재산이란 장삼이사의 이런저런 초라한 손들에 흩어져 있으면 별 힘을 못 쓰는 법인데, 한 사람의 손 안에 움켜쥐어져 있으니 이처럼이나 놀라운 일들을 해 내는 군요.

케인 벤디고는 섬 하나를 소유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호위대와 소규모의 해군, 육군 등을 직접 거느리는 군주입니다. 나이도 아직 40을 넘기지 않아 보일 만큼 활력이 가득한 미남인데, 보통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이처럼 정신의 활력이 육체적 매력까지를 지탱해 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라고 일단은 해 두죠). 이 정도 부와 권력과 원대한 비전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군주라 불려 마땅하다... 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는 진짜로 미합중국 대통령(이라고 명시되진 않았으나 독자는 당연히 눈치챌 수 있죠)을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에게 승인까지 받은, 진짜 국가 원수이자 주권자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런 일은 불가능하며, 분별 있는 독자에게는 소설의 매력을 다소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게 유감입니다. 모나코니 안도라니 하는 공국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아직까지 독립국가 신분을 유지하는 게 아니듯, 국제 관계란 힘만 있다고 바로 독립적 단위로 승인받을 수 없습니다.(하물며... 그러나 스포일러이니 언급 자제)

어쨌든 그렇다 치고, 퀸 부자는 이 나라에서 국내 살림을 도맡아하는 총리이자 케인 벤디고의 동생인 아벨 벤디고에게 특별히 초빙되어, 예의 섬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형이자 국가 원수이며 벤디고 제국의 창립자이자 세계를 뒤흔들 만큼의 영향력(실제로 남미 여러 국가의 정권들이 이 사람의 입김으로 교체되었다는 설정입니다)을 발산하는 케인이, 누구에게로부터 지속적으로 암살 협박을 받고 있다는 사정 때문입니다. 퀸 부자는 이런 장난(워낙 엄중한 경호를 받는데다, 상상을 초월하는 만능 스포츠맨인 케인을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으므로)을 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 줄 것을 의뢰받습니다. 막상 대면해 본 "킹" 케인 벤디고는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 같았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 케인의 본명은 사실 카인이었답니다. 동생을 죽인 성경 속의 그 인물이죠." 표기상의 한계, 오해, 무신경 등이 결합하여 오히려 절묘한 분별 효과를 낸 셈인데, 영어 원문에는 케인=Kane, 카인=Cain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의 발음은 같습니다. 따라서, 발음이 아니라 철자를 봐야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한국어판에서는 이 사실을 알 수 없고, 뭐 알 필요도 없긴 합니다). 이 한국어판을 보면 퀸 부자가 케인의 의상실을 수색하며 "지팡이는 없냐?"고 드립을 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cane(지팡이)를 염두에 둔 말장난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원서 대조는 안 해 봤으나 아마 맞을 듯).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까요?" 헌데, 찾아 보면 의외로 많다(성공한 인물들 다수 포함)는 게 함정이고, 그 박식한 작가님도 이야기를 꾸며 내기 위해 좀 오버한 면이 있네요. 어느 분에 대해 육체적 특징을 장황히 언급한 것도 그에게 시선이 대뜸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한 속 보이는 장치였고(귀족 특유의 박탈감과 정의감의 발로였다는 심리적 장치도 곁들이시지 그랬나요), 어느 물리학 박사가 죽은 이유도 원자 폭탄 제조 회유를 거절해서라는 사연이 들어 있었어야 아귀가 맞는데 아마 떡밥 회수가 안 된 듯합니다.

멋진 마술이긴 한데 그 트릭을 알고 보면 애 입에서도 욕이 나오죠. 이 소설은 (퀸의 다른 작품처럼) 멋진 착시 효과를 통해 독자를 완전히 사로잡는 finesse를 자랑하지만, 사실 내실이 좀 부족합니다. 케인의 암살이 미수에 그쳤을 때, 퀸 부자가 계속 섬에 붙들려 있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건이 이미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는데 독자가 뭘 궁금해해야 할지 좀 더 넉넉한 발판을 깔아 놓지 못한 건 마음에 안 듭니다(이것부터가 범인의 정체를 다 폭로하는 거나 마찬가지). 살인 미수의 진상은 너무도 빤히 드러납니다. 아무리 미숙한 독자라 해도 유다의 쌩쇼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테고, 그 밀실 트릭의 경위 역시 조금만 머리를 쓰면 바로 눈치챌 수 있어서 별로 자랑할 마음도 안 생기네요. 밀실 트릭의 경위뿐 아니라, "왜 퀸 부자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바보 아닌 이상 다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하필 3형제가 라이츠빌 출신이었다는 배경 설명도 우습고, 엘러리라면 구태여 고향에 갔다 올 필요도 없이 진상을 모두 파악했을 겁니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긴 하더군요. 시리즈 다른 작품을 바로 손에 잡고 읽을 마음이 생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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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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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명의 동과 서를 가르기 이전, 지식인이라면 문화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한탄하기 전에 보편이라는 이름의 배로 무해통항을 향유할 방법은 없는지 먼저 고민할 만합니다. 인류의 공영과 해방, 자유, 평등, 깨끗한 환경의 혜택 등은 누구나 공감을 보낼 수 있는 가치입니다. 혹여 좌파 지식인으로서 젊은 시절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분들이라면, "혁명", "자유", "민주주의" 등의 화두(말 그대로 화두더군요)로 보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레지 드브레는 벌써 인생의 황혼기를 한창 넘긴 분이고, 겸손되게 "고령으로 인한 무능"을 스스로 언급할 만큼 지긋한 나이지만, 편지들을 구성하는 문장에서 우러나는 지적 활력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듯합니다. 자오팅양(한국식 독음이라면 조정양)은 중국 철학계를 대표할 만한 리쩌허우 박사의 수제자로서, 학자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다 할 세대입니다(그래서 나이로는 저 드브레의 아들뻘이죠) "트러블 메이커"라는 달갑지 않은 비판도 들어가면서 학계와 독자의 인식 지평을 여러 신선한 시도를 통해 넓힌 공헌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분의 "천하 체계"를 다룬 개념서가 번역되어 나왔고,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중에서 그 개요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두 분 다 자신의 속한 체제, 민족, 국가 안에서 이단아처럼 인식되는 면이 있는 지식인들입니다. 드브레는 대학생 시절 체 게바라 등의 혁명 활동에 직접 가담하다 징역형까지 선고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자오팅양은 좀 놀랍게도 "유물론적 변증법"에 과하게 집착할 필요 없으며, 관념론의 출발점에 서서 세계의 인식은 같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폅니다. 이런 생각이 현 중국 공산당 수뇌부에 마냥 마뜩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정통파 사관에 의하면 어차피 중국사 3대 혁명 중 앞의 두 개는 최종의 단계에 의해 지양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물입니다. 허나 자오 박사는 첫째 혁명의 산물인 주 무왕의 체제에서 큰 의의를 찾고, 이것이 현대 국제 정치 체제 확립에도 큰 시사를 준다는 쪽입니다.

한편 드브레 역시, 아들뻘 학자에게 보내는 서신치고는 정말 겸손하고 정중한 어조로(사실 좌파 지식인치고도 대단히 우아한 말투를 구사합니다) 대담하고 속 깊은 소통을 시도합니다. "진-한의 혁명은 그저 궁정 쿠데타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이 왜 혁명인가?" 아마도 드브레는 자오 박사의 대표작을 진지하게 읽은 후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을 이처럼 제기한 듯합니다. 하지만 이 질의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기본 사실을 착오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네요. 시황제의 진 건국이든, 한 고제의 군국제 확립이든, 혹은 무제의 본격 군현제 실시이든 간에, 이 "혁명"은 기존 봉건제의 근본적 한계를 뛰어넘은, 동아시아 세계 체제의 근본적 요소에 초석을 놓은 말 그대로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위, 진, 수, 당, 송 등의 등장은 궁정 쿠데타로 볼 여지가 있지만 말이죠.

"혁명"이 아래로부터 민중의 참여를 그 필수 요소로 삼는지 여부를 놓고도 두 지식인은 적잖은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드브레는 처음부터 68 혁명 세대의 일부이므로, 특히 그의 후견인 격이었던 사르트르가 고안한 "연대와 박애 정신에 기반한 폭력"에 대해 매우 우호적입니다. 한편 그는 우둔하고 투박한 하층민이 아무 개념 없이 미신적 국부 신앙 비슷하게 마오를 숭배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교육과 인식이 미비한 하층민은, 스스로 좌파 정치 이념을 뿌듯한 각성의 지표인 양 과시적으로 언표하면서도, 그 아득한 조상뻘 원류가 될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시합니다.

이런 드브레에 대해, 자오 박사는 "지금은 cogito가 아닌 facio의 시대"라며 자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물론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논변에서 나온 용어지만, 사실 20세기 들어 바로 드브레의 스승이자 후견자인 사르트르 자신이 <존재와 무>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그 실존적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죠. 자오 박사가 이 점을 의식하고(따라서 다분히 도발적 의도에서) 이 토픽을 꺼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다 불꽃 튀는 논쟁의 향연을 벌이기보다는, 너무 정중하고 우아한 담론을 꾸려 가는 모습이라서요.

드브레는 설혹 자유롭고 깨인 지성을 가진 개인이라 해도, 그 소속 민족의 집단적 인식 한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가령 한(漢)족은 얼마나 좡 족(광서 장족)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지 같은 다소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까지도 포함합니다. 이에 대해 자오 박사는 "12세기에 동양으로 유입된 유대인들조차 아무 충돌 없이 동화시킨 게 중화의 체질"이라며, 고정된 틀이나 제약 없이 모든 문화 요소를 수용할 수 있었던 지난 역사를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비교적 이론의 여지 없이 합의를 이루는 대목은 "탐욕스러운 자본에 공동 대응하는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민중은 처음에 신민(臣民)의 지위에서 시민의 위상을, 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쟁취 획득하였으나, 이제 자본에 의해 강제로 "고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데 두 분은 거의 충돌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오 박사는 모호하고 위험하며 내용이 거의 박탈되기까지 한 democracy 대신, 자신이 입안한 publicracy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드브레 역시, 중세에 가톨릭의 라틴어,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신앙(이 말 안에 어느 정도 회의주의가 내포된 거죠. 저는 소위 레지스탕스 신화에 대해 "아름다운 거짓말"로 규정하는 드브레의 이 책에서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을 대신할 만한 그 어떤 "보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를 표현합니다. 서신 왕래를 통한 지식인들의 의견 교환 역시, 인류가 "더 많은 빛, 광채"를 갈구하는 오랜 전통 속에 유지해 온 아름다운 소통의 장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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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상속.증여 만점세무
세무법인 택스홈앤아웃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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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서문에서 "상속, 증여 관련 세무 처리는 더 이상 재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말이 좀 새삼스럽게 들릴 만큼, 현대 사회에서 재산의 유무상 이전을 둘러싸고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은, 웬만한 경제 활동 참여자라면 거의 보편적으로 체감하는 편입니다. 이 문제는 이제 사원끼리 점심 먹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수준이라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여튼 양적으로는 예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요로워지다 보니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재산을 매개로 하여 대부분 맺어지는 게 원칙이 되었고, 재산이 움직이는 곳에 (달갑지는 않지만) 세금의 부과가 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기 마련이라서죠.

특히 증여의 경우, 웬만큼 재산을 모아 둔 부모님의 입장에서 인생의 어떤 단계, 과정에서건 해결을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며, 유학이나 결혼 등 수시로 찾아오는 굵직굵직한 고비에서 피해갈 수 없는 난제이기도 합니다. 증여는 부모-자식 간 뿐 아니라, 절세 등의 목적을 위해 배우자 사이에서도 행해지며, 간혹 표면적으로 꺼내기 어려운 여러 다른 이유(?) 때문에 형제, 기타 특수 관계자(이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되죠) 사이에서도 이뤄집니다. 상속은 당사자(대개는 부모님)의 사망이라는, 일생에 기껏해야 한두 번인 계기로 겪게 되는 법률사건이지만, 증여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일 년 중에도 여러 번 골머리를 앓게 하는(수증 자체야 해피해도) 세무 문제를 반드시 유발합니다. 소홀히 다루다가는 금전적 손실도 크게 입을 뿐 아니라, 조세범으로 몰려 치명적 불이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상속, 증여 관련하여 평범한 시민들이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여러 사례를 뽑아, 이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해법을 쉽게 가르쳐 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물론 상속-증여 관련 세제의 전모를 알려면 최소 학부 과정 한 학기 분량의 수업을 들어야 하겠지만, 중산층이 평생 살면서 마주치는 세무 문제란 어느 정도 유형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모든 난관을 원칙부터 캐고 들어가는 식으로 대처하는 건 비능률적입니다. 물론 세무 전문가에게 구체적인 상담을 받는 편이 낫겠지만, 납세자 자신이 대강은 개념을 잡고 있어야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릴 때 최종 선택을 하기가 쉽습니다.

p138에 보면, 아버지의 정기예금을 담보로 하여 대출을 받고자 하는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금이 담보가 된다는 상황 자체가 잘 이해 안 되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보통 자유저축형(입출금이 자유로운 계좌)의 경우, 통장 앞부분에 장황히 나오는 약관대로 "양도, 담보 제공" 등 대부분이 허용 안 됩니다. 사례에서 "정기예금"이기 때문에 담보 제공이 가능한 겁니다.

여튼 이 아버지의 예금이, 아들에게 증여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들이 돈 빌릴 때 담보로 제공된다는 것뿐인데, 왜 증여세가 부과되는지 의아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법규 명문과 국세청의 태도는 "담보 제공을 일종의 용역(서비스)로 보아, 무상으로 제공되는 편익으로 간주하여" 이에 증여세를 부과한다는 취지입니다. 아마 이렇게 표현해야 일반 대중에게 납득이 된다고 판단했던 같은데, 사실 재산권 중 "물권"의 경우 소유권 유형이 있고, 용익형이 있고, 담보형이 있습니다. 빚을 질 때 제3자가 담보를 제공하는 것도 재산을 직접 증여하는 만큼이나 사회 생활에서 상당한 편익을 주는 결과이며, 물권법 질서의 기본형을 고려할 때 이게 오히려 형평에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출금 상환을 못할 때 담보로 제공된 예금은 채권의 만족에 충당됩니다.

다만 그저 담보의 제공이, 완전한 소유권 이전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는 없으므로, 법은 담보 수증인(담보를 받은 사람- 위 사례에서 아들)이 실제로 이익을 본 금액이 일천만원을 넘길 경우에만 과세합니다. 사실 이것도 그저 형평성의 차원에서 해석상 과세되던 건데, "조세법정주의"에 어긋난다고 해서 법원에서 패소 판결하는 게 많았죠. 이제는 실정법으로 정해진 만큼 반드시 신경 써야 하는 문제가 되었고요. 이 점만 봐도 증여세제가 평범한 중산층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지 잘 알 수 있습니다.

p133에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사례가 나옵니다. 형이 동생에게(동생이므로 그저 특수관계자일 뿐 배우자, 직계 존비속과 다른 취급입니다) 아파트를 증여할 경우, 5년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 C에게) 처분하면, 그 취득가액은 형이 동생에게 아파트를 줬을 당시가 아니라, 형 자신이 아파트를 취득할 당시의 가격으로 잡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양도 수익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죠.

(책에 그런 설명은 없지만) 이런 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양도 소득이 얼마든 간에 단일 세율이 적용되는 게 아니라, 금액이 늘어나면 세율 자체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누진세). 제가 다른 예를 만들어서 좀 들어 보겠습니다. 1) 한 번으로 1억 6천만원을 남긴 거래와, 2) 두 번에 걸쳐 각각 8천만원을 남긴 거래가 있다면, 1)의 경우 6천 8십만 원을 납부해야 하지만, 2)의 경우 두 사람이 낸 세금을 합쳐도 3840만원에 그칩니다. 당사자가 남남이면 상관 없는데, 만약 2)의 경우 A→B→C에서 앞의 A와 B가 부부다, 뭐 이러면 이 집 사람들은 다른 납세자에 비해 3천만원 가까운 세금을 덜 내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걸 막자는 게 제도의 취지입니다.

p102를 보시면 재미있는 사례가 또 나옵니다. "증여세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 일단 자녀가 그럴 만한 소득이 없어 보이는데도 갑자기 아파트나 고가의 재산을 취득했다, 이러면 세무 당국에서는 일단 주의를 기울인 후, 특별한 사정이 없어 보이면 "증여로 인해 이 재산을 얻었다"고 추정하여, 당사자가 증여 사실에 대해 신고를 하건 말건 바로 증여세를 부과합니다. "증여 받았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같은 항변은 안 통합니다. 반대로, 당사자가 "이 돈은 내가 노력하여 번 돈"이라는 증명을 해야 이 처분을 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금출처 소명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업 소득, 근로 소득, 이자- 배당 소득 등 자신이 세금을 납부한 실적이 있으면, 그런 과거의 소득을 기초로 내가 지금 이 재산을 살 수 있었다는 소명이 되는 거죠. 그 소득은 이미 세금 부과가 한 차례 이뤄졌으므로, 다시 증여세(혹은 무슨 세금이든)를 물 필요가 없게 됩니다. p102밑에 "본인"이라고 된 건, 아버지 박종부씨가 아니라 그 대학생 딸을 가리키는 겁니다. 요즘 어떤 재산가들의 경우, 자녀에게 작은 사업체라도 차려 주고(혹은 대기업에 취직시키고) 어떤 경제활동의 외관을 갖추는 건 이런 이유도 있는 겁니다. "내가 증여한 게 아니라 지가 노력해서 번 돈이다." 이런 어떤.. 명분(?)을 만들어 주는 거죠. 사업소득과 증여 이익은 부과되는 세율 면에서 차이가 크니까요.

증여의 덩치가 클 경우 증여세도 당연히 액수가 큽니다. 이때 부모님 입장에서 쿨하게 증여세도 같이 내 주는 것도 흔히 봅니다. 문제는, 세무서에 신고할 경우 증여세 포함분도 같이 신고를 해야지(즉, 본래 주기로 했던 돈+ 세금으로 낼 돈), 원 증여액만 신고를 하면 결과적으로 세금 포탈이 된다는 겁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런 걸 이해 못하는 분들(주로 당대에 갑자기 돈 번 분들)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고, 왜 세금에 세금을 또 물리냐고 항의하는 모습도 봅니다. 이건 만들어진 지 한 세기도 넘은 관행이며, 또 세금은 문명국 어느 나라나 "세금에 세금이 또 붙는" 구조입니다. 이런 게 낯설다면 자신은 부자들과 달리 많은 세금 안 내고 편안히 살아왔구나 하며 좀 수긍도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부자들이야 다 자기들 나름대로 서민이 안 겪는 고생을 따로 하고 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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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상인들 - 프란치스코 교황 vs 부패한 바티칸
잔루이지 누치 지음, 소하영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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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재산이란 누구의 재산도 아니다." 즉 먼저 약삭빠르게 손을 뻗어 가로채는 자가 임자라는 뜻인데, 이런 도둑질과 비리, 사기 문제는 어느 나라의 공적 영역에나 존재합니다. 문제는 최고 권력자와 대중이 어느 정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근절하려는 의지를 가졌느냐 하는 점이겠죠. 무엇보다 우리 한국도 이런 구조적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 책은 더욱 큰 실감으로 독자(종교 불문)에게 다가옵니다.

이 책의 저자, 그리고 실상을 잘 아는 내, 외부 관계자들의 시각에 따르면, 바티칸 시국, 혹은 교황청의 재정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지경이라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헌금의 감소이며, 둘째 이유는 관성적으로 지출을 늘려 가려는(딱히 이유도 없습니다) 조직의 생리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한층 더하는 건, 영문 모를 돈이 자꾸만 교회 밖으로 새어나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오랜 세월 동안 바티칸의 관료제에 몸을 담아 온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직무상의 무능 탓에 교황청의 살림을 똑바로 챙기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힌 비밀스러운 사연을 다룹니다. 놀라운 건 추기경, 주교의 직위를 지닌 일부 고위 성직자들이, 일반인보다도 훨씬 못한 도덕성으로, 순전히 개인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뻔뻔스러운 횡령과 사기, 배임을 저질러 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성스럽고 고귀한 목적을 가진 조직이나 활동이라 해도, 물적 기반이 없으면 단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유능하고 청렴한 회계 책임자, 그리고 재정 정책 입안, 집행자는 어느 경우에건 필요합니다. 이런 방대한 조직(더군다나 유구한 역사의)에서 그런 일을 맡는다면, 처음에는 적성이 뛰어나고 투명한 관리를 이어나갈 의지가 있었기에 그 자리에 임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최고 수장(물론 교황)이 바뀌어도, 업무의 연속성을 위해 재정 실무자가 계속 자리를 지키다 보면 자연히 타성에 빠지거나 부정 부패의 유혹, 음모에 연루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설사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 줘도,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비슷한 성향의 인물, 혹은 공모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을 두고 이어 온 구조적 비리와 모순이, 전임 교황 대 부터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다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그대로 방치했다간 조직의 붕괴를 부를 수도 있다는 거죠. 천 수 백년을 이어온 바티칸이 금전 문제로 파탄에 직면한다면 세계사적 사건(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인들 누구나 알다시피 소탈하고 청렴하며 정의감 넘치는 성향으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해 온 진보적인 성직자입니다. 용기 있는 성품 답게,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티칸의 비리 문제를 손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명령을 직접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COSEA라는 독립적 위원회를 새로 조직해서, 교황청의 공식 기구들에 대해 행정의 투명성을 면밀히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 책은 교황의 명을 받은 위원회, COSEA의 분투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COSEA의 영문 명칭이 책에도 나와 있지만, 왠지 약어와 본 이름이 잘 안 맞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COSEA의 원어는 이탈리아어이기 때문이죠. 이탈리아는 본디 르네상스 도시 국가들의 할거 시절에도 부정과 비리가 많아 늘 말썽이었고, 심지어 당시 교황청 역시 각종 검은 세력의 음모와 부패가 활기를 치지 않을 날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로마의 작은 구역을 차지하는 시국(市國)이나, 반도 대부분을 점유하는 본국(?) 이탈리아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도둑들"이 활개치는 건 중세와 현대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에 실린 비리, 음모, 범죄 내용들도, 어떤 단일 세력이 조직적으로 바티칸을 좀먹는다기보단, 고만고만한 부패 인사들이 느슨한 담합을 이뤄, 푼돈, 때로는 목돈을 빼돌린다는 게 적합한 표현 같습니다.

물론 그들은 전체의 운명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싶을 때는 놀라운 협동심을 보이기도(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자로서 제가 내린 결론은, 어떤 항구적 조직세를 이룰 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는 쪽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리메이슨" 혹은 "오푸스 데이" 같은 평신도 조직을 (책 전체를 통틀어) 두어 번 거론하는데, 유심히 살펴 읽었습니다만 적어도 이 책 중에서는 분명한 근거를 갖고 이들 조직을 언급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 책의 포커스는, 바티칸 관료제 내에 암약하는 몇몇 좀도둑들과 이들을 비호하는 고위 성직자들에 대해 맞춰져 있습니다.

뒤가 구린 성직자들은 자신의 명령을 군말 없이 수행할 하수인을 찾기 위해, 역시 떳떳지 못한 일부 하위 성직자들의 뒤를 봐 주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아성애 혐의로 여러 번 기소(공식적, 비공식적)의 대상이 된 사제를 비호한 칼카뇨 추기경같은 이입니다(어디까지나 이 책 저자의 견해에서 그렇다는 거구요). 바티칸 행정처 사무총장으로 오래 재직한 주세페 시아카 같은 이는, 온갖 불투명한 회계 처리의 블랙홀과도 같은 배후로 지목됩니다. 이런 인물들은 당대에 갓 진입한 실력자라기보다, 몇 대에 걸쳐 조직과 친숙한(?) 비리의 심장부에 있던 이전의 거물들과 혈연, 지연 등으로 얽힌 연고를 갖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의 위원회가 비리의 핵심을 향해 압박해 들어오자, 이들 업무(그리고 교황의 직분)에 가장 중요한 부서 사무실, 공관의 내밀한 곳이 일단의 절도범에 의해 피습, 침입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중요한 기밀 서류가 사라졌지만, 정작 의미심장한 건 이 사건이 벌어진 방식입니다. 수사 결과, 절도단은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가장 능률적인 방법으로(비번 등을 훤히 알고), 필요한 핵심만 털어서 빠져 나갔습니다. 도둑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당신들(교황 측)의 업무를 교란, 파괴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였죠. 도난물이 목적이 아니라 절도, 침입 행위 자체가 목표요 메시지였다는 뜻입니다.

교황의 개혁 작업은 지지부진합니다. 사실 COSEA 멤버 면면을 보면 청렴하고 의욕적일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경륜 면에서 경량급 인사들입니다. 초기 조사 활동 시기에 각종 기구에 협력을 요청하면, 교황의 위임을 받은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나옵니다. 이제 의미심장한 위협까지 받고 있으니 사정은 더 나빠지겠죠. 한편 재정 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뚜렷한 성과를 못 내었기에 교황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펠 추기경 같은 인사가 의욕을 보이고, 말도 탈도 많던 국무원장 직위가 "교황청 사무국장(papal secretary)"로 축소 조정되며(교황청 내 제반 기구의 조직도에 대해선 책 p5를 참조하십시오), 경제재정 정책을 총괄할 부서가 신설되는 등의 움직임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비리의 당사자들은 이탈리아 경찰, 검찰, 법원에 의해 구금, 수사, 평결을 받는데 이는 라테란 협약에 의거, 교황의 재가가 최종적으로 이뤄지면 가능한 절차입니다(바티칸에서 그런 사법 인력을 다 보유하기 힘들겠죠). 교황이 이 절차를 허가하는 경우, 사실 스스로 주권을 일부 포기하는 셈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하지만 조직 자체가 웜낙 큰 위기에 봉착했다고 하며, 교황 개인의 의지도 단호하다고 하니 지켜 볼 일입니다. 내부와 외부의 적들에 공히 맞서 싸우는 그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성전의 상인들이란 제목은 신약 복음서의 "성전 정화" 기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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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인생의 문장들
오다시마 유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푸른숲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인생의 문장"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인생 내내를 통해 두고두고 곁에서 참고하거나 나 자신을 돌아볼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문장을 가리켜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은 사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충분하지만, 그렇게 수 없이 많은 문장 중 무엇을 가리고 추려 하나의 엄선된 앤설러지를 이루는 작업은 그 편집자의 일관된 세계관과 철학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내 셰익스피어 연구에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오다시마 유시 노교수가 일반 대중을 위해 이렇게 예쁘게 묶어낸 한 권의 책은, 셰익스피어라는 거장 말고도 우리 시대 깊은 교양과 높은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석학을 우리 독자가 따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뜻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노교수님의 관점이, 현대 수정주의 트렌드와 그리 타협하지 않는 경향이라는 점에서 마음 편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문적 경향성이 이 책 안에 짙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젊어서 한 명의 열혈 초보 연극배우로서 갖은 정열을 다해 해석하고 포옹했던 텍스트,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한 문호의 진지한 탐로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원작자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더 먼저 읽힙니다. 다음으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젊어서는 청춘 특유의 불꽃 같은 열정, 나이 들어서는 모든 풍파와 애로의 기억을 한 구석으로 치워두고는, 그저 잔잔한 관조의 마음으로 지난 역정을 돌이켜 보는 달관의 심성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이 정화, 이 화체의 절절한 문장, 절실한 구절들에, 이제 인생의 황혼에 서서 자신과 세계를 찬찬히 통찰하는 한 노교수의 담담한 독백을 들어 본다는 의의가 크게 스며 있습니다. 그러니 독자가 젊으면 젊은 대로, 활화산 같이 타오르는(타올랐던) 청춘의 표백에 귀 기울일 일이고, 나이 드신 층이면 역시 그에 걸맞는 묵직한 반추와 성찰의 아포리즘에 깊이 빠져 들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의 챕터에 고루 인용됩니다. 맨 처음에 인용되는 대사가 줄리엣이 그의 첫사랑이 어떤 피를 물려 받은 신분인 줄을 알고 "왜 그대의 이름은 로미오인가요?"를 절규하는 바로 그 대목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유의 매력과 생동감을 잃지 않고 끊임 없이 재해석이 가능한 고전을 보면, 인물들의 성격이 판에 박힌 평면성을 탈피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예측 불가에다 반항적인 면이 있습니다. 줄리엣 역시 연인에 맹종하거나 인습과 현실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맹렬한 거부를 시도하는데, 그 당돌하고도 엉뚱하게 내뱉는 첫마디가 저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로미오 역시 "철학 따위는 집어 치우라"고 하며, 줄리엣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철학이 무슨 소용이냐며 통분한 절규를 내뱉습니다. 이 명대사를 저자는 제8장 <영혼의 외침>에 배치하여, 청춘의 미숙한 좌충우돌 외에도 인생 어느 시기에나 공통된 깊은 고뇌의 외침을 생생히 대변하게 역할을 맡깁니다.

"말을 다오, 말을! (그)말 대신 내 왕국을 주겠다." 역사나 설화, 문학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태로 즐겨 꼽히는 게, 순간의 괴로움을 참지 못해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소중한 권리와 유품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자손의 선택입니다. 이 순간 말 한 필이 없어 생사의 기로에 놓인 군주, 그에게 있어 누대로 물려받은 왕국, 그 통치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믿어 온 왕국의 종사를 타인에 넘겨도 무방하다고 외치는 목소리. 제아무리 존엄한 혈통을 물려 받은 처지라도 목전에 임박한 누란의 정세 앞에 일체의 자산과 자존을 포기하려 드는 모습, 인간이란 이처럼이나 취약하고 영속적이지 못한 영혼을 지녔을 뿐임을 처연한 세팅 속에 잘 드러내고 압축하는 문장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실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이치고는 좀 뜻밖이다 싶은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물론 이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도 많고요). "학문은 우리 인간을 모시는 시종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 저자가,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그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학자로서의 두 입장이 어떻게 갈등, 충돌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지 그 태도의 흥미로운 입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 결국 세월의 도전과 침식에 맞서 승리하는 까닭은, 인간, 인간의 지향과 가치를 그 모든 것의 앞자리에 두는 숭고한 결단과 확고한 의지 덕분입니다. 학문은 인간을 모시는 시종의 지위를 자처함으로써, 이번에는 역으로 일세에 그치지 않고 영속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선도하는 지침의 역할과 자격을 보유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책은 그래서 한 작가의 대표적인 흔적, 표방을 통해, 인류가 먼 여정의 어느 지점까지 도착했으며 여전히 만만찮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현대에 무슨 가르침을 제공할 수 있는지, 산뜻한 요약과 깊이 있는 전망을 동시에 펼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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