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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상인들 - 프란치스코 교황 vs 부패한 바티칸
잔루이지 누치 지음, 소하영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공공재산이란 누구의 재산도 아니다." 즉 먼저 약삭빠르게 손을 뻗어 가로채는 자가 임자라는 뜻인데, 이런 도둑질과 비리, 사기 문제는 어느 나라의 공적 영역에나 존재합니다. 문제는 최고 권력자와 대중이 어느 정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근절하려는 의지를 가졌느냐 하는 점이겠죠. 무엇보다 우리 한국도 이런 구조적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 책은 더욱 큰 실감으로 독자(종교 불문)에게 다가옵니다.
이 책의 저자, 그리고 실상을 잘 아는 내, 외부 관계자들의 시각에 따르면, 바티칸 시국, 혹은 교황청의 재정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지경이라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헌금의 감소이며, 둘째 이유는 관성적으로 지출을 늘려 가려는(딱히 이유도 없습니다) 조직의 생리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한층 더하는 건, 영문 모를 돈이 자꾸만 교회 밖으로 새어나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오랜 세월 동안 바티칸의 관료제에 몸을 담아 온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직무상의 무능 탓에 교황청의 살림을 똑바로 챙기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힌 비밀스러운 사연을 다룹니다. 놀라운 건 추기경, 주교의 직위를 지닌 일부 고위 성직자들이, 일반인보다도 훨씬 못한 도덕성으로, 순전히 개인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뻔뻔스러운 횡령과 사기, 배임을 저질러 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성스럽고 고귀한 목적을 가진 조직이나 활동이라 해도, 물적 기반이 없으면 단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유능하고 청렴한 회계 책임자, 그리고 재정 정책 입안, 집행자는 어느 경우에건 필요합니다. 이런 방대한 조직(더군다나 유구한 역사의)에서 그런 일을 맡는다면, 처음에는 적성이 뛰어나고 투명한 관리를 이어나갈 의지가 있었기에 그 자리에 임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최고 수장(물론 교황)이 바뀌어도, 업무의 연속성을 위해 재정 실무자가 계속 자리를 지키다 보면 자연히 타성에 빠지거나 부정 부패의 유혹, 음모에 연루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설사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 줘도,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비슷한 성향의 인물, 혹은 공모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을 두고 이어 온 구조적 비리와 모순이, 전임 교황 대 부터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다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그대로 방치했다간 조직의 붕괴를 부를 수도 있다는 거죠. 천 수 백년을 이어온 바티칸이 금전 문제로 파탄에 직면한다면 세계사적 사건(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인들 누구나 알다시피 소탈하고 청렴하며 정의감 넘치는 성향으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해 온 진보적인 성직자입니다. 용기 있는 성품 답게,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티칸의 비리 문제를 손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명령을 직접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COSEA라는 독립적 위원회를 새로 조직해서, 교황청의 공식 기구들에 대해 행정의 투명성을 면밀히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 책은 교황의 명을 받은 위원회, COSEA의 분투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COSEA의 영문 명칭이 책에도 나와 있지만, 왠지 약어와 본 이름이 잘 안 맞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COSEA의 원어는 이탈리아어이기 때문이죠. 이탈리아는 본디 르네상스 도시 국가들의 할거 시절에도 부정과 비리가 많아 늘 말썽이었고, 심지어 당시 교황청 역시 각종 검은 세력의 음모와 부패가 활기를 치지 않을 날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로마의 작은 구역을 차지하는 시국(市國)이나, 반도 대부분을 점유하는 본국(?) 이탈리아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도둑들"이 활개치는 건 중세와 현대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에 실린 비리, 음모, 범죄 내용들도, 어떤 단일 세력이 조직적으로 바티칸을 좀먹는다기보단, 고만고만한 부패 인사들이 느슨한 담합을 이뤄, 푼돈, 때로는 목돈을 빼돌린다는 게 적합한 표현 같습니다.
물론 그들은 전체의 운명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싶을 때는 놀라운 협동심을 보이기도(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자로서 제가 내린 결론은, 어떤 항구적 조직세를 이룰 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는 쪽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리메이슨" 혹은 "오푸스 데이" 같은 평신도 조직을 (책 전체를 통틀어) 두어 번 거론하는데, 유심히 살펴 읽었습니다만 적어도 이 책 중에서는 분명한 근거를 갖고 이들 조직을 언급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 책의 포커스는, 바티칸 관료제 내에 암약하는 몇몇 좀도둑들과 이들을 비호하는 고위 성직자들에 대해 맞춰져 있습니다.
뒤가 구린 성직자들은 자신의 명령을 군말 없이 수행할 하수인을 찾기 위해, 역시 떳떳지 못한 일부 하위 성직자들의 뒤를 봐 주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아성애 혐의로 여러 번 기소(공식적, 비공식적)의 대상이 된 사제를 비호한 칼카뇨 추기경같은 이입니다(어디까지나 이 책 저자의 견해에서 그렇다는 거구요). 바티칸 행정처 사무총장으로 오래 재직한 주세페 시아카 같은 이는, 온갖 불투명한 회계 처리의 블랙홀과도 같은 배후로 지목됩니다. 이런 인물들은 당대에 갓 진입한 실력자라기보다, 몇 대에 걸쳐 조직과 친숙한(?) 비리의 심장부에 있던 이전의 거물들과 혈연, 지연 등으로 얽힌 연고를 갖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의 위원회가 비리의 핵심을 향해 압박해 들어오자, 이들 업무(그리고 교황의 직분)에 가장 중요한 부서 사무실, 공관의 내밀한 곳이 일단의 절도범에 의해 피습, 침입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중요한 기밀 서류가 사라졌지만, 정작 의미심장한 건 이 사건이 벌어진 방식입니다. 수사 결과, 절도단은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가장 능률적인 방법으로(비번 등을 훤히 알고), 필요한 핵심만 털어서 빠져 나갔습니다. 도둑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당신들(교황 측)의 업무를 교란, 파괴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였죠. 도난물이 목적이 아니라 절도, 침입 행위 자체가 목표요 메시지였다는 뜻입니다.
교황의 개혁 작업은 지지부진합니다. 사실 COSEA 멤버 면면을 보면 청렴하고 의욕적일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경륜 면에서 경량급 인사들입니다. 초기 조사 활동 시기에 각종 기구에 협력을 요청하면, 교황의 위임을 받은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나옵니다. 이제 의미심장한 위협까지 받고 있으니 사정은 더 나빠지겠죠. 한편 재정 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뚜렷한 성과를 못 내었기에 교황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펠 추기경 같은 인사가 의욕을 보이고, 말도 탈도 많던 국무원장 직위가 "교황청 사무국장(papal secretary)"로 축소 조정되며(교황청 내 제반 기구의 조직도에 대해선 책 p5를 참조하십시오), 경제재정 정책을 총괄할 부서가 신설되는 등의 움직임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비리의 당사자들은 이탈리아 경찰, 검찰, 법원에 의해 구금, 수사, 평결을 받는데 이는 라테란 협약에 의거, 교황의 재가가 최종적으로 이뤄지면 가능한 절차입니다(바티칸에서 그런 사법 인력을 다 보유하기 힘들겠죠). 교황이 이 절차를 허가하는 경우, 사실 스스로 주권을 일부 포기하는 셈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하지만 조직 자체가 웜낙 큰 위기에 봉착했다고 하며, 교황 개인의 의지도 단호하다고 하니 지켜 볼 일입니다. 내부와 외부의 적들에 공히 맞서 싸우는 그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성전의 상인들이란 제목은 신약 복음서의 "성전 정화" 기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