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평점 :
세상에는 성공한 국가와, 그렇지 않고 실패한 국가가 있습니다. 서양 백인 중심의 시각에서 "신대륙"이라 불렸던 지역에 숱한 이주민들이 원 거주자를 몰아내고 정착했으며, 복잡다단한 투쟁 과정을 거쳐 오늘날 볼 수 있는 여러 근대 국가들이 성립했지만, 이 중 성공한 국가라 불릴 수 있는 사례는 몇 없습니다. 대부분이 치안 부재 상태, 혹은 격심한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죠. 유일하게 미국만이, 풍요로운 시민 사회 일반의 번영 단계를 넘어 초강대국으로서의 패권까지 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미국은 결코 다른 나라들처럼 토착민 중심의 자연적 확장과 정착을 이루지 않았으며, 철저히 이민자, 혹은 "침입자" 위주의 계획되고 치밀한 절차에 따른, 도시 중심의 발전사를 가꿔 왔죠. 세계에서 도시 위주로 이처럼 지속적인 국가의 발전을 도모해 온 나라의 예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이야말로, 도시의 발달, 혹은 흥망 패턴을 중심으로 그 성장과 확장의 단계를 고찰하기에 적절한, 어쩌면 유일한 국가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입니다. 어구의 전반부는 "미국의 역사 = 곧 도시들의 역사"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후반부의 "혁신"과 "투쟁"은 도시사의 내포 핵심을 이루는 두 키워드입니다. 미국의 도시들, 혹은 미국 그 자체가, 인류 문명이 가장 성공적으로 가꿔 온 혁신의 결정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부정한다면 오늘날 세계의 패권을 쥐고 군림하는 미국이라는 실체를 애써 부정하려 드는 오류에 빠지며, 무엇보다 이렇게 예쁜 외관에 콤팩트한 내용으로 꽉 짜여진 책부터가 애초에 저술되어 우리 독자들 앞에 제시될 수가 없는 거죠. 책이 아무리 미국 근대사(근대사밖에 없는 국가이니)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유지해도, 결과적, 총체적으로 그들이 "성공한 정치- 경제 단위"임은 도저히 부정 못 합니다. 선명한 광채를 빛내는 그들의 위엄 뒤에, 만만치 않는 채도로 대지에 새겨진 그늘을 동시에, 균형감 있게 고찰하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하겠습니다.
파운딩 파더 중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마치 한국의 정주영 현대 창업주처럼 소년 시절 대뜸 집을 뛰쳐 나와 자수성가의 기틀을 닦은, 그의 자서전의 가장 주된 배경인 필라델피아는 과연 미국사를 개관할 때 첫머리에 등장할 만한, 미국 도시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한 시기의 필라델피아에 대해서는 상론이 필요 없을 만큼 초기 13주 시절 교역과 생산의 중추 기능을 수행한 도시였으나, 이 책은 특히 독립 100주년 전후(남북 전쟁의 혼란이 막 수습되던 미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한)의 여러 사연과 곡절에 대해 비중 있게 분석합니다. 꼭 쇠퇴의 변곡점에 접어든 도시라야 대거 신흥 이민자들이 유입하여 하부 노동력을 공급하는 건 아닙니다. 이 시기 뉴욕 역시 아일랜드, 남부 이탈리아 출신들이 대거 몰려들어와 슬럼을 형성한 것은 마찬가지였죠. 다만 전반적으로 입지 조건의 유리함을 상실한 도시에서, 특히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이 어떤 농간을 벌여 이익을 취하고 "먹튀하는지" 그 과정을 냉철히 분석하는데, 이 부분이 독자로서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대에야 그 땅을 딛고 각자의 생업에 성실히 종사하던 이들에게 정직한 땀의 과실을 돌려 주는 얼마나 뿌듯한 이름이었겠습니까만, 이제 이 "형제애의 도시"는 그 명칭의 본의를 철저히 뒤집는 양상으로 "번영의 양지와 음지"을 극명히 가르는 비정성시로 탈바꿈하고 말았네요.
미국 서안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온갖 인종의 용광로와도 같은 복잡한 주민 구성, 미국형 도시 자치와 개방형 자본주의의 성패 여부를 가를 지표식물과도 같은 LA. 도대체 이 도시 하나만 놓고 10년기(decade)史를 써도 책 몇 권이 나올 분량의 사연을 안겠지만, 저는 이 챕터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슬프고도 의미심장한 정착사 언급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2차 대전사를 다룬 책이나, 미국 현대사의 단면을 분석한 어떤 책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루스벨트 집권기 대일 선전 포고 직후 (마치 나치 치하의 유대인처럼) 타당한 이유 없이 집단 수용된 사실은 꼭 언급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의 책에서 일본인들의 처절한 정착, 투쟁(대단히 소극적이었지만)사를 처음 접한 적이 있는데요, 저자분도 이 부분 서술을 위해 연구를 진행하며 "집단 수용이라는 야만적 조치가 이미 그 전 단계에서부터 그럴 만한 빌미,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음"을 비로소 파악하신 듯한 느낌을 표현하더군요. FDR이 괜히 변덕을 부리거나 신경과민성 정책을 편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점증하던 백인들의 반일 감정의 비열한 표출이 결국 때를 만나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는 뜻에서요. 이건 일본인들이 겪은 봉변이라며 우리가 고소해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토록 부조리한 만행을 저지른 국가, 정부가 용케도 응보를 받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하는 느낌을 부를 만큼 개탄스러운 일이죠.
며칠 전 저 남부 달라스에서 또다시 인종 갈등의 소산인 인명 피해가 발생해 미국 전역을 뒤숭숭하게 만들었습니다만,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폭발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급성장을 보인 시카고의 역사는 어찌 보면 미국이란 신생국의 성장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표본에 가까운 성격입니다. 책은 적절하게도 시카고의 폭등에 가까운 성장세를 고찰함에 있어, 미국의 영토가 급격히 증가한, 나폴레옹 1세와의 거래 "루이지애나 구입"을 기점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루이지애나는 물론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를 가리키는 게 아니며, 책에 수록된 지도에서 보듯 현재까지도 "중서부"라 일컬어지는, 북미를 남북으로 거의 종단하다시피하는 광대한 영역 전체를 포함합니다. 종래 프랑스의 형식적 관할 하에 있던 이 지역이, 혈기왕성한 미국인들의 수중에 비로소 들어옴에 따라, 시카고(이름부터가 너무도 토착민스러워 전혀 그 실질을 반영하지 않는 듯한)는 그 발전의 거점으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저자께서는 이 과정에서 "예의 바른 인종주의", 혹은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는 이율배반적 정치 술책이 거주민들의 선거구 책정과 함께 어떻게 교활하게 구현되는지 흥미롭게 서술합니다. 여튼 시카고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고, 또 번성했습니다. 정의의 타락이나 공평의 실패보다는, 혁신의 긍정적 측면이 더 크게 기능한 덕입니다. 이 시카고를 품은 일리노이가 배출한 가장 큰 현대사 인물이 바로 버락 오바마란 사실은 우리가 진실을 돌아볼 때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팩트입니다(그러고 보니 힐러리 클린턴도 있네요).
흔히 애틀란타를 두고 낡은 인종차별 관행과 기독교 보수주의(남부 침례교)의 본산처럼 여기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1996년 하계 올림픽이 이 도시에서 개최되었을 때, 마지막 성화 점화자가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로 결정되어 진한 감동을 안긴 사실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 이 도시가 따가운 선입견에 시달려 왔다는 반증도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의 폐습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지역이라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죠. 애틀란타의 호황과 번영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라면, 왜 정해진 도식에 따라 이 도시가 응보를 받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만도 합니다. 책은 상당히 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이 도시가 치명적인 쇠퇴로 빠질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의 성과와 빼어난 미덕을 잘 반영하는 한 챕터만 고르라면 저는 이 애틀란타 파트를 꼽고 싶습니다. 도시의 발전은 결코 단선적인 흑백논리에 따라 선과 악을 판명하는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보는 시야가 극히 좁은 독자만이, 이해도 극히 미흡한 주제에 대해 과도한 단순화로 치닫는 폭거를 저지를 수 있죠. "너무 바빠서 미워할 틈이 없다"는 한 줄의 코멘트가, 어떻게 위선과 자기 기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도모할 수 있는지 잘 요약합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요즘 세계 각지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적 증오"를 말합니다. 묘하게도 이 단어는 불어에서도 heine로서 같은 어원, 같은 의미를 나타내더군요. 사족으로, 저자께서는 이 일대의 공화당 지지세 확산, 보수화를 우려하십니다만, 그 반대로 플로리다, 혹은 저 서부 해안에서 인종 구성으로나 다른 배경으로나 진보 성향의 유권자가 엄청 늘어나고도 있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전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애틀란타와 정반대로, 실패한 도시의 전형이 될 만한 게 세인트루이스입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재건을 위한 야심작 중, 책에 나온 대로 "프루잇-아이고 프로젝트"는 서류상으로만 볼 때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대안이었으나, 정치인들과 건축업자, 그리고 배후에서 불측한 이익을 도모한 비양심적인 세력에 의해 최악의 재앙을 맞이했다는 줄거리죠. 사실 이 사례는 역사학 뿐 아니라 경제학 교과서에서 더 자주 인용되는 형편입니다. 임대차 시세를 최고가격 설정으로 제한해도, 타산이 맞지 않는 임대업자들의 관리 태만으로 인해 결국 더 큰 피해가 세입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결론으로 말이죠. 외부 불순 세력의 지속적인 교란 시도도 있었으나, 빈민들 자신의 도덕적 타락과 자포자기 행태도 결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1970년대 초반에 있었던 한국의 광주대단지 사건과 매우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알카트래즈는 예상대로 원주민들의 정치적 점거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더군요. 본문 중에도 언급됩니다만 사실 무작정 원주민(네이티브 아메리칸)을 편들 일은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설사 백인의 계약 위반과 협정의 폭력적 파기가 있었다고 해도(양아치처럼요), 그 계약과 직접 연고가 없는 다른 종족의 후손, 그리고 이 섬 알카트래즈에 그 보상, 대상(代償)의 효과가 그대로 이전될 수는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미국 백인 정부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원주민들이 행동에 나섰다고 하나, 이 실력 점거 역시 논리를 갖췄다고는 못 합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대목은, 원주민들만의 해방구를 형성한 그 십 수 개월의 기간 동안에도, 내부 자치 질서가 결국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DC는 선거를 치러 보면 거의 90% 넘게 민주당 표가 나오는 지역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더군요. 이유는 이 책의 해당 파트에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 심장부 중의 심장부가 그토록 진보적인 이념에 물들어 있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주최의 역사적 이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인 이 지역의 성향이나 개성만 고찰해도, 미국이란 나라가 생각보다 뿌리 깊은 건강성과 역동성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성에서 혁신이 나오고, 역동성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할 투쟁이 나옵니다.
마지막 장 뉴욕은 사실 뉴욕이란 고유명사를 빼고 현대 세계 도시 일반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1990년대의 관악구 일대, 2000년대 초반의 마포, 용산 일원의 재개발 사업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좋은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시 발달사로 고찰한 미국 현대사가 이처럼이나 보편적 실상을 드러내는 뉴욕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어쩌면 가장 성공한, 혹은 가장 실패와 거리가 먼 도시를 거느린 국가 미국의 위상을 상징합니다. 독자로서 제가 내린 이 결론은, 젠트리피케이션이 갖는 긍정적 의의만을 애써 부각하고자 함이 물론 아닙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빈민들이 자본의 냉혹한 손에 떠밀려(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도 고찰 가능합니다) 곳곳에서 속출하는 주거 모순적 현상을 비판하고자 고안된 용어이지, 결코 물질적 번영을 자랑스러워할 함의가 들어 있지 않았죠. 탁상 공론이 아닌 현실에서, 그 중에서도 살벌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냉엄히 살필 것은, 우리 가운데 얼마나 현실의 지갑이 넉넉히 채워지는 기쁨과 성과 측정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현지의 실상을 그저 책을 통해 접하지 않고 풍부한 배경 지식을 통해 주제를 꿰뚫으시는 저자의 필치 덕분에 더욱 유익한 독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제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의 레시피에 따라 여유 있게 소재를 다루는 셰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뉴욕 시장의 이름을 에드워드 코치라고 정확히 표기하신 점이나(다른 책을 보면 "코흐"등 별의별 오기가 다 나옵니다), neighborhood를 "동네"로 간명히 번역하는("이웃" 따위가 아닌) 대목에서 책에 대한 신뢰가 더 두터워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