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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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성공한 국가와, 그렇지 않고 실패한 국가가 있습니다. 서양 백인 중심의 시각에서 "신대륙"이라 불렸던 지역에 숱한 이주민들이 원 거주자를 몰아내고 정착했으며, 복잡다단한 투쟁 과정을 거쳐 오늘날 볼 수 있는 여러 근대 국가들이 성립했지만, 이 중 성공한 국가라 불릴 수 있는 사례는 몇 없습니다. 대부분이 치안 부재 상태, 혹은 격심한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죠. 유일하게 미국만이, 풍요로운 시민 사회 일반의 번영 단계를 넘어 초강대국으로서의 패권까지 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미국은 결코 다른 나라들처럼 토착민 중심의 자연적 확장과 정착을 이루지 않았으며, 철저히 이민자, 혹은 "침입자" 위주의 계획되고 치밀한 절차에 따른, 도시 중심의 발전사를 가꿔 왔죠. 세계에서 도시 위주로 이처럼 지속적인 국가의 발전을 도모해 온 나라의 예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이야말로, 도시의 발달, 혹은 흥망 패턴을 중심으로 그 성장과 확장의 단계를 고찰하기에 적절한, 어쩌면 유일한 국가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입니다. 어구의 전반부는 "미국의 역사 = 곧 도시들의 역사"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후반부의 "혁신"과 "투쟁"은 도시사의 내포 핵심을 이루는 두 키워드입니다. 미국의 도시들, 혹은 미국 그 자체가, 인류 문명이 가장 성공적으로 가꿔 온 혁신의 결정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부정한다면 오늘날 세계의 패권을 쥐고 군림하는 미국이라는 실체를 애써 부정하려 드는 오류에 빠지며, 무엇보다 이렇게 예쁜 외관에 콤팩트한 내용으로 꽉 짜여진 책부터가 애초에 저술되어 우리 독자들 앞에 제시될 수가 없는 거죠. 책이 아무리 미국 근대사(근대사밖에 없는 국가이니)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유지해도, 결과적, 총체적으로 그들이 "성공한 정치- 경제 단위"임은 도저히 부정 못 합니다. 선명한 광채를 빛내는 그들의 위엄 뒤에, 만만치 않는 채도로 대지에 새겨진 그늘을 동시에, 균형감 있게 고찰하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하겠습니다.

파운딩 파더 중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마치 한국의 정주영 현대 창업주처럼 소년 시절 대뜸 집을 뛰쳐 나와 자수성가의 기틀을 닦은, 그의 자서전의 가장 주된 배경인 필라델피아는 과연 미국사를 개관할 때 첫머리에 등장할 만한, 미국 도시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한 시기의 필라델피아에 대해서는 상론이 필요 없을 만큼 초기 13주 시절 교역과 생산의 중추 기능을 수행한 도시였으나, 이 책은 특히 독립 100주년 전후(남북 전쟁의 혼란이 막 수습되던 미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한)의 여러 사연과 곡절에 대해 비중 있게 분석합니다. 꼭 쇠퇴의 변곡점에 접어든 도시라야 대거 신흥 이민자들이 유입하여 하부 노동력을 공급하는 건 아닙니다. 이 시기 뉴욕 역시 아일랜드, 남부 이탈리아 출신들이 대거 몰려들어와 슬럼을 형성한 것은 마찬가지였죠. 다만 전반적으로 입지 조건의 유리함을 상실한 도시에서, 특히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이 어떤 농간을 벌여 이익을 취하고 "먹튀하는지" 그 과정을 냉철히 분석하는데, 이 부분이 독자로서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대에야 그 땅을 딛고 각자의 생업에 성실히 종사하던 이들에게 정직한 땀의 과실을 돌려 주는 얼마나 뿌듯한 이름이었겠습니까만, 이제 이 "형제애의 도시"는 그 명칭의 본의를 철저히 뒤집는 양상으로 "번영의 양지와 음지"을 극명히 가르는 비정성시로 탈바꿈하고 말았네요.

미국 서안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온갖 인종의 용광로와도 같은 복잡한 주민 구성, 미국형 도시 자치와 개방형 자본주의의 성패 여부를 가를 지표식물과도 같은 LA. 도대체 이 도시 하나만 놓고 10년기(decade)史를 써도 책 몇 권이 나올 분량의 사연을 안겠지만, 저는 이 챕터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슬프고도 의미심장한 정착사 언급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2차 대전사를 다룬 책이나, 미국 현대사의 단면을 분석한 어떤 책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루스벨트 집권기 대일 선전 포고 직후 (마치 나치 치하의 유대인처럼) 타당한 이유 없이 집단 수용된 사실은 꼭 언급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의 책에서 일본인들의 처절한 정착, 투쟁(대단히 소극적이었지만)사를 처음 접한 적이 있는데요, 저자분도 이 부분 서술을 위해 연구를 진행하며 "집단 수용이라는 야만적 조치가 이미 그 전 단계에서부터 그럴 만한 빌미,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음"을 비로소 파악하신 듯한 느낌을 표현하더군요. FDR이 괜히 변덕을 부리거나 신경과민성 정책을 편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점증하던 백인들의 반일 감정의 비열한 표출이 결국 때를 만나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는 뜻에서요. 이건 일본인들이 겪은 봉변이라며 우리가 고소해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토록 부조리한 만행을 저지른 국가, 정부가 용케도 응보를 받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하는 느낌을 부를 만큼 개탄스러운 일이죠.

며칠 전 저 남부 달라스에서 또다시 인종 갈등의 소산인 인명 피해가 발생해 미국 전역을 뒤숭숭하게 만들었습니다만,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폭발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급성장을 보인 시카고의 역사는 어찌 보면 미국이란 신생국의 성장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표본에 가까운 성격입니다. 책은 적절하게도 시카고의 폭등에 가까운 성장세를 고찰함에 있어, 미국의 영토가 급격히 증가한, 나폴레옹 1세와의 거래 "루이지애나 구입"을 기점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루이지애나는 물론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를 가리키는 게 아니며, 책에 수록된 지도에서 보듯 현재까지도 "중서부"라 일컬어지는, 북미를 남북으로 거의 종단하다시피하는 광대한 영역 전체를 포함합니다. 종래 프랑스의 형식적 관할 하에 있던 이 지역이, 혈기왕성한 미국인들의 수중에 비로소 들어옴에 따라, 시카고(이름부터가 너무도 토착민스러워 전혀 그 실질을 반영하지 않는 듯한)는 그 발전의 거점으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저자께서는 이 과정에서 "예의 바른 인종주의", 혹은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는 이율배반적 정치 술책이 거주민들의 선거구 책정과 함께 어떻게 교활하게 구현되는지 흥미롭게 서술합니다. 여튼 시카고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고, 또 번성했습니다. 정의의 타락이나 공평의 실패보다는, 혁신의 긍정적 측면이 더 크게 기능한 덕입니다. 이 시카고를 품은 일리노이가 배출한 가장 큰 현대사 인물이 바로 버락 오바마란 사실은 우리가 진실을 돌아볼 때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팩트입니다(그러고 보니 힐러리 클린턴도 있네요).

흔히 애틀란타를 두고 낡은 인종차별 관행과 기독교 보수주의(남부 침례교)의 본산처럼 여기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1996년 하계 올림픽이 이 도시에서 개최되었을 때, 마지막 성화 점화자가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로 결정되어 진한 감동을 안긴 사실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 이 도시가 따가운 선입견에 시달려 왔다는 반증도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의 폐습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지역이라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죠. 애틀란타의 호황과 번영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라면, 왜 정해진 도식에 따라 이 도시가 응보를 받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만도 합니다. 책은 상당히 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이 도시가 치명적인 쇠퇴로 빠질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의 성과와 빼어난 미덕을 잘 반영하는 한 챕터만 고르라면 저는 이 애틀란타 파트를 꼽고 싶습니다. 도시의 발전은 결코 단선적인 흑백논리에 따라 선과 악을 판명하는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보는 시야가 극히 좁은 독자만이, 이해도 극히 미흡한 주제에 대해 과도한 단순화로 치닫는 폭거를 저지를 수 있죠. "너무 바빠서 미워할 틈이 없다"는 한 줄의 코멘트가, 어떻게 위선과 자기 기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도모할 수 있는지 잘 요약합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요즘 세계 각지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적 증오"를 말합니다. 묘하게도 이 단어는 불어에서도 heine로서 같은 어원, 같은 의미를 나타내더군요. 사족으로, 저자께서는 이 일대의 공화당 지지세 확산, 보수화를 우려하십니다만, 그 반대로 플로리다, 혹은 저 서부 해안에서 인종 구성으로나 다른 배경으로나 진보 성향의 유권자가 엄청 늘어나고도 있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전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애틀란타와 정반대로, 실패한 도시의 전형이 될 만한 게 세인트루이스입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재건을 위한 야심작 중, 책에 나온 대로 "프루잇-아이고 프로젝트"는 서류상으로만 볼 때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대안이었으나, 정치인들과 건축업자, 그리고 배후에서 불측한 이익을 도모한 비양심적인 세력에 의해 최악의 재앙을 맞이했다는 줄거리죠. 사실 이 사례는 역사학 뿐 아니라 경제학 교과서에서 더 자주 인용되는 형편입니다. 임대차 시세를 최고가격 설정으로 제한해도, 타산이 맞지 않는 임대업자들의 관리 태만으로 인해 결국 더 큰 피해가 세입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결론으로 말이죠. 외부 불순 세력의 지속적인 교란 시도도 있었으나, 빈민들 자신의 도덕적 타락과 자포자기 행태도 결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1970년대 초반에 있었던 한국의 광주대단지 사건과 매우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알카트래즈는 예상대로 원주민들의 정치적 점거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더군요. 본문 중에도 언급됩니다만 사실 무작정 원주민(네이티브 아메리칸)을 편들 일은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설사 백인의 계약 위반과 협정의 폭력적 파기가 있었다고 해도(양아치처럼요), 그 계약과 직접 연고가 없는 다른 종족의 후손, 그리고 이 섬 알카트래즈에 그 보상, 대상(代償)의 효과가 그대로 이전될 수는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미국 백인 정부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원주민들이 행동에 나섰다고 하나, 이 실력 점거 역시 논리를 갖췄다고는 못 합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대목은, 원주민들만의 해방구를 형성한 그 십 수 개월의 기간 동안에도, 내부 자치 질서가 결국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DC는 선거를 치러 보면 거의 90% 넘게 민주당 표가 나오는 지역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더군요. 이유는 이 책의 해당 파트에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 심장부 중의 심장부가 그토록 진보적인 이념에 물들어 있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주최의 역사적 이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인 이 지역의 성향이나 개성만 고찰해도, 미국이란 나라가 생각보다 뿌리 깊은 건강성과 역동성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성에서 혁신이 나오고, 역동성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할 투쟁이 나옵니다.

마지막 장 뉴욕은 사실 뉴욕이란 고유명사를 빼고 현대 세계 도시 일반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1990년대의 관악구 일대, 2000년대 초반의 마포, 용산 일원의 재개발 사업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좋은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시 발달사로 고찰한 미국 현대사가 이처럼이나 보편적 실상을 드러내는 뉴욕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어쩌면 가장 성공한, 혹은 가장 실패와 거리가 먼 도시를 거느린 국가 미국의 위상을 상징합니다. 독자로서 제가 내린 이 결론은, 젠트리피케이션이 갖는 긍정적 의의만을 애써 부각하고자 함이 물론 아닙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빈민들이 자본의 냉혹한 손에 떠밀려(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도 고찰 가능합니다) 곳곳에서 속출하는 주거 모순적 현상을 비판하고자 고안된 용어이지, 결코 물질적 번영을 자랑스러워할 함의가 들어 있지 않았죠. 탁상 공론이 아닌 현실에서, 그 중에서도 살벌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냉엄히 살필 것은, 우리 가운데 얼마나 현실의 지갑이 넉넉히 채워지는 기쁨과 성과 측정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현지의 실상을 그저 책을 통해 접하지 않고 풍부한 배경 지식을 통해 주제를 꿰뚫으시는 저자의 필치 덕분에 더욱 유익한 독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제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의 레시피에 따라 여유 있게 소재를 다루는 셰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뉴욕 시장의 이름을 에드워드 코치라고 정확히 표기하신 점이나(다른 책을 보면 "코흐"등 별의별 오기가 다 나옵니다), neighborhood를 "동네"로 간명히 번역하는("이웃" 따위가 아닌) 대목에서 책에 대한 신뢰가 더 두터워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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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영화로 배우다 - 십대가 꼭 지녀야 할 12가지 인성 꿈결 청소년 교양서 시리즈 꿈의 비행 11
라제기.백승찬.이형석 지음, 남동윤 그림 / 꿈결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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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갈수록 조직화되고, 조직 안에서는 혁신이 강조되고, 혁신을 위해서는 조직원 사이의 협업이 강조되는 추세입니다. 뛰어난 역량을 가진 개인이라도, 불건전한 파벌 형성 따위의 시도로 조직의 협화(協和)를 깨뜨린다면 이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능력조차 보잘것없는 개인이 비열한 책동으로 가뜩이나 불안정한 조직 내 입지를 지키려는 의도를 갖는다면, 그 개인이나 조직을 위해 대단히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이런 분열적인 행태를, 안목 있는 지도자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들부터가 먼저 감지하고 경계하는 분위기더군요. 인화와 융화가 그만큼 중요하며, 개인주의를 그처럼 강조하는 서구 사회에서 오히려 더 강조되는 덕목이 이런 고차원적 협업 지향 인성입니다. 부회뇌동하면서 조직의 분열을 뒤에서 부추기는 이중인격자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그런 고차원적 인성이, 어린 나이에서부터 내면에 바로 자리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공감이니 협동이니 하는 게 그저 눈치나 살살 살피고, 남들의 성과에 묻어 가면서 사실상의 태업을 벌이는 행태를 의미하는 게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죠. 참된 인성이 무엇인지, 목적과 효율을 바람직한 지향성까지 갖추면서 현실화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겉과 속이 다른 책략을 구사하지 않고 회사 등의 조직에서 참된 능력을 발휘하려면, 창의성이나 혁신 역량처럼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 올바른 개념이 갖춰져야 함이 자명합니다. 이 책은 바른 인성의 구체적 덕목을 모두 열 두 가지로 잡으면서, 어린 독자(제 생각에는 중학생 고학년 정도부터가 적당한 것 같았습니다)와 심도 있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책의 어조는 차분히, 그러나 가볍지 않게 독자를 설득하려는 품입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어린 독자에게 이와 같은 인성을 가르치는 "교재", 매개체를 영화로 잡고 있습니다. 영화처럼 인생의 진실(단면이든 총제적 조망이든)을 강렬하고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서사가 또 없죠. 영화 안에는 감상자의 정서를 자극하고 공감과 설복을 유도하며 세계에 대한 비전의 변화를 촉구하는 강렬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런 주제 지향의 설득은 얼마든지 다양한 층위를 갖춘 스펙트럼으로 분화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어린 독자(동시에 학교라는 집단 안에서 어엿한 구성원이기도 하며, 앞으로 더욱 복잡한 2차 집단의 한 자리를 차지할)에게 그 나이에 걸맞는 성장 단계가 요구하는 인성 덕목을 예리하고 섬세한 의도로 키우려 들고 있습니다. 영화는 올바로 선택되고 건전하게 해석될 때, 가장 좋은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대단히 넓은 범위에서 "교재(물론 영화)"를 선택했고, 건전하면서도 밀도 높게 "인성 형성"을 위한 메시지를 뽑아 냅니다. 쉽게 보여도 이런 작업을 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게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강동원 주연의 한국 영화로, TV에서도 자주 방영하여 한 번 정도는 관람한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얼핏 보아 우스운 모습, 외관이라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듯 착각을 부르지만, 엄연히 질환의 결과로 빚어진 비정상의 불운한 조합이기 때문에 결코 당사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왕따 같은 행태의 희생양이 되지 않아야 할 상황. 부모보다 늙어 보이고 추한 겉모습을 가진 아이. 분명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개인(타인)은 아닙니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을 구태여 상정한 건, 오히려 다수와 소수 간의 작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빚어질 수 있는 집단 따돌림의 해악을 잘 강조하려는 주제의식 덕분이죠. 하나 유감인 건 해당 파트의 뒷부분에서 영화의 결말이 먼저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아이와 함께 영화를 먼저 감상한 후 부모가 함께 읽는(그리고 대화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한 파트가 끝난 후, 유사한 주제를 다룬 다른 영화들을 추천하는 방식인데요, 저는 1980년작 존 허트가 주연한 <엘리펀트 맨>을 같이 권하고 싶습니다. 몇몇 장면이 어린 관객에게 충격적일 수 있지만 어차피 그런 점은 이 <두근두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글러브>는 청각 장애인 선수들로 구성된 고교 야구단의 사연입니다. 강우석 감독의 연출인데, 일견 따분하고 그저 인위적 감동만 강요할 것 같은 이런 소재를 두고 너무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려나가서, 감독의 전달 솜씨가 이처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잘 단련된 관객에게까지 깨우쳐 준 좋은 실례였습니다. 저 역시 저자분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건 "특별 대우"가 아니라,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열린 태도라는 거죠. 제가 이 작품을 보며 놀란 건, 감독이나 배우들부터가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찍었기에 이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공유되고 설득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주제나 메시지 전달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관객에게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는 태도가, 감독 특유의 유능함과 결합한 결과입니다.

"타문화 이해", 그리고 "인간 문명에 대한 지나친 경외와 치우침"을 경계하자는 주제로, 블록버스터인 <혹성 탈출>을 이해하자는 저자분의 시각이 돋보였습니다(행성/혹성 표기 논쟁은 일단 차치하고). 사실 <스타 워즈>같은 SF 컨셉에서도 그 기괴한 모습을 한 외계인, 괴물 들의 비주얼은 타인종, 타민족 등이 주류 백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은유한 것이거든요. 이 <혹성 탈출>에서도, 겉으로는 진화의 그 느린 단계에서 (과학적으로야 있을 수 없지만) 특정 국면(phase) 둘이 동일 시기를 공유하며 빚어지는 아찔한 충돌과 갈등, 생존 투쟁을 다룬 이야기지만, 그 수면 아래에는 우리 시대 가장 민감한 이슈 중 하나인 문명 충돌, 인종 차별의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이는 먼 나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남아 등지에서 이주해 온 이들 때문에 바로 우리의 현실 일부가 되고 있는 다문화의 심각하고 절실한 얼굴을 바로 직면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과제요 도전입니다. 어른 세대는 이 문제를 학교에서 교육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이처럼 미숙하게 대처하지만, 어른들보다 더 자주 더 심각하게 이 이슈를 맞닥뜨릴 지금의 10대들은, 바르고 체계적인 접근이 더 필요합니다. 책에 나온 여러 논변과 담론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먼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주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해야 올바른 답이 나옵니다. 어린 독자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이런 책을 읽고 사회에서 부대끼는 여러 복잡다단한 문제를 총괄적으로 해결해 줄 "인성"이란 자질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계기가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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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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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양도 아득한 옛날 삼황 오제와 요 임금, 순 임금의 치세를 그리워하는 관습, 최소한 도학적, 문학적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 역시 그렇게나 오래 전에 자신들의 먼 조상(꼭 혈연으로 닿지는 않는다 해도)들이, 타인의 전횡적 지배를 거부하고, 중의(衆義)를 모아 공무의 방향을 결정하며, 나아가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결연한 싸움을 벌였던 전통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이 구사하는 우아한 언어보다 훨씬 깊이 있고, 격조 있는 표현을 써 가며 타인의 감정과 논리를 자신의 것에 끌어오려는 문치(文治)의 우위를 비중 있게 믿었음 역시 경이로워 하죠.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일컬음은 이처럼 "말로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고상한 전통이 사라지고 창과 기마술로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려는 풍조가 만연했음을 개탄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로마, 특히 공화정 로마 시대는 이처럼 정치한 논리와 고아한 수사로 상대를 설득하고 보다 정의로운 총의를 모으려는 의사의 전통이 모두를 고개 숙이게 하던 시절입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이러던 것이,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어찌 보면 모두를 승복하게 하고 진두에서 이끌어갈 덕목을 고루 갖췄다고 볼 수 없는, 하자 있는 지도자들이 오랜 전통을 정면에서 깨뜨린 이래, 타르퀴니우스 이래 존재하지 않던 폭군의 악폐를 악몽처럼 다시 공동체에 들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과거의 절도 있고 우아하며 고풍의 품위 있는 지배를 받던 체제가 아닙니다. 폭풍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과거처럼 드세고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이나(1부), 차별 받던 변두리의 서자들이 오랜 세월 품어오던 불만 따위(2부)가 아닌, 바로 로마 스스로가 품은 내부의 모순 때문입니다. 이 3부는 자신과 싸우는 로마의 분투기입니다. 소설 중에도 직설적인 서술이 있듯, 오랜 전통을 지키려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술라와, 기사와 상인 계급의 관심을 더 돌보려는 카르보 등의 두 패로, 귀족에서 하층민까지 철저히 갈려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부를만큼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까마득한 예전 남의 조상들 사연이 아닌,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도 전혀 거리가 멀다고는 못 할 사정이기도 하죠.

대체로 저는 1부를 마리우스의 스토리로, 2부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몬 술라와 드루수스의 사연으로 파악했습니다. 1부가 그야말로 로마의 이상적인 공화정 그 전형을 그대로 보여 주듯, 때때로 부패한(그리고 끔찍하게 어리석거나 무능한) 장군과 관료들이 등장하긴 했어도, 말과 설득력, 교양의 높이로 반대 진영을 포용하는, 그야말로 "동양적 군자(혹은 그를 가장한 위선자)"들의 우아미 경연의 장이었다면, 2부는 장년기의 그 원숙한 인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광인이 되어 버린 마리우스, 그리고 더이상 근시안적 계급 이익 말고는 아무것도 살필 수 없게 된 귀족 계급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이었죠. 그렇다면 이 3부는, 마치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처럼, 혹은 칼 슈미트적(아니면 마키아벨리적?) 결단의 미덕으로 모든 혼란을 한 큐에 쓸어버릴 난세의 영웅이 등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3부는, 마치 알렉산드로스 3세처럼 신비한 미모와 고귀한 혈통(일까요?), 신묘한 전법과 불굴의 용맹을 지닌 청년 장군 폼페이우스의 라이징을 그 핵심에 둔 기나긴 사연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술라나 마리우스(특히 후자는 이 매컬로 여사의 작품에서 너무 미화된 느낌이 있습니다만) 들은 우리가 여러 고전, 혹은 대중서에서 충분히 조명되어 대강의 캐릭터가 어렴풋이 그려지기까지 하는 익숙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비중임에도,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서 훼방을 놓고 말도 잘 못 하고 우악스럽게 판을 휘젓다 비명에 간 폭한 정도로 오해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실제로 그는 마치 초한 쟁패기의 항우처럼, 혈통도 좋고(일단은 그렇다고 하죠) 군략과 용맹도 뛰어났으나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면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사실 개인적 기량으로 비교할 때 마리우스가 과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보다 못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이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부계 기준으로 따지면 가문 역시 그리 모두 앞에 내세울 만큼 평판 있는 혈통으로 보기 어려운 게 폼페이우스입니다(마리우스는 정말로 양계 모두 한미한 출신). 그런 그가 왜 이렇게 모두의 환영을 받고(피케눔 출신 "가노"들은 뭐 그렇다 쳐도) 전면에 등장하게 된 걸까요? 외모가 빼어나서? 나이가 젊어서? 마리우스에게인들 그런 시절이 한때나마 없었겠습니까?(게다가 폼페이우스는 못 배운 걸로 치면 마리우스를 몇백 배로 압살하죠ㅋ)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정세의 판국이 과거의 가늘가늘 아름다운 전통만 내세워서야 도통 솔루션이 안 보이는 난국으로 접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폼페이우스의 (귀족 답지 않은) 무식한 과단성에 열광했던 것 아닐지요. 여튼 술라와 젊은(어린) 폼페이우스가 만나 서로의 속을 읽어가며 대화하는 장면은, 마치 어제 방영되었던 <38사기동대> 5화에서 마진석(배우 오대환씨가 연기)이 양정도(배우 서인국)에게 "우리 김계장님 내 과네 완전? 응?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이야!"라고 하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러나 항우처럼 우직한 무인 기질만으로 상황을 돌파한 건 아니었습니다. 소설 중에 적절한 묘사가 있듯, 폼페이우스는 냉혹한 현실 감각과 끝없는 비전, 꿈을 동시에 갖춘 정신 세계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자만 갖춘 사람은 비천한 정상배가 됩니다. 후자만 갖춘 사람은 백주 대로에서 맞아죽기에나 딱 좋습니다(안됐지만 드루수스 같은 인물). 술라는 이 중 어떤 유형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자기 절제력을 갖추었고, 두뇌가 우수하며, 도광양회하다(ㅋㅋ) 한순간에 결단력을 선보이며 판을 엎어 버리는 실행력이 있는 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자유자재로 동화, 소통하는 정서적 안정까지 갖춘 유형이란 점에서, 아니아니, 게다가 외모까지 완벽한! 무슨 기준으로도(심지어 혈통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오랜 가문의 표상! 코그노멘인 술라가 후져서 그렇지) 애송이 폼페이우스보다 우월한 남자였음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겁니다. 하필 마리우스 같은 평민 영웅과 역할이 겹쳐 초장에 괜히 진을 빼게 되었고, 슬슬 기를 펴 보려 하니 이번에는 나이가 발목을 잡는군요(피부가 너무 연약하고 아름다웠다는 것도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 이건 농담입니다).

만약 술라가 좀 뒤에 태어나서 시저와 자웅을 겨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너무도 용호상박인 두 인걸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느라 로마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바로 멸망했겠습니까? 아니면 역시 "주워먹는 타입의 정치적 천재"가 또 하나 나타나서(옥타비아누스처럼) 운명적인 제정으로의 발걸음을 틀었겠습니까? 확실한 건 이 폼페이우스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나 판을 흔들기는 힘들었겠다는 정도. 여튼 그는 자신의 이상과 꿈으로 세계의 현실을 삼켜 버릴(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다른 표현에서 인용합니다) 엄청난 정신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긴 했습니다. 이런 효과적인 안티테제가 나올 수 있었기에, 카이사르 같은 진테제가 결국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3부는 특히 올드 브루투스(원서에는 꼬박꼬박 "올드"를 붙입니다)가 나와 장기 떡밥 큰 덩어리가 촘촘히 뿌려집니다.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고, 번역의 가독성이 좋은 "마스터즈 오브 로마".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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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
김장섭 지음 / 트러스트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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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라는 아주 예전 속담이 실감나는 요즘입니다. 실제로 육류의 분별 없는 섭취(가난이 빚은 피해의식 때문이라든가)가 대사 증후군 등 탈을 일으키기도 하는 게 사실이고, 본인의 각성이나 진지한 의식 전환 없이 "그저 멋 있어 보여서, 이게 대세라서" 뭘 따라하는 선택의 경우 반드시 좋지 않은 결말을 부르는 예들이 흔히 보이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한 요즘, 어디에 투자하고 얼마만큼의 수익을 바라는 게 합리적인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합니다. 하도 금리가 낮고 마땅한 수익원이 없다 보니 무리하게 빚을 내서 "남들 따라" 투자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집에만 쌓아 두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행태입니다. 한국이 한창 때처럼 고성장 트랙에 올라탄 상태도 아니고, 사람의 성향과 개성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투자 선택 방향도 제각각인 게 사실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과거에는 이렇지 않았죠. 남들이 뛰면 다같이 껴서 뛰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선택이 단기, 혹은 장기적으로 볼 때 본인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약간의 손실을 봤지만 더 망할 수도 있었던 시황을 고려할 때 어차피 내가 머리를 굴리고 모든 정보를 취합한 후 결정하고 내가 본 손실이라며 안도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남들 따라 묻지마 투자를 한 후 제법 재미를 봤음에도 불구, 아주 희박하나마 더 큰 대박의 가능성을 놓쳤다는 사실에 가슴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대뜸 느껴진 점은, 책의 저자님이 단편적이고 그 효용 기간이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정보, 팁"을 가르쳐 준다기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더 이상의 고도 성장이 불가능한 요즘 경기에, 개인이 어떤 경제 마인드, 투자 마인드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물고기 몇 마리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거시경제의 패턴과 전망을 볼 때 마인드 세팅을 어떻게 바꿔야만 하는지, 기본 태세라고 할까? 마음가짐 자체를 어떻게 먹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저자분의 혼이 실린 여러 코칭이 논의의 전제로 제시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왜 투자를 해야 하는지, 투자하는 시기가 따로 정해진 것(은퇴 후, 노년기 등)이 결코 아닌 이유가 무엇인지, 투자의 결과에서 무엇을 기대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자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설령 투자를 한다 해도 어느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지, 성공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개인마다 다 다를 겁니다.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등의 운명이 엇갈리는 건 과거에도, 앞으로도 비슷합니다. 문제는 그 손실, 이익의 폭입니다. 1990년대 초에는 주식이 폭락하자 손실을 보전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바람직한 투자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개인이 어느 선에서 만족을 얻고 결정에 책임져야 하는지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낙후한 시대의 단면입니다. 이런 시절에도 대박을 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었습니다. 대박이라고 해도 그 결과가 비이성적 과정에 의해 이뤄졌고, 건전한 사회적 후생의 증가 반영이 아님은 마찬가지지요. 반면,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이성적인 결정 과정을 거쳐 적정 수준의 투자(가처분 소득의 레벨, 객관적인 투자 조건 등)가 이뤄진다면, 결과에 대해 개인도 크게 낙담할 일도 줄어들 뿐 아니라(주관적, 객관적 모두), 사회 전체로 보아도 그 소득의 분배 결과 역시 불건전성이 감소한다는 사실입니다. 후자는 우리들 개개인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문제는 전자죠. 후회 없는 투자, 결과를 내 자신이 받아들이고 비이성적 폭주가 없는 투자 패턴을 생활화하는 게 이 책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동산인가? 아직도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향수에 젖은 이들, 혹은 투자의 개념부터가 잘못 잡혀져 있는 이들은 이 부동산 투자는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며 선을 긋기 일쑤입니다. 저자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명쾌하게 논의의 틀을 마련합니다. 1) 흔히 하는 말처럼 지금은 백세인생 시대다. 2) 이 긴 인생을 지탱할 소득의 원천이 있어야 한다. 3) 일정 연령 이후에는 근로 소득을 기대할 수 없고, 사업 소득이란 고전하는 자영업 현황을 볼 때 역시 전망이 좋지 못하다. 4) 이자소득... 말할 필요도 없다. 5) 그렇다면 남은 건 부동산 임대 소득밖에 없죠.

주식의 경우 투자의 달인이었던, 현재도 그러한 저자는 간단하게 짚고 넘어갑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그 다음엔 중국이 알짜를 모두 빼 먹는 추세. 당신이 여간 두뇌가 좋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투자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하고 싶으면 중국 시장에 투자하라." 안 해 본 게 없는 것 같은 저자는, 이제 경매로 돈 벌던 시대도 끝났다고 합니다. 당연한 게, 재미를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요령도 널리 퍼져 이제는 모든 참여자가 비슷한 역량으로 시장에 참여한다는 거죠. 헐값에 낙찰 받을 가능성이 클 리가 만무합니다.

재테크 전문가들이 언제나 강조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목돈은 빨리 만들어질수록 좋고, 투자는 다만 한 달이라도 빨리 이뤄지는 게 좋다." 그래서 저자는 외고/과학고, 명문대 졸업, 대기업 입사 등으로 이뤄지는 코스보다, 특성화 고교 졸업 후 대기업 생산직 취직이, 100세 시대에 노후를 편안히 꾸려갈 "더 나은 코스"라고 단언합니다. 명분보다 실리를 취하자 같은, 일시적으로 마음을 달래는 주문이 아니라, 평균적인 대한민국 경제 참여자의 생활 패턴을 고려하여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해(解)라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사실 미국 경제학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정식화한 명제입니다만) 합리적인 투자/소비 결정은 개인의 일생 전 구간을 고려하여 이뤄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원론적인 강의라면 대단히 심심한 책이 아닐까, 당장 현장에 뛰어들어서 활용할 정보가 필요한데.. 라고 망설이는 분이라면 그것도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 고민한 바가 많아서, 많은 생각을 거치고 말 한 마디를 꺼내는 전문가의 말이 어떤 건지는 바로 감이 오더군요. 저자는 일단 금리의 전망에 대해 간단히 짚습니다. 저도 이 책 저자가 언급한 버냉키(직전 연준 의장)이 쓴 책(<행동하는 용기>)을 최근에 읽었는데, 버냉키의 의기양양한 자랑질에도 불구하고 한국 같은 주변국에서 그런 선택을 따라하는 데는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르겠죠(몇 달 전 강봉균 전 장관의 견해 피력도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저자는 최근 한국 수도권 개발 계획의 현황과 추세를 지적하며, 역세권 관련 어떤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지 간단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이 부분만 읽어도 솔직히 큰 도움이 된다 싶더군요(구체적인 결론은 별로 공유하고 싶지 않은).

역시 시야가 넓은 분 답게 거의 전방위적으로 중국 변수를 고려에 넣고 시나리오를 짭니다. 부동산을 다룬 책은 많지만, 현재 세계 각국에서 어떤 식으로 중국의 큰손들이 부동산 "투기"를 하는지에 대해선 별반 언급이 없습니다. 이 책은 현재의 패턴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들이 어떤 전략으로 시장에 임하는지도 아주 냉정하게 보고 있습니다. 제주도에 이들 의 자금이 몰려들어 아주 뜨거운 시황이 전개되는 것도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인데, 활동 반경이 넓으신 저자다 보니 자신이 겪은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려 주고 있네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정리한 결론에도 주목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짧게 흘리는 듯 언급하는 여러 토막 정보에도 신경을 써서, 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는지 전체의 감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대가에게서는 지나가는 농담으로부터도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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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은 죽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희재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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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미국은 그 출발은 미미하였으나 스스로의 손으로 일군 거대한 제국 위에 발을 딛고 세계를 향해 호령하는 비즈니스의 타이쿤들을 실제로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Kane Bendigo 역시, 실존의 여러 사업가들을 요것조것 믹스한 듯 매력적인 실감을 풍기는 캐릭터입니다. 돈, 혹은 여타의 재산이란 장삼이사의 이런저런 초라한 손들에 흩어져 있으면 별 힘을 못 쓰는 법인데, 한 사람의 손 안에 움켜쥐어져 있으니 이처럼이나 놀라운 일들을 해 내는 군요.

케인 벤디고는 섬 하나를 소유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호위대와 소규모의 해군, 육군 등을 직접 거느리는 군주입니다. 나이도 아직 40을 넘기지 않아 보일 만큼 활력이 가득한 미남인데, 보통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이처럼 정신의 활력이 육체적 매력까지를 지탱해 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라고 일단은 해 두죠). 이 정도 부와 권력과 원대한 비전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군주라 불려 마땅하다... 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는 진짜로 미합중국 대통령(이라고 명시되진 않았으나 독자는 당연히 눈치챌 수 있죠)을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에게 승인까지 받은, 진짜 국가 원수이자 주권자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런 일은 불가능하며, 분별 있는 독자에게는 소설의 매력을 다소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게 유감입니다. 모나코니 안도라니 하는 공국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아직까지 독립국가 신분을 유지하는 게 아니듯, 국제 관계란 힘만 있다고 바로 독립적 단위로 승인받을 수 없습니다.(하물며... 그러나 스포일러이니 언급 자제)

어쨌든 그렇다 치고, 퀸 부자는 이 나라에서 국내 살림을 도맡아하는 총리이자 케인 벤디고의 동생인 아벨 벤디고에게 특별히 초빙되어, 예의 섬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형이자 국가 원수이며 벤디고 제국의 창립자이자 세계를 뒤흔들 만큼의 영향력(실제로 남미 여러 국가의 정권들이 이 사람의 입김으로 교체되었다는 설정입니다)을 발산하는 케인이, 누구에게로부터 지속적으로 암살 협박을 받고 있다는 사정 때문입니다. 퀸 부자는 이런 장난(워낙 엄중한 경호를 받는데다, 상상을 초월하는 만능 스포츠맨인 케인을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으므로)을 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 줄 것을 의뢰받습니다. 막상 대면해 본 "킹" 케인 벤디고는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 같았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 케인의 본명은 사실 카인이었답니다. 동생을 죽인 성경 속의 그 인물이죠." 표기상의 한계, 오해, 무신경 등이 결합하여 오히려 절묘한 분별 효과를 낸 셈인데, 영어 원문에는 케인=Kane, 카인=Cain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의 발음은 같습니다. 따라서, 발음이 아니라 철자를 봐야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한국어판에서는 이 사실을 알 수 없고, 뭐 알 필요도 없긴 합니다). 이 한국어판을 보면 퀸 부자가 케인의 의상실을 수색하며 "지팡이는 없냐?"고 드립을 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cane(지팡이)를 염두에 둔 말장난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원서 대조는 안 해 봤으나 아마 맞을 듯).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까요?" 헌데, 찾아 보면 의외로 많다(성공한 인물들 다수 포함)는 게 함정이고, 그 박식한 작가님도 이야기를 꾸며 내기 위해 좀 오버한 면이 있네요. 어느 분에 대해 육체적 특징을 장황히 언급한 것도 그에게 시선이 대뜸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한 속 보이는 장치였고(귀족 특유의 박탈감과 정의감의 발로였다는 심리적 장치도 곁들이시지 그랬나요), 어느 물리학 박사가 죽은 이유도 원자 폭탄 제조 회유를 거절해서라는 사연이 들어 있었어야 아귀가 맞는데 아마 떡밥 회수가 안 된 듯합니다.

멋진 마술이긴 한데 그 트릭을 알고 보면 애 입에서도 욕이 나오죠. 이 소설은 (퀸의 다른 작품처럼) 멋진 착시 효과를 통해 독자를 완전히 사로잡는 finesse를 자랑하지만, 사실 내실이 좀 부족합니다. 케인의 암살이 미수에 그쳤을 때, 퀸 부자가 계속 섬에 붙들려 있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건이 이미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는데 독자가 뭘 궁금해해야 할지 좀 더 넉넉한 발판을 깔아 놓지 못한 건 마음에 안 듭니다(이것부터가 범인의 정체를 다 폭로하는 거나 마찬가지). 살인 미수의 진상은 너무도 빤히 드러납니다. 아무리 미숙한 독자라 해도 유다의 쌩쇼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테고, 그 밀실 트릭의 경위 역시 조금만 머리를 쓰면 바로 눈치챌 수 있어서 별로 자랑할 마음도 안 생기네요. 밀실 트릭의 경위뿐 아니라, "왜 퀸 부자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바보 아닌 이상 다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하필 3형제가 라이츠빌 출신이었다는 배경 설명도 우습고, 엘러리라면 구태여 고향에 갔다 올 필요도 없이 진상을 모두 파악했을 겁니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긴 하더군요. 시리즈 다른 작품을 바로 손에 잡고 읽을 마음이 생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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