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산업혁명 - 경영자여, 이대로 생존할 수 있겠는가?
한일IT경영협회 지음, 요시카와 료조 엮음,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옮김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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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학자마다 개념 포착에 있어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이 책 p88에 나온 대로, 4차 산업혁명이란 빅데이터, 유전공학, IoT, 인공지능 등 일찍이 그 가능성만 전망되던 분야에서 폭발적인 혁신이 이뤄지고, 그 혁신의 결과물이 제조의 "모듈"로 양산되어 예측 불가의 분야에서 창의적 재조합이 이뤄지며, 이 결과로 산업 전반이 다른 양상을 맞는 현상을 지칭합니다. 한국에서는 클라우스 슈밥이 쓴 작은 책자가 이 메가트렌드를 잘 요약하는 지침서로 인기를 끄는 듯합니다.

이 책은 슈밥의 책보다 분량이 더 적고, 일본이라는 국지적 시장과 기업군의 현황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추상적, 혹은 "인문적" 파악으로서 이 4차 산업혁명을 대할 게 아닌 이상에는, 이 (더) 작은 소책자가 우리네 기업의 비전, 장기 예측을 행할 지침서로 쓰기에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일본의 형편에 주된 pivoting이 이뤄지고 있어서 과연 제목에 합당한 내용인지 살짝 의심이 들었습니다만, 일본인이 쓴 책이니 철저히 일본의 현실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게 당연하다는 수긍이 되더군요. 또 하나, 일본의 현실에 철저히 천착하여, 지금 일본이 맞고 있는 도전, 환경의 변화(바로 "제4차 산업혁명")에의 대응책을 성실히, 꼼꼼히, 적실하게 분석하는 내용이라면, 역으로 그로부터 대체 4차 산업혁명의 본질과 난점이 무엇인지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재해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해도, 우리와 전혀 무관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 허리케인, 시로코 등에 현지인들이 효과적으로 대비하는 방식을 보면, 그 자연재해를 극복하는 비결이라든가 폭풍의 발생하는 원인, 지속 시간 등의 본질(기압차라든가 국지적 지열의 작용 등)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유사한 자연재해가 어느 정도 파괴력을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가질지 추측이 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이 책은 우리와 대단히 유사한 산업의 성장 구조와 운영 방식,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가진 일본의 현황을 분석했기에, 우리 기업에게 직접 참고되는 바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책의 곳곳에서 밝히는 바처럼, "한국"은 일본에게 영원한 타자요, 후발 주자이며, 아직은 신흥국에 속하는 성질이 다른 그룹의 구성원입니다. 저자는 삼전에 오래 몸 담은 인력이기도 하기에 한국에 감정적 태도로 접근하거나 선입견을 갖거나 하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 기업(삼성과 엘지)의 장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이 일본 기업들에 비해 갖는 체질상의 강점이라든가, 최근 일본이 실패한 신흥국(동남아, 중국, 인도 등) 시장에서 어떻게 한국이 성공했는지 매우 냉정한 분석을 합니다. 그들 입장에서 경쟁자이자 적수인 한국에 대해 SWOT 분석을 이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시도하는 건 그 자체로 시야와 비전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이 책은 대체로 일본의 지난 시절 실패에 대해 통렬한 반성에서 논의의 시작점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30년(20년)"이니 하는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어구로 문제를 호도하지도 않습니다(이 표현이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일본이 실패한 이유는 과거 생산자 위주의 시장에서 그저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내놓기만 하면 소비자들이 알아서 사 가던 환경 조건을 잊지 못하고, 시대의 변모에 냉큼 적응하는 데에 태만히했다는 점을 꼽습니다. 저자는 "최고의 품질도 필요 없고,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의 품질을 구현하면 그만이며, 이 적정 품질 이상의 효과를 노리는 투자와 연구는 원가 낭비 요인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원문 그대로는 아니며 독자인 제가 재구성). 이 말은 과거, 고장 잘 안 나는 일제의 장점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의 니즈가 어느 수준에서 이뤄지는 지 보다 고객 속으로 파고들라는 주문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소비자들이 (거대 기업에서 내어 놓는 훌륭한 제품의 컨셉과 품질, 지향성에) 너무도 순응적이었기에, 사정이 천차만별인 글로벌 시장에 알맞는 체질을 기르는 데 실패한 면도 있다고 합니다. 시장에 따라서는 섬세한 부가기능이 여럿 부착되는 것보다, 그저 한 가지 기능성으로 튼튼하게만 돌아가면 충분한 곳도 있는데(위의 예와는 반대죠) 예를 들어 중국 특정 지역에서는 감자 깎는 용도로 세탁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시장에서 그런 (어이 없는) 요구를 하면, 그들에게 팔고 싶은 공급자로서는 그 요구에 부응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글로벌 시대 현지화(localization)의 첫번째 뜻입니다. 그저 가전 제품의 매뉴얼에 충실하게만 사용하는 일본인들의 습관에 길들여진 일본 기업으로서는 이런 이상한 시장의 요구에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일본 시민 누가 세탁기에 감자를 돌리겠습니까? 저자는 반대로, 한국 기업들은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고 현지의 니즈에 따르기만 하는 전략을 택했기에 성공했다고 그 요인을 짚어 냅니다. 두 나라의 대표 기업에 고루 몸 담아 본 기업인만이 행할 수 있는 분석이요, 유지할 수 있는 공정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니즈가 다양하고 경쟁이 치열하며 소비자들이 대체 만족을 모르는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이,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세계 각처의 시장에 두루두루 통할 제품을 만든다고도 합니다. (이 책에 언급은 안 되지만)주방 세제라든가 과거 피처폰 시대 한국 휴대폰 같은 게 대표적인 예죠. 주방 세제는 중국인들이 입을 모아 "한국 게 잘 닦인다"며 칭송이 자자합니다. 피처폰도 취향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이 고르고 골라 살아 남은 모델이 북미나 유럽 시장에서도 그대로 통했습니다. 이렇게 시장 여건이 우호적으로 조성되어 향후 십 년은 삼성 폰이 노키아 등을 추월하고 명품으로 군림하겠거니 예상했는데(디자인 등의 요소는 중국이 따라잡기도 힘들겠으니), 전혀 뜻하지 않게 잡스가 새롭고도 파괴력 있는, 그야말로 게임 체인징의 혁신을 이뤄 낸 겁니다. 노키아는 결국 환경의 변화에 적응 못하고 도태되었으며,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도전을 맞아 유리한 전망이 갑자기 깨진 삼성이야말로 타격이 컸을 만했으나, 역시 앞뒤 안 가리고 감성에 젖지 않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바탕한 전략 전환으로 그들은 다시 살아남는 데 성공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불가능하다 싶은 적응을 해낸 것으로 보는데,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 저렇게 된 것도 이런 이유가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이란 (컨셉과 현상 모두) 본디 독일에서 유래했습니다. Industrie 4.0이란 민-관 합동 전략에서 비롯한 거죠(그래서 철자가 저처럼 독일식입니다). 독일은 이처럼, 좁은 국토와 역사적 시련, 인건비 상승, 부존 자원 부족 등 갖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저력을 잃지 않고 있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모습입니다. 독일은 냉전 체제 아래에서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경제 내실화, 수출 입국에만 집중했고, 갑자기 흡수 통일이 이뤄져 천문학적인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음에도 EU 단일 시장 창설 등 여러 호재를 만들어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 4차 산업 혁명이란 메가트렌드 역시, 미래를 살피고 대비해 온 독일 경제에 다분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현재의 난관에 정확히 대응한 이들이, 미래에도 합리적인 여건을 조성하며 시장과 대 추세를 선도해 나가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자는 이런 유리한 점이, 비록 "잃어버린 30년"이란 좌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만의 장점을 간직해 온 일본 경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일본은 정치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기업은 장기적 미래를 내다보고 R&D에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으며, 원천 기술의 확보에 예전부터 강점이 있었던 일본 기업이 이런 국면의 전환을 맞아 대도약을 이룰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원천 기술이 꼭 아니라도, 모방과 재조합의 창의가 지난 십 년 동안 잘 통하던 시절이었다면, 게임의 룰이 바뀌는 지금부터는 일본이 다시 크게 일어설 수 있다고 지적하는군요. 중국도 물론 정치가 안정(?)되어 있습니다만, 당 지도부가 전략 판단을 그르치면 회복할 방법이 없고, 얼마나 시장의 첨단 변화에 적응하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일본은 기업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게 큰 강점이라는 거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최근 일각에서는 거액의 R&D 예산을 대기업에 퍼 주는 게 특혜이자 낭비라고 지적합니다. 기업이 어떤 산업에 무슨 전략으로 임하든, 그에서 어떤 성과와 실패를 기록하든 그 위험은 기업이 전적으로 부담할 뿐, 국가가 이를 분담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원론적으로는 타당하나, 세계의 시장과 경쟁 여건이 이런 이상, "알아서 살아 남으라"고 방치할 수만도 없습니다. 벤처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은 관련자들의 모럴 해저드로 인해 크게 실패한 바 있습니다. 기업도 기업이거니와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을 구상할 때, 세계적 범위의 트렌드가 어떻게 바뀌고 어떤 추세로 수렴, 발산하는지 먼저 정확한 상황 인식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이 국지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일본의 분석을 통해 훨씬 세밀하고 깊이 있는 시사점을 던져 주는 책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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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아이 2
에리크 발뢰 지음, 고호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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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긴 분량 내내 무거운 분위기로 끌고 가다 드디어 이 2권 끝에서 마무리가 되긴 하네요. 1권 리뷰에서 말한 대로, 고아원 출신인 여러 성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에게 날아온 의문의 편지를 받고 그 발신자의 신원, 그 와중에서 알게 된 수수께끼의 다른 인물 그 정체 등을 캐고, 아울러 자신을 낳아 준 친부모가 누구인지, 오랜 세월 동안 베일에 갇혀 있던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담습니다.

템포가 빠른 북유럽 스릴러 주류와는 달리,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어두운 과거, 그리고 그 객관적 시련이 인물들에게 남긴 깊숙한 상처를 지층 조사하듯 더듬느라 진행이 상당히 더딘 편입니다. 고아라는 수치스러운 정체성, 그리고 추한 외모, 밝지 못한 성격, 이 모든 것들이 빚은 상처를 보듬느라 남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들의 발버둥을 일일히 살피고 그 배경을 분석하느라, 남 일(가상의 세계에 불과한)을 구경하는 독자조차 진이 다 빠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말에서, 그 수가 적지도 않았던 모든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이 한 지점에서 여튼 모두 제 가닥을 찾아 깔끔하게 정리되는 데서 뭔가 마음이 풀리긴 합니다. "깔끔하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겠으나(당사자들 입장에서야 그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냐는 점에서), 여튼 이들도 진실 앞에 눈을 감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가졌으며, 또한 한 사람(혹은 그 이상)의 죽음이 과연 자연사인지 다른 원인이 개입했는지를 규명할 때에는 이게 더 이상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를라나 페터 등의 비중이 줄고 이 2권은 수사네, 아스거 등의 어린 시절 회상, 그리고 새로 파헤쳐진 사실이 독자 앞에 와락 제시됩니다. 수사네는 보기 드물게 미인형인 외모인데, 1권 리뷰에서 말한 것처럼 용모가 예쁜 아이는 그나마 좋은 조건의 양부모를 찾는 데 시간이 덜 걸린다는 장점이 있죠. 수사네를 입양한 이들은 작은 농장을 가꾸는 부부였습니다. 덴마크는 특이하게도 반도 우안에 위치한 섬에 수도도 있고 번화한 도시들이 위치하지만,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유틀란트 반도에는 이처럼 농업, 낙농 등의 기능이 맡겨져 있죠. 도시와 농촌 간의 이런 괴리는 이 소설에서 인물들 사이의 갈등과 적대 의식, 혹은 이유 모를 친밀감(드물지만)을 형성하는 근인으로 작용합니다. 이 소설은 별 것 아닌 듯 흘리며 지나가는 말 중에 제법 깊숙한 복선을 깔아 두는 게 습관이더군요.

사생아라는 게 꼭 버려진 아이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마땅히 법적으로 엮여져야 할 두 남녀 사이에서 자라지 못한 모든 아이, 혹은 풍요롭고 명예스러운 환경에서 성장하고 모든 것 가졌으나, 자신의 정확한 출생을 알지 못한 아이(이게 누구일까요?)까지 다 포함하는 의미더군요, 이 소설에서는 말이죠. 1권에서 뜬금없이, 막달렌의 이야기를 하면서 프레데릭 7세가 나오길래 뭔 의미일까 했는데, 그 양반이 생전에 상궤에서 벗어난(왕족치고는) 행각을 보인 점이나 후계를 못 남긴 사유 등이, 작가는 다 그런 껄끄러운 기억과 유별난 결벽 심리, 혹은 수치심 등이 다 먼 이유가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사만다는 결국 자신이 사생아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사만다와 운명의 켤레쌍곡선을 그리며 강한 생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는(이라기보다 그냥 외모빨로 잘 풀리는 듯도 한?ㅋ) 수사네의 선택이 이 2권에서 이야기의 주된 흐름을 형성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2권(3, 4부)가 다른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두루두루 담지 못한 면이 있어 불만이 좀 있었구요.

1권에서 "늪지의 바보(눈알이 빠지는)"에 얽힌 끔찍한 비밀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면(텍스트 묘사인데도 정말 징글징글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네요), 여기서는 좀 미니어처화한 카나리아의 끔찍한 생애가 등장 인물, 그리고 우리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줍니다. 기 드 모파상의 <여인의 일생>에서도, 여러 새끼를 낳는 암캐와 그 중 한 마리 마사크르의 화소가 특징적인 사건이었듯 말입니다. 생명을 세상에 배출하는 산모의 모습은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활동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한데, 아이들은 큰 짐승도 아닌 카나리아의 출산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독자인 저 역시, 작가의 묘사가 생생해서인지 괴물처럼 큰 알을 낳다 건강이 나빠지고(이미 포태 기간 중에 심각한 질환이 발생한 듯), 기형의 알과 시름시름 앓는 "산모"를 동시에 폐기, 안락사시키는 부녀(?)의 단호한 행동을 보고(읽고)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네요. 양아버지 안톤은 마음이 여리고 선량한 인물이지만, 어쩌면 삶의 가장 추악한 진실에 대해 일찍부터 그 다루는 방법을 깨우치고 득도한 듯 담담하게 비루한 일상을 사는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그는 경제적으로야 넉넉한 형편입니다. 단지 화려하고 주목 받는 인생을 내심 꿈꾸었던 아내의 존경을 못 받은 일개 촌부, 농장주였다는 의미에서일 뿐입니다.

결국 원하고 갈망하던 이성에게 선택되지 못하고, 안정된 현실을 보장해 줄 평범한 남자에게 머물렀던 여인의 맺힌 오랜 한이, 자신과 사랑하는(어쨌든) 가족 모두의 삶을 파괴하고 말게 된 거죠. 카나리아를... (스포일러라 생략)... 에는 그만큼 큰 의미가 숨어 있었다는 게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작가, 바람둥이는 수사네의 통렬한 비난처럼 결국 허풍쟁이에 불과했는데도, 그녀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과 비련에 너무 많은 것을 투영했던 겁니다. "누가 진짜 사생아인가? 우리 중 누가 출생이라는 최악의 시련을 자기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가?" 어떤 축복은 그 실체를 알고 나면 최악의 저주로 판명나기도 합니다. 이런 비관적인 현실 인식, 시초에 잉태된 죄의식 때문에, 작가는 현대 덴마크의 일견 풍요로워 보이고 아름답게 조성된 문명의 여건 뒤에 온갖 추악한 모순과 괴물들이 숨어 모두의 영혼에서 고뇌를 잠재울 날이 없다고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우리는 예정된 스케줄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부품에 불과하다. 닐스 보어의 해석이 옳아야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확인되는 셈이다. 왜 전자들은 우리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려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모습을 바꾸고 접근을 거부하는가?" 외모가 추한 마리는, 그새 온갖 신산과 아픔을 겪고 다시 콩슬룬(이 소설의 주무대가 된 고아원입니다)에 돌아온 수사네와 황홀한 동성 섹스를 치르고 나서(소설에선 대단히 간접적으로 돌려돌려 묘사하지만 결국 성적 체험을 뜻하겠네요. 전 1권에서도 막달렌과 마리가, 신체적으로 불가능하겠으나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지 추측했습니다) 튀코 브라헤를 향해(이 사람들은 고인과 대화하는 게 주특기) "우주의 신비를 당신보다 내가 더 확실하게 풀었다!"며 환호합니다(그럼 브라헤는 한번도 못해 보고 죽기라도 했단 소리? 이렇게 체험과 자산이 빈약한 사람이 어쩌다 한 번 맛을 보면 세상 천지에 자기만 해 본 양 방방 뛰게 마련이죠 ㅋ) 아그너가 부각되면서 물리학, 천문학 토픽이 자주 등장하는데, 호일, 구스, 호킹, 칼 세이건 같은 이들의 이름과 주장이 소설의 테마 그 외연을 확장하며 독자에게 많은 암시를 남깁니다. 참고로 닐스 보어와 그 학파의 입장에 붙은 이름이 "코펜하겐 해석"이듯, 덴마크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인류에 남긴 업적이 큰 많은 학자를 배출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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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종 살인자 밀리언셀러 클럽 25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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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 "디 공(公)"은 가공의 인물은 아니고, 당나라 때 실존했던 관료입니다. 이 디 공 시리즈는 그의 젊은 시절 지방의 행정과 사법을 관할하던 수령으로서 그의 현명하고 매혹적인 활약을 다룹니다. 작가는 권말에서 자신이 어느 문헌의 어느 부분에서 모티브와 소재를 얻었는지 소상히 밝히는데, 비록 실제 기록에서 착상과 영감을 얻었다 해도 그 형상화와 쫄깃한 구성 솜씨를, 전통 중국식 회장체 소설의 형식 안에 능청스럽게 발휘하는 게, 읽는 재미로서 최고의 장르물 안에 거리낌 없이 꼽고 싶습니다. 이 사람을 소재로 삼아 중국판 명탐정 연작을 짓는 게 이 네덜란드 작가의 시도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분의 창작 세계에서 접하는 "디 공"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매력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서양인의 문예라는 이질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책 어디에도 언급이 없긴 하나, 주인공 "디 공"은 우리가 잘 아는 당 고종 때의 문신 적인걸입니다. 狄(적)을 현대 북경어로 "디"라 발음합니다. 물론 소설의 배경이 된 당나라 때에 이 글자의 음운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겠고요.

이 소설에는 세 건의 미제 범죄 현안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은밀히 어느 서생과 교제하던 푸주한의 딸이 느닷 강간치사의 희생자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연 왕씨 성을 가진 생전 그녀의 정인이 용의자로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무지몽매한 지역민들은 왜 신관 사또가 냉큼 범죄자를 처단하지 않는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두번째 사건은 사건이라기보다 추문과 의혹에 가까운데, 새로 부임한(?) 주지승이 불임 여성들의 숙원을 아주 신통하게 해결해 주는 능력으로 큰 신망을 얻고, 동시에 엄청난 축재에까지 성공하지만, 어떤 흑막과 술수가 있으리라는 게 지역의 중론이라는군요. 마지막으로는 다분히 실성한 듯 보이는 어느 노파가,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어느 토호의 만행을 이 지방관 디 공에게 고발하며 정의의 실현을 읍소하는 사안입니다.

디 공은 괜한 선입견과 감정,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기록을 꼼꼼히 검토한 후 허점을 발견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가장 있을 법한 진상이 과연 무엇이었겠는지에 대해 꼼꼼하고 치밀한 추론을 한 후, 자신의 시나리오가 타당한지를 검증하기 위해 현장 실사에 나섭니다. 이 점에서, 이번 주부터 OCN 시리즈 채널에서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엘리멘트리>에서 맹활약 중인 셜록(조니 리 밀러가 연기합니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디 공께서 더 점잖고 더 침착하며 용모가 더 빼어나시고 더 젊어 보이는 데다 우리 동양인의 감성에 더 부응하는 듯합니다. 첫째 사건은 거의 한눈에 진상을 파악하는데, 시신에 난 상처와 용의자의 물리적 상태가 서로 맞지 않음에서 단서를 잡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왕생의 경박해 보이는 친구가 진범이라 추측했는데 그건 아니더군요. 둘째 사건은 아예 마음을 비우고 접근합니다. "정말로 부처님의 영험으로 포태의 기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게 괜히 의뭉을 떠는 게 아니라 그 나름으로는 진심이었던 듯합니다. 확고한 양심과 주견이 갖추어진 교양인이었기에 발휘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지요. "사불범정"의 오랜 동양적 신조가 여기서도 재확인되는데, 작가께서 참 동양학에 깊이 천착하셨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순박하고 착한 처녀를 무참히 살해한 그 진범이, 디 공의 치밀한 수사망에 걸려 들어 마침내 제 죄를 자백하는 과정도 통쾌하고, 탐정이라기보다는 거의 전략가의 면모와 능력으로 흉측한 주지승의 정체를 밝히는 흐름도 속시원하지만, 이 책 제목 "쇠종 살인자"에 걸맞게 그 핵심을 이루는 범죄 사건은 바로 셋째 케이스입니다. 지방의 (중앙에 든든한 연줄도 갖춘) 대토호와 맞서며 마침내 그 잔인무도한 악행을 낱낱이 밝히는 디 공의 활약이야말로 압권이라 하겠는데요. 린의 죄명은 현대 영미 법제로 따지면 OBSTRUCTION OF JUSTICE이겠는데, 미드 많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쪽에서는 상당히 중죄로 취급합니다. 소설 끝에도 나오지만 "사소한 죄명을 걸어 속인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여지가 이런 관점에서는 상당히 줄어들죠. 우리 실정법의 "공무집행방해죄"는 엄격히 해석될 뿐 아니라 형량도 적은 편입니다.

사실 세 사건 모두 (마치 홈즈 시리즈처럼) 명탐정의 일방적인 능력 발휘를 그저 넋놓고 감상할 뿐 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여튼 재밌었으니 만족하며 책을 덮으려는 순간, 진짜 반전이 하나 기다리고 있더군요. 힌트는 본문 중에 부족하지 않게 주어진 편인데, 읽으면서 뭔가 수상쩍다거나 사리에 안 맞는 바로 그 대목이 힌트이니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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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아이 1
에리크 발뢰 지음, 고호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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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우연은 우연인 듯 보여도 알고 보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떤가요, 이 말에 동의를 하시는 편입니까? 삼라만상 그 운용의 이치를 모두가 필연이요 업보로 파악하는 불가나 힌두이즘의 관점에서라면 이 명제는 참입니다. 그러나 일상을 바쁘게 사는 평범한 우리들의 눈에, 오히려 "뭔가 의미가 있는 듯 보여도 알고 보면 그저 우연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 많지는 않을까요. 무엇이 진리인지는 부다나 공자님 같은 대성현이 아닌 탓에 알 수 없으나, 어떤 특별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는 저 맨 위에 적은 말이 자신들의 가슴을 저미는 삶의 질곡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들(가상이길 바랍니다)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며, 다만 북유럽과 독일을 잇는 유틀란트 반도(수도는 동안의 섬에 있습니다만)에 자리한 작은 나라, 우리 막연한 선입견으로는 평화롭고 "착한(?)" 나라이기도 한, 덴마크란 지리적 배경에서 힘들게 힘들게 생의 특정 시기를 거쳐 자립한 이들입니다.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 용케도 버젓한 현재의 직장, 직위, 신분을 가졌겠다 싶을 만큼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대작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보면, 지독한 빈민가 출신인데다 성장기 대부분을 조직 폭력단원 일에 종사한 자가, 행운과 약삭빠름으로 정부 고위 관료직에까지 오른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 한창 사회에서 중간-고위 관리자 노릇으로 활약할 나이 때의 인물들은,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네요. 물론 어떤 이들끼리는 서로 알고, 어떤 이들은 같은 수용 시설에서 계속 같은 시기를 보낸 건 아니라 모르기도 합니다. 서로 계속 알아 온 사이끼리는 큰 문제가 없는데(작은 다툼과 갈등은 언제나 있더군요), "잠시 우리 사이에 있다 떠난 아이"가 누구인지를 몰라 일이 커집니다. 개인의 가정사나 평온을 위협하는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 이들, 혹은 이들이 모시는 인사들이 제법 거물들이라 아예 국가적 스캔들로까지 번질 테세네요.

백성들에게 관대한 정치를 베풀었고, 소탈한 매너와 인격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나중에는 전제 군주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국민에게 보다 큰 권리와 참여를 허용하는 입헌 조치를 내린 덕분에 "민중의 왕"으로 불리었던 프레데릭 7세. 그가 그 설립에 간여한 고아원이라면 정말 유서 깊고(근 두 세기 전의 군주입니다), 이후로도 주로 보수파 정치인들에 의해 "덴마크인은 어느 누구라도 따스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해야 한다"는 정치적 슬로건을 입증할 좋은 예(혹은 정치적 쇼의 무대)로 널리 활용됩니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지극히 타당한 말(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듯)처럼 "가장 좋은 집은 해변가에 있다"는 원칙을 그대로 실천하기라도 하듯, 이 고아원은 멋진 구조에 안락한 시설에, 가장 비싼 땅을 점유하는(쉽지 않은 결단이죠) 인도주의와 박애의 표본입니다. 원장이나 사감 등도 사명감 투철한 사람들이며, 무슨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악당들처럼 고아 장사를 하는 류가 아닙니다(한때 페스탈로치도 "고아 장사꾼"이란 오해를 받았죠). 겉을 봐도 그렇고, 속을 어지간히 살펴도 별 문제가 없는 듯하네요. 입양을 장려하는 (오래 전의)홍보 문구에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의 친부모를 추적할 수 없습니다"가 명시됩니다. 요즘이야 시스템이 좋아져서 큰 물의는 생기지 않지만,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 이 시설에서 아이로 지내던 수십 년 전이라면 반드시 보장되는 지원은 아니었을 텝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피임 도구와 약품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 타락한 남성의 정욕에 희생이 되어 그 대가를 오롯이 떠맡아야 했던 여성들은, 특히 고위층과 유력 인사의 사생아를 낳고서는 "철저한 비밀이 보장되던" 이곳에 제 아이를 떠맡겨야만 했습니다. 만약 이 스캔들의 진상이 철저히 밝혀지면 해당 정치인의 정파와 그 소속 정당은 비록 과거사라고는 하나 큰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들이 인도주의와 국가 복지 시책의 성공을 과대 포장하여 그토록 위선적인 속셈을 뒤에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국민의 공분을 부를 게 분명하죠. 물론 입양아 당사자들의 사생활도 보장이 되어야 하기에, 내밀한 출생의 비밀은 그 공개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겉으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이 특급 국립 고아원의 추악한 단면입니다.

"추함"은 이 소설 속에서 다른 의미로 독자에게 강렬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이들 중에는 예쁜 용모로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만한 처지도 있을 테고, 이런 아이들(작중 페터 같은 아이 - 나중에 기자가 되죠)은 설령 고아라 해도 쉬이 버젓한 형편의 다른 가정에 입양될 수 있겠죠. 헌데 보통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면(다 고위층의 사생아라는 게 아니라, 그 중에 숨겨진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빈곤층에서 유기된 출신이 훨씬 많겠죠), 장애가 있거나, 용모가 특히 추하거나 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행여 좋은 가정에 입양이 되어도,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지는 않겠으나, 유독 이 소설의 사정은 고아들이 특이한 이름을 갖는 예가 많더군요. 뭐 고아 아니라도 이름이 이상하고 아버지가 노조 간부라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한 애(뮈)도 있었습니다만.

부모에게 버럼 받거나 온전한 혼인을 성립시키지 못한 출신이라는 사실도 서러울 텐데, 이러저런 이유로 또래들에게 따돌림까지 받고, 나중에 입양아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 한번 상처 받고, 마리 같은 아이는 극심하다 할 만큼 추한 외모 탓에 어느 가정으로부터도 입양이 이뤄지지 않아 평생을 시설에 머물러야 할 형편입니다. 그나마 마리는 시설의 책임자가 직접 입양을 한 덕분에, 그리고 예의 "최고급 시설"에서 베푸는 복지 덕에,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만, 이런 선천적인 악조건이 안긴 상처, 그리고 시설이 숨기려 애쓴 추악한 사정을 알고 나선 마음의 평온을 찾기 힘듭니다. 마리는 꼬마 때 이웃에 사는 막달렌이란 성인 여성을 알게 되는데,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인이었으나 유복한 집안의 지원, 천성적인 밝은 성품으로 오히려 주위에 희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마리는 처음에 이분을 만났을 때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체험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그 외모의 추함에 대한 본능적 경멸, 다른 한편으로는 동질감이었겠죠. 막달렌은 프레데릭 7세를 "영혼의 친구"로 두는 좀 특이한 정신 세계를 가지기도 했는데, 물론 혼령이 찾아 와 대화를 나눈다는가 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이런 사연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미스테리와 직접 큰 연관을 가지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요(아직 2권을 안 읽었습니다), 작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대목을 세심히 묘사하는군요.

세심한 묘사가 이뤄지는 건 이 대목 뿐 아니라, 고아원 출신 소년(지금은 다 성인이 되어 자리를 잡은)이 그 고난의 유년기에 겪었던, 아주 지독한 사건 하나를 끔찍한 방식으로 회고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컸기에, 자기들끼리 모여 약자의 설움을 공유하고, 그 맺힌 한을 "더 약한 자" 하나를 찾아 내어 풀어야만 했습니다. 이들이 만약 그대로 사회 하층민으로 주저앉았다면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할 여유도 없었겠으나(실제로 이런 게 더 일반적입니다), 버젓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보니 이런 추악한 과거가 다 끔찍한 악몽으로 남는 거죠. 이들은 우연한 편지, 협박인지 뭔지도 모를 모호한 편지를 동시에 받고서, 수십 년 전의 과거에 다시 발목이 잡힙니다.

"덴마크는 작은 나라다.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마치 작은 시골 주민들이 모두 들어 알듯 사정이 뻔하다." 그러나 덴마크는 훨씬 높은 윤리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유명한 기자 한 사람이 근거도 없이 불법 이민자가 드레퓌스처럼 억울한 누명을 썼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그의 방면을 이끌었지만, 이 자는 그런 호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동종 범죄를 또다시 저지르며 은인들을 비웃고 자살합니다. 언론인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기자는 거의 경력을 끝내야 할 만큼 비난을 받는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윤리의식의 발현으로도 보입니다. 이에 덧붙여 케네디의 암살, 훨씬 전 나치의 점령과 게릴라 활동, 68세대를 자칭하는 이들의 보수화 등이 촘촘한 시대배경으로 제시되어 사연의 실감을 더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독일이란 큰 나라에 가로막힌 지리적 위치를 감안할 때(더군다나 북구 특유의 보수성까지 생각하면) 프랑스 68세대가 그만큼이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처음 알게 되었네요. 심지어 이 소설에는 히피 족도 나와서 남 스페인에 자치구를 찾아 정착한 어느 여인(토싱의 어머니) 이야기도 잠시 언급되며, 고아 하면 빠질 수 없는 1970년대 한국 고아 수출도 지나가듯 나옵니다. 박진감 있는 전개보다 인간 내면의 깊숙한 상처가 어디서 비롯하고 어디에서 크게 덧나는지 그 사려 깊은 고찰이 돋보였습니다만, 2권은 또 어떨지 계속 읽어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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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 열린 정치와 소통하는 리더십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오긍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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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는 보통 제왕학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고전입니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주로 유념하던 사서 삼경 등 과거 시험 출제에 애용되던 텍스트와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그 중요성과 연혁에 비해서는 현대인들에게 그 지명도가 낮은 듯 보입니다. 이 고전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건 모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그 취임까지의 준비 기간에 이 책을 읽었다는 일화가 널리 퍼지고부터입니다. 사실 조선조, 고려조에 이 책을 읽은 축은 그저 제왕들에 그친 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명신, 충신들처럼 군주를 잘 보좌해야 할 재상과 판서 들, 혹은 장래 일신의 높은 영달을 바랄 당상관, 당하관들도 넉넉히 가까이해야 할 잠재적 독서층이었겠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바른 처신으로 동료와 상사의 신망을 얻고자 할 모든 직장인 역시, 이 책의 저자가 먼 시점부터 염두에 둔 청자(聽者)가 아니었을까요.

정관정요는 몇 년 전부터 여러 역자분들에 의해 완역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김원중 선생님의 한국어역의 특징이라면 1) 타 저자의 주가 아닌 텍스트 본문에서 한문 텍스트의 누락이 없고 꼼꼼한 옮김입니다. 2) 김원중 교수님의 해설엔 초보자를 넉넉히 고려하는 친절함이 깃듭니다. 기본적인 사항을 언제나 먼저 짚고, 혹시 필요하다면 여러 주석본을 인용하여 부가 설명을 하십니다. 3) 편집에 가독성이 높습니다. 이는 책이 펴내어진 출판사에 따라 사정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4) 윤문이 꼼꼼하여 문법 오류나 오탈자가 매우 드물고 문장이 평이하게 잘 읽힙니다. 특히 이 <정관정요>는 어떤 심오한 경전의 의의를 탐구하기보다, 다분히 실용적(처세적) 목적에서 읽혀야 하겠으므로 이런 미덕이 더 절실히 요구됩니다.

당태종은 수천 년에 달하는 중국 역사 전체를 통해, 학자나 민중을 불문하고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객관적으로 그는 "사실상의" 창업 군주로서 제국의 기초를 튼실히 닦은 공덕이 크죠.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선 무단히 고구려를 침공하다 국력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비난과 빈축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이조차도 그는 "즉시" 과오를 뉘우치고 갓 성립된 체제의 내실을 다지는 게 진력했다는 점이 탁월합니다. 이 과정에서 "위징이 살아 있었던들 그가 진언을 삼갔겠으며 끝내 내가 이 무리한 원정을 시도했겠는가!"라고 개탄했다는 그의 회오 속에, 이 고전 <정관정요>의 주된 저술 모티브인 그 유명한 명신이 또 등장하여 인연을 잇는군요.

그는 군주의 인품과 태도 면에서 또한 기념비적인 덕성을 갖춘 걸물이었습니다. 인신(人臣)된 자로 제갈량의 전범이, 학자로서 수신의 미덕을 갖춘 자로 동중서 같은 이의 롤 모델이 꼽히겠으나, 제왕으로서 만인(이라기보다 군주의 후계자 될 자들)의 거울이 될 처신이라면 당연 당태종의 그것이 거론됩니다. 이는, 건국 군주(부친 고조보다 사실상 더 큰 공헌)로서 손에 피를 끔찍히도 묻혔으며, 무엇보다 제 피붙이를 둘씩이나 죽인 패륜과 악행을 저지른 이로서, 향후 원만한 정국 수습과 차분한 나라 살림이 거의 기대되지 않은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헌데 일단 보위에 오르자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정적이자 자신의 패륜 행각의 가장 큰 표적, 피해자였던 형의 최측근 위징을 등용하여 국사의 매 면모를 직간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위징의 처신 역시 볼 만한데, 죽다가 살아난 목숨 그저 일신의 안위나 돌보자는 생각에 굴신과 아첨, 복지부동으로 일관하지 않고, 군주(한때는 주군의 정적)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오히려 말마다 폐부와 정곡을 찌르는 충언, 냉정한 국정 운영으로 응수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일부러 비위를 긁는(즉 국사와 직접 관련 없는 삐딱선) 제스처도 취했는데, 이 역시 바보가 아닌 그로서 매 순간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세민의 성격이 간단치 않고, 친형제의 생명을 둘이나 앗은 이가 일개 재상 따위의 행보에 겁 먹을 게 뭐겠습니까. 여튼 그는 어차피 거두어졌다 다시 들인 여분의 생을 산다고 생각하고, 신하로서 남아로서 국가의 신민으로서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언행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군주와 신하가, 서로 속을 훤히 꿰뚫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통 큰 제스처를 취하는 건 중화 문명에서 실력자, 대인으로 천하에 보이려는 모든 야심가들의 공통점입니다. 서안 사변을 기술할 때 유시민도 자신의 <거꾸로..>에서, 장개석과 장학량, 주은래의 쇼맨십을 두고 이런 평가를한 적 있습니다. 당 태종 역시 천하에 "내가 결코 냉혈한이나 속 좁은 독재자가 아님"을 보여 주려 했고, 위징 역시 그런 "쇼"에 철저히 조연으로 부응했습니다. 때로는 주연의 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오버액션까지 할 정도였는데, 이 역시 당 태종은 바로 그 속내를 간파하고 케미를 맞췄지요.

지금 한국은 국제 정세상 대단히 어려운 시기입니다. 중국 당국은 이례적으로 "한국의 친구들(朋友們. 붕우문)"이란 표현까지 써 가며 재고를 촉구했으나, 이내 "90% 이상의 네티즌이 제재 원해" 같은 여론전을 쓰는 등(환구시보) 국익 앞에 체면을 돌보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 가지 정책으로 일관하며 융통성을 잃는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다음 한 수가 무엇인지 알고 현명하고도 실리적인 외교를 펴야 하며, 아마도 단지 일국의 통치자로서 발휘해야 할 지혜를 넘어, 국가 간 치열한 외교전에서 십분 채용해야 할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지혜가 이 책 안에 담겨 있는 만큼, 당국자들이 넉넉히 참고해야 할 인문 고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런 위기의 시국일수록 나라의 참 주인인 우리 국민들이 더욱 열독하여 냉철한 집단 지성을 가다듬는 데에도 이 책은 유용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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