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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 - 경영자여, 이대로 생존할 수 있겠는가?
한일IT경영협회 지음, 요시카와 료조 엮음,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옮김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학자마다 개념 포착에 있어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이 책 p88에 나온 대로, 4차 산업혁명이란 빅데이터, 유전공학, IoT, 인공지능 등 일찍이 그 가능성만 전망되던 분야에서 폭발적인 혁신이 이뤄지고, 그 혁신의 결과물이 제조의 "모듈"로 양산되어 예측 불가의 분야에서 창의적 재조합이 이뤄지며, 이 결과로 산업 전반이 다른 양상을 맞는 현상을 지칭합니다. 한국에서는 클라우스 슈밥이 쓴 작은 책자가 이 메가트렌드를 잘 요약하는 지침서로 인기를 끄는 듯합니다.
이 책은 슈밥의 책보다 분량이 더 적고, 일본이라는 국지적 시장과 기업군의 현황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추상적, 혹은 "인문적" 파악으로서 이 4차 산업혁명을 대할 게 아닌 이상에는, 이 (더) 작은 소책자가 우리네 기업의 비전, 장기 예측을 행할 지침서로 쓰기에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일본의 형편에 주된 pivoting이 이뤄지고 있어서 과연 제목에 합당한 내용인지 살짝 의심이 들었습니다만, 일본인이 쓴 책이니 철저히 일본의 현실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게 당연하다는 수긍이 되더군요. 또 하나, 일본의 현실에 철저히 천착하여, 지금 일본이 맞고 있는 도전, 환경의 변화(바로 "제4차 산업혁명")에의 대응책을 성실히, 꼼꼼히, 적실하게 분석하는 내용이라면, 역으로 그로부터 대체 4차 산업혁명의 본질과 난점이 무엇인지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재해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해도, 우리와 전혀 무관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 허리케인, 시로코 등에 현지인들이 효과적으로 대비하는 방식을 보면, 그 자연재해를 극복하는 비결이라든가 폭풍의 발생하는 원인, 지속 시간 등의 본질(기압차라든가 국지적 지열의 작용 등)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유사한 자연재해가 어느 정도 파괴력을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가질지 추측이 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이 책은 우리와 대단히 유사한 산업의 성장 구조와 운영 방식,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가진 일본의 현황을 분석했기에, 우리 기업에게 직접 참고되는 바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책의 곳곳에서 밝히는 바처럼, "한국"은 일본에게 영원한 타자요, 후발 주자이며, 아직은 신흥국에 속하는 성질이 다른 그룹의 구성원입니다. 저자는 삼전에 오래 몸 담은 인력이기도 하기에 한국에 감정적 태도로 접근하거나 선입견을 갖거나 하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 기업(삼성과 엘지)의 장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이 일본 기업들에 비해 갖는 체질상의 강점이라든가, 최근 일본이 실패한 신흥국(동남아, 중국, 인도 등) 시장에서 어떻게 한국이 성공했는지 매우 냉정한 분석을 합니다. 그들 입장에서 경쟁자이자 적수인 한국에 대해 SWOT 분석을 이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시도하는 건 그 자체로 시야와 비전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이 책은 대체로 일본의 지난 시절 실패에 대해 통렬한 반성에서 논의의 시작점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30년(20년)"이니 하는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어구로 문제를 호도하지도 않습니다(이 표현이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일본이 실패한 이유는 과거 생산자 위주의 시장에서 그저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내놓기만 하면 소비자들이 알아서 사 가던 환경 조건을 잊지 못하고, 시대의 변모에 냉큼 적응하는 데에 태만히했다는 점을 꼽습니다. 저자는 "최고의 품질도 필요 없고,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의 품질을 구현하면 그만이며, 이 적정 품질 이상의 효과를 노리는 투자와 연구는 원가 낭비 요인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원문 그대로는 아니며 독자인 제가 재구성). 이 말은 과거, 고장 잘 안 나는 일제의 장점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의 니즈가 어느 수준에서 이뤄지는 지 보다 고객 속으로 파고들라는 주문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소비자들이 (거대 기업에서 내어 놓는 훌륭한 제품의 컨셉과 품질, 지향성에) 너무도 순응적이었기에, 사정이 천차만별인 글로벌 시장에 알맞는 체질을 기르는 데 실패한 면도 있다고 합니다. 시장에 따라서는 섬세한 부가기능이 여럿 부착되는 것보다, 그저 한 가지 기능성으로 튼튼하게만 돌아가면 충분한 곳도 있는데(위의 예와는 반대죠) 예를 들어 중국 특정 지역에서는 감자 깎는 용도로 세탁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시장에서 그런 (어이 없는) 요구를 하면, 그들에게 팔고 싶은 공급자로서는 그 요구에 부응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글로벌 시대 현지화(localization)의 첫번째 뜻입니다. 그저 가전 제품의 매뉴얼에 충실하게만 사용하는 일본인들의 습관에 길들여진 일본 기업으로서는 이런 이상한 시장의 요구에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일본 시민 누가 세탁기에 감자를 돌리겠습니까? 저자는 반대로, 한국 기업들은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고 현지의 니즈에 따르기만 하는 전략을 택했기에 성공했다고 그 요인을 짚어 냅니다. 두 나라의 대표 기업에 고루 몸 담아 본 기업인만이 행할 수 있는 분석이요, 유지할 수 있는 공정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니즈가 다양하고 경쟁이 치열하며 소비자들이 대체 만족을 모르는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이,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세계 각처의 시장에 두루두루 통할 제품을 만든다고도 합니다. (이 책에 언급은 안 되지만)주방 세제라든가 과거 피처폰 시대 한국 휴대폰 같은 게 대표적인 예죠. 주방 세제는 중국인들이 입을 모아 "한국 게 잘 닦인다"며 칭송이 자자합니다. 피처폰도 취향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이 고르고 골라 살아 남은 모델이 북미나 유럽 시장에서도 그대로 통했습니다. 이렇게 시장 여건이 우호적으로 조성되어 향후 십 년은 삼성 폰이 노키아 등을 추월하고 명품으로 군림하겠거니 예상했는데(디자인 등의 요소는 중국이 따라잡기도 힘들겠으니), 전혀 뜻하지 않게 잡스가 새롭고도 파괴력 있는, 그야말로 게임 체인징의 혁신을 이뤄 낸 겁니다. 노키아는 결국 환경의 변화에 적응 못하고 도태되었으며,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도전을 맞아 유리한 전망이 갑자기 깨진 삼성이야말로 타격이 컸을 만했으나, 역시 앞뒤 안 가리고 감성에 젖지 않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바탕한 전략 전환으로 그들은 다시 살아남는 데 성공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불가능하다 싶은 적응을 해낸 것으로 보는데,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 저렇게 된 것도 이런 이유가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이란 (컨셉과 현상 모두) 본디 독일에서 유래했습니다. Industrie 4.0이란 민-관 합동 전략에서 비롯한 거죠(그래서 철자가 저처럼 독일식입니다). 독일은 이처럼, 좁은 국토와 역사적 시련, 인건비 상승, 부존 자원 부족 등 갖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저력을 잃지 않고 있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모습입니다. 독일은 냉전 체제 아래에서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경제 내실화, 수출 입국에만 집중했고, 갑자기 흡수 통일이 이뤄져 천문학적인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음에도 EU 단일 시장 창설 등 여러 호재를 만들어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 4차 산업 혁명이란 메가트렌드 역시, 미래를 살피고 대비해 온 독일 경제에 다분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현재의 난관에 정확히 대응한 이들이, 미래에도 합리적인 여건을 조성하며 시장과 대 추세를 선도해 나가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자는 이런 유리한 점이, 비록 "잃어버린 30년"이란 좌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만의 장점을 간직해 온 일본 경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일본은 정치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기업은 장기적 미래를 내다보고 R&D에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으며, 원천 기술의 확보에 예전부터 강점이 있었던 일본 기업이 이런 국면의 전환을 맞아 대도약을 이룰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원천 기술이 꼭 아니라도, 모방과 재조합의 창의가 지난 십 년 동안 잘 통하던 시절이었다면, 게임의 룰이 바뀌는 지금부터는 일본이 다시 크게 일어설 수 있다고 지적하는군요. 중국도 물론 정치가 안정(?)되어 있습니다만, 당 지도부가 전략 판단을 그르치면 회복할 방법이 없고, 얼마나 시장의 첨단 변화에 적응하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일본은 기업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게 큰 강점이라는 거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최근 일각에서는 거액의 R&D 예산을 대기업에 퍼 주는 게 특혜이자 낭비라고 지적합니다. 기업이 어떤 산업에 무슨 전략으로 임하든, 그에서 어떤 성과와 실패를 기록하든 그 위험은 기업이 전적으로 부담할 뿐, 국가가 이를 분담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원론적으로는 타당하나, 세계의 시장과 경쟁 여건이 이런 이상, "알아서 살아 남으라"고 방치할 수만도 없습니다. 벤처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은 관련자들의 모럴 해저드로 인해 크게 실패한 바 있습니다. 기업도 기업이거니와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을 구상할 때, 세계적 범위의 트렌드가 어떻게 바뀌고 어떤 추세로 수렴, 발산하는지 먼저 정확한 상황 인식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이 국지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일본의 분석을 통해 훨씬 세밀하고 깊이 있는 시사점을 던져 주는 책이라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