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 루브르를 거닐며 인문학을 향유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안현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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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본디 텍스트로 된 인문과 구상을 갖춘 회화, 조소는 생각만큼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을 눈으로 받아가며 <천지창조>를 완성하는 고달픔이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고 해도, 펜을 쥐고 개념을 정초하는 이들의 당혹과 고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으니 누구의 일이 더 고상하며 편안했다고 단정할 것도 아닙니다. 또, 예술품이나 텍스트나 결국은 당대인(중 소양 있는 이들)의 공감과 합의를 담은 사상의 구체화이기 때문에, 전자의 해석, 후자의 구상화가 손쉽게 서로 통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작이라고 평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 책은 미술품의 여러 사례를 통해 그 안에 담긴 메시지, 배경 설화, 작가의 개성, 실제 역사를 어떻게 읽어낼 지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선명하고 깨끗한, 그리고 부분에 초점을 뒀을 경우 어디에 주 시선을 두어야 할 지에 대해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책이더군요. 이런 책들이 사례를 들고 도상학을 가르칠 때("도상학"인지 뭔지도 모를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에게 쉽게 알려 주어야 성공입니다), 그리 많은 실례를 들지 않는 게 그간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분야에선 도그마화한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 작품 앞에서 얼마나 무리 없이, 융통성 있게 "이야기"를 풀어주느냐 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도상학에서 일단은 개별 작품이 무리 없이 설명되고 그를 보는 "독자"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도상학은 예술과 유리된 별개의 "독재"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경험담, 혹은 실수에 대한 회고로 "디도"의 예를 듭니다. 본문에서 주로 설명되는 건 카이요의 조각이고, 사진으로는 뒤러의 회화도 제시됩니다. 카이요의 조각에 대해 "설화와는 달리 앳되어 보인다"고 저자는 평하시는데, 디도가 실제로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죠. 여왕이면 으레 나이를 먹었겠거니 여기는 것도 선입견일 수 있고, 도생 망명하는 아이네이아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아 이 중년 남성과 비슷한 또래겠구나 짐작하는 것도 꼭 정확하다고는 못합니다. "자결"이 반드시 루크레치아를 연상시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디도는 주로 그 시신이 활활 타오르는 게 대뜸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여튼 반례가 이렇게 융력한 것만으로도 두 점이나 있으니.. 1990년대 말에 "다이도"란 외국 가수가 갑자기 한국 대중에게 부상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저 디도에서 따온 거죠. 프랑스어의 경우 어미(ending. 語尾)가 -n이 붙어 이상하다고 하시는데, 확실히 이 디도의 경우는 이상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원어도 여튼 오메가로 끝나므로 어미 없는 꼴처럼 보이고, 다른 언어의 표기례는 그저 -o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영어는 반대로 무조건 떨어뜨리고 보는 게 습관이라 짜증이 나지만요.

앙리 4세가 사랑했던 정부(情婦)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동생을 그린 유명한 회화(이게 작자 미상이죠)는 사실 일개 가십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게 분에 넘치게 회자되는 경우입니다. 저자께서도 "어딘가 엉성하고, 마땅히 배웠어야 할 시대의 첨단 기교(이런 걸 영어로 state of the art라고 합니다)가 반영되지 못했다"고 하시는군요. 과감하게도 외설적이고 짖궂은 제스처를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예술 자체의 성취보다는 정치 풍자의 의도가 짙은 작품인데, 당시에는 이 두 영역이 미처 분화되지 못한 이유도 있겠고, 당대인들에게 그토록 큰 화젯거리를 던져 준 작품을 쉬이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내지 못한 미련도 한몫하지 않았을지 짐작합니다. 처가로는 발루아, 모계로는 나바르(나바라)의 적통을 이어받은 앙리 4세는 사실 전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축복 받은 군주였습니다. 일개 초라한 방계 왕족에 지나지 않았던 부르봉의 명자(존재감도 없었던)는 오로지 그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대명사처럼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죠.

"혁명의 피를 그만 멈추어라!" 납치되었던 사비니(사비눔)의 여인들이 이제 돌아와 "이미 우리는 로마 아기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며 양측의 싸움을 말리는 장면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극단적 대결을 부추기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남들이 이만큼 나아갔을 때 그에 미치지 못하고 뒤처진 이들입니다. 남들이 상황에 대해 이만큼 각성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때 여전히 과거의 상처로 (저 혼자) 몸부림치는, 아주 일방적이고 미숙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낙오자죠. 이런 사람들이 자기 인생 망가진 게 억울해서 무리를 선동하고 평지풍파를 일으킵니다. 싸움을 말리는 게 여인으로 채 자라지 못하고 미숙한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아닌, 아이를 낳고 세상의 다른 국면을 겪어 본 이들이라는 게 유독 눈에 띕니다. 물론 애를 낳고 키워도 여전히 철이 못 든 인간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시몽 부에의 작품 둘을 들며 특히 작품에서 풍기는 우의(의 힘을 가르치는 저자의 태도인데요. 사실 도상학의 출발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림은 물감과 붓과 종이를 통해 쓴 인문의 표현이자, 궁극의 이데아를 재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펜과 개념으로만 이뤄진 텍스트로서의 인문과 분단되거나, 별개의 영역으로 갇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까다롭게 여겨지고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건 선입견에 불과한데, 이상하게도 제가 유년기에 읽었던 학생백과사전 미술편에도 "미술은 으레 어려우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전제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연예인 뒷담화처럼 때로는 천박하기도 하고, 종교의 오의를 가르치는 신비함과 신성함도 때로는 담습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만 딱히 무람히 여길 것만도 아닌, 우리의 고상함과 가벼움, 사악함과 활기참을 그대로 담은, 인간 정신의 모상이자 자녀를 대하는 눈으로 미술을 대하는 게 정답이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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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동을 말하다 - 이슬람.테러.석유를 넘어, 중동의 어제와 오늘
서정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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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이란- 이라크 사이의 전쟁, 팔레스타인 일대에서의 이스라엘과 PLO 사이의 갈등, 그리고 레바논 안 기독교- 무슬림 세력 사이의 충돌이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이 세 지역에서의 말썽은 과거에 비해서는 그나마 잦아든 편인데요(이스라엘 일부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합니다만). 대신 서방 세계와 무슬림 사이의 전면적 적대관계가 큰 규모로 비화하여, 어떻게 된 게 눈만 뜨면 접하는 게 세계적 범위에서의 테러 소식입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데에는 우선 부시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이슈 핸들링이 큰 비난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근원적 이유를 찾자면 서방 세계 거주자들의 전반적 시각, 그리고 이들에 표준을 맞추며 살아가는 우리들 관점까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네요. 한마디로, "남을 욕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인데요, 이 책의 저자께서 독자들에게 촉구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이슬람 혹은 중동을 호의적으로 보건 비판하건 개인의 자유이나, 팩트를 정확히 안 후에 그런 시도를 해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죠.

우선 우리는 이슬람, 무슬림 세계와 중동을 자주 혼용합니다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동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개념이고, 이슬람이니 무슬림이니 하는 건 종교적 프레임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께서는 이스라엘 인들과도 직분상 자주 접촉하시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이슬람"의 카테고리로 화제를 꺼내면 불쾌해하는 게 당연하죠. 저자분이 우려를 드러내는 건, 특히 한국인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건 사실 한국이란 범위를 벗어나면 바로 오류로 드러나는 게 많습니다. 설사 한국이나 서방 세계 전체가 상식으로 판단하는 사항도, 중동인들에게 이를 들이대면 불쾌해할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만의  가치관에 불과하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이는 주체 의식의 결여나 사대주의 같은 게 아니라, 우리가 사업상 상대해야 하는 파트너에 대한 기본적 예의입니다. 거래를 트겠다면서 그들의 비위를 정면으로 거스른다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죠. 과거 중동 지도자들과 상대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규모의 프로젝트 추진에 성공한 최 모 회장, 김 모 회장 같은 분들은 이 점에서 각별히 처신에 능했기에 성공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독재자가 흔히 수십 년 간 국가를 지배하곤 하는 저들의 풍토에 곧잘 거부감을 드러내곤 합니다. 헌데 저자는 특히 중동 정치 문화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중동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을 제외한 셈 족은, 강력한 무력 지도자가 하나 출현하면 그 자가 죽을 때까지, 혹은 무력적 우위를 상실할 때까지 그 지배를 용인하는 게 오랜 전통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일단 힘이 곧 정의라는 사고 방식, 그리고 그런 무력에 의해 무질서가 극복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차라리 이익이라는 어떤 합의가 오랜 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ㅎㅎ

독일의 칼 슈미트도 일단 권력이다 힘이다 하는 결단으로, 모두를 위해 헌법 질서가 일단 잡히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고, 홉스 역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건 종식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 바는 있습니다. 아무튼 저들 서아시아인들은 아직도 저런 사고 방식으로 사회와 체제, 질서를 바라본다고 하니 그 점을 유의하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죠. 이게 사실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큰 갈등이 생기는 대목인데, 1) 일단 서구 사람들의 일방적 가치관을 주입,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2) 막상 현지인들을 이해하려 들고 보니 저런 후진적(이렇게 대뜸 규정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사고 방식에 머무르고 그걸 고집하기까지 하는 양상을 어떻게 이해해 줘야 할지, 두 시각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이에 대한 담론 내 토의가 한창 진행 중인, 미해결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슬람 프레임과 서아시아 프레임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렇게 강력한 남성이 전면에 나서 자신의 의지로 무질서를 평정하고 힘에 의한 통치를 펼치는 건, 종교로서 이슬람 교의와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슬람이 종교로 성립한 건 1400년이 갓 넘었을 뿐이고, 서아시아의 가부장적 남성 우월주의는 그 몇 배도 넘는 역사를 갖습니다(구약성경, 혹은 유대교의 토라에 얼마나 지독한 남성 우월주의가 배어 있는지를 떠올리면 요게 실감나죠). 이슬람교는 오히려 이런 막무가내 추세에 적절히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종교로서 이슬람을 비난하거나, 광신적 행태가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비난하는 건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저자는 중동권에서 표기되는 문자인 아랍 글자(물론 유대인은 다른 문자를 씁니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형태인 데 대해, 한국인은 예전부터 이런 표기 관습을 지녔으며(다만 종서[縱書]라는 데서 큰 차이가 있긴 합니다), 지금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는 이를 준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시아 공통의 행태일 뿐인데 왜 이상하게 여기냐는 거죠. 그러나 저는 1) 일본이나 중국도 가로쓰기가 최근 확산되는 추세이며, 2) 합리적인 관행으로 인류가 중지를 모아 살아남은 관행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 같은 비중(가중치)를 주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또, 서양 역시 왼쪽보다 오른쪽에 문화적 타당성을 주어 온 건 우리와 다르지 않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자는 "아랍의 민주화 추세는 결코 우리보다 뒤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근거는 이미 19세기부터 민주주의나 평등 사상이 널리 대중과 지식인 사이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듭니다. 다만 경제 운용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부족장 세력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매우 크며, 이 국민 경제 대부분이 지하자원인 석유의 채굴에 의존한다는 특수한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으나, 앞에서 논급된 "서아시아 고유의 가부장제 문화" 고려와 다소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네요.

중동, 아랍인들은 특히 상술에 능한 민족성으로 유명합니다. 벌써 고려 시대에 무역항 벽란도를 통해 그 먼 거리를 왕래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국제 무역 허브인 당, 송의 항구를 거쳤긴 했지만). 1) 저자께서는 두 가지를 특히 주의하라고 지적합니다. 사재기는 불법이 아니다, 2) 택시 운행 바가지 등 상인이 벌이는 수작은 결코 비난 대상이 아니다. 본래 이들은 이처럼 터무니없이 판을 벌이거나 과도한 조건을 제시하고, 상대의 깜냥과 배짱에 따라 흥미로운 말장난을 주고 받으면서 흥정을 벌이는 게 관습이라는 거죠. 이걸 불쾌하게 여기거나 도덕적으로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은 아주 도량이 협소하고 꽉 막힌 인간으로 취급되어 다시는 거래를 틀 수 없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사업을 벌이려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항이죠.

아랍이 왜 이렇게 경제적으로 후진적 구조에 머무르는가. 이는 문화가 아닌 경제적 수치로 드러나는 현실이므로 편견이라든가 왜곡으로 볼 게 아닙니다. 제조업이 대단히 미비하게 발달했기 때문에, 왜 지난 몇 년 전 이집트, 리비아 독재체제가 무너질 때 대뜸 첫째 원인으로 거론된 게 청년 실업이듯, 만성적으로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게 이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이유는 간단한 게, 제조업을 영위하려면 신경 써야 할 건 너무 많고 시설의 덩치는 크고 그 들인 노력을 고려하면 이문도 박한 게 사실입니다. 상업이란, 그에 비하면 적게 투자하고 많이 남기는 게 분명하죠. 대신 제조업은 개인 차원의 부자만 양산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거느리는 노동력 규모가 엄청나고, 한번 흥하면 시시한 상인 따위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를 크게 쌓습니다. 만약에, 그저 주위의 시시한 사람들, 빈곤층만을 상대로 부자 행세를 하고 싶다면(즉, 더 넓은 세상의 표준이 뭔지 모른 채 자신만의 표준에 갇히고 싶다면) 제조업이란 모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게 서아시아 경제 체제의 근본 모순입니다. 중동 이야기를 할 것도 없고, 과거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로부터 얻어야 할 시사점은, 제조업을 간절히 갖고 싶으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그들에게 우리의 합작이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한번 인간관계가 뚫리면 대단히 화통하게 구는 그들의 생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수쿠크 등 아랍에서 자리잡은 전통적인 금융 방식에 우리가 전향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전쟁에서 위태하지 않다는데,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이들을 이해하고 가까이에서 사귀려면 무엇보다 먼저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협력도 가능하고, 혹 비판을 하려 들어도 올바른 비판이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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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문이원 엮음, 신연우 감수, 제갈량 / 동아일보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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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사실 신출귀몰한 지혜주머니(智囊)였다기보다, 원칙에 충실하고 공맹의 가르침, 즉 충효의 도그마에 지행(知行)을 합일시킨 인격자이자, 유능하고 청렴한 관료형 인간에 가까웠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더 정확한 평가입니다. 실제로 <삼국지>의 저자 진 수 라든가, 주를 쓴 배송지 등도 그를 전술적 천재로 보지 않고, "임기응변에 능하기까지 했으면 대적할 자가 없었을 것" 정도로 아쉬움을 표현할 정도죠. 이런 제갈량을 전통적으로 중국 민중들이 사랑하여, 후세에 창작된 연의류에서 그를 책략과 술수에까지 능할 뿐 아니라 호풍환우하는 초인으로까지 과하게 미화한 감이 있습니다. 나관중 등은 이런 민중의 기호에 더 부응했을 뿐이겠고요.

이 짤막한 분량의 <장원>은 그래서 어떤 처세술이나 군략의 비의를 가르친다기보다, 유교의 강직한 충의(忠義)의 도그마를 핵심만 찔러, 그러나 간곡한 문장으로(제갈량은 당대의 문장가이기도 했죠) 표현한 저서입니다. 충의지사는 말을 길게 하지 않고, 그 격정과 에너지를 아껴 실천에다 투입합니다. 제갈량이 그 담백한 충성심과 의리를 얼마나 인격 속에 잘 구현한 인물이었는지는 이 책의 표현과 스타일, 체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충의지사는 본디 말이 길지 않습니다.

원문부터가 이처럼 소략하니, 고대의 사회와 정치 체제, 그리고 그 속을 살며 일구던 이들의 사고 방식에 여전히 낯설 수밖에 없는 우리 독자들은 더욱 원전에 친근히 다가서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공명 량(亮)의 원저에다 덧붙여, "문이원"의 해제와 해설을 자세히 서술한 구조입니다. "문이원"은 사람 이름이 아니며, 동양 고전 인문을 연구하는 모임의 명칭인데요. 얼핏 보면 자계서마냥 처신의 바름과 정수를 가르치는 모양새이기도 합니다만, 그게 천박한 처세의 편의를 알림이 아니라 성현들의 강직하고 타협 없는 마음 자세, 수양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우는 내용이니 오히려 원문과 번역만 제시된 편제보다 이처럼 친절한(그리고 긴) "주석"이 함께 수록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將戒>편에 보면, 역자들께서는 이를 "장수의 표본"이라고 옮깁니다. 실용적인 번역 태도로 보이는데, 뭐 구태여 문의에 충실하자면 "장수가 경계할 바" 정도가 되겠지요. 여기서도 공명은 <상서>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며 당대의 지침으로 받드는 모습인데, <상서>는 우리가 잘 아는 사서 삼경 중 "서경"으로도 부르는 그 고전입니다. 춘추 시대의 손자도 그렇고, 본디 중국 사상 체계의 여러 가닥 중 특히 병법을 논하는 영역에서는 공맹의 오랜 훈시와 무관하게 다른 제자 백가의 뿌리에서 비롯한 체계가 많습니다. 하지만 공명은 이처럼, 무장의 몸가짐을 논할 때에도 유가 정통의 교리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대전제로 삼아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장강(將彊)>편에 보면 재상의 위치에 오르고도 공명은 궁신접수(躬身接水)의 태도를 내내 유지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장원> 본문에 나오는 게 아니라 역자들께서 다른 전거 중 공명의 행적을 일러 뽑은 표현입니다. 이것만 봐도 이 책 편역 방침의 유익함을 엿볼 수 있는데요. 이 편에 보면 재물을 가지고도 그 인간됨됨이가 용렬하여 제대로 쓰지 않다 멸망하는 장수의 패착을 꾸짖습니다. 실제로 이 비슷한 예가, 명나라 말기 황제와 환관들이 서로 숨겨 둔 예산을 아끼고 상대가 먼저 금전을 풀어 모병하기를 기다리다 문 앞에 닥쳐 온 오삼계의 군대, 그리고 여진족의 팔기군을 막지 못 해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합니다. 어리석고 멍청한 자에게 재보는 최소한의 편의도 제공하지 못 한 채 오히려 불운과 재앙을 부르는 불씨가 되는 겁니다.

<便利>편은 역자들이 "전쟁에 유리한 조건"으로 옮기고 있네요. 여기서 역자들은 제갈량의 논변을 뒷받침할 방증으로 오대 십국 시대의 이존욱 등 여러 사례가 보여준 병법의 기발함과 반대 사례를 듭니다. 제갈량이 실제로 임기응변에 능하지는 않았으나, 대신 앞선 전사(戰史)에서 여러 좋은 사례를 들어, 유격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등 모범적인 임기응변의 교리화를 꾀합니다. 과연 제갈량다운, 규칙에 어긋나지 않고 재주꾼의 폭주를 경계하는 조신한 가르침이자 시스템의 정비라고 하겠습니다. 삼국 시대(제갈량의 활동 시기 기준)와 오대 십국기는 거의 700년이라는 시간 차가 나는데도 이처럼이나 적실하게 교훈이 적용되고, 또 서로 다른 사서에서 유사한 예를 끌어온 편역자들의 소양 높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제갈량(연의가 아닌 정사 속 인물)이 이처럼 구체적인 병법 실무를 논한 것도 진귀하게 보는 표본일 뿐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이 전법의 특수한 논변을 실제 처세에, 그것도 군자의 당당한 마음가짐으로 응용할지 깊이 고민하게 돕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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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여행 : 규슈 7대 조선 가마 편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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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큰 차이가 나는 점은, 생존을 위한 필수 양분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는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날것을 아무렇게나 절단, 저작하여 소화하는 게 동물이고, 반대로 인류라면 원 재료를 "조리"한 후 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식중독 따위를 예방할 수 있고, 섭취할 수 있는 재료의 범위를 넓힐 수 있으며, 나아가 풍미의 향유라는 인간만의 쾌락 영역을 확보합니다. 어떤 종류의 "그릇'이건 이를 필수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인간뿐이며, 처음에 그저 식사의 장치로 사용했던 것을 나중에 완롱, 감상의 고유 대상으로 삼은 건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고된 노동 단계에서 벗어나 일종의 문화 생활을 누리는 수준으로 접어들었는지의 여부는, 손쉽게 도자기류의 구비가 얼마나 그 문화권에서 보편화되었는지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동양에 대해 언제나 잉여 쾌락(주로 정신적)의 향유 면에서 큰 열등감을 느껴 왔던 서양이 근대 이후 필사적으로 도자기의 수입, 제조 기술 습득에 열을 올린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조용준 선생님께서 몇 년 전부터 펴내고 계신 <OOO 도자기 여행> 시리즈를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퀄리티가 진귀하고 텍스트(책) 취지에 부합하는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게 초보자에게는 엄청 큰 응원이 되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소리지만) 이 분야 입문자에게는 기초부터 착실히 가르쳐 주시면서도 한 권 떼고 나면 소양이 엄청 늘게 도와 주는, 도자기학의 친절한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이런 알찬 내용이 기행문의 형식으로(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부한 역사적 배경, 맥락의 설명과 함께 곁들여져 있으니(역사도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누구나 좋아하죠), 예쁜 도자기 공부도 공부지만 책을 읽는 사람의 영혼과 정신이 몇 뼘은 더 자란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유럽 도자기에 대해 그토록 간곡한 사연과 깊이 있는 문화, 역사적 내력이 숨어 있음을 전 저작들을 통해 배웠던 독자로서는, 이 일본 도자기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책이 오히려 좀 늦게 나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마저 있습니다. 마치 유홍준 선생의 "일본 문화 유산 답사편"이 가장 늦게 나온 것과도 비슷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과는 또 경우가 다르니까요(개인적으로 저는 그 시리즈와 이 조용준 선생님의 기획을 동렬에 놓거나, 더 좋아합니다). 아무튼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설렘으로 책을 읽었고, 역시 대만족이었네요.

특히 제가 첫부분부터 눈을 크게 뜨고 읽은 대목은 소위 "엔슈류"의 기원과 발전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일본 도자기의 시원은 그저 정유재란 후 조선 땅의 도공들을 대거 납치하여 규슈 일대에 가둬 둔 후 외부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 아이템을 제작하게 한 데서 잡아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가깝지만, 저자께서는 이 팩트가 남긴 과도한 자부심과 자아도취가 오히려 우리의 눈을 멀게 했다며 일침을 가합니다. 우선 도공 집단이 해외로 끌려가 국부의 주요 섹터가 유실되었음에도 당국은 그저 내국인들의 송환 이슈로 여겼을 뿐 산업적 중요도에 대한 자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장인들의 송환이 극히 지지부진했을 뿐 아니라, 규슈 현지에서 오히려 더 합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는 이들이 새 환경에서 더 의욕을 낸 것도 엄연한 사실이죠. 재능과 기예가 부가가치에 기여한 바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후진적인 조선의 시스템이 결국 국가적 고립과 경제적 피폐를 자초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저자의 관점은 결국 "왜란 이후 새로이 일어선 일본 도자기 산업과 그 예술적, 문화적 성취는 독보적이고도 광범위한 것"이라는 쪽입니다. 남 좋은 일만 시킨 게 마냥 자랑일 수가 없고, 좀 과장하자면 탱자가 회수 이남을 건너 비로소 귤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엔슈 류(流)"는 코보리 마사카즈가 도토미(遠江), 즉 엔슈(遠州)에 부임해 온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앞의 것은 훈독, 뒤의 것은 음독이라서 같은 한자인데도 발음이 저렇게 다르죠. 예전 일본 소설 번역판 같은 데서는 한결같이 "도토우미"라고 쓰던 기억도 있네요. 다카토리 가마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책에서 일부 내용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 둘이 합쳐져 이룬 "엔슈- 다카토리 (콜라보)"의 한쪽 부모가 어떤 내력이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카토리 가마에 대해 독자로서 제가 미흡하나마 작은 지식이 있던 것도, 이 책에서 아주 자세히 나오는 세이잔 여사의 사연이 그나마 한국인들에게 조금은 알려진 이유에서입니다. 세이잔 여사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 벌써 40년 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진 일로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적이 있고(부끄럽게도, 물론 몰랐던 이들이 더 많을 줄 압니다만), 이때 두 분 어린 제자를 받아 일본 현지에서 사사(師事)하게도 했습니다. 책에도 나옵니다만 이 두 분(당시에는 청년)은 결국 병역 문제를 해결 못 해 중도 귀국해야만 했는데요. 이 당시 비슷한 케이스로는 바둑 기사 조훈현씨,  야구 선수(당시 경동고를 갓 졸업한) 백인천 씨 등이 있습니다. 어떤 원칙이 없었는지 그나마 일본 현지 체류가 가능했던 이는 이들 중 딱 한 사람밖에 없죠. 저자는 이 과정을 설명하며 한국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에 대해 크게 개탄합니다. 참고로 다카토리 가마는 후쿠오카 소재이며, 우리가 비교적 잘 아는 심수관 선생 가문은 사쓰마에 터잡은 분들입니다. 八山을 하치야마, 혹은 야쓰야마가 아닌 "팔산(파루산-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읽히기를 고집하는 이 가문의 고집에서 뭉클한 민족정신을 접한 독자가 많을 것 같네요.



한국의 도자기 하면 청자나 백자 외에 떠오르는 게 없음이 우리 못난 자손들의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저자께서는 다른 권위자(신한균 회장님)의 지지를 얻어, 이 다카토리 도자기, 그리고 (다음에 새로 등장하는) 아가노 도자기의 근원이 회령 자기라고 의견을 개진하십니다(이후에 소위 4대 지방요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심). 이 회령 자기라고 할 때 회령은 물론 함경북도의 그 회령입니다. 우리는 함경도 일대 거주민들에 대해 그저 조선 내내 차별 받던 반(半) 여진족의 후예 정도로 치부하기 일쑤입니다만 이처럼 민족 문화의 중요한 한 자락을 구성하는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요삼채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북방 유목 민족이라고 마냥 고급 문화의 창조에 어두웠던 건 아니죠. 저자는 이 회령 자기의 원조를 허난(하남. 사기 근성과 손버릇 나쁜 걸로 유명한 그 하남 성입니다) 자기에서 유래했다고 보시는데요. 그게 어떻게 해서 두만강 일대를 거쳐 회령에 정착했는가. 이유는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쉬이 납득이 됩니다. 여진인이 송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허난 성의 카이펑(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대량)에 도읍한 후 고유의 도자기 제조법을 발달시켰고, 이후 몽골에 쫓겨 도로 제 고장으로 밀린 후 그 도공들을 데려 와 기반을 잡게 한 게 연원이었다는 주장입니다(p102 본문 설명에다 약간 첨가). 이러던 게 임란 훨씬 이전 함경도 일대 동해 연안을 침범하던 왜구가 현지인들을 납치해 간 게 이들 유파의 일본식 기원이 되었다는 건데, 읽으면 읽을수록 안타깝습니다. 물론 저자님의 관점에 따르면 이후 일본에서 훨씬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기법을 발전시킨 그 이후의 과정이, 반도 내에서의 산업, 기예 침체상과 대조할 때 더 부끄러운 실상이지만요. 이어령 선생도 지적합니다만 일본인들은 문화를 수입해 오는 데도 거침이 없고, 그 수입 문화를 열도식으로 변용, 변형하는 데에도 언제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당연히 (원) 회령자기는 남성답고 투박하며 거친 맛이지만, 이게 아가노 풍으로 정착하면서는 (저자님의 표현대로) 고분고분하게 스타일과 심미적 구조가 변했다는 거죠.

앞에서 잠시 음식 섭취 문화를 거론했지만, 도자기 문화는 그 자체로 완상용이지 반드시 안에 무엇이 담겨야 하는 게 아니며, 당연한 말이지만 내부에 함부로 뭘 담다가는 큰일나죠. 그러나 히젠 나고야로 건너와서 사가 현(역시 역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고장입니다)의 가라쓰야키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른바 "음식과의 합일이 이뤄진" 경지를 또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처럼 국지적 생활문화가 한번 집중적으로 발전하면 그 집착이랄까 종교적 숭배 경향이 아주 극단적으로 치닫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이 책에 나오는 여러 도자기(각 유파를 대표하는)라든가, 풍신수길 집정기에 극성을 이룬 다도 문화에서 한 벌 고가 세트가 성 한 채 가격에 육박했다는 설 등을 접하면 정말 한국인으로서는 아연실색해질 뿐입니다. 물론 특수 기예와 장인의 일가를 이룬 성취에 대해 그만큼의 존중이 있는 문화였기에 가능했던 부작용(?)이기도 했지만 말이죠.

조용준 선생님의 책에는 첫째 현지를 직접 답사한 저자의 성실한 노력과 실감나는 감상, 현지에서 직접 겪은 이만 토로할 수 있는 지방색과 여행자의 격정이 그대로 배어납니다. 둘째 어떤 대목은 역사적 지식이 좀 있어야 매끄러운 소화가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그 자체로 쉽고 재미있는 역사 공붓거리입니다. 셋째로 대상을 포착한 모든 사진과, 지도 등등 보조 미디어가 텍스트에 하나하나 달라붙는 적실성을 지녀 독자의 이해가 몇 배는 더 높아지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이 두꺼운 책이 고작 규슈의 7대 가마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께서 장담하셨듯 이제 혼슈로 이어지는 대장정이 예쁜 책(언제나 예쁘죠) 안에 또 어떤 모습으로 담길지 벌써부터 기대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네요. 별 스무 개도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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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글쓰기를 부탁해 - 꿈과 끼를 찾는 십대를 위한 글쓰기의 모든 것
한경화 지음, 유영근 그림 / 꿈결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최근에 도입된 "자유학기제"를 고려하여 짜여진 글쓰기 교재입니다. 저는 요즘 학생들이 맞게 될 가장 큰 정책상의 전환, 그리고 그 전환이 줄 혜택이 바로 "참여의 확대"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TV 어느 채널에서 한 여배우가 "참여"라는 단어에 풍성한 감정을 넣으며 발성하는 게 들리는데요. 이처럼이나 "참여"란 창의성 있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특별한 의의를 갖는 개념입니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끌려다니며 지식을 주입당하는 대상"이 아닌, 자기 힘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살아 있는 영혼으로 성장할 비전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 구조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어떤 동료 신입생이 "우리는 시청각 세대이다."를 선언하며, 지나친 부담을 주는 글읽기와 쓰기를 지양하려는 듯한 의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딴에는 그게 시대정신이었다고 여겼는지 모르며, 또 당시에는 "포스트모던"의 잘못된 수용, 오해가 그런 트렌드를 일각에서 부추긴 점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교육의 바른 방향은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글쓰기, 글읽기를 배제하고선 이뤄질 수 없다는 데에 다시 굳은 합의가 형성된 듯도 합니다. 수동적으로 시청각 컨텐츠를 소비하기만 하는 정신은, 참여와 창조가 시민의 덕목으로 요구되는 현대 민주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와 각성을 정리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된 행복을 구가, 향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영혼이 가장 불행하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테니 말입니다.



책은 정말 아무 부담 없이 누구나 열어 보고, 또 거기 쓰인 내용을 따라할 수 있는 포맷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미국 학부생이 공부하는 교재로 수업을 받으면서 느낀 점이, 우리와는 너무도 달리 인트로와 본문이 내내 쉬운 말로 쓰여 있고, 독자의 흥미를 자연스럽게 부르는 형식이었다는 건데요. 이런 책들의 핵심은 단원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연습문제"였습니다. 물론 지도하는 교수님이 꼼꼼하게 그 과제를 챙겨야 실효가 생기죠. 이 과정에서 창의력 전반과 전공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싹트고, 수업은 교수님께 끌려 다니는 게 아닌 학습자의 "참여와 각성"이 메인이 되는 방향을 갖춥니다. 요즘 한국에서 나오는 교재들은 이처럼 중학생들이 보는 책조차도 이런 방향성을 가진다는 게 부러운 점입니다. 그냥 쉬운 게 다가 아니고, 아이들이 읽어가다 보면 저자들의 깊은 의도를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게 좋습니다.

1부는 "창의톡톡 글쓰기"라고 제목이 붙었는데요. 물론 포인트는 "창의"에 놓여 있습니다만, 주로 우리 현대인들이 직접 노출되어 있는 글쓰기 환경에 올바로 적응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저는 이런 내용과 인스트럭션이 책의 맨처음에 놓인 게 의외였습니다. SNS에서 바른 덧글(댓글) 달기, 웹소설 감상하기와 나도 한 번 써 보기, 웹툰 창작하기(웹툰은 순수하게 쓰기의 영역이라기보다 그리기 활동이 결합되어 있음에도) 등이 주된 과제입니다. 기존의 경직된 작문 교육이 아닌, 아이들이 자신들의 실생활에서 가장 흔히, 그리고 직접 접할 환경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임할지를 "교육"하는 이런 포맷이 신선하기도 했고, 세상이 이처럼이나 바뀌어 가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2부부터는 어른, 기성 세대가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려가며 아이들의 글쓰기 과정을 먼저 고민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읽을 책이라고는 하나, 먼저 아이들을 지도할 위치에 있는 부모님, 학교 교사들이 읽어 보고 실천적 고민을 해 봐야 함은 당연하겠습니다. 시 쓰기, 시와 잘 어울리는 시화(詩畵) 완성하기, 기행문 쓰기 등이 제시됩니다. 특히 기행문을 내실 있게 쓰는 과제는, 변화한 교육 환경인 "자유학기제"와 결부되어 이전과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먼저 내가 직접 방문하여 겪어 보고 싶은 타지, 타향을 선택하고,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내가 예상, 기대했던 바와 직접 체험한 환경이 어디에서 달랐고 독특한 감흥을 불렀는지 자신과의 밀도 있는 대화를 요구합니다. 인터넷이나 SNS 등 다양한 채널과 매개체, 소통 방식을 통해 격지의 풍광과 지방색을 미리 접하고 일정한 기대를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에서, 기행문의 쓰기 역시 이전과는 좀 다른 형식과 성취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물론 글을 쓰는 아이 자신의 자아 성장과 만족이 최우선 과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겠구요.



3부는 "글쓰기"를 위한 단원이라기보다, 현실에의 참여와 비판, 시민 의식의 성숙을 위해 "글쓰기"를 어떤 과정, 단계로 활용할지를 고민하는 곳이더군요. 인용되는 교재로는 시사주간지 TIME도 나오고, 우리의 이웃과 먼 나라의 시민들이 주로 어떤 모순과 난관 때문에 어려움과 아픔, 상처를 겪는지 자세히 가르칩니다. 비판과 지적, 시민으로서의 참여를 위해 어떤 덕목과 기술적 수단이 필요한지,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해 볼 것을 가르칩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마냥 덮으려고만 드는 일본에 대한 비판도 있고, 게임과 스마트폰에 빠져 살면서도 그게 중독인지 모르는 청소년 자신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비판은 타자, 타인만을 향한 것이어서는 곤란하죠. 글쓰기가 바른 인성을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인성 발전 과정 그 자체라는 점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왠지 똑똑해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죠?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갖기 쉬운 고정관념인데, 아주 근거가 없지도 않습니다. 똑똑해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글을 더 잘 써 나가게 되는 과정에서 학생 본인의 지성이 발달하게 돕는 게 이 책의 장점입니다. 바른 글쓰기는 바른 방법으로 학생의 지능을 균형 잡게 키우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책의 이 단원은 영화 보고 나서 감상 쓰기, 특히 마틴 루서 킹 2세의 그 유명한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등 시대를 바꾼 명연설문을 읽고 자신도 자신만의 연설문을 써 보기 등 재미있는 과제를 많이 부여합니다. 자유학기제 아래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아이들은 참 행복할 것 같네요.

글을 쓰는 건 예컨대 입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면도 있지만, 글을 쓰는 활동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고,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지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분명한 과제를 부여하는, 실천적 - 미래 형성적 커리큘럼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챕터로 나뉜 다섯 가지 큰 제목이, 사실은 어른들에게도 미처 다 마치지 못한 인생의 과제를 "글쓰기"를 통해 정리해 주는 의의를 갖기도 하더군요. 청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초심을 되찾는다는 목적, 마치 <문장강화>에서 능숙하고 세련된 글쓰기를 가르치듯 기본기를 다듬어 보자는 목적도 있었는데, 읽다 보니 글쓰기는 그저 기술일 수 없는, 인간됨됨이 형성의 필수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먼저 꼭 한 번 읽어 보고, 자유학기제라는 축복된 환경에서 산뜻한 인생을 가득한 희망으로 설계할 아이들에게 권해 줄 만한 멋진 교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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