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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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람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나 의지나 생리 작용이나 번식 욕구 같은 게 있어서, 그 생멸 주기에 대고 "생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누가 이렇게 여긴다면 그거 (좋게 말해 줘서) 아주 소박한 생각일 뿐 아니라,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추상적 개념들이 "의인화"하여 치열한 인문 담론의 핵심을 이루는지 캄캄히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기까지 합니다. 작가나 저자들이 그런 표현을 쓰는 건 독자로서 익숙해져야 할 분위기일 뿐 아니라 자기(독자) 사유의 내실을 다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누구라도)아주 순진해진 채로 이렇게 되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정말 유령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뭔가 엮일 듯 말듯 관계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 맴도는 두 남녀(혹은 셋 이상)의 마음과 몸 속으로 쏙 들어오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이 한번 끼어든 사람과 관계가 어쩜 그리도 전과 쌩판 다르게 바뀔 수 있을까?"



이승우 선생님의 문학적 개성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요설의 미학"으로 지적한 적 있습니다. 대개 요설이란 독설이나 궤변과도 통해서, 사람이 말을 갖고 부리는 게 아니라 말이 사람의 혀를 조종하는, 악의, 기만, 조롱, 정복 등 불순한 목적과 통하기도 합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사르트르 등 천재적 지능과 사유의 근성 때문에 실제 인생에서 고통 받은 이들의 상흔과도 연결되는 게 이 요설입니다. 헌데 이승우 선생의 요설은 이런 예들과는 대척점을 이룬다 할 만큼 반대의 빛깔입니다. 본래 한국 산문에서 이런 요설을 즐겨 구사하는 분이 잘 없기도 하거니와, 이승우식 요설은 오만한 셰프가 투박한 서민의 혀를 길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이데아의 미각"을 가혹하게 상기시키려는 과시적 조련의 수단이 아니고, 그와는 정반대로 "이 구수한 된장국도 알고 보면 분자 단위로 쪼개 볼 여지가 있다니께?" 같은 훈훈한 휴머니즘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구실을 합니다. 마치, 왕릉 근처에서 선희한테 "믿음이 안 가게 생겼어도 내 말을 진즉 들었어야제!"를 말하는듯한 노인(이 작품 속의 단역 캐릭터 중 한 명)의 미소처럼 말입니다. 요설 끝에 따뜻한 공감과 격려가 기다리고 있다니 그 자체가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이승우 선생의 작품 속에서 만나는 건 또 언제나 그런 풍경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추상명사와 모호한 개념을 앞세워 말을 위한 말을 그저 지적 우월함의 과시 방편으로 삼아 공해처럼 지어낼 때, 이승우 작가님은 정말로 궁금해서 독자의 손을 잡고 "저 멀리 뭐가 있는지 끝까지 가서 확인해 보자는 듯" 된장국 같은 요설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따라가는 독자도 (잠시 헤맬망정) 그의 권유와 지도가 어렵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런 분, 이래 왔던 분이 이번엔 "사랑"을 주어로, 주제로 삼아 장편을 내놓으셨으니 이거 안 펼쳐 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요설도 많고 철학도 끼어들지만, 또 언제나처럼 "캬 맞어."하는 공감과 뿌듯한 각성으로 끝납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자면 결국 화해와 포용, 제 갈 길에로의 복귀가 이뤄지는 익숙하고 푸근한 결말입니다. 삼각관계라고 해도 칙칙하거나 저속한(다른 작품에서 이런 설정으로 시작하는 건 있습니다만) 느낌이 전혀 안 듭니다. 결국은 누구나 나름 뭔가를 얻고 무대에서 퇴장합니다(심지어 우리 독자들까지).

등장 인물은 몇 안 되고, 그의 전작들에서 주로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나이는 다들 먹은 축들이고, 어쩜 근간 중에는 좀 젊은 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장님" 영석 씨는 사십을 좀 넘긴 듯하고,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이 보이는 선희 씨는 그보다 십 년 가까이 연하이며, 항상 작가님의 작품에 한 자락 걸치는, 뭔가 페르소나 같은 주인공이 또 있어 줘야 하는데 이 장편에서는 그게 형배 씨입니다. 나이는 선희보다 두 살 위라고 하네요. 그리고 이들과는 좀 다른 세상에 사는 연애도사, 연애지상주의자 준호, 역시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또 특히나 다른 세상에 사는 민영 정도가 주요 캐릭터들이며, 그 외 완전 단역 같지만 의미심장한 기능을 맡은, 한복집 사장님인 형배의 모친, 그리고 형배의 생부 등이 전부겠습니다. (아니, 그 생부와 눈이 맞아 가정을 파탄 낸, 사진 속에서만 등장하는 묘령의 여인이 또 있네요)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인가? 사랑이 무슨 구덩이라도 되어서 거기 빠지기나 한단 소린가? 오히려, 사랑이 사람에 빠져들어온다고 해야 맞지 않은가? 저도 아주 예전 학교에서 fall in love (with)란 숙어를 배울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요. 묘하게도 이 표현은 뒤에 "함께"란 뜻의 전치사 with가 같이 딸려 옵니다. 이 책 중에 인용되는 유명한 카프카의 말처럼, "그녀와 함께도 살 수 없지만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 같은 모순당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 토픽 중 하나는 "자가당착, 역설, 모순"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어 감옥에서 나가고 싶지만 동시에 감옥 안에 안착하고 싶은 게 죄수의 심리라는 말도 있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자신이 시원찮게 사랑을 하면 그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란 의미에서)"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멀리하게 된다는 갈등, 나아가 사랑하는 이(상대방)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그간 불안불안 여겨온 고뇌에 대한 보상, 과연 내 의심이 근거가 있었군 같은 분노에 대한 정당화 때문에 맹렬히 질투, 격분으로 자신을 빠져 들게 하는 결의, 이 모두가 모순이고 아이러니인데,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런 양가적 감정의 함정 속에서 허덕입니다(일단은).

다만 저는 마지막 것, 즉 믿고 싶지 않은 배신을 보상심리 때문에 믿어버린다는 심리는, 특히 영석처럼 결핍의 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만 고유한 일종의 병리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간 혼자 속 썩은 내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됐네!"라며 분노를 과연 폭발시킬까요? 어설픈 한 마디 해명이라도 상대가 해 주면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을 믿어버리고 마는 게, 사랑에 빠진, 아니 사랑이 빠진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선택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이른바 언어의 태(態. voice. 수동태/능동태 하는 것), 상(相. aspect. 주체와 객체의 관계) 같은 그래머 이슈를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여러 번 다룹니다. 앞에서 "사랑에 빠지냐, 아니면 사람이 빠지냐?"도 그렇고, 꿈은 꾸는(능동) 게 아니라 꾸어진다는 말씀도 그렇고(예리하지 않습니까?), 이런 학설 대로라면 우리말 뿐 아니라 영어 문법도 그 기초부터 다시 재점검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한 마디 거들자면 결코 능동이 아닌 걸 능동처럼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적 기만에는 그를 만회할 만한 강렬한 무의식이 근본 동인이었다고 둘러대는 게 또 가능하죠!

태와 상의 이슈를 끌어대며 화자가 들려 주는 사색, 요설 중 가장 근사한 건, "사랑은 강요지만 주체도 목적도 없고(원 나!) 객체만 존재하는 그런 강요이다."였습니다. 사실 주체가 있긴 한데 운명, 숙명(사랑이 세팅한)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속에 쏙 들어온 "사랑"이고, 이 역시 화자가 처음에 깔아 둔(가르쳐 준) 전제 중 하나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구걸은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이 달성되면 끝나지만, 구걸 그 자체가 목적일 땐 중단될 수가 없다." 마치 갈릴레오의 사고 실험에서처럼, 방해물이나 다른 힘의 작용이 없다면 영구히 지속되는 관성의 마력을 보는 것 같군요.

끝없는 역설, 역설을 가능하게(비록 비가시적 세계 속이지만) 만드는 건, 역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 반물질(antimatter)로서 악(惡)도 간혹 (먼 거리에서나마) 동반하는데, 이 악 역시 인간의 (어설픈) 의지의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라, 주객이 전도되어 오히려 인간의 의지를 수단으로 부립니다. 화자는 <오셀로>의 이아고를 들며, 상관 오셀로가 자신의 아내를 건드리지 않았음을 그 교활한 이아고가 모를 리 없었음에도, 의심을 억지로 지어내면서까지 그 장대한(...) 모함의 서사시를 꾸려 가는 과정을 두고, 모든 것을 수단으로 부리는 "악의 능동성"을 지적합니다.

안티테제로서 악이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그만큼 테제로서의 사랑이 온갖 기적(앞서 말한 모든 역설 역시 부분적으로는 다 기적입니다)을 낳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니요. 이런 사랑은 그럼 보편적 원형이 따로 존재하는 건가, 아니면 역시 개개인에 따라 다른 개성의 사랑, 사랑, 사랑이 자기만의 색깔을 뽐내며 인력과 척력의 장난 속에 연분을 맺기도 하고 흐트리기도 하는 건가. 형배 씨는 보편을 믿고, 도사님인 준호 씨는 자신의 실전 경험에 비춰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며, 어설픈 스토이즘으로 자신의 비겁을 위장하지 말라며, "주면 그저 먹으면 될 뿐"이라며 자신의 도를 설파합니다. 모든 여자는 그녀만의 장점이 다 있는 거라고, 내가 사랑과 연애의 달인인 건 그런 저마다의 매력을 기막히게 알아 봐 주는 그 각별한 미각 덕분이라고, 아주 흡인력 있게 형배(와 독자)를 향해 썰을 풀어댑니다. 이런 건 제가 아는 어느 바람둥이의 지론과도 통해서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좋아?" "모든 여자. 이 여자는 이래서 이쁘고 저 여자는 저래서 이뻐." 연애와 사랑에 서툰 자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뭐 하나 고정된 이상형을 머리와 가슴에 박아 둔다는 겁니다. "삶(생명, 곧 사랑)"이 가장 싫어하는 게, 죽은 듯 고정된 융통성 없음입니다.

준호 씨의 지론에 따르더라도, 사랑이 보편자인지 개별태인지에 대한 해답은 사실 안 나오는 셈입니다. 보편자가 개체에 침투하면, 그 개체의 개성에 맞게 다른 방식(매력)으로 작용하는지 또 알게 뭐겠습니까? 여튼 이런 준호 씨도, 민영을 만나고부턴 사람이 달라지고 확고한 신념, 라이프스타일부터가 변합니다. 진짜 사랑에 한 방 맞은 후로는, 인생의 무덤이라 여겨 온 "결혼"을 더 이상 마다하지 않습니다. 민영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녀와 키(라고 쓰지만 읽기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 이제 그는 지론과 자신까지를 배반하며 결혼을 서두릅니다. 쿠피도 신, 벗고 다니며 화살을 날려 대는 꼬마가 이처럼이나 짖궂습니다.



이 소설에서 정말 긴 생애를 마치는 모습이 드러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형배 씨의 생부입니다. 누구 눈에도 무책임하게 보이며 "언젠가는 너도 나를 이해하게 될.."같은 더 무책임하고 철없는 한 마디 때문에 더 큰 짜증을 유발하는, 인생 한번 거하게 헛산 표본으로 보이는 이분의 장례식에, 여태 다른 공간 먼 무대에서 각자의 사랑으로 앓아 대던 모든 이들이 마침내 모입니다. 끓어오르던 감정도 한때고 이제는 무덤덤하게, 우정 비슷한("증명이 필요 없다"는!) 느낌으로 그 눈을 바로 볼 수 있는, "형배면 다야? 선배면 다냐고!(전 이 대사가 참 우스웠던 게, "형배"란 존재가 선희에게 얼마나 큰 존경과 애정으로 자리했[그녀에게 '다'일 수도 있었다는 뜻]는지, 말장난 말고도 여실히 보여 주는 한 마디였기 때문이죠)"의 두 커플은 다시 담담히, 그러나 건전하게 조우합니다. 가장 격렬한 반대 증거(아무렇게나 하고 만남)를 보고도 배신의 확증이라며 익숙한 버림 받음의 슬픈 세레모니(이거 다 자기 말대로 구걸이고 고백입니다. 우리 독자들은 다 알아챘죠)를 (추접하게) 펼치던 징징이 영석도 다정하게 넥타이를 매어 주는 그녀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망자의 일생 동안 그 몸에 들려 사련(邪戀)을 부추기던 이 사랑이란 녀석이, 이제 다시 엉뚱하게도 준호로 숙주를 옮겨, 반짝이는 눈빛을 선희로 향하게 하는군요.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낯섦과 설렘이야말로 사랑의 뚜렷한 징후라고 이미 화자는 복선을 저 앞에서 깔았습니다(아는 사람도 다시 낯설어져야 사랑이 싹튼다며). 생애를 마친 듯 다시 한 생애를 바로 시작하는, 이 녀석의 난잡한 수작이 또 시작되었군요. 위력이 상당히 강하니 모두 조심들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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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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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은 누구나 중력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신이(神異)한 능력을 가진 이를 묘사할 때 상투적으로 "물 위를 걸었다"는 표현이 쓰이듯, 무거운 지구의 끌어당김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모든 속박과 굴레와 아픔과 고뇌로부터 초탈한 존재나 마찬가지겠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같은 말이, 높은 이상을 품고 살아도 현실의 제약을 무시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하죠. 현실의 한계를 유념해야 꿈도 이룰 수 있다는 게 물론 상식인데(마치 중력장의 위력이 우리 모두의 상식에 속하듯), 혹시 정반대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공중부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허공을 떠 다니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혹은,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이미 꿈은 이뤄졌다든가 말이죠.

이제는 삼십대 중반을 넘긴, 북미 일대와 널리 스페인어권에서 단연 주목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인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완성했던 장편이 반갑게도 한국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불교 철학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걸 제 생존의 편의를 위해 색(色)을 가르고 경계를 지르는 망동을 사람은 일삼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본문 중 쉴새없이 등장하는 문학가, 예술가들, 그들의 작품, 또 작품들 속에 쓰인 상징과 기호(대부분 서유럽과 미국, 간혹 남미 스페인어권 소속)의 방대한 인용을 잠시 잊는다면, 이런 동양적 세계관을 진하게 환기시켜 주는 주제를 담습니다. 주제만 그런 게 아니라 소설의 형식마저 그에 걸맞게도, "빠르게 교차하는 미니쿠엔토들이 태피스트리처럼 직조되며(역자 후기에서의 표현입니다)", 서로 멀찍이 떨어진 시공간을 넘나듭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핵심 줄기는, 사이가 좋았다가 멀어질 뻔하다, 다시 가까워지는 듯하며 서로를 잃어버리고, 기묘한 계기를 밟아 다시 만나는(?) 어느 가족을 다룹니다. 이야기만으로만 좇으면 매우 단순하기 짝이 없죠.



"다시 만난다"라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자께서는 후기의 해설 속에서 이 작품의 구조를 크게 N, N1, N2의 세 갈래(의 층위적) 서사로 나눌 수 있다고 하십니다(이하, N 등은 소설 본문 속이 아닌 역자님의 표기, 규정입니다). N에서는 주인공이 여성인데,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인 남편과의 사이에 "중간아이"와 "아기" 두 자녀를 둔 엄마, 아직 유아인 둘째에게 (때로 아주 힘들어하며) 수유를 해야 하는 꼼짝없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다만 그녀는 허름한 출판사에서 엉터리 번역(본인 스스로 이 일을 한다고는 안 했지만, 사연의 진행을 보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다고나 해야) 등 출판 쪽 일도 하기 때문에 맞벌이 비슷한 사정이었으나, ..... (이후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길요)

N1은 이 여성이 N 속에서 써내려가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중간아이(자기가 붙인 이름인데 이유는 스스로 그럴싸하게 대더군요)와 남편이 함께 읽기도 하는데(참여는 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도 역시 같습니다. 즉 남편, 중간아이 등 가족이라든가, N 속에 나오는 주인공 여성의 친구(근데 이게 실존인지 환영인지가 모호하죠. 어차피 구분이 의미가 없다지만)들도 고스란히 등장합니다. 나중에 가면 어느 게 N이고 N1인지 더 뒤섞이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독자들은 머리를 써 가며 "가만, 이게 소설(속 소설)이 아니라 액자인가?"라며 헷갈려하지 않습니다(SF라면 그래야 하는데요). 오히려, "아 N과 N1을 나눌 필요가 없구나. 그냥 읽어내려가야 더 편한 하나의 이야기였구나."하고 깨닫게 되죠. 이 규칙을 알아야 이해가 빠르다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이를 자연스럽게 독자한테 납득시켜 준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소설(=소설 속 소설)이 현실(소설)이고, 현실이 소설이란 뜻입니다.

꿈은 이루어지나요?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돕...는 건 아니고ㅋ, 자기 실현적 예언이란 말이 있죠. 물론 물리계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배하기에, 부정적인 기대는 현실화하기 쉬워도 그 반대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 비슷한 뜻으로 작품 중에 나오는 말 중에, "인생에서 배운 쓰디쓴 교훈은 다만 너무 늦게 깨닫게 되기에, 교훈으로서도 별 쓸모 없는 게 대분이다"라는 게 있기도 합니다. 여인은 처음에 꼭 갈 필요도 없는 필라델피아 출장을 우기는 남편("시나리오 작가가 왜 촬영 현장에 따라가야 하지?")을 의심합니다. 미래의, 혹은 가상의 배신에 복수하기 위해, 여인은 선제적으로 자신의 소설(N1) 속에서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심지어 여자(사람)친구와도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가집니다. 여전히 이 완성 중의 소설을 읽는 남편은 이제 불안해하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계속 따져(그러나 소심하게) 묻습니다.

"그걸 왜 궁금해해?" 이 말은 아내가 저 소심한 남편에게 되묻는 질문이 아니라, N2 속의 힐베르토 오웬이 눈먼 늙은 괴짜에게 듣는 말입니다. 오웬은 맨해튼 체류 시절 호머 콜리어(앞의 장님)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먼저 듣습니다. "이봐, 아직도 자네의 미래가 기억 안 나나?" 미래가 어떻게 "기억"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오웬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지만 노인의 저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를 딱히 여기며 노인은 다시 한 마디를 던집니다. "자네가 쓴 글을 보란 말이야."

아내는 이제 남편과 아주 사이가 멀어지고, 급기야 남편은 짐을 싸서 그녀를 떠나기까지 합니다(여기까지는 N에서의 메타적 언급이 있으므로, N1만에서의 사정임이 확실하죠). 여인은 초대를 받고 방문한 장소에서, 일련의 미술품에 한참 시선을 빼앗깁니다. 웬 뚱뚱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작품의 창작자가 자신이라며 집에 초대를 하는군요. 나흘 정도를 머무는데 처음에는 이 뚱보가 발기가 잘 안 되어 애를 씁니다. 뚱보의 몸집에 걸맞은 거대한 욕조 안에서 혼자 놀기 심심해진 그녀는 친구 다코타를 불러 남자를 그녀에게 인계합니다.. 자, 이 모두는 아직도 그녀가 쓴 소설(N1) 속에 머무는 내용일까요, 아니면 소설 속으로 빠져 나와 자기 실현을 시작한, 상위 서사 N의 일부일까요? 여인은 소설을 통해, 그간 불길히 여기다 못해 기정사실화해 버린 미래의 한 줄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린 걸까요?

"엄마, 아빠가 바퀴벌레처럼 작아져 보이질 않아, 찾아야 할까봐." 그런데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바퀴벌레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 중 그리고리처럼 제법 클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작품 후반부에서 공포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꼬리 없는(잘린?) 고양이만한 덩치일 수도 있습니다. 느닷 작아져 아이 눈에 안 띄는 남편은, 정말 그녀가 예언처럼 작성한 소설 속의 서사처럼, 서로의 감정상 거리를 반영하듯 멀어졌는지(줄어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인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합니다. 어두운 통로를 달리는 열차의 차창을 응시하면 일부는 바깥이 보이고, 일부는 유령처럼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이 보이는 게 당연하죠. 헌데 여인은 자신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실존 인물 오웬, 즉 힐베르토 오웬을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설 속에는 N2가 다른 섹션으로 깔리고(사실 이는 독자의 오해인데, 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오웬은 청년기, 부유한 가문의 여인과 잠시 가정을 이루다 이혼하고 "전 아내"를 "상처 입고 재능을 비로소 꽃피운 유명 인사"로 만들어 준 후 굴욕감에 떠는 중년기, 그리고 (호머 콜리어를 만난 후 그처럼 눈이 멀어 버린) 노년기, 이렇게 세 시기의 자아가 교차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지분 1/3을 가진 주인공이 이 힐베르토 오웬인 셈입니다.

힐베르토 오웬은 물론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그 멕시코의 시인이 맞습니다(철자는 Gilberto인데, 스페인어라서 e, i 앞의 g는 ㅎ처럼 읽습니다. 장군을 "헤네랄"이라고 하는 것처럼). 멕시코인인데 성이 오웬인 이유는 부모가 아일랜드인 이민자 출신이라서입니다. 말하자면 콜롬비아 보고타(아내의 출신지)에서나, 맨해튼에서나, 자신의 무덤을 미리 본 필라델피아 어디서나 이방인으로 머물렀던 셈이죠. 이런 그가 "사진에 안 찍히고 맹인 눈에는 오히려 보이는" 유령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하겠는데, 생전에나 사후에나 유령인 그가, 현대 미국에서 (역시 이방인으로 사는) 주인공 여인과 전철에서 기묘하게 조우한 것 역시 당연합니다. 참고로 하필 전철(의 창)이 첫 만남을 위한 장소로 등장한 건, 이 작품 중에도 인용되듯 오웬이 뉴욕의 전철에서 느낀 강렬한 위화감(아니, 친밀감)과 관계 있습니다. (물론 에즈라 파운드의 그 작품 역시 교묘한 맥락으로 환기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젊은 시절 동거했다거나, 필라델피아에서 노년을 보냈다거나 멕시코 부영사로 근무했더거나  하는 부분은 실제 오웬의 삶과 일치합니다(물론 세부적인 장면은 다 작가의 상상이겠지만). 헌데, 젊어서 날씬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다 늙어서 눈도 멀고 볼품없이 살도 찐 이 노인은, 의욕의 한계를 느끼며 애써 이룬 가정도 다 해체되어가던 그 순간 여인의 집 한 구석에서 "중간아이"에 의해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미 여인이 오웬과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눈치챘는데요. 둘은 성별도, 속한 시대도 사는 공간(일부가 겹치긴 하나)도, 심지어 생사 여부도 다르지만,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 아니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오웬은 알고 보니 바로 자기 남편(이거 스포일러일까요...)임이 "발견"되니, 세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진정한 경계 해체, 그리고 피안과 차안, 나와 너, 이승과 저승, 죽음과 삶이 화해하는 순간입니다.

"죽음과 삶은 관점을 달리했을 뿐 결국 같다." 저는 그런데 이런 논리가, 작품 중에도 나오듯 sorites의 역설로도 해결 가능하다고 봅니다. 머리가 십만 가닥 있는 사람은 대머리인가? 아니다. 그럼 그 사람보다 한 가닥 적은 사람은? 역시 아니다. 이런 식으로 수를 하나하나 줄여나가면, 결국 머리가 하나도 없는 자 역시 대머리가 아니라는 결론이죠. 우리는 누구나 매 순간 조금씩 늙어갑니다. 늙어간다는 건 생명의 원기가 몸 속에서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처음 만난 유부녀를 끌어안으려다 마구 구타당하던 시점의 오웬은 이미 죽은 목숨인가요? 창 밖을 내다보며 수음하던 시절의 날씬한 청년(오웬 자신)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닙니다.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닌(눈도 안 보이고 가족들로부터도 배제된) 오웬이 아직 죽은 게 아니라면, 유령으로서 여인과 소통하는 오웬도 죽은 게 아니라는 게 작품의 논리입니다.

trustafarian은 스페인어는 아니고 영어 어휘입니다. 부유하면서도 지레 겸손한 척 격식없는 척 가난한 예술가연하는 젊은이를 뜻하는데, 별로 젊지는 않지만 N1에 잠시 등장한 저 뚱보(여자를 자기 집 욕조로 초대했던)도 그런 타입이고, N2의 젊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도 여튼 젊은 시절에는 그런 삶을 보낸 게 맞습니다(이 사람은 진짜 재능있는 예술가였지만). N1과 N2에 이처럼 겹치는 요소가 많으니, 이 두 하위계열 서사는 이미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N과 N1은 처음부터 경계가 모호했으니, 이 세 서사는 결말에서 역시 하나로 통합됩니다. 호머 콜리어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 역시 구분의 필요가 없는 하나였으니 더 거리낄 게 없겠고요.

역자 후기가 끝난 후에는 작가 루이셀리가 2014년 한 잡지에 작품 해제 삼아 직접 쓴 글이 하나 더 실려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막 취학할 무렵의 자신이 (아직 냉전의 긴장이 가시지 않은) 서울에 체류하며 외국인 학교(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의 기억을 털어 놓습니다. 한국어판만을 위한 기고는 아니지만 여튼 이 때문에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죠. 여기서 그녀는 외교관 자녀로서 겪은 여러 추억을 털어 놓는데, 힐베르토 오웬도 말년에 원치 않게 부영사직을 지냈으므로 두 인물(오웬과 작가 루이셀리) 사이에 교차점이 또 하나 마련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권말의 이 짧은 글이 "N 0(제로)" 정도로 다가오던데, 어차피 우리가 중력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서사의 층위, 국적, 성별 따위는 다 무시할 권리가 있기도 하니 이게 독단적, 자의적 규정이라고는 생각 안 되기도 하고, 이 멋진 작품을 끝까지 즐긴 독자의 특권이기도 하겠습니다.

삶의 해체를 글쓰기로 이겨낸다는 게 대강의 요약이겠지만, 사실 해체와 복원(혹은 재생)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할 것 같네요. 작가(주인공)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그 유명한 서두를 언급하는데, 거기서도 crack-up과 break-down은 의미가 상반되는 두 부사(파티클)로 같은 외연-내포를 이룹니다. 이처럼 상충되어 보이는 게 알고보니 하나라는 깨달음은 이 소설에서 여러 모로 중대한 암시를 던집니다.



소설 속에서는 "엉터리 번역" 이야기가 나오지만(이는 미국 안에서 영원한 타자로 살아야 하는 라티노들의 비관적 인식과 각성을 상징합니다. 미국인들은 영원히, "가까운 이웃"을 오해하며 살고 그 오해의 틀과 경계에서 결코 안 빠져 나오려 드는 거죠), 이 한국어판은 너무도 풍성한 후주(라기보다 아예 작품 해설)가 달려 있어 독자의 이해를 친절히 돕습니다. 오웬의 작품에 대한 주코프스키(객관주의 유파 시인. 오웬과 거의 동년배였습니다)의 번역이 새로 발견되었다며 가짜를 지어낸 그녀의 대담한 행동을 보면, 마치 고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가 생각나기도 하며, 또 그만큼이나 방대한 문학적 상징이 작품 곳곳에 녹아든 모습입니다(이래서 역주가 중요해지고요). <푸코의 진자>에서 장난스러운 주인공들은 위조 문서 때문에 목숨을 잃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쩜 근원의 각성과 화해, 평화, 해탈을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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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전 - 여성의 삶을 말하다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유향 지음, 김지선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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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도 그렇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대체로는 왕실의 친족, 종실 출신의 인사들이 백성 풍속의 교화나 모범 사례의 현창을 위해 이런 열전류를 집필, 출간하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같은 이름, 혹은 비슷한 제목을 달아 둔 것들이 여럿 발견됩니다만 특히 이 책은 전한 시대의 유향이 저술한 것으로서, 그 유서(類書) 들 중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꼽힙니다.



사실 전한시대만 해도 이후 중화 제국 문화의 기틀이 막 자리잡히기 시작할 무렵일 뿐, (이 책 역자 김지선 선생님의 말씀처럼) "숨막힐 듯한 여성 억압적 문화와 풍토"가 민중을 억압할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열녀(烈女)"라고 하면 대뜸 죽은 남편의 길을 따라 은장도를 가슴에 품다 어느날 장거를 결행하는 섬뜩한 모습을 떠올리기 일쑤이지만, 정확히 말해 이 책 제목 "열녀전"의 "열(列)"은 그 글자가 아닙니다. 뒤의 것은 "아름답다(물론 문제가 많은 가치판단입니다만), 빛나다, 대차다" 같은 의미형태소입니다만, 앞의 것(즉 列)은 그저 "여럿"이란 의미일 뿐이라서, 소위 허신의 <설문해자>에서 거론하는 동음동의의 원칙에도 해당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은 그저 "여인열전"으로 풀어도 무방하며, 기술적으로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문구일 뿐이죠.

더욱이, 이 책에서 저자 유향이 다루는 여인들은 (책 서문에도 나와 있듯) 그 상당수가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들입니다. 공맹의 가르침은 아직은 국가의 교전, 도그마로 채택, 확립되지 못했을 시절이며, 그저 제자백가의 한 입장 정도로 아찔할 만큼 불안정한 위상에 그쳤을 뿐이죠. 저자 유향이 여러 여인들의 생을 검토하며 모종의 교훈을 추출한 후 이를 보급하려 든 의도는 사실이었겠으나, 이것이 (이후에 변질되듯) 철저한 남녀 차별의 억압적 기제를 뭇 독자들에게 강요, 세뇌하려는 뜻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그 근거로, 이 책에 수록된 여성들의 삶은 그 묘사가 지극히 발랄하고, "거침 없고(책의 표현입니다)", 인간 본성의 밝은 면 어두운 면, 용기와 음험함, 절제와 적나라한 욕망을 모두 고루 다루는 중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역자의 규정대로, 이 책은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첫 장 모의전에서 "모의"의 의(儀)는 기본 틀, 모범 같은 의미입니다. 격식에 맞춘 행사를 "의식(儀式)"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글자죠. 이 장은 어머니의 모범이 될 만한 여러 여성들을 소개, 분석합니다. 아버지건 어머니건 자식들을 잘 키웠다는데 그게 흉이 되거나 다른 이유로 트집잡힐 이유란 없습니다. 어떤 빌미에서건 무슨 여성에게 현모양처를 강요한다느니 하는 가당치도 않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럼 자식을 낳아 놓고 마음대로 엇나가도록 방치를 해야 옳단 소립니까?



춘추시대 위(衛)나라 정공(定公)의 부인이었던 정강은 그의 며느리가 남편(아들)이 죽은 후 자식(손자)도 없이 세월을 보내자 그 재가를 기쁘게 허락했으며(벌써 여기서부터 책의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나죠. 성리학적 도그마는 이때로부터 천 년이 지나야 출현합니다), 군주가 강대국 진(秦이 아니라 晉입니다. 이 晉나라가 아직 쪼개지지 않고 있었으니 춘추 시대입니다)으로부터 망명객의 재송환을 요구받자 얼른 이를 수락할 것(싫어도 다시 데리고 있을 것)을 조언합니다. 일시적인 위신과 단순히 감정상의 유불쾌를 따지다가 냉혹한 국제질서에서 큰 실리를 놓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후 친아들이 아닌 간을 위 헌공으로 옹립하다 그 자질의 용렬함을 깨닫고 후회하며, 다시 그 동생 자선을 추대하여 보위 폐립의 주도권을 쥡니다. 당대나 후세의 평자들은 그녀를 두고 "세상사에 통달한 여성"으로 칭송하지만, 제 생각에 이는 도덕적 측면보다 정치 수완의 능란함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여튼 이 점에서도 이 책이 맹목적 열녀(烈女)상을 주입하는 의도가 아님이 잘 드러나죠.

위(衛)나라 장군 오기는 전쟁터에서 일개 병졸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주며 격려하는 놀라운 전우애를 보여 그 부하들이 미친 듯 분발하여 전투에 나서게 했습니다. 이를 가리켜 연저지인(吮疽之仁)이라 부르는데, 이 오기는 이후 초나라 조정에도 몸을 담죠. 그 초나라에 자발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모친 이야기가 역시 "모의편"에 나옵니다. "졸병들은 겨우 콩밥을 먹는데 너는 장수의 몸으로 혼자 기름진 식사를 즐기니, 어찌 저 부하들이 생사를 건 결전에서 너를 의지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의 준열한 꾸짖음에 정신이 버쩍 든 그는 이후 장군, 지도자로서 몸가짐을 바로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전국시대의 대사상가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한 이야기와 더불어, 아내(며느리)를 홀대한 아들(물론 맹자)을 호되게 꾸짖는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예전에 이처럼 집안의 평화와 질서를 지키는 데 현명함을 발휘한 시어머니가 다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구색맞춤으로 적당히 돌아가며 편을 들어주는 식이 아니라, "네(아들 맹가)가 먼저 예의를 어기고서 오히려 상대(그 처)를 비난하니 어찌 이치에 맞겠느냐?"라며 조목조목 논리에 근거한 훈계를 내리는 품이, 가히 저런 흐트러짐 없는 어머니 밑에서 올바른 아들이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사마천 사기 <관안열전>에 보면 안자의 마부가 멀쩡한 허우대를 하고서도 고작 마부자리에 만족하고는 줏대없이 히죽대는 모습을 보고 그 아내가 분발을 촉구하는 일화가 나오는데, 이 책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이것 말고도 초나라의 광인 접여의 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반드시 남편을 잘 내조하여 공경대부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거나 하는 뻔한 사연(이 역시 고착화한 유교 도그마가 독서 대중에게 불어 넣은 환각에 가깝죠)이 아니라, 평범한 가계를 일구고 사는 서민들의 삶도 그 현명한 아내의 처신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오히려 잔잔하게 깨우쳐 줍니다. 참된 인생의 도락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다분히 현대적인 기조가 물씬 배어난다 하겠습니다.

인지전을 보면 자식을 잘 키워 출셋길에 오르게 했다거나 하는 정형화한 어머니들의 패턴 나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도에 넘는 빠른 승진, 깜냥을 감당 못 할 중책에의 보임 등을 만류하고 나서는 어머니들의 처신이 보입니다. 해당 인재를 낳아 기른 어머니만큼 그 장단점과 한계를 훤히 파악하는 입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아들의 개성과 약점, 기국(器局)의 경계를 손바닥처럼 꿰는 어머니야말로, 뜻하지 않은 좌절과 재기불능의 실패로부터 개인의 인생을 구원하는 첫째의 기둥이며, 동시에 한 나라, 거대 조직의 명운까지 좌우할 최적의 참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장에서도 역시 사기열전에서 자주 접하던 사화(史話)가 보입니다.

역자께서는 장들의 중간에 독창적인 논평을 삽입하여, 예컨대 정(貞)과 순(順) 같은 대립되(어 보이)는 덕목이 어떻게 한 개념, 한 인물에 포섭될 수 있는지 친절한 설명을 읽는이들에게 베풉니다. 쉽게 말해 정은 강하고 적극적인 본성이요, 순은 그 반대에 가까운데 왜(어떻게) 이 둘을 결합할 수 있냐는 거죠. 이에 대해 역자의 정교하고 치밀한 논증이 있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두 이치를, 한 몸에 품고 다른 이(남편이라든가 자식들)에게 그 빈 곳을 채워주며 온전한 인성으로 길러 주는 능력, 자질이야말로 여성에게만 가능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해 내는 게, 바로 다름 아닌 이 책에 실린 여걸들의 인생이 몸소 입증해 보인 바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그런 뜻에서, 뭇 남성보다 우월했던, 잘났으면서도 이런 아름다운 천품을 과시하지 않고 은근히 실리와 행복을 챙길 둘 알았던 여성들의 삶을 통해,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는 건 여성"임을 깨우치는,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즘 고전이라고나 불러야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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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 헤밍웨이 단편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헤밍웨이의 가장 큰 매력은 번잡한 수사(修辭) 없이, 정확하면서도 간결하게 선명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있는 듯합니다. 문학에 있어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대명사처럼 거론되지만, 막상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문장이 우수와 감성에 젖을 때도 많고, 번잡한 상념과 사소한 잡담으로 단락이 채워질 때도 많습니다. 여튼 그는 단편이든 장편이든 깔끔한 구성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단호한 장인인지라, 어느 누가 어느 시점에 읽어도 그의 작품은 진위를 혼동할 수 없는 시그너처를 분명히 드러내 보입니다.



이 책은 편집자도 편집자였겠지만 작가로서의 그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묶어낸 작품집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문구가 대체 뭔 뜻일지 호기심을 부르는데, 이 작품집 중에 그런 제목을 단 단편은 실려 있지 않고 행여 다른 기회에서라도 그가 그런 작품을 창작한 적도 없습니다. 수록된 단편(어떤 건 중편에 가깝게 긴 분량입니다)을 모두 읽고 다시 책에 붙은 제목에 눈을 돌린다면, "아 그래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독자의 그런 반응을 다분히 의도하고 이 작품집을 묶어낸 작가로서의 고집과 소신이, 어쩌면 그렇게도 개별 작품의 문장 곳곳에서 묻어나기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집에서 제법 분량이 긴 두 편을 꼽자면 <The Undefeated>와 <Fifty Grand>이겠습니다. 전자는 책 맨처음에 실려 작품집의 분위기를 설정, 주도하는 역할이란 느낌이던데요. 주인공은 1인칭 화자인 마누엘입니다. 마누엘은 전성기가 지난 퇴물 투우사인데, 한 번 출연(공연)으로 (비교적)큰돈을 손에 쥘 수 있는 투우사 노릇이 매력도 있거니와, 그보다는 "늙고 퇴락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 순순히 인정할 수 없어, 병원에서 퇴원(아마도 직전 출연에서 잔부상을 입었나 봅니다)한 후 레타나 사장을 찾아가 흥정을 벌입니다. 확실히 한때 잘나가기는 했는지 사장은 내심 500페세타(현재는 물론 쓰지 않는, 스페인의 옛 화폐단위지요)를 마음에 두지만 반으로 후려쳐 가격을 부르고, 마누엘은 돈보다 일 욕심, 잃어버린 자존을 찾으려는 욕구에 휘둘려 300페세타에 합의를 보고 맙니다.

헤밍웨이의 독자라면 이런 초반에서부터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주인공 마누엘은 장편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역자 이종인 선생께서는 권말의 후기(겸 독자가 꼭 읽어야 할 필수 해제)에서 저 장편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 작품을 유비하시지만, 꼭 핵심 주제뿐 아니라 작품 설정 디테일까지도 둘은 너무도 비슷합니다. 이런 캐릭터를 줄기차게 장편 단편 가리지 않고 그의 작품 속에서 줄기차게 그려 댄 건, (비록 성장 환경이나 누리던 물질적 풍요는 달랐어도) 헤밍웨이 본인이 사멸해가는 남성성과 부단히 투쟁하던 가상의(그리고 그가 접해 온 현실 속의) 늙은 남자들에게 무한히 공감했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종인 선생은 후기에서 "죽음에 대한 비정상적 공포" 때문에 그 반대보상심리로 생에 비겁자처럼 집착하는 캐릭터를 즐겨 창조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와는 조금 시선을 달리하여, 젊음의 활기, 대담무쌍, 민첩한 몸놀림 등에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상남자로서의 자부심이 자기 존재의 첫째 이유였던 헤밍웨이(와 그의 부친까지)의 동기에 보다 주목하고 싶더군요. 사실 마누엘은 투우사로서 퇴물이다 뿐이지 몸이 아픈 데도 없고, 맘만 먹으면 다른 직업을 구할 수도 있고, 남자로서 아직은 어디가서 괄시 안 받고 제 구실 할 시절입니다. 다른 데서 "왕년 잘나가던 투우사" 같은 후광을 내세우며 딴 일을 하면 자존도 지키고괜한 육체적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는데, "한창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를 구태여 주변과 자신에 납득시키기 위해 모래판에 등장하는 거죠.

뼈만 남은 앙상한 황소는 주리토 같은 피카도르(이 책에서는 "기마 투우사"로 번역합니다)로부터 몇 번 칼질을 받았고, 떠오르는 루키이자 앞으로 이 경기장의 스폿라이트를 한몸에 받을 젊은 에르난데스의 능숙한 솜씨 탓에 큰 상처를 입고 기운까지 다 뺀 상태지만, 마지막 일격을 가해 경기를 마무리하려는 마누엘에게 빈틈을 내 주지 않습니다. 명시적으로 그런 표현은 없지만, 마누엘은 이 황소를 그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 대하듯 낭만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만용과 자기도취에 빠진 우스꽝스러운 늙은이가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황소는 타자, 객체가 아니라, 바로 마누엘 자신입니다. 아마도 황소 역시 마누엘을 그리 보고, 젊은 투우사를 상대할 기력을 아껴 이 최후의 일전을 그에게 전력투구할 생각인 듯합니다.

마누엘은 소를 잘 다룹니다. 늙은 나이치고는 말입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는 않은 에르난데스는 자신의 몸에 덜 밴 기술을 구경할 때면 감탄도 내뱉습니다. 오랜 고참에 대한 경의와 다소 뒤섞인, 썩 공정한 평가는 아니지 싶은데, 마누엘과 지난시절 내내 같이 경기를 뛰어 온 주리토는 단호히 부정합니다. "좋은 솜씨가 아냐." 동료에 대한 폄하라기보다 그의 둔해진 동작, 노쇠화의 흔적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난 반응이며, 독자들은 차라리 불길한 예언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노인과 바다>에서 그 야구 이야기 좋아하는 소년 이름이 "마놀린"이고, 지금 이 작품에서 투우사 마누엘의 애칭이 "마놀로(작품 통틀어 두 번 나옵니다)"인데, 이 두 이름은 모두 성인 남성 이름 "마누엘"에 지소사(指小辭)가 붙은 모습이란 점입니다.

구태여 늙은 마누엘이 레타나 사장을 찾으며 "나 마놀로일세."라고 한 건(사장은 그를 피하려고 처음에 인기척을 안 냅니다), 일단 친근감의 부각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호칭이 자연스러웠을 젊은 시절의 자신을 애써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죠. 레타나 사장은 (이후 술집 종업원들의 말에서 드러나듯) 쓸모가 다한 연줄은 가차없이 내치는 비정한 성격인데, 여튼 늙은 마누엘을 경기에 끼워 준 건 여러 동기가 있었겠습니다. 아마도 주리토와 비슷한 판단을 하곤, 뜨거운 맛을 본 후 영영 은퇴시키자는 속셈이 깔려 있었겠죠. 허나 이는 일종의 예우이기도 한데, 예의 그 종업원들 평가 "레타나 사장님과 친구라는 건 곧 성공한 인생이란 뜻이죠!"에서도 우리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투우사의 연기가 시원찮고 마침내 놓친 칼이 관중석까지 튀는 사태가 자(사실 꼭 시원찮았다기보다, 젊고 팔팔한 이가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건 만국 공통입니다) 관중들이 방석을 던져대는 건 마치 일본의 스모 경기 풍속도와도 비슷해서 읽으며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주인공 마누엘의 마음이야 굴욕과 비참함으로 가득찼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사력을 다한 마누엘은 결국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죽었단 소릴까요? 얼굴에 덮어씌워진 수건은 수술의 채비일 수 있고, 죽음이 임박했으면 의사가 아닌 사제가 배석했을 텐데 하는 판단을 내리는 걸로 보아 아직은 정신이 멀쩡하고 맑은 상태.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 듯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도, 타인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묘사에서, 근거 없는 자존 때문에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는 회한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헤밍웨이의 (마누엘의 눈을 빌린) 투우경기 묘사는 어떨까요? 여기서 제가 재밌게 본 건, 극의 전개에 별 필요도 없는 "이류 투우 평론가(이름도 안 나옵니다)"를 등장시켜, 판에 박힌 데다 경기의 실황에 낱낱이 몰입하지도 않은, 허접한 문장으로 투우를 보도하는 그의 행태를 꼬집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어쩌면 당대 일류 비평가들에 비해 투우의 본질을 깊이 이해 못 한 채 실황을 그려 나가는 작가 자신에 대한 반성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저 비평가와 같은 수준으로 몰락해가는 마누엘의 다른 각도 투영임은 당연하겠고요.



<다른 나라에서>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될 듯하다 느닷 맞는 결말이 충격적입니다. 이종인 선생은 저 뒤의 <조국은 당신에게..>를 두고 "이색적으로, 논픽션이 단편집에 끼어 든 경우"라고 지적하시는데, 제 눈에는 이 매우 짧은 단편 역시 헤밍웨이 본인을 화자로 간주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자전적 작품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타인의 겉모습이 처음에 준 인상(기대 혹은 공포)와 실상이 어긋날 때, 공정한 평가를 거두고 전술적으로 가혹한 태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죠.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혁혁한 무공을 세워서가 아니라. 사고로 인한 부상, 외국인이라는 법적 지위 때문에 훈장을 받습니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혹 이 주인공을 정말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로 상정해 보십시오. 남자다운 외모에 근엄하고 단호한 눈빛, 영화배우를 해도 어울릴 외관에 알고 보니 죽음에 대한 강박으로 가득찬, "천성이 매와는 거리가 먼" 겁쟁이였다면 동료들이 전과 같은 시선으로 봐 주겠습니까. 저는 이 작을 논픽션으로 봐야 작가의 의도랄까 사건 묘사가 더 실감 있게 와닿는다고 봅니다.

<하얀 코끼리 같은 산>은, 어려서부터 불교 설화를 읽거나 듣고 자란 우리 동아시아권 독자들에게 더 심상이 선명히 다가올 만한 작품입니다. 아마도 어느 젊은 커플의 대화를 엿듣고, 제3자의 눈과 귀에 여실히 그 허상과 위장, 현실 외면, 왜곡 등이 포착될 만한 상황을 소재로 삼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원치 않게 아이를 밴 여성, 기를 쓰고 중절을 권하는 남자(이런 말을 하는 자가 어떤 속셈인 줄은, 당사자만 빼고 다 압니다), 불안해하면서도 이 남자가 결국 애정을 거두지는 않았겠지 라며 헛된 기대를 놓지 않는 여자. 이 모든 게 서술자의 주관이 일절 제거된 채 녹취록처럼(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독자 앞에 제시됩니다. 툭툭 던지는 듯 무심하고 시시하게까지 들리는 대화 속에 천 마디 철학과 상념을 담는 게 헤밍웨이의 재주이며, 장편 <무기여...>에서 그의 이런 테크닉은 절정의 솜씨를 보인 것 우리는 다 알죠. 사실 저는 이종인 선생의 해석에 일단 반대하고 "하얀 코끼리"에서 뭔가 다른 속뜻을 캐치해 보려 애썼지만, 역시 통설 통념의 설득력은 쉽게 극복되는 게 아니더라는 게.

<딸을 위한 카나리아>는 뒤의 이종인 선생 후기에서 "모두에게 각각 하나씩은 있을 법한 카나리아"라는 해석이 더 멋있었고, 실제로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이 말이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결혼이란 으레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미국 부인의 지리한 "썰"이 유도하는 반향, 그런 절실하고 편협한 믿음(이지만 모두가 공유, 동감하는 역설)을 정면으로 배반한 채, 이 매우 짧은 단편의 주인공 부부는 파탄이 난 결혼에 마지막 치장, 위장, 포장 작업을 행합니다. 미국에서 파탄을 맞아도 별거는 파리에서 진행해야 격식에 맞다는 지독한 허세, 위선은 진정 충격적인 반전인데요.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단편을 작품집 맨처음에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야 왜 "(어떤) 남자들이 왜 여자 없이 인생의 잔혹한 단면과 맞서야 하는지" 혹은 "여자를 사이에 두지 않고 바라본 인생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작가 자신의 답(역시 그림으로만 던져 주는)을 우리 독자들이 더 곰곰히 곱씹게 되기 때문이죠.

<간단한 질문>과 (저 앞의) <다른 나라에서> 둘 다 "이상한 소령"이 등장합니다만 물론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후자의 소령은 명백히 픽션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제가 앞에 지적한 "전자를 논픽션으로 봐야 한다"의 한 근거가 무너지기도 하는 셈인데요. 여튼, 여기서의 소령은 지속되는 불리한 전황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멘탈이 다소 교란된, 불쾌한 쪽으로 심성이 엇나간 모습입니다. 반면 전자는 이방인 청년에게 인생 선배로서 뭔가 바른 교훈 하나라도 전달해 주고 싶은,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상한 타입이죠.

<조국은...>은 정말 논픽션으로 봐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건조하고 쌩뚱맞은 사건의 연속, 그를 담은 일지에 가깝습니다. 어울리지도 않게 세 파트로 구성이 나뉘기까지 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좀 튀는 제목까지 붙어 있습니다. 허름한 승용차 문에 매달려 20km를 여행하다 못 견디겠는지 내리는 어느 파시스트 청년, 여성 종업원의 돈 안드는 구애를 끝내 거저절하는 잘생긴 독일인 가이, 그리고 다시 한적한 부락에서 영문 모르고 불량한 파시스트에게 벌금을 뜯기는 두 남자, 이처럼 서로 연관이나 맥락 없어 보이는 세 사건의 나열 뒤 지나가듯 붙인 코멘트가 인상적입니다. "이런 여행을 두고 무슨 평가를 남기거나 깊이 있게 살펴볼 거리가 있을 리 없다." 전체주의에 지독한 반감을 지닌 헤밍웨이가, 아름다운 고장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발호를 단지 급히 스쳐 지나가야 할 역사의 소란, 장난질로 본 감회가 잘 드러나죠.

<살인자들>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유명한 단편이죠. 아마도 승부조작 먹튀 행각 때문에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된 스웨덴 권투 선수의 신변을 둘러싸고, 불량배 두 명(신원이 천천히 밝혀지는 게 인상적입니다), 종업원 두 명, 요리사(흑인) 한 명이 겪는 소동이 중심입니다만, 피해를 본 이들은 엉뚱하게도 식당의 세 일꾼 말고는 없습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안에 권투 선수는 저 두 불량배(살인자들이라곤 하지만 어딘가 못미덥네요)에게 목숨을 잃을 것 같지만 소설은 거기까지 커버 안 하고 서둘러 막을 내립니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는지 천천히 상황이 밝혀지는 건 맨 앞의 <The Undefeated>와 비슷합니다. 그 작품 속에서도 마누엘의 시선으로 레타나 사장이 작은 체구로 비춰지지만, 끝에 가서야 타인들의 시선으로 이번에는 늙은 마누엘 역시 왜소한 체구임이 조명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분석은 작품 속에 전혀, 화자의 내러티브 일부를 빌려서라도 그 단서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거장들이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통찰과 비의를 한 마디라도 더 지면에 담으려고 안달이었는지와 대조해 보십시오. 그들에 비하면 헤밍웨이는, 오로지 담백하고 선명한 심상 제시를 통해, "내가 지금 뭔 말을 하고자 함인지 독자 니네들이 눈치 채 보라"는 투나 마찬가지입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그래서 여백에 오히려 독자의 참여 공간이 늘어나고, 한정된 지면이나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화자와 청자가 참된 소통을 이룬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은 우수 속에 진한 허무, 그를 통한 관조와 달관이 배어납니다. 왜 하루키가 이 작품집을 그토록 아꼈을까요? 청춘기에 그처럼 애독했다는 헤밍웨이의 세계에서 그가 배운 건 집념, 투지, 승부욕, 초탈까지는 아닐지라도, "알고 보면 별것도 없는 인생, 세계"에 대한 "허무를 직시할 건전한 용기" 정도는 충분히 우리 독자들이 공통분모로 엿볼 수 있을 텝니다. 그게 유독 하루키에게서만은 특유의 낭만주의, 엉뚱한 상상력, 위트 속에 휩싸여 있을망정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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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위한 롤모델 유일한 이야기 -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은 유일한의 도전하는 삶과 아름다운 나눔 꿈결 롤모델 시리즈 3
정혁준 지음 / 꿈결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유일한 박사님은 엄격한 가풍에서 특별한 훈육을 받고 자란 어린 시절을 거쳤습니다. 그에게는 사업에 전념하여 가문을 융성하게 할 개인적 책임감과 동시에, 하필 그때 우리 민족 전체에 닥친 암울한 시련을 극복해야 할 집단적 책무가 동시에 부과되었습니다. 그는 유교적 교육을 명문가의 전통에 따라 뼈속까지 새기며 일깨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 맞춰 서구의 신지식과 문명을 습득하는 다른 과제까지 성실히 해내어야 할 짐까지 지워진 청춘기이기도 했죠.

유일한 박사님은 이처럼 생의 매 순간마다 "두 가지 이상의 숙제"가 주어진, 다른 이들보다 갈등해야 할 이유가 많은 삶을 산 분입니다. 한국 최초의 제약 회사 창립자로서 유일한 선생은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현대적 과제와 이슈에 비추어서도 메우 모범적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있는 위인입니다.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그 이른 시기에서부터 몸소 실천한 점도 위대하지만, 기업 활동의 친환경 목표 설정이라든가 하청 기업에게 갑을 관계를 따지지 않고 공존공영의 생태계를 조성하려 애 쓴 점 등은, 왜 한국이 지금 고도성장의 과실을 마음 편히 못 누리고 이처럼 불편과 분쟁을 겪어야 하는지 그 모든 대답을 내려 주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사람의 업적에 대한 평가라는 게 시일이 지나면 퇴색하거나 정반대 방향을 틀기도 일쑤인데, 선생처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만인에게 존경, 흠숭 받는 인생을 살기도 참으로 드물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일형(유일한의 아명)은 기독교 신도이자 부유한 상공인이었던 부친 유기연의 슬하에서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자라난 장남이었습니다. 당시 평양 일대에는 그간 조선왕조 통치하에서 서북인이라며 차별 받던 설움을 극복하려는 듯,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큰 활기를 띠며 널리 퍼지고, 신교 특유의 자활자조 이념이 이들 사이에 자리잡아 전에 없던 경제 호황을 맞는 중이었죠. 이 무렵이면 아직 국권침탈 국면으로 넘어가기 대략 십 년 전쯤인데, 특히 유기연 선생은 개화파 청년 박장현을 만나 신문물의 놀라운 성취에 눈을 뜨고, 장차 엄청난 국난을 맞이할 민족의 앞날을 대비하고 개개인(자신과 자녀들)의 장래를 윤택히 만들려면 선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탁견이었으며, 위대한 인물은 그 부모님의 각별한 정성과 교육에서 탄생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 책은 어린이용이지만 고증이 비교적 치밀하게 된 모습이 돋보입니다. 페이지를 넘겨 가며 저자께서 한 문장, 한 점의 정보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려 애쓰신 흔적이 잘 드러나는데요. 정확히 그가 몇 살 때 유학길에 올랐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밟아 목적지에 이르렀는지 다소 엇갈리는 다양한 기록들을 최대한 다 소개해 주시는 성의가 좋았습니다. 유기연 선생이 "미국 중부 지방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중심부가 가장 문물이 번성했을 테니..."라고 하는 말에 박장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장면(물론 작가의 상상력이겠지만)이 재미있었는데요. 아마 작가님도 미국 사정에 밝으시겠지만 사실 네브래스카 등 중서부 일대는 이른바 "인 비트윈 에어리어"로 불리는, 개성도 재미도 흥청거리는 부유함도 없는 심심한 촌구석으로 미국에서는 통하기 때문이죠(책에 그런 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다만 저자는 날카로운 분석도 곁들이시는데, 만약 동아시아 출신 철도 노동자들이 잔뜩 몰려들어 인종 차별과 갈등상이 첨예한 서부로 갔다면 어린 일형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나마 인간미가 남아 있는 중서부라야 교육 여건이 유리하지 않았을지를 짚는 대목이 좋았습니다.

책은 유일한의 일대기만 서술하지 않고,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떠했는지, 조선(한국) 내의 정치, 경제적 실정은 어느 단계였는지에 대해서도 유익한 정보를 싣습니다. 역사와 인물의 일대기란 이처럼 교차 조명되어야 그 참된 의미를 독자가 깨달을 수 있죠. 앞서서 유기연 선생이, 청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국의 실정을 개탄하는 장면에서도, 어린 독자들은 한국의 근대사 어느 지점에서 인물이 성장했는지 다시 확인이 가능하겠고요. "왜 유일한이 빈손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는지, 왜 스스로 돈을 벌어가며 고학했는지"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여객선상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음을 박스 속에 넣어 유일한 생전의 회고 형식으로 가르쳐 줍니다. 편집이 단조롭지 않고, 어려운 단어 뜻풀이나 배경 설명을 최대한 친절히 곁들이는 태도도 책의 큰 장점입니다.



터프트(이 책은 정확히, 소년 일형의 은인이었던 가족 이름을 "터프트"라고 명기합니다) 가족은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고(책에는 왜 독일계 이민자들이 이 시기 대거 미국으로 몰렸는지 배경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소년은 지역의 헤이스팅스 고교에서 공부면 공부, 리더십이면 리더십, 운동 능력이면 운동 능력,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인재라고 해도 이처럼 그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구요. 미국 고교에서 백인 친구들을 다 제치고 풋볼 센터포워드("센터"가 맞겠죠?)포지션을 맡았을 정도이니 그 체력과 센스, 튼튼한 체구 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궁금한 건 소년 유일한이 미국에서 꿈을 키울 때 그 가족분들은 뭘 하셨냐인데요. 여기 대해서도 용케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시려고, 책에선 "간도로 진출(1909)하였으나 의외로 큰 손실을 봤다"며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책의 뒷부분에서 이어지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유일한이 호미리 씨와 결혼할 무렵까지 가족들은 계속 북간도에 거주한 것 같네요. 확실히 이재에 밝은 분들은 어떤 시스템이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여 생존과 번영에 성공하는 것 같지만 이런 예기치 못한 역경도 언제나 따르게 마련입니다. 일형 소년이 헤이스팅스 고교에 입학할 때가 막 한국(조선)이 국권을 잃었을 무렵임이, 이 책 맨 뒤의 깔끔한 연표를 통해 잘 나와 있습니다.

고교 성적이 워낙 좋아 어디든 입학할 수 있었겠지만 이런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보고 마음이 편할 수 없었던 유일한은, 잠시 대학 진학을 미루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을 송금하여 본가를 부양하기로 합니다. 이때 처음 멀리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취직하여 하필 크리스마스에 그 지역 일대가 정전을 맞게 하는 큰 사고를 내지만, 동료와 직근상관이 한사코 "누구보다 성실한 미스터 유의 잘못이 아님"을 입을 모아 변호하는 통에 해고의 위기를 잘 넘깁니다. 이때의 아찔한 경험은 그의 일생을 통해 큰 교훈이 되었음을, 본인과 그 조카분(유승흠 이사장) 등의 입을 통해 술회됩니다.

이 책에는 유일한의 성장기에 영향을 직간접으로 끼친 독립투사, 애국지사들의 이름도 여럿 등장하는데,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알력 관계로 잘 알려진 박용만 선생이라든가, 독립협회에서 주동적 역할을 맡은 서재필 생 등이 그 좋은 예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당대 미국 산업상의 눈부신 발전상을 설명하며 에디슨, 포드 등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의 활약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뿐만 아니라 록펠러와 그의 사업 스타일, 철학 등을 비교한 대목도 있습니다.

중국 출신 호미리씨와 결혼하며 유일한은 더욱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다져 나갑니다. 중국에 체류할 당시 어느 허름한 행색에 낡은 가게나 운영하던 장사꾼이, 집으로 돌아오자 고대광실 살림에다 더할 나위 없는 호사를 누리는 걸 보고 이유를 묻자, "잘 꾸며 놓으면 탈세를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때 그가 다짐한 건 한국(이미 일제에 병탄되었지만)에 돌아가서는 걸코 탈세하는 일이 없어야 국가가 위난에 처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었는데요. 훗날 유한양행으로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일구고서도 모범 납세자로 여러 차례 표창을 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선생은 통조림 사업 성공을 기반으로 큰 돈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금 상당 부분을 광복군의 독립 투쟁 지원에 썼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단지 신의와 자조 정신으로 성공한 사업가일 뿐 아니라, 민족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애국지사이시기도 함을 알 수 있죠. 해방 이후에는 대한상의 회장직을 맡아 사리의 추구보다는 민족 경제 전체가 고루 회생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애쓰셨는데, 그 척박하고 악착스러운 경쟁 풍토에서 이런 선비 정신으로 경영과 처세에 임한 분이 계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산업화 초기 많은 기업들은 헐값에 부지를 사들여 점유하다가 뜻하지 않게 지가가 급등하여 가외의 횡재를 맞게 되었는데요(이런 풍토는 이후 20년 후까지 이어져, 당시 정부에서는 소위 대기업의 "비업무용 토지 보유"를 제한하려 절치부심했죠), 유 회장님은 주저없이 "사회 환원"을 내세우며 처분을 지시합니다.

유한양행은 그 이른 시기부터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내세우며 현대 기업이 지향해야 할 바른 행보를 앞장서서 끌고 나갔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개념이 아니라도, 소비자와 생산자, 기업과 대중이 공존 공영을 도모할 길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답을 제시하고 관대한 실천에 나선 이런 선구자적 기업인, 애국자의 면모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란 끝이 없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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