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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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한 달 전쯤('24.5) 제가 <비트겐슈타인 입문>이라는 제목의, 프랑스 저자분이 쓴 유명한 책 한 권을 리뷰했었는데요. 그 본문 중에 보면 contemporary 인류학자이자 여성학자(많이 배우신 부류의 페미니스트) 한 사람의 논문, 비트겐슈타인의 페미니스트 식 재해석을 다룬 글이 잠깐 인용되었더랬습니다. 그 논문 저자 이름이 비나 다스였고,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인도 사람입니다. 지금 이 책 저자 수바드라 다스 박사는 그분보다 젊은 분인데 다스("봉사자")라는 성씨가 원래 벵골 지방에 많아서일 뿐 두 사람이 서로 혈연관계이거나 한 건 아닙니다. 그 비나 다스, 지금 이 책 저자 수바드라 다스 모두 벵골 출신입니다. 다스라는 성은 힌디어로 दास라고 쓰는데, स는 원래 밑에 취소 기호가 붙어야 하지만 그냥 저렇게도 씁니다. 원 발음이 "다사"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찰스 다윈은 근대 들어서도 이어지던 종교적 폐습의 근본을 허문 사람으로도 칭송받습니다만, 이 책에서 저자는 인종적 편견을 깬 데에도 크게 기여한 점을 강조합니다. 식민 통치 시절 영국인들로부터 혹심한 인종 차별을 겪었던 인도인들, 그 중에서도 벵골 지방에는 영국인들이 일찍부터 밀고들어와서 이 풍요로운 땅을 수탈했었습니다. 그 먼 후손이기도 한, 역사학자 수바드라 다스가 이 주장을 하는 건 정말 독자 입장에서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것입니다. p51을 보면 대영제국에 노예제 폐지법 적용이 겨우 1833년에 이르러서라는 건, 법적으로 대영제국에 편입된 식민지에의 적용을 말함이며, 인도는 엄밀하게는 무굴 제국과 각 토후국의 명목상 지배를 받았지 저때는 영국의 법적 통치를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사실상, 경제적, 무력 지배).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넘어서 세포이 항쟁 진압을 거치고 인도 제국이 선포되어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되었죠. 

p69를 보면 tu regere imperio populos, Romane, memento라는 라틴어 구절이 인용되며, 이 구절은 베르길리우스가 썼다고 나옵니다. 이게 고대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발췌되었으니 당연하겠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17세기 계관시인 드라이든이 "그렇지만 로마인이여, 오로지 당신만의 힘으로 인류를 통치하고 세상을 복종시키는 것이다"라고 번역했다고 나오는데, 저 구절만으로는 그리 새겨지지 않습니다. "너 로마인이여 기억하라, 사람들을 제국의 힘 아래 통치한다는 것은"까지입니다. 드라이든의 저 번역에 해당하는 구절은 뒷부분까지가 다 나와야 합니다. "오로지 당신만의", "그렇지만" 같은 건 베르길리우스의 원문에 없고, 드라이든의 번역문에만 있는 문장 성분입니다. 아마 드라이든은 저 구절을 그리 읽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드라이든은 "로마인이여"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로마라는 도시를 의인화하여 "로마여"라고 했죠.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라틴어 원문은 (이 책에서도 보듯) 명백하게 "로마인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참 후 칼라일은 영국인을 새로운 로마인이라 선언했고, 매우 다른 동기에서 20세기 초 무솔리니도 영국인을 그리 불렀다고 책에 나옵니다. 저자가 구태여 칼라일과 무솔리니의 그 발언을 인용하는 게 매우 재미있게 읽힙니다. 

휴 블레어(p103)뿐 아니라 19세기 인류학자, 문화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주장한 바는, 특정 민족이나 인종만이 문자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더 독특하게 보입니다. 잉카 문명만 해도, 키푸라는 고유의 기록 시스템(p114, p220)을 갖고 있었음이 최근에 밝혀짐에 따라 그 오랜 선입견 하나가 깨어졌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피사로 패거리에게 그토록 선진 시스템 전체가 쉽게 무너진 사실에 대해서도 별반 이상해할 게 없습니다. 그런 예는 몽골 기병에게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 중 하나인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 대학살이 벌어진 사실이나, 베이징의 빈틈을 여진-차하르 연합 세력이 수시로 공략하여 민간을 약탈하다가, 결국 도르곤이 입관하여 패권을 차지하고 양주의 학살을 지시한 예 등 부지기수입니다. 이 모두에 공통된 하나의 원리는, 패배한 이들 역시도 그 체제에 내부 모순이 심각하게 축적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잉카 제국이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는 점도 대단할 게 없는 게, 대영제국은 어디 면적이 좁아서 나치에게 멸망 직전까지 몰렸겠습니까? 

Death is the great equalizer(p309). 이 말은 개인뿐 아니라 문명권, 나라, 도시의 경우에도 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익히 배운,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의 죽음에 대해 다소 기이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제9장의 서술이 가장 재미있게 읽혔는데, 얼핏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토픽들을 기막히게 엮어서 "서양은 모든 죽음을 망쳐 놓았다(p337)" 같은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저자의 스토리텔링 기술에 탄복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인기 있는 강연자, 채널 운영자인 사실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할까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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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티밋 바 북 - 홈텐딩과 바텐딩을 위한 1000가지 칵테일의 모든 것
미티 헬미히 지음, 양희진 옮김 / 미래지식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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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베버리지, 혹은 약한 도수의 주류를 풍취와 함께 즐기고 싶을 때 꼭 바(bar)에 찾아가는 게 아니라 집에서도 분위기를 내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자리한 풍습이고, 한국에서도 바텐더 테이블을 차려 놓고 멋지게 믹싱하며 손님 접대를 하는 걸 보면 그저 구경만 해도 흐뭇해지고 절로 흥이 나는 듯합니다. 그런 풍습이 생겨난 본국보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더 까다롭게 격식을 따진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습니다만, 이게 회사 접대 차원에서 갖출 걸 다 갖추고 세팅을 해야 하기도 하니 격식을 다 차리는 게 비판 받을 일이야 하나도 없습니다. 말이 앞이 다르고 뒤가 다른 게 문제면 문제겠지 말입니다. 

이 책은 일단 편집이 세련되고, 격식에 맞게 정확한 레시피, 부대 메뉴가 설명되었다는 점이 제게는 유익했습니다(화보가 좀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누가 마련한 절차가 번잡하고 그럴싸해 보이며 돈이 많이 들었음직한데, 엉뚱한 경우의 예식을 끌어왔다면 그것도 민망한 결과이겠으며, 그간 착각하고 있었던 걸 바로잡아 주기도 하는 유익한 정보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p48을 보십시오. "프리미엄급 술은 단일 종류의 스피릿이 적어도 90%는 되어야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여기서 스피릿이라 함은, 칵테일 믹싱 원료 중 주류만을 따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통은 spirits라고 복수형으로 씁니다(원래는 "정신"이라고 할 때 그 스피릿입니다). 뭐 복수는 언어 관행상 그리 쓰는 것이지 꼭 여러 종류의 술을 섞는다는 뜻이 아님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 나온 대로, 단일로 90% 이상이 정석이며, 그 이상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독특하게, 맥주는 이상할 만큼 순정으로 고집스럽게 즐깁니다. 물론 룸살롱 같은 데서 폭탄주 마실 때는 제외입니다만 폭탄주는 풍미나 흥취가 아니라 비즈니스 쇼부(?)를 위한 용도이니 여기서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p92를 보면 맥주 칵테일 제조법이 나오는데 책의 설명도 그러합니다만 이렇게 맥주 기반 칵테일 믹싱도 수 세기의 역사를 지닌, 독자적 평가를 받아 충분한 레시피임이 맞습니다. 이 페이지에 보면 한국 사람들이 식겁할 만한 아이템이 있는데, 바로 비어 버스터입니다. 이름값을 한다고 무려 맥주에 보드카를 섞는 방식입니다. 요즘은 한국에도 러시아, 중앙아시아계 외국인(주로 노동자)들이 유입되어서인지 심지어 편의점에도 보드카 코너가 따로 생긴지 오래입니다(싸구려긴 해도). 보드카가 싸게 들어오니 이렇게 (약하게라도) 칵테일 해 먹고 싶은 이들에게는 좋은 환경입니다. 

p125를 보면 브랜디 코블러라는 게 나옵니다. 브랜디는 한국인들이 착각을 하는데 이게 포도주이긴 하나 고급 술은 전혀 아닙니다. 브랜디 코블러도 그 어원을 알고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이게 약식으로 부담없이, 아는 이들끼리 즉석에서 만들어 먹기 좋은 그런 메뉴죠. 책에도 나오듯이 클럽소다, 혹은 마땅한 게 없으면 어디서 칠성사이다나 트레비 같은 거 사 와서 조심스럽게 붓고 살짝 저으면 되겠습니다. 책에 나오듯 스터링(stirring)이 핵심입니다. 

책이 책이다 보니 리큐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철자는 liqueur이며 이 프랑스어를 직통으로 들여온 영국에서 이걸 리큐어라고 읽습니다. 인터넷 어디에 보면 이걸 미국식으로는 리쿼라고 읽어서 주류인 liquor하고 발음상으로는 구분이 안 간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어디라고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엉터리같은 소릴... liquor는 [리커]이며, liqueur는 미국식으로만 [리쿼]라고 읽습니다. 프랑스식으로 리퀘(르)로 읽어 주는 게 정석이겠지만 우리는 영국식, 미국식을 많이 따라들 하니 그걸 또 대세로 봐야 하겠지요. 이 책에서도 그런 취지로 저 표기를 유지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p225를 보면 creme과 cream을 구분하는데, 앞의 creme은 원래 불어로서 앞 음절의 e에 그라브가 찍힌 형태입니다. 저렇게만 보면 불어와 영어의 차이일 뿐 둘이 뜻이 원래는 똑같아요. 불어는 저걸 그라브 때문에라도 [크렘]이라 읽고, 영어도 간혹 크렘이라고 발음합니다만 그냥 똑같이 크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레시피에서는, 책의 설명대로 creme은 에멀전(emulsion)이며(여성들은 이게 뭔지 대강 짐작이 될 겁니다), cream은 미숙성 브랜디를 인퓨징하는 걸 가리켜서 서로 구별됩니다. 이 책처럼 꼭 주류가 아니라, 두루 다른 음식 조제 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p272에 보면 피나 콜라다가 나옵니다. 책에 피나라고 되었습니다만 "피냐"가 표준 발음이고 미국인 히스패닉 할 것 없이 다들 그렇게 소리냅니다. 경구개 비음(硬口蓋 鼻音. palatal nasal)은, n 위에 비르구릴라, 혹은 틸드를 찍어서 표시하곤 하죠(책 해당 페이지의 원어 중 찍힌 기호도 참조). 아무튼 휴양지 해변에서(뭐 꼭 카리브해가 아니라도) 마시면 제격인 피냐 콜라다! 캬~ 바로 밑에 나오는 피냐 콜라다 누에보는 처음 들어 보는데 세상에는 제가 들어 보지도 못한 고급 아이템이 많다는 점 다시 실감합니다!ㅋ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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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사치
김영희 지음 / 작가와비평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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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께서는 p99에서 디지털 리터러시를 거론하십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한글만 읽고 쓸 수 있다고 문해자(文解者)가 아니며, 내가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고 얼마나 찾을 수 있으며 잘 활용하는지가 또한 중요하다는 뜻에서입니다. 책에서는 잭 안드라카라는 소년의 예를 듭니다. 우리도 불과 몇 년 전에 췌장암으로 타계한 어느 유명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췌장암이라는 게 그만큼 자각증상도 늦게 오며 일단 뭐가 느껴졌다면 돌이킬 방법도 없어서입니다. 이 소년은 친지분의 죽음을 계기로, 오로지 인터넷에서만 정보를 수집하여 췌장암 진단키트를 만들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난다긴다 하는 제약 바이오회사들은 어린 소년이 그런 큰 일을 하는 동안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경제와 산업을 이끌어간다고 하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 사례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인터넷에는 그만큼 정보가 거의 무료로, 지천으로 깔렸다는 점입니다. 사실 시니어나 중년은 살아온 이력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안목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같은 걸 봐도 남다른 걸 떠올리기가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에이, 별게 있겠어?" 같은 관성과 지레짐작에 이어지는 포기, 또 비생산적인 정보 탐색과 컨텐츠 소비에 시간과 정력이 낭비된다는 점입니다. 

어린이, 젊은이들은 혹 남에게 거친 말을 하거나 매너를 어겨도 어느 정도까지는 양해가 됩니다. 뭘 잘 몰라서 그러겠거니 하는 사회의 포용심이 작동해서입니다. 그러나 중년에게는 그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이와 경험에 따른 책임감과 타인으로부터의 기대 수준이 높아서입니다. 그래서 중년의 언행은 지극히 신중해야 하며, 그 결과에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p116에서 저자는 스페인 속담 하나를 소개하시는데, "화살은 마음을 관통하지만 거친 말은 영혼을 꿰뚫는다."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남들에게 가능하면 따뜻하고 격려가 되는 말, 나도 다른 이에게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을 좀 해 주라는 충고를 독자에게 건넵니다. 

말로써 모든 오해를 풀고, 서로의 마음도 보듬는다면 말을 건네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윈-윈이 아니겠습니까. p117에서 저자는 범죄자 신창원의 예를 드는데, 그의 모교 어느 교사가 그렇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던들 그렇게까지 사람의 인생이 나락일로를 걸었겠냐는 지적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성장기에 행여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게 각별한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어른들의 책임이 왜 중요한지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p147에는 피카소의 명언이 나옵니다. "온세상이 예술 아닌 게 없다." 과연 빼어난 감각과 창의력을 가진 천재의 말 답습니다. 일수사견이요 불안돈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천재라야 사물과 세상이 나름답게 보이는 건 아니고, 내 마음에서 삿된 것을 다 떨쳐 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들도 마음과 안목만큼은 고흐, 피카소, 미켈란젤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보통 인간의 아름다움은 청춘에서 찾는다고 하지만, 인간의 원숙미, 인격에서 배어나오는 여유와 품격은 중년을 청년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중년의 보람과 기쁨에 대해서는 예술가들이 그 핵심을 일찍부터 꿰뚫어본 바 있습니다. 예술과 삶에 있어서 아무것도 빠진 게 없다." 역시 피카소가 중년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피카소가 그 정도로 중년 예찬론자였던 줄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저자는 또한 예술에서 중요한 건 그 완성도가 아니라 진정성이라고도 하십니다.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려는 중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p202에는 미국 가정살림 전문가, 홈메이킹의 레전드 사업가인 마사 스튜어트의 행적에 대해 소개합니다. 올해('24) 이분의 나이 82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령에는 노령에 어울리는 섹시함과 품격, 우아함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걸 몸소 보여 주고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볼때 중년 남녀들은 그저 아직도 한창 나이인 청년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대체 중년이 위축되고 침체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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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노랑나비
한정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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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5월 중순)에 이시형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썼었습니다. 그 책에도 보면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삼촌이 지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세상이 갑자기 바뀌었다 싶을 때 그간 쌓아온 설움을 한번에 다 쏟아내겠다는 듯 못된 짓을 해 대는 패악 분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이팽이라는 놈(p37)이 그렇습니다. 원래 인간 못된 것은 제놈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악으로 갚는, 이른바 은반위수의 패륜 짓거리를 하는 게 공통인데, 오갈데없는 것을 거두어 사람 대접을 해줬더니 벌인다는 짓이 저렇습니다. 어렸을 때 충명하고 남의 선망을 한몸에 받던 귀한 인생은, 저렇게 비천한 자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기도 하니 주의할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라는 게 있습니다. 할머니도 지금은 몸이 아프셔서 요양보호사 이모(p43, 98)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대소변을 가리기 힘들어 방에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지금 고은이하고 똑닮은(p145) 소녀였습니다. 선예(김선예, 즉 고은이 할머니), 화자, 순덕이(옛날 분들이라서 이름이 다 저렇습니다) 등과 동네를 뛰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십니다. 그때는 다들 피부도 곱고 천진난만한 소녀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어린 시절, 젊고 잘생기고 총명했던 삼촌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걸 보고, 사람을 대체 어떻게 때리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냐며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우리들은 몸에 부드러운 곡선이 생겨 제법 처녀 티가 나고 있었다(p30)." 할머니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체 왜 싸울까? 미움과 증오는 어디서 비롯하는걸까?" 어린 고은이의 질문(p76, p158)입니다. 고은이는 너무 어려서 한국전 당시 삼촌이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도 그저 들어서 알 뿐입니다. 다만 고은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뉴스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엄청난 양의 포탄이 도시에 떨어져 중요 시설들이 못쓰게 망가집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상대 쪽의 잘못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고은이를 불러다놓고 다시 할머니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동해안 작은 어촌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셨습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야 쓸데없이 남을 질시하지 않고 심성이 곱게 자라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전쟁 배경은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일수 오빠는 LST가 미군이 본격적으로 인천상륙을 준비하기 위해 저렇게 기동 중이라고 전하고 아버지도 그 비슷하게 예측하시지만 사실은 그게 아님이 드러납니다. p110을 보면 미군이 구룡포로 물자와 인력을 철수하기 위해 이 함정을 운용했다고 나오는데, landing ships, tanks의 약자입니다. 채고은의 친구 은미는 공부 잘하는 친구, 잘생긴 친구 등 부러운 애들이 세상에는 많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남 신경쓰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애들만도 못한 심성으로, 제 스스로도 무슨 소린줄 모를 미친 증오의 외침을 짐승처럼 떠들고 다니는 열등감에 쩐 불쌍한 인간도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외할머니가 수 놓은 것은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기도였다." 얼마나 가슴 뭉클해지는 말입니까. 세상에는 이처럼 남도 잘되고 나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선한 인생이 많지만, 얄팍한 이기심과 출세욕, 나면서부터 거짓을 즐기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불쌍한, 저주받은 인생도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에는 노랑나비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나비에는 죽은 자의 영혼들이 들어가서 저렇게 가냘픈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채고은이 쓴, 학교 제출용 보고서로 마무리되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는 전쟁과, 70여년 전 한국에서 벌어진 6.25를 서로 등치시킵니다. 우리 모두 이 어린 학생이 간절히 바라는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며, 호국 영령이 산화해 간 6월을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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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임택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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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사랑은 보통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미련없이 모든 걸 불태워야 한다고도 하지만, 정작 한창 버닝하는 당사자도 그렇게 하기 힘든가 봅니다. 내가 이런 동기로 그에게 끌려도, 상대도 나를 좋아해도, 서로에게 다른 걸 기대하고 만난 두 사람이 상대를 속속들이 알기 힘들고, 결국 그렇기에 한때 뜨거웠던 사랑도 식고, 이 감정의 앙상한 잔재가 서로에게 남긴 바가 무엇인지 깊이 회의하고, 환멸에 빠지고... 그 누구도 사랑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게 이 때문입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네요. 

박혜람이 파리에서 돌아온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동기뿐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뭐가? 김섬을 다시 찾은 게 말입니다. 우리는 멜로물에서 다시 돌아온 누군가를 놓고, 왜 니가 다시 와서 잘 살아가는 나를 들쑤시냐고 원망하는 장면을 곧잘 보곤 합니다. 김섬은 이미 아슬아슬해하던 독자들이 보기에는 그나마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통지표(p123), 아니 홍지표가 이미 그녀 곁에 제법 오래 있어줬기 때문인데, 그래도 (약간 스포를 하자면) 홍과 김의 관계를 박이 괜히 끼어들어 파탄낸 것까지는 아닙니다. 홍은 그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박이 아니었다 해도 결국 김과 오래 이어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박이 얄미운 게, 여튼 김-홍 관계의 파탄에 대해 미필적 고의를 갖고 밀고 들어온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p29를 보면 프랑스어 동사 faisander에 대한 준오의 설명이 나옵니다. 준오의 말대로 이 단어는 꿩이나 그 고기를 가리키는 faisan(퍼장)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어가 본래 그렇지만 라틴어를 거쳐 받아들인 단어입니다.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이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예를 들어 p26 같은 곳에서 이슬람의 어원이 평화냐 아니면 복종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핏대를 올리며 싸울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슬람의 어원이 복종이라고 해도, 먼 옛날 복종이라는 단어가, 특히 중동인들에게는그리 부정적이지 않았을 겁니다. 유교 문화권에 오래 살던 우리 조상들이(지금 우리들과는 크게 달리) 충(忠)이라는 단어를 보고 마음에 뜨거운 것이 밀려왔듯 말입니다. 

준오, 장은주, 송강, 현수호, 샤를리, 제롬, 앙리, 건우, 엘렌, 정우 말고도 이 소설에는 길거나 짧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p75의 어느 노부인은 처음 보는 박혜람에게 "프랑스를 좋아하세요?"라고, 그것도 사무적으로 묻습니다. 마치, 20년 전에 죽은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제목이라도 읊듯 말입니다. 예전에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별로가 된 것들은 보통의 우리에게도 한 트럭씩은 다들 있습니다. 지적인 캐릭터들이라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혜람이 날치기범을 향해(테러범 아닙니다ㅋ) 그놈이라고 부르는 대목(p58), 어느 영국식 영어 사용자의 get the f*** out of here 어쩌구라며 불평하는 말(p42), 김섬 아빠 후배 동호 아저씨(경상도 사람)가 불량배한테 이 새* 어쩌구 하며 쫓아버리는 장면(p140) 등 극히 적습니다. 

재혼 상대로 예전에 알던 누군가를 찍어 놓았건만 공교롭게도 그 자녀들끼리 이미 감정이 생겼더라, 이런 이야기는 한국식 막장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있었던 희비극입니다(저 한참 뒤에 보면 김섬 엄마하고 동호 아저씨하고도 뭔 일이 생깁니다. 내 딸 어쩌구 하던 게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죠). p63에 나오는 샤를리와 제롬이 그렇습니다. 프랑스는 말만 대혁명의 나라이지 은근 차별이 심하죠. p50을 보면 톨레랑스도 간데없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 이슈는 샤를리뿐 아니라 저 뒤에 밝혀지는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p230에 보면 김섬은 사춘기 때 성당(원래는 다녔던)에도 나가지 않고 독립적으로 지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짧은 구절이 그녀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김섬한테조차, 어렸을 때 고생했다는 그 누구(스포)는 간접으로나마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거죠. 결국 둘은 길게 이어지기 힘들었겠고, 사실 김섬부터가 일시 도피처로 oo에게 어떤 환상을 품지 않았었나 저는 생각합니다. 뭐가 어떻게되었든 간에, 박혜람이 이기적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희한하게 오체투지 관행이 있는데, 박혜람이 이 쇼를 하는 장소는 법당(p177)입니다. 

苦樂汝自當 邪正由汝已. p176에서 혜람이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인용합니다. 이 말의 묘미는 고락, 사정 모두 부정적인 개념이 앞에 온다는 점, 부정적인 감정과 체험에 더 방점을 두며 모든 게 당사자인 네가하기 나름이라는 뉘앙스를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앞구절에 當이라는 술어로 종결지어 영어의 deserve라는 느낌을 주고 종결부에는 어조사 已를 두어 박력을 더합니다. "부활은 화려한 듯해도 상처를 그대로 안고..." 그런데 그래서 부활이 위대한 것 아닌가요? 상처가 (보다시피) 이렇지만 난 살아났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소설의 김섬은 기실 부활이 내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처가 가슴아팠던 나머지, 그 이전 무구하던 시절만 바라던 나머지, 그냥 아픈 대로 자신의 고치에 그대로 머물고만 싶은.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칼을 들게 하더라고(p160)." 이 말도 저는 허세 같았습니다. 

이 점을 박혜람은 알았던 듯하고 그래서 저는 라미 누나(p46)가 밉네요. 등장인물들의 연배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배경으로 등장하는 음악들입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바르쿠 네그루)>라든가. 음악이 소설 장면장면과 잘 어울려서 마치 음성지원이 되는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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