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내는 철학책 - 삶의 궤도를 바꾸는 전방위적 철학 훈련
황진규 지음 / 철학흥신소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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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사람을 어떤 의미를 찾는 존재로 이끕니다. 고대부터 철학의 출발점은 거기였고, 지금처럼 물질문명이 발달한 시기야말로 철학이 사람의 삶 중심에 다시 놓여야 할 때입니다. 여태 무심히 봐 넘겼던 일상도 사물도 자연도 철학이라는 필터를 입히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저 착시가 아니라 나의 둔한 눈을 틔워 주고, 여태 생각지 못했던 바를 일깨웁니다. 저자 황진규 선생님처럼 많은 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의 삶이 보람으로 가득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6에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관계는 평등한 관계도 있고, 일방이 타방에 종속된 경우도 있습니다. 종속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인 관계 중 자발적인 것도 있고 비자발적인 것도 있는데, 후자는 부모-자녀 사이가 대표적입니다. 책에는 선생-학생도 예로 나오는데 이건 초중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배정되는 경우가 그렇겠습니다. 그럼 전자의 대표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분명 불가항력적이지만 자발적입니다. 이 미묘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감정인데도 헷갈려하고 올바른 관계 설정을 어려워합니다. 이처럼 철학의 프레임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내가 직면한 문제의 성격이 더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에게 아마 영원히 낯설 미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이처럼 남겼습니다. 

"구경은 보는 것이지만, 사랑은 '하는' 것이다.(p120)" 사랑만큼 개념, 관념에 머물길 거부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웠냐는 우스개도 있지만, 사랑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프랑스의 평론가 기 드보르는 구경만 하는 행위의 한계와 취약점을 지적합니다. 사태의 변천에 주인공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구경꾼으로 머물고 소외되는 건데, 그래서 이 병든 사회에 리얼리티 예능이 그처럼 판을 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발달 이전에는 으뜸되는 감각이 지금처럼 시각이 아니었고, 사람이 주체가 되어 직접 만져 보고 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이 바로 촉각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완성하는 사랑이란, 몸소 "하는" 형태라야 비로소 제값이 쳐 지는 셈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온갖 요상한 상업적 이미지로부터 자극만 받지 말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 보자는 게 저자의 제안입니다. 

300여년 전 동프로이센의 철학자 칸트를 보면 어쩌면 한 인간이 이처럼이나 박학다식하고 철두철미한 탐구정신을 지녔을까 하는 감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올해는 칸트 탄생 300주년이 되는 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미성숙을 다룬 대목(p143)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한 인간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숙하다고 하면, 머리가 모자라다, 지성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지성이 설령 정상이라고 해도, 그 지성을 활용할 용기가 부족하면 역시 미성숙한 사람으로 머문다고 합니다. 대개 사람이 자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자신이 없고 말도안되는 망상에 사로잡히길 좋아한다면, 이 역시도 미성숙의 뚜렷한 증명이 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대체로 머리 역시도 모자라며, 그 아들 손자 대에도 그런 특성이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진실은 힘이 강합니다. 진실이 위대한 이유는, 별반 가공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통짜로 해결해 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아무리 불편하다 해도 그대로 진실을 까발겨버리면 그 복잡하던 문제가 저절로 해결책을 찾기도 합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너무도 솔직하게, 인간은 본래가 폭력적이며 존재 자체가 폭력(p180)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솔직합니까?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고 문제를 호도하기보다 이처럼 대놓고 솔직해지는 언명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삶의 조건 자체가 폭력인데 뭘 옳고 그름을 따집니까? 우리가 공기, 심장, 눈, 물에 대해 언제 찬반을 가린 적 있습니까?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이 동물과는 다른 탓에, 어떻게 해야 그 행사하는 폭력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으로 순화되고 공리적일 수 있을지 고민할 뿐입니다. 

결단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라는 행위로 그 논의의 출발점을 잡았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나 외에 모두를 적으로 삼으려는 본능(p303)을 가졌습니다. 이러니 정치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근거없이 특정 지역을 폄하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내밀한 믿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규정(헤겔은 규정에 대해, 부정의 부정이라고 말한 바 있죠)하길,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연속"이라 했습니다. 적을 없애버리는 근원적 방법 중 하나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자발적 고립이라는 역설을 통해, 대체 개인을 둘러싼 조직, 사회,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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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데트의 노래
프란츠 베르펠 지음, 이효상.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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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20세기 초, 로마 가톨릭에서 공인한 기적 두 건이 특히 유명한데 각각 루르드의 성모, 파티마의 성모라고 부릅니다. 이 중 전자를 소재로 삼아 20세기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델이 장편으로 만든 게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간 이런 작품이 있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이번에 파람북 출판사에서 꼼꼼하게 번역하여 이렇게 두꺼운 완역본으로 재단장하여 내었습니다. 이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는 1960년대 내내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병상 원고가 초역이고, 그 아드님인 이문희 대주교가 중간에 다듬었으며 또 이선화씨가 이번에 참여한 결과물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가진 독자라면 그간 영성 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걸 봤을 것이고, 이 완역본으로 더욱 신앙을 다질 만합니다. 실화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다면 권말 p676에 등장인물 소개가 있으므로 먼저 읽고 나서 소설을 탐독해도 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성모의 현현이 지체 높은 자, 신학적 지식에 밝은 자, 권세 높은 자 앞에서 이뤄지지 않고 저 두 건에서처럼 가장 초라하고 힘없는 이에게 이뤄졌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있던 소녀 베르나데트(p140), 그녀의 가족이라고 해도 무지몽매한 탓에 이 소녀가 참된 메세지를 전하려 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애를 때려서 제정신을 들게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이웃이 말리지만 그들 역시 이 부모가 "신앙심이 깊고 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압니다. 그런데도 애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걸로 오인하여 매를 들어 고치려 들었으니 정말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일은 전체 공동체가 나서서 바로잡거나 수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에는 제국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예를 들면 p198 같은 곳입니다. 검사, 판사 등 국가의 법질서 유지 직무에 종사하는 이들 직함 앞에 주로 붙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실제로는 다른 혈통이라고 합니다)가 노련한 포퓰리즘 술책으로 정권을 잡은 후 스스로 황제를 칭했는데(이 소설에도 잠시 나옵니다), 국민투표를 거쳐 국체를 바꾸었으므로 이처럼 프랑스가 제국으로 통합니다. 물론 이후에 공화국으로 다시 바뀐 후에도 북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에 식민지를 유지했으므로 제국주의 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시장, 검사장, 본당 신부 등이 모여 부랑자나 질서 교란자는 그저 태형으로 길들이는 게 최상이라는 둥 그 시대상을 반영한 언사를 주고받습니다만, 이 사람들도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뭔가 사정이 다르다는 걸 잘 압니다. 또 이때는 영국, 미국, 프랑스 모두 2차 산업혁명을 겪으며 곳곳에 철도가 놓이는 등 격변의 시기를 건너갈 때입니다. 

"아니, 샘이 솟는 게 무슨 기적입니까? 샘은 그냥 땅을 파면 생길 수 있어요!" p289에서 클라랑스가 앙투안의 말을 가로채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만 속으로는 이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 싶습니다. 샘을 파는 인부들도 소녀 수비루의 위엄, 권위 같은 게 은연중에 느껴져 그 말을 따랐던 것 아니겠습니까. 4복음서에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종의 authority 같은 게 그 언행에서 풍겼다는 기술이 자주 나옵니다. 1분에 최소 100리터가 나온다는 기적의 샘물. 아마 이때쯤이면 프랑스 전역에 미터법도 널리 보급될 무렵이겠는데 혁명과 함께 전파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여파가 이런 데서도 드러납니다. 

p388을 보면 현장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기를 쓰던 당글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통제불능 상황으로 가는 중이라고 힘들게 루르드의 고위 인사들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는 속이 시커먼 은행장이었죠. 검사장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용기는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하는 오락이죠." 이 사람은 진정한 용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가 상황 앞에서 튀어 보이기 위해 부리는 일종의 쇼맨십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여기 루르드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하찮은 속물로 보인다는 뜻이죠.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로 등극하고 반대파를 억압했습니다만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랑스의 정치 풍토에서 그의 집권 기반이 내내 탄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루르드의 소녀 베르나데트가 일으킨 파장이 자칫하면 제정(帝政)의 기초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황후 외제니까지 막후에서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아랑곳않고 페라말 신부에게 말합니다. "작은 쥐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에요.(p518)" 소녀의 심지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확고한 믿음 덕입니다. 

의외로 스케일도 크고 당대 사회상이 리얼하게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도 소설적 재미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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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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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 속에 오로지 긍정적인 감정만 가득할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의 행적을 보면 악인들의 몹쓸 짓을 보았을 때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곤 했습니다. 하물며 평범한 우리들이 언제나 차분하고 행복한 느낌만으로 우리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시기, 질투, 분노는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무엇인가를 행하는데, 저자는 이런 감정들도 일정한 기능이 있으므로 무조건 억누를 수만은 없고, 오히려 그 긍정적인 의의를 잘 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감정도 무시할 건 아니라는 정도의 소극적인 주장이 아니고, 이런 감정을 적극적으로 살려 내 인생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라는 적극적인 취지입니다. 

(*몽실북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고대 로마의 귀족, 학자 들 중 중요한 비중을 지닌 일단의 인사들이 신봉했던 철학의 한 지류가 스토아 학파이며, 황제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이 철학에 기여도 하고 깊이 심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p47을 보면 성공한 CEO 등이 요즘 부쩍 강조하는 게 "신 스토아주의"라고 하는데, 원래 기업가들이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기질이 진취적입니다. 진취적인 기질이야 남들이 따라하고 싶은 장점이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치면 목표 달성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이들이 주장하는 신 스토아 주의는 그런 저돌적이고 성급한 마음을 잠시 진정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이크로팁을 담습니다. 고전 스토아주의는 프뉴마라는 "창조의 불"이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원리라 믿었는데, 사람은 무엇이 이 세상을 관통하는 질서인지 깊은 사색을 통해 깨닫고 그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종류의, 마치 성인과 같은 감정통제형 삶의 방식이, 과연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성격의 목표인지에도 의문을 품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우리를 격동하게 만드는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성숙하고 초연하며 인생에 달관한 경지에 이르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정도나 되어야 가능할지도 모르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소통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그만큼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양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나의 감정을, 설령 그것이 질투, 시기 같은 한심한 감정이라고 해도 이를 일단 긍정하고, 그 자원의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살리자고 독자들에게 제안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 벌레가 꼬인다면, 이를 독한 살충제를 써서 없앨 게 아니라(없어질지도 의문이지만) 그 벌레라는 걸 제 구실을 하게 잘 살려 오히려 꽃가루를 널리 퍼뜨리는 용도로 잘 써 볼 수는 없겠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부정적인 감정을 이처럼 실용적으로 잘 길들인다는 게 말처럼 쉬울까? 일단 질투, 시기, 분노 등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나의 상태부터가 엉망이 됩니다. 오염, 비참화, 잠식(p89) 등이 아마 으리가 이런 감정들에 대해 들어온 부정적인 효과이겠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도, 이런 감정이 내 안에 생기면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고 자제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니체의 경우 그의 여동생이 열렬한 반유대주의자, 민족주의자였으므로 사후에 그의 여동생에 의해 내용이 많이 왜곡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p118). 그의 사상 핵심은, 지나치게 이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려 들면 결국 정신에 병이 들어 남도 나 자신도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내 자아를 올바로 작동하게 하려면 부정적인 감정을 정당화(p132)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엄청난 에너지를 좋은 쪽으로 활용하려는 선택입니다. 

영어에는 green with jealousy라는 표현이 있는데 질투라는 감정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 책 p177에도 그 표현을 이용하여 작가가 재미있는 말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시기는 또 어떻습니까? 남과 나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남과 비교해서 부정적인 내 자신을 낫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면, 또 이를 실천에 잘 옮긴다면 오히려 나의 발전을 자극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죠. p197에는 쌤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우리말 쌤통도 물론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독일어의 Schadenfreude를 옮긴 것이라고 본문 내 역주에 나옵니다. 저도 대략 십 년 전에 어느 독일 저자가 쓴 자계서에서 이에 대한 긴 논의를 읽은 적 있습니다. 요는, 이 Schadenfreude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하면 폭발적인 동기부여로 전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정만이 내게 선물할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원을 나의 도약, 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그냥 느껴라. 감정은 감정의 독자적인 삶을 산다는 점을 잊지 말라(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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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빌딩 찐부자의 생존 비법 - '평범한 직장인에서 당당한 건물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부자를 만드는 '부동산 투자'의 힘
다크호스 조태호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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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태호 대표님(다크호스. 줄여서 닥호)의 이력을 보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근로소득만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청년들에게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을 13년 동안 다니셨지만 부동산 투자, 임대사업을 통해서 현재의 풍요로움에 이른 그 과정을 보면, 요즘 왜 다들 해외주식이나 코인에 몰두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투자는 직장인들에게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데, 그렇다고 사행심으로 무턱대고 아무거나 대세라며 몰려다닐 수도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7을 보면 엘지, 삼성 등 친구들도 다들 어엿한 대기업 좋은 부서에 근무하는 분들이고 직장에서 능력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퇴직 후 고기집 등 자영업에 도전했다가 몇 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는 예가 나오는데 이런 일이 비단 이분한테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버티다버티다 안 되어서 폐업신고를 세무서에 하러가는 사장님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래서 뭘 하든 간에,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대표님은 투자도 투자지만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교육도 하는 등 우리가 종래 알던 그런 사업자 유형이 아닙니다. 요즘은 남보다 앞서가려면 이렇게 방송인(?), 컨텐츠 제작자 노릇도 겸하는 등 팔방미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며 과거 농경사회, 산업화 시절처럼 나라에 사람만 많다고 그게 다 인적자원이 되는 게 아니고, 그래서 한국도 지금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겁니다. 더 이상 많은 사람이 살 필요가 없는 경제 구조로 이행하는 중이며, 이전의 인구 구조만 바라보던 자영업이 그래서 다들 죽어나가는 거죠. 이런 사회에서는 하나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p72를 보면 학생 시절부터 친구였던 분과 함께 일을 하시던 이야기가 있는데, 제가 독자로서 냉정하게 읽어 보면 이분이 일을 잘 못하시고(대표님 관점에서), 그래서 야 친구야, 더 이상 의 상하기 전에 이 일을 니가 알아서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둘러서 권하는 겁니다. 마음아프지만 현실이 이런데 어쩔 수가 없죠. 그런데 사람은 또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마인드셋이건 실력이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괜찮은 투자안을 발견하여 열심히 브리핑하는 친구분을 보며 대표님은 또 생각이 바뀝니다. 세상 이치가 다 이렇습니다. 

임대사업자는 또하나의 적폐세력인가?(p81) 자본주의가 뭐가 좋냐면, 어떤 업종이 위기일 때 아 난 이거 도저히 못들고 있겠다 싶은 사람은 다 나가고, 적성이든 실력이든 뭐든 나는 이걸 유지하겠다 싶은 사람이 끝까지 버티다가, 그 사람만 망하든지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다시 업황이 살아나든지 해서 체제가 생명을 이어가는 거죠. 사회주의는 모든 걸 국가가 결정하기 때문에 관료가 정책을 잘못 입안, 집행하면 나라 전체가 절단나는 건데, 구 소련이 그랬고 지금 중국이 고생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다만 중국은 완전한 관제(官制)가 아니기 때문에(=민간이 어느 정도 위험을 분담하기 때문에) 소련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 건데, 여튼 저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시장에 주택 공급이 문제될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몸테크(p118)라는 말이 있는데 앞으로 재개발이 예정된 요지의 구축 아파트에 실거주하면서 승인이 떨어지는 그날만 기다리는 투자(?)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에서 대구 동구로 이사 간 친구분에게 저자가 하는 말을 보면 직장인 중 공감가는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요약하면 모두가 선망하는 그런 좋은 아파트, 갖출 것을 다 갖추고 내가 잡은 그 시점부터 죽 우상향하는 그런 아파트는 지금 그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없어서 머뭇거리는 것뿐인데 온갖 합리화를 해 대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게 고작이라는 거고, 가슴아프긴 해도 이게 저 친구분 같은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처한 현실이란 거죠. "넌 내 유튜브를 안 봐서 그래!" 

"때로는 머리보다 손발이 빠른 사람들이 더 성공하기도 합니다.(p251)" 역시 보는 안목이 있는 분이라서, 사정상 급매(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내놓은 좋은 물건을 그대로 매입해서 지금껏 잘 키우고 자녀분들도 13살, 9살이 되었다고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기운을 받아야 사업운이 트이고 장사가 번창한다고 하는데, 세상사가 운으로만 잘 풀리거나 하진 않습니다. 매순간 공부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정보를 쌓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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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도정치 - 과연 한국정치에서 제3의 길은 가능할까? 홍성민 교수의 알기 쉬운 정치철학 강의 3
홍성민 지음 / 인간사랑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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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로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오신 홍성민 박사님(파리 제10대학)의 새 책입니다. 종래 홍알정 시리즈가 두 권까지 나왔었고 저도 모두 리뷰를 올렸었습니다. 이번 셋째 권의 주제는 "유럽의 중도정치"입니다. 

미국이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대체 중도를 걷는(혹은 그렇게 주장하는) 정치인, 정치세력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여튼 중도 비슷한 걸 처음에 표방했던 마크롱도 12월 초에 행정부 붕괴를 겪었습니다. 프랑스의 내각 붕괴는 그들의 제5공화국 출범 후 처음 겪는 사건인데, 프랑스의 유서 깊은 민주주의가 이제 본격적인 도전에 직면한 시점이라 하겠습니다. 20여년 전 영국의 토니 블레어(p102. 단 이 책에서는 30년 전인 1994년 그가 노동당 당권을 잡았을 때를 먼저 회고합니다)는 노동당 소속이면서도 제3의 길을 표방했었는데 당시로서는 큰 환영을 받았으나 지금 블레어의 후계를 자청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없습니다. 책에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제가 읽기로는 그런 취지로 봐도 무방하지 싶습니다. 

아무래도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어떤 천재의 아들이었고 본인도 천재였던 J S 밀의 <자유론>에 크게 빚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도 1부의 2장에서 그의 <자유론>, <사회주의론>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사회주의라고 하면 21세기의 독자들이 느끼는 바가 크게 다를 수 있는데 밀이 이 책을 쓴 건 1859년, 칼 마르크스가 <자본(Das Kapital)>을 쓴 것보다 8년이나 앞선 시점이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인류사 최초의 그 실험이 행해진 것보다 반 세기를 훌쩍 넘는다는 점도 먼저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심지어 진 웹스터의 청소년용 고전 소설 <키다리 아저씨>에도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정확한 의미를 따질 수 없습니다. 

p71을 보면 교수님께서 각주 60번을 통해 "이명박 정부에서도 거대 기업의 이윤공유제를 주장한 관료가 있었으나 반대가 많아 시행되지 못했다"고 하신 대목이 있는데 독자인 제가 알기로는 이 비슷한 일(정확히 뭘 염두에 두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이라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그 정부에서 동반성장위원장 자격(그 직전에 국무총리 역임)으로 그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그것도 노동자가 기업의 이윤을 공유한다기보다 중소협력업체와 대기업이 나눈다는 취지였죠. 정운찬 총장보다 7년 연하인, 고대 농경제학과를 나온 사업가 출신 정운천씨가 있는데 이분은 이명박 정부에서 농림장관을 지냈고 나중에(2016년) 새누리당 공천으로 전북 전주시 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 있는 인사입니다. 

p99 이하에 앤서니 기든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재미있게 읽었으며, 애초에 제3의 길이라는 말도 이 양반이 코인한 용어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특히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공저한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가 자주 인용됩니다. 고 김수행 교수님은 한국에서 최초로 마르크스 원전(독어판 말고 영문판. 마르크스는 영국에도 망명차 오래 체류했죠)을 옮긴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는 국민정치파라고 옮겨지는 mass politics(김수행 교수 번역에서 그대로 가져왔다고 박사님이 각주에서 밝힙니다)는, 노동당(영국)이라고 해도 널리 국민 대중을 바라보고 정치해야 한다던 팩션이었으며 이 후계자들이라면 지금도 노동당에 있습니다. 아니, 당장 현 수상인 키어 스타머만 해도 노동당 안에서 구 블레어 노선과 유사하며 그렇게 해서 올해 7월의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죠. 

2부에서는 독일의 중도정치가 역사적으로 고찰됩니다. 페르디난트 라살레(이 책의 표기를 따르겠습니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여러모로 특이하긴 하죠. 책에서는 현장 노동자 출신이라고 하는데 라살레는 집안이 부유해서 대학 교육도 받았고 나중에 마르크스 등에게도 후원까지 해 준 적 있습니다. 다만 워낙 기인이었던 그가 노동일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p115에 나오는 독일 사회주의 사상 계보도가 매우 재미있게 정리되어 눈길을 끕니다. 라살레의 포지션을 보통 국가사회주의라고 하는데 이 명칭을 20세기의 나치당이 그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p122를 보면 <노동자 강령>에서 그가 농민들의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반동이라고 타매하는 대목이 인용되는데 유럽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농민에 대한 불신이라는 게 이처럼 역사가 유구합니다. 이러니 나중에 마오가 스탈린, 흐루시초프한테 사람 취급을 못 받았죠. 20세기 말 기민당 콜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잠시 정권을 잡았던 사민당의 슈뢰더(한국인 부인을 맞은 일로도 유명합니다)의 노선도 설명됩니다. 

3부에서 프랑스 중도노선의 역사가 설명되는데 우리에게는 <자살론>으로 유명한 뒤르카임(이 책의 표기를 따르겠습니다)의 이른바 "연대주의"에 대한 조망이 이 책에서 아주 뭐 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입장을 이해해야, 한때 인기가 좋았던 마크롱의 앙마르슈 당 노선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는데, 제가 생각할 때 특히 p235의 이민법 같은 건 좌우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국익이 도모될 만한 정책(서평자인 제 생각일 뿐이며 저자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인 듯한데 좌우 양쪽으로부터 십자 포화를 맞았고 그의 정권이 이렇게 몰락해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부에서는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이분도 김수행 교수 라인입니다)의 연구가 인용되며 이분은 원래 미국에서 토지 공유를 주장했던 헨리 조지 전공입니다. 이분이 한국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장관을 지냈고 나중에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했던 죽산 조봉암 사상 사이의 연관을 다루었습니다. 귀속재산처리와 농지개혁은 한국 현대사를 바꿔 놓은 중대 정책 수립, 집행이었는데 이 의의를 짚은 박명림 고대 교수(한국전 성격 파악에 있어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중요 연구자이기도 합니다)의 주장도 자주 인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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