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무늬 - 청소년 디카시집
박예분 지음 / 책고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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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는 요즘 폰카가 성능이 너무 좋아지다 보니 거의 유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미러리스라든가 하는 하이엔드 품목은 예외입니다만 그런 걸 어린 학생들이 갖기는 쉽지 않죠. 이 시집은 아동문학가이신 박예분 선생이 쓴 작품집인데, 아이처럼 순수한 동심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 사실 디카라는 것도 이걸 혹 가진 분들이 있다면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분들일 텐데, 심플하고 과감한 구도로 촬영한 여러 컷들이 함께 실려서 동시 작품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8에는 <저공비행>이라는 작품이 나오는데 이 멋진 사진을 보면 이 책의 메인이 시인지, 아니면 사진인지가 헷갈릴 정도입니다. 하긴 종이를 자르는 게 가위의 윗날 아랫날 중 어느 편인지 구태여 가릴 필요는 없겠죠. 아무튼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활강하는 갈매기와, (사실은 제법 거리를 두었겠으나 광각상 가까워 보이는) 갈매기를 가리키는 팔뚝이 서로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 사진과 함께 게시된 시도 기가 막히는데, 시에는 갈매기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내 근처를 나는(=비행하는) 심장 폭격기"라는 묵직하고 짧은 구절이 독자에게 충격을 줍니다. 이 컷을 정말 한 마디로 압축하는 시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p94에는 정말 웃음이 안 나올 수 없는 작품 <초상권>이 있습니다. "내 사진 함부로 쓰지 마시고 박예분 시인의 디카시(詩)에만 올리세요"라는 구절을 보며 빵터졌는데, 이 사진 작품을 보면 정말로 오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뭔가 사람들을 향해 심각한 당부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시인의 텍스트 작품이 미리 자리를 잡아서 그리 선입견이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튼 사진 작품과 시가 기가막히게 들어맞는 분위기라서 참 절묘한 포착이다 싶었습니다. 하긴 오리도 감정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데 자기 얼굴이 아무데나 돌아다닌다면, 또 허락을 받은 작가분 외에 다른 이가 함부로 쓴다면 거 어디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는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 재방송을 어쩌다 주말에 볼라치면, 입양한 아이를 두고 "가슴으로 낳았다"는 표현이 그 대사에 포함된 걸 가끔 듣습니다.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니라도 가슴으로 낳았다는 말이 왠지 찡한데, p119를 보면 시인도 고목나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바로 애기똥풀이라고 하십니다. 수종이 다르니 얘들 사이가 부모자식이 될 수야 없죠. 그러나 지척에 두고 양분을 나눠 가졌으니 뭐 양부모라 못 부를 것도 없는 사이입니다. 또 여기서 제가 묘하게 본 부분도, 애기똥풀이 정말 멀리서 보면 하늘하늘 날개짓하는 나비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광화문 아니라 전국 어디에나 있지 싶습니다. 그만큼 한국인에게는 보편적으로 숭배되는 성웅(聖雄)인데, 아마 차고 계신 그 칼을 칼집에서 뽑으신 적은 없기에(동상이니까) 녹이 슬어서 실제로는 잘 들지 않으리라는 시인의 말은 타당합니다. 그런데 이 동상이 굽어보는, 뛰어노는 아이들(대체로는 초등학교 운동장 소재이겠으므로)과 함께 이 풍경이 평화의 상징이라는 말까지 덧붙었습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도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하라고 했으니 이 말은 여러 이유에서 합당합니다. 

p212에는 <엄마는 고민 중>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생선 두 두름이 소쿠리에 나누어 담겼는데, 이 사진이 엄마의 고민과 무슨 상관일까. 그런에 다음 페이지네 나오는 "고사리 넣고 지질까, 튀길까, 찜 할까."라는 구절을 보고 아 그렇겠구나 싶었네요. 엄마한테는 덩치는 작아도 싱싱한 이 물고기들이 과연 어떤 요리로 쓰여야 제맛일지, 또 식구들에게 최상의 대접이 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죠! 예술가의 탁월한 안목부터, 가정주부의 가장 소박한 고민까지 두루 압축된 멋진 시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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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시선
이재성 지음 / 성안당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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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시인은 2005년생이니 이 시집을 출간한 작년에 열아홉살이었습니다. 그는 고3때까지 야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재작년부터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를 발표하며 사람들(=독자들)과 소통했다고 하니 우리가 SNS를 마냥 나쁘게 볼 것도 아닙니다. 소셜미디어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런 유망한 시인을 미처 만나지 못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성안당(보통 자격증 교재 만드는 곳으로 알았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 시인과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했지만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물이란 분자는 사물의 색을 더 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시인은 p34의 <비>에서 자연은, 혹은 모든 물체들은 비를 피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도 비 때문에 몸 혹은 마음이 아플 수 있지만, 내 타고난 빛깔이비로 인해 더 선명해진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서 제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비를 맞았을 때 그 맞는 입장에서 "아플" 수 있다는 그 상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밖에서 비가 후두둑 떨어지면 피하기 바쁩니다. 당연히 옷이라든가 머리, 혹은 휴대한 물건이 젖을까봐인데, 시인은 그것도 다 비 맞는 게 아파서라고 해석하는 거죠. 그러나 자연도 사물도 의연히 맞으며 상처를 낫우려 들듯, 사람도 비를 구태여 피하지 말고 그냥 맞으면서 내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시인은 (나이도 어리면서)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해외 대도시에 놀러가면 우리는 미술관에 꼭 들러서 사진도 찍고 인스타에 올리려고 아주 발버둥을 칩니다. 그런데 p40의 <미술관>이란 작품에서, 시인은 바로 우리 근처에 미술관이 있다고 합니다. 입장료도 없고 전시품도 더 그럴싸한데 우리는 근처에 그게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칩니다. 그건 바로 하늘입니다. 이 미술관은 전시품도 매일매일 바뀝니다(눈이 어두워서 그게 바뀌는 줄 모를 뿐). 미술관은 휴무일이라는 게 있으나 하늘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늘을 미술관으로 바로 볼 줄 아는 그 맑은 눈이 어린 나이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게 부럽습니다. 

수평선이 하나의 프레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p50의 <수평선>을 보면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바다, 하얀 구름 아래 하얀 갈매기, 노란 태양 아래 노란 등불처럼, 수평선을 대칭축 삼아 양편에 비슷한 빛깔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이치를, 시인은 "화가가 그림을 너무 크게 그려 수평선으로 나누어 놓았다"고 설명합니다. 너무 큰 그림은 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지 않습니까. 바로 맞은편 페이지에는 출퇴근도 일정한, 피곤해서 흐느적거리는 노을에 대해 안쓰러움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시인의 가장 큰 재주는 바로 그 보는 시선의 독창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라는 공간은 진공이 아니고 중간에 매질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열(熱)의 전도 현상이라는 게 벌어지는데 시인은 p60의 <늦가을의 너>에서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덩달아 자신에게 차가워진 "너"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공기가 차가워진 건 알겠는데 왜 너까지 차가워지냐는 겁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냐고 하는데, 본래 차가워진 공기는 사람한테서도 열기를 뺏어가게 마련이니 당연하게 여기...라는 건 아주 무책임한 조언이겠죠.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따스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시인도 알고 우리도 다 압니다. p61의 <시의 계절>에서 시인은 솔로(그래서 헤어졌나 보죠?)인 신세를 가볍게 탄식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는 누구나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p86의 <신체검사>에서 시인은 신검 결과가 1급이라면서(야구 선수 출신인데 오죽할까요?) 마치 투쁠 등급을 받은 한우가 이렇지 않겠냐는 말에 빵터졌습니다. 그 솔직한 느낌 표현에 대한민국 모든 남성들이 공감할 수 있겠는데, 이처럼 이 시집은 나이 어린 시인의 꾸밈없고 기교없는 작품들 때문에 독자의 마음까지 뿌듯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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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2010년대편 1 - 증오와 혐오의 시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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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전북대 신방과 교수로 재직하셨으며 당대에 큰 논란이 될 만한 이슈를 과감히 제기하여 언제나 담론의 중심에 서 있었고, 현재는 명예교수직인 강준만 박사님의 새 책입니다. 이 제1권은 2010년, 2011년을 각각 다룬 1부, 2부로 구성되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2010년대는 다섯 권의 책들이 더 나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근간예정도서들의 목차가 이 책에 마치 예고편처럼 실려 있기도 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2010년에는 유시민씨가 국민참여당이란 당을 만들었다고 p78에 나옵니다. 이런 책에서 상기시켜 주지않으면 이제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한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유시민씨는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많은 노선과 불일치하는 행보를 자주 보여서 주류에 의해 이단시되던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지난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말입니다. 이 챕터의 말미에,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홍세화씨가 "절독을 하려면 조용히 하면 되지, 구태여 선언을 해 가며 해야 했나?"며 일침을 놓은 발언이 실렸습니다. 홍세화씨는 작년(2024) 4월에 타계했습니다. 

이무렵에는 이명박 정부가 서서히 임기말에 달하며 권력 누수 현상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참모였던 권재진씨를 법무장관에 임명하려 하자 야권에서 많은 반발을 표시했습니다. 정부는, 특히 법무행정과 검찰권 감독을 맡은 부서는 청와대로부터 독립된 인사가 그 장을 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이런 책을 통해 되짚지 않으면 전혀 생각조차 안 날 듯한데, 강준만 교수가 마치 실록처럼 상기시켜 줘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재미있게, 또 의미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p226에서 저자는 물리적 인의 장막과 심리적 인의 장막을 지적합니다. 전자는 이른바 문고리권력 실세 집단으로 우리가 아는 것이며, 후자는 특정 정치인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팬덤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후자에 대해서 저자는 특히 "사모(思慕) 집단"이라고 규정하는데 책에서 박근혜씨를 지지하던 약칭 박사모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듭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정치인은 팬덤이 아니라 항상 보편적인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런 인의 장막이 그를 막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정치인에게 해롭고 국가를 위해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고 저자는 소결론을 냅니다.   

p248을 보면 2011년 4월 27일에 (봉하마을이 소재한) 김해을 선거구에서 보궐선거가 있었나 봅니다. (거듭되는 말입니다만) 이런 사실은 책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기억에서 까맣게 잊혀진 사건들이라서 새삼 지난 역사의 의미에 대해 반추도 하게 됩니다. 당시 유시민씨는 여전히 국민참여당을 유지하며 자당의 후보 이봉수씨를 민주당과의 협상을 통해 단일후보로 내세웠으나 선거에서는 패배합니다. 이때 원래 민주당에서는 김경수(나중에 경남지사를 지내는 바로 그 인물)씨가 나올 예정이었다고 하네요. 또 강금원씨가 유시민씨에 대해 그는 친노가 아니라며 강하게 비판했던 사실도 적혔습니다. 그리고 이 챕터에는 문재인 비서실장, 탁현민 공연기획자 등 진보 진영의 다음 시기를 이끌어갈 중요인물들이 슬슬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원래 2007년 즈음에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내부가 아니라 재야단체(지금 명칭으로 시민사회단체)에서 대부처럼 활약한 박원순 변호사를 차기 대선 후보로 모셔오면 어떻겠냐고 한 적 이 있습니다. 그런데 박 변호사가 한사코 고사했죠. 그때만 해도 박원순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반 시민들사이에서는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1년 이 시점에서는 분열만 거듭하는 민주당에 대해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여, 박원순 등 외부 인사를 영입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이때 안랩이라는 벤처 기업의 성공으로 크게 주목받았던 안철수씨가 갑자기 인기가 높아져서 단번에 서울시장 보선 후보로 떠올랐는데, 결국 박영선(민주당 내 인사. 방송인 출신), 박원순 등과 단일화를 거쳐 박 변호사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p334에 나오듯이 이때는 토마 피케티라는 프랑스의 경제학자가 제기한 불평등 아젠다가 크게 주목받았는데, 저자는 동물학자 리처드 코니프의 말도 인용하며 무슨 이유로 빈자들이 부자를 찬양하고 고마워하는지를 두고 호되게 비판합니다. 또 저자의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종편 허가, CJ E&M 등의 창립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어 서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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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운다
안영실 지음 / 문이당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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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실 작가의 단편 여덟 작품이 실렸습니다.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다!" 서문에 나오는 작가님의 말인데, 아니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아니고, 소설이 이야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같은 서문 안에 안영실 작가 본인이, 답 아닌 것 같으면서도 답인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떠도는 존재다."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입니까? 하지만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보다 더 적실한 설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한국 소설에는 왜 이렇게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떠도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역마살이라는 이름으로 좋게 포장하곤 하죠. 이게 여자 입장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게 더 기가 찹니다. 든 정이 있어서(p22l 차마 사람을 미워하지는 못하겠고 그저 사주팔자에 무슨 마가 껴 저러는 거겠거니 합리화를 하는 심리인데, 아무튼 이게 지난시대 어른들이 세상사를 이해하던 한 방식이었습니다. <만전춘별사>까지 그 유래를 거슬러올라갈 수 있네요(그보다 훨씬 전이겠지만). 그리고 아일랜드의 봄, 갓 구운 스콘에까지 심상이 옮아옵니다. 극과 극의 전환이며, 에밀리를 위한 왈츠(?)를 말로 표정으로 연주하는 "그"와 함께 금지, 아니 지금의 밤이 깊어갑니다. 원심력은 그저 겉보기로 구색을 맞춘, 힘의 평형을 이루는 장식에불과하니 결국은 이 왈츠가 돌림노래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비지땀의 뜻을, 비지를 먹으면서 흘리는 땀이라고 의도적으로 제시한 오답 선지를 읽으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물론 문제은행의 그 출제자는 사람들더러 웃으라고 그런 선지를 고안한 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진지하고 심각한 학력평가에 그런 문장이 나오니 웃음보가 터질 수밖에 없었겠는데... p58(<늑대가 운다> 中)을 보면 비지는 날콩을 갈아넣어야 제맛이 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요즘 K푸드가 세계를 휩쓰는 세상이라지만 날콩과 익힌 콩의 그 미묘한 차이를 외국인들이 비지(혹시 이걸 먹는다면)에서 알아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비지는 그 비릿한 맛 때문에 한국인도 잘 못 먹는 이들이 많죠. 

지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외교 방침(한때 기업 화웨이의 영업전략이기도 한)을 전랑의 그것이라 불렀는데, 이런 걸 보면 그들의 유전자 안에 몽골인의 그것이 적잖이 들어갔나 봅니다. p61에 보면 몽골 전통의 연주 가락을 "흐미"라 부른다고 나오는데, 이게 그들이 좋아하는 늑대 울음소리와 닮았습니다. 개들의 하울링, 숙희(이 작품에서 개 이름입니다)의 울음... 사람들도 이에 익숙해지면 뭔가 속으로 감정이 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나 늑대나 그 깊은 본성은 닮은데가 있고 둘 다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니. "마니 녜드 이녜드(네 이름은 웃음이란다)." 

"늙음은 미(美)가 아니라 추(醜)다." 이건 죽은 움베르토 에코 같은 사람한테 물어 보면 책 두 권으로 답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 <매미>에서 화자는 한자를 파자(破字)하며 그 깊은 뜻을 파고들려 합니다. 술 유(酉)에 귀신 신(神)이 붙은 글자라는 건데, 그럼 모습이 보기 싫어지는 건가요? 여튼 상관없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화자가 "미만 따지는 시상(세상)이 덜 되야먹은 겨!"라고 바로 일갈하시니 말입니다. 경(經)을 읽으면 절로 눈물이 난다...(p84) 전 도저히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개수대도 깨끗하고 젊은 양반 기억도 싹 사라진 치매의 부작용, 아니 특효까지도 말입니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p105(<여자가 짓는 집> 中)에 인용되는 카를로 로벨리의 책 제목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확실히 그 눈에 콩깍지가 씌는지 엄마 눈에는 딸 인생 망칠 작자(J라는 분)라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이 사위라는 자는 학벌이 아깝고 인물이 아까운데(그 장모님의 평가입니다)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합니다. J가 멋진 양복을 입고 첫출근을 하던 날 전철에서 유도선수들에게 맞아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같은 회사 직원들이 손쓸새 없이 그런 일이 터졌겠다고 짐작은 되지만, 전 솔직히 요즘도 대기업에서 직원들에게 그런 걸 일부러 시키는지 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설정상 요즘 일은 아닙니다). 약은 인간은 전철에서 설령 시비가 붙어도 상대 약만 올려놓고 적정 단계에서 빠져나오는데 J는 고수한테 아직 배울 게 많은 듯합니다. 아, 아무튼 지금 숨이 가뿐 건 내가 아니고, 이 수치스러운 감정도 내가 아니며 나는 어딘가에 상처없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그 여성분의 생각, 너무 슬픕니다. 

냉장고 정리를 평소에 잘 해둬야 합니다. 안 그러면 p218(<바람벽에 흰 당나귀> 中)에서처럼 가뜩이나 내성발톱으로 아픈 발가락을 더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죠. 전 가끔 소설가분들이 마치 AI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소설이라는 게 이런이런 효과를 노리고 치밀하게 설계된 소산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꺼내시는 중 기막히게 떠오른 온갖 이미지와 주제가 희한한 조화를 이루며 작품 하나가 만들어지니 말입니다. 내성발톱 이야기가 나왔다고 진짜 작가분이 내성발톱으로 고생하는 건 아닐건데, 또 물리학 전공하고 졸업 후 재벌사에 입사한 남친이 정말 있었던 것도 아닐텐데 이야기가 이렇게 신기하게 잘 이어지니 말입니다. 아무튼 <갈릴레이 갈릴레오(순서가 바뀐 건 이유가 있습니다)>에서 희수와 함께 망원경을 들고 다니는 J는 앞의 그사람과는 또다른 인물이겠습니다. 옷 벗은 마야(p167)가 사실 진짜 아름다운 데가 어딘지 정확히 아는 그는 망원경도 필요 없는 인물이며, 유도선수들에게 맞은 곳도 이제 멀쩡히 다 나았으리라 믿습니다(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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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장 - 365 에세이 일력,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결심 (만년형, 스프링북)
오유선 지음 / 베이직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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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랩에 싸인 종이박스를 개봉하니 정말 예쁜 일력 한 권이 나옵니다. 요즘은 이렇게 탁상용으로 제작된 일력 형태의 출판물이 많이 나오는데 이게 일종의 굿즈도 되고 팬시상품도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한 권의 책이며 독자는 그 안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를 차분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일력들이 그렇듯이(아닌 것도 있습니다만) 날짜는 적혀 있지 않고, DAY 1, DAY 2 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를테면 DAY 5에는 데일 카네기의 말이 나오는데, 주제는 걱정 내려놓기입니다. 걱정해도 아무 소용 없는 문제로부터는 스스로를 좀 해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해야 마음의 평화가 생긴다는 건데, 사실 마음의 평화라는 것도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사치입니다. 하루하루의 과제를 열심히 해결해 나가는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걱정을 빨리 제거해야 자신의 당면과제에 집중할 여력이 생깁니다. 단, 걱정을 벗어나는 것과 현실을 도피하는 건 엄연히 다릅니다. 현실의 어려운 과제가 내게 도전해 오면 바로 맞서야 하며, 이를 피했다간 더 큰 위험과 손해가 닥칠 뿐입니다. 나를 위협하는 손톱만한 시도에도 죽기살기로, 목숨을 걸고 대항해야 문제가 일부라도 해결됩니다. 

데스몬드 투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회(앙글리칸) 주교였고 생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분입니다(3년 전 타계). 이분의 말이 DAY 54에 나오는데, 그 주제는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특별하게 되고 싶어하며, 평범한 자신에 끝없이 실망하고 자신을 비하합니다. 그러나 투투 주교는 "당신이 미처 느끼지 못할 뿐,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우리들에게 힘을 줍니다. 나의 장점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럿 있겠지만, 투투 주교는 메모지에다 그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죽 적어 보는 것을 그 중 하나로 꼽습니다. 

사람은 일도 해야 하고, 그 바쁜 일로부터 릴랙스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걸 20세기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일과 사랑의 균형"이라고 불렀고 그 내용이 DAY 85에 나옵니다. 그 표현이 재미있는데 "당신이 가능을 믿든, 불가능을 믿든, 당신이 딱 믿는 대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매사가 부정적인 사람은 그 말이 재수없어서라도, 될 일조차 안 되기 마련입니다. 이 페이지에는 심리학의 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말도 함께 실렸습니다.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감정, 지식은 이미 불구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DAY 123을 보면 마우드 V 프레스틴의 말이 소개됩니다. 이분 이름은 정확하게는 Maude V Preston인데 Sharing이라는 제목의 시(詩)에서 앞 연(聯)을 인용한 것입니다. There isn't much that I can do,
But I can share my bread with you, And I can share my joy with you, And sometimes share a sorrow too, As on our way we go.가 영어 원문입니다. 인생이란, 결코 혼자 걷는 길일 수 없고,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데서 온전한 형태가 완성됩니다. 

링컨도 생전에 그토록이나 많은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자신을 변함없이 지지한다고, 함께 가 줄 것이라고 믿었다면 아마 큰 힘을 얻었으리라는 저자의 말씀(DAY 151)이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링컨은 강철 같은 의지를 가졌던 인물이며 지지자도 많았으므로 그가 생전에 가던 길이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믿음이 곧 (그에게)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도 합니다. 

조르주 클레망소는 역 U자형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던, 20세기 초에 프랑스를 이끌었던 정치인입니다. 이분 말이 DAY 351에 나오는데, 이 장에는 데일 카네기의 말도 함께 실렸습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라. 돈은 나중에 따라온다." 글쎄 현실적인 필요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취미에만 몰입할 수 있는 특권은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부여되지 않겠습니다만 여튼 자신의 정직한 열정이 무엇인지 알 필요는 있겠습니다. 물론 그게 주제파악이 안 되는 환각, 자기기만이 되어서는 대단히 곤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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