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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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는 순자, 백이삭, 또 그의 부모(백이삭의 장인 장모) 등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졌더랬고, 이 2권에선 순자가 원래 배었던(?) 아기, 그 후에 백이삭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 그들이 장성해서 낳은 아이들이 커서 벌어지는 굴곡 많은 사연이 길게 이어집니다.

여러 대(代)의 굵직한 희비극이 교차하는 장편을 읽다 보면 핏줄의 기질과 업보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구나 같은 감회에 마음이 숙연해질 때가 많습니다. 대체로 이런 소설들은 전대(前代) 인물들이 뒤로 갈수록 비중이 급격히 적어지거나 아예 자취도 없이 퇴장하는 수가 많아서 아쉬웠는데, 이민진 변호사의 이 작품은 1권의 주요 인물들이 2궝에서도 계속 얼굴을 비추며 일관된 주제를 부각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백이삭은 1권에서 폐결핵을 앓았기에 얼마 못 살리라는 예상을 (작품 속의 인물들이든, 작품 밖의 우리 독자들이든) 다들 할 수 있었죠. 이 2권에서는 폐결핵이 아니라 그 외 다른 중병들(후유증이나 합병증일 수 있죠)을 계속 앓다가 중반부쯤에 가서 죽고 맙니다. 백이삭과 순자네 집은 가뜩이나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고 그 형 요셉네도 마찬가지였는데, 맏아들 노아는 공부를 꽤 잘 하는 아이였고 조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만으로 와세다 대 입학 자격을 따 냅니다. 이 집안에서야 당연 경사로 여길 만했습니다. 노아의 백부 요셉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한수에게 찾아가 후원을 부탁하려는 집안 의견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파친코를 운영하는 고로 사장의 호의를 구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지금이야 첫손을 다투는 명문이지만 와세다 대학은 사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 학생이 입학금이나 기타 기여를 할 재력 있는 집안 출신이면 넉넉히 받아 주었습니다(그래서 나이 좀 드신 분들은 와세다[조도전] 대학 알기를 좀 우습게 압니다). p111에서 "그토록 위대하고 전설적인" 같은 평판은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고로 사장은 그 앞에서 잠시 나왔었죠. 노아의 이부 동생인 모자수는 자기 형(이부형인지는 물론 몰랐겠으나)이 갓 대학에 입학할 무렵 벌써 사회에 한 발을 디뎌 돈깨나 버는 어린 매니저 노릇을 하고 다닙니다. 형이 공부에 대단한 적성을 지닌 것과 대조적으로, 동생은 뭘 외운다든가 계산을 꼼꼼히 해 내는 일과는 아주 담을 쌓았습니다. 그렇다고 바보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가며 구변이 매우 좋습니다. 옷도 잘 입고 덩치도 크고 힘도 꽤 쓰며 잘생긴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도 얻는 편이죠.

이 모자수를 고로 사장이 꽤 잘 본 겁니다. 고로 사장의 모친이 제주도 해녀 출신이라는 건 이 2권 전반부에서 암시됩니다. 그렇다고 반쯤 같은 조선인 혈통 때문에 모자수에게 끌렸냐 하면, 고로 사장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세상사 이치에 훤하고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자수가 풍기는 활력과 총기를 알아보고 이런 애를 종업원으로 매장에서 굴려야 장사가 잘 된다는 확신이 유일한 동기였을 뿐입니다. 녀석이 똑똑했기에 유리한 조건으로 써 준 것이지, 무슨 핍박 받는 조선인 처지가 불쌍했더거나 동병상련의 심경 같은 한가한 소리는 이 사람 앞에 씨알도 먹힐 리 없습니다. 1권에서 너무도 암담하고 절망적이며, 그 와중에서도 사람만 좋은 이들이 대거 등장해서 독자의 마음이 좀 어두워질만 했다면, 2권은 활력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일찌감치 성공적으로 도입한 일본 땅에서 악착 같은 몸부림으로 살아남고 적응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소설의 재미를 더합니다.

앞서 말했듯 모자수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고로 사장에게 고용된 것도 지아키라는 처녀(예쁘긴 하나 지나치게 남자들에게 꼬리를 치고 다니는, 그렇다고 딱히 처신이 아주 값싼 것도 아닌)를 돕다가 (가뜩이나 조선인이라고 차별 받고 감시의 대상이 되는 판에) 경찰 손에 입견될 뻔한 걸 그가 관여해 구해 준(지역 유지였으므로) 사건을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고로 사장의 매장에서도 모자수는 단연 여직원들에게 주목 받았는데, 모자수가 고른 건 유미라는 직원이었고, 둘이 잘 어울린다며 사장의 축복까지 받습니다. 안타깝게도 유미는 2권 중반부에서 (이 매력적인 여성에 대해 좀 길게 이야기가 이어질 줄 기대했으나) 교통사고로 죽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주 건강하고 영민한 아들 솔로몬은 혼자 살아남습니다. 미국 크로니클 타입 대중 소설에서 사실 자주 봐 오던 전개이고 다만 인물과 배경이 한국, 일본 등으로 바뀌어서 이색적으로 다가왔을 뿐 어딘가 좀 익숙한 진행이긴 합니다.

모자수의 이부 형 노아는 와세다 대학에 드디어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우리 독자들은 다 알지만 사업가 고한수가 저 순자를 현지처 삼아 희롱하다 낳은 아이죠. 학교에서 그는 오만하고 리버럴 기질 가득한 아키코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집니다. 아키코는 사실 학교에서도 제멋대로의 기질 때문에 교수에게 찍혔던 판인데, 앞으로 교수에게 잘 보여 학계 진출을 은근 염두에 두는 노아로서는 이런 학생을 가까이해서 유리할 게 없었습니다(정치적 고려). 출신 성분상 노아 같은 조선인에 친근감이나 연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 아키코의 화통한 처신에 반해, 노아는 장래 생각도 그만 놓아 버렸던 거죠. 이 과정을 한 챕터 정도로 처리하는데 조금 빠르다는 느낌도 들지만 역시 유사 장르에서 익히 보던 패턴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아키코에게, "난 니가 나쁜 조선인이 아니고 좋은 조선인이라 생각하며, 이런 멋진 조선인을 우리 엄마아빠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행운인 듯해."란 말, 또 "고한수란 사람은 사실 니 아빠 아냐? 너무 닮았던데. 그리고 우리 아빠도 못 버는 그런 엄청난 수입을 어떻게 올리니? 야쿠자겠지 아마." 란 말을 듣고 바로 그녀와 헤어집니다. "니네 생각대로, 우리 조선인들은 이처럼 한순간에 돌변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그 다음 서술이 충격적인데, "나쁜 조선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나쁜 조선인으로 본다는 말이나 같은 뜻으로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노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역시 똑똑하죠. 노아가 또 충격을 받은 건, 그전까지만 해도 고한수 사장이 왜 자신을 돕는지 깊이 생각 않고 넘어갔는데, 아키코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진상이 확 납득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날 즉시 어머니인 순자씨에게 모든 걸 추궁하고, 고 사장의 진짜 직업이야 순자씨 본인도 모르니 뭘 확인해 줄 것도 없었겠으나 여튼 노아는 학업이고 뭐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종적을 감춥니다.

고로 사장은 나이도 좀 젊은 편인데 유독 순자 아주머니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그 아들인 모자수에게도 잘 대해 줍니다. "모자수"는 영어 Moses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며, 한국 이름은 백모세입니다. 예전 1980년대 중반에 200m 육상 스타였던 에드윈 모지스 때문에라도 익숙해진 이름이죠. "보쿠(白)" 같은 일본식 독음이나, "반도" 등 재일교포들의 창씨 성을 접할 때마다 우리 독자들의 마음이 짠해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 초반부에 위안부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고, 한국전쟁은 그리 깊이 안 다뤄지며 "싸움이 나는 통에 (고향인) 부산 영도에 가 볼 수도 없다"는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영국계 청교도나 네덜란드계 신교도가 초기에 이민 와 시스템을 발전시킨 미국에서, 예컨대 아일랜드계니 그보다 훨씬 뒤의 이탈리아계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았습니까. 게으르다, 성질이 급하고 감정적이다, 폭력적이다, 등등.... 이런 편견 패턴이 일인들이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예컨대 이런 소설에서 인물들의 입을 통해 표현, 재현돠는 건데.... 문학 작품(혹은 영화)를 통한 전염일 수도 있고, 근대화 과정에서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하는 행태를 보고 일인들이 그대로 따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파친코는 첫째 모자수가 고로 사장의 매장에 취업한 도박장이기도 하고, 확률을 기막히게 조정하여 손님들로부터 최대 이익을 뽑아내는 고로 사장의 수완이 화려하게 꽃피는 상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모자수의 이부 형인 노아가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한 곳이 바로 어느 파친코의 경리직이었기에, 이 기묘한 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주친 산업의 교차점이기도 하죠.

사실 이 소설에서 무작정 일본인들이 악마로 그려지진 않습니다. 집단으로서 다가오는 일본인은 한없이 잔혹하고 비이성적인데, 개개인은 인간적이고 푸근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많은 듯 묘사됩니다. 반면 조선인 역시, 우리 동포이고 같은 상처를 안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이해와 지지를 얻고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부터가 한없이 비뚤어졌거나 거친 본색입니다. 개개인의 선의/악의와 무관하게, 큰 틀에서 사람 운명을 갈라놓는 건 그래도 역사의 모순과 체제의 의도입니다. 차별과 억압의 기제가 얼마나 많은 개인과 가정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성실한 개인들은 또 어떤 식으로 치열하게 이런 시련을 극복해 가는지 이 장편은 잘 그려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5권 정도 분량으로 이야기를 더 상세히 늘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모자수와 노아 두 형제 이야기만으로도 두 권치 사연이 충분히 나올 듯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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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식사전 - 중국 비즈니스에 꼭 필요한 중국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를 한 권으로 끝낸다! 길벗 상식 사전
이승진 지음 / 길벗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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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상대란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관광지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추한 유흥을 즐기는 행태를 보면, 아 저 사람들 갈 길이 아직도 멀었구나 싶기도 하고, 불과 이삼십년 전 우리도 저런 모습이지는 않았던가, 심지어는 아직도 우리 속에 저런 뒤떨어진 행태가 남지는 않았을지 냉정히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됩니다. 헌데, 막상 대륙에 가서 일 때문에 사람을 겪어 보면 이런 생각이 확 바뀝니다. "그 사람들 보통내기가 아니다", 혹은, "역시 유구한 세월 동안 상행위에 종사해 온 이들이라서인지 몸에 밴 그 무엇인가가 있다"든지, 그 근원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능숙한 요량이 분명 풍기는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현지에서, 실무를 행할 때 중국인들 고유의 독특한 개성과 관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우리 한국인 독자들에게 따끔히 일침도 가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도 참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맛에 길든 면이 있습니다. 우리 딴에는 멋스럽고 운치 가득한 행태들인데, 남들이 보기엔 매우 어색하고 스스로 바보  같은 수를 두는 듯만 합니다. 특히 중국 현지에 진출한 사업가들 중, 이처럼 한국 밖에서 잘 안 통할 법한 습성에 젖은 채 중국(과 중국인들)을 대하다가 큰 낭패를 보거나 하는 일이 꽤 잦습니다. 한국에서 영영 터잡고 살기만 할 것 같으면 문제가 없겠으나, 그렇지 않고 기어이 중국에서 승부를 볼 작정이면 이런 문제는 반드시 고쳐 나가야 합니다.

사장님들이 보통 "중국인들은 개인주의"라고 자주 말하곤 하죠.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좀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우리도 퇴근 시간 후 업무상 카톡 안 하기 등을 회사 지침으로 정해 두는 분위기가 근래 확산되는 추세입니다만, 서양인들이나 (심지어) 중국인들이나 이를 잘 이해 못 하는 눈치입니다. 사실 회사 일에 전념하고 조직에 충성을 바치는 풍조는 그 자체로야 전혀 나무랄 게 아니나, 때로는 선을 넘어 공과 사를 모두 해(害)하는 결과까지 빚는 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이를 이해 못 하는 한국 사장님들을 중국인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건 또 그러려니 하는데, 심지어 서양인들조차 "기업 문화는 서양과 중국이 정상이며, 당신네들이나 일본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건 확실히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이 책은 이처럼, 읽다 보면 속이 뜨끔해지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못하다고 비웃곤 하던 사람들이, 알고보니 오히려 더 상궤와 정석에 충실한 길을 걸었더라는 깨달음이란 확실히 충격젹이긴 합니다. 많은 중국 기업들은 이미 세계 유수의 우량 회사로 발돋움했고, 부자들도 셀 수 없이 양산되어 돈을 쓰는 스케일부터가 한국의 졸부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국에서 돈깨나 쓰며 행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들 중국 부자들이 호기롭게 과시적으로 써 대는 돈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잘난 체 하는 계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래 반중 혐중 분위기가 부쩍 고조되는 것도, 우리보다 중국이 꼭 문화나 경제상의 단계에서 뒤쳐져서가 아니라, 우리 뒤를 바싹 추격해 오는 중국에 대한 경계의식이나 조바심 따위가 그 원인이 아닐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회사는 가족 같은 회사입니다." 사실은 급여를 넉넉히 주지 못할 때 구차한 변명으로 내거는 사탕발림에 불과하고, 급여도 시원찮으면서 이런 가당찮은 슬로건을 내세우는 한국 회사나 사장님들을 중국인들은 꽤 경멸한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직장, 회사 문화의 폐단이 누적되어 오다 작금의 갑질이니 미투니 하는 대혼란이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일을 해 주고, 회사는 사원의 업적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 주며 서로 윈윈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예쁘장한 여사원 하나를 옆에 두고 과연 통역 업무를 하기나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장식품인지 모를 용도로 수행시키는 사장님들을 중국 현지에서 흔히 보는데, 한국 사람이면 그 심리가 뭔지 훤히 짐작(공감?)되고도 남지만 중국인(혹은 그 어떤 외국인이라도)은 무슨 생각으로 저 사람이 저러는지 그저 고개가 갸웃해질 뿐입니다. 꽌시 꽌시 하며 노래방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술자리를 강요하지만, 남는 건 아무것도 없고 급할 때 중국 공무원을 찾아 청탁이라도 하면 어느새 딴청을 피우며 모르쇠로 나옵니다. 억울하게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니라, 겉발림 관계를 "꽌시"로 착각하다가 대가를 치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 국기는 보통 오성홍기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공모를 통해 정해진 국가의 상징이라는 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국기나 국가가 공산 혁명 완수 직후인 꽤 오래 전에 정해졌는데, 처음에는 도안이 그리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선정위원들이 고생깨나 했다고 합니다. 예선과 심사를 통과한 후보가 아니라 번외 군에서 골랐다는 배경 소개가 무척 흥미로우며, 당이나 국가나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건만 당시로선 거액의 상금이 지급되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매우 놀랍게 다가옵니다.

중국을 세운 혁명 1세대,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이 이 나라에서 어떤 신화적 위상인지는 우리도 잘 압니다. 많은 이들은 덩샤오핑을 두고 과감한 개혁 개방 정첵을 이끌며, 마오의 독재가 낳은 폐단 때문에 해체 위기까지 몰린 국가를 구원했다고 여깁니다. 헌데 덩샤오핑은 정작 국가 주석직까지 오른 적이 없으며, 1세대인 양상쿤, 완리 등이 주요 공직을 수행했고, 이분은 사실 중앙군사위원회만 장악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유명한 말을 남긴 마오의 태도를 계승이나 하듯, 덩샤오핑은 그저 군대를 장악한 사실만으로도 중국을 능히 다스렸습니다. 현재의 시진핑처럼 국가 주석, 당의 수반, 군의 총수 등을 모두 겸직한 지도자가 나오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두 기를 연임한 후 한 peroid를 격하고선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전통까지 처음으로 사라진 터라, 앞으로 중국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극히 불투명해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 중국은 지역이 너무도 광대하고 물류 등 인프라가 열악하여 시민들이 겪는 불편상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이런 악조건을, 알리바바 같은 영리한 전자 상거래 업체가 가장 효과적인 방식의 사업 기회로 활용하여,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수완을 보면 사실 선진국이나 심지어 우리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개발 적용해 온 방식인데, 내수 시장이 워낙 크고 현지인들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니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중국은 기회의 땅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저런 기업이나 CEO들이 어떻게 해서 그처럼 빛나는 성취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수억 소비자들의 "마음"을 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이라고 해서 그저 쉬운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한 것만도 아니라서, 같은 중국인 사업자끼리도 살인적인 경쟁을 벌였고, 유능한 현지 인재는 돈 아끼지 않고 영입하는 정성을 들였기에 오늘의 그들이 있을 수 있었지요. 현지에서 성공하겠다며 종래의 구태의연한 방식에만 의존하는 사장님들이, 소비자나 종업원들의 내심, 생리도 전혀 이해 못 하고, 지난 그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소양도 부족한 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은 단지 중국인에 대한 상식만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한국인들의 부끄러운 민낯에 대한 반성에잠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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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현대지성 클래식 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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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처음에 공화정으로 출범한 정치 단위입니다. 다스리는 영역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합의와 타협을 일일이 개재시키기가 쉽지 않아 제정으로 이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 실력자들이 알력을 빚기 십상이었습니다. 군인황제들의 대립 항쟁으로 인한 혼란기도 자주 등장했고, 잔학한 독재자들의 전횡도 역사를 얼룩지게 했습니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달아 출현하여 로마의 정치를 안정시킨 건 그나마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 "오현제"의 재위 그 황금 시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애독한 고전이라고도 평하는데, 어쩌면 미국이 최상의 전성기를 보내고 서서히 국운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도 그의 재임기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정치 단위나 개인이라도 전성기를 지나고 나면 다음에는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이때 당사자는 차분한 마음으로 하강의 시기를 관조하고, 인간사의 상승과 하강 국면 뒤에 숨은 이치를 냉연히 통찰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왜 노련하고 유식한 정신들이 서투르고 무지한 정신들에 의해 낭패를 당하는가.(p104)" 실제로 우리의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런 곤란이나 치욕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파견한 관리나 측근 혹은 지인이 그런 곤경에 처한 걸 보고 떠오른 상념일 수도 있고, 자신이라든가 자신의 선임자들처럼 현명한 정치를 편 황제들이 다스린 제국이, 어인 까닭으로 매번 변방의 만족에게 어려움을 치르는지 납득이 안 되어서 나온 코멘트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그의 결론은 "시작과 끝을 알고 모든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정해진 주기를 따르는 영원한 순환 속에서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이성, 이를 아는 정신이다."입니다. 심오하기도 하고 다소 느닷없는 비약처럼도 들립니다. 전통적인 헬라 철학의 결론처럼도 보이고, 아직 기독교 공인 200년도 훨씬 전이라 그 교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황제 본인의 (지독한) 주지주의 표백으로도 느껴집니다. 여느 중국 황제 같으면 "천자(天子)"인 자신의 고독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았을 텐데 구태여 인간 보편의 자질인 "이성"을 거론한 건 역시 교육 받은 사람 답기도 합니다.

"욱신은 당당하고 단정해야 하며 움직일 때나 가만 있을 때나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신이 지혜롭고 기품이 있으면 그것이 얼굴 표정에 드러나듯이, 우리의 육신 전체에도 정신의 품성이 그대로 바반영되게 해야 한다." (p144) 황제로서 위엄 있는 처신과 태도를 유지해야 했던 고충이 어느 정도는 드러나며, 사실 황제는 외양의 기품만으로 뭇 대중과 신하, 잠재적 경쟁 세력을 압도해야 할 피로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삼국연의>의 조비 역시 맹달 같은 풍신 좋은 이를 구태여 곁에 두려 했던 것도, 그저 눈에 보이는 위신의 중요성이 현실 정치에서 떨치는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현인이, 허세와 진정한 내면의 힘 그 반영을 서로 혼동했을 리 없고, 바로 안체 나온 여러 심오한 통찰은, 위세와 위엄이란 어디까지나 내면의 품격과 강인함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 후세의 독자들에게) 여실히 깨우칩니다.

"감각을 방해하는 건 동물적 본성에 해롭고, 충동을 방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p164)" 여기서 "동물적 본성에 해롭다"든가, 방해된다든가 하는 구절의 뜻이 다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인의 수상록이지만, 동시에 윤리와 수신의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동물적 본성 등이 무엇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면, 이를 내 주위에서 떨쳐내어야 한다는 걸까요, 아님 그 반대일까요? 답은 그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로 우주적 완전체이기 때문에, 어떤 방해 작용에 의해서도 동요, 오염되지 않고 혼자서 제 기능을 잘 수행한다."

그렇습니다. 동물적 본성이든 감각이든 주변의 교란 요소에 의해 언제든 원활한 작동에의 장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중 간혹 나의 판단에 큰 도움을 준 "직감, 촉" 따위야 얼마든 기능 저하(?)를 겪어도, 이성은 그런 기복이 없으니 얼마나 듬직한지를 강조하는 취지입니다. 다른 말로, 무릇 황제라면 자신의 이성을 잘 단련하여 통치의 자질로 능숙히 부릴 정도가 되어야 하며, 이 습성이 몸에 배지 않은 자는 감히 자리를 넘볼 엄두도 내지 말라는 일종의 선포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원리들을 활용해서 현실에 적용시킬 때에는, 검투사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를 본받아야 한다. 검은 언제나 신경 써서 자신의 손에 챙겨들어야 하지만, 격투기 선수야 그저 주먹을 오므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p232)." 저는 요즘 모바일 기기가 마치 삶, 신체의 일부가 되어 모든 이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풍속도도 이 구절에서 바로 연상되었습니다. 필요한 정보와 자료 따위는 모바일 기기를 통해 바로 구할 수 있으며, 일종의 지식 외주 장치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머리 속 웨어하우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 머리 속의 여유 공간을 창의력이나 무궁무진한 상상 등 새로운 자원으로 메울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불행히도 많은 이들의 경우 자기계발의 경지가 그에까지 이르지를 못합니다.

정전, 방전, 기타의 이유로 기기(device)와 분리되었을 때,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게 그저 중독자의 금단 증상이 빚은 불안뿐이라면, 기기는 나에게 편의를 준 게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피폐시킨 것뿐입니다. 참된 소통과 관계 형성은 얼굴을 맞대고 정직한 감정을 교류할 때에만 가능하며, 입에 발린 메시지 교환이나 형식, 타성에만 매몰된 이모티콘 남발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신체와 내 두뇌에 내 것으로 온전히 남는 판단, 감정, 이성(아무나 못 가지겠지만요ㅎ), 지식 등을, 평소에 더 큰 애착을 갖고 존재의 일부로 만들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경주해야 할 듯합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그 어느 구체적 상황 속에서도 가장 바르게 말하거나 행할 수 있는가?(p205)"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예컨대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든가, 학자, 지사적 소신을 위해 처참한 죽음도 마다지 않았던 방효유, 사육신 등이 떠오릅니다. 신상에 별 위해가 안 닥칠 때 큰 소리로 떠들며 소신을 가장한 아집이나 허세를 부리는 건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정말 "누구"에게라도 가능하다는 건 주변에서 여실히 확인 가능하며, 기가 막히거나 어안이 벙벙할 때조차 있어 사람의 내면 그 성실성(integrity)와 목소리의 크기란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점까지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문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에 직접 고통과 위해가 침노했을 시, 도대체 어디까지 그 저항이 가능하냐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떠한, 구체적" 등의 한정어를 써 가며 사실상 "극한 상황"까지를 암시하는 중이죠. 어떻습니까? 나의 소신은 과연 그런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이 걸레짝이 되고 난 후에도 끝까지 유지된 소신은, 이제 현상의 존재와 분리되고 난 후에도 어떤 의의를 지니겠습니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현세의 쾌락을 더 중히 평가하기에, 이 점에 대해서 그리 큰 의의를 두지 않는 듯합니다. 공자의 도그마를 옹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에 대해 제한적으로 경배를 바치는 관행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원통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 생긴 모습대로 고유의 회전 운동을 어느 지면 위에서나 이어갈 수 있지는 않고, 불이나 물을 비롯한 자연이나.... 어느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변하지도 않고 그 어느 장애물도 쉽게 돌파할 수 있다.(p205)" p164에 이어, 아니, 사실상 이 책 어느 구석을 펼쳐 보아도 이성의 순일성과 항구성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긴 하지만, 다시 이성에의 온전한 의존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철인 황제답게 일생을 두고 감정의 절제와 궁극의 평온을 추구한 흔적이 책 곳곳에 배어납니다. 제국도 쇠망하기 마련이고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야 반드시 육신이 쇠하고 넋과 혼백도 간데없이 마모되기 마련입니다. 허나 이 명저는 저술된지 2천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식자층의 손을 떠나지 않고 애독됩니다. 책의 내용에 위화, 생경함을 느끼는 건 수양 안 된 짐승 같은 소인배나 거짓말쟁이들 뿐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미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은 위인보다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그들에게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성과 수양과 아파테이아란 그래서 불멸의 경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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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인재를 만드는 4차 산업혁명 멘토링
권순이 외 지음 / 북캠퍼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4차 산업혁명의 거센 파고가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끼치리라 예측되는 요즘입니다. 유치원, 초등, 중등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현재 우리가 영위하는 직업군 중 상당수가 사라진 세상에서 자기 포부를 펴고 자아실현을 꿈꾸겠으나, 아이들이 그렇게 미래를 가꾸도록 교육시켜야 하는 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슨 직업을 지망하며 종사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비전과 진로를 제안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우선 어린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향후 전개될 4차 산업혁명을 설명한 책이지만, 어차피 우리 어른들도 미래의 기술 구조나 사회의 기본 틀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한국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쓰신 이 책을 어른들이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권해 준 후, 내용 이해를 지도한다기보다는 함께 고민하며 진로를 모색하는 쪽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빨라서 어른들이 아무리 아는 척 시늉을 해도, 정말 알고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체면치레나 하는 중인지 바로 알아들 봅니다.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행하는 소통은 그 어떤 "교육"보다 아이들의 정신적 성숙에 도움이 됩니다.

1장은 여태 전개되어온 산업혁명들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습니다. 지금 예상되는 트렌드가 "4차"라면, 그에 선행하는 "전편"들이 뭔가 있어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산업혁명이란 게 1차, 2차, 3차,.. 하고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부자가 생겨나고 반대로 종전의 부를 잃은 채 몰락하는 계층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모습 자체가 달라지곤 했습니다. 변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든 크든 일어나는 게 세상의 이치지만, "혁명"이 벌어지면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죠.

책에는 어린 학생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혼동하기 쉬운 개념의 분명한 정리가 아주 명쾌하게 이뤄집니다. 우선

1)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은 유독 한국에서만 자주 쓰는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입에 자주 올리면 그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표준적으로 반복되는 줄로만 알고, "한국식 관행"이나 "콩글리시"를 경우에 맞지도 않게 쓰다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물론 클라우스 슈밥이 이 용어를 처음 대중화시킨 것도 맞고, 외국에서도 상당히 잦은 빈도로 이 개념이 쓰이기도 하나, 이 새로운 트렌드를 과연 "4차 산업혁명"이라고"만" 불러야 할지에 대해선 아직 유보적인 태도라는 겁니다(명칭이나 개념 파악으로서 다른 대안들도 있음). 예컨대 독일에서는 이것 관련 플랫폼을 두고 "인더스트리 4.0"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소사이어티 5.0"으로 명명합니다. 이처럼 이름은 다르지만 그것들의 외연은 대개 같습니다("내포"까지 같은지는 조금 머뭇거려지지만).

2) 놀랍게도 저자분(특히 이 첫 파트를 서술한 박재용 선생)께선 클라우스 슈밥 이전에도 이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쓴 예를 여러 개 찾아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어느 사회학 논문에 보면 무려 1940년대 후반에, 정확히,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란 용어가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진짜 놀란 건 우리가 <엔트로피>의 저자로 잘 아는 저널리스트 겸 사회학자 제리미 리프킨도 "3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중점적으로 코인시켜 결과적으로 이 "4차 산업혁명" 용어의 대중화에 간접으로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3) 과연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그 내용에 대해서도 학자들, 기업들의 의견이 저마다 갈릴 뿐 아니라, 심지어 어떤 분들은 "4차" 개념 자체에 회의를 갖고 "3차"에 포함시키기도 한다는 게 책에 나옵니다. 저는 솔직히 성인용 저서들 속에서도, 주제 개념어에 대해 이처럼이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비판적 고찰을 하는 책을 거의 못 봤습니다. 독자로서 의문을 품긴 여러 번 했어도 서평에 그런 주관적 느낌까지 다 쓸 수는 없어서 그저 당연한 공리려니 하고 저자의 기조에 거의 무조건 동조하듯 말한 게 보통이었죠.

허나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래 이게 정확한 지적이다. 이게 솔직한 현실이지 지금까지의 담론은 과장된 면이 너무 많았다"는 느낌에 속이 다 시원해지더군요. 여튼 우리가 지구 온난화 이론 구조에 다소 미심쩍인 면이 있어도 "어차피 환경 보호의 대의 자체가 타당하므로" 너그럽게 넘어가듯,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종전의 산업 판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건 분명하므로 그런 논의들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해서 뭐 손해 볼 것이야 없습니다.

아이들 책이라고 해서, 아직 학자들이나 업계에서조차 완전한 합의가 안 이뤄진 걸 중간 논의 생략하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건, 그야말로 "반(反)" 4차 산업혁명적 발상이 아니겠습니까? 전 저자분들의 이런 꼼꼼하고 신중한 태도가 오히려 믿음이 가서 좋았습니다. 어른들도, 본인들도 잘 모르는 걸 그저 당연하다는 듯 애들 앞에서 밀어붙이실 게 아니라, 저자들과 함께 토의, 토론이나 하듯 공부를 해 간다는 자세로 아이들에게 읽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장에선 맨처음 인공 지능 담론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우리 성인들이 지금껏봐 오던 내용과는, 관점이나 제안의 구체성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의 저자들이 각각 별개의 맥락에서 이야가하던 파편적 정보를 이어붙인 책들과는, 설득력과 진정성 면에서 확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차피 기능적인 지식에 불과한 어학, 회계학, 법학 등이라든가, 미술에서도 테크닉의 습득에 의해 재현 가능한 영역은 기계에게 그냥 전담케 하고, 인간은 예컨대 상처 입은 타인의 감정 치료 등 다른 영역의 직업에 진출하게 하자는 겁니다. 이 아티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이른바 머신 러닝, 즉 다양한 사례의 학습을 통해 기계가 자동으로 그 패턴을 찾아내어 수행하게 하는 원리에 대해 아주 직관적으로, 쉽게 설명해 주셨다는 겁니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언급 등 독자로서 개인적으로는 찬동 않는 부분도 많지만, 그런 문제는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혹시 갈릴 수 있는 다른)의견도 존중해 가며 함께 토의하도록 하시고, 무엇보다 인공지능 관련 각종 개념 설명이 명쾌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단연 추천할 만합니다.

다음에는 자율주행차와 드론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인용 대중서에는 이 둘을 별개 토픽으로 분리하는 게 보통인데, 아이들 시야를 고려하여 한 주제로 묶은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2018년 평창 올림픽 식전 개막 행사에서 선보인 여러 사례도 소개하는 등 최신 정보가 반영되어 있고, 바로 앞 파트에서 설명된 인공지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어린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설명 순서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엔진이 따로 필요 없으니, 앞쪽이 튀어나오고 브레이크도 따로 밟아야 하던 예전차와는 모양새도 다르고, 버튼 하나로 다 움직일 수 있어 너무 좋은" 게 전기차라는 설명인데, 어떻습니까? 쉽고도 간단한 한 마디로 핵심과 본질을 전달하지 않습니까? 이건 전기차에 대한 설명이고 자율주행 토픽은 그 앞뒤에서 상술되는데, 이렇게 주제를 쉽고 능숙하게 풀어 주는 책을 전에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러면서도 개념의 정확성을 훼손 않고, 오히려 웬만한 성인 대중서보다 더 꼼꼼히 따지고 든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빅데이터 설명입니다. 이 역시 제가 개인적으로 요즘 학부 교과서 몇을 골라 여러 권 진행하는 중인데, 오히려 이 책 한 권을 읽고 새로 눈이 틔워진 대목이 더 많았습니다. "그게 그런 소리였나?" 이렇게 말하면 "애들 책 치곤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하실 분도 있겠는데, 마치 명강사가 연단에서 아둔한 청중들 자극해 가며 설파하는 열변을 듣는 투입니다. 안 어렵고, 오히려 내가 모르는 부분 자극 받아가며 더 긴장 챙기면서도 쉽게 와 닿습니다. 쉬운 설명은 들을 때에만 편하지 다 듣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죠. 헌데 이 책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먼저 학부형들이 읽어 보시고, 본인들이 뭔가 확실히 각성된(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다음 자녀들과 함께 읽어 보세요. 이런 책은 개인적으로 처음 보는 듯해서, 이처럼 기분 업된 서평 뿌듯하게 남깁니다. 별 열 개도 아깝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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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산업 전략 보고서 - 중국을 뛰어넘고 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이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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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파장과 전망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고 무성합니다. 대체로는 "종전의 고루한 사고방식, 건전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입에 밴 넋두리 같은 판에 박힌 불평, 노력 없이 자릿세만 받아먹으려는 직함 위주의 사고 방식으로는 현재의 직장도 유지하기 어려움" 정도에 결론이 모아지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각 산업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미래의 산업상에 대한 적응이 용이할지는 별 대안과 논의가 나오지 않는 듯합니다.

이 책은, 여튼 가까운 시일 안에 쉬이 위축이나 후퇴, 심지어 퇴출이 벌어지지는 않을 듯한, 또 현재 많은 이들에게 큰 부가가치를 벌어다도 주는 구체적인 각각의 산업군에서, 현재의 업황이 어떠하며, (꼭 4차 산업의 여파가 아니라 해도) 근시일 안에 업계의 지향이 어떤 쪽으로 변할지에 대해, 각종 통계와 지표를 근거로 매우 구체적인 전망과 제언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기틀도 마련 못 하거나 첫걸음도 떼지 못 한 추상적인 직업, 산업에 대한 공상 가까운 논의도 아니고, 믿을 만한 논거와 자료에 기대어 직간접 관련자들을 위한 충고를 상세히 풀어 놓았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저 장밋빛 미래만 듣기 좋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읽다 보명 "허 참 이런 일을 다 겪고도 여태 몰랐단 말인가"하며 분노가 치미는 대목도 있고, "큰일 났군. 개별 국민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앞으로 뭘 해먹고 살까" 처럼 눈 앞이 캄캄해져오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FDR의 말처럼, 업황과 미래상이 아무리 암담하다 해도 괜한 호들갑으로 직업인들의 사기까지 꺾어 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적실한 대비책도 마련되기 마련이므로, 독자들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정리한 현황, 분석한 대안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망상에 젖지만 않으면, 뭐라도 돌파구가 생기기 마련이며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낸 적 있습니다.

1장은 단 한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저자 명의는 못 찾았으나 아마 이근 교수(학부 때 개인적으로 제 지도교수님이시기도 했던 ㅎㅎ)님 저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 아티클은 책 전제를 요약하거나, 이 기획의 성격과 의의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아무리 암울한 현실이라도 정면으로 시선을 준 후 돌파구를 찾으려 들면 못 할 일이 없다고도 했습니다만, 곁에 버티고 서서 불쾌한 선택(사실상 선택도 아니지만)을 강요하는 중국과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는 깊은 고민을 쏟아부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대립각을 세우고 이해가 계속 상충하는 경쟁자로 대할 수도 있고 2) 대등한 관계를 설정한 채 약은 호혜 관계를 이어가는 협력자가 될 수도 있으며 3) 마치 대기업과 중소기업처럼 원-하청 관계로 수직적 분업을 일굴 수도 있는데 사실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도 3)이며 한국인이 악몽으로 간주하는 시나리오도 3)입니다. 2)는 그저 3)의 현실을 호도하는 우회어법이나 겉만 그럴싸한 가림막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네덜란드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리한 생존 방법을 모색하며 한때 무역 제국을 건설한 적도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득세할 때는 프랑스에, 호언촐레른 황실이나 나치가 판을 칠 때는 독일에 각각 먹힌 바 있습니다.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사실상 매우 협소한 몇 가지 길뿐이나, 여튼 겨레 전체와 경제인들의 지혜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2장의 첫 글은 게임 산업에 대한 전망과 진단입니다. 영화 <대부>를 보면 비토 코를레오네와 탐 헤이건이 마약 산업(?)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는 장면이 있는데, 결론은 "우리가 설령 손을 안 대어도 누군가가 발길을 내디뎌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판을 다 쓸어 버릴 테니, 이 장사야말로 '미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는 대사에 잘 녹아 있습니다. 엄연히 합법의 영역인 게임 산업을 두고 "마약"에 비유하는 건 좀 어폐가 있지만(그 정도가 아니라 그 많은 게임 팬들이 몰려와 항의할 일이지만), 산물 혹은 서비스가 다분히 향유자의 "중독성"에 기인하는 바 크고, 사회 일각(주로 노년층)으로부터 우려, 의심어린 시선, 심각한 질타를 사기 일쑤라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아주 없지도 않습니다.

정서 순화와 인문 마인드 함양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통속 문학류 역시 장르에 빠져드는 중독자 양성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고, 설령 인문 고전이라고 해도 아주 속물적 맥락에서만 인용하거나, 일일이 막장 코드로 (자기 수준에 맞게 변환하는) 저질 독자(독자라기보다는 중독자라고 해야 마땅할)가 유식한 척 떠들어대는 풍조에 비기면, 게임 팬들이 특정 캐릭터를 거론하며 일상의 대화 소재로 삼는 분위기는 하나도 비난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담론은 게임 스토리와 배경, 캐릭터들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며 인문과 픽션을 주도할 것입니다. 게임보다 무대도 협소하고 창의력도 훨씬 덜한 웹툰이 현재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점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브컬처와 주류 고급 문화는 서서히 경계가 사라져갈 뿐 아니라, 후자의 경우 어차피 취향이 고급으로 태어나거나 환경 속에서 길러진 이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뇌 대신에 짬뽕만 가득한 돌머리가 어설프고 코믹한 흉내를 낸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죠.

2008년 이전에는 중국 게임 업계와 시장이 혼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국내 업체가 참신한 스토리와 깔끔한 비주얼로 진출만 했다 하면, isbn를 받아와라 뭘 보강해라 심사를 거쳐라 시간만 질질 끌고 허가를 내어 주지 않다가, 어느새 저질스레 짬뽕 같은 헛소리를 늘어 놓는 치매 걸린 노파처럼 짝퉁이 먼저 시장에 깔려 유저들을 선점하기 십상이었습니다. 2008년 이후 저작권 보호를 강화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공정한 경쟁이 이루지기에는 미흡한 실정이며, 몇 주 전 EU 국가들이 입을 모아 그 심각한 실정을 지적도 한 바 있습니다.

국내 업계도 고질적인 문제점과 타성을 개혁해야만 앞날이 긍정적일 수 있으며, 중국이 맹추격한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가 경쟁력을 (다소나마) 보유한 AR, VR 플랫폼에서 비교 우위를 강화해야만 합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아직도 국가나 사회 단체에서 "유해물"의 범주에 이 게임을 넣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공대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가 이 AR, VR 섹터에 집중 투입되고, 최고의 인력이 게임사에 영입되어 승부를 걸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부 마니아층만 접근 가능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노래방에서 피로를 풀듯 중노년층도 거리낌 없이 향유하는 게임 시장의 외연 확대가 절실하고, 이 저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비전이 절실합니다.

노령 인구가 증가하는 21세기는 누가 뭐래도 건강 산업이 가장 각광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중국 스마트 의료의 현황을 점검하는데, 이 대목에서 사실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환자나 서비스 수요층도 별의별 사람이 다 나오기 마련이고, 이에 대응하며 기업의 체질이 단련되는 속도나 양상도 차원이 다릅니다. 게다가 중국의 정부는 애초에 정책의 기조가 흔들릴 걱정이 없기에, 알토란 같은 프로젝트를 잘 가꾼 후 (독재든 뭐든) 밀어붙이기만 하면 되니, 민간의 창의가 혹여 부족하다 해도 진척과 발전이 두드러집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지역이 워낙 광대하다 보니 원격 의료에 대한 수요도 크고 발전의 유인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한국도 무의촌 무변촌(변호사 없는 마을) 문제가 심각하지만 영원한 장기 과제로 남은 반면 중국에서는 여튼 불편의 타개를 위해 뭐라도 몸부림이 이뤄진다는 게 중요합니다. 치료와 진단이 원격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의약품의 판매, 배송도 동일 메커니즘인데 한국에서는 현실과 법제적 제약 때문에 상상히 힘든 풍경이죠.

"스마트 헬스 케어"의 경우 가장 총명하고 교육 잘 받은 인력이 대거 모여드는, 마치 1980년대 미국 실리콘 밸리를 연상케 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민간의 의욕이 충만하고, 그 인적 자원의 품질도 높을 때 산업의 전망이 밝은 건 당연하며, 반면 우리는 젊은이들이 공무원 채용에 최고의 열을 올리니 나라의 장래가 우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료와 직접 관계가 없는 회사들도 대거 진입하여 이 시장의 무궁무진한 과실을 탐하며, 자신들 역시 스타트업으로 시작하여 대기업으로 우뚝 선 텐센트, 알리바바 등이 이제 새로 시장에 진입한 타 스타트업들을 후원하며 엑셀러레이터 노릇을 하는데, 저자는 IBM, 구글 등보다 훨씬 양질의 사회적 책무(동시에 자사의 장기적 이윤 추구)를 행하는 이들 기업의 밝은 안목에 경의를 표하는군요.

농업은 그저 전근대 산업으로만 인식되었으나, 저는 3년 전쯤에 "6차 산업"으로서의 농업 그 비전에 대해 상세한 설명과 비전을 담은 남상일 선생의 저술(https://blog.naver.com/gloria045/220382039684)을 읽은 적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지지부진이지 이 분야에서도 다른 선진국이나 심지어 중국조차 엄청난 투자를 하며 미래를 준비하더군요. 사실 중국이야말로 태생에서부터 농업으로 출발의 기반을 잡은 나라이며, 거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다른 인프라까지 구축한 농경 문명권과, 그저 소수 엘리트 전사의 무력에만 의지하는 유목 문화권의 대결 구도에서 항상 긴장을 곤두세우던 나라가 또 중국입니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이란 본시 공장 노동자가 생산의 주체로서 각성하여 일으킨다는 게 공산주의의 정통 교리인데,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일일이 대립해 가며 이 도그마를 자국 현실에 맞게 수정까지 한 역사도 있습니다. 중국은 3농 문제로 대국으로의 발돋움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데, 이른바 스마트팜의 개척으로 여러 사회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겠다는 포부라고 하는군요.

국가가 야심차게 계획을 마련해도 민간의 의욕, 창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 없습니다. 스마트 팜의 비전에 기대어 민간에서도 이 분야 투자에 매우 열성이고 관련 기술 인프라에도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데, 이 분야 기술을 가리켜 "어그테크"라고 부른다는군요. 우리는 첨단 미래 산업 중 하나인 바이오 시뮬레이션에 대해서도 그저 간간히 회젯거리가 되는 게 고작인데, 중국에서는 이처럼 미래 아젠다 하나하나가 실제의 화두로 부각될 뿐 아니라, 민간의 자금이 제 출구를 알아 보고 몰려들기까지 한다는 게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름이 "6차 산업"인 게 괜한 명칭 인플레가 아니어서, 산업 간 융합이 선행 필수 조건인데 이 점에서 전통 제조업, 서비스업 체질이 튼튼한 편인 한국은 기회가 꽤 열려 있는 편인데도 근시안적 틀에 갇힌 마인드가 아쉬울 뿐입니다.

바이오 시밀러는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를 떠나서, 이미 십 년 전부터 "이 분야야말로 국가간 승패가 갈리는 최후의 격전장"이라는 점이 이미 합의에 이르렀다 할 만큼 각광 받는 분야이고, 삼성 이재용 회장도 이미 십 년 전부터 자사의 미래로 언급한 적 있습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2012년에 삼성은 미국의 바이오젠과 합작사를 설립하여 착실히 기반을 다져 왔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전망 좋다며 자주 거명되는 (주)셀트리온의 모범적인 R&D와 전략도 책에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규제 문제가 또 말썽인데, 중국에서 현재 크리스퍼 기법이 잠시 서유럽을 추월한 것도 애시당초 윤리나 인권 관련 규제가 전무한 중국 특유의 무식한 분위기가 한몫 한 겁니다. 근데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이 한국에서는 매우 엄격한 규제로 자리하며, 앞서 언급한 대로 게임 역시 온갖 규제와 비우호적인 분위기 때문에 산업으로서 온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한국에서는 이른바 오픈마켓이라고 불리는 C2C 섹터가, 가뜩이나 시장도 좁은 터에 발전하기가 여러 모로 힘든 조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디 열악한 생존 조건 하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발전시킨 베두인 족, 노르만 족, 몽골 족 등의 사례가 있긴 합니다만, 공통적인 다른 성장 촉진 요소는 뻬어난 리더십과 효율적인 조직 문화가 개개인의 성취욕, 승부욕을 돋우어 주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은 이 중 과연 무엇을 갖추고 있습니까? 또, 이제는 모든 면에서 최우선의 고려 요소가 되어 버린 중국이 갖춘 강점은 무엇입니까?

성장이다 혁신이다를 논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실 이 책의 저술 팀에 속한 저자의 면면에서는 대개 이런 기조로 논의를 이어 왔습니다(전작들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러나 이 책은 결론 파트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 하나를 던집니다. 어차피 물적인 성장도, 또 국가가 마련한 혁신의 인프라도 이제 중국과 정면으로 견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중국이 보유한 물적 기반이 우리보다 월등하고, 심지어 지도층의 혁신 의지나 장기 비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전술 역량도 우리보다 앞섭니다. 무엇으로 중국과 붙어야겠습니까? 무엇을 들이밀어야 중국이 애초에 우리와 경쟁이 안 되는 강점으로 항구히 의존하고 체질화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인간 중심 경제 구조"입니다. 스마트팜이나 혁신의료, 핀테크, 게임과 AR, VR 등도 자세히 보면 중국은 서유럽, 미국에서 일단 기본 이론과 프레임을 베낀 후 무식하게 물량을 투입해서 밀어붙이는 매우 단순한 전략뿐입니다. 명목은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사람 값이 개값만도 못한, 천민 자본주의의 전형입니다. 텐센트 같이 멋지게 살아남은 스타트업도 있지만 이 하나를 띄우기 위해 비참하게 떨려나간 패배자, 도산 기업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거리를 다니다 그저 공안의 눈에 밉뵈어 범죄자 신세로 떨어져 남편도 자식도 없이 모르모트 취급 당하는 짬뽕 같은 인생은 일일이 거명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한국은 인권 사정이 이 정도는 아니며, 운전기사에 대한 오너 가의 가혹 처우까지 일일이 문제가 되는 걸로 보아 국민들의 자의식과 명예욕이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높습니다. 저자가 제언하는 건 사회 친화적인 기업, 소비자를 배려, 공감하는 인간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여, 비인간적인 산업 구조의 경쟁자들을 자연스럽게 따돌릴 수 있는 우리만의 경쟁력을 갖추자는 쪽입니다. 현 대통령의 지난번 선거 캐치 프레이즈 중 하나가 "사람이 먼저다"이기도 했던 만큼, 실천에 옮겨지기만 한다면야 이 험악한 경쟁의 장에서 그야말로 최후의 결정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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