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그녀의 꽃들
루피 카우르 지음, 신현림 옮김 / 박하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연계에서 "성폭력"이란 게 과연 어떤 양상으로 존재할까 같은 게 궁금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젠더 담론에 대한 여러 교양서적을 읽으며 인간은 확실히 이런 이유에서도 대단히 폭력적이고 파괴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고, 비뚤어진 개체의 생존 욕구와 자연의 공존, 조화가 어디까지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깊은 의문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요즘 특히나 미투 움직임 때문에 사회 곳곳이 심상찮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이처럼 상황이 (그나마) 호조건으로 개선되는 속에서도 여전히 피해자로서 그늘에 갇혀 밖으로 과감히 못 나오시는 안타까운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낯뜨겁고 추악하며 비틀린 추태를 떨기도 합니다. 어떤 자는 이 와중에 비천한 부화뇌동 심리를 발동하여 신나게 범죄 행각에 가담하다가, 일이 심상치 않게 풀린다 싶자 나쁜 머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싸~악 잊고는 관전자 모드로 돌변하여 특유의 어색한 연극을 혼자서 요란하게 펼치기도 합니다. 세상사 참으로 요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 루피 카우르는 시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실제로 성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이런 깊은 상처가 개인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문화권 전체가 안은 원죄라든가, 제도에 깊이 스민 비뚤어진 우월 의식, 편견 따위가 최상위의 범죄 교사자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긴 이런 말을 하면, 마치 피해자에 깊이 공감하는 듯 위선을 떨다가 "빈곤한 후진국에서 입에 풀칠이나 간신히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같은, 차라리 비하나 조소에 가까운 표현 속에 희한한 우월감, 병적 쾌감을 담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컨대 한진그룹의 모 전무처럼 진짜 금수저 출신이기나 하다면 그러려니 포기하고 그나마 말도 안 하겠는데. 진짜 간신히 차상위나 모면한 인간이 말도 안 되는 허세 속에 환각의 신분 상승 의식을 혼자 치르고 있으니 그저 아연할 밖에요.

"오늘 폭탄들은
모든 도시들을 무릎 꿇렸다.
난민들은 보트에 올라탔다.

지난달 방문한 고아원은
쓰레기처럼 버려진 아기를 위한 곳이었다.

어찌 내 삶이
기적에 못 미친다 하겠는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이 삶을 얻었는데"

(책 p134 <상황>에서 일부 발췌)

보트피플이라고 하면 1970년대 후반 월남 패망 후 동남아에 속출했던 난민들을 주로 가리켰으나, 현재는 지중해 일대에서 떠도는 난민들이 대뜸 떠오르죠. 루피 카우르는 자신도 피해자였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훨씬 못한 어린 고아들을 동정하며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에스컬레이트합니다. 가장 불행한 인간은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환각을 지어내어야만 버틸 수 있는 자이고, 이 SNS 시인 카우르처럼 스스로의 삶이 "기적"임을 알아볼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당신은
이전에도
내 삶에
다녀갔어."

(책 p192 <또다른 생애> 全文)

시인이 본디 인도 분이다 보니 우리처럼 윤회 사상에 매우 익숙한 발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긴 "우리처럼"이 아니라 우리가 저들 문화권에서 수입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생의 유한함에 절망하고, 고통스러울망정 윤회, 재생(reincarnation)을 통해 존재가 한번 죽음으로 사멸하고 끝이 아님을 상정하고 싶은 마음은, 인류 통성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으로 육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이성이라면, 당연 전생에서의 기시감이 그 정(情)에 투영될 만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먹여 준 사람들의
접시를 채우지 않고
낯선 이들의 접시만 채우고 있다면
나는 무슨 소용인가"

(p220 <가족> 전문)

가장 잘못된 인간은 배우자와 불화하며, 자신에게 비뚤어진 가치관만 심어 준 범죄 형질의 DNA만 퇴행적 추억 안에 간직한 부류입니다. 이런 자는 가족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 속의 병든 형질을 애무하며 비뚤어진 망상에 취하는 거죠. 시인은 그간 여러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위 시 <상황>에서 보았듯) 절망적 처지에 놓인 고아, 난민들에 대한 진정성 가득한 봉사에도 몸 담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를 보듬어 주고 수렁에서 건져 주고 외부의 상처에서 보호해 준 가족들에 대한 "보은(報恩)"이 후순위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솔직한 고백이 독자의 마음을 훈훈하게 채웁니다.

너무 어두운 쪽으로만 선입견을 갖지 마시고, 미국 SNS를 뜨겁게 달군 스타 네티즌이었던 그녀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집이니 그저 시를 만난다고 여기고 부담 없이 책을 펼쳤으면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상처가 있는 분들이야 직접 공감대를 지닌 시인의 표백이니 특별한 기대를 품어도 되겠지만 말입니다. 박하의 책이라서 여전히 예쁜 장정 덕분에 독자는 더 행복합니다. 원문이 힌디어가 아니라 영어이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그녀의 인스타나 페북에 가서 직접 감상, 교감할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셔츠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3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 지음, 이보석.서유경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그런 생각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처럼, 시대를 앞서 가는 조류와 각성이 꼭 러시아에서 비롯할까?" 역사 중 그러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면 유일하게 공산주의 체제가 지배하던 구간이며, 심지어 이 시절에도 (지난번 리뷰에서 말한 것처럼) 디나 루비나 같은 빛나는 여성 작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일각을 이끈 사례를 보기도 했습니다. 두 세기 전 활동한 고골의 단편들 역시, 지금 읽는 감각으로도 얼마나 모던, 아니 포스트모던한지 모릅니다. 멍텅구리 바보나 그저 제 하찮은 감각에 낯설다고 해서 당치도 않게 "예전 작품" 운운할 뿐이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작가"란 직종은 따로 구별되지 않고, 만인 창작 만인 향유의 구조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게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수련이나 소양이 불비한 채 그저 어리석은 대중에게 말초적인 어필이나 하는 영리한 통속물의 생산자나, 무책임한 선동가가 고작 득세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가 스스로를 일러 "현대 러시아 인문의 선구"를 자처하는 건 그래서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러시아 문학 같은 유서 깊고 뼈대 탄탄한 가문에 자격 있는 적장자가 출현한 셈이니 말입니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약혼녀>가 대뜸 떠오르는 건, 꼭 등장인물 샤샤가 이름이 비슷해서만은 아닙니다. <약혼녀>애서 집안의 결정에 따라 알렉세이와 혼인하기로 정해진 나쟈는, 한편으로 나의 인생이 이렇게 타의에 의해, 다른 어떤 가능성도 꽃피워 보지 못한 채 고정된 궤도만 운행하는 게 과연 올바를까 하는 깊은 회의에 잠깁니다. 이 나쟈에게 "당신 생각대로 의지대로 해 보세요!"라며 마치 남자 팅커벨처럼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히치콕 감독의 <서스피션>에서와는 달리, 나쟈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미래를 꾸려 갈 수 있었지만, 아마도 많은 경우 현실은 나쟈 아닌 리나의 경로를 따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샤샤는 이혼남입니다. 대도시에서 그러저럭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혼 후 실의와 회의에 젖어 낙향하는 이들은 종종 봤지만, 샤샤처럼 반대로 기존의 터전을 떠나 모스크바 같은 대처로 이전하는 건 처음 봅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골, 중소도시를 떠나는 건 차라리 흔해도, 샤샤는 "거대한 모스크바"에서 오히려 그 빈곤하고 틀에 박힌 가능성의 영양실조에 몸부림을 칩니다. 허나 독자인 제 생각에, 이런 샤샤의 호들갑은 그저 에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호들갑, 혹은 사전 정지 작업에 가까웠던 듯합니다. 실제로 그는 "기적과도 같이" 그녀를 발견했기 때문이죠.

기적과도 같이 발견한 그녀와 함께, 샤샤는 전혀 새로운 일생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작가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를 영화에서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분은 사실 무대에 더 자주 서는 배우이고, 출연한 영화는 러시아 영외에서 잘 상영되지 않습니다만(흥행 전망이 불투명하니 당연하죠) 운 좋게 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한 편을 감상한 적 있습니다. 이분이 어떤 배역을 맡든,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배역보다는 배우 자신의 이미지가 관객한테 깊이 다가와서 박힙니다. 소설을 읽으며 소심한 주인공 샤샤가 지금 뭘 말하려는지 감이 안 오는 분들은, 한번 그의 영화를 구해서 연기를 구경해 보십시오. 샤샤가 꼭 그리시코베츠의 페르소나 같아서 지금 하는 말입니다.

잘 차려입고 즐겁게 외출하려는 찰나 꼭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청하는 고향 친구에 대한, 약간 죄스러운 짜증 경험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 소설 속에서 "현실"을 대변하는 건 친구 막스와의 소통과 접촉뿐입니다. "기적처럼 만난 그녀"는 과연 현실이 맞을까요? 전처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생의 동력 주요 부분이 꺼져 버린 샤샤에게, "기적"은 그런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 정도 아니었을까요? 기적과 유쾌한 도락은 사실 샤샤가 "잠" 속에서만 체험할 수 있었고, "현실"은 따분하고 부담스러운 친구 막스와의 접촉이 고작인 거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산책". 말만 들어도 그윽한 느낌이 바로 전해져 옵니다. 수려한 산천의 풍경에, 흐르는 물을 국자로 그냥 떠 마셔도 병든 닭의 비뚤어진 신진대사와 썩은 영혼을 그대로 씻어 줄 것만 같은 천혜의 아름다운 강산. 하늘이 내렸다 할 이토록 아름다운 국토 한복판에 도읍한 신(新) 조선의 제제는, 첫째 이민위천(以民爲天)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본격 민본의 행정을 지향했고, 둘째 청렴하고 유능한 신진 관료 사대부를 대거 등용하여 통치의 효율을 기했습니다. 그래서, 비단 아름다운 풍수와 역사의 순리에 기대어 신 왕조가 개창한 게 아니라, 문물 제도의 세밀한 실제 곳곳에서 과연 볼 만한 것 평가할 만한 것이 많아 그 위에서 넉넉히 상념의 "산책"이 가능했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조선"의 이미지를 물으면, 첫째 약하다(약했다), 둘째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 등 부정적인 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자 신병주 교수님의 이 책은, 대륙에서 이삼백년짜리 왕조가 흥성과 쇠망을 번잡스레 반복할 때 그 위신과 체제를 오백여 년이나 이어  온 이 왕국의 제도와 사정에, 다시 새길 만한 미덕과 장점이 많았다는 쪽입니다. "와, 이런 게 다 있었어?" 무릇 산책이란, 마음을 명경지수의 단계에 가만히 둔 후, 격물치지하고 위민찰물하여 나와 내 주변에 감춰져 있던 그 무엇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어진(御眞)은 한 강역을 다스리는 지존의 금상을 비단 등에 붓으로 옮긴, 사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는 통치자의 모습을 격지와 후세에 두루 전할 참으로 중요한 예술품이자 소통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아슬아슬하게나마 전하는 몇몇 어진들은, 국립 고궁 박물관이 특별 전시회라도 열어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일반에 노출되는 예가 매우 적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전 와중에서 이 소중한 문화 유산 중 상당수가 멸실하여, 현재 일부라도 남아 전하는 건 다섯 분의 임금 몫뿐입니다.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용모와 기풍을 평하면서, 예컨대 연잉군(이후 영조)의 경우 젊었을 때나 노년(이는 물론 한참 후대에 그려진 것입니다만)에나 깐깐한 성품, 혹은 체형이 그대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장수한 데에는 이처럼 철저한 자기 관리가 큰 기여를 했으리라고 현대적 해석을 덧붙입니다. 하나 상기하고 싶은 건, 이처럼 특별한 전시회라도 열려 평소에 접하기 힘든 소중한 유산을 만날 기회에 대한 정보는, 우리들이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꼭지는 2015년 12월 19일에 작성되었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 무렵이면 모 전직 대통령이 느닷 사거(死去)할 시점이기도 한데, 그에 따른 저자의 소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앵두"가 현재는 표준어이지만 어원은 앵도(櫻桃)라고 합니다. 책에는 꾀꼬리가 잘 먹고 복숭아를 닮아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합니다. 혹 그렇다면 앵(櫻)은 앵(鶯)으로 바뀌어야 할 듯합니다. 여튼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 부왕의 질환을 돌보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고, 후원에 따로 이 나무를 길러 그 열매를 따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봉건주의의 잔재라든가 하여 왕실의 이런 훈훈한 미담을 체제의 프로파간다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뜸 이런 생각부터 드는 사람은 제 부모에 불효하고 스스로의 삶도 불성실하게 영위하는 실패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천한 밑바닥은 정작 사람 같은 사람의 행적에 선뜻 공감을 못하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당시 궁중에서 최고 실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에 대해 일개 과부로 폄하하고, 명종(조선 13대 임금)은 고사(孤嗣)로 칭해 큰 논란을 야기했던 북인의 영수 남명 조식의 일화도 책에 전합니다. 남명 조식은 조선 유가 사색당파 중 한 무리의 개조로 일컬어질 만큼 학덕이 높은 대유(大儒)였는데, 저기서 "고사(孤嗣)"라 함은 고아나 마찬가지인 외로운 처지로서 대(代)를 이은 장손이라는 뜻이니, 새기기에 따라서 나이 들고 깨달음이 큰 선비가 젊은 군주에 보내는 지극한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 말하듯 "그냥 임금이 된 사람" 정도로 비아냥대는 뜻이 결코 아니죠. 이 일화는 명유의 "상소"가 조야에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했는지, 언로(言路)의 트임이 정치의 청탁(淸濁)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베풀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영조도 집권 후 탕평책을 시도했는데, 사실 당쟁의 폐단은 그보다 훨씬 앞선 선조, 광해군 연간부터 심각한 정정 불안을 낳던 수준이었습니다. 오리 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은 남인 출신이었는데도,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전단(專斷)했던 북인들조차 그의 덕망을 높이 사 중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가에 따라 간신으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오래 전 당나라의 역사를 봐도 여튼 이림보 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재임할 때엔 정치적 균형이 달성되어 군사 변란 등이 일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고려 말 이인임이 그렇게 욕을 먹어도 여튼 그의 수완으로 조정이 붕괴되는 지경은 면했던 것입니다. 광해군과 북인이 이 오리 정승을 조금만 후대했어도, 서인의 쿠데타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되었을 겁니다.

저자는 특히 숙종 연간에 종종 파견되었던 "암행어사" 직책에 대해 언급하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어사는 "당하시종신"이었으므로, 예컨대 소설(혹은 판소리 대본) <춘향전>에서처럼 갓 과거에 급제한 신참이 어사로 임용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사는 종 6품이상의 품계여야 했으며, 당하관은 정3품 하계부터 종 9품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장원급제자의 경우 종6품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었으니 소설 속 설정은 당대 법제와 충돌하지는 않으나, 다만 상피제의 한계 때문에 실제 남원으로 파견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도 덧붙입니다.

2013년 11월 15일에 쓰인 글이지만 서두에는 ".... 최근 드라마 <대군>등의 방영으로 ...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말씀으로 보아 이 부분은 적어도 올해(2018) 상반기에 개필된 듯합니다. 수양의 리더십과 체제 재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만 "쿠데타로 임금이 된 정통성의 결여"는 두고두고 꼬리표처럼 그의 행적을 발목잡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른바 "황표 정사" 등으로 왕의 위상과 권위를 추락시킨 김종서와 황보린 등의 과오가 쿠데타를 결과적으로 유발한 패착을 지적하는 것도 저자는 잊지 않습니다.

역사상 조선의 정유년에는 큰 고비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점에 저자는 주목합니다. 우선 왜(倭)가 재침(再侵)한 정유재란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효종의 북벌 추진으로 인한 전화 조짐의 긴장기, 이로부터 한참 후의 대한제국 건국 등을 꼽습니다. 이 글은 2017년 정유년 초에 쓰였는데, 저자의 특별한 느낌과 감회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바로 뒤 p148에는 아관파천을 두고 1896년 병신년이라고 하는데, 이미 을미개혁 당시 정부에서는 양력을 채택한 후이므로 이 부분이 보다 정확한 듯합니다. 다만 육십갑자는 태음력에 의한 전통 역법으로 해가 바뀌는 시점 이후에 적용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 혹은 앞으로 읽으실 분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대목이 바로 "세종 연간의 국민투표"입니다. 물론 명칭이 직접적으로 "국민 투표"로 정해지지야 않았습니다만, 이른바 공법(貢法), 즉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의 실시에 대해 세종은 무려 국민의 뜻을 직접 물은 거죠. "...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 아뢰게 하라." 총 참가자는 17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는 여성과 노비를 제외하면 거의 전 국민의 참여가 이뤄진 결과라고 저자는 해석합니다.

책 말미에는 이른바 화산 이씨의 시조가 멀리 베트남에서 정착한 일(이 자체는 고려 연간입니다)부터 해서, 조선 시대에 이뤄진 다양한 외부인의 귀화 사례를 언급합니다. 이른바 다문화 이슈에 대해 조선도 대단히 선제적, 진취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조선 시대의 통치자들이 이처럼 실용과 공영의 이념으로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사실에 비추어,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 후손들이 어떤 방향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할지는 자못 뚜렷하다고나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 - 사할린한인 문제를 둘러싼 한.러.일 3국의 외교협상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2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지음 / 채륜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낯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족(異族)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도 치욕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보다 더 죄스러운 건 어떤 경로로건 식민 통치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체제에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한 동포들을 되돌아오게 하지 못했고, 아예 그런 일이 없는 양 까맣게 잊고 딴청을 피웠던 그 오랜 역사입니다. 미국은 여튼 자기 국적을 가진 "국민"들을 송환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않고 나서지 않습니까. 식민지로 떨어진 부끄러운 내력보다 더 심각한 죄의식을 가져야 할 게 바로 "동포에 대한 나몰라라식 방치"입니다. 이는 소위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이슈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분들은 엄연히 피해자인데도 일인도 아닌 동족에 의해 손가락질 당할까봐 그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사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진짜 아킬레스 건이라 할 사할린 동포 송환 문제에 대해, 국내에서는 거의 최초라 할 만큼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연구서입니다. 본격 연구서라서 현대사, 그 중에서도 2차 대전 후반부에 대한 소양이나 (이른바)북방 영토 문제에 대한 이해, (한국인이라서 당연하기는 하나) 식민 지배 기간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지식이 있어야 무리 없이 읽어갈 수 있습니다. 허나 좀 묘한 건, 설령 지식이 없어도 사명감이나 역사에 대한 죄의식만 갖춘 독자라면, 오히려 이 책으로 첫걸음을 떼어가며 공부를 할 동기, 수단도 마련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 그런 독자가 하나 보여서 하는 말이고요. 그 까닭이라면, 연구서라는 본분 외에 저자들께서 각별한 사명감으로 필치를 잇고 지면을 채우셨기에, 문외한인 독자에게도 어느덧 그 진의가 전해져, 무지와 자격의 결여라는 먼 도랑을 건너게 해 주는 일종의 다리 구실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세계의 역사학자들에게는 대략 20년 전, 하나의 보물 창고, 크리스마스 선물 보따리가 왕창 주어졌는데, 그게 바로 구 소련 기밀 문서의 공개입니다. 한국전 발발 책임 소재에 대해서도 그간 남침설, 남침 유도설, 북침설 등 온갖 입장이 난무했으나, 저 사건(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던 자료)을 계기로 특히 한국의 박명림 교수가 거의 확고부동한 정설로서 "남침설"의 기반을 세운 적 있습니다. 저는 이 책도, 사할린 한인 강제 억류 경위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입장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분야 연구 성과 역시 마땅히, 늦어도 십수 년 전에 이 정도가 달성되어야 했으나, 워낙 관심들이 적고 관련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이만큼이나 늦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으나 이런 알차고 멋진 연구서가 지금이라도 나왔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께 여쭤 보면, 해방 후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의 경우 그렇게나 군기가 문란하고 미개인 같은 모습이었다고 하죠. 이래서 특정 연령층의 경우 소련에 대한 이미지가 (이후 반공 교육 등과는 무관한 별개 팩터 때문에) 매우 좋지 못한데, 이는 예컨대 베를린 함락 이후 대거 자행된 집단 성폭행이라든가(이런 걸 합리화하는 인간 쓰레기들도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비슷하게 노출되기 마련인 한심한 행태들 때문에 세계인들 사이에 대략 사정이 비슷합니다. 그런 삼류 체제와 민족에 의해 반 세기 넘게 지배를 받은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이 불쌍할 뿐이죠. 헌데 냉전 체제라는 게,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자는 양(兩) 초강대국 사이에 공통적으로 책임이 지워지는 거라서, 미국 쪽 잘못도 없다고는 못 합니다. 동유럽 공산권은 미국이 조금만 도와 줬어도 언제 붕괴했을지 모르는, 매우 취약한 체제였던 겁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냐면, 이 사할린 동포 송환 문제 역시, 해방 이후 한국 정부에서 약간의 성의만 보였던들 그분들이 그렇게나 오래 낯선 이방에 억류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이 책의 충격적인 결론 때문입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흉악한 적국의 마수를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문제를 가슴 아프게 방치한 게 아니라, 치졸하고 구차한 잔머리를 굴리느라 그 많은 동포들, 즉각 모셔왔어야 했을 우리 겨레들을 내팽기치고 있었으며, 이는 부작위범도 아닌 사실상 작위범의 소행, 사보타지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제가 그 세대야 아니지만 읽으면서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이건 남의 겨레를 험지에 잡아간 일본인들의 만행보다 더 악질이라고 말이죠.

지금까지 사할린 동포 억류에 대한 통설은, 물론 소련 당국이 강제로, 어떤 필요에 의해 잡아두고 있었다는 게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게 여쭤 보면, 왜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갑자기 과학 기술 수준이 발전했느냐에 대해(핵무기도 만들고 우주 개발에도 앞장 서고), 종전 후 독일 과학자들을 대거 납치하여 그런 비약, 성장을 이뤘다는 대답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는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고, 실제로 베를린 점령 후 단지 자원과 지원이 부족해서 답보 상태에 머물던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지도부의 재량으로 마음껏 돌려 쓸 수 있는 국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판타지이긴 하나) 영화 <젠틀맨 리그>에서 살짝 배경이 바뀐 채 언급되죠.

이 책은 그런 통설에 대해 여러 근거를 들며 그 바탕을 헤집어(undermine) 놓습니다. 우선 여태의 상식은, 광대한 영토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비적성 국가의 인력을 잡아다 놓고 활용했다는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소련의  입장이 생각보다 아주 복잡했다고 전합니다. 군부에서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북으로 보낼 것을 주장했고, 사할린 지역 정부에서는 잔류를 고집했다는 거죠. 책에서는 또한, "인력 활용을 위한 목적이라면 보다 교육 받고 우수한 직능을 지닌 체류 일인들은 (패전국이니만치 다루기가 더 쉬웠을 텐데도) 왜 그리 일찍 송환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까 언급했던 "독일 과학자 문제"와도 맥이 닿은 이슈이지요.

책은 구 소련 외교 문서뿐 아니라, 근래 들어 시효 기간이 지나 하나 둘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 정부 문서를 참조하여, 사할린 동포들이 돌아오지 못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낱낱히 해부합니다. 일단 이들이 한국(남한)에 돌아올 시, 거주 자활 공간의 마련이라든가, 경제적 지원 문제가 아주 난감했다는 겁니다. 사정은 뻔합니다. 당시는 한국 국내 인구조차 부양할 형편이 못 되어, 아이를 하나만 갖자느니 가족계획을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느니 세계 인구 밀도 몇 위라느니 하는 정책 홍보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으니까요.

한국 정부는 묘한 잔머리를 굴렸는데, 일본더러 이들을 일단 "일본 영토 내로 불러들이고, 그들에 대한 피해 배상도 일본 정부가 알아서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아주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은 아닙니다. 사할린 일대는 당시 일본이 영유하거나 강제 점거하던 형편이었고, 이들을 징용, 징병 등의 명목으로 끌고 간 직접 주체도 일본이었으니 말입니다. 여튼 일본이 이를 수용할 리도 만무했습니다. 그들은 일본 내 거주하는 "자이니치" 관련 문제도 마지 못해, 위선적으로, 피상적으로, 건성으로 다루던 판이었고, 재일 동포 일부는 북한으로 송환했다가(속으로 얼마나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해했겠습니까) 문제를 빚기도 했죠. 어쩌면 이는 현안을 회피하려는 양국의 "자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했던 겁니다.

책의 제목은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입니다. 인질극에는 책임을 져야 할 악한이 있고, 가슴 태우며 경과를 지켜 보는 피해자의 가족이 있습니다. 헌데, 피해자의 가족이 어떤 이유에서건 인질범과 내통하여 인질의 고통을 내내 증가시키거나 방관했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불편한 진실은 애써 외면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야 합니다. 책에 보면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후 록히드 스캔들로 사임합니다)의 유감 표시가 잠시 언급되는데, 어째 역사는 이 시절보다도 더 도덕성을 상실하고 후안무치해져가는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한 촌동네에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행복과 성취를 일구기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먼 여정에서 어디에 출발점이 놓인다는 게 그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본 영화 중에 <미스테리어스 스킨>이라는 게 있는데, 주인공 청년이 이상한 방식으로 집착하는 "자아 실현"이라는 게, 자신이 태어난 벽촌 "허친슨"이란 동네에 대한 경멸, 증오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알고선 감상 후 허탈감과 연민의 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허친슨 타운"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기이하게도 개개인의 타인의 삶에 방관자적으로 임하거나, 아주 소극적인(파괴적일 때조차 소극적이더군요) 반면, 지금 이 소설 <베어타운>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치 우리 드라마 전원일기 같은 데에서처럼, 든든한 소속감과 연대의식 같은 게 구성원들 사이에 확실히 공유됩니다. 허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죠. 소통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더라도, 전혀 엉뚱한 작은 곳에서 서로 닮은 상처 하나가 있었다면, 두 공동체는 마침내 비슷한 양상의 파국으로까지 함께 치달을 수 있습니다(둘은 상대의 존재를 전혀 모르겠지만).

연대의식과 상호 부조 정신으로만 똘똘 뭉쳐 일어났다면, 공동체를 이끌어갈 때에도 계속 그런 식이면 됩니다. 베어타운은 그러나 출발과 몰락이 그런 식은 아니었습니다. 특정 스포츠, 예컨대 이 작은 베어타운뿐 아니라 인근 일대에서 다들 열광하는 하키 같은 종목(우리는 잘 이해 못하겠지만 북유럽은 물론 대서양 건너 캐나다에서도 거의 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죠)에서, 이 동네 출신 청소년들이 큰 대회에서 쾌거를 이뤘다거나 할 경우, 이제 마을을 살리고 죽이는 건 스포츠의 성취입니다.

"인기, 열광"은 첫째 무형의 분위기이고, 둘째는 타인의 호응에 전적으로 기인하는 겁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고 부나 영예를 가져다 주는 바도 없습니다. 반면 자존과 (한때의 것이라도) 재산, 주목의 획득이 그 인기에 기인했다면, 이제는 타인의 열띤 눈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게 사라지면 개체로서 견딜 수 없는 허탈감과 자존 붕괴 때문에 개인이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베어타운에서 일어난 "그 사건" 때문에 몇몇 관련자들이 견딜 수 없는 갈등(양심과 현실적 이익 사이의)에 빠질 때에도, 끈끈한 연대의식으로 서로를 떠받칠 듯만 했던 주민들은 묘한 "거리 두기"에 나섭니다. "그래, 옳은 일을 해야(do the right thing) 마땅하지. 허나 이 마을은 어떻게 할 거니? 팀이 이기고 지고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현실적 이익이 달렸는데?" "너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지고, 심지어 너도 행복해진다." 원작 소설과 각색 영화가 모두 화제가 되었던 <장군의 딸>도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그 소설(영화)에서는 "결코 방관자, 계산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최악의 배덕자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만.

예시한 다른 두 작품의 경우, 하나는 팀 버튼 식으로 몽환적이다가 최악의 비극을 각성하는 결말로 달리고, 다른 하나는 범죄 수사로 시작하여 누구도(생판 남이라고 해도)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가족사의 비극으로 마무리됩니다. 반면 이 작품은 끔찍한 범죄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희생자의 사연을 다루면서도, 수많은 등장 인물과 그등 사이에 빚어지는 갖가지 관계가, 마치 톨스토이 장편에서처럼 다채롭게 벌어집니다. 배크만은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관계의 다양성을, 적절한 해학과 풍자를 통해 여태 못 보던 풍속도로 변환하는 쪽에 능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소통과 관계라 해도, 한쪽은 이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역시 자신만의 편한 오해로 장막을 치고선 해석하고 이용하는 거죠.

읽으면서 이 작은 동네에 참 별의별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 나온다 싶었습니다.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우리 독자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혹은 어떤 주거 형태라도)에는 어떤 이들이 살까요? 유독 매번 얼굴이 자주 마주쳐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저런 사람이 다 살았나 싶은 낯선 얼굴도 있을 겁니다. 내 눈에 유독 자주 띄는 사람은 싫든 좋든 내가 그에게 관심을 두고 있고, 내 영혼의 나도 모르는 결이 어느 한 구석 그와 크게 닮았거나, 끔찍할 만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크게 다른 건 크게 닮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들었습니다. 반면, 어떻게 해서도 눈에 안 띄는 사람은 기이할 만큼 낮은 확률로, 내 영혼의 빛깔과 일일이 다른 경로를 골라 개성을 빚은 사람이겠고 말입니다.

촌동네에서 비슷한 성장 환경을 거쳐 성인이 된 사람들이라 해도, 전혀 공감대가 없거나, 심지어 적대하더라도 정이라곤 한 톨도 안 붙게 적대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반면 말 그대로 "애증"이라 할 만큼 좋은 쪽이든 아니든 끈끈하게 관계가 들러붙기도 합니다. 오베 아저씨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이야 단연 그 개성 찐한 오베 선생이지만, 알고 보면 오베를 그토록 두드러지게 했던 인물들 역시 좀 기이한 방식으로 스토리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죠. 배크만의 작품은 "양념 같은 조연, 빛나는 단역"이란 평범한 말로는 좀 설명이 부족합니다. 한 사람의 개성이 여럿으로 쪼개지면서, 다른 몇몇 인물들 사이에 들어가 큰 모자이크처럼 다시 반사된다고나 할까요.

소설을 읽다가 "혹시 등장 인물 소개 같은 건 없을까?"하며 앞으로 돌아가 봤는데, 정말로 추운 나라인 러시아 장편 고전 번역본에서 보통 그렇게 하듯 집안별로 간략한, 도움되는 가이드가 나와 있더군요. 열성적인 독자라면 최소한의 성실함을 발휘해서, 인물 관계도 정도는 2차원 메모지나 (하이퍼링크가 가능한) 워드 프로그램 등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설계된 "자신의 두뇌" 안에 스스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귀찮아서가 아니라, 책이 꼭 그런 장치를 (이미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독자를 위해서도) 마련했을 것 같아서 기대를 했는데, 마침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아 주어 반가웠습니다. 이 책에서처럼 어떤 가이드가 색다른 의미로 도움이 된 건 처음 하는 경험이기도 했습니다(뭐가 그렇게 개인적으로 반가웠는지는 저도 좀 혼란스러운지라, 시간을 두고 좀 생각해 볼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