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메시스, 때로는 약이 되는 독의 비밀 - 나쁘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에 대한 재발견
리햐르트 프리베 지음, 유영미 옮김 / 갈매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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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지만 한국인들의 고단한 생존 이력을 잘 보여주는 관용어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먹고 안 죽으면 보약이다." 원, 일단 섭취한 후 당장 치명적인 부작용만 발생 안 시켰다뿐 두고두고 몸을 축낼 몹쓸 성분이 왜 없겠습니까만, 한국전 같은 극한의 시련을 겪고 용케도 여기까지 끈질긴 생존을 이어 온 집단에서 당연 나올 법도 한 말이지 싶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니체는 대체로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오랜 정신적 혼란과 방황을 겪은 인물이긴 하나 삶의 신조 중 하나로 저런 말을 표현해 내기에는 대체로 안정된 환경에서 산 사람입니다. 들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되지만 여튼 (그의 다른 명언들처럼) 강렬한 진실의 일단을 간직한 말이긴 합니다. 물론 트집을 잡자면 한도 없는 예외와 반증에 취약한 테제이기도 하죠. 엊그제 죽은 모 재벌 그룹 총수의 삶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여튼 살면서 적절한 스트레스가 없다면 오히려 그 개체는 체질이 약해지고 이른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건 꼭 (니체와 국적이 같다거나) 뛰어난 생물학자가 아니라 해도 오래 전부터 여러 현인들(독일인도 아니고 생물학 전공도 아닌)이 해 온 말입니다. 소가 적당히 파리를 쫓기 위해 꼬리도 흔들어야 건강이 유지되는 것처럼, 외침(外侵)없이 장기간 평화만 이어지는 나라는 망한다고 본 학자도 있습니다.

책날개에서 (아마도 이 책 편집자가 정리한 글이겠지만) "호르메시스"는 "적응적 스트레스 반응"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본문 중에서는 p62:10에 정확히 이 어구가 등장합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말로, 자극을 뜻한다"고 합니다. 정확한 어원은 ὀρ′μαειν(호르마에인. 맨 앞의 따옴표같이 생긴 부호가 h 발음을 지시하죠)이란 동사이며, "자극하다"란 뜻을 가집니다. 고대 그리스어에 "호르메시스"란 말이 코인되었던 건 아니고, 한참 후 근세에 들어 독일의 약물학자들이 이 말을 창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 리하르트 프리베 박사는 1970년생입니다.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이지만, 예를 들어 "오늘날 젊은이들은 예전 세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온하고 유리한 환경에 살면서... " 같은 말을 꺼내는 통에 약간 의아해지기도 했습니다. 여튼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처럼 좋은 환경 속이라고는 하나, 앞선 세대보다 덜 움직이고 더 먹어대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평균 수명이 더 짧아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프리베 박사가 한창 젊었던 시절 유행한 트렌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 이론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리 느꼈던지, "사람들은 선형적이고 딱 나눠떨어지는 걸 좋아하지, 불규칙적이고 비선형적인, 예컨대 카오스적인 걸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사실 지금 젊은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그 정도나 지났으면 이제는 상식이 되었을 법도 하고 그 이론적 구조가 더 속시원히 해명되었을 법도 한데, 아직도 비선형 세계관은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현상적 기술에 머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분명히 설명되는 인과관계를 숭배하고 강조하며, 그렇지 못한 건 신비의 영역에 맡기거나 신의 권능 정도로 얼버무리며 묻어두길 더 선호한다."

왜 어떤 독성 물질은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가지 않고, 면역력을 오히려 강화시킬까요? 사실 제너가 250년 전 종두법을 발명했을 때 그가 착안한 이치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애들을 엄하게 키워야 인간이 된다면서, 감기라도 들면 한겨울에 홀랑 벗겨서 밖에다 세워 놓는 경우도 과거에는 허다했습니다. 저자가 하는 말은, 분명 어떤 한계를 넘지 않는 자극은 인체의 면역력과, 그 외 아직 명쾌히 규명되지 않은 어떤 적응력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 배로 비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가 세 배의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밭에 비료를 뿌렸는데 그냥 방치했을 때보다 더 수확이 적을 때도 있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비선형적 진행"이라든가 상식에 반하는 인과관계 등이, 모두 호르멘시스의 신비한 효능과 관계를 갖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세기 전에 비해 많은 편익을 누리긴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선조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기대했을 법한 수준보다) 더 캄캄한 무지에 싸인 현실을 냉정히 직시할 수 있는 좋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진화의 기본 속성은 변이성(variability)이다." 그 위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적응적인'이란 말은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형용사다" 이 대목은 책 전체에서 결국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돕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자극이 없는 환경에서 개체는 무엇에든 적응하려 들지 않습니다. 험난한 환경에서 시련을 딛고 살아난 종족은 이후 외부를 향해 거대한 정복의 행진을 시도하는데, 과거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무슬림들이 그러했고, 노르만 바이킹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몽골의 정복자들, 또 몽골의 압제를 오랜 동안 겪다가 떨치고 일어난 러시아인들도 이후 무서운 기세로 시베리아로 동잔해 왔습니다. 반면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번영하다 몽골에 정복당하고서 계속 숨을 죽여야 했던 우크라이나 인들은 지금도 내분에 시달리는 형편입니다.

파라켈수스는 저자처럼 처음에 약리학으로 학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이들에개 꽤 흥미로운 삶을 산 사람입니다. 오백 년 전에 살다 간 이 약리학자의 이름을 놓고 저자는 이런저런 분석을 시도합니다. 출생시 거의 무작위로 붙은 사람 이름자 하나에 무슨 그런 큰 의미가 있을까만은 여튼 실제 생의 궤적과 인물이 품은 가능성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기라도 한지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대목이 흥미롭기는 합니다 여튼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 싶은 건 "동종요법"의 신비한 효능입니다.

오래된 서양의 민담 속에, 똑 같이 생긴 환약(알약) 둘 중 하나를 고르게 하며, 희한하게도 상대가 무엇을 고르든 반드시 이 자가 살고 상대방은 죽게 되는 이야기가 있죠. 답은, 평소에 이 자가 조금씩 조금씩 독성을 섭취하여 면역력을 길러 두었다는 게 비결입니다. 이 이야기가 BBC 드라마 <셜록> 1화에도 등장하는데, 바보 같은 셜록은 50/50의 확률에 목숨을 걸다 왓슨의 명사격 솜씨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한 위기에 빠지고, 끝까지 놈의 속임수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등동물이든 고등동물이든 호르메시스의 장점을 이용하지 않는 생물은 없다. 인간 역시 야생초를 오래 전부터 치료제로 활용해 왔고, 운동의 이로움을 깨달았으며... " 운동도 사실 아주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신체 역량과 열량의 무의미한 낭비이며 노화의 촉진 계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는 여기지 않고, fitness를 위해 하루 일정량의 운동은 필수로 받아들입니다. 이 역시 저자의 관점에선 호르메시스 기제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포 영역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메커니즘 중 하나가,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은 세포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다." (p231) 놀라운 것은 이 과정을 통해, 미래에 종양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병든 세포(암세포는 엄연히 자기 체계의 일부이며, 기생충과 동일시하는 건 극단적인 무지의 소치이죠)를 제거하며, 저자는 수컷 초파리가 일부러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이런 세포를 조기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는 게 관측되었다고도 합니다.

"호르메시스는 쉽게 무력화되지 않고, 엄청난 잠재력을 갖는다."

인간은 플라스틱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노화하고 무력화합니다. 저자는 이런 의심을 품어 보았다고 합니다. "왜 인간은 일단 생식 능력이 없어진 후에도 바로 사멸하지 않고, 너무나 긴 잉여의 시간 동안 생존하다가 죽는 걸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손자 손녀를 돌보며 오히려 건강이 좋아지고 지병의 증세가 완화되었다는 노인들도 우리 주변에 많죠. 저자는 책에서 위트를 여러 번 구사하는데, 이 경우도 "아이 돌보는 스트레스가 즐거움을 능가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고 단서를 답니다. 이 책의 주제가 스트레스 관리를 통한 면역력 강화라는 점에서 꽤 우습기도 한 서술이죠.

모르는 영역은 그저 미지의 상태로 남겨 놓아야 사람은 더 흥분과 보람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비선형 인과관계에 어떤 "설명"을 시도하는 카오스 이론에 대해 반감(일단 저자는 그러시다고...)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그러나 이 호르메시스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오랜 동안 개봉 안 된 채 남아 있었으나 이제 신비의 거풀이 한 자락 한 자락 벗겨지며 오히려 인류에 희망을 안기는 원천이 되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사실 이는 체계적으로 매뉴얼화한 학자들의 도움보다, 우리 일반인들도 자기 일상에서 선을 넘지 않고 실천에 옮길 수 있기에 더 유익한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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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 달라이 라마와 유전자의 생명토론
아리 아이젠.융드룽 콘촉 지음, 김아림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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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현인들은 그런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질문 중에서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수위는 없다고 하며, 이 의문이 해결되면 다른 모든 (하위의) 문제들은 절로 답이 찾아진다는 거죠. 헌데 이 정도 레벨의 아득한 의문에 대해 과연 인간의 지혜로 답이 찾아질 가능성이란.....

존재의 근본과 기제를 찾는 아찔한 사유까지에는 못 미쳐도, "우리는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정녕 모든 여정의 끝이며, 아무것도 남지 않는 종결인가?" 같은 질문 역시, 우리 필멸(아니었으면 좋겠지만)의 인간들이 그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DNA에 대한 지식이나 분자생물학에의 이해가 진전되기 훨씬 이전, 명징한 언어 체계가 아닌 정직한 직관으로 이미 붓다, 바르다마나 같은 대각성인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불가에 입문하여 평생을 정진 수련하는 스님들 역시, 해법을 구하셨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여튼 마음의 평안만큼은 진즉부터 확보하셨을 터입니다. 이런 분들께 한 번 정도는 저 아득한 근원의 의문을 여쭙고 조언을 구하는 것도 현명한 시도입니다.

"생물학자들과 티베트 승려들이 만나 생명과 죽음을 논하다!" 흥미진진합니다. 생물학자들이라고 해서 생명의 탄생과 사멸, 혹은 이후의 어떤 과정(그런 게 있다고 일단 가정한다면)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깊은 통찰을 얻기에 딱히 유리한 지점에 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며칠 전 93세의 나이에 말래이시아 총리로 북귀하여 "적폐 청산"에 시동을 건 마하티르(의사 출신입니다)는 젊었을 적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과학은 '어떻게'만 열심히 설명할 뿐, '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렇다고 딱히 과학을 폄하하는 취지로 받아들일 건 아닌 게, 과학이야 본디 "왜"에 대해 설명할 이유가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죠. 여튼, "어떻게"에 대해 다른 어떤 직업인보다도 할 말이 많은 이들이, 평생 동안 "왜"마 생각하고 탐구해 온 분들을 만난다면, 정말 흥미롭고 진지하며 유익한 대화가 이뤄질 법합니다. 당사자들도 당사자들이지만, 보는 우리들이 더 알뜰한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p92를 보면 앙드레 지드의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바닷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나아가지 않는 한, 새로운 대양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실 바닷가에만 서도 그 막막한 바다의 볼륨에 인간은 넉넉히 압도됩니다. 해안 지역에 이웃한 산악지대에 올라 바닷가를 내려다봐도, 어쩜 저렇게 엄청난 물의 더미가 저편에 뭉쳐 있나 하는 느낌에 사람은 누구나 아찔해집니다. 그러니 바닷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노 저어 간다 해도, 인간은 그 대영의 깊이와 폭을 감히 직관으로 재지 못합니다. 대양 한가운데에서도 이곳이 대잉인 줄 모르는 게 인지의 한계입니다.

한계의 극복이란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개체는 길어봐야 백 년을 살 뿐이지만, 인간이란 종(種)은 지금의 기본 틀을 갖춘 후에도 무려 이백만 년 이상을 생존해 왔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희생하여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은 부모 대(代)의 형편을 조금씩 조금씩 개선하여 이만큼이나 번듯한 외양과 내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개체의 삶은 유한해도 종의 생육과 번성이 장구하고 성공적(현재까지는요)이었기에, 인간은 상상 속에서나마 불멸을 꿈 꿀 자격이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되세요." 이는 다분히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인문 고전(그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인문 분야의 명저라고 평가해야 마땅합니다)을 다분히 의식한 언명이겠습니다. "자기가 죽으면서 그 유전자가 생명의 순환 고리를 계속 돌 수 있으니(p95)" 개체의 유한한 발버둥으로는 감히 닿을 수 없는 경지를, 이미 종의 설계와 작동 매커니즘은 진즉부터 예비, 가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세균이 인간으로 환생한다?" 이 책의 저자는 첫째 불교의 사유 체계에 대해 그저 지적 호기심이나 건조한 교양 수준을 넘어 체질적, 정서적으로 교감, 몰입할 수 있는 분들이며, 다음으로 미국에서 손 꼽히는 명문대에서 정통으로 생물학을 전공, 교수하는 학자들입니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 그 가르침의 정수를 다른 차원에서 음미, 탐색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식 사고에선, 공감하고 교분할 수 있는 그 어떤 의식도 "다른 생명체로의 환생"이 가능하므로, 이론상 내생(來生)에 인간이 세균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저자는 "의식(consciousness)"를 깊이 탐구하며, 이른바 세포의 항상성(homeostasis)와 이 개념을 연결지어 봤습니다. "대체 순환과 윤회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사실 천 수백여년 전 티벳 승려들은 지사에서 가장 현명하고 방대한 지식을 교습받아온 엘리트 집단이었고, 날란다 승원이라는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대학에서 부단히 수련해 온 문명의 담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계승한 현재의 승려들 역시 지상에서 가장 오랜 지혜와 비의(秘義)의 수호자들이기에, 저자는 이분들께 현대 생물학의 정수를 가르치고 공유하는 작업이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마치 구글이 인공지능을 개발하여, 유한한 인간의 연산 능력으로 채 알아내지 못한 각종의 시나리오와 묘수를찾으려 들듯이 말입니다. 일단 승려들이 생물학 원리의 심오한 정수를 습득하면, 그들의 깨우침은 보다 선명하고 더 깊은 곳을 향하겠으며, 이는 다시 평균적 인류의 정신 성숙으로 피드백, 선순환될 수 있습니다.

대체 불교와 생태학 사이에 어떤 유기적 관계가 있을까요? 책은 1980년대에 이탈리아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거울 뉴런"에 대해 짚고 넘어갑니다. 이 이슈는 과학 대중서, 심지어는 자계서에서도 워낙 인기 있게 다뤄진 터라 구태여 중등교과 과정에서 배운 적 없어도 누구나 입에 올리며 화제로 활용하곤 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핵심 교의 중 하나가 "제행무상 제법무아"입니다. 사람은 자아, 개체에 집착해서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타인 타물에 활짝 열린 마인드를 가지면, 공감 능력이 향상될 뿐 아니라 나도 살고 남도 사는(live and let live) 윈윈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벌써 당대에 타인과 동족, 나아가 생물 보편과 공생할 수 있는 이는, 수직 차원(종족 번식) 이전 수평 범위에서 불멸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입니다. 물론 덜 떨어진 분자는 생명과 화합이 아닌, 범죄에의 부화뇌동으로 일신도 망치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데, 본인은 이 어리석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이런 자는 정작 필요한 공감 능력과 참여에 대해선 유전자가 태생부터 그리 조작된 듯 청개구리 행보를 합니다.

CBCT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cognitively-based compassion training의 약자로서, 이 책의 저자도 핵심적으로 참여하는, 바로 에모리 대학 소속의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CBCT의 중요 성과는 특히 저자의 친구분(ㅎㅎ)인 계세 롭상 박사와 저자의 학술 동료인 찰스 레이전 교수 두 분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책 후반부에서는 내내 "롭상과 척(찰스의 애칭입니다)"으로 불리니 유의해야겠습니다. 웹에서 자료를 찾으실 때는 Charles L. Raison으로 키워드를 삼아야 자료가 잘 발견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서양도 동양 문화도도 본연의 제 색깔을 유지할 때에야 가장 고도로 기능한다." 그래서 에모리 대학의 이 프로젝트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며 거의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사실은 책 읽기 전 저부터도). 저자는 그런 반응도 다 예상했다는 듯, "다분히 낭만적인 편견과 윤색, 왜곡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라며 서양인의 눈으로 걸러진 미화나 곡해로 치닫지 않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 태도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Enlightened Gene"인데, 불교의 영어식 용어(번역)에서 부처님, 혹은 크게 깨달은 이를 두고 The Enlightened One이란 표현을 본래 씁니다. 사람이 진정 세상사와 자기 마음 가는 길을 거리낌 없이 이해하고 수용하며 원만의 경지에 이르려면, 장내 미생물이나 심지어 분자, 세포 단위까지 하나하나 깨달아 광명에 의해 밝아지는 체험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깨달음의 그날 그런 느낌이 아니셨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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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급회계 (상) - 제4판
김성기 지음 / 다산출판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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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기 교수님은 한국 회계학계의 대 원로인 분입니다. 학원가(CPA, 세무사, 관세사 등)에서 이름 날리는 강사들은 많지만 그들의 저서는 대부분 이런 큰 학자들의 책을 짜깁기한 것들이죠. 김 교수님은 이 분야 관련 참고서나 문제집을 여럿 출간하셨지만 유독 "중급회계" 교과서만큼은 이 다산출판사에서 내시는군요.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제가 배울 때는 대략 1,000페이지 정도의 단권 체제였는데, 지금은 보다시피 이렇게 상하권 분권 포맷입니다. 연습문제 별권 해답집까지 포함하면 총 세 권이네요.

교수님이 쓰신 책은 K-IFRS 라고 따로 한정어가 붙은 시리즈도 있습니다. 그런 책과 이 책의 차이점은, K-IFRS 류는 그야말로 국제회계기준의 한국형 룰에 한정해서 충실히 설명해 둔 것이고, 이 책은 이론상으로 다양한 입장이 나올 수 있는 여러 사례를 일일이 다 언급한 체제라는 점이죠. 케이스마다 설이 갈릴 수 있는 건 법학뿐이 아닙니다. 회계 역시, 구체적인 거래 사건을 놓고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분개할 수가 있습니다. 가령 매출채권의 분기별 수령을 놓고도, 원장에 채권액을 정액법으로 상각할 수도 있고, 유효이자율법으로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회계 공부를 하면서 어느 한 가지 입장만 줄창 암기하는 건 당장 시험 합격에는 유리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머리를 일찍 굳게 하는 악습입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다산출판사의 편집은 독자가 참 편하게 볼 수 있는 미덕이 있습니다. 분개는 차변과 대변의 포맷 안에 사항을 기입하는 건데, 이게 편집이 요령 부득이면 아주 독자 입장에서 피곤합니다. 특히 문제집이나 수험서가 아니라 이런 기본 이론서를 공부할 때는 국제회계기준에서 채택하지 않은 다른 입장도 이해를 해야 하는데, 상충되는 두 학설의 차이가 무엇인지 좀 명쾌하게 도시하지 않으면 독자 입장에서 정말 헷갈리기 마련이죠.

회계는 알뜰하고 통쾌한 매력이 있습니다. 예컨대 매출채권 처리에서 일단 상품을 기초(期初)에 넘기고, 매 분기(혹은 반기, 혹은 연말)마다 분할하여 대금을 받는다고 하면, 이걸 그저 들어오는 현금만 장부에 꼬박꼬박 기입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3년에 걸쳐 들어오는 돈(그나마 아직 손에 쥔 돈도 아니고 외상 매출금 채권)을, 예를 들어 1억원이다 하면 바로 1억원을 자산으로 간주(이걸 회계학 용어로 "인식'이라고 합니다)해서 되겠습니까? 미래의 금액은 액면 그대로의 가치가 없고, 적정한 이자율로 "할인"을 해야 온당한 평가입니다.

이게 그저 나 혼자 참고하자고 적는 장부라면 뭘 써도 무방하겠으나, 예컨대 상장이 이뤄진 기업이라면 자산 가치가 뻥튀기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국제회계기준도 존재하며, 그 더 이른 시기부터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정타당하다고 여겨지는 회계관행(이른바 GAAP)"이 논의되었던 거죠. 그런데 이처럼, 알고 보면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는 회계학의 깊은 이론적 바탕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다지려면 이처럼 여러 입장,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다룬 체계적인 교과서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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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대신 권총을 든 노인
대니얼 프리드먼 지음, 박산호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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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지팡이 대신 권총을 든 노인"이지만, 아주 정확한 압축은 아닙니다. 왜? 주인공 노인은 엄마 배 아프게 하고 태어나서 "두 번 다시 다른 장례식에는 갈 필요가 없을(본인 자신의 표현)" 죽음에 이르기까지, 몸을 의지할 지팡이 따위는 손에 쥐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그런 위인이기 때문이죠. 모르겠습니다. 성질을 못 참아서 남(젊은이든 거인이든 뭐든)을 두들겨패기 위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 들어야 할 때라면 또.

지팡이 같은 건 생전 들 일이 없을 성깔 괄괄한 이 노인은 전직 경찰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더티 해리>의 감독이 돈 시겔인데, 같은 유대인이기도 해서 우리의 주인공 버크 샤츠(그땐 노인이 아니었죠)에게, 이런 화끈한 형사의 성격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또 지금까지도 손자뻘 형사, 경관들에게 레전드로 통하는 대단한 이력과 평판을 남긴 분입니다. 예전 관용어 표현으로 "누구누구도 나 앞에서 할아버지라고 하고 갔다"는 꼭 그 문면이 그대로 적용될 만한 인생이었습니다.

이 사람 성격 보통 아니라고 잔뜩 세팅을 꾸미고 소설이 시작하는 게 아니라(그런 시도는 여태 많이 읽어서 새롭지 않습니다), 독자의 눈살을 약간 찌푸릴 만한 당혹스러운 에피소드로 대뜸 소설의 문이 열립니다. 하기는, 모르겠네요, 망자의 가는 길을 꼭 그 마음 편히 해 주려고 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주는 게 꼭 의무는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고, 사안이 사안인만치 죽어도(....) 용서 못 할 일이 따로 있기도 하겠죠. 우리의 주인공 노인이 '유대인'이란 점도 감안은 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 폴란드에서는 "나치의 황금 열차"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고 이의 조사를 위해 공권력 일부가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알고보니 놈들은 그저 강도였어." 나치가 그토록 집요하게 유대인을 말살하려 들었던 이유는, 1차 대전 패전 후 완전히 파산했던 독일의 거덜난 경제를 메꾸려 들었던 게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라고까지 (노인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합니다만, 여튼 꼭 나치 아니라도 전쟁이란 "남는 장사"를 벌이기 위한 셈속이 대개는 크게 작용했던 게 맞습니다. 사방에서 약탈한 물자를 금괴로 바꿔 은닉한 후, 패전이 가까워오자 장교들이 저마다 몇 덩이를 꿍쳐 남미 등으로 은신했다는 음모론은 그간 꽤 인기 있게 퍼졌고, 일부는 아마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죽어가는 친구에게 "차마 못 들을 말"을 들었고, 본인 자신은 살 만큼 살았으니 새삼 무슨 물욕 같은 게 없지만(젊었을 때에도 없었을 것 같네요), 죽어가는 친구를 더 잡도리까지 해 가며 저승길을 재촉한(보기에 따라선 버크 샤츠 노인이 죽였다고도 볼 수 있는...) 터에, 원치 않게 금괴 추적 소동에 그는 말려들게 됩니다. "한심한 성직자" 캐릭터가 하나 등장하는데, 나쁜 습관(도박 중독) 때문에 교회 살림을 거덜내기 생긴 카인드 목사(의사가 아니라 신학박사)가 또 우연찮게 이 금괴 이야기를 듣고 가당치 않은 기대를 걸게 되며, 목사에게 도박빚을 받아 내어야 할 또다른 사람도 이 미친 모험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확천금의 꿈은 사람 여럿의 영혼과 실제 삶을 망쳐 놓기 마련인데,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담담한 평정을 유지하는 건 가장 성질 급하고 과격한 이 노인입니다.

"버크"는 별명이고 노인의 별명은 "바루흐"입니다. 글쎄.... 기독교 외경(제2경전)에도 "바룩 기"가 있기도 합니다만, 여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크게 다른 점이 이 "curmudgeon"은 종교적 의무감은 별반 의식하지 않은 듯합니다만 유대인으로서 인종적 자부심은 엄청나다는 점입니다. 말빨도 장난 아닌데, 87세의 나이에도 "원래의 치아를 그대로 유지할 만한" 대단한 기력이고(기력 좋다고 꼭 이가 그대로 붙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의 성깔과 언변은 이 범상치 않은 "이빨"에서 연원하는 게 아닐지 ㅎㅎ(말 그대로 이빨 좀 까는 노인이죠)

노인에게는 아픈 사연이 많습니다. 보통 이런 이들이 승진 고과에 유리한 실적은 잘 못 올리고, 자신이 속 시원해지는 사건만 집요하게 매달려 결국 "나쁜 놈들"을 잡아내는 그런 타입이죠. 전설로는 남았지만 일생을 윤택하게 보낼 만한 승진이라든가 다른 세속적 기반은 마련 못 했고, 독자들에게 충격인 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기까지 했던 과거입니다. 마치 오베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이분 곁에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후송되어 와서 5주 동안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 곁을 내내 지킨 아내분이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넘어지기도 자주하고 그것말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이제는 거꾸로 자신이 아내를 돌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노인의 거침 없는 언동에 웃음이 나면서도 이런 장면에서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는데, 이 소설의 매력은 이처럼 독자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과정이 꽤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장르의 공식은 그간 독자들에게도 다 밝혀졌기 때문에, 현대의 독자를 매혹하려면 뭔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리는 맛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 본 듯만 해도 버크 샤츠 노인의 동선이 계속 흥미진진한 건 바로 이 때문이죠.

아들을 일찍 보냈지만 명문대에 재학 중인 손자가 있는데, 할아버지처럼 사람 본성을 꿰뚫어 보고 능숙히 다루는 재주는 없지만(그건뭐 당연하죠)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아 이 노인과 좋은 요철 궁합을 이룹니다. 구글, 와이파이, GPS 따위가 뭔지 말만 들어도 (그 맑던)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 노인은, 이제 멀리 이스라엘 당국과도 접촉하여, 반 세기 전 국가, 종족 차원뿐 아니라 개인 레벨에서까지 원한을 쌓은 지글러란 전직 나치 장교를 추척하러 나섭니다. 노인의 나이는 공교롭게도 87세인데, 왜 저기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이 "four score and seven years..."로 시작해서 학교 교과서에서도 가르치고 문예, 영화에서 수없이 패러디되기도 하죠. 노인의 성향과 기질이 심지어 작중 배경의 나이에서까지 암시되기도 하는 터라 웃음이 나왔습니다(작중에서 노인은 88세 생일을 새로 맞습니다).

대개 장르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정해진 경로만 걷습니다(그래서 장르소설이죠). 허나 이 작품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튼 주인공 노인의 성격 일관성 구현을 위해 좀 불편한 사건도 대뜸 앞에 배치한다거나, 카인드 목사의 생각지도 않은 끔찍한 운명을 느닷 제시해서 독자들을 경악하게 만듭니다. "정보를 좀 찾아 보려고" 옛 직장(경찰서)에 들러 새파란 후배들과 반가운 만남을 갖기도 하지만, 노인의 과거에 묻혔던, 결코 죽음의 순간까지도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악감정을 대를 이어 물려준 그 망령(을 대변하는 다른 후배)과 매우 불편한 조우(오가는 말까지 아주 험악한)도 하게 됩니다. 이런 장치가 확실히 다른 작품에서는 못 보던 것이라 신선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왕년에 그렇게 유명하셨던 분(그렇게 적을 많이 만들고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고 그 손자가 말하죠)이 노년인들 무난히 평탄하게만 보낸다면 그게 더 설득력 없는 소립니다. 대사 속에 쉴새없이 유머가 구사되기도 하는 터라 독자로서 장르 취지, 성격을 충분히 착각할 만합니다.

반 세기 가까이 세월이 지나며 인류는 그간 나치만큼이나 질이 나쁜 인류의 공적(公敵)을 적지 않게 접해왔습니다. 어쩌면 특유의 우둔함 때문에, 세차게 질서를 휘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파멸해 버린 나치는 다루기 쉬운 적수였는지도 모릅니다. 노인은 세상을 선명한 선과 악의 가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아야 할 악이 존재하고, 이러한 악과 비루한 내통을 한 자는 평생의 지기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게 그의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고 기질입니다. 이런 변하지 않는 "꼴통 기질"은, 1970년대 대중이 그토록이나 열광했던 지조 있는 영웅 "더티 해리"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고, 때로 나치 같은 더러운 손에 장악되기도 하는 "변치 않는 황금"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영어 표현에 "솔리드 골드"란 게 있는데,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노인의 정의감이라든지, 유머나 플롯 등 어느 면에서도 딱히 버릴 게 없는 소설의 (의외로) 탄탄한 내실을 두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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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황제 - 로마보다 강렬한 인도 이야기
이옥순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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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습기를 머금은 고장입니다. 섬은 아니지만 다른 문명권과 뚜렷한 경계를 이루며, 어느 다른 종족도 일구지 못한 독특한 성취와 개성을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영국이 거대 통합권역 식민지를 건설하기 전, 유구한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이들 문명이 이룩한 정치 단위가 바로 "무굴 제국"이었습니다.

"GDP 세계 1위였던 무굴!(띠지에 나옵니다)" 아닌게아니라 인구도 엄청나고 워낙에 산출되는 물산이 많으니(이것이 인구 지지력으로 다 이어지는 거죠), 정확한 통계야 현재 남아 있는 게 없다 쳐도 전혀 과장된 문구가 아닙니다. 본디 수백년 전에는 정통 토속 신앙에 기반한 굽타 왕조가 다스렸는데, 페르시아 저 너머에 웅거하던 이슬람이 10세기 이후 이곳까지 넘보게 되죠. 페르시아나 그를 널리 포함하는 호라산 고원의 유목민족, 널리 우즈벡 일대의 전사들이 무슬림화하면서 인도 아대륙의 역사는 아주 복잡하게 꼬이게 됩니다.

"인도의 운명을 걸고 치러진 대회전은 이처럼 싱겁게 마무리되었다"(p26)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바부르의 전략과 재치가 워낙 뛰어났던 이유도 있지만, 라지푸트의 30개 부족이 이브라힘 술탄에 맞서 그를 지지했던 배경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지푸트는 지금도 인도 공화국의 필수 구성을 이루는 거대한 주(州)이며, 이곳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투지가 굳건하여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독립 세력권을 이뤄 왔습니다.

저자의 해석은 꽤나 명쾌하고 풍부한 감성을 띠는 게 특징입니다^^ 독자인 저도 십여 년 전 인도에 다녀왔었고 일 때문에 이쪽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서 어느 정도는 익숙한데요. 마치 시오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등장인물과 역사적 대사건에 대해 일일이 주관적 평가를 하는 태도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브라힘 술탄은 인기는 없었으나 원칙은 있었다" 같은 평가를 보고선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원칙만 있는 지도자는 항상 인기를 잃게 되는 게 어느 정도는 숙명일까요?

여튼 토착 힌두 세력이 그렇게나 오랜 세월 동안 몰아내려 애쓴 "델리 5왕조 술탄"의 마지막 군주인 이브라힘이 제아무리 변변치 못한 위인이었다 쳐도, 가즈니 왕조, 노예 왕조 이래 수백 년 동안 델리 같은 요충지에 웅거하며 큰 권위를 행사해 온 이 체제를, 불과 반나절만에 무너뜨린 바부르의 수완이란 실로 대단했습니다.

라나 상가가 어떤 책략과 구상을 품었는지는 p30에 자세히 나옵니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어쩌면 저렇게나 태평하게 자기 편할 대로의 망상을 즐기는지 모르겠다. 마치 머리(아니 짬뽕사리) 안에 음란한 상상만 가득 채워 놓고, 고전조차도 저질 도색물로 낱낱이 변환시키며 늙고 썩은 욕망을 밑바닥 사이비스럽게 충족시키는 졸혼 치매 노파와 다를 게 뭐 있을까?" 하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라나 상가에게는 그 나름의 의존할 근거가 있었지요. 앞서 말한 대로 10세기 이후부터 고원의 무슬림 전사, 정복자들이 주기적으로 힌두 아대륙 북서부를 침공해 들어왔는데, 이상하게도 이 덥고 습한 지역의 엄청난 재보(財寶)를 냉큼 갈무리한 채, 혹은 일부만 챙기고선, 이들은 자기 본향으로 돌아가버립니다. 정 관리할 필요가 있으면 자신들이 부리던 "노예"를 황제로 책봉하고서 말이죠. 라나 상가는 일종의 "적응적 기대"를 발동하여, 이 바부르도 결국 제 땅으로 돌아가겠거니 결론을 내린 겁니다.

고원의 정복자들이 힌두스탄에 대해 품은 경멸감은 예로부터 유명합니다. 이 책에서도 누차 인용되는 대로, "재물은 풍성하나 사람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소회는 바부르뿐 아니라 앞선 시대의 여러 지배자들이 공통적으로 표현한 감정입니다. "일을 시키려면 그에 딱 알맞은 기능을 지닌 장인들이 많은 건 확실히 좋다." 이는 마치 중화 대륙을 점령한 몽골, 만주의 유목 종족들이 처음 정복 사업을 완수하고 천자 놀음을 할 때 피력한 소회와 비슷합니다.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다 뿐이지 전사의 후예로 타고난 운명인 저들 유목민족도, 중원의 농경 민족에 대한 거리낌 없는 경멸감을 무시로 표현했습니다. 청 말기에 어떤 이는 "황실의 재물과 권위를 차라리 양이에게 넘겨줄지언정 가노(家奴)인 한족(漢族)에게 줄 수 없다."는 극언까지 내뱉었죠.

알렉산더 대왕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 받은 그 풍부한 소양으로 내내 그윽한 운치 담긴 행적을 남겼듯, 바부르 역시 시인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다양한 기록을 후세에 전합니다. 감성 풍부한 부친에게 유감스럽게도 그 낭만적 기질만을 더 많이 물려받았는지, 후계자 후마윤은 처음에 이브라힘 술탄의 잔당을 잘 다루지 못해 꽤 고생을 합니다. 세르 샤는 이브라힘의 부장이었는데, 오히려 모시던 주군보다 더 수완이 좋았는지 거의 아대륙의 패권을 후마윤에게서 빼앗기 직전까지 갑니다.

"당신에게 힌두스탄 전체를 넘겨주었으니(무슨 자랑임?) 내게 라호르만은 남겨 주시오."
"당신을 위해 카불은 남겨 놓았으니 라호르에서는 물러나시오."

카불은, 잘 아는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이며, 라호르는 지금도 파키스탄의 경제 요충지이고 영국 식민 통치 기간에도 핵심적인 구실을 한 곳입니다. 이 책에는 후마윤이 고전한 이유 중 하나를 놓고, "유목 민족 특유의 분할 상속제"를 들고 있습니다. 사실 대제국의 경영과 분할 상속은 서로 함께 맞물려 갈 수 있는 관계가 전혀 아닙니다.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가문과 국가가 영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투르크 제국은 형제(왕자)들 간의 죽음을 불사한 투쟁을 통해 제국의 후계자를 결정했죠. 낭만적이고 맘 좋은 바부르가 자식들에게 두루 영토를 나눠 주다 이런 혼란이 초래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단, 출생상의 서열보다는 능력 위주의 대접이 마땅하다는 유목 민족 고유의 정서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의 조부가 말한 대로 힌두스탄에는 뛰어난 인재가 참으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제국은 1인 기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크바르 대제는 마치 조부가 여러 협력자들과의 제휴로 대제국을 일군 것처럼, 아직도 도처에서 일어나는 패권에의 도전에 대해 능수능란한 정치술과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병용하며 맞섰습니다. 책에는 암베르 왕국의 만 싱과 아크바르 대제가 평생에 걸쳐 이룬 인연에 대해 재미있는 서술이 나옵니다.

"신이 천국에서 아름다움을 나눠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만 싱의 검은 피부를 놀리며 스물 살의 젊은 아크바르가 만 싱에게 건넨 농담입니다.

만 싱 같은 뛰어난 인재에게 제국의 위신과 지위를 적절히 배분하며, 제국은 나날이 기반을 다져 나갔습니다. 다신교의 폐습을 결정적으로 혐오하며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게 이슬람 정통파였지만, 아크바르 대제는 융통성 있게 제국 내 세력 균형을 도모하며 타 종파에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힌두 고전 음악도 애호하며 탄센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등, 아크바르는 편협한 특정 종족만의 군주가 아닌 만민을 애호하고 보살피는 "제국의 통치자"로서 면모를 더욱 과시했습니다. 인도 역사에 길이 남을 현군으로서 그가 기려지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훌륭한 아버지 밑에 꼭 불초한 자식이 나와서 골칫거리를 만드는 건 동서고금이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사이비 밑에 더한 사이비 치매 딸이 태어나서 대대로 가정을 망치고 망상 속에 들어앉아 추한 자위를 일삼는 건 그보다는 드물지만 말입니다. 무라드는 아버지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술과 난행에 중독되어 아버지의 속을 문드러지게 하고(p108), 마침내는 노망한 닭처럼 먼지구덩이에 둘러싸여 비참하게 고독사합니다. 망나니 아들 살림은 어울리지 않게도 "자한기르"라는 이름으로 황제위를 잇는데, 세상에 과연 천도가 있는 것인지 이 현명한 아버지이자 "진정한 세계의 정복자"는 사실상 패륜 자식에게 찬탈과 시역을 당한 셈입니다.

대체로 동아시아 제국사의 패턴에서 이런 식으로 정권을 잡은 후계자의 연이은 패착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까지 가는 게 보통이나, 자한기르는 제 아들 쿠슈라우(그 할아버지 아크바르가 무척이나 아낀 손자)에게 도전을 받고(업보죠), 막내아들의 반란을 겪는 등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어른"이 됩니다. 마치 사이비 닭머리가 어려서부터 사이비를 과학으로 잘못 알고 세뇌 당해 평생 치매에 시달리며 나잇값도 못한 채 추태를 떠는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죠. 자한기르는 타 종교 타 문화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고(이거 하나만은 아버지한테 참 좋은 본을 받은 것입니다), 반항의 기운이 보이면 가차없이 진압하여 제국의 정치적 안정도 기했습니다. 마치 조선의 신문고처럼 "저정의의 줄"을 마련하여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직접 돌보려 애도 썼습니다.

"그런가? 나의 후비가 실수로 너의 남편을 죽였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내 아내가 너의 배우자를 죽였으니, 너도 저 여자의 배우자, 즉 나를 죽이면 되지 않겠느냐. 내 어명을 내려 둘 터이니, 나를 네가 죽였다고 해서 누구도 너의 신상에 해를 못 끼치게 하리라."

물론 "쑈"이겠지만, 쑈치고는 대단한 쑈입니다. 여튼 이처럼 공정하고 사심 없는 통치자라는 인상을 신민에게 심어 주어, 초기의 찬탈자 패륜아 이미지를 많이 벗었다고 저자는 평합니다.

이 다음은 샤 자한이 제국을 다스립니다. 샤 자한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타지 마할"을 지은 바로 그 군주입니다. 무슬림은 본디 일부다처가 법제이며, 더군다나 샤 자한은 세상에 둘도 있기 힘든(생각해 보니 동시대에 셋 정도는 있었겠네요) 제국의 통치자인데 배우자 여럿을 둔들 전혀 흠이 될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꼭 보면 저 오스만 제국에도 그랬고, 일구월심 한 배우자만을 바라기하는 통치자가 이처럼 드물게 나오긴 합니다. 제가 더 이해 안 되는 건, 이처럼 가정적인 부모님을 둔 왕자들이, 어쩜 그리도 잔인하며 인륜의 기본을 저버리는 이상한 성품으로 자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종의 둘째(적자 중)아들 수양대군 이유가 저지른 악행과도 유사하죠.

아우랑제브는 광신자였습니다. 어쩌면 그 선조들 중 가장 나쁜 형질만 골라서 타고난 게 아닌지, 여태 종묘 사직의 위대한 군주들이 극구 피하던 길만 골라서 걷고, 오늘에 계승해야 할 업적만큼은 기를 쓰고 내던진 못난이였습니다. 어설픈 정복자 흉내를 내다 제국도 망쳐 놓고, 제 자녀들과도 불화하는 등 한 개인으로서도 성격 파탄자였습니다. 말년에는 완전히 망령이 든 듯 실의와 좌절에 가득한 나날을 보냈는데, 타고난 제 깜냥을 돌이켜 보지 않고 미친 망상에 젖은 자들의 말로가 꼭 이와 같습니다.

이후 무굴제국은 처연한 행로를 보냅니다. 삼백 년 전 창업자 바부르가, "골목대장" 정도로 전락한 이브라힘을 신나게 두들겨 제위에 오른 것처럼, 페르시아의 정복자(정확하게는 그 위 고원 지대 아프샤르 족의 우두머리였습니다만 여튼 사파비 조의 몰락 이후 이 일대를 잠시 제패했습니다) 나디르 샤에게 처참하게 공략당한 후(델리 시민 2만명이 학살 당했습니다. p254) 완연한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이보다 얼마 전에 사이드 형제 같은 간신에게 황제가 농락당한 적 있고, 이후 샤 알람 같은 군주는 굴람 카다르 같은 악인에게 모진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합니다. 이때 이름만 남은 군주를 보위해 준 곳은 마라타 동맹이었으니, 이 동맹은 백여 년 전 어리석은 광신자 아우랑제브가 그토록 멸절하려 든 바로 그 힌두스탄 중부의 적대 세력이었다는 게 아이러니를 더합니다. 이후 무굴 제국은 거의 형해화되었다가 대영제국에게 병합되는 사정, 우리가 잘 알죠.

예전에 시공사에서 디스커버리 총서(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디쿠베흐트 시리즈를 한국어로 번역한 기획)의 일환으로 "무굴 제국"이란 책을 낸 적 있습니다. 지금 이 책이 그 책보다 분량도 많고, 도판도 대개 양이 비슷하지 싶으며, 그 책에서 살짝 얼버무린 대목을 더 명쾌히 더 감성적으로 서술했으며, 무엇보다 한국인저자의 시각이 반영된 점도 탁월한 미덕입니다. 인도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필수 교양서로 누구한테나 추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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