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쳐들고 나서 "이게 원래 이렇게나 두꺼웠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하긴 피터 래빗 아니라 어떤 텍스트, 작품이라도, 글자 크기와 일러스트 레이아웃에 따라 볼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긴 합니다. 그렇다 쳐도 피터 래빗 이야기는 역시 이런 버전으로 읽어야 또 제맛이구나 하는 생각, 민음사의 이 책을 읽고 확인하게 된 감상, 혹은 원칙(?)이었습니다.

피터 래빗은 물론 귀여운 토끼입니다만, 인간세상도 그렇고 적자생존 원칙이 지배하는 자연계에서 어떤 녀석이 귀엽게 생겼다고 포식자들이 그를 봐주거나 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못생긴 동물보다 이런 애들이 더 손쉬운 먹잇감(easy victim)이 되곤 하는데, 어느 학자가 "포유류의 어린 것들이 몹시 귀여운 이유는 동정심을 유발해 생존 포지션의 유리함을 도모하려는 진화상의 이유"라고 한 주장에는 그래서 동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피터 래빗은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행동과 판단도 서투릅니다. 곤경에 처하기도 일쑤이고 매번 그를 자상히 돌봐 줄 "후견자"가 곁에 있지도 않습니다. 위기에 빠지면 그만의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피터에게는 타고난 인복 같은 게 있는지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면서 음으로 양으로 친구들도 많이 곁에 모여드는데, 사실 평범한 우리네 인생도 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에나 이르게 된 겁니다. 많은 어린 독자들이 국적 불문하고 피터 래빗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다른 캐릭터는 다 잊어버리거나 커서 못 입게 된 옷 갖다버리듯이 스스로 "극복, 삭제"하는 게 보통인데, 유독 얘가 많은 이들의 추억과 동심 속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왠지 뭔가 동일시가 이뤄진다는 거죠.


피터 래빗의 세계에는 유력한 피붙이들(?)도 꽤 나오는데 예컨대 "고양이에 대한 세간의 평판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버니 영감 같은 사람..이 아니라 토끼가 그 대표격이지요. 이처럼 개성 있고 흥미로운 캐릭터가 매 에피소드마다 새로 등장해서 독자의 관심을 끕니다. 이 영감님은 놀라운 솜씨를 보여서 고양이(공포의 대상이었던)를 혼내키는데 제가 주목한 건 그 직후 벤에 대해 내린 조치(?)입니다. 피터는 귀가한 후 래빗 부인에게 칭찬을 받으며, 이 래빗 부인이 "양파를 꿰어 토끼 담배 다발, 허브 다발과 함께 천장에 걸어 두었다."는 문장(p120)으로 저자(물론 액자 밖의 베아트릭스 포터 부인)는 해당 에피소드를 마무리합니다. 이런 건 일종의 트로피라고 봐야 할 텐데, 피터 래빗이 성장하면서 요런 자그마한 성취가 앞으로 내면의 자긍, 자신감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겁니다. 또 이런 장치, 화소들이 어린 독자들에게 어트랙션으로, 동일시 지점으로 기능하겠고 말이죠.


"말을 하는 동물" 모티브가 서양인들의 의식 중에서는 꽤 중요한 비중인가 봅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이는 "성경에서 말을 하는 동물이 나오는 예는 딱 두 번인데.."라며 발람의 나귀를 그 중 한 예로 듭니다(나머지 하나는 낙원의 뱀). 물론 이걸 지적한 사람은 아시모프가 처음이 아닙니다. 우리 동아시아인 같으면 허황된 이야기라 해서 설화 문학 자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고, 하물며 그 중에 말하는 동물이 몇 번 나오니 마니를 카운트하는 수고는 더군다나... 여튼 여기서 포터 여사가 "그나마 말을 하게 세팅한" 동물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고 끝까지 말이 없는 부류가 따로 있습니다. 주인공이 피터 래빗이니 같은 토끼 종족들은 당연히 상당수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적대하는 애들 중 상당수는 그저 "말 못하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죠. "사람"은 피터 래빗의 종족에게 꽤 위협적입니다만, 여튼 책을 읽는 독자들 자체가 "사람들"이니 "말을 못한다는 세팅"으로 소외시킬 수는 없습니다.(단, 예컨대 "총 쏘는 사람"처럼 단역으로 등장했다 나가는 이들은 끝까지 말이 없습니다)

뭘 맛있게 먹다가 탈이 나면 풍미의 쾌감이 쉽사리 잊혀졌다는 유감스러움 외에, 당장의 육체적 괴로움, 친지들 앞에서 흉한 꼴을 보여야 하는 난감함, 좋은 자리를 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에 오랜 동안 그 기억이 남을 겁니다. 더치스(Duchess)는 자신이 파이 틀(원어로는 patty pan)을 삼켰다는 걱정, 공포 때문에 지레 탈이 나는데, 나중에 의사선생이 오자 겁이 나서 "그냥 맥만 짚어 주셔도 낫겠어요." 같은 우스운 말도 합니다. 에피소드 마지막에 "펌프 아래 파이 틀이 놓여 있었는데, 맥거티(매고티. Maggotty) 선생이 배려하여 놓아 둔 것이었다." 같은 말은 원문에 없고, 이 한국어판에서 "그야말로 독자들을 배려하여" 보충해서 삽입한 겁니다. 정황상 추측이 가능하지만 갑자기 문장이 다른 장면으로 튀면 어린 독자들은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뜻인지 당혹할 수 있죠. 또, 매고티 선생은 그저 의약학 지식에만 정통한 게 아니라 진정 환자를 살필 줄 아는 인술(仁術)의 대가라는 점 우리는 알 수가... ㅎㅎ

p276을 보면 "홀쭉한 디기탈리스 사이에 마음에 드는 그루터기가 있었다." 란 문장이 나옵니다. 그루터기도 마음에 들고 아니고 처럼, 어려서는 모든 사물과 대상에 호오의 감정을 일일이 부여하는 게 또 정신의 특질입니다. "디기탈리스"는 혹시 추리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게 심장약의 재료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티 안 나게 죽이는 설정에서 자주 등장해서 이름을 아실 텐데, 물론 피터 래빗 이야기에 섬뜩한 설정이 자주 나오긴 해도 그런 의도로 등장한 게 전혀 아님은 당연합니다. 이 식물로서 디기탈리스에 대한 설명은, 이 민음사판의 최고 강점 중 하나인 "풍부한 역주"에 딱 필요한 만큼만 잘 나와 있습니다. 영국 아이들에게는 일상의 이름인데, 그곳과 우리가 섭생이 크게 다른 만큼 많은 동식물 지칭 보통명사들이 마치 학술용어처럼 낯설게 다가올 텐데, 그렇다고 이를 유치하게 일일이 "현지화" 시키는 것도 내용 왜곡이라는 이유에서 마냥 선호할 방법은 아닙니다. 하긴 요즘 한국의 아이들이 모국인 한국의 자연에 대해서나마 어디 구체적인 이름과 생태를 잘 알기나 하겠습니까만.

p438에 보면 오소리에 대해서 각주 표기가 있길래 뭘까 싶어서 뒤로 넘어가 보았는데, 그저 종으로서 오소리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오소리는 물론 우리가 아는 그 오소리이며 여기서 캐릭터 이름은 토미 브록입니다. 하긴 아무리 한반도 자생종 중에 오소리가 있어도 아이들이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그나마 인기도 없는) 형편이니 책에도 주석이 달려야 하겠지요. 이 종은 badger라고 저들이 부르는데, 이 이름을 두고도 영화나 문학에서 각종 말장난(pun)이 다 있습니다.

애플리 대플리
눈은 작지만 눈치는 참 빨라!
애플리 대플리
파이를 좋아해! (p538)

Appley Dapply has little sharp eyes,
And Appley Dapply is so fond of pies!

이 민음사판에는 위의 "참" 같은 단어를 볼드 고딕으로 처리했는데, 포터 여사의 원문에도 특별히 대문자를 써서 강조한 부분이 있고 민음사판은 일일이 이런 의도를 존중해서 텍스트를 처리했습니다.

세슬리 파슬리 동요(Cecily Parsley's Nursery Rhymes)도 이 책에 안 빠지고 실렸는데요. 특히 p538에는 "세 마리 눈먼 쥐" 노래 가사가 나오죠. 이것 자체는 17세기까지 기원이 거슬러올라가는 꽤 오래된 것입니다만 여튼 포터 여사의 버전으로 현대 독자들에게 더 친숙하긴 합니다. 이것의 배리에이션 중에 007 중 한 편인 숀 코너리의 <닥터 노> 맨 처음에 등장하는 "Three blind mice in  a row"가 있는데, 이 곡은 킹스턴 칼립소가 부른 것입니다. 정말로 소경 노인 세 명이 눈도 안 보이면서 어딜 살금살금 잠입해 들어가는데 배경에 이 곡이 깔립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무서운 사람들이었다는 건데, 그 코믹하면서도 오싹한 분위기가 어쩌면 이 포터 여사의 동화의 그것과도 다닮았습니다. 이처럼 피터 래빗 이야기는 그 이전의 설화 전통도 충실히 계승했고, 나온지 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다양한 다른 영역에 다시 파생적 영향을 끼치는 중이니, 교양을 위해 성인 독자들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9
막스 베버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저는 고(故) 정운영 교수님이 진행하던 E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학자분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정운영 교수님도 정말 글 잘 쓰시지만 그런 경지는 노력하다 보면 어찌어찌 흉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스 베버 처럼 문장을 쓰려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안 될 것 같기만 합니다." 이런 말은 막스 베버에 대한 극찬과 존경의 마음도 잘 표현했지만, 동시에 정 교수에게도 대단한 경의를 바치는 것입니다. 19세기 유럽 사회학을 정초(定礎)한 거인이자,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등과 나란히 당대 3대 지성으로 꼽히는 천재 중의 천재였던 인물에게, "그저 조금 처지는 정도"로 평가 받는 건 설사 공치사라고 해도 엄청난 호의이겠기 때문이죠. 저 "3대"의 명단을 보면 두 사람이 독일인이요, 한 사람이 프랑스인으로서 끼어 간신히 옛 "그항드 나시옹"의 체면을 살리고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도 그렇지만, 막스 베버 역시 정교하고 독창적이기 이를데없는 사상과 체계를, 지극히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 안에 담아낸 문필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 고전, 즉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를 읽는 이들은, 저작에 표현된 탁월한 발상과 제안과 함의를 궁구(窮究)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기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표현과 문장 구축의 아름다움에 흠뻑 매혹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해도 뭐 아주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 고전이 현대에 들어 재해석될 필요가 큼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어와 독일어처럼 구조의 큰 차이를 보이는 언어 사이에 번역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현대지성의 이 번역본, 특히 박문재 선생님 같은 신학, 인문의 대가가 옮기신 텍스트에 더욱 큰 기대를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박문재 선생의 영문 고전 번역도 뛰어나지만, 특히 이분이 젊은 시절 학창기를 보내시기도 한 곳이 독일이기에, 이 독일어로 된 불후의 저작 번역은 특히나 탁월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기도 하는데, 우선 이 책은 집필 당시에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믿는 사회, 나라는 잘 살고, 구교도 중심의 공동체는 빈곤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첫째, 그런 믿음은 막스 베버가 활동하기 이백여 년 전에도 이미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본디 16세기의 종교개혁 자체가, 성직자라는 특수 계급을 인정하기 거부하고 신앙이나 생산 활동에서나 봉건적 신분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중산 계급, 부르주아지의 몸부림에서 비롯한 겁니다. 막스 베버는 이로부터 한참 뒤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인데 어떻게 그런 신조(타당하든 아니든 간에)를 처음 창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근대 유럽의 지성 수준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신교도들이 자립을 외치며 새로운 종교 신조를 빚어나가던 사조 속에, 역시 새 시대의 기제로 서서히 대두하던 자본주의 윤리(이 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이들도 많지만)가 어떤 상관 관계를 맺어 나갔는지, 그 구체적 과정을 규명하는 게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오히려, 책 서두에도 바로 나오듯, 많은 유럽인들이 믿어 오던 대로, 과연 "구교=빈곤, 신교=풍요"의 등식이 올바른 것인지부터를 그는 검증하고 있습니다. 또, 스스로가 밝히듯이 "이처럼 널리 퍼져 있고 많은 이들이 옳다고 (자랑스럽게[신교], 혹은 체념하듯[구교]) 믿는 바"라고 하면서, 자신 이전에 이런 생각이 이미 주류의 위상을 점했던 현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신교는 곧 부의 원동력"이란 공식을 바로 막스 베버의 이 고전이 처음 도식화하고 증명했다고 여기는 상황을 보면, 그는 지하에서 매우 당황해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내 책을, 심지어 서문이라도, 읽기나 한 것일까?"

이 고전은 명문장도 명문장이고, 막연한 믿음과 편견의 더미 속에서 진실로 타당한 명제만을 과학적으로 추출하여 보석 세공하듯이 정립해 나가는 그 추론 과정도 경이롭기 짝이 없지만, 완독하면서 또다른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천재는 언제나, 과학("과학'이라는 단어를 자연과학에만 한정시키는 끔찍한 백치도 있죠)적 진리를, 이처럼이나 고단하고 까다로운 절차, 차라리 고행이라 부를 만한 과정을 거쳐서 찾아내는 것일까?" 박문재 선생 같은 진짜 실력자의 손을 거친 명료한 문장을 통해서도, 막스 베버가 진리를 세공해 나가는 그 과정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구경만 하는 입장에서도 피곤하기 짝이 없는데, 만들어내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천재는 천재이기에 이런 까다로운 탐험, 프로젝트도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고 손쉽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가창의 달인들이 정말 힘 안 들이고 고음을 쭉쭉 뽑아내듯이 말입니다.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노력을 해야 이런 거인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음을 새삼 자각하고, 좀 겸손해질 필요도 있겠고 말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다양한 종파, 입장, 계열을 분석하는 작업은 실로 구절양장의 길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중국사의 5호 16국 분석 정리가 그렇게나 힘들다고도 하는데 다분히 엄살이고 과장이며, 각 교단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기도 난망한 지경이지만 그저 계보만 올바로 파악하기도 너무나 힘듭니다. 막스 베버의 주전공, 관심사가 종교학에만 머문 게 결코 아닌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전, 명저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히려 그를 종교학자로 잘못 아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 책은 차라리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에 한 발씩을 걸친 책인데도 말입니다), 책은 본격 종교학자들보다 더 세밀하고 권위 있게,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 널리 분포한 교파들의 구조를 분석합니다. 종교 신조의 탐구가 본연의 목적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눈이 트였다는 종교학자들의 고백이 잇따랐을 만큼 말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가 일개 직공일 시절부터 "새로운 교파 하나를 만들어 보자"며 동료들과 열심히 토의하는 장면이 나오죠. "원, 입에 풀칠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종교 창시자 흉내를!"이라며 비웃는 이들도 있었을 텐데, 그 정도가 아니라 그들 이민자들의 선조가 유럽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프랭클린의 동시대에도 아마 이단, 이교라며 대뜸 단죄부터 받고 화형장의 한 줌 재로 사라질 위험이 아직은 엄존했을 터입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개인의 내심에 대해 체제나 사회가 일절 간여하지 않고, 그저 당사자가 사회적 경제적 신용을 잘 지키느냐에만 주의를 집중했던 합리적인 풍조가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대체, 장로교나 감리교나 재세례파 (그 외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숱한 입장들)중, 누구를 프로테스탄트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런 건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융통성과 관용, 합리주의야말로 자본주의와 근대 정신의 본체입니다. 막스 베버의 이 고전은, 다름 아닌 이 점을 지적하는 게 원 의도인데, 터무니없는 무자격자들이 감별사, 호메이니 흉내를 내며 훈장질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찬 일입니까.

"이단에 속하거나 신앙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이미 내면적으로 종교적 전통에서 벗어난 도시 귀족 계층... (중략)... 교회는 그저 겉으로만 신앙을 가져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이미 묵시적으로 펼쳤던 것이다."(p111) 이 대목에서 막스 베버는, 자신들의 행각이 어떤 관점에서도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자각을 이미 이들 계층이 가졌다는 점까지 노골적으로 지지합니다. 따라서, 행여 허상에 지나지 않는 "자본주의 정신"을 순진하게도 막스 베버가 도그마화했다는 (정반대의) 선입견 역시, 이 충실한 완역본은 정면으로 무너뜨립니다.

막스 베버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지성미는, 일단 극한에까지 부정, 비판을 가해 보고, 그럼에도 여전히 시련(trial)을 견뎌내는 황금 명제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권위와 광휘를 (아닌 척 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기교에 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의 전성기 복싱 스타일을 보면, 마치 맞아나 주겠다는 양 가드를 다 내려도 결국 한 대도 안 맞고 타격도 안 받습니다. 타고난 천재, 테크니션이라야 이처럼 자기가 스스로 판 곤경에서 우아하게 빠져 나오는 재주를 피울 수 있는 거죠. 막스 베버가 스스로 행하는 자체 검증은, 가장 완강하고 적대적인 비판자들이 시도할 법한 것보다 더 철저하고 더 집요하며 논리적입니다. 그의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황무지 같은 암반 지대에 성능 좋은 포크레인이 들어와 개간, 또 개간하며 옥토가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을, 마치 독자의 머리 속에서 체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고전 고전 하는 건, 삼류 저자의 시시한 수백 권 책을 읽는 삽질을, 이런 명저의 일독 한 번 수고로 대신할 수 있는 그 "경제성"에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파는 상품의 원가는 얼마인가 알기 쉬운 원가계산
시바야마 마사유키 지음, 권흥수 옮김, 박종주 감수 / 이코북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사업, 특히 제조업에서 원가 계산은 경영의 필수 팩터입니다. 품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원가를 낮추는 기법이야말로 기업의 사활이 걸린 관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영학과 커리에서 원가의 관리와 연관된 과목이 그렇게도 많이 개설된 건 이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저자는, 더 이상 원가를 낮출 여지가 없기에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마른 수건 짜내기라도 해 보려고 요즘 빅데이터 빅데이터거리는 것이다, 뭐 이런 주장까지도 내세우는데, 워딩의 모냥새는 좀 빠져도 이게 업계의 실상 일면을 정확히 담기는 한 겁니다.

그래서 원가의 정확한 측정, 그저 경영자 본인이 혼자 적당히 윤색해서 혼자 마음 편하자고 내놓는 수치가 아니라, 정말로 자기 업체의 현황을 정확히 반영하는 원가는, 마치 육체적 건강 지표만큼이나 그 객관적 실상이 중요합니다. 한편, 아무리 정확하게 측정했다손 쳐도 이를 통해 향후 경영의 어떤 비전을 제시받을 수 있는지가 사실은 본질이죠. 이 정도 나오면 잘 하고 있는 건지, 사장님은 잘 하신다고 하시는 거지만 타 경쟁업체는 그보다 훨씬 낮은 원가로 관리한다면 문제가 심각한 겁니다. 어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겠죠.

원가는 대개 학자들이 셋으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해당 기업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한 원가입니다. 이를 두고 actual cost(실제 원가)라고 부릅니다. 학생의 성적이 또래들보다 높은 애도 있겠고, 좀 못하는 애들도 있듯, 이는 기업의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것과 같습니다. 같은 업종 영위한다고 다 같은 수익을 올리는 게 아님은 당연하죠.

그래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싶은, 평균이라기보다는 사업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모범적인 "성적" 같은 게 있을 텐데, 이게 "표준(standard)원가"입니다.

어떤 표준이 있다고 해도 반드시 개별 기업이 이에 일일이 맞출 수 있는 게아닙니다. 그래서 양자, 즉 표준원가와 개별 기업의 현실(실제 원가)를 적정 수준에서 절충하여, 장단기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원가가 바로 "정상(normal)원가"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보며, 본디 규범이란 뜻을 지닌 norm이란 어근의 깊은 연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규범에 못 미치는 기업은 업계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 저자는 일본 분인데 젊은 나이에 까다로운 자격을 요구하는 여러 시험을 통과한 재간꾼이신 듯합니다. 또 세무, 회계 분야 지망생들에게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명강의로도 유명한가 봅니다. 일본인 저자 중에 이런 분들이 있던데, 어차피 동양과 서양은 사고 방식과 관점이 다른 만큼 뭔가 동양인의 공감대 위에서 서양 지식을 풀어 주는 설명, 대중서가 필요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입문자들에게 요긴한 지침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0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재란 무엇일까요? 나면서부터 물론 일정한 자질을 타고나는 게 천재의 본연적 정의에 맞아떨어지겠지만, 그저 하늘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은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재능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그 부모와 가정, 학교, 사회가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야만, 자아실현과 공동체 기여가 동시에 가능한 소중한 인적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J S 밀은, 그 부친 제임스 밀에 의해 천재 교육을 받고 자라난, 어찌 보면 성장 과정에서부터 과도한 관심을 의식하고 자라난 프로젝트형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사실 꼭 천재로 자라난 이들뿐 아니라, 왕실의 후계자, 재벌가의 2세, 3세 등이 다 같은 운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축복과 시선, 관심은 오히려 당사자의 성격과 심성에 상처를 줄 만한 재앙일지도 모르며, 실제로 이 부담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해 보통 사람만도 못한 폐인의 행로를 걸은 숱한 예들도 우리는 접하곤 합니다.

J S 밀 역시 그런 위기를 소년, 청년기에 여러 번 겪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가 아닌, 마치 신(神)과도 같은 부친에 의해 세심하게 꺾꽂이되듯 자라나는 인생이, 아무리 병충해로부터 안전하고 겉모습을 화려하게 꽃피워도, 생의 매 단계를 자유의사로 누리며 정직한 감성으로 제 삶을 부대끼지 못한다면, 그저 야생의 비천한 잡초보다 더 불행한 영혼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J S 밀이 논하는 자유는, 그래서 다른 이들의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도덕 철학 논의보다 훨씬 절실한 깊이를 가집니다. 창조주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인생에 무슨 자유가 있을까 싶은 회의 속에서, 그래도 자신은 그 와중에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는 대견스러운 자각, 통찰, 더 나아가 자신만 못한 모든 타인들에 대한 동정과 공감 가득한 시선으로의 이행, 이 전부가 어쩌면 "지적인 괴물"에 그칠 수 있었던 J S 밀이란 한 개인의 위대한 환골탈태요, 대오각성을 통한 인류와 사회의 구원이라 평가해 봄직한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보다 이백년 앞서 태어나고 활약한 영국의 시인, 사상가로 존 밀턴이란 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 <아레오파지티카>는 1644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해는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반란에 의해 망한 연도이기도 하죠. 이 저서는 이른바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을 처음 체계화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절대 권력(정치든 종교든)이 미리 정하여 대중에 강요하기보다, 백인 백색의 사상과 주의를 자유롭게 표방하도록 하여 그 중 가장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은 이념이 사회를 이끌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1644년 당시에 이런 파격적 주장을 그나마 가장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널리 퍼뜨릴 수 있었던 게 영국 사회이며, 이후 유럽과 세계를 통해 가장 왕성한 경제와 문물의 발전을 이룬 것도 다 이런 정신적 인프라의 건전성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이웃 중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어느 나라는, 특정 검색어를 인터넷 상에 일절 노출되지 않게 한 조치를, 마치 자랑이나 하듯 관변 매체를 통해 홍보하는 중입니다. 엄연한 독재자를 독재자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 이걸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2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런 우리 촛불 혁명의 참된 의의와 기치가 가장 절실히, 최우선적으로 수출되어야 할 곳이 바로 저런 체제속이라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이백여 년이 지난 후, "대체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의 의의란 무엇인가?"를, 여태 이뤄 온 모든 도덕철학과 인식론을 총동원하여 명료한 언어로 새로이 규명한 저작이, 어느 "세기의 천재"에 의해 다시 집필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자유론>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바로 자유이며,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은 벌써 인간이 아닐 뿐 아니라, 혹여 우리의 곁에 이 소중한 천부인권을 누리지 못하거나 박탈당한 이들이 있다면, 그 자유의 달콤하고 유익한 숨결을함께 나누고 늘려야 할 사명감을 다시 인식하는 게, 우리 모든 자유인의 본분임을, 이 고전은 준열하고도 품위 있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정치 공동체들의 규모가 커졌고, 무엇보다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법률을 통해서 개개인의 사적인 삶에 속하는 세세한 부분들에 지나친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지배적인 여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가해져 오는 도덕적 압력의 기제는 더욱 집요해졌고, 심지어 그런 압력은 사회 문제보다도 개인과 관련된 문제에서 더 심각해졌다." (p54)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개인과 대치하는 사회적 권력의 압박"이란, 반드시 야만적인 독재 체제의 탄압이나 폭력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개인을 억누르는 "전체의 의견"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일 때에조차, "사적인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시도"는 결국 그 도덕이나 종교의 건전한 기반조차 무너뜨릴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손톱만큼의 정당성도 갖추지 못한 독재정권의 전제적 횡포야 새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개인의 양심이 누리는 자유는, 비록 그것이 전체의 시선에서 일탈이나 방종으로 비춰진다 해도, 그 소중한 개체 자유의 존중으로부터, 사회 전체가 누리는 인권과 자유의 기반이 비로소 생성될 수 있음을 J S  밀은 일찍부터 통찰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전처럼 아주 많은 수는 아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조에 대해 아무 합리적인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타당하며 온건한 반론에 대해서조차 묵묵부답인 채, 심지어 피상적인 반박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대꾸를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권위자로부터 한번 의견을 이식 받은 후에는 마치 광신자가 도그마를 숭배하듯 아무 의심 없이 죽은 정신의 맹종으로 이를 받들며.... " J S 밀은 이처럼, 대체 아무 합리적인 성찰의 계기조차 갖지 못한 채 무슨 음울한 짐승마냥 정체 불명의 주문을 읊조리며 "어설픈 꼰대짓"을 하는 일부 무지한 계층에 대해,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아둔한 과거의 잔폐라며 신랄한 비판과 건전한 우려를 표방합니다. 이런 자들은 때로 겸손과 소탈을 가장한, 그 속은 거짓으로 가득찬 유사 반성의 표백을 통해 무리의 신망을 모으려 책동하지만, 그 본질이야 설익은 자기 연민, 나아가 오만과 독선의 비겁한 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썩은 위선자들의 행보가 마치 사회 정의의 목소리인 양 통용되는 사회는, 참된 의사 소통의 자유도 없고 건설적 토의의 장도 폐색된, 죽은 망령들의 섬뜩한 염불만 가득한 공동 묘지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천재의 본질은 독창성입니다. 독창성은 당연하게도 개개인 고유의 특성에 대한 섬세한 존중과 배려에서만 싹틀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이미 이룰 것을 모두 이룬 완벽한 사회일까요? 만약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욕망을 충족받고 성장한 이라면 그리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겠으며, 설령 그런 이라 해도 성장 과정에서 새로 생기는 욕구를 매번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적으로 소유한 자원에도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편익 체계가 그의 눈높이를 미처 만족 못 시킬 수 있으며, 오히려 이런 이들일수록 더 높은 차원의 희구를 품게 마련입니다. 예술이나 기발한 테크닉이 이런 환경에서 최상의 성과를 꽃피우는 건 오히려 당연하며, 천재(말하자면 이 책 저자 J S 밀 같은 이) 역시 본연의 잠재력을 최대 범위로 달성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개성들이 하나같이 점잖은 도덕률에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J S 밀은 이런 사례에 대해서조차, 개성과 사적인 영역이란 엄격히 존중되어야 하며, 어설픈 자신만의 독단을 함부로 타인의 삶에 잣대로 들이대지 않는 절제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물며, 무엇을 올바로 판단하거나 바로잡을 힘, 지혜도 없는 주제에, 마치 관용을 베풀며 참아준다는 식의 가당찮은 허세를 떠는 작태란, 진정 하나의 코미디일 뿐입니다. 그렇게 개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해서, 사회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창의력으로 인한 혁신입니다. 완벽한 사회라면 이런 걸 억눌러도 됩니다. 사회와 체제가 완벽하지 못하기에, 개성은 자유롭게 뛰놀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진화와 발전과 도약이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p162를 보면 당시만 해도 만연했던 중국 여인들의 전족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미친 폐습의 경우에도, 이를 합리화한 봉건 체제는 마치 여성의 미(美)를 소중히 배려나 한다는, 참으로 가당찮은 썩은 구실을 들먹인 게 아니었겠습니까? 억압과 순치의 시도는 비단 성(性)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분포한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 구도 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탈 코르셋" 운동이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자유의 가치는 모든 억압과 통제의 기제를 썩은 문짝처럼 걷어차 버리려는, 인간 통성의 의기와 어느 하나 통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봉건적 정체와 빈곤을 탈피하게 된 건, 개개인의 자유와 권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자각하고부터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전족을 늠연히 벗어던지는 그 순간, 나도 자유롭고 남들도 행복해지는 공존 공용의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악독한 미세먼지를 깨끗이 정화하고 타고난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 출발선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로지 자유, 자유의 덕목일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틈새 경제 - 소비자의 틈새시간을 파고드는 모바일 전략
이선 터시 지음, 문세원 옮김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아마존닷컴의 성공 요인을 흔히 "롱테일 마케팅"에서 찾죠. 버려지는 듯한 사소한 부분들을 모아모아 공략하면 의외로 큰 셰어를 확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확실히 웹 진열의 장점은 별의별 희한한 수요를 가진 고객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지 않고도 효과적인 청약, 판매가 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편, 이토록이나 쓸모 있던 많은 부분이 그동안 무의미하게 버려졌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도 됩니다.

사실 이런 각성은 우리 일상의 작은 습관, 그 개선으로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어느 자계서를 읽어 봐도 대가(大家), 부자들의 결론은 얼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모아집니다. 미국식 개척, 자조(自助) 정신의 원조로 여겨지는 벤자민 프랭클린 역시 그 자서전 상당 챕터들의 소결론은 바로 "Time is Money"입니다. 나면서부터 부모님께 물려받는 재산이야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시간만큼은 누구나 공평하지 않습니까. 어디 몸이 불편한 데가 있다면 그런 분들이야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요량대로 쓸 수 없다고나 하지만, 사지놀림이 원활한 이가 공기처럼 넉넉히 주어진 자기 시간 관리 하나를 못 한다고 하면 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이 글을 쓰는 저부터도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기기가 많은 경제활동인구의 시간, 그 중에서도 특히 10대, 20대 등 젊은 층의 시간을 뺏는다고는 하지만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특히 "회사 휴게실의 장점에 (중략) 이동성과 옵션을 크게 더하는(증가시키는)" 면이 크다고 합니다(p89). 우리하고는 조금 정서가 다른 대목도 있고, 아마도 여기서 근로자는 사무직이 아니라 육체 노동자에 좀 가까운 듯합니다만, 여튼 휴게실에서 이른바 "미디어 군것질거리"를 제공하는가 하면, (저자의 관점으로는 이게 더 중요한데) "사교(社交)의 정치학을 피해갈 수 있다"는 거죠. 이것이 지시하는 정확한 맥락은 몇 페이지 앞에서 발견됩니다. "일터란, 다양한 인종과 사회적 지위가 만나 충돌하는 자리인 동시에 동료의 개인사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자리다." (p85)

서평 서두를 이 토픽으로 꺼낸 건 지극히 당연한 게, 심지어 시간 관리의 달인이자 100달러짜리 지폐의 주인공인 벤자민 프랭클린마저도알 수 없었을, "모바일 기기"의 등장으로 인해 획기적 전환점(저자의 관점이자 동시에 우리 일반 독자들의 상식이기도 하죠)을 맞게 되었다는 게 이 책의 주요 논지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주요 포인트야 물론 2007년 아이폰의 등장이지만, 그 외에도 페이스북이 선보인 뉴스피드 기능 따위가, "개인별로 맞춤화한 뉴스 제공자 역할을 하도록 재설계해, 사용자의 소셜 네트워크 안 활동을 보도하고, 사람들에 관한 유의미한 정보와 그들이 공유하기로 한 정보를 강조해 표시"할 수 있게 도왔다고 평가합니다(p61). 이게 바로, 예컨대 한국에서 처음 론칭된 "싸이월드" 같은 데서 저들을 결국 따라잡지 못했던 기술상의 패착 요인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도 아프리카나 유튜브 등 개인 방송 전문 플랫폼이 대단한 활황을 띠고 있는데, 지상파 채널이나 케이블 TV의 뻔한 편성에 물린 이들이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 떠나는 기착지가 바로 이런 곳들입니다. 최근에는 케이블 채널에서도 이런 온라인상의 개인 방송 중 인기 있는 것들을 모아 보여 주는데 DIA TV 같은 것이 그 대표입니다. 사실 방송과 "틈새 시장"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미국 사례 중 심야 방송 같은 걸 그런 통념을 깬 좋은 예로 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코난 오브라이언 같은 이가 진행하는 쇼도 그러하며, 심야 시간대는 아니지만 이번에 방탄소년단을 (여러 번) 초청한 엘런 드제너러스 쇼 역기 성(性) 소수자를 배려하다 메이저로 성장한 케이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BTS 역시 미국에서는 그닥 주류 취향이 아닌데 여러 마이너들의 지지가 모이고 모여 이런 성공이 가능하지 않았을지 그냥 저 혼자서 생각해 봤습니다. 훨씬 앞선 시기 프랑스 등에서 SM의 아이돌들도 결국 그런 과정으로 인기를 얻었고 말이죠.

우리 나라에서는 "청춘 낙서"라고 번역된 영화 <American Graffiti>의 경우 자동차가 미국인들의 일상에서 가지는 의의가 얼마나 큰지환기하는 예로써 저자는 들고 있습니다. 출퇴근 과정에 자동차가 벗이 된지야 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모바일 기기가 발명, 보급됨에 따라 비로소 사람들은 이 짜투리 공간,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장악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의미 부여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모바일 기기 때문에 오히려 "근무 시간이 늘어나(p135)" 직장 밖에서까지 상사나 동료와 접촉하며 업무에 종속되었다는 지적도 큰 설득력을 가집니다. 이 때문에 한국 대기업들도 "퇴근 후 단톡 금지" 등을 명시적 지침으로 정하는 게 어느덧 관행이 되었.., 지만 실상은 여전히.... 여튼 어제 후보 토론회에서도 드러났듯,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는 모바일 덕에 해방된(혹은, 비로소 손 안에 들어온) 각종 짜투리 시간을 어떻게활용할지에 그 관건이 놓였다고 하겠습니다. 모바일 기기 덕분에 손 안에서 갖고 놀 장난감이 많아진 사실에 환호할 게 결코 아니라, 오히려 지금부터 다시 (경제적)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세컨 챈스가 주어졌다는 점에 긴장을 해야 할 일입니다.

"캐쥬얼 게임"이란, 온라인에서 간단히 즐길 수 있는, 논자에 따르면 따로 참여 방법이나 규칙을 배울 필요가 없는 간단한 구조의 게임을 말하는데, 더 파고들 것도 없이 우리가 정말로 짜투리 시간에 즐기는 숱한 스마트폰 게임을 뜻하겠습니다. 정말로 "캐주얼"하게 발을 들여 놓고 즐기려면 반드시 모바일 기반이라야 가능하겠는데, 사실 이보다 더 "틈새경제"를 성공적으로 활용한 예는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중요한 건, 게임 개발자가 아닌데도 그저 플랫폼만 깔고서 더 이상의 지적 자원 투입 없이(물론 있기야 있지만) 자릿세만 받아먹는 구글(구글 플레이), 애플(앱스토어) 등의 수완, 혹은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전철을 한번 타 보십시오. 60대 노인까지 (고도리든 뭐든) 반드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전에 없던 고수익 시장을 개척한 예가 앞으로 또 생길까요? 치킨 안 시켜 먹는 사람은 있어도 게임으로 시간 안 죽이는 사람은 없다시피합니다.

영리한 사람은 오히려 여기에 더 주목할 겁니다. "나는 구글이나 애플의 호갱 노릇을 하지 않겠다." 파편처럼 흩어지는 시간을 모아모아 나만의 능력 계발, 예컨대 어학 학습이나 코딩 같은 데 쓰면 얼마나 유능한 인적 자원이 될까요? 가만 내버려 두면 장마철 빗물처럼 의미 없이(때로는 재앙으로 바뀌기도 하는) 짜투리 시간을 살뜰히 모아, 내 일생 동안 발전을 가로막은 몇몇 요소를 제거하는 데 투자한다면, 꼭 소득의 증가로 이어져야 그게 보람이 아니라, (모 후보가 그리 강조하는 것처럼) 삶의 질 자체가 달라질 겁니다. 벤자민 프랭클린 등 자계서 고전들의 오랜 철칙이 다시 재확인될 뿐 아니라, 이제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까지 예비되는 순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