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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19
막스 베버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평점 :
예전에
저는 고(故) 정운영 교수님이 진행하던 E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학자분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정운영 교수님도 정말 글 잘 쓰시지만 그런 경지는 노력하다 보면 어찌어찌 흉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스 베버
처럼 문장을 쓰려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안 될 것 같기만 합니다." 이런 말은 막스 베버에 대한 극찬과 존경의 마음도 잘
표현했지만, 동시에 정 교수에게도 대단한 경의를 바치는 것입니다. 19세기 유럽 사회학을 정초(定礎)한 거인이자,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등과 나란히 당대 3대 지성으로 꼽히는 천재 중의 천재였던 인물에게, "그저 조금 처지는 정도"로 평가 받는 건
설사 공치사라고 해도 엄청난 호의이겠기 때문이죠. 저 "3대"의 명단을 보면 두 사람이 독일인이요, 한 사람이 프랑스인으로서 끼어
간신히 옛 "그항드 나시옹"의 체면을 살리고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도 그렇지만, 막스 베버 역시 정교하고 독창적이기 이를데없는 사상과 체계를, 지극히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 안에 담아낸
문필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 고전, 즉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를 읽는 이들은, 저작에 표현된 탁월한 발상과
제안과 함의를 궁구(窮究)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기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표현과 문장 구축의 아름다움에 흠뻑 매혹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해도 뭐 아주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 고전이 현대에 들어 재해석될 필요가 큼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어와 독일어처럼 구조의 큰 차이를 보이는 언어 사이에 번역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현대지성의 이
번역본, 특히 박문재 선생님 같은 신학, 인문의 대가가 옮기신 텍스트에 더욱 큰 기대를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박문재
선생의 영문 고전 번역도 뛰어나지만, 특히 이분이 젊은 시절 학창기를 보내시기도 한 곳이 독일이기에, 이 독일어로 된 불후의 저작
번역은 특히나 탁월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기도 하는데, 우선 이 책은 집필 당시에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믿는 사회, 나라는 잘 살고, 구교도 중심의
공동체는 빈곤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첫째, 그런 믿음은 막스 베버가 활동하기
이백여 년 전에도 이미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본디 16세기의 종교개혁 자체가, 성직자라는 특수 계급을 인정하기 거부하고
신앙이나 생산 활동에서나 봉건적 신분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중산 계급, 부르주아지의 몸부림에서 비롯한 겁니다. 막스 베버는
이로부터 한참 뒤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인데 어떻게 그런 신조(타당하든 아니든 간에)를 처음 창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근대 유럽의 지성 수준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신교도들이 자립을 외치며 새로운 종교 신조를 빚어나가던 사조 속에, 역시 새 시대의 기제로 서서히 대두하던 자본주의 윤리(이
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이들도 많지만)가 어떤 상관 관계를 맺어 나갔는지, 그 구체적 과정을 규명하는 게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오히려, 책 서두에도 바로 나오듯, 많은 유럽인들이 믿어 오던 대로, 과연 "구교=빈곤, 신교=풍요"의 등식이 올바른 것인지부터를
그는 검증하고 있습니다. 또, 스스로가 밝히듯이 "이처럼 널리 퍼져 있고 많은 이들이 옳다고 (자랑스럽게[신교], 혹은
체념하듯[구교]) 믿는 바"라고 하면서, 자신 이전에 이런 생각이 이미 주류의 위상을 점했던 현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신교는 곧 부의 원동력"이란 공식을 바로 막스 베버의 이 고전이 처음 도식화하고 증명했다고 여기는 상황을 보면,
그는 지하에서 매우 당황해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내 책을, 심지어 서문이라도, 읽기나 한 것일까?"
이
고전은 명문장도 명문장이고, 막연한 믿음과 편견의 더미 속에서 진실로 타당한 명제만을 과학적으로 추출하여 보석 세공하듯이 정립해
나가는 그 추론 과정도 경이롭기 짝이 없지만, 완독하면서 또다른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천재는 언제나, 과학("과학'이라는
단어를 자연과학에만 한정시키는 끔찍한 백치도 있죠)적 진리를, 이처럼이나 고단하고 까다로운 절차, 차라리 고행이라 부를 만한
과정을 거쳐서 찾아내는 것일까?" 박문재 선생 같은 진짜 실력자의 손을 거친 명료한 문장을 통해서도, 막스 베버가 진리를 세공해
나가는 그 과정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구경만 하는 입장에서도 피곤하기 짝이 없는데, 만들어내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천재는 천재이기에 이런 까다로운 탐험, 프로젝트도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고 손쉽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가창의
달인들이 정말 힘 안 들이고 고음을 쭉쭉 뽑아내듯이 말입니다.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노력을 해야 이런 거인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음을 새삼 자각하고, 좀 겸손해질 필요도 있겠고 말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다양한 종파, 입장, 계열을 분석하는 작업은 실로 구절양장의 길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중국사의 5호 16국 분석 정리가 그렇게나
힘들다고도 하는데 다분히 엄살이고 과장이며, 각 교단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기도 난망한 지경이지만 그저 계보만 올바로 파악하기도
너무나 힘듭니다. 막스 베버의 주전공, 관심사가 종교학에만 머문 게 결코 아닌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전, 명저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히려 그를 종교학자로 잘못 아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 책은 차라리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에 한 발씩을 걸친 책인데도
말입니다), 책은 본격 종교학자들보다 더 세밀하고 권위 있게,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 널리 분포한 교파들의 구조를
분석합니다. 종교 신조의 탐구가 본연의 목적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눈이 트였다는 종교학자들의 고백이 잇따랐을
만큼 말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가 일개 직공일 시절부터 "새로운 교파 하나를 만들어 보자"며 동료들과 열심히 토의하는 장면이 나오죠.
"원, 입에 풀칠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종교 창시자 흉내를!"이라며 비웃는 이들도 있었을 텐데, 그 정도가 아니라 그들 이민자들의
선조가 유럽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프랭클린의 동시대에도 아마 이단, 이교라며 대뜸 단죄부터 받고 화형장의 한 줌 재로 사라질
위험이 아직은 엄존했을 터입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개인의 내심에 대해 체제나 사회가 일절
간여하지 않고, 그저 당사자가 사회적 경제적 신용을 잘 지키느냐에만 주의를 집중했던 합리적인 풍조가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대체,
장로교나 감리교나 재세례파 (그 외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숱한 입장들)중, 누구를 프로테스탄트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런 건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융통성과 관용, 합리주의야말로 자본주의와 근대 정신의 본체입니다. 막스
베버의 이 고전은, 다름 아닌 이 점을 지적하는 게 원 의도인데, 터무니없는 무자격자들이 감별사, 호메이니 흉내를 내며 훈장질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찬 일입니까.
"이단에
속하거나 신앙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이미 내면적으로 종교적 전통에서 벗어난 도시 귀족 계층... (중략)...
교회는 그저 겉으로만 신앙을 가져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이미 묵시적으로 펼쳤던 것이다."(p111) 이 대목에서 막스
베버는, 자신들의 행각이 어떤 관점에서도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자각을 이미 이들 계층이 가졌다는 점까지 노골적으로 지지합니다.
따라서, 행여 허상에 지나지 않는 "자본주의 정신"을 순진하게도 막스 베버가 도그마화했다는 (정반대의) 선입견 역시, 이 충실한
완역본은 정면으로 무너뜨립니다.
막스
베버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지성미는, 일단 극한에까지 부정, 비판을 가해 보고, 그럼에도 여전히 시련(trial)을
견뎌내는 황금 명제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권위와 광휘를 (아닌 척 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기교에 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의
전성기 복싱 스타일을 보면, 마치 맞아나 주겠다는 양 가드를 다 내려도 결국 한 대도 안 맞고 타격도 안 받습니다. 타고난 천재,
테크니션이라야 이처럼 자기가 스스로 판 곤경에서 우아하게 빠져 나오는 재주를 피울 수 있는 거죠. 막스 베버가 스스로 행하는
자체 검증은, 가장 완강하고 적대적인 비판자들이 시도할 법한 것보다 더 철저하고 더 집요하며 논리적입니다. 그의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황무지 같은 암반 지대에 성능 좋은 포크레인이 들어와 개간, 또 개간하며 옥토가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을, 마치 독자의 머리
속에서 체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고전 고전 하는 건, 삼류 저자의 시시한 수백 권 책을 읽는 삽질을, 이런 명저의 일독 한 번
수고로 대신할 수 있는 그 "경제성"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