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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혼에 꽃을 주게 만드는 100가지 이야기
임창석 지음 / 아시아북스 / 2018년 6월
평점 :
단순하고 흔히 애용되면서도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감탄이 나오는 구도가 바로 상하(혹은 좌우) 대칭입니다. 이 책의 표지도 그런 사진이 장식하는 모습인데, 바람 때문이었건 우연한 파랑이 근저를 지나갔건 일시 일렁였던 수면 때문에 높은 기둥이 마치 용수철의 굴곡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되비치는 게 인상적입니다. 세상 만물은 그저 곧고 티 없으나, 이를 반영, 수용하는 우리의 마음과 안목이 뒤틀려 있어 온갖 불안과 잡념이 당사자의 영혼을 괴롭히는 건 아닌지, 모두가 진지하게 되새겨 볼 일입니다.
저자께서는 현역 정형외과 전문의이며 등단 문인이기도 한 분입니다. 이 책에는 모두 백 편의, 잠언 같기도 하고 짧은 시 같기도 한 성찰의 결실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이를 읽는 독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뭔가 초심의 경지, 혹은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평온한 영혼으로 돌아가게 돕는 그윽한 메시지들을 담았습니다. 저자는 일관되게, 자연, 우주의 품으로 돌아가 단단히 안기는 길 외에 우리 인간이 궁극의 안식을 찾을 길은 딱히 없다는 쪽으로 차분히 말을 건네시는데, 이 역시 어떤 언어 메시지로 다가온다기보다는 마음이 푸근해지는 스냅 샷이 독자의 망막 위에 살포시 앉히는 뭐 그런 느낌입니다. 아마도 저자께서 직접 찍으신 선명하고 청아한 사진이 텍스트 옆에 나란히 실린 덕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인간이란 우주에 플러스 효과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1+1=2가 아닌, 오히려 1+1=3 같은 것이 사람들의 본성에 맞는 연산법이란 뜻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연약한 생명체가 현 시점에서 진화의 최종 단계(현 시점에서 말입니다)인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인간은 험한 자연 환경의 도전을 딛고 건사하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큰 육신을 짊어지고 있으며(곤충이나 미생물에 비해), 그 육신을 온전히 유지할 만큼 강력한 방어, 공격 수단을 갖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살아남아 찬연한 문명을 이루고, 여타의 미물들과는 달리 모종의 의식(consciousness)을 발동하여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자문(自問)하는 어엿함이 또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모든 건 그저 기계론적인 1+1=2 식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의 물리 법칙만 건조하게 작동하는 세상이라면 이런 놀라운 존재가 지상에 발을 딛고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인간들은 이런 태생시의 축복 받은 존재 그 본분을 과연 부끄럽지 않게 이어가는 중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뛰어난 지능과 상황 파악 능력을,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데에 잘못 전용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물론 우리에게 모진 시련도 안깁니다만, 그보다는 따뜻한 온기를 우리의 약한 살결에 불어 넣어 주고, 상쾌한 호흡을 여린 허파에 전파하며, 마주칠 때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쾌락을 부여하는 각종의 체험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교미 과정을 유독 짜릿하게 즐기는 유일하다시피한 종(種)입니다. 이런 존재의 축복을 우리는 가장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낭비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씀에 따르자면, "인간은 이미 탄생시부터 무한한 존재입니다." 발버둥쳐 봐야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이라며 한탄을 일삼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어떤 성질들이 영역 안에 갇혀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질량과 인력이 탄생되며, 그에 따른 부수적인 힘들이 나뉘어져, 빛과 함께,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엄마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도, 우리들의 부모님뿐 아니라 전 우주가 숨죽이고 관찰하다 마침내 온갖 축복을 퍼붓는 대환희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존재 하나가 세상에 나왔다는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무한의 족적을 남겼음인데, 하물며 기적 같은 생명체가 누리 안에서 백 년을 부대꼈다면 그 파장은 대체 얼마나 길고 깊게 미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무한한 존재입니다. 이런 생각 깊은 생명체로 빚어졌다는 자체가 축복이며 경이이니, 생명과 의식 자체가 이미 무한이란 본질을 품고 있음입니다.
사람은 개, 돼지와는 달리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저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생각, 그래서 제 본질이 한없이 미천해도 인근의 배설물에게나 고작 우월감을 느끼며 너절한 천품을 합리화하는, 빈약한 사고 능력을 가리려 쉴새없이 무의미한 잡음으로 더러운 입을 메우는, 마당에서 키우는 지저분한 늙은 암탉이 아닌 이상, 사람은 결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 혹여 이 역시, 안분지족을 모르는 욕심이 아닐까요? 저자는 이 역시 "우주가 당신에게 부여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라며 우리를 다독입니다. 물고기 등 해양 생물에게는 자동으로 수중의 위상을 조절할 수 있는 부레라는 기관이 있음을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널리, 익히 배웠습니다. 부레는 이런 평형 감각 외에 청각에도 관여하는데, 이는 우리 인간의 귀가 한 구조 안에서 수행하는 기능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인생의 높낮이를 스스로 조절하는 안정된 삶을 살게 해 주는 부레와도 같은 것을 우리들은 갖출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우선 끊임없이 남의 말을 듣고, 이런 좋은 책을 읽으며 외부로부터 좋은 자극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귀가 평형감각과 청각을 동시에 수행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과학과 합리적 지식 체계에 언제나 몰두하고 직업 수행의 핵심 요소로 가까이 두는 분들일수록 "영적(靈的)"인 세계에 큰 관심을 둡니다. 이는 이미 현대과학이 지적인 갈증을 충족시켜 주는 데 어느 정도 한계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중고등학교 수준의 과학도 모르는 사이비 괴수일수록 자신이 채 이해도 못 한 몇 가지 명제를 주문 외우듯 복창하며 본인이 무슨 감별사라도 되는 양 침을 튀기며 무언가를 열심히 저주하기 일쑤입니다. 병든 저능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과학"에 의지함을 자칭하는 해프닝처럼 우습고 비참한 몰골도 또 없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몸에서 발산되는 생체광자, 즉 biophoton이란 실체에 주목하자며, 과학자들이 혹시 이 미지의 단위로부터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소개를 합니다. 물론 이 역시 기존 프레임으로 환원 가능할지도 모르며,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구명해 보려는 열망이 낳은 착각, 착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가 그저 1+1=2와 같은 건조하고 따분한 법칙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게 아닌, 무엇인가 제3의 정신적 팩터가 크게 좌우하는 부분이 있고, 그 정체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의 마음, 정신에 자리한 그 무엇이라면, 그 생각만으로도 우리 존재 자체가 따스히 밝혀지고 힘이 나는 구석이 분명 있습니다. 모든 것이 태초에 경로와 종착점이 결정되어 있고 그 한심한 쳇바퀴만을 열심히 돌리는 중이라면, 우리네의 생(生)이란 얼마나 구차하고 무의미한 컨베이어 벨트 오퍼레이션에 불과하겠습니까?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유일하게 인간에 부여된 자유는 자살의 가능성"이라고까지 극언(極言)했는데, 해당 책을 읽어 보면 그의 논지는 의외로 치밀한 논변에 기초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백여년 전의 그가 알지 못했을 이 바이오포톤의 실증을 보여 준다면, 아마 그 고전의 결론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궁극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였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위대한 스승이 이처럼이나 명징한 말로 깨우쳐 주고 눈 앞에 들이밀어도(무려 이천육백년 전의 일이죠) 그것의 참다운 의미를 모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자신이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바로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의 경계를 없애도록 하세요. 만물의 영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나란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너란 존재 역시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평지풍파나 시련이나 고통은 나의 영역을 벗어난, 저 아득한 곳에서 연유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시련이 나를 덮치는데, 나라는 협소한 영역 안에서만 해결책을 찾으려 드니 어찌 답이 나오겠습니까? 허나 자신이, 광막히 뻗은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데 인식이 도달하면, 자신이 겪은 고통 역시도 막막한 우주에 작은 파장으로 흡수될 뿐입니다. 대양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들 무슨 흔적이나 남겠습니까? 즐거움도 괴로움도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티끌과도 같을 뿐입니다. "내"가 이미 우주와 합일되어 무한한데,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 자신"이 이미 어디에 있단 말이겠습니까?
텍스트도 좋지만 마주보게 배치(juxtaposition)된 사진의 풍취가 참으로 그윽합니다. 정직한 예술혼으로 담은 풍광은 이처럼 글귀의 깨달음과 깊이로도 직결되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