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영혼을 꿈꾸다
임창석 지음 / 아시아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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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살아 있다." 사상가나 철학자들뿐이 아니라 자연과학자들 상당수마저, 표면에 기생하는 하잘것없는 생명체들을 거대한 힘과 호흡으로 굽어보는 지구의 "영혼"을 두고 가이아 이론으로 체계화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 실체나 논거가 구비되어 있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양식 있는 지구인들로부터 옹호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지구 온난화 이론 같은 것도 사소한 논거 흠결을 빌미삼아 반대진영으로부터 트집을 잡히기도 합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탄소 원료 저감 등의 실천을 통해 이 추세가 반드시 가로막아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생존의 절박한 문제 앞에서 논거를 따지고든다는 건 참 한가한 짓입니다. 말 안 듣는 못된 아이들은 엄마한테 호되게 엉덩이를 맞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진리 아니겠습니까.

임창석 저자는 (지난번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현직 정형외과 전문의이자, 이 책의 유려한 문장에서도 잘 드러나듯 등단 시인이며, (아마도 우리 독자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사진을 참 잘 찍으시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상록(잠언서?)마저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은근한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단지 무슨 구약성서 등에 나오는, 눈빛 심상치 않고 거동 살벌한 그런 예언자풍이 아니라, 잔잔히 지혜를 일깨우고 좋은 말로 엄마처럼 타이르는 단정(端正)한 현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과연, 우리들은 선지식처럼 어머니 지구에 영혼이 있음을 알았지만, 세파와 이기심에 부대끼면서 우리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줄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이 책, 즉 "지구의 영혼"에 대해 자근자근 싱기시키는 가르침이란, 먼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궁극의 진리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너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와 연결된 하나이며, 인간들 역시 자연과 일체가 된 존재이다." 그러니 개인만 살겠다며 스스로의 몸을 해쳐 대는 짓거리란 얼마나 우습고도 어리석습니까.

이 책은 겉으로 보아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실제 소설로 읽어도 됩니다. 아주 두드러진 사건이 없어도, 등장인물들이 담담히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짚어가는 포멧은 역시 익히 확립되었던 전통 중 하나입니다. 마치 저자 본인의 페르소나라고 봐도 될 듯한 "의대생(레지던트) 제임스"의 회고 액자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장래가 창창한 예비 의사이고 역량과 솜씨도 좋지만 알지 못할 한 가닥 회의를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합니다. 온갖 인종이 모여드는 뉴욕 허드슨 강가에서 각종의 정물, 혹은 역동적 풍경을 스케치하는 그의 모습 역시 저자 자신의 상(像)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듯합니다. 해부, 해부,... 제임스는 마치 전역 후 얼마 안 된 군인이 다시 내무반 생활로 돌아간 악몽에서 깨어나듯,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반복되는 루틴과, 칼을 쥐고 낯선 노인의 시든 육체를 가르는 역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일지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이런 그에게 느닷 다가온 건 어느 소녀의 일기장이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마티"인데, 마티는 들으면 꼭 남자 애 이름 같지만 Matrha의 애칭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여자애한테도 흔히 씁니다. 남자는 Marty라고 살짝 철자가 다르다고도 하는데 뭐 꼭 그렇지만고도 않습니다. 여튼 이 소설에선 일부러 Marti라고, 소녀 이름의 정확한 철자까지 제시됩니다.(성씨는 "하비". 마치 해부학의 아버지 윌리엄 하비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마티는 엄마가 없습니다. 어느날 생전의 엄마와 함께 놀던 뉴욕 바닷가를 떠올리며, 새로 이사 온 오하이오 주 이리 호수 근처에서 뛰어다니다 구덩이에 빠져 크게 다칠뻔하고 기절까지 합니다. 뉴욕은 바다에 면해 있지만 이곳 이리(Eerie) 호수도 바다처럼 넓기에 소녀에게 기시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여튼, 정신을 차려 보니 큰 몸집의 갈매기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죽어 있느데, 따스하기도 했고 푹신하기도 하다가 이제는 싸늘해진 무엇이 바로 지금 갈매기의 사체인 걸 알고 소녀는 놀랍니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해주자 하비 씨는 차분히 딸의 머리를 어루만집니다.

"엄마가 너를 지켜 줬나 보다...."
"네에....?"

한편, 장면이 바뀌어 소녀 마티와 리처드는 그전부터 자주 만났지만(?), 이번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까지 거칩니다. 무슨 소린가 하니, 리처드는 본래가 오하이오 출신이고 거기서 학부까지 마쳤지만 의대(콜롬비아대) 공부 때문에 뉴욕까지 온 거고, 아까 말했듯 마티는 뉴욕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머니를 잃은 후 이곳 오하이오로 아빠 따라 이사 온 겁니다. 그러니 둘은 고향과 거주지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교환(?)한 셈입니다. 리처드가 오하이오 체류 시절 호숫가에서 뛰놀던 마티를 먼발치에서 본 건데, 그때는 리처드 본인도 개인 마티를 의식한 건 아니었고 그저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앞에서 마티가 엄마를 잃은 소녀라고 했는데, 리처드 역시 비슷한 상실의 아픔을 안고 자랐습니다. 형 에릭이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주변에서는 영웅의 죽음으로 떠받들지만 어린 리처드에게는 영문 모를 큰 시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소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현인 아첵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문까지 닫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작가님의 다른 책 <자신의 영혼에 꽃을 주는 100가지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들춰 보게 됩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 외에 "영혼"이라는 구성 요소를 갖는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양심이나 행동 원칙의 일관성 같은 게 결여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을 두고 "영혼을 악마에게 판 자"라는 비난을 하곤 했죠. 겉치레로 반듯한 예의를 지키고 치밀한 계산 하에 행동하기는 하나 결국 이웃을 해칠 궁리만 하는 사람에게 영혼이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가 어찌 기독교 문화권에만 통하겠습니까? 바른 마음을 지니고 공동체에 속하며, 이웃과 가족에게 뜻있는 결과를 남기려 애 쓰는 인간 문명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겠습니다.

 

저런 나쁜 유형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을 잃기로 작정하고 이기심만을 키우는 사이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에 꽃을 주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때로는 의식적으로 필요합니다. 척박한 황무지에 절로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딴에는 정성스레 가꾸는 화분에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실제로 꽃을 다뤄 본 사람이라야 실감합니다. 하물며, 악이 언제나 방문객으로 깃들기 쉬운 우리 인간의 경우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이란, 우주에 플러스 효과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p31)" 무슨 뜻일까요? 영혼의 안식이 깃들 여유가 없는 척박한 물리계에서 1+1은 언제나 2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마음, 풍부한 상상력,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여유 등은, 1+1의 결과를 때로 3으로 만듭니다. 자연 법칙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1=3이야말로 인간에게 맞는 산술법"이라고 합니다. 1+1=3을 때로 만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 어쩌면 결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사람이라면 기계적 산술 법칙을 때로 초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주민들은 죽은 이의 슬픔보다도,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 속에 남겨진 죽음을 더 비극으로 생각한단다.(p60)." 그렇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 더 이상 우리와 살을 맞대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분의 죽음이란 그 자체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극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먼 천국에서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며 그리워하실 망자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더 찢어질 듯 아픈 건 살아남아 여전히 이승에서 삶을 부대끼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디 내 마음만 잘 추스른다고 그게 다이겠습니까. 다른 유가족들, 친구들, 협업자들, 추종자들의 설움도 달래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구란 행성은 아직도 불완전한 단계란다... 이 넓은 시공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착한 주파수를 쏘아대는 뇌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들처럼 진화된 집단 생명체의 조화된 뇌세포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p96)."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씀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우주는 너무도 광대하며 인간은 티끌보다도 작다. 그러나 거대한 공간인 우주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반면 그 작은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티끌보다 작은 인간이 우주 전체보다도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거의 끊임없이 대를 이어가며 심지어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까지 궁구해 낼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 존엄한 생명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타 생명체와 교감하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이것이 그저 한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우주를 향해 주파수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가 모이고 모여 감히 저 거대한 우주에 영향을 끼치며 마침내 어떤 운명조차도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하찮은 개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씀이나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의해서 벌써 우주에다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벌써 하나의 우주입니다. 함부로 살아서 될 일이겠습니까. 책임이란 걸 의식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보다 성숙해지면 종교 간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고 지구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인류 전체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이다.(p115)" 인류의 마음입니다. 철수와 영희의 마음이 아니라, 70억 인구가 하나되어 뿜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마음은 저 차갑고 외로운 우주 검은 구석조차 온기로 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레이더나 인공 발열 장치를 통해서? 아닙니다. 그런 걸 만들려면 환경을 해치고 탄소를 다량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건 자연과 우주와의 교감, 화해가 아니라 또하나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착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이웃과 공유하고 우주로 향해 뿜어낼 수 있다면 그순간 우주는 환히 밝혀지고 암울한 팽창을 멈춥니다.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죽음도 넘어설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 개인개인이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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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적분과 벡터해석
박종안 외 지음 / 북스힐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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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체로 대학 교과서들은 지나친 수식적 엄밀함을 동원하여 설명을 해 나가므로 초심자, 혹은 갓 대학 학부 수준 수학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학부 수준 수학이라 해도 이미 고교 시절부터 상당한 소양을 쌓았거나 특출한 적성을 보유한 이들이 이 과목을 수강하는 게 보통이므로, 다른 과목과 달리 수학은 초보자의 사정을 봐 주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내용 전개가 이뤄지는 게 사실입니다. 타 분야에서는 "힘들지? 호~호~" 하며 어린이 돌보듯 배려하는 대중서도 많으나, 수학은 그런 책이 좀처럼 쓰여지지도 않습니다. (구태여 찾자면 예전 김용운 교수님 형제분이 쓰신 학생용 책들이 있긴 합니다)

해석학(철학의 그 해석학이 아닙니다) 역시 차분히 한 걸음씩 떼어가며 자신만의 자질을 닦아 나가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좌절을 안기기 일쑤이니, 몇 페이지 넘겨 보고 "어 재밌군?" 같은 느낌이 바로 와 닿지 않으면 아예 시도도 않는 편이 낫습니다. 어떤 분들은 학창 시절에 수학을 소홀히했던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지 사회인이 된지 오래인데도 늦게나마 도전해 보고 싶어하기도 하는데, 그 의기는 멋지지만 성과가 잘 나지 않으므로 시도 후 괜히 마음에 상처만 더 커지는(?) 데다, 애써 머리에 몇 가지 지식을 넣는다 해도 어디 마땅히 쓸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공학도들, 혹은 여러 이유로 수학과에 적(籍)을 두게 된 이라면. 수학이라는 기초 위에 지식의 체계를 쌓아 나가야만 하며 이 길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친절하게 이 분야 입문을 도와 주는 책이 필요한데, 초심자에게 도무지 친절하려야 할 수가 없는 구조적, 숙명적 난점을 그나마 최대한 완화해 주는 교재가 이만큼 성의를 보이기도 드물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학부 초보 수준에서, 이 책 p43 이하에 본격적으로논의되는 "음함수의 미분법" 만큼 활용도가 높은 정리가 또 없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컨대 치환적분 같은 것도, 치환적분(이 책 p118 이하에서 다룹니다)의 기본 테크닉에 너무 의존 않고도, 음함수의 미분 기초 원리만 갖고서도 어찌어찌 풀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방법을 자기 힘만으로 생각해 낼 정도면 영재 소리를 들어 마땅한데, 그렇다 쳐도 이후 과정을 보며 아 이 방법이 훨씬 편리하구나 싶으면 다시는 그런 원시적인 수단에 의존 않게도 되죠.


한국에서는 선행학습이다 뭐다 해서 너무 문제 풀이 위주로 진도 빼기 경쟁을 하다보니, 웬만큼 잘하는 학생들(수학 영재가 아닌 공부 잘 하는 공대생 정도 레벨)도 그냥 죽지 못해 진도에 끌려 가는 고역을 겪곤 합니다. 수학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가며 자신만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쾌감이 다른 영역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성격인데, 너무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우등생들도 이 상쾌한 지점을 종종 잊습니다. 그래서, 수식(數式)을 너무 강조하지 않고 이처럼 최대한 말과 직관으로 풀어주는 책이 더 필요하기도 합니다.

부분적분은 꽤나 기교적입니다. 하나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계산 과정에서의 테크닉에 가깝죠. 미분을 배울 때 처음 다루는 게 곱미분입니다. 두 식의 곱으로 이뤄진 함수는, 하나씩 미분하고 다른 하나는 원 상태를 유지한 후, 도출되는 둘을 합으로 표현한 게 그 도함수라는 원리 말입니다. 그건 또 어떻게 해서 그런 게 나오냐고 묻는다면, 뉴턴이 처음 제시한 "극한을 통해 도함수를 유도하는 방법"을 아주 교과서적으로 차분히 되짚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여튼 이 곱미분의 원리를 이용하여, 까다로운 모습을 띤 함수를 (미분의 반대 과정으로) 적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쉽사리 적분 못 하는 함수도 부지기수이나, 여튼 비교적 손쉽게 적분할 수 있게 애초에 세팅이 된 함수라면 괜히 뺑뺑 돌아가지 않고 이 "부분적분법"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로그함수, 다항함수, 삼각함수, 지수함수의 우선 순위를 둔 후, 이들 모양에 최대한 가까운 걸 f(x)로, 다른 남은 하나를 g'(x)로 놓고(기호는 저것들 아닌 다른 뭐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곱미분 원리의 역(逆)에서 나온 대로 정해진 공식에 그저 대입하는 것입니다. g'(x)는 나중에 원함수인 g(x)로 돌려야 하므로, 가능하면 적분이 가장 편하게 이뤄질 만한 식과 매칭시켜야 이후 계산에 힘이 덜 든다는 점에 착안했죠. 앞에서도 말했듯 어떤 법칙이라기보다 계산상의 요령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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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부가가치세 실무
황종대.강인.신정기 지음 / 삼일인포마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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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가(附加)가치(價値)세는 1970년대 후반에 한국에 도입된 대표적인 간접세입니다. 현재는 국가 재정의 중요 부분을 지탱할 만큼 비중이 커졌습니다만 도입 초창기만 해도 조세 저항이 너무도 컸었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제의 도입 시기가 행여 조금만 늦었어도 과연 한국에 안착할 수 있었겠냐며, 중소 상인들에게까지 큰 부담을 안기는 제도 자체의 특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미국에는 아직까지도 부가가치세가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주(州)마다 영업세(sales tax)가 부가되기는 하나 이는 통일적이지 않습니다. 영국은 용케도 1970년대 전반에 이 세제를 도입했으며,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늦은 1989년이 그 시초입니다.

부가가치세 도입이 늦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의 담세자인 상인들에게 너무도 큰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영수증의 교부는 요즘이야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부가세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거래시(매입, 매출)마다 이를 작성한다는 게 꿈 같은 일입니다. 물론 부가세를 시행 안 해도 거의 어느 나라나 소득세(사업소득) 납부 의무는 있으므로 거래 증빙 자료는 갖춰야만 합니다. 한편, 요즘처럼 신용 카드 거래가 보편화하고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현금 영수증"교부가 필요해진 시스템인데, 차라리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쯤에 이 제도가 전면 시행되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조세 저항" 부분에서는 훨씬 무난한 분위기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게 전력 시스템 변경에서 110V → 220V 승압 조치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도 여깁니다. ㅎㅎ

여튼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재화를 어느 업체가 사 들였을 경우, 업체는 판매자로부터 매입 대금의 10%를 추가로 내야 합니다. 비록 납세자와 담세자가 일치하지 않는 간접세라고 하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도입 초기에서 모든 상인들이 대단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거죠. 내가 판매자에게 지불한 10% 금액은 그의 것이 아니라, 나중에 과세 당국에 그가 납부해야 할 것을 임시로 보관할 뿐입니다. 이후, 이 물건에 나만의 가공을 더하든지, 혹은 그대로 팔든지 간에, 나는 내가 물건 혹은 서비스를 파는 이로부터 다시 부가가치세 명목으로 10%를 더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 10%는 그대로 과세 당국에 다 납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전에 부담한 부분만큼은 빼고 내는 것입니다(이를 매입 세액 공제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나는 나만의 마진을 더 붙이고 팔았겠으므로, 내가 내어야 할 금액은 (매입 세액 공제를 감안하더라도)다만 얼마라도 더 남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이처럼 상인들에게 심각한 부담을 안기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아도(매입 세액 공제까지 받는 데다, 내가 물건을 판 상대로부터 금액을 징수하는 것일 뿐이므로) 실제로는 영수증 작성 의무라든가, 10% 가격 상승 부분 때문에 매출이 감소하는 등(어떤 이유로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드는 건 시장 경제의 철칙입니다), 이 제도는 이만저만 큰 원성을 사는 게 아닙니다. 차마 폐지까지는 거론 못 해도 세율을 현행 10%에서 8% 정도로 낮추자는 주장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간접세이므로 사실상 소득 분포 역진성이 구현된다는 면에서도 점수를 깎아먹으나, 이 제도가 궁극적으로 세원 확보에 큰 기여를 하고, 경기 활성화에도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란 점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합니다. 여튼 세제의 이런 이면에 대한 이해가 이뤄지면, 마트 같은 데서 영수증 받을 때 VAT 인쇄 파트가 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책값이 상당히 비싼데 개인보다는 업체 등에서 한 권 비치하고 두고두고 참조하는 용도가 메인이죠. (아니면 조세 관련 전문 직종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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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출간 30주년 기념판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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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요람기의 추억을 그리워하거나, 거친 세파에 시달리며 초심을 잃어가는 성인 독자들에게, 미국뿐 아니라 30년 전 한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던 힐링 도서의 제목을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이 구절은 다양하게 패러디되거나 기발한 변형으로 대중들 사이에 퍼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알아야 할 모든 것"의 강렬한 함의와, "유치원"이란 단어가 품는 따스한 심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이치는 원어인 영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 로버트 풀검은 목사님으로 보통 소개되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나 다양한 직업을 거쳤던 분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에 진득하게 정을 못 붙이고 시선을 불안하게 바꾸는, 주위와 대체 융화를 못하는 떠돌이 같은 타입이 아니라, 머물던 어느 구석에서도 인생의 궁극 이면을 지긋이 응시하며 진리를 관조하는 인격자 같은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설픈 지사(志士) 타입을 흉내내거나 편협한 정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며 목소리만 높이는 되다 만 실업자(이런 사람은 좌파라고 해도 수구꼴통이나 마찬가지로 머리통이 콱 굳은 인간이죠), 얼치기가 아니라,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나요?"를 잔잔히 일깨워주는 듬직한 노 스승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 책 안에서 힘차게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30년 전에는 저자 풀검 역시 아직도 팔팔한 장년의 남성이었겠지만, 그 무렵부터 그는 노숙한 지혜를 이미 정신에 장착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책에는 뻔하고 식상한 힐링 동화만 실려 있는 게 결코, 결코 아닙니다. 로버트 풀검 저자가 그 다채로운 주유 천하 여정만큼이나, 실제로 자신이 겪은 일상의 경험, 혹은 있을법하지 않은 장소에서 드물게 만날 법한 이들과 겪은 묘한 조우에 얽힌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펼쳐집니다. 이런 체험담이 일상 잡기로 그치는 게 전혀 아니라, 그 안에서 분명한 "교훈의 정리"가 함께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p132를 보면, 아이다호 주(州)의 남파에서 온 어느 영어 교사 부부와 치른 작은 소동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배터리 방전 때문에 점퍼 케이블이 필요해서 저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 독자들도 다 잘 알지만) 풀검 목사는 기꺼이 이들을 도울 마음을 품었습니다. 풀검 목사가 특별히 선량해서라기보다, 우리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거리낌 없이 부부를 도우려 나섰을 겁니다. 문제는 저자가, 이들을 도울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영화에 보면 한 캐릭터가 "당연히 흑인은 (도둑놈처럼) 자물쇠 따는 법을 알고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거냐?"라고 퉁명스레 받아치는 장면도 나오지만, 기대를 잔뜩 했던 부부에게 (의외로 관련 기술이 부족하고 손놀림이 서툴렀던[이건 진짜 의외더군요]) 풀검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부부로부터 따뜻한 격려가 담긴 서신과 선물까지 함께 받은 풀검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작가 자신을 가리킵니다)이 바로 옆에 있고, 열심히 도우려고 해도, 그가 어리석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굿 사마르탄"은 선의도 있었고, 환자를 적시에 구조할 요령이랄까 침착성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 수식어인 good는 "착하다"는 뜻 못지 않게 "쓸모있는"이란 뜻도 함께 가졌던 셈입니다(!). good but useless한 Samartan이었다면, 아마 예수님이 그 수훈 중에 인용할 가치를 못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네 생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설령 의욕이 충만하고 야심이 하늘을 찔러도 그에 걸맞은 지식과 요령, 혹은 포괄적인 능력이 없으면 그 대찬 각오랄까 계획 전반까지가 실제에서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유치원을 졸업한지 한참 지난 우리들이 사회에서 실제 겪고 쓰라리게 배운 교훈입니다. 엄청 깨지고 난 후 뭔가 각성이라도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어디에도 안 통할 외골수만 부리는 게 인격의 가치라고 착각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도 봅니다. 아마 더 참담한 실패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일 겁니다.

위 문단에서 "소용, 쓸모"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만, 저자께서 확실히 인생의 쓴잔도 적지 않게 들이킨 분이라서인지 책 곳곳에 이 말이 자주 나옵니다. p93을 보면 최초의 열기구 비행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무지몽매한 농부들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열기구를 갈갈이 찢었다는 우스운 촌극이 빚어졌다고 하죠. 몽매한 대중 속에 숨은 폭력 선호 경향은 이처럼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낙오자 특유의 피해의식과 광기가 집단 군중 심리 속에 감춰져 정의를 사칭할 때 빚어지는 참극 역시 이와 같습니다. 여튼, 이 일화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대체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라는 질문에 "그럼, 갓난아기는 어디다 쓴답니까?"라고 되받아친 일화가 아주 유명하죠.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이 마이클 패러데이로 바뀌어서 전승되기도 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만 같으나, 이 책에서 인용되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한 법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저는 <패러독스 이솝 우화>라는 책에서 어느 주인공이 "신이시여, 정말 세상을 더럽게도 다스리는군요!"라고 절규하던 장면을 읽은 적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엔 아름다운 국면이 많지만, 우리는 아마도 "참 드럽게도 돌아가는 세상"에 분노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분노의 경우가 더 잦으면, ㅎㅎ 그건 아마도 본인이 인생을 더럽게 살고선 애먼 신(있는지 없는지도 모를)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자는 어려서(이거는 정말로 유치원 때의 경험이겠죠) 숨바꼭질을 무척 못했는지(솜씨가 서툴렀는지), p42에서 "유독 숨는 재주가 뛰어났던 아이"를 떠올리곤 합니다.

독자들이 놀라게 되는 대목은, "신 역시 그 아이와 비슷한 존재 아닌가" 하는 쪽으로 결론이 옮아가는 부분입니다. 이에는 여러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대체 어디 숨어 계시길래 세상에 이리 불의가 횡행하며, 저능한 실업자나 노망한 닭대가리가 끝도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게 방치하시는가 하는 원망일 수도 있고(ㅋㅋㅋㅋ), 반대로 신의 이치란 참으로 오묘하여 범상한 인간의 눈으로 그 신묘함을 도무지 알아챌 수 없다는 한탄일 수도 있습니다. 애매함과 속 깊음은 사실 저자(혹은 화자)의 내공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편인데, 이 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치한 영탄조나 (반대로) 찌질한 원망 일변도가 아니라, 이처럼 두 영역의 경계에서 묘한 통찰을 담담히 읊어대는 저자의 실력이 크게 작용도 한 것입니다. 챕터 말미에는 중세 신학자를 인용하며 "신은 본디 숨은 존재(Deus absconditus)"라는 말까지 인용합니다. 이 라틴어는 영어에도 그 직접 흔적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이웃을 잘 만나야 신상이 편한 법인데, 풀검 목사는 주택 경계에 피어난 민들레를 못 참아 제초제를 뿌리고 만 어느 이웃과 겪은 작은 트러블도 소개합니다(p170 이하). "이보쇼, 당신이 죽인 잡초는 내게는 소중한 민들레였단 말이오!"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이웃은 고개를 돌리는데, 이 판국에서도 저자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응시합니다. ("나의 광기 어린 표정과 시선을 뒤로 하고 그는...") 저는 이런 숨은 유머가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고도 생각합니다. 많은 삼류 저자들은 자신의 책에서 자신을 절대 선, 억울한 피해자, 정의의 독점 대변자로 포장합니다. 그러나 풀검 목사는 다분히 비정상적이고 찌질한 면까지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데, 이게 오히려 여유 있고 의젓한 저자의 성숙한 면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찌질이도 자기 약점을 그대로 노출할 때가 있는데, 대개 더 물러설 곳 없는 궁지에 몰렸거나 미숙한 유아가 엄마를 애타게 찾듯 싸구려 위안을 간절하게 바랄 경우가 고작입니다. 결코 성찰이나 달관의 산물 같은 게 아니죠.

"잊지 말자.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스트라이크 세 번이면 아웃이란 걸." 이 구절은 확실히 시대상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저 무렵 범죄자가 전과 3범이면 종신형에 처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죠. 이 법은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연방 정부의 적자폭만 부풀리거나 교도소에 납품하는 업자들의 배만 불려줬다는 부작용이... 여튼 저자는 "대체 시민의 자격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아마도 미국 국민의 절반 가량은, 정기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시민의 자격이 문제되는 세상에서라면 바로 터전을 잃을 수 있으며, 추하고 늙고 화를 잘 내는 내 친구 대부분은 당연히 실격"이라며 다분히 냉소적인 결론, 혹은 비판을 제기합니다. 사실 이 말도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구분이 모호한데, 이런 챕터는 확실히 미국 밖에서보단 안에서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을 법하죠. 안타까운 일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이민자 문제, 부평초처럼 떠도는 이들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심지어 미국 바깥으로까지 확산(지난주에 크게 이슈화한 이탈리아의 난민 수용 거부라든가)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미국에는 이상한 자가 이상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며 볼썽 사나운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으니...

잘은 몰라도 이 목사님은 근사한 여성과 데이트하는 즐거움을 구태여 포기할 분 같지는 않습니다. p239에서 저자는 어느 근사한 여성에게 "추궁"받은 신랄한 질문에 대해 여느때처럼 근사하게 둘러치며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살면서 끝없는 우울과 절망에 빠져들 때 나는 어떻게 빠져나왔던가?" "'무릎을 꿇어라, 여기 천사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 뒤의 것은 그와 종파를 달리하는 모르몬 성가대의 노랫소리였습니다만, 목사님은 이 챕터에서도 "아니, 그래서 목사님은 어떻게 빠져나왔다는 건데요?"라는, 분노 어린(?)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은 안 합니다. 그가 들려 주는 충고는 그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에 대해 "작품"이란 답을 내놓았는데, 그가 거둔 인생의 승리는 (이 저자의 말처럼) 9번 교향곡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거, 들리는 사람만 들리고 백치의 닫힌 돌 같은 머리통에는 스며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절절한 교훈을 저자는 그리 뻐겨대지 않고, 마치 유치원 꼬마가 무용담이나 말하듯 잔잔하게 소박하게 유머러스하게 우리 독자들에게 들려 주는 것입니다. 성공한 책에는 확실히 그 무엇이든 선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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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프레임 전쟁이 온다 - 진보 VS 보수 향후 30년의 조건 새사연 지식숲 시리즈 3
박세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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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는 선거가 며칠 전에 있었습니다. 유생 육가는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유방에게 직언했다는 고사가 있긴 하나, 그 일화는 싸움의 향방이 결정되고 그 사후처리가 더 중요하다는 맥락도 담습니다. 이 책은 이번 지선의 향방이 결정되기 전에 집필, 출간되었겠지만 사실 선거 결과도 그렇고 그 전날 열린 미북 정상회담의 중요한 기조도 일찌감치 누구나 예측이 가능했기에, 책의 이런 주장을 놓고는, 오히려 향후 정국을 보다 크게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어떤 대응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 정권이 프레임 덕에 승승장구한다고만 볼 것은 아니지만, 계속 잘나가려면 프레임의 새로운 국면을 더 가다듬거나, 향후 십 년을 버틸 새로운 프레임을 마련하자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김영삼이라는 어느 노회한 정치인이 마련했던 "프레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합니다. 저자의 분석은, 김영삼이 맞이했던 정치 여정의 큰 위기에 대한 프레밍에서 시작합니다. 김영삼은 직선제가 도입된 대선에서 낙선하고,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제3당의 지도자로까지 위상이 후퇴하는 결과를 맞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3당합당이라는 담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보수"라는 큰 깃발 아래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한데 모이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외연을 크게 확대하고, 그 지지자들은 "우리는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주역, 한편으로는 산업화를 이끈 세력까지 아우른다"는 자부심까지 지닐 수 있었다는 겁니다.

반면 이에 포함되지 못한 진영은, 서로 정체성도 다르면서 주류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소외 의식까지 겹쳐 한동안 올바른 정치적 대응에 나설 수도 없었다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의 "영웅적인 프레임 설정" 덕택이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입니다. 이 사례가 책 첫머리를 장식하는 건 저자 개인의 성향도 성향이겠으나, 그만큼 각 정치 세력들에게 "프레임의 선점,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의도였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동의하고 싶지 않은데, 첫째 삼당 합당은 김영삼이란 개인이 최초에 주도한 기획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당시 집권 세력 중 신TK계열(이들 역시 제 꾀에 제가 넘어갔던 셈)이 구상한 빅텐트에 가까웠죠. 둘째 너무나 이질적인 세력들이 "보수"라는 기치 하에 몰려들었기에 내부 파쟁에 쉽게 빠져들어 (우리가 다 봤듯이) 가벼운 위기에조차 취약점을 드러내다 쉽게 붕괴되었습니다. 오래 가야 프레임이 프레임이지 내내 자중지란에서 헤어나지 못하다 7년만에 깨졌으면 그게 무슨 프레임이겠습니까(홍준표씨 같은 사람도 이때 그 당에 픽업된 사람이고). 오히려 이를 물려받은 구 한나라당, 이회창씨가 뜻하지 않게 프레임 잔재의 이익을 누렸으나, 본인의 역량 부족으로 그 유리한 이점을 살리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지요.

셋째 삼당합당의 한 축인 JP 계열을 1995년에 대대적으로 축출하다 오히려 반대진영에 넘겨주는(이게 사상 초유의 정권교체로까지 이어지죠) 어리석음을 범했고, 빅텐트는커녕 자파 패권주의를 어설프게 시도하다 정치신인 이회창에게 별 수고 없이 당권을 쥐게끔 자초한 게 당시 YS계의 서투른 책략이었습니다. 한참 후 2012년 (정반대편의) 민주통합당 역시 너무 무리하게 외연 확장을 시도하다 손발이 안 맞아 총선에서 패배한 것과도 비슷합니다만, 오래 전 "민자당"도 "신한국당"도 다 실패한 프레임이었습니다(진영의 좌우와 무관하게 지나치게 비대한 조직은 운용이 어렵다는 걸 증명). 당시 "민정당"이 살고 싶었으면 자기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했어야 현명한 선택이었겠죠(공화계와의 소연합이라든지). 민정당은 그 아슬아슬한 후신마저 이번 지선에서 전멸한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뿌리가 다른 세력은 오래 동거할 수 없습니다. 이익 앞에서 단단한 결합을 영원히 유지할 것만 같았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300년만에 요란한 이혼을 준비하는 모습이라든가, 결국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X친 막대기 취급 당하며 스페인 진보 진영에서 버림 받는 걸 보십시오.

오히려 저는 2016년 총선 전 반대파(안철수, 천정배, 정동영, 박지원 등)를 차례차례 다 몰아내고 지휘체계와 노선을 선명히, 일사불란하게 구축한 이른바 친노계의 무지비하고 냉혹한 선택이 여기까지 온 성공 동인이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승기가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벌써 오늘 아침에도 장하성 실장 사임 여부를 둘러싸고 작은 잡음이 있었고(결국 스테이한다는 쪽이었으나), 조국 수석 역시 입지가 취약해졌다는 루머가 계속 떠돌기도 했고요.

여튼 책에서 주장하는 본론은 좀 더 넓어진 지평을 응시하자는 겁니다. 요지만 먼저 말하자면 크게 변화한 국제 정세 덕분에, 한국의 현 진보 진영이나 보수 세력이나 전혀 주체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는 중인데, 그게 바로 미-북 평화 협상이란 거죠. 저자는 다소 조심스럽게 논의를 전개하지만 요점만 얘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냉전 구도의 해체와 함께 남북 간의 체제 경쟁도 끝났다고 보던 김영삼 - 이명박 - 박근혜 정권에선 대북(對北) 고사 정책을 이어갔으나(여기서는 기묘하게도 YS가 보수로 분류되네요? 여튼 뭐), 북한은 죽을 듯하다 죽지 않고 핵무기 개발로 미국 본토 공략 카드까지 손에 쥐었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날카로운 분석이 하나 있는데, 이라크를 미국이 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대량 살상 무기(침공의 명분이었던)"를 이라크가 보유하지 못했기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반대로 북은 실제 핵무기를 지니고 있기에 미국은 "절대, 절대" 쳐들어가지 못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입니다. 친다 친다 말만 많았지 미 본토가 핵 공격에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도저히 감행 못한다는 겁니다(여기에 트럼프는 한반도에서 수백만 사상자가 난다는 핑계를 또 대고 있지만). 이 지적은 불편하긴 해도 현 시점에서 반박이 불가한 타당한 분석입니다. 지금 하는 짓을 보면 트럼프가 꼬리를 내린 게 명백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지금 기준으로 그렇다는 거고 앞으로 미국 강경파가 또 어떤 추동력을 얻어 "정밀 타격"을 추진할지는 모르는 거지만요)

"현실(북을 치기 힘듦)"을 똑바로 보자는 세력이 미국에서 힘을 얻으면, 그들이 한국의 보수 세력을 무슨 배려라도 하여 대북 강경책을 이어나가리리는 기대는 터무니없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과거에도 사실 미국은 한국의 보수세력을 그리 배려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했으나 리지웨이 장군은 휴전선의 현상 유지 후 전쟁의 조기 종결을 의도했죠. 닉슨이나 그를 이은 카터 등은 남한에서 주한 미군 완전 철수까지 추진했었는데 카터는 카터라고 해도 닉슨은 공화당 소속의 확고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시대에 적응 못하고 현 보수 세력의 상당수는 그대로 도태되리라는 게 저자의 소 결론인데 저자만의 예측은 물론 아니고 다들 예상했던 바였지만 이번 지선 결과를 다 보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 자못 비장감이 들 만도 합니다.

그럼 트럼프 이전 오바마는 어떠했는가? 책에서는 미국이 북핵(ICBM까지 추가)이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 고려할 수 있는 세 가지 옵션을 분류하는데, 그 중 두번째 옵션이 "암묵적 용인, 현상 유지 관리"입니다. 명시적으로 용인도 안 하지만 경거망동시 바로 행동에 돌입하겠다는 태세를 유지하는 건데, 저자는 이 역시 힘들다는 겁니다. 파키스탄 등과 달리 북으로부터 핵 보유 용인을 대가로 얻어낼 수 있는 게 없고(근데 이건 좀 아닌 게, 파키스탄은 제대로 된 협력을제공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빈 라덴을 숨겨줬죠), 이를 방치하다간 미일, 한미 동맹의 기반이 되는 핵우산 체제까지 모두 깨어지고 되려 핵 확산 추세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오바마가 바로 이 기조를 잘 유지했다고 보고요. 이 지루한 현상 대치가 의외로 오래 이어질 가능성도 적지는 않았는데(그 사이에 북한은 경제난으로 붕괴할 수도) 트럼프가 어리석게 혼자 조급증을 낸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네요. 여튼 저자는 단칼에 잘라 "이 두번째 전략은 유지 불가능"이라 말씀하시는데 저는 좀 고개가 갸웃해지긴 합니다.

선대와는 달리 ICBM이나 핵무기를 완성품 단계까지 이끈 현 지도자 김정은이 뭔가 판 자체를 크게 바꿔 놓은 건 사실이고, 이번 싱가폴 방문에서도 리셴룽(이현룡) 총리나 외무장관, 전 교육장관 등에게 이상할 만큼 따뜻한 환대("야.. 너 대단하다.." 뭐 이런?)를 받는 걸 봐도 뭔가 자기 힘으로 위기를 타개한 게 상징적으로 비춰지긴 합니다. 저자는 지나가듯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팩터가 크게 작용하긴 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이정희씨 같은 사람이 전대(김정일)와는 달리 이상하게 힘을 내던 것도 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지금 새삼 들기도... (앗 이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ㅎㅎ) 어쨌든 현재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고, 당장 남한에서 보수세력이 궤멸된 게 이 점을 선명히 증명합니다.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고 마냥 만세를 부르거나 승리감에 도취될 게 아니라, 변화한 상황에서 잡은 승기를 오래 유지하고 항구적인 시스템으로까지 이어가 보자는 게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제2프레임"론입니다. p183을 보면 그러나 저자는 큰 우려를 표현합니다. 소위 촛불혁명으로 인해 전통적인 보수 세력은 이미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고, 여론조사에서도 보듯 문재인 대통령은 높은 개인적 인기를 여전히 누리고는 있습니다. 허나 "사회 경제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으며,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목표와는 매우 먼 거리에 놓였는데 이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문제의 진짜 원인이 다른 데 있었고, 문 정부가 의거하는 프레임이 (역시) 변화한 현실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이 책이 취한 태도 중 크게 신뢰가 가는 건, 현상을 분석할 때 그 인근의 좁은 시점만 보지 않고, 현재를 있게 한 먼 과거(이의 획정은 사람에 따라 범위, 관점이 당연히 다르겠지만)까지 응시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글로벌화가 확고한 대세라 여겨졌던 1990년대 중반을 돌이켜봅니다. 저 앞 1부에서 또하나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이 있었는데, 민자당 3당 연합이 워낙 큰 덩치로 외연을 확장하는 통에 그 반대진영이 자신을 진보, 좌파, 민족주의, 사민주의, 혹은 심지어 리버럴리즘(이거는 너무나도 애매한 스탠스라서, 반대로 신자유주의와 오히려 맥이 좀 통할 뿐 아니라, 나중에 등장한 미국의 티파티와도 한 발을 걸치는 겁니다) 중 무엇을 정체성으로 삼아야할지도 모를 만큼 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겁니다(그나마 일시적이었다고 저는 봅니다만). 뭐 이거 하나만큼은 성공이었죠. 아무튼 현재의 국제 무역 질서가 어느 시점에 뿌리를 두었었는지 책은 제법 긴 분량을 할애하여 고찰하는데, 프레임이란 본래 이처럼 이론적 뿌리가 탄탄해야 오래가는 법이죠.

본시 노동 vs 자본의 프레임으로 세계를 획정한 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였습니다. 어떤 바보 같은 밑바닥은 "마르크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목청을 높이다가, "모든 문제는 노조를 만들어 해결하면 다 풀린다"는 둥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지 얼굴에 지가 침을 뱉는 근본 없는 헛소리를 떠들기도 하죠. 지금 현 정부를 이끄는 지도자 대부분(임종석, 조국, 김경수 등)은 도대체가 NL의 깊은 뿌리를 제외하고는 그 올바른 정체성이나 정책 기조를 파악할 수가 없는 인사들인데, 이들 앞에서 마르크스를 폄훼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근본 없는 비천한 인간의 아부란 건 이처럼이나 코믹하게 마련입니다. 뭘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심사숙고한 바도 없으면서 주워들은 풍월로만 떠드는 인간들이 대개 이런 행태를 보이죠. 여튼 저자는 이 노동 vs 자본의 "슈퍼프레임"에서 이후의 모든 정치모델이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친 맑스 진영뿐 아니라, 확고한 반대 진영 역시 이 노동vs 자본 프레임 하에서 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폈다는 소립니다. 개인적으로 백번 타당하다고 보입니다. 저자는 "복지국가" 프레임 역시 슈퍼 프레임인 자본 vs 노동에서 파생된, 작은 제3의 길로 보는데, 이 역시 슈퍼프레임 자체가 퇴조함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 2015년 10월 경에 서울대 교수들이 공동 집필한 <축적의 시간>이란 책을 읽고 일개 독자 입장에서 간단한 독후감도 남긴 적 있습니다. 뭐 여튼, 저자는 그 책 내용 중 일부를 원용하며, "개념 설계 지식 대부분은 명시적인 매뉴얼(밑바닥 바보는 매뉴얼이라면 무작정 사이비 숭배를 하고 보는데 그 매뉴얼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또 까맣게 모르죠)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개념 설계 역량은 자본 축적의 정도에 결코 비례하지 않으며, 오로지 지난한 시간의 시련을 견뎌야만 형성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부 좌파 이론가들 중에는 여전히 자본 축적을 신비화, 절대시하는 경우가 있으나 현실 변화를 도외시한 시각이다(p314)." 그 정도가 아니라 자본 축적의 고도화로 인해 오히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결국 무너진다는 스토리텔링은 맑시즘 이론 구조의 핵심 블럭입니다. 저자는 이런 프레임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겁니다.

저자가 대안 모델로 내세우는 건 "사람 중심 경제"입니다. 이 모델의 다른 이름은 창조경제이기도 한데, 특정 정치인의 구호와 꼭 연결시킬 건 없습니다. 이 컨셉 자체는 십 몇 년 전부터 있었고, 어느 정치인이 자기 편할 대로 선거 프레이즈로 선점한 거지 그 사람이 창안한 게 전혀 아니며 실제로 그 정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바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청년 창업가들의 "후츠파" 정신과도 맥이 닿는데, 쉽게 말해 조직 내 경영자와 노동자의 구분을 없애고 직원 모두가 신나게 일하는 분위기(성공적인 벤처 기업에서 볼 수 있는)를 조성해서 여태 없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자는 겁니다. 이 모델 자체는 충남지사를 역임한 (몇 달 전에 처참히 몰락한) 모 정치인도 옹호한 바 있는데, 이게 보수 진영에 동조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었지요. 그러나 현 대통령의 지난 대선 후보 시절 "사람이 먼저다"와도 오히려 크게 맥이 통하는 이론입니다. 낡은 프레임으로 현실을 보니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난 시대의 슈퍼프레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작업은 물론 중요합니다. 역사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고, 과거의 맥락을 올바로 이해해야 현재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는 역사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합니다(칭찬을 해도 뭘 똑바로 알고 칭찬을 해야 비례[非禮]가 아니듯). 그러나 구 프레임을 이해한다는 것과, 이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현 정부가 역사에 없던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런 호기를 제대로 활용 못 하고 또다시 전 시대의 실패 패턴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프레임 자체를 성공적으로 갈아타는 과정이 필수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책의 결론부, 즉 뉴 프레임과 대안 모델의 제시가 더 구체적이었으면 좋았겠으나, 이런 작업은 지식인 개인 레벨에서 이룰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죠. 판을 깔아줘야 할 쪽은 오히려 정치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 핵심 세력이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나 현실과 적극적으로 융화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최근 민노총에서 여당의 선거 유세 현장에 일일이 나타나며 방해한 일이라든가, (앞서 말했지만) 낡은 주장만 일삼다 처참히 몰락한 보수 진영의 참화가 다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현실을 바로보지 못하면 현 정부의 미래도 과연 어떤 곤란한 상황을 맞을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겁니다. 중요한 건 진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적응해야 할 "현실"입니다. 이데올로기도 현실에 맞추어 이를 설명해 낼 능력이 있어야 존속할 가치가 있는 거겠고요. 저는 처음에 예전 조국 교수의 <진보 집권 플랜>같은 류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전혀 편협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원대한 비전이 눈에 들어와서 무척 만족스럽고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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