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의 자기 시험을 위하여 Bridge Book 시리즈 2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이창우 옮김 / 샘솟는기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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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없이 깊은 명상 속에서 자신과 마주할 때 비로소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무지 한계 바깥의 것을 범주적으로 적대하며, 현명한 사람은 무지에 직면하여 비로소 겸손을 배우고 (감히) 영원을 응시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도 극한의 공포와 무력감 끝에 신을 대하는 다른 방법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데,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도 널리 읽혀 온 키르케고르(키에르케고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름) 역시 그의 저술 행간 곳곳에 그런 깊은 경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저술들)는 꼭 중등교육 윤리 교과서에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한국 독자들이 (믿는 종교에 무관하게, 혹은 무교라도) 교양과 품격 있는 대화를 위해 필독서로 읽혀 왔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같은 책은 꽤 유명했었으나 근 한 20년 사이 무슨 곡절인지 필독서 범주에서 사라져 버린 듯합니다. 여튼 파스칼의 <팡세>처럼, 그의 청아하면서도 맑고 정직한, 그리고 심오한 고독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폭 넓은 호응을 얻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래, 그러나 성경은 원어로 쓰여 있다니까."
이 말은, 성경 한번 꼭 읽어 보라고 권하는 여자친구에게, 남자가 대꾸하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읽을 생각 없어." 같은 메시지를 에둘러 표현하는 거죠. 원어(헤브류어, 헬라어)를 내가 어떻게 읽느냐며 엄살을 피우고 사실상 거부하는 건데.... 키에르케고르의 시대 덴마크는 물론 신교(新敎)를 받아들인지 꽤 오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만 본디 세속적인 이들 국민들은 서서히 교회 다니는 빈도를 늦춰 가고 있었죠. 당연히 넉넉히 세속화한 풍토 속에, 따분한 성경을 뭐하러 읽느냐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했습니다. 지금은 복지 국가 시스템이 잘 자리잡혀 세계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리는 그들이지만, 이 책 출간, 그리고 저자의 죽음 십 수 년 후에는, 유럽 열강으로 부상한 프로이센과 전쟁에 휘말려 영토를 잃고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여러 모로 격동을 앞둔 전환기, 많은 방황을 그 국민들이 겪고 있었을 무렵이었겠네요.

이 간단한 (가정 속의) 대화를 보면, 왜 키에르케고르가 시대를 초월하여 세계 곳곳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는지 그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끝없이 깊은 사유의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지만, 독자들과 대화할 때 한없이 낮은 레벨로 내려와 격의 없고 솔직한 소통이 가능한 특별한 능력까지를 지녔던 것입니다. "당신의 소박하고 속된 고민, 내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 성경 읽기 싫고 도덕을 묵상하기 버겁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곤란하겠다 싶은 많은 이들의 고뇌와 망설임, 죄책감, 갈증 등의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 깨끗한 언어로 빚어내었기에, 그의 책은 올 타임 스테디셀러로 우리 곁에 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몰랐다면 그건 이미 구세주도 아니고 독생자도 뭣도 아닙니다. 지금은 기적을 행하기에 군중들이 몰려 들어 그를 환호하지만, 곧이어 더 강고한 세속 권력이 들이닥쳐 그를 어떤 식으로건 징죄하고 처형하려 들 줄(그리고 이 어리석운 군중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조롱하리라는 미래를) 그는 이미 알았습니다. 요나 역시 현명하고 선택받은 이였기에, 그의 운명을 내내 피해다녀 마침내 고래 뱃속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죠. 그저 예언자일 뿐이었던 요나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점에서까지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그는 매순간 자신의 운명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으며, 한 순간도 이를 거부할 마음을 품은 적 없습니다.

"그래, 그분은 피할 수도 있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 깨달을 무렵 무한한 환희와 선택받았다는 벅참이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곧 무거운 책임감, 나아가 세상과의 충돌 때문에 닥쳐올 엄청난 갈등의 예감으로 바뀌며, 이때 선택받은 자는 현명하기에 이 모든 예감이 곧 필연임까지 깨닫습니다. "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나의 재능은 곧 십자가이기도 하며, 이미 피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는 것을 말이죠."

"이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며, 이 길은 너무도 좁은 길이다. 이 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좁아진다."

역시 지난시절 키에르케고르의 수상록 만큼이나 널리 읽히는 베스트셀러였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도(제목부터가 "좁은 문"입니다. 영어인 Strait is the Gate로도 유명하고, 불어 원제인 La Porte Étroite로는 말할 필요도 없죠. "좁은 문"이 올바른 번역인데 불어 맛을 살리려고[혹은 문학적 전통 한 자락에 기대어] 영역은 저리 이뤄졌습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이 출전) 천국에 이르는 험난함을 비유적으로 이른 바 있습니다. 올바른 길은 좁고도 험하나, 또 그 길의 끝에 다다라 본들 결국 죽음을 맞을 뿐이나(필멸의 존재이므로), 이 길을 피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처럼 순명해야 함(그가 모범으로 보인 것처럼)을 그와 그의 독자(즉 우리들)은 마음으로부터 수긍하고 순종합니다.

대체로 인지(人智)가 무지몽매했던 과거에는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한 자연, 예측할 수 없이 다가오는 자연 재해 때문에, 그저 간절히 흉을 피하고 길함을 바라는 마음으로 종교를 미신처럼 믿었을 겁니다. 이후 자연과학과 각종 공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구태여 종교에 기대어 화를 피할 필요가 없음을 영악하게 깨달았습니다. 고등 종교와 미개한 미신이 이 지점에서 갈리는 건데, 물질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괴로움과 위기를, 바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겪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제 혹한과 혹서(혹서는 좀...ㅋ), 기아와 질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의와 음모와 사악한 감정 등이 빚는 관계로부터의 질병입니다. 암에 걸리는 이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영양이 부족해서, 타고난 유전병의 사슬에서 못 벗어나서가 아니라, 바로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를 못 배겨내어서입니다. 그럴 때, 180년 전의 현인 키에르케고르가 권하는 여러 처방이 있습니다. 꼭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도(솔직한 말로, 종교 믿어서 더 암 걸릴 것 같다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어디 교회 안이라고 사람 사이의 질시, 불화, 갈등이 없겠습니까?) 이 책을 읽고 본디 인생이 고해(告海)임을 깨달은 후 묵묵히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청신한 삶의 본령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전이 고전인 건 다 이유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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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99%는 환율이다
백석현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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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환율이 99%이다." 책을 펴 읽으면서 그렇게까지나 될까 생각도 했었으나, 이 잘 쓰여진 책의 앞부분 1%만 읽고도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그 나라 경제의 실력, 상태, 건강도가 모두 반영된 게 결국은 환율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처럼 한 나라의 경제가 대외적으로 폐쇄된 경우를 상정한다면 또 모르겠으나, 현대에는 어느 나라건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에 의존하여 경제를 꾸려 나갑니다. 그러니 환율은 세계 시장에서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그 나라의 경제 성적표를 매겨 주는 지표이며, 앞으로 이 나라의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려주는 예리한 징조이기도 합니다.

환율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걸 알려준 책 처음의 1%만으로도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지만, 책의 나머지 99%는 유익함과 재미를 동시에 얻어 가며 읽었습니다. 사실 어떤 주제건, 올바른 방향이 제대로 잡히면 그 다음부터는 순풍에 돛을 단 듯 빠른 진도를 나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 일단 올바른 맵이 형성되면, 지식의 살을 붙여 나가기도 무척 쉽습니다. 환율이 거시 경제 이해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올바른 시선이 일단 잡힌 후에는, 지금까지 파편적으로 떠돌던 경제현상에 대한 여러 잡다한 지식(오해 포함)이 바른 체계를 이뤄 나가게 되더군요.

환율은 기본적으로 두 나라 통화 간의 교환 비율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체계가 제로섬 게임, 즉 누구 하나는 이익을 본 만큼 다른 당사자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또 흔히 한국 미디어에서 쓰는 표현, "환율이 절상되었다/절하되었다"는 옳지 않다고 합니다. 환율이 오르고 내리는 데에는 여러 변수가 개입하는데, 마치 단일한 의지가 일괄적으로 무엇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표현도 소개되는데 REVALUE/DEVALUE 등은 현 경제 체제에서 쓸 일이 많이 않을 듯합니다. 시장이 하는 일은 인위적 조작 같은 게 아니라 일일이 통제할 수 없는 많은 방향의 힘들이 끼어든 결과이기 때문이죠.(뿐 아니라, 절상, 절하가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면, 이 책 p18d에 나오는 대로 그 나라가 아마도 환율 조작의 혐의를 쓸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잘 되지도 않지만)

어느 나라의 통화나 "지불 수단"으로서의 기능 외에 "가치 저장" 노릇을 따로 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에 비하면 이런 역할은 상대적으로 아주 미미할 뿐입니다. 저자는 "달러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 가치 저장 수단"이라고 평하는데, 세계 경제 주체 어느 누구도 달러를 그저 한 나라의 통화 정도로 여기지 않고, 비상시에 대비한 특별한 자산으로 간주합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는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패권 교체의 기회까지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계 각국은 미국 달러를 (여전히) 대량 보유하는 선택을 했고, 중국 위안화를 마구 서둘러 사들이는 액션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라서, 앞으로 세계에불확실성이 거친다 싶을 때 일시적으로 금값이 오르긴 했으나, 조선족 거주지로 몰려가 "장차 세계의 패권국은 중국이 될 터이니 위안화 꿍쳐 둔 것 좀 주세요! 다 살 테니!"라고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지요. 시장의 심판은 본시 이처럼 냉정한 법입니다. 축구 경기와 다른 점은, 난다긴다 하는 축구 전문가, 도박사들도 결과 예측에 실패하여 돈을 날리기도 하지만, 시장의 "도박사"들은 그저 시장과 세상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판지을 뿐이라는 겁니다(전쟁이 나서 기존 판도가 무력, 군사력에 의해 바뀌는 경우 제외.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시장과 환율은 [혹 가동을 한다면] 전쟁의 성패를 앞서 예견할 수 있을 겁니다).

달러화는 세계 외환 시장의 흐름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강합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는 게, 달러/원 환율의 결정에서 달러와 원이 비슷한 비중으로 (마치 상품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어떤 물건의 가격을 결정할 때 같은 만큼 작용을 하듯) 결과를 만들 듯해도(사실, 그런 상식에 의존하는 이들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실제로는 압도적으로 달러의 비중이 크다고 합니다(당연하죠). 달러는 원화뿐 아니라, 비슷한 시점에서 다른 통화와 엮여 만드는 환율 쌍(雙) 속에서도 대개 같은 방향으로 동인을 만들 만큼 그 영향이 강합니다.

뉴스를 보시면 원달러, 원엔, 원유로 등은 다른 방향으로 각개약진해도(엔은 오르는데 달러는 내린다든가), 달러가 묶인 곳은 거의 같은 방향으로 형성되는 걸 흔히 보는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달러를 가치 저장 수단으로(지금 당장 한국에 전쟁이라도 나서[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외국 통화를 챙겨야 한다면 과연 뭘 손에 넣으려 들지 자신의 심리를 살펴 보면 뻔합니다. 당연히 답은 달러입니다) 간주하기 때문에, 외환 시장의 움직임이 이렇게 가는 겁니다.

세계 경제 주제 관련 어느 대중서에서도 다루는 게 "트리핀의 딜레마"입니다. 쉽게말해, 국제기축통화 구실을 하려면 부지런히 달러를 찍어야 하는데, 이렇게 무한정 하다 보면 가치가 떨어져 결국 기축 통화 자격에 지장이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적게 찍거나 회수하면 국제 통화 노릇을 또 원활히 못하게 되고요. 이는 그러나 미국에게만 불리한 게임은 아니며, 달러화를 많이 보유한 나라는 미국이 강할 때 덩달아 이익을 누리게 되나, 미국이 약해지면 자신이 보유한 달러의 가치도 같이 떨어지므로 결국 손익계산서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셈도 됩니다.

저자는 1990년 통독 직후 통일 비용 지출로 거의 파산 상태까지 갔던 독일이 지금처럼 초호황을 누리는 비결은, 단연 유로화의 도입 덕분이라고 합니다. 전 유럽이 같은 통화를 쓰니 이 권역 안에 별 제약 없이 독일 물건을 싼 가격에 수출할 수 있고, 또 원체 독일의 상품이 경쟁력이 강하다 보니 유로존 곳곳에 잘 침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미국(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벌이는 자유무역협정 시스템만 해도 완전한 자유무역이라 보기엔 한계가 뚜렷하고, 얼마 전에 봤듯이 한 나라가 불만이 있으면 자유로 탈퇴할 수 있는 등 문제가 큽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강력한, 단일 통화 도입이 (FTA 등보다도) 십 년 앞서 이뤄졌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책 맨앞에, "환율은 제로섬 게임이다"라는 저자의 말이 있었던 걸 떠올려 보십시오. 환율 문제를 무려 "단일통화"라는 수단으로 돌파했으나, 유로존 각국이 아예 단일 재정 - 단일 정부로 통합되지 않는 이상에는, 독일이 이익을 보면 다른 나라는 손해를 본다는 뜻도 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유로존이 독일에 조금씩 보조금을 지불하는 셈"이라 요약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독일은 강한 유로, 더 통합된 EU를 지향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독일은 이제부터 유로존의 다른 국가들에 더 많은 걸 나눠줘야만 할 것입니다. 이때, 지금까지 다른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일 안에서도, 이익보다는 손해를 보는 계층이 늘어납니다(국가 전체로는 이익이라고 해도). 저자는 만약 메르켈 현 총리 이후 그만한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독일은 자국 국민을 더 우선 달래기 위해(여태 거둔 혜택을 타국보다는 자국 국민에게 먼저 나눠 주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EU를 먼저 깨고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봅니다. 상황이 바뀌면 전략도 바뀌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저자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41에 보면 "... 한국에서 기준 금리를 인상하면 주식 시장에서 자본 유출 요인이 채권 시장에서 자본 유입 요인보다 강하게 작용하여 오히려 원화 약세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경제를 이해할 때 가장 난감한 점은, A라는 사건(원인, 요인)이 반드시 B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anti-B, 정반대 방향으로 튀기도 한다는 겁니다. 한국은행에서 기준 금리를 올리면, 이자율이 유리하니 1) 해외 자금이 한국의 채권 시장에 몰려 듭니다. 그러면 다들 원화를 가지려 하니 원화는 강세를 띨(가치가 올라갈) 수 있죠. 그런데 본디 금리가 오르면 주식시장의 매력이 떨어지고, 특정 국가에서 주가가 대체로 떨어진다 싶으면 외국인 자본은 2) 주식과 원화를 동시에 팔아치울 겁니다. 이러면 이건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요인이 됩니다.

1)과 2), 두 반대 방향의 힘 중 무엇이 더 강하겠습니까? 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일단 외국인이 보유한 주식 가치 볼륨이, 채권의 그것보다 거의 여섯 배 가까이 크기 때문에, 2)의 힘이 더 크므로 원화는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 그럴 수 있습니다" 정도로 확신의 강도를 약화시킵니다. 이유는, 이 역시 몇 가지 변수만 고려한 지극히 단순한 모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사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몇 가지 단순한 이치만 머리에 넣어 두고 그대로 되기만을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태도가 또 없습니다.

내가 A라는 여자한테 잘해준다고 치죠. 이런 멋진 매너가 소문 나서, 앞으로 공동체 내 다른 여성 모두에게 두루 인기가 높아질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정반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이런 잔머리 굴리는 전략적 태도가 A에게건, 혹은 이를 객관적으로 지켜 보는 다른 여성에게건 티가 나서, 이 남자가 가볍다고, 딴 속셈이 있다고 소문이라도 확 나면, 이런 tactics는 안 하느니만도 못한 결과가 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애정사가 돌아가는 이치도 이렇거니와, 훨씬 더 복잡한 다양한 변수들의 개입으로 인해 작동하는 시장 경제 체제에서, 각주구검, 수주대토, 교주고슬만큼 어리석은 대응 방안이 또 없습니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얄팍한 밑천으로 피우는 잔재주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짓도 안 벌여도 여자는 이런 기본 실력이 탄탄한 남자한테, 그저 호기심 때문에라도 저절로 접근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화가 절상되면 무역에 불리하게만 작용하여 손해인가 보다 여기기 쉽습니다. 실제로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의 현실에 대부분 맞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역으로, 강세를 띤 원화로 더 많은 해외 자산을 사들일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플라자 합의에서 일본이 서방 국가들의 압력에 굴복해 탈탈 탈려 오늘의 "잃어버린 OO년"을 불러왔다고만 생각하지만, 강해진 엔화를 기반으로 일본 역시 얼마든지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해 빚은, 자초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과연, 경제의 99%가 환율로 다 설명이 될까? 우리는 흔히 실물 섹터의 중요성만 생각하고, 그의 그림자에 불과한 자본 분야의 비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 간과하기 일쑤입니다. p136의 "원포인트 레슨"을 보면, 무역에 수반되는 외환 거래는, 순수 외환거래로만 이뤄지는 물량에 비해, 고작, 고작 1/40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기축 통화국이 되기 위해, 예컨대 쑹홍빙의 <화폐 전쟁>에 나오듯(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은, 금 등(특히 은)을 과거처럼 본위로 삼는 새 외환 제도가 필요하다고 나오는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무역으로 백날 돈을 벌어봐야, 현재 미국이 장악하는 자본 시스템에 새발의 피도 안 되는 도전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지금 쑹홍빙이 간만에 낸 후편 새책 읽는 중이니 기대해 주세용)

이 책은 환율이 돌아가는 이치도 잘 설명하지만, 우리가 지금 뉴스를 보며 대체 왜 저러는지 고개가 갸웃해지는 여러 현상에 대해, 아주 직관적인 답을 내어놓습니다(그러면서도 신중합니다). 벌써 십 년 전, 이십 년 전부터 세계 패권을 미국에게서 뺏어온다는 중국은 왜 십 년 가까이 더 나가지도 못하고 제자리걸음일까요? 요즘 인터넷에 보면 "십 년 전부터 중국 망한다고들 했지만 이처럼 굳건하다"고 하는 댓글이 많은데, 어설픈 물타기입니다. 왜 중국의 성장이, 애초 떠들었던 대로 파죽지세가 아니고 오히려 신창타이니 뭐니 하며 구차한 변명이나 내놓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십년 전부터 이뤄진다던 패권은 어딜가고 고작 "아직 안 망했다"는 게 전부입니까? 그간 궁금하던 사항이 책에 시원하게 잘 해명되어 있어 읽고 난 기분이 너무도 가뿐합니다. 별 열 개도 아깝지 않네요. 앞으로 나오는 대중 경제서들이 좀 본받아야 할 내공이고 포맷입니다. 이렇게 후련하고 막힘 없는 책은 근래 처음 읽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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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당신에게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강혜정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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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E H Carr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요약한 적 있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 역사는 과연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이며, 역사가 과거에만 묶여 있을 시 이는 참된 역사일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사는 현재와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로먼 크로즈나릭 교수님은 좀 다른 면에서 저 유명한 말을 재해석합니다. 역사가 "현재"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매개를 통해 우리와 대화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끼는 이 없이, 다이렉트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을까? 사실 저자의 모국인 영국 아닌 프랑스에서는 이미 "아날 학파"가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거대 정치사나 형이상의 의미 부여가 아닌, "소소한 일상으로 이뤄진 역사"에 대해 집중 탐구를 시작한 적 있습니다. 그들과 이 저자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역사적 사건(거대한 맥락의)과 일상사(의 메시지)를 애써 구별하지 않고, "당신들, 바쁜 현대인들은 왜 그렇게 무의미한 관념과 선입견에 파묻혀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잊고 사는가?"에 대해 정면으로 교훈을 추출하여 우리에게 건넨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역사책이나 그 역사책에 등장하는 철학자, 현인들은, 시대가 많이 흘러 다분히 이해가 어렵게 된 언어로 표현했었다뿐, 실제로는 매우 명쾌하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여전히 어려운 관념이었으나 저자 크로즈나릭 교수님이 이 책에서 비로소 쉽게 풀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개념은 물론 우리들이 고교 과정 "윤리와 사상" 등에서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등의 구분으로 배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개념사항들을 넘어,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감, 순수한 호감, 도와 주고 싶은 마음, 연대 의식 같은 게 우리 역사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알려 줍니다. 어찌보면, 그런 순수한 가치를 담지 못하는 역사는 벌써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할까요, 아님 그래도 선하게 바뀔 여지가 있기는 한, 척박하게 버려진 땅 같은 걸까요? 저자는 p100에서 일단 비관적인 답을 내어놓습니다. 2차 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 십자군 전쟁, 식민지 개척 전쟁, 현대의 이기적이고 약탈적인 기업들이 저지르는 환경 오염... 인간이 악하다는 증거는 끝도 없습니다. 저자는 나아가 "타인을 해치는 비상한 능력을 지녔으며, 불의를 보고도 수동적인 태도로 수수방관하는 능력" 역시 인간이 탁월하다고 비판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도 부끄럽지만 타당한 지적이며, 우리 인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생각을 비껴갈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관점의 대표자로 책에서는 토마스 홉스 같은 이를 들며, 우리 동양권의 독자들이 잘 아는 논자로는 순자 같은 이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불길하게만 세상과 인간을 볼 일은 아닙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인간 본성과 인간사에서 그와 반대되는 희망적인 불씨에 주목한 인물도 있으며, 그 대표격으로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를 꼽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직접 쓴 표현은 아니지만 저자는 그를 가리켜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로 본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스미스를 경제학 개조로만 알지만, 그의 시대에는 도덕철학이라는 게 지식인, 석학의 필수 논의 과제였으므로 그의 정력과 시간, 재능도 주로 이쪽에 쏟아졌던 게 맞습니다. 경제 관련 논변, 연구는 오히려 가외의 취미 비슷한 것이었죠.  

저자는 이어 18~19세에도 상당수의 백인들이 노예제 폐지를 입 모아 주장했으며 이것이 바로 타인의 이유 없는 불행에 눈감지 않는 공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p122). 이런 공감의 목소리, 행동, 협력이 모이고 모여 변화를 이끌어내며 역사의 근본적인 흐름을 바꾼다는 취지입니다. 윌리엄 월버포 같은 당시 영국의 정치가가 실제 행동으로 보여 준 노력은 감동적입니다. 미국의 토머스 클럭슨 같은 분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또 어떻습니까. 이분, 또 스토 부인 같은 사람들은 펜으로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노예제의 비참한 실태를 알리고 고발했는데 이 책에도 얼마나 잔혹하게 노예들에 대해 태형이 이뤄졌는지에 대한 기록 인용이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는 한때 미국에서 소수파 이단으로 멸시, 탄압받았습니다. "퀘이커"라는 말 자체가 비칭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한때 멸칭이었던 프로테스탄트에 자랑스럽고 적극적인 아이덴티티를 새로 정립한 것처럼, 퀘이커 교도들 역시 "그래! 우리는 퀘이커다!"를 선언하고 오히려 주류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회 문제와 모순에 대해 해결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p222에서는 존 울먼이라는 운동가를 소개하는데, 소신과 지조 굳은 한 인간이 세상을 어느 정도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모범적인 예시입니다. 18세기 중반인 울먼의 시대에도 영국에서 아직도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듣고 울먼은 대서양을 건너기까지 합니다.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몸이 근질거려 못 견디는, 살아 움직이는 양심의 표본입니다.    

우리는 행운의 숫자를 7로 여기지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5에다가 세상의 비밀과 이치를 모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자연계를 구성하는 요소도 다섯 개요, 인간의 (외부) 감각도 시, 청, 촉, 후, 미 다섯 개입니다. 그는 이런 전제 아래에서 인간에게 내부 감각이라는 게 있다는 주장을 해부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는데, 근대에 들어 이 주장은 가차없이 버려졌습니다(하지만 현대 들어 뇌신경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런 황당해 보이는 학설도 어떻게 재조명이 이뤄질지 모릅니다). 

특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은 감각 세계와 정신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고 평가된다고 합니다(p241). 이 해석이 하도 근사하게 보여서 후주(p494)와 참고문헌 목록(p474)을 찾아 보니, 콘스탄스 클래슨이 36세에 썼던 책이 그 출처라고 나오네요.  

서유럽 역사에서 부러운 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먼 거리로 탐험을 떠나 기어이 (그들 입장에서) 발견을 해 내고 마는 모종의 용기입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도, 막부에서 남만인(이베리아 출신), 홍모인(네덜란드인) 등을 폄하하자 "그래도 그 먼 거거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며 감탄하는 장면이 있죠. 19세기 탐험가 메리 킹슬리는 첫째 정규 교육을 전혀 못 받았고 둘째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가득했던 시절 대담하게도 아프리카로 떠나 많은 업적을 이뤄냈고 현지인들에 대해 동조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를 기록으로 남긴 점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동시대인이라 볼 수 있는 찰스 다윈의 글은 대단히 심각한 편견을 드러냅니다. 

개개 국민을 농노의 위치에서 끌어올리는 데에는 국민교육의 실시가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인종주의와 증오를 조장한 면 작지 않고,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 냉혹해지거나 오히려 적극 가담케 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쳐 큰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고 휴머니티 가치 자체가 훼손되었습니다. 이런 불의와 부도덕,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연대의식 회복이 필수이며 우리는 그런 목소리와 교훈을 다름아닌 역사를 통해 실감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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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법인세법 - 제2판
노현섭.김영화 지음 / 피앤씨미디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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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개인 소득세를 내고, 법인은 법인세를 냅니다. 법인은 법(종류 불문)에 의해 "인(人)"으로 여겨지는 단위를 말합니다. 자연인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출생 신고 외에 특별한 절차가 필요 없지만, 법인은 설립의 절차가 따로 요구됩니다. 그래서 법인세를 실제 내기도 하고 법인 해산 판결도 내려지지만 이런 법인이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있지는 않으나 있다고 가정하고 사회 생활과 제도의 편의를 도모할 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이미 법인세를 냈는데 또 개인(주주 등)에게 소득세를 부과하는 건 이중과세라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법인 실재설의 경우, 엄연히 법인은 자연인과 구별되는 실재 단위이므로 이런 과세 정책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법인 의제설은 반대로 이중과세의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법인세란 그저 조세의 편의를 위한 제도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라 해도, 반드시 후자의 입장에 서는 건 아닙니다. 양설의 대립 여부를 떠나, 법인세 제도를 마련해서 기업 단위에서 먼저 세금을 걷는 건 조세 당국 입장에서 매우 편하기는 합니다. 이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 실재/의제의 대립은 대부분 무의미하다고 보며, 법인의 존재는 조세 징수의 편익에도 큰 이유가 있다는 제3의 입장이 너른 지지를 받습니다.

어떤 학자분(한국에서는 김현동 교수 등)은 "법인이라는 길목"에서 일단 조세를 거두어들여야, 수없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개인 소유 관계의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분이나 소유권 관계가 투명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탈세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걸 일일이 세무 당국에서 추적한다면 막대한 인적 자원, 경비가 소요될 터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로스업 방식으로 이중과세 논란을 해결합니다. 일단 주주 소득에다, 법인세 단계에서 납부했던 금액을 도로 더한다는 게 중요합니다(실제로 주주가 받은 돈은 법인세 납부 후 줄어든 배당액인데도요). 이렇게 해서 일단 소득세를 계산한 후, 세액 공제 방식으로 법인세 납부 부분만큼을 빼 줍니다. 앞서 세액 표준 계산시 (받지도 않았는데) 합쳐진 돈보다, 이처럼 세액 공제 방식으로 덜어지는 돈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소득공제보다는 세액 공제가 유리하다는 점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그럼 그로스업은 왜 해 주느냐? 나중에 세액 공제를 해 줄텐데 애초에 법인세 납부 후 금액이 표준이 된다면 그야말로 이중 공제를 해 주는 셈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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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모르는 남자들의 심리 - 사랑이 서툰 너에게
이성현 지음, 차상미 그림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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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에서 온 여자, 화성에서..."란 말이 있듯, 여성과 남성의 심리는 너무도 다릅니다. 과연 같은 종(種)이 맞는지가 의심스럽지만(?), 교합 후 2세를 생산하는 걸 보면 섣부른 의심을 할 일도 아닙니다. 자웅 성체가 현격히 다른 모습을 한 걸 두고 dimorphism이라 부르는데, 사람의 경우 공작새나 사자 만큼 차이가 나는 경우는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안타깝게 보는 건, 거 괜찮게 풀리겠다 싶던 커플이 사소한 다툼을 계기로 헤어지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이때 "결국 뭐 잘 안 맞았나 보지 뭐." 하고 체념할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미미했던 불화나 오해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다면 그건 제3자가 보기에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관계의 파탄이라는 "사고"를 미연에 막고, 현재 그럭저럭 잘 되어가는 관계라면 더욱 "기름"을 치고, 뭔가 낌새는 있는데 아직 스파크가 안 튀는 단계라면 촉매제를 확 부어 주는 게 바로 이성 심리의 이해입니다.

이 책은 아직 젊은 남성 저자가 쓴, "알 필요도 있고 알아 주었으면 하는 미묘한 남성 심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남자가 여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배려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여자 입장에서 일단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전략이 뭐가 있을지 코칭해 주는 내용입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면 한 번은 관계를 가꾸는 게 일차 목표이지, 미숙한 에고만 철벽방어하고 정신승리에 그친다면(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 그걸 어디 어른의 심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 입장에서 꼭 챙겨야 할 여성의 심리" 같은 주제는 다른 책에서 찾거나, 아니면 이 작가(크레에이터)께서 언젠가 후편으로 쓸지도 모르죠.

남자들이 여자한테 하는 "귀엽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 얘기는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여자가 하는 말과는 달리, "사귀지도 않으면서 괜히 부담스러워 할까봐, 또는 못생겼다고 장난치면(사실 장난도 아님) 기분이 나쁠까봐"(p17)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거죠. 대략 이십 년도 전에 벌써 "해명이 나온 주제"인데, 그래도 어느 세대에게나 지난 세대의 지혜(...)를 물려줄 필요는 있습니다. 연애 자체는 낭만이지만, 결실을 보거나 덜 타격이 가는 결말(파국)을 위해선 언제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답장은 꼬박꼬박 하는데 선톡이 없으면, 그건 (역시) 마음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크다."(p27) 안타깝지만 이 역시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 선톡도 가끔 날려서 관리를 하는데, 대부분의 남성은 이 정도의 배려, 꼼수도 쓰지 않기 때문에 판별이 쉽죠. 이렇게 쉬운남자 심리인데도 속을 못 알아채는 이유는, 여성의 경우 그 남자한테 한번 빠져들면 더 심하게 콩깍지가 씌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현실, 해답은 뻔한데 그 여성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영리하게, "현실이 이러므로 꿈 깨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제발 희망고문들 좀 하지 마세요"라며 오히려 남자들에게 충고를 합니다(!). 이처럼 (여성)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공하는 크리에이터가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ㅋ 아, 물론 "여자건 남자건 쳐내세요(p27)"라고 텍스트상으로는 나와 있으므로 꼭 특정 성별의 독자에게만 어필하는 멘트는 아니겠습니다. 좀 뒤에 보면, 여성 역시 자신에게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데 마음이 없으면 초장에 단칼 거절을 하라는 조언이 나옵니다. 역시 희망고문이 가장 나쁘다면서 말입니다(p37).

썸을 타는 건 맞는데 왜 남자는 고백을 안 할까요?(일단 남자가 고백 안 하는 경우부터 분석) 첫째는 거절당하면 다시는 못 만나니까. 둘째 여성이 자신보다 훨씬 나아 보여 자격지심이 있을 때,. 이 두 가지 이유가 주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하지만 또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자도 어장 관리를 하지만, 그보다는 "걱정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혹은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가 진짜 이유라는 거죠. 여기까지는 별 새로운 게 없는 내용인데, 그 다음 조언이 좋습니다.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해 보라"는 겁니다(p33).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하면 가벼워보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오히려 남자는 용기 있는 여성으로 그녀를 생각하며(p43), 자신감 있는 여자라고 더 큰 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긴다(p45)는 겁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100% 맞는 말입니다. "가볍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게 글러먹은 놈이죠."라고도 하시는데, 100% 찬성입니다. 용기 있다 이런 걸 떠나 요즘 여성들은 호감이 있으면 빤히 시선을 응시하더군요. (물론 정반대의 경우에도 기가 막혀서 쳐다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결론은 "자존심 때문에 사랑을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괜찮은 여자를 대뜸 거절하는 놈은 안목이건 깜냥이건 비전이건 다 시원찮은 놈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단순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존심이 세다." 그래서 데이트 비용 등을 낼 형편이 안 될 때, 데이트 자체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저자는 (그런 남성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여자친구는 물질보다 남친 자주 만나는 게 더 좋으니 그런 경우 부끄러워하지 말고 여자에게 기대기도 하라고 말합니다. 근데 정말로 이 충고가 100% 먹히는 관계라면 참 행복한 커플이겠으며, 누구의 충고 없이도 이미 알아서들 잘해나가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남자는 능력을 자발적으로 키워 나갑시다. 그래야 개념녀를 만납니다.

남자가 질투를 안 하는 이유는 뭔가(남자가 질투를 "하는" 심리는 이 책 앞에서 다뤘고 이 서평에서도 간접 언급했습니다). 이것도 "에휴 그냥 헤어지면 되지"가 있고, 반대로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뭐라도 다 배려하고 참는 심리가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여자는 질투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게 보통이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남자한테 "쌩얼(민낯)"을 보여 줘도 될까? 여자들은 이 경우 못생겼다고 싫어하게 될까봐 많이 주저한다지만, 남자들은 여자친구의 "순둥순둥한(p67)"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초창기, 아직 콩깍지가 씌었을 때 보여줘야 효과가 더 좋다고 저자는 권하는군요. "미리 보여줘서 예쁘다고 머리에 박히게 하라" 거 참 맞는 말입니다.

잔소리의 경우 여자는 "다음부터는 제발 좀 안 이랬으면" 하는 생각으로 하는 건데, 남자는 "안 그래도 잘 하고 고칠 건데 왜 쓸데없이 감정 소모를 하지?" 같은 생각으로 언짢아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화를 더 자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전여친과 비교하는 남자는, 지금 이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전 여친의 환상을 대용품을 빌려 재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남자와는 과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단칼 충고입니다.

좀 묘한 이야기도 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감수성이 터져서(이 경우는 꼭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아니라 반대로 비하 심리도 있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죠) 갑자기 여친에게 전화해서 "나보다 더 나은 남자 만나" 라는 괴멘트를 던지는 경우가 있답니다. 이때 속셈은 여친이 질려서 그냥 헤어지고 싶은 건데 희한한 핑계를 대며 자기기만, 위선을 떠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게 맞는 소린가? 남자 입장에서 잘 생각해 봤는데, 생각해 보니 거 참 대단한 통찰이다. 이거는 허를 제대로 찔리고도 자기 심리를 자기가 몰라 남자들이 대부분 인정 안 할 것 같습니다. 타인 앞에선 물론이고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도 말입니다. 이 책이, 아직 나이 어린 저자의 달달하고 그저 맞기만 한 당연한 상식으로 무슨 바넘 효과를 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런 대목처럼 남들이 채 캐치 못한 지점을 치고 들어가니까, 예전부터 이 크리에이터가 인터넷에서 소문도 나고 조회수도 높고 인기를 끄는 것 아니겠나 싶었습니다.

에피소드 32에 남자는 "자신을 좋아해 준 사람과, 좋아한 사람 중 누구를 더 못 잊나요?"란 질문이 있습니다. 마치 예전, 수학자 레이먼드 스멀리언의 책 어느 구절처럼,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같은, (철학이 아니라 연애사의 영역에서는) 결정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단언하건대, "둘 다 생각은 나겠지만, 더 못 잊는 건 압도적으로 후자이다"라고 합니다. "좋아해준 여자를 못 잊는" 건, 그저 미안해서일 뿐이라고 합니다. 거 참 가슴 아프지만 맞는 말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나쁜 놈들(...)은 그런 미안한 감정조차도 없어서 아예 잊어버립니다. ㅋㅋㅋ

"자신이 좋아한 여자는 추억 속에서 곱씹지만
자신을 좋아해 준 여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랑거리로 삼을 뿐이다."

우리가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매 페이지 페이지마다 새로운 통찰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아는 상식을 확인하고 싶어서도 있습니다. 연애사만큼 빤히 되풀이되고 처방이 잘 알려진 영역도 없지만, 그 안에 빠져 고민하는 당사자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번민과 절망과 열정에 숨막혀합니다. 오죽하면 영어의 passion이, 그 어원 면에서 "고통"이란 뜻이었겠습니까. 허나 이런 책을 읽고 한번쯤은 나 자신을 객관화하며, 결국 별것도 없는 관계와 애정 속에서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찾다가 한 세상 마치는 거겠습니다. 망상은 금물이며, 늙은 닭대가리한테나 끼고 살라고 안겨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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