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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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머니가 비키니를 입은 것과 같았다."

영원한 삶도 일종의 저주일 수 있다는 모티브는 이미 그리스 신화의 캐릭터인 예언자 시뷜레에서부터 등장했습니다. 노인들의 가장 흔한 거짓말이라는 "죽고 싶다."가 아니라, "제발 날 죽여 달라." 같은, 가장 섬뜩하면서도 역설적인 절규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주인공의 무기력함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아무것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필멸의 존재가 느끼는 허무감과는 그 근원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입니다.

여태 타임루프는 문예 못지 않게 영화에서도 많은 걸작(적어도, 화제작)들이 나왔습니다. 자신에게만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성촉절의 저주에 걸린 필 코너의 이야기를 다룬 <사랑의 블랙홀>부터, 인류의 운명까지를 떠맡고 구원해야 하는 빌 케이지의 장엄한 투쟁을 그려낸 <엣지 오브 투모로우>까지. 타임루프물이 매혹적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선택을 돌려놓고 싶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루저의 미련을 갖기 때문입니다.

내 실수이건 남의 잘못이건 그 간발의 판단 착오로 결과가 크게 어긋났을 때의 안타까움은 기억에서 떨쳐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잔돈푼이나 아끼려는 망집에 사로잡힌 노파의 경우, 모든 악몽을 타고난 나쁜 기억력, 즉 리셋과 발뺌으로 해결하는 묘수를 지니고 있기에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죽을 지경이지 본인 자신은 속 편하게 잘 삽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책임감을 지닌 정상적인 활동자라면, 도대체 자신의 실수 하나로 모든 결과가 어그러지고 만 그 중차대한 전환점을 쉽사리 잊기 어렵습니다. 같이 일하기에 가장 편한 사람이라면, "지나간 건 잊어요."라는 한 마디로 상대의 실수를 포용해 줄 여유가 있는 그런 품성을 지닌 이입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저지른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뀐 듯 보이지만, 이 모든 걸 알고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원포인트를 교정해도 결국 사건은 똑같은 방향으로 귀결하고 만다? 어떨까요. 이 점을 확인한 후, 우리는 깊은 위안을 얻겠습니까, 아니면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지겠습니까? 이 역시, 철저한 고립된 개인의 레벨에 사는 인간인지, 아니면 자신의 지성과 의식이 더 깊고 더 높은 맥락에 연결된 진지한 삶을 사는 인간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전자라면 책임회피의 치졸한 구실이 마련되어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아가 다시 회귀한 과거에서 더 악랄한 실수를 고의로 저지르며 결국 자신에게도 별 도움이 안 될 퇴행적이고 자폐적이며 오탈적인 쾌감을 맛볼 것입니다. 후자라면 이 과제를 아마 집단지성의 몫으로 이관할지 모릅니다. "왜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문제가 풀리지 않는가? 우리는 과연 어떤 종류의 이치와 섭리에 의해 끌려다니는 노예인가?"

이 작품의 빼어난 성취는 바로, 개인의 고뇌와 번민이라는 정해진 궤도를 넘어, 칼라차크라라는 비슷한 운명에 처한 다른 개체들의 집단을 알게 되면서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들입니다. 책을 끝까지 읽어도, 그럼 우로보란에 속한 이들은 누가 설정한 틀과 규칙에 의거하여 이런 달갑지 않은 영원에 놓였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몇 달 전에 다시 컴백했으므로 현 총리)는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여전히 과학은 '왜'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지금 못해 주는 건 상관 없는데, 우리가 불안한 건 "끝까지 파고들어도 여전히 설명 못해 준채 clue의 연속으로만 뱅뱅 돌게 하는 것 아닌가?" 같은 근원적인 의문에 엮인 것입니다. 작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숙함으로 "초연"을 권하던데, 역시 책을 다 읽고 자신만의 모델 속에서 끝까지 결론을 추적해 보는 건 또 독자만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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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서랍 - 말, 인생을 원하는 대로 끌고 가는 힘
김종원 지음 / 성안당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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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됨됨이를 가르는 옛 선인들의 지혜 중에 "신언서판"이라는 게 있다고 하죠. 풍신이 의젓하고, 언변이 유창하면서도 사리에 맞으며, 글씨를 잘 쓰고, 사리 분별이 빼어난 인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자께서는 이 넷 중 특히 "언"과 "서"를 가리켜, 후천적 요소이니만치 얼마든지 노력에 따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특히 열등 DNA를 타고난, 길거리 캐스팅의 망상에 오늘도 내일도 밤잠 못 이루며 눈먼 포인트 타 먹을 생각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미친 노파가 사실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법한 충고죠. 허나, 못된 아메바 후미부에 융털 돋는다고 말을 알아 먹을 종자라면 애초에 저런 뻘짓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만.

"눈빛은 눈의 언어고,
지식은 두뇌의 언어이며,
지성은 삶의 언어이다."

"말은 결국 내 말의 서랍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검색해도 찾을 수 없고, 내 안에 없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새기면 새길수록 마음에 와 닿는, 심금을 울리는 충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은 느닷없이 발설자의 혀 끝에 영감처럼 와 닿으며 그 사람의 수요와 갈망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평소에 꾸준한 수련이 뒤따라야, 필요할 시에 그 사람의 혀끝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단단한 돌 틈을 가르듯 본연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래서, 평소에 꾸준히 자신만의 서랍 속에 기품, 치유, 긍정, 자존, 공감, 안목의 재료를 꾸준히 축적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서랍에 내용물이 있어야, 필요할 시 적기에 꺼내 쓰며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의사와 희구를 관철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통장 서랍보다 중요한 게 말의 서랍이라고 저자는 일침을 놓으십니다. 하긴 이런 좋은 말을 정반대로 해석하여, 어차피 통장에 다섯 자리 숫자의 돈도 없는 팔자(그래서 시청료를 못 냅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그저 말(IT 전문가니 과학자니 심지어 길거리 캐스팅이 다 되었다느니, 어렸을 때 잘 살았다느니 하는, 현재의 실체와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새빨간 거짓말)로 다 때우는, 졸혼 떠돌이의 견강부회로 이어진대서야 또 안 될 말입니다. 저자는 그저 평소의 수련, 준비, 정직한 노력을 강조하시는 게죠.

사람은 진정한 인격을 바로세울 바탕이 될 기품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강조하시는 게 바로 "말의 서랍"입니다. 오히려 이런 서랍은 "말"보다는 참된 노력과 도야를 거친 "말의 소재로서의 인격"을 담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회원 탈퇴만 하고 댓글만 지우고 동시에 그 나쁜 머리에서 자신의 범죄 행각만 까마귀 고기 삶아 먹은 양 잊었다고 해서 끔찍한 범죄가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tv를 봤으면 시청료를 내어야 하며, 남의 명예를 훼손했으면 복역을 통해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아둔하고 비천한 천품을 타고난 자는 가장 좋지 않은 순간에 뭣이 한풀 꺾였다며 현실 도피를 하는데, 어디 인생이 그리 편할 대로 넘어갈 수 있는지 하회를 지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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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최고의 선물, 세상법칙 사용설명서
김영철 외 지음 / 좋은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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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물론 이 말은 책의 저자가 우리 독자들을 가리켜, 참다운 자존과 긍정의 눈을 뜨라는 격려의 뜻에서 베푸는 찬사이겠습니다만, 우리 역시 주변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료라든가, 그 의식에 허위의 거품이 끼지 않은 정상적인 경제 활동 인구를 향해 얼마든지 같은 말로 응원을 보낼 수 있지 싶습니다. 물론 지 허위 망상에 취해 멀미를 하는 자, 혹은 가짜 IT 전문가(실상은 초딩 코딩이 뭔지도 모르는 밑바닥) 따위는 선물은커녕 토사물에 가까운 해악이겠지만 말입니다.

요즘은 주부들을 상대로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회사가 꽤 많습니다. CEO도 여성이고(약장수 같은 미친 수다쟁이가 아니라 진짜 프로그래머, 개발자 출신) 직원들도 80% 가까이가 여성인 견실한 어느 중소기업이라든지 말이죠(사명은 구태여 거론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회사에서 항상 강조하는 덕목이 "워라밸"입니다. 요즘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구호처럼 되었습니다만, 여성들이 특히 많이 근무하는 회사의 경우 육아, 가사 문제를 아무래도 직원들이 신경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회사는 창업 초기부터 이 문제를 대단히 정책적으로 고려해 왔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을 잘 둘러 보면 요란하게 생색이나 내듯 표어를 만들어 내기 이전, 이미 조직 성장과 생존의 문제로 이를 인식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경영을 솔선수범한 중견 기업이 여럿 있습니다.

동화세상 에듀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회사는 지금도 주부 인력을 대상으로 양질의 연수 과정을 통해, 돈도 벌고 젊은 시절 못다한 자아 실현도 마저 이루는 등 이른바 사회와 소통하며 상생의 기회를 제공해 왔으며, 이제는 바인그룹이라는 거대한 사업체를 이뤄 더 큰 규모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흙수저가 절대 금수저가 될 수 없다고, 계층 사다리는 이미 붕괴된 지 오래." 어쩌면 이 말은 맞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타임머신이라도 개발되어 1960년대쯤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시절에는 그럼 계급 간의 장벽이 없고 차별이 없고 부조리가 없었을까요? 지금은 누구누구가 갑질한다며 하소연하거나 목소리를 모아 을들의 반란을 시도할 수나 있는 세상입니다. 어떤 밑바닥의 경우 말도안되는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자신의 비천한 현실이 떠넘긴 스트레스를 풀다 댓글 싹 지우고 회원 탈퇴나 한 걸로 과거가 다 씻겨 내려갔겠거니 또 특유의 자폐 망상에 잠겨 흐뭇해 하는 중입니다만 어디 그리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되겠습니까? 지은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야죠. 멍청한 주제에 입만 살아 떠드는 인간은 범죄도 어설프게 저지르다 신세를 망치기 일쑤입니다.

여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것대로 모순과 한계가 있으며, 과거 역시 "와 저런 세상에선 죽어도 못 살겠다" 싶은 지긋지긋한 질곡이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흙수저가 신분 상승하는 일은 없거나 극히 드물었으며, 혹 있다 해도 지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했다는 게 진실에 가깝습니다. 당대에 무지 고생하고 그 과실을 맛보는 쪽은 그저 그 자녀들일 뿐입니다. 이들 역시 그 부모가 고생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프거나 고생을 분담하니, 결국 세상에서 호강만 하고 마른 자리만 골라앉는 인생은 하나도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면 근본이 뻔한 한국 사회에서 집안 세탁 빼면 다 서민의 자식들이지 무슨 용가리 통뼈가 있겠나 이 말입니다. 손에 십억 백억을 쥔 사람은 그 십억 백억 만큼의 고뇌가 또 따르게 마련입니다. 반면 빈털털이 밑바닥은 시청료 오천원 삥땅하는 요령을 발견하고 무슨 천년 묵은 산삼이나 발견한 듯 희열에 벅차 개멀미를 하니 참으로 세상은 공평합니다. 가정은 파탄이 난 채 길거리를 헤매는 졸혼 늙은이한테 그 정도 낙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긍정의 힘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이렇게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큰 재산이나 횡재를 노리겠다는 게 아니라(그런 건 멀미하는 밑바닥 인생이 자기합리화나 거짓말로 제 초라한 인생을 어설프게 위장할 때나 필요하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주변의 소중한 지인들과 뜻 깊은 시간을 채워 나갈 때 필요합니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건데, 하긴 입만 벌리면 헛소리 거짓말인 범죄자 사기꾼들이 이 경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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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슬, 멈추지 않는 추진력의 비밀
닐 파텔.패트릭 블라스코비츠.조나스 코플러 지음, 유정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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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모 프로야구 팀에 "허슬O"라는 별명이 붙곤 했는데(물론 그 팬들로부터) 요즘은 그 팀이 그냥 강팀으로 위상이 아예 굳어서인지 구태여 그런 식으로 칭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허슬(HUSTLE)"을 우리가 칭찬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누군가는 아주 강하지는 않으나 정해진 여건에서 몸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그 "감투 정신"에 대한 경탄이 그 동기이겠습니다. 우리들도, 썩 유리한 여건은 아니나 한 번 정도는 내 몸, 내 정신을 오롯이 던져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저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근데 실천에 옮기기란 정말 쉽지 않은데, 첫째 그러다가 실패하면 내 자신의 에고가 모두 무너질 것 같고, 둘째 무엇보다 그러다가 너무 아플 것 같고(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엄두가 안 나서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극복한 사람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자계서 저자의 성공하는 자질은, 자신이 아니라(자신이면 물론 더 좋겠지만) 남이 이뤄 놓은 업적을 (어리석은) 우리 대중에게 멋진 포장과 확실한 설득력으로 캐스팅(전달)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건 일반인들이 알지도 못했고, 솔직히 저는 이 시간까지도 그게 과연 법칙은커녕 일말의 진실을 담고나 있을지 깊은 의문이 듭니다. 허나 말콤 글래드웰 덕분에 이건 이제 "진실, 법칙"의 위상으로 올라섰고, 이처럼이나 인식이 굳어버린 이상 설령 누가 1만 시간을 투자해서 일이 안 되었다고 해도 그건 그 자신의 잘못일 뿐 "법칙"을 탓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습니다. 아니 이처럼이나 법칙이 예외가 많으면 그게 과연 법칙이기나 할지 의문도 들지만, "법칙"의 가장 확실한 마력(권력)은 그런 의심과 회의를 한순간에 제압하고 든다는 데에 있기도 합니다.

혹시 마크 노플러나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까요? 사실 질문이 좀 잘못된게, 이들은 지난 특정 시기 특정 장르의 레전드이자 아이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세대에게는 기억이야 안 될리가 없지만, 단지 최근에 그 이름을 잠깐 잊었을 뿐이겠죠. 여튼 저자는 말합니다. "1만 시간을 투자하라! 그럼 당신도 (당신의 우상인) 그들처럼 될 수 있다!" 저자께서 아무래도 그 세대에 속하셨다 보니, 책 중에서 예를 들어도 이런 예를 드신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특정한 위인을 거명하며, "당신도 이분처럼..." 이란 충고, 권유, 인스파이어링을 접할 때는, 그 착석한 현장에서야 열띤 호응을 보내어도, 자리를 떠서는 대부분 심드렁해지기 일쑤입니다. 말이 맞고 공감이 되어서라기보다, 대개는 강연자의 지명도나 수입 정도에 비례한 반응입니다. 이런 사람한테 호응 안 보내면 자신이 뭔가 뒤떨어진 것 같아서죠. 우리들 대부분은 지독한 속물들이라서, 각성, 동의, 반감, 감명 같은 내면의 반응에조차 이처럼 자신을 속입니다. 한 술 더 떠 어떤 자는 책을 읽고도 특유의 허위의식을 못 버려서, 알맹이는 이해 못하고 껍데기만 남는다느니 뭐니 하는 식으로 저자의 취지를 왜곡하며 마치 자신은 알맹이를 이해나 했다는 양 가당찮은 허세를 떨기도 합니다. 너무 어려서 일화 위주의 책들만 읽어, 정작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수업 받을 시간이 없어 기초 원리도 이해 못한 채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나 봅니다. 책은 적당히 읽고 학교 공부에도 좀 성의를 보이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무튼 저자의 필치는 탁월합니다. 당신도 1만 시간만 투자하면 잡스나 게이츠나 스티븐 호킹(헉)처럼 될 수 있다!고 누가 말하면, 겉으로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도 속으로는 아마 한 톨의 납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만 시간 후 마크 노플러 변신"이라고 하면, 당장 낙원동에 가서 헌 기타 하나라도 돈 주고 사오고 싶은 느낌이 들 겁니다. 이는 첫째 내 내심이 진짜 원하던 꿈이기도 하고(자질이 안 따라주는 이가 꾸는 과학자의 꿈은 사실은 그의 성공, 경제적 풍요, 지명도 따위에 대한 선망이거나 세뇌, 강박의 산물일 뿐입니다), 둘째 뭔가 단순한 손가락 노동만으로 이뤄지는 투입, 수행은 머리를 쓰는 일보다 훨씬 낫겠지 하는 생각도 들어서입니다. 그러나 마크 노플러 같은 초일류 대가의 성취는, 볼륨 99.99999%까지는 누구나 모방 가능합니다. 마지막 0.00001%에서 기술자와 천재의 차이가 갈리는 거죠. 이 역시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처럼 하늘이 점지한 자질이라서 안타깝지만 극복이 안 됩니다.


자 그러나...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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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경제학 - 4만 년 인류 진화의 비밀
필립 E. 워스월드 지음, 이영래 옮김 / 동아엠앤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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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진화해왔습니다. 아니, 적어도 현상을 오래 유지하지 않고, 이 페이즈(phase)에서 저 페이즈로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전에 "경제이론은 계속 돌고도는 것"이란 말까지 했습니다.

이 책은 실무와 이론 경력을 두루 갖춘, 필립 E 에스월드의, 다분히 새로운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이른바 "코드 경제학"이란 것인데, "경제학"이라는 표제어 중 일부 때문에 혹시 어려운 내용 아닐지 지레 겁먹는 독자가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제학 관련 토픽은 이 책에서 아주 비중있게 실제로 다뤄지며, 심지어는 경제학사 입문자에게 이 책을 개념서로 권해 줘도 될 만큼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다른 용도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허나 내용은 인류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꼭 "경제, 경제학"에 독자의 시야를 한정하여 읽어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명사 전반"으로 영점을 조준한 후에야 저자의 취지를 곡해하지 않고 온전히 독해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저자가 논하는 "코드"는, 인류의 습성이랄까 통성 한 부분에 주목한 개념입니다. 즉 인간은 문화와 문명의 고안, 개척 이전이건 이후이건, 사물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코드를 만들어거 해석하며, 또 자신의 대응(혹은 응전, 토인비식의 개념) 과정에서도 코드 만들기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코드 만들기, 혹은 코드라는 렌즈를 통해 걸러대는 습성이, 특히 경제학이라는 거대한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4차 산업혁명의 여파 때문에 누가 일자리를 잃는다느니 뭐니 하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21세기에 고유한 현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 90여년 전 폴 더글라스라는 경제학자가 감지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던 그 아티클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먼 과거(적게 잡아도 중세)에는 수 년 혹은 십 수 년 동안 잘 훈련된, 계산에 능하고 장부 작성 기법에 정통한 전문가들만이 사업체에 속하여 우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더글라스의 시대에는 이미 "미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불과 수 주의 훈련 기간만을 거쳐 이 분야에 투입되곤 했던 현상이 (특히 이런, 눈 밝은 학자 같은 이들에 의해) 지적되었던 것입니다. 이 아티클이 발표되고 얼마 후에는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린(오타 아닙니다) 여성들이 계산 등 특정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게 그리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닌 게, 1980년대만 해도 학군 내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주산 잘 놓는 학생들이 차출되어 인문계 고교 등의 내신 성적 산출에 동원되기도 했었으니, 이들이 다 "컴퓨터"들이 아니고 뭐였겠습니까. (품삯이나 제대로 쳐 주기나 했을지 원)

이 책에서 인용되는 더글라스 교수는, 특히 경제학 전공자라면 초년생 시절부터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 게, 이른바 규모의 경제에서 체증이나 체감 말고 스케일 비례하여 수확이 균일하게 발생하는 이른바 콥-더글라스 생산함수를 공동 창안한 바로 그 사람이라서입니다. 고교에서 이과 출신들은, 지수함수의 경우 아무리 미분을 해도 "거의 그 원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현상을 잘 알 텐데, 바로 이 성질을 콥과 더글라스가 자신의 모형 구상에 그대로 써먹었습니다.

인간을 두고 흔히 "도구를 만드는 동물(homo faber)"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원시적일지라도 어떤 도구를 만들어 쓰기 전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자신의 능력을 훨씬 증가시킬 수 있는 어떤 도구를 만들어 온 그 오랜 패턴과 습성에,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4차 산업혁명(저자는 꼭 이 개념을 책 속에서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의 트렌드를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우리들 현대인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능력, 퍼스널하게 몸에 지닌 능력"만을 신봉할 뿐, 기계를 통한 능력 증폭, 대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는 거죠. 저자는 이런 완고한, 혹은 이해가 뒤떨어지는 이들을 위해 "더 예가 필요한가?"라며 다양한 예증을 들고 있습니다. 이래서 제가 이 책을 "경제사, 경제학사, 혹은 문화사 입문서"로 써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안 하고와는 별개로 말이죠.

책에서는 "코드 사용의 극한 도전" 끝에 발명해 낸 핵무기, 그에 연관한 프로젝트(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를 거론하며, 다시 윌리엄 제본스를 거론합니다. 윌리엄 제본스 역시 칼 멩거, 레옹 왈라스(레옹 발라) 등과 함께 지지난 세기 이른바 신고전 학파의 3대 개조 중 한 사람인데, 이 책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제본스를 자주 거론합니다. 이 이론은 참으로 다양히, 저자에 의해 이곳저곳에 적용되는데, 심지어 블록체인의 핵심 이론 파트인 "인증-검증 알고리즘"에까지 이 제본스의 이론을 적용합니다. 이미 네그로폰테 같은 인문학자에 의해 문명, 나아가 인간 본성까지 디지털 부호로 변형, 재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책에서 우리는 "너무도 코드를 좋아하다 코드 자체로 변화해 버릴지도 모르는, 마치 콧대 높은 사람이 되려다 아예 코 자체로 바뀌어 버린 코발료프 서기관"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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