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이미 와 있는 미래
롤랜드버거 지음, 김정희.조원영 옮김 / 다산3.0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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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의 <미래 충격> 등 여러 고전들은 지금도 널리 읽힙니다. 노환으로 작년에 이미 타계한 분의 책이, 요즘의 첨단 추세를 시원히 해명하거나 곧 다가올 미래를 예견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 당연히 아니죠. 그가 말한(말했던) "미래"는 벌써,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이거나, 아니면 이미 과거에 편입된 시간들일 겁니다. 그런데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예견이 이처럼이나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놀랄 만큼 많은 대목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의 예견은 과거에 속한 사항이 아닌가? 우리가 다시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이처럼 정확한 예언의 맥락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가고 없지만(대신 그의 따님이 있긴 하죠ㅋ), 이 신통한 책의 취지를 다시 탐구하면, 혹시 "후편"에 대한 내용 짐작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토플러뿐 아니라 영역을 달리하는 다른 모든 고전도 마찬가지죠. 뻔한 소릴 갖고 혼자만 깨우친 진리인 양 부풀려 떠드는 건 바보들이나 일삼는 짓입니다. 현명한 사람, 혹은 현명해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미래의 향방에 주시합니다.

이 책은 앨빈 토플러에 버금간다 할 덴마크의 저명한 미래학자 롤프 옌센이,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에 저술한,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입니다. 21년 전이 먼 예전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21년 전이라는 시간의 핸디캡을 딛고 이처럼이나 미래(즉 현재)를 정확히 내다보았다는 그 통찰력이 놀랍다는 뜻에서입니다. 만약 롤프 옌센이 누군지도 모르고, 21년 전의 저술임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면, 1) 담론이 시원하다. 다른 이론가의 체계를 엿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야에 의해 "이야기(이 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미래는 이야기의 세상이다, 이 정도로 한 줄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를 풀어놓고 있다. 2) 많은 대중 경제경영서, 혹은 자계서 등이 요즘 써 대는 주장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고품격의 철학이 전 내용을 관통한다 3) 디테일에는 다소 동의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미래의 대세가 무엇일지에 대해, 실감나는 정신 무장이랄까 시야 전환을 힘있게 촉구해 준다, 뭐 이 정도 반응들이 나오지 않을지 짐작합니다.

21년 전에 쓰여진 책치고는 놀랄 만큼, "4차 산업 혁명"이란 말만 본문 중에 등장하지 않을 뿐, 이 책은 아날로그식 감성이 사회 전반의 산업적 지향을 "다시" 지배할 미래를 생생히 그려냅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이른바 "제3의 물결"이라 일컬어지던, 정보화의 도도한 흐름이 세계를 휩쓸 시절이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가정마다 PC가 보급 안 된 곳도 있었을 시절이고, 우리가 지금 TV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접촉하는 그래픽 인터페이스(MS 윈도라든가)가 아직 결정판이랄 만한 게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정보화 사회가 채 성인기에 접어들기도 전이었는데, 옌센 박사는 "꿈과 스토리와 낭만이, 산업화 시대가 안긴 기계적 효율과 마음의 상처를 모두 덮어버릴 세상"을 논하고 있는 거죠. 물론 아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로 향해 모두가 발버둥친다는 것, 이제 그 지점이 대세가 되었다는 것, 이 포인트를 잘 공략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기업들이 혈안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합니다.

옌센 박사는 놀랍게도, 인공지능이 등장하여(이 말은 물론 이보다 훨씬 앞선 시점부터 등장했었지만, 옌센 박사님이 거론하는 범주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게다가 지금 구글(이 책이 쓰여질 무렵 이 회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과 애플, IBM 등이 컨셉화한 내용[상용화했든, 아니면 마케팅 구호에 아직 머물든 간에]과 거의 일치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합니다. 물론 한 번의 대세 전환기에 대량 실업이 발생한다는 건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바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사람들이 잃은 일자리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에게 "로봇세"를 물려야 한다는 등의 절박한 논의가 나오는 사정을 반영하여, 아직 그런 위기를 꿈도 꾸지 않았을 무렵의 독자들에게 미리 위안을 건네는(ㅎㅎ) 투로 책을 쓰는 분은 당시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이는 저자가, 매우 vivid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확신을 가진 채 책을 썼다는 방증이죠.

제3의 물결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정보화의 물결이 일상과 문명 전반에 가져다 줄 편의만 꿈꿨을 뿐, 실직이니 직업의 종언이니 하는 걸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래왔듯 이 대세가 적어도 반 세기는 지속되리라 보았죠). 박사님은 정보화사회가 일찍 종말을 맞고, 본인이 내다본 "드림 소사이어티"가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 장담합니다. 제가 눈여겨 본 건, 산업화 사회건 정보화 사회건 간에, 이런 변혁의 물결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는 식으로 저자께선 보고 계신 대목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정보화 사회는 그간 사람들이 정을 붙이고 존재의 곁에 가까이 두며 위안을 구했던 많은 추억을, 메마른 부호 덩어리로 대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 노동의 상당수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갈아치우기도 했지요(제가 한 달 전쯤에 리뷰를 쓴 <더 박스>라는 논픽션에 그 실상의 상징적 일부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산업혁명(1차, 2차)의 물결은 수공업 장인들의 설 자리를 대거 빼앗았습니다. 러다이트 운동 같은 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심각한 파문 중 하나였고요.

스토리를 만들고, 팔고, 산다! 이는 2년 전쯤 제가 이미 읽고 리뷰도 여기 남겼던 <르네상스 소사이어티>에도 나옵니다(이 책이 그 책보다 훨씬 앞서서 저술되었습니다만). 요즘은 아이들 수학 커리큘럼(국가에서 기획, 집행하는)에도 이 개념이 반영되었을 정도로, 파편적이고 냉정한 지식 덩어리는 미래(현재) 사회에서 퇴출되어 가는 게 현실입니다. 저자는 잃어버린 꿈과 낭만, 그리고 가슴을 가득 물들이는 "스토리"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소비하고 향유하는, 그래서 존재의 일부로 편입하고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궁극의 상품이자, 모두가 제작자로 나설 수 있는 산업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기업 역시, 고용주가 피용인과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았던 과거와 달리, 생산의 본체를 이루는 만인 경영의 시대가 열려, 종업원의 모임이 곧 기업이 되는, 계급 구조와 산업화 사회의 본격 해체를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소비하는 세상에, 독점적 대량 생산 설비가 무슨 소용이겠냐는 뜻입니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저자는 "마르크시즘은 이 점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도 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요즘 독자들은 무슨 소린가 싶을 겁니다. 물론 이 책은 소련 붕괴 한참 후에 저술되긴 했지만요.

학교 다닐 때 저는 어느 미국인 저자가 쓴 책을 부교재로 삼았던 수업 시간에, "예컨대 코카콜라 광고 같은 건 아무런 실용적 정보를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럼 소비자는 왜 이런 광고를 소비하며, 기업은 무슨 까닭으로 거액을 들여 집행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과제)을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신입생이었기에, "경제학 논리에만 파묻혔기에 이런 어리석은 의문이 드는가 보다"하고 넘겼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엉뚱하게도 "그래,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에 지나지 않아"라며, 교재의 취지에 맞게 세계관까지 새로 세팅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영문판으로 대략 십 년 전에 읽고서야, 학부생 시절의 그 당돌한 반발이 오히려 정당했다는 각성이 들더군요. 그 광고는 (방향이 건전하든 그렇지 않든, 꿈이든 환각이든 간에) 시청자에게 "스토리"를 팔고 있었던 게(심지어 지금도 그렇죠) 분명하고, 오히려 시대를 앞서갔던 셈입니다. 나만의 꿈을 정직하게 간직하고, 타인에게 희망과 긍정을 불어넣는 능력으로, 미래에는 서열(!)을 매기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드림 소사이어티야말로 그 이후의 단계가 없는, 사회 발전의 궁극적 귀착점"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곱씹을 만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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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데일 카네기 지음, 이문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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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고유의 전통에서 비롯했다 할 수 있는 자기계발 장르란, 알고 보면 파운딩 파더 벤자민 프랭클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연원이 매우 오래된 셈입니다. 그뿐이 아니라 메이플라워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토착인이 없는 곳을 가려 가며 농경지를 개간한 청교도들에게서도 초기 self -help의 사상적 맹아를 발견할 수 있으니, 어쩌면 미국 한정으로 본격 문학이나 철학보다도 더 깊은 뿌리를 지닌 게 이 자계 분야의 저술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자계서 중 문장이 좋은 작품은 여느 문학 못지 않고, 실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념과 생각이라면 그것이 꼭 철학 분야의 작품보다 열등하다고 누가 강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오래된 실용풍 사상가들의 주장에서 빼놓지 않고 공통으로 발견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개개인이 유용하고 착실한 습관을 들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습관을 들인다는 건 말은 쉽게 꺼낼 수 있어도, 이를 자신의 정신 깊숙한 곳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하고, 쉽사리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다지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습관이라 함은 말이나 생각이 아닌 "몸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습관을 통해 어떤 가치를 지향할 수 있음은 이미 수단이 아니라 목적의 경지에 다다른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참 재미있는 책입니다. 어렸을 땐 픽션과 판타지를 좋아하다가, 나이 들고 내 생활과 이상의 구체적 실현, 도모에 보다 주안을 두면서, 전기나 역사를 좋아하게 되는 게 보통의 추이입니다. 이 책은 철저히, 대체로 데일 카네기와 동시대에 산 인물들에 대한 사례 연구를 통해,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결론을 저자 특유의 감성적 어조와 함께 이끌어내는 게 최고의 장점입니다. 제가 이 2권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헤티 그린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슷한 캐릭터가 1980년대 미드 <엘러리 퀸>에도 나오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자계서라고 해서, 직장인만 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을 것 같은 초등 저학년이 읽어도, 재미있게 쓰여진 이 책의 다양한 일화들을 몰입해 가며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아이가 있으면, 많이 칭찬해 주시면서  건전한 독서 습관이 붙을 수 있도록 격려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들도 어려서 아동 문고의 포맷으로 읽은 책들 중에, 이런 위대한 위인의 일화들만 모아 놓은 책을 읽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일화 모음의 성인용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배우 라이오넬 배리모어 같은 이의 이야기는, 설사 영화 팬이라고 해도 이분이 다소 오래 전에 활동한 까닭에 낯설 수가 있고, 이분의 이름을 알 연배라면 아마 연예인한테 자기계발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부터에 벌써 동의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은, 비록 해당 배우의 이름이 낯설게 들릴 뿐, 얼마든지 유용한 바를 배워 낼 수 있습니다.

우드로 윌슨은 1912년, 태프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불화로 인해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 정도로 아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데일 카네기는 이분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참고로 삼아야 할 지 제법 구체적인 교훈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가 이분에 대해 마냥 긍정적인 시각만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여러 일화(T. 루스벨트는 데일 카네기가 매우 자주 인용하는 인물 사례 중 한 명이죠)에서, 공연한 분열과 대립이 엉뚱한 이에게 이익을 주었다는 취지로 적고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우드로 윌슨은 평화주의자로서 미국 역사에 큰 한 획을 그은 위인이고, 무엇보다 본격 학자, 교수 출신으로서 대단한 책벌레였음이 당연하기 때문에, 데일 카네기는 이 인물을 두고도 독자에게 가슴에 와 닿는 여러 방침을 추출하고 있습니다.

로렌스 티베트나 엔리코 카루소 같은 성악가, 가수들로부터 데일 카네기는 일관된 팩트, 유용한 지침을 강조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정확한 음과 기교를 구사하는, 재능 있는 후보자가 반드시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재능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왜 그 재주꾼들, 탤런트들이 다 입지를 다지고 큰 돈을 벌지 못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창작과 아이템을 소화, 소비해 줄 대중의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는, 상업적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데일 카네기 자신의 결론이기에 앞서, 현장의 무대 책임자나 감독, 매니저들이 일관되게 증언하는 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실제로 프랭크 시내트라나 투병 후의 새러 본, 혹은 밥 딜런 같은 사람도, 성량이 약하거나 심지어 가창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대중의 정서 한복판을 정확히 겨냥하여 그들의 가진 역량 모드를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플라치도 도밍고가 라이벌 파바로티에 비해 기량이 그리 뛰어났다고 할 수 없으나 언제나 그가 당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감정 표현과 호소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기본기를 소홀히한 채 그저 선동이나 감성 자극에만 나서는 것은 더 나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정직과 성실의 원칙에 위배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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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원가마인드
정명환 지음 / 신론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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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자산 가격에 포함시켜야 할 부분이며, 어디서부터가 당장 소멸되고 마는 좁은 의미의 "비용"인지, 그 구분은 언제나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금액은 내내 특정 자산에 담긴 채 남아 있어 그 자산이 일정 효용을 창출하는 데에 기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부분은 분명 특정 자산의 가치로 평가하여, 그 자산의 "원가"를 구성하는 것으로 장부 처리를 해야 마땅합니다.

제조원가에는, 예컨대 책상이라고 하면 원목 구입 대금 같은 게 재료의 가격으로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재료 자체는 아직 특정 자산이 아니므로, 그 자산의 계정에 적어 넣을 게 아니라 (그저) "재료계정"에 기입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러다가 제조 과정(공정)이 상당히 진척되면, 이는 더 이상 "재료 계정"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재공품 계정"에 들어갑니다. 여기까지는 딱히 회계적 사고 방식에 고유한 성격이 아니고, 평범한 상식인의 관점에서도 그러려니 납득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 일시 고용한 목수 등에게 지급한 임금, 품삯 등은, 그저 회사가 지출하는 소모성 인건비로 처리하면 그만일까요? 이런 지출은 지금 만들어지는 중인 "제품"에 이후 내내 체화, 통합되는, 어려운 말로 "자본화"하는 지출이라고 볼 수 있죠. 따라서 노무원가 중 실질적으로 이 제품에 투하되었다고 추적할 수 있는 부분은, 이를 해당 제품의 "직접 노무 원가"로 간주해도 됩니다. 여기서부터 관리회계가 슬슬 어려워지는 부분이겠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인적 직접노무원가 비중이 매우 큰 실정이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업무 자동화 바람이 불고 많은 기술 혁신이 이뤄짐에 따라, 이제는 기계가 이런 부분을 상당히 많이 대체합니다. 또, 기계는 한번 사다 놓고 돌리면 돌릴수록 1/n의 비율로 그 비용이 감소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 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비용이 절감될 수밖에 없습니다(효율 이슈는 차라리 둘째치고라도).

회계의 원칙 중 "중요성"이란 항목이 있죠. 비용은 비용인데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만큼 흘러갔는지 추적이 어렵거나, 일일이 계산하고 드는 비용이 더 클 경우 이런 건 구체적으로 분류, 배분하기보다 그저 특정 항목으로 묶어 따로 취급하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입니다. 세상에 무슨 "회계를 위한 회계" 같은 건 없기 때문이고, 회계, 기장 역시 그 어떤 특정 목표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어리석고 미망에 사로잡힌 늙고 추레한 인생이, 보물선 같은 미친 환각에 사로잡혀 메르스 환자 같은 헛소리를 떠들며 상식의 우선순위를 정반대로 섞는 추태를 부림이나 마찬가지로, 회계 역시 "지금 기록, 분석을 하는 최우선 순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경영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이런 데 서투르면, 빚쟁이한테 쫓겨 다니거나 고작 그런 자의 운전대를 잡고 시중이나 드는 비참한 신세를 평생 면하지 못하고, 끝없는 자기합리화나 퇴행적 근친상간에나 집착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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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법정에 서다 - 허승 판사의 공부가 되는 법과 재판 이야기
허승 지음 / 궁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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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관계가 불법이기 때문에, 원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법이 아니라 민법 746조에서 이런 청구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죠. 단, 수익자쪽에만 그 불법원인이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그에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고 법은 법 아닌가?" 같은 주장도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법은 특별히 이런 경우를 조문으로 따로 규율한 거죠. 이것 비슷한 게, 민법은 제2조에서 권리남용에 해당하는 경우 그 권리 행사를 들어주지 못하게 정해 놓고도 있습니다. 또 103조의 경우, 신의성실, 공서양속 등에 어긋날 경우 역시 권리 행사 자체를 부정한다고 명정합니다.

대법원1999. 6. 11판결99도275의 경우, A가 B더러 C에게 뇌물로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경우, B가 C에게 주지 않고 마음대로 써 버렸다고 해도, 이런 행위가 A에 대한 횡령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법은 불법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법언(法諺)에서 그 근거를 찾기도 하죠.

그런데 과연 무엇이 불법이고, 무엇이 불법이 아닌지는 "국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결코 아닙니다. 자신은 전혀 죄가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명예훼손을 저질렀을 경우, 고의가 없다고 항변하거나, 취지가 옳으니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항변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경우 개인의 내면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세상에 죄 짓고 벌 받고 감옥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지어야지. 저놈에게 해코지를 해야지." 이렇게 또렷한 의식으로 다짐을 해 가며 어떤 행동에 옮기거나 하는 경우는 백에 하나도 찾기 힘듭니다.

내심으로는 다 끊임없이 합리화를 하는데, 이게 합리화인 줄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하는 인간, 전혀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줄 모르는 인간, 아예 무슨 의적질이나 하는 줄 착각하는 인간 등 그 고의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모자라다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고, 머리 속에 견강부회 회로 말고는 들어선 게 없다는 이유로 다 무죄 방면을 해 줄 것 같으면, 세상에 죄인은 아마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스포츠 선수가 한 여성 직업인(유명인)에 대해, 평소에 습성이 어떻느니 행실이 어떻다느니 하며 메신저상으로 길게 전 여친에게 늘어 놓은 것이, 전파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검찰에서 바로 기소를 하려 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설령 사적인 공간에서 나눈 대화라고 해도, 얼마든지 명예훼손을 이룰 수 있고 한국의 사법 제도는 대개 이런 경우 엄격히 취급하는 편입니다. 저 선수의 경우와는 또 별개로, 보물선 따위의 허랑방탕한 꿈을 꾸는, 정신이 맑지 못하고 지려천박하며 사회경험도 현저히 부족한 자가, 하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 가치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미성숙한 인간은, 일종의 정신적 근친상간의 쾌감에 빠져 영원히 정도에 복귀할 수 없는 수준이라 봐야 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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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제인 오스틴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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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에 박희정 작가님의 일러스트가 풍부히 곁들여진, 오스카 와일드의 고전 <도리런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습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악당의 저주 받은 사연과, 대부님이 빚는 차갑고도 몽환적인 순정만화의 스타일, 필치가 매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이 콜라보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제인 오스틴의 명작과 다시 이뤄질 줄은 짐작 못 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이 대표작 말고도, 그녀의 다른 작품들 역시 끊임 없이 재해석되거나, 은막에 의해 옮겨지기나, 아니면 바로 이와 같이 외국에서의 색다른 트리뷰트를 받는 중인데,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프랑스나 독일의 문학이 여전히 더 활성화되었고, 전문가들로부터의 평판도 높았던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동시대의 다른 걸작들보다 유독 영국의, 그 중에서도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이처럼 끊임 없이 재조명 받는 걸까요? 일단 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현대가 여성의 사회적 역할, 내면에 대해 철저한 재구성과 분석이 이뤄지는 시기이며,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감성과 통찰이 여전히, 아니 의외로 도구로서 혹은 지향 설정으로서 큰 도움을 발휘하는 저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유의 다른 하나로는,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영어가, 이백 년 전과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널리 확산되어, 전 지구적 범위에서 영어를 준 모어로 수용하는 인구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도 됩니다. 예전에 저는 한창 일본 드라마가 국내에 저변을 넓힐 때, "능력자(덕후?)들이 자막을 잘도 만들지만, 원어로 바로 소화하여 들을 때의 그 미묘한 맛은 도저히 못 살리지." 같은 반응을 접한 적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인 오스틴이 구사하는 19세기 영어는, 말을 원어민들이 구사하는 날것 그대로 받아들일 때, 여태 못 느껴보던 감흥과 각성의 "맛"이 어떠한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아주 모범적인 "문학의 힘"을 증명합니다. 중국이 아직은 절대 미국(영어를 쓰는)을 못 따라가는 게, 중드(심지어 대드라고 해도)를 볼 때 그 쓰인 대사이건 배우의 감성 표현이건 도저히 이쪽을 넘볼 수준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갑자기 누가(그것도 여성이) 실종되기나 하는 그런 풍조에서, 사람의 깊은 감성과 내면에 어필하는 무슨 걸작 따위가 과연 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저는 <오만과 편견>의 청춘의 필독서인 줄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떤 고전 명작이든 청춘기에 읽으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오만과 편견>은 어떤 출판사의 어떤 컬렉션에서도 고전 명작 리스트에 올려져 있습니다(과거나 지금이나). 아마도 마치, 과거 나이 든 세대가 읽던 일본산 순정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처럼, 이상적이고 몽환적인 세팅이 기본으로 깔린 채, 다만 감성과 소통과 반응만이 날카롭게도 현실을 직시하는 이런 전개, 이렇게 구축된 허구의 세계가, 자칫하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못 다스려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기 쉬운 청춘을 바람직하게 순치시킬 수도 있다. 뭐 그런 뜻으로 선해하고는 싶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리뷰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사실 이런 작품은 아예 박희정 작가님이, 마치 타계한 고우영 화백 같은 <삼국연의>를 재창조했듯, 전면 만화 포맷으로 창작될 필요가 있다고생각합니다. 요즘 세대가 오로지 게임 세계의 언어와 논리로 소통하거나 (드물게도 희한한) 영감을 받는 것처럼, 웹툰 역시 새로운 시대의 예술 장르로 자리를 잡은 게 엄연한 현실이고 그걸 부정하려 발버둥쳐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시도를 보며, 이제 텍스트 온리의 시대는 확실히 저물어가지 않는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텍스트 온리의 시대에 너무 많은 것을 여태 투자해 온 입장"에서도, 회수 못 할 매몰비용은 그냥 포기해야 하지 않냐는 씁쓸한 각성이 들어서 하는 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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