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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이정명의 소설은 책에 관한 검색도 거치지 않고 읽을 정도로 신뢰감이 가는 소설들이었다. 역시나 '악의 추억'도 처음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책속에 푹 빠져 버렸다. 저자의 작품인 '천년 후에'는 3년간 매일밤 틈틈히 쓴 책이었고, '뿌리깊은 나무'는 10년의 구상과 집필을 거쳐서 쓴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뿌리깊은 나무'나 '바람의 화원'은 조선시대의 '훈민정음'이나 '신윤복''김홍도'가 소재가 되면서 소설에 연쇄살인이라는 장치가 첨가되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그래서 '뿌리깊은 나무'는 '다빈치코드'나 '장미의 이름'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런데 '악의 추억'은 기존의 소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상도시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미지의 두 도시 (침니랜드&뉴아일랜드)- 원래 침니랜드가 있었고, 그의 부속 섬들이 있었는데 방조제를 쌓아서 새로운 모습의 뉴아일랜드가 된다. 서로 1Km 해협사이에 놓여있지만 너무도 다른 곳, 침니랜드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 배고픈 사람, 미혼모들이 배회하는 거리, 범죄자가 날뛰는 곳인데 반해, 새로 들어선 뉴아일랜드는 하늘을 찌를듯한 마천루, 흰셔츠의 금융인들, 화려하고 번쩍이는 광고판과 쇼윈도의 거리, 기회의 땅이며 욕망의 신천지이다. 뉴아일랜드의 건설로 이 두도시는 안개가 자욱한 도시로 변했다.
'안개는 위험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위험할 뿐이다.'(p11)
안개가 잔뜩 낀 밤에 이루어지는 연쇄살인.... 첫번째 살인은 안개속의 케이블카안에서 아름다운 금발여인이 머리에 총을 맞고 발견된다. '웃는 얼굴'로.
안개는 범죄자에게는 케이블카의 운행 소음도 어느정도 삼켜줄 수 있고, 정적보다는 적당한 소음이나 비명을 묻어 주는 것이다.
두번째 살인사건은 정박된 요트의 난간에 이 도시의 부를 장악하고 있는 유니온 뱅크의 회장 손녀가 밧줄에 묶여서 죽어 있다. 역시 '웃는 얼굴'로.
세번째 살인사건 역시 방조제 기슭에서 여인이 발견된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정직당했던 경찰 매코이가 무장해제된 상태로 투입된다. 그리고 심리분석관이며 범죄심리학과 뇌과학을 공부한 라일라도 살인사건의 해결을 위해 같이 행동하게 된다. 권력과 부에 아부하면서 승진을 거듭했던 수사과장 제임스 헐리, 그리고 정년을 앞둔 그럭저럭 자리만 지키는 것 같은 카슨....
이야기의 전개과정에서 매코이가 7년전에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살인마 데니스코웬과의 총격전에서 데니스 코웬가 쏜 총알이 매코이의 머리속에 박혀서 긴 식물인간 생활을 거쳐 2년간의 재활치료끝에 살아있지만 극심한 두통과 아득한 현기증, 불면, 기면발작까지 일으킴을 알게 된다. 매코이는 이번의 연쇄살인 역시 7년전에 자신의 총에 사살된 데니스 코웬이 살아서 저지르는 살인마 행동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건 해결에 뛰어다닌다.
책표지 뒷면에 나오듯이 '하나의 기억, 두 개의 도시, 세 명의 희생자, 네 개의 퍼즐.....' 하나의 기억은 7년전의 연쇄살인 사건이 얽힌 기억- 매코이의 기억뿐이 아닌 심리분석관인 라일라에게도 숨겨진 살인에 관한 괴로운 기억이 있다. 두 개의 도시가 저자의 상상의 미지의 도시이라는 설정이 있기에 이 작품이 더 돋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어떤 도시였다면 어색했을 것같은 이야기이다. 세 명의 희생자들은 폭력이나 악의 희생자들이며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여자들이다.
네 개의 퍼즐은 살인사건 현장엔 꼭 신문의 퍼즐면이 펼쳐져 있고, 그 중의 일정한 단어는 다음의 살인 사건에 관한 힌트이다.
그런데,7년전의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의 살인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희생자 주변의 다른 죽음이 뒤따르게 되고 그와같은 첫폭발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충격은 주변으로 폭발하고 다시 그 폭발이 도시 전체로 번지게 되는 '다중 나선형 연쇄살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중의 한 사람이 희생되면 그에 따른 슬픔으로 정신병원에 가는 경우도, 이어서 자살을 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3명의 살인사건의 희생자들도 모두 폭력과 악의 희생자였고 소중한 것을 잃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 온 여자들이다. 그리고, 이어서 뒤따르는 자살 아니면 이에 따른 살인....
독자들은 첫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이책에 빠르게 빨려 들어가게 된다. 밝혀질 것 같은 순간에 다시 암흑속으로 들어가는 묘미를 맛보게 될 것이다.
과연, 라일라는 왜 매코이가 처리했었던 살인사건에 관심이 있는가?
매코이가 죽지 않았다고 하는 데니스 코웬은 과연 살아 있을까?
매코이가 데니스 코웬의 환상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매코이가 7년이란 긴 세월동안 마음에 가지고 살았던 '악의 추억'들은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해 주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마지막 남은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고, 놓치고 싶지 않은 고양이(?) 애들 레이드를 보다듬으면서 그렇게 쓸쓸하게 자기의 뇌속에 박힌 총알(?)과의 사투를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 총알이 가져다 준 엄청난 비극을 끌어 안은채로....
'남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단 한 순간'은 매코이에게는 너무도 큰 상처이자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라일러는 어땠을까? 그녀에게도 자신을 대신하여 희생당한 동생에 대한 '악의 추억'이 있었다. 죽은 자들의 고통은 끝났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가면서 감당해야 할 무겁고 깊은 상처들이 있었다.
"영혼이 맑은 사람들은 상처가 있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상처 말이야. 당신의 운은 죽음을 담고 있었어, 떨쳐낼 수 없는 절망을 말이야." 매코이는 그렇게 말하며 창백한 손목을 감싸주었다. "내 눈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고요?" 매코이는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고통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남아 있는 고통이야. 사건이 끝나고, 혼란이 가라앉고, 공포가 지나가고..... 죽은 자들의 고통이 끝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는 자들의 고통이 시작되지." (p251)
보통의 스릴러 소설들이 사건의 전개와 추적과정에 치우쳐 있는데 반하여 이 책은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의 고통을 심리적으로 잘 묘사하였다. '뇌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서 본 '매코이'와 '라일러'의 내적 갈등과 행동들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 어떤 추리소설과 비교해도 월등할 정도의 전개과정과 갈등 구조, 적절한 긴장감이 읽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과거는 안개처럼 느닷없이 다가왔고 안개 속 풍경처럼 흐릿했다. 과거를 잊는 것은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과거가 즐거웠다면 씁쓸한 즐거움일 것이고 고통스러웠다면 달콤한 고통일 것이다. (p282)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몇 장 안 남겨진 상태에서 너무도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독자들은 역시 '이정명'의 소설의 탄탄한 구성에 놀라워하면서 뇌과학에 대한 설명으로 '그럴까 아닐까'하던 의문점들이 모두 풀리게 된다. 결론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도 하나 가득 독자들의 마음에 담은 채로....
그런데, 독자들이 느끼는 것이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겨 주면서 모든 이야기는 끝난다.
'라일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개는 희미하고 모호하며 위험하기까지 했다. 라일라는 안개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크리스 매코이가 데니스 코헨이었을까? 대답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영원히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므로. 설사 무언가를 안다 해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마침내 많은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므로. (p335)

최신 뇌과학과 범죄심리 분석 이론, 첨단 과학 기법....
상처입은 영혼의 내면을 그린 매혹적인 심리 스릴러의 절정! (책 뒷표지글 중에서)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무엇이 '욕망'인지 '의심'인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증오와 사랑, 기쁨과 슬픔은 상반되 감정이지만 심리적인 자극이란 점에서 같아요, 극도로 증오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거나 기쁨이 극에 이르면 눈물을 흘리는 현상말이예요, 범죄자를 증오하고 뒤쫓으면서도 그들을 동정하는 형사의 심리도 마찬가지죠" "정반대의 감정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뇌가 감정을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죠" (p195)
책 속의 한부분인데 이 글이 의미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책장을 닫으면서 느끼게 된다. 이런 장르의 소설을 읽은 후에 오는 개운함보다는 읽은 후에 더 많은 생각이 남는 그런 여운을 지닌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정명'님의 소설을 즐겨 읽고 언제나 새로운 책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저자의 책들이 대개는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하여 '악의 추억'은 1권의 단행본이지만 이 책의 335페이지는 어떤 책보다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