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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자기 앞의 생>을 다시 읽으려고 하는데, 이전에 썼던 리뷰가 생각나서 여기에 다시 옮겨 놓았습니다.
- 2013년 11월 30일에 쓴 리뷰 -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책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다. <비밀>이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 책을 함께 읽는데,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모모가 이웃에 사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는 부분까지 읽어주고 그 다음은 자신이 떠난 후에 읽어 보라고 했다 고 한다. 드라마와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이 문장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비밀>이란 드라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읽기로 했다.
먼저, 작가인 '에밀 아자르'에 대해서 알아보자. 요즘 화제가 되는 '조앤 k 롤링'의 <쿠쿠스 쿨링>은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다. 영국 출판계와 언론들은 이 소설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 놓았다. 신인작가의 소설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기자의 추척으로 이 소설의 작가가 '조앤 K 롤링'이나는 것이 밝혀졌다. 가난한 이혼녀이자, 무명의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녀가 <해리 포터>로 인하여 일약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르면서 부와 명예를 갖게 되었지만, 새로운 작품은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선입견을 떠나서 독자들에게 제대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인정받은 작가들 중에는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책을 낸 작가들이 더러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로맹 가리'이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지만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소설가, 외교관, 영화감독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동일인에게는 한 번 밖에 주지 않는 프랑스 공쿠르상을 2번 수상한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건 바로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도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1956년에 <하늘의 뿌리>로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을 수상한 후에 <자기 앞의 생>으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또 공쿠르 상을 받았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4권의 소설을 펴냈는데, 그당시에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같은 인물일 것이라는 설이 떠돌고 언론의 추적을 받기도 했지만, 교묘하게 자신의 오촌 조카가 '에밀 아자르'인 것 처럼 활동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에밀 아자르'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로맹 가리'는 불행하게도 1980년 권총 자살을 하면서 자신의 유서에서 이런 사실들을 밝힌다. 그 내용은 그가 죽은 6개월 후에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란 글로 세상에 발표된다.

이 책에는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뒷 부분에 이 글이 함께 실려 있다.
그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 시작하는 것, 다시 사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이 내 존재에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고 글 속에 자신의 심경을 담아 놓았다.
'로맹 가리'에게 '에밀 아자르'는 새로운 탄생, 다시 시작함, 모든 기회를 다시 한 번 가져다 주는 그런 의미의 가명이었을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episode)가 있는 <자기 앞의 생>은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소설의 사회적 상황이나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소재들이 지금의 싯점에서 읽기에는 그리 가슴에 확 와닿지는 않는다. 그리고 비루한 인생들의 이야기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읽혀지기 보다는 소설 속의 글들이 거칠기도 하고, 반복되는 내용들이 있어서 현대작가의 소설들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꺼칠꺼칠하게 다가온다.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창녀. 성 전환자. 병든 자, 아내를 죽인 아버지, 정신병자, 유태인,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의 단어 만으로도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고 살아 남은 로자 아줌마와 그가 돌보는 아랍인 아이인 모하메드 (모모)의 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로자 아줌마는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프랑스 뒷골목에서 몸을 팔면서 살아가다가 늙은 뚱뚱이 아줌마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까지 올라가는 것 조차 힘겨운 그런 몸으로 창녀들의 아이를 돌봐준다. 불법 매춘을 하는 여자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기에 창녀들은 그들의 아이를 로자 아줌마가 돌봐 주는 댓가로 돈을 준다. 그녀의 집에는 7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는데, 아이들의 엄마가 연락을 끊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아이들은 누군가의 집에 입양이 되기도 한다.
모모는 자신의 나이도 잘 알지 못한다. 열 살인가 했지만, 어느날 나타난 아버지에 의해서 열네 살임을 알게 된다. 열네 살 모모는 어릴 적에는 로자 아줌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말썽도 부리고, 거짓말도 하고, 창녀들 주변을 맴돌기도 하는 아이이다. 자신의 엄마를 죽인 정신병자 아버지가 나타났을 때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그의 아들이 아닌 척 할 정도로 적응력이 강한 아이이기도 하다.
로자 아줌마가 병에 걸리자 모모는 아줌마를 돌봐 주어야 하는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된다. 로자 아줌마는 뇌질환으로 치매 현상까지 오고, 서서히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데, 의사는 로자 아줌마를 병원으로 옮기기를 권한다. 그러면 로자 아줌마는 병원으로, 모모는 빈민구제소로 가게 되는데....
모모는 생각한다. 안락사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로자 아줌마가 병원에서 오랜 세월을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이렇게 사회로 부터 멸시받는 소외계층에 대한 삶을 조명해 본다.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보다는 비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혈연관계도 아닌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을 준다. 처음에는 보호자의 입장이었던 로자 아줌마가 모모에게 보호 받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지만, 모모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로자 아줌마를 돌보는 일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상황도 좋지 않으나, 로자 아줌마와 모모에 기울이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해 준다.
모모는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하밀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이처럼 소외받는 사람들에게도 생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책 속에서 찾아야 한다.
모범적인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끈끈한 정은 우리 시대의 모자지간의 정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간섭하고 엄마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우리 시대의 모자의 관계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기에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직전에 펼쳐지는 장면은 어쩌면 매스컴을 통해서 보았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로자 아줌마가 강제 수용소에 잡혀 가던 때의 그 무서움과 같은 두려움이 있을 때마다 가곤 하던 지하층의 '유태인 피난처'. 그곳에서 발견된 두 사람.
하밀 할아버지가 들려준 "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없이는 살 수 없다." 는 그 말 한 마디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심지어 가족도 없는 그들에게도 생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이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도 생은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