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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ㅣ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평점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천사의 게임'으로 나를 매료시켰던 미스터리 소설 작가이다. 나에게는어쩌면 인생은 천사의 게임일지도 모른다는 단상이 떠올랐던 작품이었는데, 그 소설이 좋았던 것은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명쾌하고 확실한 결말이 아닌 독자들의 의식수준에 맡겨진 결말이 '천사의 게임'을 더 빛나게 했고, 읽은 후에도 한참동안 여운이 남았던 소설이었다. '천사의 게임'은 2008년에 발표되면서 스페인에서만 10개월만에 170만부가 팔려서 '사폰 신드롬'이 생겼던 작품이다. 그 이전의 작품으로는 2001년의 '바람과 그림자'가 101주동안 베스트셀러에 랭크되기도 했었다.

이런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처녀작이자 데뷔작이 바로 '9월의 빛'이다. '바람의 그림자, '천사의 게임'과 '9월의 빛'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9월의 빛'에 나오는 내용이 이후의 작품들에서 차용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독자들이 '카를로스'의 소설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독자들이 작품속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가 마치 한 편의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듯 할 정도로 생동감과 박진감, 현장감이 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상상력과 한 치앞도 예측할 수 없는 추리력도 그의 작품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9월의 빛'의 책장을 넘기자 마자 까만 바탕에 저자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싸인이 담겨있다. 저자의 한국 독자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진....

이야기는 이레네에게 보내는 백 번째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절절한 사연이 있기에 그는 이레네에게 이처럼 답장이 없는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1937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노르망디근처의 파란만에 위치한 숲속의 궁전과도 같은, 아니 커다란 성채와도 같은 크래븐 무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많은 부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르망 소벨의 아내와 두자녀인 이레네와 도리온,
그리고 저택의 주인인 라자루스, 마을 청년인 요트에 관심이 많고 바다를 좋아하는 이스마엘의 겪는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그림자와의 결투, 그림자에 얽힌 진실은 무엇이며, 그림자의 실체는.....
크래븐 무어 저택을 둘러싼 숲의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저택의 벽을 따라 숨는듯, 때론 흩어지는 듯한 그림자의 정체.

장난감 발명가 라자루스의 이 저택에는 기괴한 로봇 인형들이 떠돌아 다닌다. 시계 모양, 날아다니는 새, 로봇인형, 그리고 천사의 모습까지....
그런데, 장난감은 앙증스럽고 밝은 느낌이 음산하고 칙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마을에는 이상한 이야기들도 많이 있는데, 20 여년 전에 폭풍속에서 실종된 미스터리한 여인의 이야기와 함께 근처의 등대섬은 마법에 걸렸는지 폐쇄된 등대에서 불빛이 비치기도 한다. '9월의 빛'이....
그리고, 등대섬의 동굴에서 발견했다면서 이레네에게 전해주는 알타 마티스의 일기장, 그리고 저택에 오래전부터 앓아 누워 있다는 라자루스의 아내.
이런 설정들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초기작이어서 그런지 유령이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설정이고, 구성도 미스터리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복선들이 별로 깔려 있지 않은 그런 소설이다.
결말을 이끌어 나가는 방법도 퍼즐 맞추기이기는 하지만 복잡하고 많은 조각이 필요한 퍼즐이 아닌 단순하고 적은 조각이 필요한 퍼즐이어서 쉽게 맞추어진다.
이 책의 핵심은 '도플 갱어' - 어떠한 이유로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온 사람의 그림자일 것이다.
이 저택을 둘러싸고 호리병속의 기체처럼 슬며시 들어와서 형체를 만들기도 하고, 스스로 형체가 흩어지면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림자의 정체가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저택의 주인이자 장난감 발명가인 라자루스가 들려주는 파리의 빈민촌 고블랭가에 살던 7살 외톨이 친구 장 네빌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었다.
병약한 어머니의 학대로 장난감이란 장난감은 모두 불에 태워지고 홀로 놀던 불우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 병이 심했던 어머니는 어린 그를 어두운 지하실에 가두었는데, 그는 고블랭의 어린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꿈이었던 미스터리한 인물, 장난감 공장 사장 '다니엘 호프만'을 환상속에서 만난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줄테니 너의 마음을 달라고 하면서.... 환상속의 다니엘 호프만의 도움때문일까 그는 7일만에 힘들었던 감금생활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되고.....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도리안에게 들려준 베를린 시계상 헤르만 블뤼클린의 이야기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들어 준 댓가로 많은 금화를 받고 또한 자신의 영혼도 의뢰인에게 넘겨준다. 시계상은 또한 영혼까지도 함께 팔을 팔았기에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영혼을 팔았던 시계상이나 마음을 빼앗긴 라자루스는 결국엔 모든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라자루스의 장난감 발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공장도 잘 돌아가고 결혼을 하게 되어 크래븐 무어에 오게 되면서 나타나는 그림자. 이미 라자루스는 자신의 마음을 팔았기에, 자신의 그림자를 팔았기에 아무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라자루스의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림자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정말 라자루스의 마음을 빼앗아간 장난감 공장 사장인 '다니엘 호프만'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7살 어린 라자루스가 자신이 쓰레기통과 재단더미를 뒤져가면서 만들었던 장난감들, 특히 수호천사였던 가브리엘 천사 인형.
그것들은 어머니의 정신적 결함과 자신에 대한 증오로 잿더미속에서 불태워졌다. 그때 느꼈을 어린 아이의 아픈 상처, 그리고 그보다 더 극한 상황이었던 지하실에 일주일동안 감금되었을 때의 비참한 현실속에서 속삭이던 목소리와 사악한 그림자는 다니엘 호프만의 목소리와 그림자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어린 라자루스의 내면속 악이 싹트면서 내는 목소리이며, 그림자인 것이다.
매일 매일 몸소리쳐지는 현실속에서 어린 라자루스를 직접 지옥으로 이끄는 영혼의 사악한 그림자였고,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림자, 내 자신의 그림자, 내가 어디를 가든 쫓아 다니는 사악한 영혼, 내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지니고 있는 영혼. 바로 라자루스가 그 그림자인 것이다.
그가 만들었던 발명품인 로봇 인형들, 그중에서도 천사 인형은 악마와 같은 천사의 눈동자를 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라자루스의 마지막 탈출구는? 그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그렇다. 라자루스와 알마의 사랑은 그림자까지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아니, 어쩌면 라자루스만이 간직한 어떤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폭풍속에 물에 빠진 알마가 사랑했던 것이 과연 라자루스였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기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결말의 이야기는 그림자가, 그리고 라자루스가 시몬에게 한 이야기를 근거로 했기때문에....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도 독자들의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내가 그림자의 정체를 내면의 악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또 있다. 베를린에 사는 '다니엘 호프만'에 대한 정보와 마지막에 이레네가 이스마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그 근거이다.
다니엘 호프만은 빈민촌의 아이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다니엘 호프만과 그가 베를린에서 저질렀던 일들' 이것은 바로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다니엘 호프만'은 바로 우리 마음속의 악을 일컫는 것이다. 라자루스가 어린 시절에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듯이, 히틀러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것이 내면의 악을 불러 일으켰으니까....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읽었던 '9월의 빛'이 우리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소설의 내용보다 훨씬 큰 것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림자.....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소설의 특징은 미스터리장르와 모험소설, 그리고 거기에 로맨스가 화합이 되어서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된다. 거기에 영화를 방불케하는 섬세한 묘사는 긴장감과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9월의 빛'은 '안개의 왕자'와 '한 밤의 궁전'과 함께 3부작 연작소설이다. 곧이어서 두 작품이 출간된다고 하니 함께 읽어보면 확실하게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