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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한강 지음 / 비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어른을 위한 동화인 <눈물상자>를 읽고, 한강이란 작가가 좋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한 권, 한 권 읽어 나간다.
<희랍어 시간>, < 붉은꽃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는 작가의 사생활이 궁금해져서 산문집을 읽기로 했다.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산문집이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작가의 성격이나 생각그리고 작가가 걸어온 삶의 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도 하기에...
그래서 고른 책이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이다.

책을 읽으려고 했을 때에 페이지 수가 400 페이지를 넘어가면 은근 부담감이 생긴다.
그런데, 한강의 책들은 아주 얇다. 이 책 역시 200 페이지가 채 안된다.
"한강 산문집, 노래 CD 수록" 이란 책표지 귀퉁이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즐겨 듣는 CD려니 했더니, 한강 작사, 작곡, 보컬 이라고 하는 CD가 책 뒷표지 안쪽에 고이 들어 있다.

한 권의 산문집을 샀는데, 이게 무슨 횡재란 말인가 !!
그녀는 " 소설을 쓰기 전에 시를 썼고, 시는 원래 노래에서 나왔으니까." (p.6)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냥 마음만 소박하게 담자고....
이 책 속에는 흘러간 추억 속의 노래들이 많이 소개된다. 그 노래에 얽힌 오래되어서 빛바랜 추억담까지.
그녀는 글쓰기 뿐만아니라, 음악에도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꿈 속에서 선명한 피리 소리를 듣고, 꿈에서 깨어나 그 노래의 소절을 적을 수 있으니.
어느날은 가사없이 피아노와 첼로, 목관악기의 합주를 꿈 속에서 듣고 오선지에 그려 넣을 수 있으니.
" 아직도 새로운 노래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잠깐 지나가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걸까. 한두 마디 가사가 입술에 붙고, 다음의 선율과 가사가 한 몸으로 딸려 나오는 순간의 느낌은 그때마다 신비롭다. " (p. 32)
노래에 얽힌 사연도 다양하여, 가곡, 소리, 가요, 팝송 등의 이야기가 정겹게 펼쳐진다.
아버지의 노래인 <황성옛터>, 그리고 어머니의 노래인 <짝사랑>.
그 부분에서 나는 우리 아버지, 엄마의 추억 속의 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의 노래는 <찬송가>가 아니었을까?
그 이외의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기억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노래는 여러 곡이 떠오른다.
거나하게 술을 드시고 오신 날에 <메기의 추억>이나 <베사메무쵸>를 몇 소절 부르시던 것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음악에 대한 추억은 그 보다 더 많이 있다.
아버지의 학창시절에 모으고 모은 돈으로 사셨다는 음악가들의 명곡이 담긴 레코드판, 그리고 틈틈이 마련하신 가곡이나 가요 레코드판.
일요일 아침이면 온가족은 골목청소, 화단청소, 마당 청소에 동원되고, 아버지는 그 레코드판을 크게 틀어놓으셨다.
그때 들었던 곡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였다. 간혹 <동백 아가씨>나 <황성옛터>를 트실 때는 우리 딸들은 유치하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런 가슴 속에 꼭꼭 간직하고 있었던 오래된 추억이 이 책을 읽으니 솔솔 가슴 속에서 튀어나온다.
한강이 이 책에 소개하는 노래들과 함께 추억을 되새겨 보듯이....
Let it be, You needed me, 황성옛터, 보리수, 엄마야 누나야, 보리밭, 짝사랑,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 정태춘, 박은옥의 촛불 등.

아마도 젊은 세대들은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노래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노래들도 여러 곡이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유행했던 노래들이기에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추억이 깃든 노래들인 것이다.

오래된 노래가왜 좋을까?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겠지만, 한강은 이런 글로 답한다.
" 가끔 그렇게 옛날의 감각으로, 아주 오래 모니터에 앉아 이메일을 쓴다. 문자 메세지를 보낼 때도 이렇게 쓸까, 아니면 저렇게 쓸까, 고민하여 몇 분을 보내 버릴 때가 있다. 글쓰는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편지를 쓰던 습관 탓이지 싶다. 오래된 노래가 좋은 까닭은, 혹시 오래된 마음이 좋아서 일까?" (p. 119)

" 우리가 가장 나약할 때, 가장 지쳤을 때, 때로 억울하거나, 서럽거나 후회할 때, 가장 황폐할 때,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나무는 그 자리에 있다. 땅 속 캄캄한 곳에서부터 잔뿌리들로 물줄기를 끌어올려 잎사귀 끝까지 밀어 올리며. 그러니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때로 이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고요한 몸, 더욱 고요한 눈길로 이들을 떠올리기 위해서라도. 어느날 거울을 보았을 때, 내 그을린 얼굴 대신 한 그루 낮고 푸른 나무가 비칠 때까지." (p.142)
한강의 글이 다소곳한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조용히 울려 퍼지는 듯한 느낌을 주듯이, 한강이 직접 작사, 작곡하고 부른 10곡의 노래도 그녀를 닮아 있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작품들, 그 속에는 작가의 서정적인 문장들이 돋보이고, 그 문장들은 모여서 읽은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기듯, 그녀의 노래도 그렇게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