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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위풍당당>의 작가인 '성석제'는 너무도 낯익은 작가이지만, 작가의 책을 한 권의 책으로 읽은 것은 <왕을 찾아서/ 성석제 ㅣ 문학동네 ㅣ2011>가 처음이었다.
그 책을 손에 들고 작가소개를 보면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나는 작가의 글을 참 많이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책이 나에게는 한 권도 없었던 것이다.
이상한 생각에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많이 읽었던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뒤적여 보니, 그 책들 속에 성석제의 작품들이 또렷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세이나 여러 작가들의 글을 모아 놓은 책에서 그의 글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성석제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은 <위풍당당>이 두 번째 책이 되는 것이다.
위풍당당~~ 제목에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떠오르는 것은 많은 독자들도 그러 하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 속의 누구의 모습에서 위풍당당을 찾을 수 있을까?
작가가 '입담계의 아트', '재담계의 클래식' ( 책띠의 글 중에서) 이라 불리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니, '위풍당당'이란 단어 속에는 진한 해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각종 스포츠 시상식이나, 행사에서 자주 울려 퍼지는 귀에 익은 <위풍당당 행진곡>을 뒷 배경음악으로 깔고 보무당당하게 걸어 들어 왔다가 똥통에 빠지거나, 똥물을 뒤집어 쓰고 초죽음이 되어서 줄행랑을 치는 봉래산 자락의 조폭들의 모습을 그대로 비웃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
아니면, 세상의 아픔을 한 자락씩 가슴에 안고 사는 강마을 사람들이 조폭들의 싸움에 대항하여 보여준 그 위풍당당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해석은 독자 각자의 몫이지만...
혹자는 작가의 입담이 2000 년대에 들어서면서 도드라지지 못하다고도 하지만, <위풍당당>을 통해서 그의 입담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걸쭉한 입담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는다면, 그저 그런 어느 소읍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정도로 웃고 넘어 갈 수도 있겠지만, 소설 속에 담긴 의미들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요즘의 세태를 많이 반영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적 배경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금강산의 여름 이름인 봉래산. 이 소설의 작은 강마을의 얕은 산의 이름이다. 금강산도 아닌 것이 봉래산인 것이다.
소설 속의 마을은 10 여년 전에 사극 촬영장이었던 곳이었고, 사극이 끝난 후에도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관광객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내팽겨쳐진 듯한 그런 마을이다.
한때는 영화(榮華)도 누렸겠지만, 이제는 잊혀져 버린 곳이 된 마을.
그곳에 모여든 몇 명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아픔이 한가득 담겨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마을의 아버지격인 영필 노인은 만석꾼 집안의 적장자였지만, 조부와 부모가 죽게 되자 친인척들이 재산을 가로채 가고, 끝내는 정신병원과 감옥을 드나들었던 사람이다,
마을의 어머니격인 소희는 남편이 죽은 후에 그의 유언장에는 자신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 " 남편 인생의 조화에 지나지 않았다" (p. 54) 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 마을로 스며들어서 각종 야채와 꽃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밖의 여산, 이령도 나름대로의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이 소설의 사건 발단이 되는 인물인 새미와 준호.
그의 이야기는 더욱 마음을 울려준다.
20살 꽃다운 나이의 새미에게 일어났던 의붓 아버지의 상습적인 성폭행.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남동생 준호.
준호의 나이는 18살이지만, 정신연령은 한 자릿수이다. 그러나, 자신이 의붓 아버지로부터 누나를 지켜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누나를 지키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다.
이들 등장 인물들의 아픔을 통해서 우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사회는 왜? 이들을 인적도 없는, 그 흔한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이곳에 정착하게 만들었을까?
그들에게 이 강마을은 토마스 모어가 말하던 그런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도연명이 말하던 무릉도원일까?
그들은 그렇게 가족은 아니었으나, 가족보다 더 끈끈한 그 무엇으로 맺어지게 된다. 선택에 의해서 맺어진 가족. 서로 사연은 다르지만, 가슴에 안고 사는 아픔으로 맺어진 가족인 것이다.
"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자기 가족한테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이야. 상처를 줬을 수도 있지. 어쨌든 옛날 가족과는 다들 남남이 되었어. 그리고 여기 이 마을에 어찌 어찌 와서 다시 한식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우리는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다. 너희도 이제는 우리 식구가 되었어. " (p. 164)
혈연관계에서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로 인하여 사회로 부터 내쳐진 사람들이 강마을에 흘러 들어와서 서로가 가족처럼 살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던져주는 사회문제들이 이 소설 속에서 질문과 해답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이들의 보금자리에 나타난 전국구 조폭들.
위풍당당한 전국구 조폭들의 침입이 마을 사람들을 끈끈하게 단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한때는 드라마에서 조폭을 멋있게 포장하는 때도 있었지만, 조폭들도 이제는 '의리로 살고 죽는 시대는 갔다'고 한다. 20명 가량의 조폭들이 이 마을 근처에 들어오게 되면서 마을사람들과 조폭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미를 노리던 조폭을 보기 좋게 애꾸눈을 만들어 버리고 계곡밑으로 떨어 뜨려서 부상을 입힌 준호를 잡기 위한 조폭들의 반격.
조폭 무리들에게는 촌뜨기 마을 사람들이 우습겠지? 까짓 것? ...
과연 그럴까?
똥! 똥! 똥의 위력이 이렇게도 크다니....
무방비 상태의 조직원 3명을 유인하여 똥통에 빠뜨리기도 하고, 조폭 보스에게 똥물을 뒤집어 쓰게도 하고.
이 마을에서 자연 비료로 쓰이기 위해서 모아지던 똥들은 이들에게는 보물처럼 귀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고, 조폭들을 몰아 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조폭들에게는 똥은 그들이 이 마을을 접수할 수 없도록 하는 장애물이고, 그들의 모습을 추하게 만들어 버리는 더러운 똥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같은 물질에 대한 다른 반응. 그것 역시 오늘날 세태에서 가질 수 있는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생각'이 아닐까 한다.
가족관계, 권력, 재물, 정치상황...
그런 것들은 같은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렇게 다른 시각으로 다가오는 것일테니까...
나는 이렇게 <위풍당당>을 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것 역시 같은 책에 대한 독자마다의 또다른 시각이 될 것이다.
<위풍당당>은 오늘날, 붕괴되어 가는 가족관계 속에서 참다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에서는 참매, 물총새, 장어, 딱따구리 등의 습성을 통해서 생태계의 섭리를 이야기해 주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연을 닮은 인간들의 모습도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소제목들이 가곡이나 오페라, 팝송 등의 가사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기도 하다. 소제목의 출처는 책의 끝부분에 실려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책을 덮으려는 순간에 눈에 들어왔다. 음악에 조예가 깊다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을텐데, 음악에 관한 상식이 부족하기에 그저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넘길 수 밖에 없는 나의 무지함을 느끼게 된다.
<왕을 찾아서>에 이어서 성석제의 장편소설로는 두번째 읽게 된 <위풍당당>.
처음엔 등장인물들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책 속의 대사 부분들이 너무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소설에 몰입하는데 지장을 주기도 했지만,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책을 읽는 속도가 붙게 되었다.
책 표지 뒷글에는 "쉴새없이 터지는 유쾌한 웃음 끝에 달리는 눈물 한 방울"이란 표현으로 이 책을 소개하지만, 내 생각에는 유쾌하다기 보다는 통쾌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그리고 웃음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표현하고 싶다.
" 통쾌함 속에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 이라고 해두고 싶다.
내 책장 속에서 읽혀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칼과 황홀/ 성석제 ㅣ 문학동네 ㅣ2011>도 빠른 시일내에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