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석파란 - 제1회 황금펜 영상문학상 금상 수상작 ㅣ 황금펜 클럽 Goldpen Club Novel
류서재 지음 / 청어람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석파란>은 이하응의 호를 딴 묵란이니,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은 이 소설이 이하응의 일대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기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철종이 승하하기 직전의 이야기에서 에서 승하한 후에 이하응의 차남이 왕위에 즉위한 직후까지의 이야기이다.
바로 <석파란>에서 이야기하는 '바위'의 의미인 역경이란 시기는 1861에서 1863년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하응의 일대기라기 보다는 19세기 말의 격동의 시기 중의 한 시점에 놓인 이하응을 비롯한 그 시점의 군상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미 작가는 서문을 통해서,
" 이 소설에는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없고 다만 군상이 있을 뿐이므로 그림으로 치면 인물화가 아니라 풍속화이다. 이하응은 주인공이 아니라 격동기에 서 있는 한 인물일 뿐이다. " (서문 중에서) 라고 밝히고 있다.
'인물화가 아닌 풍속화'란 글에 주의를 기울이고 소설을 읽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석파란>은 역사소설로 보기에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가상의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미 독자들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통해서 이하응의 이야기를 많이 접해 왔다. 특히 드라마 <명성황후>를 통해서 이하응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다.
왕족이지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상가집 개 행세를 하며 파락호 생활을 했다는 것, 언젠가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야심을 품고 살았다는 것, 명성황후와의 정치적 대결,, 청나라에 유폐되는 굴욕적인 이야기등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동안 많은 책들은 이하응의 정치적 행보만을 를 다루었기에 그런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식으로 읽기에는 <석파란>은 좀 다른 색깔의 소설이다.
(사진출처 : Daum 검색 : 석란도 대련)
이 소설은 이하응의 예술적 경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석파란이란 묵란을 통해서 당시의 정세, 이하응의 야심 등을 시대적 배경과 함께 담아 내는 것이다. 그것의 밑그림으로는 진주 민란 등의 농민반란, 서원의 횡포, 권력층의 비행, 매관매직과 같은 당시의 상황들을 이하응 자신이 직접 체험하게 하고 있다.
그저 파락호 노릇이나 하면서, 앞날을 기약하는 그런 이하응이 아닌, 국내 정세에 큰 귀를 열고, 듣고, 체험하고, 생각하는 이하응의 모습이 그려진다.
구미산을 찾아가서 동학의 최제우를 만나 그의 사상을 듣기도 하고, 청의 태평천국의 천왕이라는 홍수전의 여자 중의 하나와 교류를 갖기도 하고, 부인인 여흥 민씨와 유모인 박마르타를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는 것이다.
동학, 서학, 성리학에 대한 이하응의 생각이 이 책 속에는 깊이 담겨 있다.
조선의 500 년 근간이 되어 왔던 성리학이 과연 백성들을 위한 이념이었을까 하는 부정적 시각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사상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최제우가 동양의 유불선 사상과 서학의 평등사상을 합쳐서 만든 동학, 그가 추구하는 후천 개벽의 나라.
청의 홍수전이 중국의 대동사상에 서학의 평등사상을 접목한 태평천국.
그리고, 서양의 예수가 차별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했다는 그 세상.
이하응은 이런 세상들에 관심을 가진다.
그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미래에 백성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던 세상은 백성을 위한 나라였고, 그들은 백성을 위한 왕이었으니까.
" 묵란은 붓을 든 사람의 생각이 옵니다. 난초는 붓을 든사람의 생각따라 피어납니다 " (p. 210)
난을 치는 이하응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섬세한 이야기 속에 동학, 서학, 성리학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석파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김병학과 뒷방 늙은이로 쓸쓸히 늙어가는 조대비의 이야기일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는 움켜쥐고 천 년, 만 년을 누리고자 할 것이고, 권력을 잡지 못한 자는 설움과 핍박 속에서 권력의 잡기 위한 술수를 쓰게 되는 것이 그들이 가지는 야욕이 아닐까.
" 왕족으로 태어나 숨죽이며 살아온 이력은 가슴 속에 날 선 칼처럼 숨어 있었다. 웬만한 멸시는 멸시도 아니었고, 웬만한 배신은 배신도 아니었다. 세상의 멸시와 배신을 수없이 겪은 자의 가슴은 갑옷처럼 두꺼웠다. " (p.p. 210~211)
왕족이지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하응을 눈여겨 보고, 이용하고자 하는 자는 조대비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왕좌를 잃은 치욕보다 외로움이 깊었지만 외로움보다 치욕이 깊어야 했다. 치욕의 감정에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혼자 겪는 외로움에는 사람이 없었다. " (p. 214)
이들의 만남은 석파란이 매개체가 되지만, 그것은 권력을 향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하응에게 묵란은 그림 이상의 것이었고, 유일한 탈출구였다. 묵란은 세상의 편견과 구속을 깨는 호방한 호흡과 같은 것이었고, 묵란이 없으면 마치 죽은 목숨처럼 방안에서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묵란은 나를 표현하는 거야 " (p. 159)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소설로 읽기에는 작가적 상상력이 많이 들어가 있는 소설이다.
읽는 도중에 고개를 갸웃거려야 할 정도의 상황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하응이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를 만나러 경북 구미산에 가는 이야기.
김병학의 집에서의 김옥균과 민자영의 만남.
이하응의 부인에 의해서 양녀로 함께 살고 있는 민자영(훗날 명성황후)이야기 등은 가상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 같아서, 우려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하응이 동학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생각도 소설 속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석파란>의 작가인 류서재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이 소설은 제 1회 황금펜 영상 문학상 수상작품인데, 수상작답게 필력이 대단하다.
배경묘사라든가,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그리는 글들이 섬세하다.
특히, 난을 치는 모습을 묘사하거나, 묵란을 설명하는 글들은 이 분야에 깊은 지식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필체가 난처럼 세련되면서도 단아하다. 그리고 구성도 치밀하다.
읽기보다는 서평을 쓰기가 더 부담스러운데, 그것은 이 소설이 작가가 서문에 썼듯이 이하응이 주인공이 아니고, 군상이 있을 뿐이라는 것, 서양화로 치자면 인물화가 아닌, 풍경화라는 말이 답해주는 것이다.
또한, 약 2 년이라는 짧은 시간의 설정으로, 예술인으로 난을 치는 이하응의 모습 속에서 그의 생각들을 읽어 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의 새로운 시각에서 본 이하응의 모습이 이하응이 권력을 잡기까지의 그의 모습이고, 초기에 정치에 임하던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의 그의 정치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으니....
그의 인생은 바위틈에 피어난 청초한 난으로 남을 수 만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