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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독이는 한국의 명수필 : 살며 생각하며 느끼며
피천득 외 지음, 손광성 엮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수필은 청자의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소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다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 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 ( 피천득의 '수필' 중에서, p. 276)
얼마만에 읽어 보는 피천득의 '수필'이란 글인가 !
학창시절 가장 흥미있었던 과목이 국어였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두 눈 반짝 반짝거리면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기에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시, 수필은 지금도 구절 구절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하게 느껴진다.
'피천득'의 '수필'도 몇 몇 문장은 그래도 머리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그 의미는 그리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앞의 문장을 읽다보니, '수필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든다. 수필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읽으면 그것이 바로 수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수필은 쉬운 글인듯 보이지만, 그렇게 단순한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수필 속에 담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장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수필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이기에 읽고 나며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 수필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필가와 작가 등이 수필을 남겼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싶은 수필은 70 여편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60여 편의 골라서 바로 이 책 <한국의 명수필>에 담아 놓았다.
나도향의 그믐달, 이양하의 신록예찬, 나무, 정비석의 산정무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김진섭의 백설부, 피천득의 인녕, 수필 등은 교과서에 실렸었거나 현재도 실려 있는 작품들이기에 우리들과는 친숙한 수필들이다.
이렇게 친숙한 수필을 읽게 되니, 옛 생각이 난다. 내가 이 수필들을 처음 읽었던 학창시절의 교실 속에 앉아 있는 그런 기분이 든다.
정비석의 '산정무한'은 금강산 기행문인데, 이 수필을 배울 때에 마의태자 이야기가 애처롭게 느껴졌었는데, 지금 읽어도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다가온다.
"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 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 (龍馬石) -마의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 철책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창명히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화석)된 태자의 애기 (愛驥) 용마(龍馬)의 고영(高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는 듯, 소복한 백화(白樺)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 정비석의 '산정무한' 중에서 , p. 103)

정진권의 '비닐우산'에는 지금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파란 비닐우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볼품 없는 비닐우산, 바람이 불면 금방 살이 부러져 나갈 듯한 비닐우산, 그 우산을 단돈 100원에 사던 그 시절의 파란 비닐우산 이야기이다. 갑자기 비가 내리면 파란 비닐우산 장수들이 길로 나와서 우산을 판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돈 100원이 없어서 볼품없는 파란 비닐우산을 사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계용묵은 '구두'에서 그 시절에 구두를 오래 신기 위해서 구두의 뒤축에 징을 박던 때의 이야기를 한다. '또그락 또그락' 말발굽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구두를 신고 창경궁 곁담을 걸어가다가 어떤 소녀를 뒤따라 가는 꼴이 되었는데, 구두 뒤축의 징소리를 듣고 자신을 따라 오는 줄 알고, 도망치던 소녀와의 신경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책 속에 담긴 수필들은 한국 수필을 대표하는 작품들이기에 몇 십 년전에 쓰여진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주옥같은 수필들이니 두고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이 책을 꺼내서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1993년에 초판이 간행되었고, 이번에 다섯 번째 개정판이 나왔다. 오래전부터 이 책을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도 상당수가 있을 것이다.
아껴서 아껴서 몇 편씩 음미하면서 읽고 싶은 그런 수필들이다.
마지막으로 이양하의 '나무'의 몇 구절을 적어 본다.
"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날 한반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 (p.p. 217~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