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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는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감각을 가진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읽은 후에 마음 속에 남는 것들이 많다.
그는 1995년에 등단했지만, 내가 김영하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2010년에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김영하 ㅣ랜덤하우스코리아 ㅣ2009 >를 통해서 였다.
소설가를 소설이 아닌 여행 에세이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나온 시칠리아에서의 내면적 성찰이 잘 나타나 있었다.
그 책을 덮는 순간, 김영하의 글에 매료되어서 그의 소설과 에세이 등을 골라서 읽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김영하의 작품 중에 나는 여행 에세이인 <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ㅣ 아트북스 ㅣ 2007>를 가장 좋아한다.
이 책은 매우 특이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한 권의 책 속에 하이델베르크를 배경으로 하여 에세이와 사진 그리고 소설이 함께 담겨 있다. 그러니 에세이이기도 하고, 사진집이기도 하고, 여행서이기도 하고, 소설책이기고 한 책이다. 이런 형식을 갖춘 책으로 '서진'의 <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서진 ㅣ푸른숲 ㅣ 2010>이 있기도 하지만, <여행자 - 하이델베르크>를 읽을 때만 해도 그런 형식의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이다.
어쨌든 김영하가 쓴 책들은 그 어떤 책을 읽게 되든지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의 형식도 특이한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책 속에는 어떤 묵직한 주제의식이 담겨져 있었다.
김영하는 그의 대표작인 <빛의 제국>을 출간한 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 해설 중에서, p. 153)
내가 김영하의 대표작인 <빛의 제국>을 아직 읽지 않았기에 그 의미를 알지는 못하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은 후의 내 느낌이 바로 그랬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빽빽한 문장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결하면서도 압축된 문장들이 때론 듬성듬성 한 페이지 속에 담겨 있기도 한 149 페이지에 달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책속의 내용만을 따라 잡아 읽는다면, 아주 쉽게 읽히는 그런 소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노인이 한때 연쇄 살인을 하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김병수는 16살 때에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다.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살인의 시작이다. 그후에는 어떤 뚜렷한 원한 관계가 있어서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동기라고 할 수도 없는 이유때문에 30년동안 지속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이미 공소시효가 다 지난 사건들이 되었다.
"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매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 카메라이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p. 35)
그런 연쇄 살인범인 그가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일 매일 기억이 존재할 때에는 메모를 해둔다. 그건 과거의 살인범인 자신이 현재의 살인범이라고 추정되는 자로부터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다.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살인범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피로 범벅이 되는 잔인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으나, 이 이야기는 유머와 위트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어쨌든 나는 그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 (p. 38)
그러나 이런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뒤엎어 버리는 것은 소설의 끝부분에서 나타나는 대반전이다.
'역시 김영하 작가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담겨 있었던 계획된 치밀한 구성이 이 소설을 돋보이게 한다.
왜 작가가 '오이디프스'의 이야기를 끄집어 냈던가를, 그리고 김병수가 즐겨 읽던 반야심경의 구절들이 왜 담겨 있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 그러므로 공(空)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도 없고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영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 (p. 148 - 반야심경의 구절)
우리 주변의 허상들에 매달리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은 망상이었던가....
김영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과 악에 대한 통찰을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영하는 '작가의 말'을 통해 자신이 습작을 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묵묵히 그를 격려해 주었던 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아버지는 현재 투병중이고, 작가는 '꽤 괜찮은 작가'가 되는 날을 아버지에게 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적어 놓았다. 이미 독자인 나에게는 '꽤 괜찮은 작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말없는 격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