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애를 죽이기까지
사쿠라이 치히메 지음, 김지혜 옮김 / 하빌리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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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기, 만약에.”

내 말에 하나코가 천천히 반응했다. 나를 보는 듯 보지 않는 듯한 크고 검은 눈동자.

“만약 딱 한 사람을 죽여도 된다면 누구를 죽일 거야?”

“뭐야, 그게.”

하나코는 웃었다. 어이가 없다며 내 말을 일축해 버릴 듯한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p.129


하나코의 최애는 아이돌 그룹 '백 투 더 나우'의 멤버 후지카와 이사미이다. 백 나우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건 잘생기고 노래도 춤도 뛰어난 데다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다이가지만, 하나코는 두 번째로 인기가 많은 이사미를 더 좋아한다. 다이가처럼 천재형이 아니라 노력해서 자신을 갈고닦는 유형의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건축가인 아빠와 인테리어 코디네이터인 엄마는 항상 바빠서 하나코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낯을 가리는 소극적인 성격으로 왕따는 아니지만 딱히 친구도 없어 학교에서도 외톨이이다. 그런 하나코에게 아사미는 유일한 기쁨이자 삶의 낙이며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처럼 입학 이래 누구와도 말을 섞찌 않던 남자애 쓰키미야가 하나코에게 말을 건다. 아사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라고 말이다. 같은 멤버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두 사람은 금새 가까운 사이가 된다. 컴퓨터를 잘하는 쓰키미야는 SNS 게시물을 구석구석까지 확인해 이사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아내고, 연예인들이 많이 산다고 소문난 초고층 맨션을 찾아가 멀리서 이사미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도 한다. 총기 마니아인 쓰키미야는 엄한 아버지로부터 늘 잔소리를 듣고, 어머니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집에서도 별채에서 따로 지내는데, 하나코를 초대해 자신의 취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하나코는 쓰키미야가 있어서 참 든든하다고, 이사미가 최애인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쓰키미야는 이사미의 팬이 아니다. 그저 하나코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이사미를 좋아하는 척 접근한 것이었다. 




다섯 사람은 그대로 첫 곡을 선보였다. 음악에 맞춰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였고 힘찬 노랫소리가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무대 위에는 다채로운 색상의 조명이 빛났고 원색의 유성들이 흩어졌다. 옆에 앉은 하나코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확인하니 심각한 표정으로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틀림없이 후지카와 이사미를 향해 있을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후지카와 이사미를 죽이겠다고.                  p.294


한편 이사미는 겉으로 보여지는 자신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이가에게 끊임없이 라이벌 의식을 느꼈고, 멤버 중에 특별히 가까운 히로히토와의 관계를 BL 망상으로 좋아하는 팬들과 그걸 가지고 자꾸 놀려대는 멤버들을 향한 분노가 쌓이고 있었다. 유명세와 맞바꿔 자기 생각을 억누르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고, 팬들에게 자신은 만들어진 이미지인 '동양풍 꽃미남'이라는 살아 있는 인형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러한 마음들이 쌓여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 감정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팬들이 있는 자리에서 다이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식으로 문제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팬들의 비난 어린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그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사미는 완전히 나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아이돌이라 믿어 왔던 최애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의 몰락과 함께 하나코의 세계도 산산조각나는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다. '줄곧 이사미에게 속았으니까. 아름답지 않은 이사미 따위 필요 없어. 죽어 버려.'라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때 떠오른 것은 “만약 딱 한 사람을 죽여도 된다면, 누굴 죽이고 싶어?”라는 쓰키미야의 질문이었다. 게다가 쓰키미야는 이사미가 사라져야 하나코가 혼자가 된다고,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위험한 충동은 무대 위의 이사미를 향하는데, 과연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그 목적을 이뤄낼 수 있을까. 잘 나가는 스타가 한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현실에서도 빈번히 일어난다. 문제는 그 몰락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최애를 위해 쏟았던 시간과 감정, 마음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를 사랑했던 팬들 역시 함께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그러한 감정이 조금 더 깊고, 심각했기에 끔찍한 비극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가끔 도를 넘은 사생팬들의 문제에 대해 보도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생팬'이란 연예인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추적해 침해하는 극성팬을 뜻하는 말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사생팬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그 처절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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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에 진심인 편 - 히라가나는 모르지만
도쿄잇초메(최제이) 지음 / 길벗이지톡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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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래 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식권 자판기를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관광객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 아니라 그런지 그림은 하나도 없고, 온통 일본어로 표기된 메뉴들만 빽빽하게 있었다. 번역기 어플을 써봐도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는 메뉴들이 많아 대충 감으로 몇몇 메뉴를 시켜서 먹으며 허둥댔던 기억이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계획된 장소, 그러니까 관광객들이 필수로 가는 유명한 식당도 들르지만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되서 현지의 로컬 식당에 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한글 메뉴판은 커녕 영어로도 표기가 안되어 있는 곳이라면 정말 난감하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일본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지 않더라도, 로컬 식당 메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나 같은 경험을 해본 이들을 위한 완벽한 책이 나왔다. 제목부터 '일본 여행에 진심'인 편이라니... 어쩐지 무작정 신뢰가 가는 책이다. 




이 책은 인스타와 유튜브에서 여행 정보와 꿀팁, 일본어를 친근하고 유쾌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도쿄잇초메의 첫 책이다. 저자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일본어 첫걸음을 떼고 약 2년 만에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합격, 이후 4년간 도쿄에 살면서 쌓은 정보들을 30만 팔로워에게 나눠주고 있다. 일본 여행을 더 재밌게 즐기고 싶은 독자들의 가려움을 정확히 긁어줄 이 책은 초보자가 현실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본어부터 여행할 때 알아두면 유용한 일본 문화, 그리고 각종 쓸모 있는 여행 꿀팁들이 담겨 있다. 


딱딱한 학습서가 아니라 여행 에세이처럼 사진과 글을 구성해 술술 잘 읽히고, 현지의 베테랑 가이드처럼 꼭 필요한 내용들만 쏙쏙 정리해두어 현지에서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책이다. 각장이 끝날 때마다 귀여운 캐릭터의 만화 구성으로 틈새 퀴즈가 있어 내용도 확인하고, 재미도 더해준다. 




일본어 회화 책을 꽤 봐왔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은 가장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것 같다. 일본어 인사부터 시작해 음식점 주문, 라멘집, 스시집, 카페, 이자카야, 편의점, 쇼핑, 호텔, 교통수단 등 각 장소와 상황에 필요한 일본어들이 구성되어 있는데, 정말 히라가나도 모르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문제없이 주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저자가 현지에서 직접 부딪히며 거르고 거른 현지 밀착형 일본어만 보은데다, 실제로 이어질 대화의 흐름대로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도록 정리가 되어 있어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다. 


웨이팅 할 때 써먹는 초간단 일본어, 식당 메뉴판 공략법, 스시집에서 현지인이 쓰는 은어, 계산대 앞에서 무조건 써먹는 표현 모음, 화장실 생존 일본어, 일본 여행에서 해볼 64가지까지 알찬 정보들이 가득 담겨 있는 책이다. 각각의 장은 모두 QR 코드를 통해 원어민 음성을 들어볼 수 있는데, 일본어 발음뿐만 아니라 우리말 해석까지 같이 녹음이 되어 있어 듣기만 해도 표현을 익히기에 아주 좋을 것 같다. 




레트로 감성의 일본 킷사텐을 좋아해서 여행을 가면 꼭 들르는 편인데, 이 책에 코메다 커피도 소개가 되어 있어 매우 반가웠다. 오전 11시까지 모닝 세트를 판매하는데, 가성비가 매우 훌륭한 곳이라 여행 중에 들르기 너무 좋다. 일본 편의점도 무조건 방문하는데, 새로운 제품 앞에 신발매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는 사실과 영수증은 절대 바로 버리지 말라는 팁이 유용했다. 한국의 1+1 행사처럼 일본에도 공짜로 하나 더 주는 이벤트가 있는데, 편의점 영수증 맨 아래에 무료라는 한자와 함께 바코드와 사용 가능 날짜가 있는지 꼭 확인해야겠다. 


그밖에도 부록으로 알아두면 쓸모 있는 11가지 한자, 여행할 때 꼭 써먹는 22가지 단어, 급할 때 바로 펼쳐 보는 33가지 문장 리스트가 잘 정리되어 있으니 활용해 보자. 도쿄잇초메의 입담과 글빨이 유쾌하고 재미있게 일본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현지에서 백퍼 통하는 일본어 책을 찾고 있다면, 꼭 필요한 내용만 군더더기없이 담은 책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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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지친 밤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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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스다 미리의 책들을 좋아한다. 몽글몽글 귀여운 캐릭터 일러스트도 사랑스럽고, 소소한 일상 속 이야기들이 가볍게 펼쳐지지만 그 속에 삶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는 것도 참 좋다. 30대 여성들의 현실과 삶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수짱' 시리즈에 이어 이번 신작은 50대의 일상과 중년의 삶에 대해 차분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수짱'시리즈가 탄생한 지 16년이 흘렀으니, 작가도,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만큼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위스키 하이볼을 마시는 것이 생각보다 되게 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젊은 여자가 이러면 사연 있어 보이지만, 중년 여성에겐 그냥 현실감 넘치는 풍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이볼을 마시며 왠지 중년에 지친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어디선가 내 마음 속 생각과 똑같은 말이 들려온다. 중년에 지쳤다며 대화 중인 두 여성은 마침 나이도 같은 50이다. 만담 콘테스트를 준비하겠다는 두 여성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바로 뒤 자리에서 우연찮게 엿듣게 된 '나'는 그 뒤로 종종 심야에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게 된다. 혹시 오늘도 그들이 와 있으려나 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렇게 50살 중년의 웃픈 일상 이야기가 펼쳐진다. 




'중년'이라 하면 청년과 노년 사이의 단계로 보통 40대에서 60대 초반을 의미하는 나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우두둑하면서 푹 자도 찌뿌둥해지는 나이, 티셔츠가 이제 안 어울리는 것 같고, 뭐든 새롭게 잘 어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나이, 화장도 예전처럼 마음에 들지 않고, 앉았다 일어날 때 영차가 저절로 나오는 그런 나이다. 마스다 미리는 바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 사소하지만 분명한 변화들을 그려낸다. 어쩐지 서글퍼지는 순간도 마스다 미리의 작품 속에는 툭툭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적당한 무심함과 무겁지 않은 진지함이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늙음'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 몸의 시스템은 40대 이후로 확연하게 달라진다고 하던데, 주위를 둘러보면 40대가 되면서 확실히 체력이며, 건강이 달라진 걸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변화는 50대, 60대가 되어가면서 점점 더 가속화 될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에너지 넘치게 삶을 대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더 이런 경쾌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것이 우리에게 마스다 미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 '나이 드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이 계속 태어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세계가 꾸준히 사라진다. 자연의 이치이지만 사실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년이란, 흔히들 느끼는 것과 달리,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그렇게 늦은 때는 아니다. 나이 듦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 온전히 나를 위해 시간을 들여 고민한 필요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다. 


중년에는 지쳤고, 나이 먹는 건 재미없지만, 그럼에도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다정한 작품이었다. 매번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읽고 나면 특유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기분이랄까.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니까,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마음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책을 덮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소소한 즐거움을 챙기며 살자고 다짐해본다. 찬란한 날들은 이미 다 지나가버린 것 같지만, 나이를 먹어서야 깨닫게 되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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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식물학 - 이름은 알지만 사연은 몰랐던 105가지 꽃과 풀의 속사정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김수경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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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장풀의 꽃은 하루밖에 피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오전 중에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 시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식물은 예로부터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것의 상징으로 여겨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잎을 모아 물감으로 쓰기도 했고, 잎 속의 즙을 약재로 쓰기도 했습니다. 하루치 분량의 꽃을 이어가며 피워내는 식물. 하나하나는 덧없이 지지만 그것들이 모여 여름 내내 푸른빛을 잃지 않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모여 이루는 아름다움, 그것이 닭의장풀입니다.               p.51


일본의 대표적인 식물학자이자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신작이다. 쉽고, 재미있게 식물학에 대한 풍성한 지식들을 풀어내는 책을 많이 냈는데,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되어 있다. 그 책들 중에 <전략가, 잡초>와 <잡초들의 전략>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대부분 쓸모없는 식물이라고 알고 있던 잡초에 대해 '특수한 환경에 적응하고 특수한 진화를 이룬 특수한 식물'이라는 해석을 들려 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식물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꽤 읽어 봤지만, 잡초를 주인공으로 하는 잡초학이라는 학문은 꽤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자가 워낙 유쾌하고 위트있고 가볍게 글을 풀어내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번에 나온 <방구석 식물학>은 우리가 익히 일상에서 보고, 알고 있던 꽃과 풀들의 속사정에 대해서 들려주는 책이다. 각각의 식물마다 아름다운 세밀화가 수록되어 있어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힐링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렵고 낯선 식물들이 아니라 계절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풀꽃들의 이야기라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작은 들꽃 하나에도, 꽃집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 하나에도 시대와 지역을 넘어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이야기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기도 했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풀 한포기, 꽃 한송이도 결코 함부로 대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새삼 다시 들었고 말이다. 




데이지는 오래전부터 꽃점에 쓰여온 식물입니다. 꽃잎을 한 장씩 떼어내며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를 번갈아 읊조립니다. 마지막 꽃잎에서 나오는 답이 곧 사랑의 결론. 또한 눈을 감은 채 데이지를 꺾었을 때 손에 든 꽃의 송이 수가 그녀가 결혼할 때까지 남은 연수를 나타낸다고도 합니다. 손에 쥔 꽃 한 송이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얹고 꽃잎 하나하나를 떼어내며 답을 기다리던 사람들. 데이지는 그 오랜 설렘을 조용히 간직해온 꽃입니다.               p.189


봄이 되면 어디선가 펼쳐지는 샛노란 꽃밭을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으레 그것을 유채꽃이라 부르지만 사실 도감에는 '유채꽃'이라는 식물이 따로 없다고 한다. 유채는 배추속 식물에 피는 노란 꽃을 두루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 들판을 가득 채운 노란 꽃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유채, 서양배추, 양배추, 콜라비, 갓 등 저마다 잎을 활짝 펼친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모두 넓은 의미의 유채꽃이라고 한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네잎클로버는 길가나 자주 밟히는 곳에서 잘 발견되는데, 사실 네잎클로버는 잘 밟히는 곳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잘 밟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토끼풀은 성장점이 땅 가까이에 있어서 밝혀 상처를 입으면 네잎클로버가 나오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운이 밟히고 또 밟히면서 자라나는 것이라니 어쩐지 다음에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게 되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잡초가 엉겅퀴라는 사실, 히로시마 원폭 페허에서 살아남아 가장 먼저 꽃을 피운 식물이 협죽도라는 것, 수선화가 자기 자신에게 반해 꽃이 된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의 이름이라는 사실, 달리아에게 변덕이라는 꽃말이 붙은 이유가 나폴레옹 황제 황후의 시녀 때문이었다는 것 등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많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식물의 겉모습만 알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민들레, 쑥, 엉겅퀴, 강아지풀, 수선화, 작약, 수국, 채송화, 해바라기, 코스모스, 은행나무 등 누구나 알고 있는 식물들의 뒤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으니 말이다. 신화와 전설, 세계사와 과학을 넘나들며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겼던 책이다. 각각의 식물마다 두 페이지가 할애되어 있고, 예쁜 그림이 눈을 즐겁게 해주며, 내용 설명도 그리 길지 않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기분이 내킬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좋고, 사전처럼 필요한 꽃과 식물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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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교유서가 시집 6
추성은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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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이/무너져서//

한 개의 수박이 되었다//

격자 창문을 타고/내려오는 넝쿨 줄기는//

나를 허영으로부터/지켜주거나 훼손하거나 하지//

             - '수박 게임' 중에서, p.37


지난해부터 시작된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가 꾸준히 출간되는 덕분에 요즘 시집을 자주 읽게 되었다. 내지에 표지 색과 같은 컬러의 그라데이션을 줘서 밑줄 긋고, 메모하면서 읽기 딱 좋다.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은 추성은 시인의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이다.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추성은 시인의 첫 시집인데, 일상적 소재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 시 45편을 묶었다.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는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를 시작으로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기혁 시인의 <소설책>에 이어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까지 꾸준히 새로운 시들을 선보여왔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내지에 그라데이션을 줘서 더 아름다운 시집인데, 심플한 이미지의 표지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내지의 은은한 색감이 정말 예쁘다. 시집을 읽기 전에 만나는 '시인의 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통과하고 있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투명한 유리창과도 같은 느낌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함께 포함된 작은 엽서에도 시인의 말이 인쇄되어 있어 좋았다. 




나인 것과, 나였던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를 계단처럼 오르내리며 횡단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나. 진흙더미처럼 덩어리째로 쌓아올린 근육이 딱딱해지다가 서서히 흘러내립니다. 새하얀 뼈가 들숨날숨에 따라 움직이고. 나의 호흡은, 텅잉 그대로 살얼음의 모양을 내며 흩어집니다. 규칙적이지만 아주 희박합니다.               - '녹는점' 중에서, p.48


나란히 있는 창 너머로 두 개의 평온한 장면이 번갈아 보인다. 연인이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은 조류를 발골하는 동안, 그의 뒤편으로는 날아오른 새가 열매를 쪼아먹는다. '인간의 마음과 인간이 아닌 것이 프레임 단위로 쪼개진 채 상영되고 있'다는 이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눈앞에 보였다. 깨끗하게 닦인 창이 안팎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도심을 나는 새들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는 비극이다. 그래서 '연인과 토막난 조류와 그를 구성하는 모든 풍경은 마치 설탕공예처럼 얇고 아름답지'만, 유리창 밖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의 생명력과는 괴리가 있다. 투명한 유리창이 참새의 목을 부러트리는데, 그 안쪽에선 평화롭게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삶이 있다. 그러니 잘 차려진 비밀은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의 심장은 인간의 심장을 닮았고, 티라노사우루스의 천적은 홍학이며, 서울숲에는 도마뱀 인간이 있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은 무너져서 한 개의 수박이 되었고, 이름을 부르면 복도 끝에서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미래, 혹은 나를 앞서간 과거였다. 일상 속 쉬운 단어로 빚어냈지만, 독특한 상상력이 더해져 비밀스럽게 반짝이는 시집이었다. 접시 위에 잘 차려진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시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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