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교유서가 시집 6
추성은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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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이/무너져서//

한 개의 수박이 되었다//

격자 창문을 타고/내려오는 넝쿨 줄기는//

나를 허영으로부터/지켜주거나 훼손하거나 하지//

             - '수박 게임' 중에서, p.37


지난해부터 시작된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가 꾸준히 출간되는 덕분에 요즘 시집을 자주 읽게 되었다. 내지에 표지 색과 같은 컬러의 그라데이션을 줘서 밑줄 긋고, 메모하면서 읽기 딱 좋다.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은 추성은 시인의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이다.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추성은 시인의 첫 시집인데, 일상적 소재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 시 45편을 묶었다.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는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를 시작으로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기혁 시인의 <소설책>에 이어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까지 꾸준히 새로운 시들을 선보여왔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내지에 그라데이션을 줘서 더 아름다운 시집인데, 심플한 이미지의 표지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내지의 은은한 색감이 정말 예쁘다. 시집을 읽기 전에 만나는 '시인의 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통과하고 있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투명한 유리창과도 같은 느낌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함께 포함된 작은 엽서에도 시인의 말이 인쇄되어 있어 좋았다. 




나인 것과, 나였던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를 계단처럼 오르내리며 횡단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나. 진흙더미처럼 덩어리째로 쌓아올린 근육이 딱딱해지다가 서서히 흘러내립니다. 새하얀 뼈가 들숨날숨에 따라 움직이고. 나의 호흡은, 텅잉 그대로 살얼음의 모양을 내며 흩어집니다. 규칙적이지만 아주 희박합니다.               - '녹는점' 중에서, p.48


나란히 있는 창 너머로 두 개의 평온한 장면이 번갈아 보인다. 연인이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은 조류를 발골하는 동안, 그의 뒤편으로는 날아오른 새가 열매를 쪼아먹는다. '인간의 마음과 인간이 아닌 것이 프레임 단위로 쪼개진 채 상영되고 있'다는 이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눈앞에 보였다. 깨끗하게 닦인 창이 안팎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도심을 나는 새들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는 비극이다. 그래서 '연인과 토막난 조류와 그를 구성하는 모든 풍경은 마치 설탕공예처럼 얇고 아름답지'만, 유리창 밖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의 생명력과는 괴리가 있다. 투명한 유리창이 참새의 목을 부러트리는데, 그 안쪽에선 평화롭게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삶이 있다. 그러니 잘 차려진 비밀은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의 심장은 인간의 심장을 닮았고, 티라노사우루스의 천적은 홍학이며, 서울숲에는 도마뱀 인간이 있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은 무너져서 한 개의 수박이 되었고, 이름을 부르면 복도 끝에서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미래, 혹은 나를 앞서간 과거였다. 일상 속 쉬운 단어로 빚어냈지만, 독특한 상상력이 더해져 비밀스럽게 반짝이는 시집이었다. 접시 위에 잘 차려진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시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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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 없는 육체
김곡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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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난 세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단한 육체는 빛을 반사하므로 겉은 드러내고 속은 감춘다. 반면 이번 세기, 보이는 게 전부다. 꿀의 매끄러움이 빛마저 매끄럽게 투과시켜 감출 내부를 없앤다. 이 모든 것을 특정 상품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는 기술들이 도처에 널렸다. 특히 인터넷은 모든 사적인 내밀함을 파괴한다. 거기선 먹고 자고 노는 것까지 모두 노출의 대상이 된다. 육체에 대해선 더하다.               p.52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는 거라고, 외모 보다는 성격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야말로 삶의 중요한 덕목이자 재능이기도 하다는 걸 말이다. 예쁜 사람이 더 많은 애정과 배려를 받고, 예쁜 외모가 면접이나 승진에서도 유리하며, 같은 상황이라도 양보를 받는 건 대체로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덕분에 우리는 정상체중의 사람도 체중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외모강박시대, 외모불안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에서 육체란 무엇이며, 몸이라는 영역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관종의 시대>, <과잉존재>에서 현대사회의 나르시시즘을 해부했고, <가족계획>, <보이스> 등의 작품을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한 저자는 몸의 변천과 사회 변화는 결코 무관치 않다고 말한다. 다이어트 중독, 건강 염려증, 딥페이크 범죄,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가스라이팅 등 이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현상들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의 동근원적인 현상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육체를 살고 있기 때문에, 다이어트가 성행할수록 스토킹이 유행하고, 딥페이크가 흥행할수록 가스라이팅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어조가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과거와는 다른 육체를 살고 있다는 그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밖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기 몸을 사랑하자고 외치지만, 정작 진정한 몸이란 누구인지를 망각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뷰티는 대중예술이다. 단, 그것은 나르시시즘의 예술이다. 이제 몸을 가진 누구나가 근육과 지방을 깎아내는 예술가가 되고, 몸 각자는 걸어다니는 예술작품이 되어 가지만 거기엔 온통 나, 나, 나뿐이다. 심지어 몸이 나다. 나르시시즘의 미학이 불러온 결과는 끔찍하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저항성을 없앤다. 몸은 저항 없는 재료가 되어 개인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사유물이 되어간다.               p.158


성형과 바디프로필이 요행하는 시대에는 더 많이, 더 빨리 변형되는 육체만이 살아남는다. 저자는 감옥과 고문기구 대신 러닝머신과 수술대에 스스로 올라가 지난 세기 몸밖에서 치르던 전쟁을 이제는 몸속에서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건강의 개념이 바뀌었다. 현대 미용의학과 다이어트법, 의상과 화장품 등의 목적은 몸을 조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헬스장과 수술대 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범죄의 양상도 달라졌다. 지난 세기의 범죄가 조직폭력과 무장강도 등 견고한 조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세기를 지배하는 스토킹, 가스라이팅, 묻지마 테러, SNS 성착취 같은 범죄들은 편집증적, 점착적, 자기애적이다. 


지난 세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단한 육체는 빛을 반사하므로 겉은 드러내고 속은 감춘다. 반면 이번 세기, 보이는 게 전부다. 꿀의 매끄러움이 빛마저 매끄럽게 투과시켜 감출 내부를 없앤다. 인터넷은 모든 사적인 내밀함을 파괴하고, 좋아요의 경쟁이 일어나며, 신체 다양성은 멸종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다. 한편에선 다이어트와 포토샵이 유행하며 모두가 아름다운 몸의 소유자가 되지만, 다른 한편에선 각종 중독증과 함께 데이트 폭력, 리모컨 놀이, 딥페이크 범죄와 같은 병리현상들이 발현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몸에 대한 감각이 변하면 사회에 대한 감각도 변한다고. 몸이 퇴행하면 그만큼 사회도 퇴행한다고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10편의 이야기는 헬스중독, 스토킹, 가스라이팅, 딥페이크, 뇌과학 등을 과거와 현재를 비교·분석하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문제의 원인과 배경을 ‘육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아 단숨에 읽히지만, 굉장히 강렬한 사유를 들려줘 잔상이 길게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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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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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말한다. 진심으로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게 어떤 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피로, 극심한 공포로 인한 피로를 느끼며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야말로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p.60


마사의 마흔 번째 생일 파티가 끝나고 이틀 뒤, 남편 패트릭이 떠났다. 집중치료실 전문의인 패트릭은 일평생 중간지점을 벗어나지 않는 성격이었고, 잡지에 음식 칼럼을 기고하는 마사는 뭐든 극단적인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는데, 마사의 첫 번째 결혼이 실패 후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역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모두가 패트릭을 보며 저런 남자와 결혼하다니 정말 행운이라고 말했지만, 마사는 모두가 착하다고 하는 사람과 결혼했을 때 뒤따르는 문제점에 대해서 남들에게 말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마사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말이다. 




마사는 열일곱 때 처음으로 발작적 공포와 무기력감을 느꼈고, 병원을 찾았다. 이후 꾸준히 약을 먹고 마음을 다잡아도 공포와 우울, 불안, 자살 충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직장을 얻고 일을 시작해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해도, 그 결혼이 파국이 나고 다른 사람과 다시 시작해도 마사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까탈스럽고 유난스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나날이 계속 된다. 겉으로 보면 마사가 좋은 아내 또는 좀더 훌륭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혐오에 빠진 마사가 분노와 절망의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채 날을 세우고 그를 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의 삶 대부분,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본래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써왔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삶에서 기쁨을 누리고, 사랑받고, 건강한 관계를 쌓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모든 건 망가지고 엉망진창이고 또 완전히 괜찮아. 그런 게 인생이야. 그저 비율만 달라질 뿐이지. 그 비율도 대개는 제멋대로 바뀌고. 이거구나, 앞으로 영원히 이렇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바뀌는 거야." 

그런 게 인생이었고, 이후 삼 년 동안 줄곧 그랬다.... 죽고 싶어, 제발, 숨을 못 쉬겠어, 점심을 잘못 먹었나봐, 사랑해,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 였고 우리 둘 다 영원히 그렇게 살 줄 알았다.             p.307~308


이 작품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멕 메이슨의 신작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와 〈더 타임스〉에서 기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뉴요커〉 〈보그〉 〈엘르〉 등 유력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온 멕 메이슨은 두 번째 소설인 이 작품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함과 동시에 2022년 브리티시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작품은 평생 우울과 자살 충동을 겪으며 살아온 주인공 마사가 스스로 무너뜨린 삶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실 우울증은 폐렴이나 위장병처럼 평범한 질환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정신적 질병은 육체적 질병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탓도 있고, 아직은 사회적 시선이 그 두 가지를 평등하게 대하지는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당사자도, 그의 가족들도 '우울증이 진짜 병이 아니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도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게 어떤 건지 상상 조차 할 수 없다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단의 심리 상태까지 이끌고 가는 심각한 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이제 조금은 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면서 후회하고, 자책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우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에 지쳐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습관적으로 자신을 다그치느라 피곤해지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해지고, 어떤 일에도 여유가 없어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대부분 극복하고, 다시 미래를 향해 일어서게 마련이다. 이런 감정에 몇 년 동안 빠져 있어야 한다면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우울증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극중 마사처럼 삶이 너무 버겁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결국 좌절과 체념 끝에 삶을 방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사는 용기를 낸다. 절망의 끝에서 다시 기쁨을 되찾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극중 마사에게 패트릭이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건 망가지고 엉망진창이고 또 완전히 괜찮아. 그런 게 인생이야."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고, 또 내일을 향해 달려갈 힘을 내보는 것이다. 우울증을 다룬 심리학서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그런 책들보다 소설 한 편이 더욱 강렬하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섬세하게 감정을 헤아려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내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작품은 그 어려운 걸 기어코 해낸다. 현대인들이 누구나 겪는 '우울'에 대해 이토록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생생하고, 빈틈없이,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그려내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자, 이 처연하고 찬란한 고백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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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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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지겹고 무서운 당신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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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인간까지 속임수의 진화 - 속임수는 어떻게 생존 전략이 되었는가
리싱 선 지음, 김아림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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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생물의 세계에서 속임수와 부정행위가 이토록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화는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는 윤리적인 선호, 명예로운 규범, 가치 체계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실용적으로 진행되는 비도덕적이고 무자비한 과정이다. 진화는 친사회적인 협력과 반사회적인 술수를 구분 짓지 않는다. 생존과 번식률을 높이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그 결과 인간의 사회적 감수성으로 보면 뻔뻔하고 비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생물의 세계에서는 속임수와 부정행위가 번성하고 있다.               P.33~34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널리 알리기 위해 부정직한 전략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자화자찬, 남의 공로를 빼앗기,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기, 사회적 자격, 경력 등을 허위로 기재하거나, 뇌물을 주는 부정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질적인 대가를 위해 남을 속이고, 사기를 치기도 한다. 신종 보이스 피싱과 전자 금융사기, 다단계 사기, 애정을 미끼로 한 결혼 사기 등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다양한 속임수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보도된다. 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쉽게 속는 걸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남을 속이는 걸까. 속임수 기법과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는 그 동안 꽤 많이 논의되어 왔다. 그런데, 자연도 인간처럼 속임수를 쓴다면 어떨까.


식물은 가짜 신호를 번쩍이며 유혹하고, 새들은 노련한 포커 플레이어처럼 허세를 부리며, 물고기들은 수중에서 연극을 벌인다. 심지어 미생물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음모를 꾸민다. 생명체들이 속임수를 쓰는 이유는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살아남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먹이를 얻고, 포식자를 피하며, 짝을 찾고, 자손을 남기려 애쓰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현명한 전략은 힘이나 속도가 아니라, 때로는 교묘한 술수다. 속임수를 하나의 창의적인 생존 전략으로 바라보는 순간, 자연 세계는 거대한 사기극을 펼치는 거대한 무대가 된다. 이 책은 생물학, 인지과학, 진화심리학을 넘나들며 생명체가 감각과 인지의 빈틈을 파고들며 진화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센트럴워싱턴대학교 생물과학부 석좌 연구교수 리싱 선은 이 책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들어 준다. 




속임수와 속임수 대응 전략 사이의 끊임없는 군비 경쟁은 동물과 인간 모두에서 사회적 지능과 예술 같은 복잡한 속성이 출현하도록 촉진한다. 속임수라는 촉매가 없다면, 우리 세상에는 생물학적, 문화적 다채로움이 사라져 상당히 지루해질 것이다. 여전히 속임수에 대해 착잡한 감정이 든다면,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 특정 유형의 속임수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 판단하려면 이 주제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인류라는 종에서 나타나는 속임수와 자기기만에 대해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p.206


이 책을 읽는 내내 생물학적 세계 어디에나 사기꾼과 부정행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원숭이들은 교미하려고 상대에게 몰래 다가가며, 주머니쥐는 포식자에게 쫓기면 '죽은 척'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새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경쟁자들을 겁주어 쫓아내려고 거짓 경보음을 내며, 변장의 귀재인 양서류와 파충류는 자신의 피부색을 주변 색과 비슷하게 바꿔 몸을 숨긴다. 이러한 생물들의 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을 정도로, 동물 세계에는 속임수와 기만 행동이 많았다. 뇌나 뉴런이 없는 식물들 또한 그러한 전략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난초는 수분 매개자들이 선호하는 먹이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데, 이는 짝짓기 기회를 노리는 수컷 수분 매개자를 기만하고 속이는 것이다. 식물이나 균류 같은 복잡한 유기체뿐만 아니라 단세포 생물 또한 속임수를 쓴다.


생물의 세계에서 속임수와 부정행위가 이토록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속임수의 드넓은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속임수를 진화적 전략으로 해석하며, 생명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사회의 거짓과 정보 왜곡 문제에 대해서도 생물학적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다. 저자는 자연의 속임수를 거짓말이라는 제1법칙과 기만이라는 제2법칙으로 정리했다. 의사소통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위조하는 거짓말의 생물학적 본질과 상대의 인지적 편향과 약점을 무기로 삼는 부정행위에 대해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자연의 속임수를 이해하게 되면, 인간 사회의 속임수 패턴도 보인다는 사실이다. 속임수를 생명 전반에서 반복되어온 보편적인 생존 전략으로 이해할 때,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기들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러한 사례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 속임수가 일상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더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하고 있어 진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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