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낯선 동행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11
김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설명할 길 없는, 알 수 없이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조여 왔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이 어딘가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들어와 있다는 기묘한 감각이 짙어졌다. 창밖으로는 새벽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골목의 가로등 불빛은 하나둘 꺼져가고, 세비야의 새벽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p.94


스물아홉 혜성은 소규모 영상 회사에 다니다 젊은 대표의 성희롱과 괴롭힘으로 인해 퇴사를 결심한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공감해주지 않던 남자친구와도 3년 동안 지속했던 관계를 끝냈다. 부모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생활비도 스스로 벌어야 했기에 해외여행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퇴직금을 받고 전 재상의 반 이상을 투자해 스페인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혼자 해외 여행을 가는 것이 불안해 여행 카페를 통해 또래의 동행자를 구하지만, 정작 낯선 동행자는 바르셀로나 공항에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가 담당했던 호텔조차 예약이 취소된 상태, 어쩔 줄 몰라 하며 호텔 문을 나선 시간은 새벽 2시였다. 낯선 곳에서 잔뜩 긴장한데다, 머릿속 한구석에 최악의 가능성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데...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된다. 


윤길우라는 그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혜성을 도와준다. 자신이 예약한 한인 호스텔에 데려가 숙박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봐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숙소를 구하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친구가 연락이 안 되고, 그 친구가 예약한 호텔이 취소가 된 상태라는 걸 말해주자 그는 친구가 사기 친 거 같다고 카페에도 글을 올리고, 신고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관광지 티켓은 혜성이 예약한 터라 다음날 사그라다파밀리아 티켓이 두 장이었고, 길우와 함께 가게 된다. 길우는 여행 경험이 많아 보였고, 혜성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그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긴다. 내일도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 이 낯선 도시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위안에 기대고만 싶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혜성은 낯선 장소에서 낯선 동행과의 여행을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혜성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 앉아 몇 시간을 돌려보며 편집하던 영상 속의 그곳에 와서 추로스를 입에 넣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실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맛은 아니었다. 화면 너머로 보던 것의 실체를 마주하자 그 진실이 생각보다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첫 여행도,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서글퍼졌다.                  p.158~159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 세비야, 그라나다, 마드리드를 거치는 여행의 여정을 혜성과 길우는 함께 한다. 지효가 부재한 자리에 길우가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행자가 된 것이다. 서로에게 의지도 되고, 도움도 되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지를 함께 관광하며 남녀가 설렘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이, 나타나지 않은 지효에 대한 불안,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길우에 대한 의심, 그리고 본능적인 불안과 이상한 예감까지 이런 저런 감정들이 뒤섞여 복잡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사그라다파밀리아대성당, 알람브라궁전, 플라멩코의 선율 등 낭만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더 혜성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혜성이 느끼는 그 감정을 책을 읽는 독자들이 고스란히 느끼게 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오싹해지는 순간이다. 


혼자 떠나는 해외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면, 이 작품을 읽으며 그 기대감이 파사삭 부서지게 될 것 같다. 로맨스처럼 흘러가던 분위기가 점점 스릴러로 변해가는 느낌이랄까. 사소한 불안감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오싹해지는 공포감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서늘한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은 <마당이 있는 집>, <여기서 나가>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김진영 작가의 신작이다. 그 동안 만나온 작품들이 굉장히 호러스러웠다면, 이번 작품은 심리 스릴러에 가까운 이야기라 더 흥미롭게 읽었다. 야기는 완벽했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의심이 커져 가면서 매력적인 심리 서스펜스를 보여줬던 <마당이 있는 집>, 사람들의 욕망이 집착으로, 그 집착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던 <여기서 나가> 모두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 역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전작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핀 시리즈 장르소설선 라인업에 김나현, 김서해 작가도 있어서 매우 기대가 되는데, 올해에 만나볼 수 있기를 기다려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절당하기 숙제 스콜라 어린이문고 47
이수용 지음, 이해정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드디어 태양이가 기다리던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그런데 신나게 놀 생각에 들뜬 태양이에게 단짝 친구 성하가 자신은 방학 숙제부터 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4학년 공통 방학 숙제는 '도전 일지 쓰기'였다. 심통이 난 태양이는 성하보다 먼저 숙제를 해버리기로 하고,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한 남자가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하다 거절에 익숙해지기 위해 100일 동안 거절당하기 프로젝트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 남자는 백 번을 시도하고 거절당하니 실패가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소감을 말한다. 태양이는 생각한다. 승낙받는 게 아니라 거절당하는 거라면 아주 쉬울 거라고. 




부탁을 거절해 줄 사람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태양이는 공책과 연필을 들고 거실로 간다. 엄마, 나 방학했으니까 게임 아이템 사줘. 엄마, 방학한 기념으로 치즈 폭탄 피자 시켜 줘. 엄마, 나 방학 대까지 버티느라 고생했으니까 한번 업어 줘. 엄마에게 타박을 들으며 턱도 없는 부탁을 이어가고, 거절당하고, 그걸 공책에 옮겨 적다 보니 숙제가 그냥 끝나 버릴 것 같았다. 공책에 쓴 걸 훑어보는데 어쩐지 양심에 찔려서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기로 한다. 거절을 열 번 당하되 각기 다른 사람에게 당하는 걸로 말이다. 


그렇게 빵집에서 찹쌀 도넛으로 목걸이 모양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자전거 가게에서 최고로 비싼 자전거를 타 봐도 되냐고 물어보고 거절당하고, 분식집에서 백 원짜리 핫도그도 만들어 팔아 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한다. 들어줄 리가 없는 부탁을 하고는 쏜살같이 도망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장난처럼 시작한 태양이의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태양이는 도전을 거듭하면서 타인의 부탁을 무조건 거절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자신이 거절당하려고 한 말에 대해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묘해지기도 하고, 남의 부탁은 다들 귀찮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거절을 하면서 미안해하거나 한참 뒤에 다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태양이는 방학 숙제를 하며 앞으로는 거절당해도 기분이 조금은 덜 상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다 그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까. 


겉보기에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려면 직접 말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다. 어떤 부탁이든 해 보기 전에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세상은 도전하고 부딪힐수록 넓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남에게 부탁하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거절이라도 당하면 주눅이 들어서, 다음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뭔가를 포기해 본 적 한번쯤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무섭고 두렵기만 했던 거절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준다.  거절을 자주 당하다 보면 전처럼 거절에 쉽게 상처받지 않게 되고, 거절하는 상대방 입장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까지 생긴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절을 받아들이는 연습인 것이다. 이야기속 태양이는 여러 번의 거절을 통해 세상에는 승낙과 거절만 있는 게 아니라 '봐서'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거절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귀엽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지는 태양이의 여름 방학 이야기를 통해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법을 배워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식 영어 발음 수업 - 처음이라서 막막한 발음 강세부터 연음·축약까지, 발음의 핵심을 한 권에
하이빅쌤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어 공부를 꽤 해 왔다. 문법도 알고, 단어도 웬만큼 외웠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막히곤 한다. 혹은 뭐라도 말을 해보지만 정작 원어민은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 넷플릭스에서 미드를 보면 왜 아는 단어조차도 잘 안 들리고, 해외 여행을 가서 자신있게 외워둔 말을 하더라도 문제는 상대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거다. 문제는 바로 '발음'이다. 완벽한 원어민 발음까진 흉내내지 못하더라도, 그저 오해 없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대화가 통하는 발음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은 미국식 영어의 핵심 소리를 제대로 잡기 위해 완벽하게 말하는 영어가 아니라 소통이 되는 영어를 목표로 쓰였다. 유튜브를 통해 25만 구독자들에게 영어 발음 코치를 해온 하이빅쌤은 이론만 나열한 발음서가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끌어 준다. 영어 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흘러 가는지를 처음부터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기초부터 알려준다.


문법이 완벽해도, 어휘가 풍부해도, 소리가 빗나가면 소통은 끊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발음은 단지 '소리 하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영어가 비로소 영어처럼 들리기 위해서는 강세, 리듬, 연결, 축약, 탈락이라는 모든 요소가 함께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r 발음, 라라랜드부터 미역까지 L 발음의 t와 d, 소리가 아니라 바람에 가까운 h 등 미국식 발음을 완성하는 핵심 자음 소리부터 모음 소리, 연음의 원리, 축약의 원리 등으로 구분해 충분히 따라해보고 연습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왜 그런 발음이 만들어지는지 그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해, 불필요한 이론 대신 실제 발화에 바로 적용되는 핵심 원리만 담았다. 필요한 부분에 QR 코드를 수록해 저자 강의를 들으며 학습할 수 있도록 했고, 원어민 음성을 들으며 정확한 발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각각의 장마다 MP3 음원도 제공된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억양에 관한 장이었다. 언어마다 고유한 톤과 매너가 있는데 한국에서 있는 조사들을 발음하는 습관이 영어 문장을 말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반영되는데, 그것이 영어를 자연스럽게 들리게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영어의 계단식 억양에 대한 설명을 듣고 톤을 조절해 말하면 영어 문장이 훨씬 영어답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발음은 공부가 아니라 훈련'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설명만 들어서는 절대 바뀌지 않고, 무조건 해봐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입 모양을 직접 바꿔보고, 혀의 위치를 의식적으로 조정해보고, 숨을 어떻게 내쉬는지 실제로 연습해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머리로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과 입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 말이다. 영어가 가진 자연스러운 특징을 살려 강약을 주고, 흐름을 만들고, 이어질 곳은 잇고, 줄일 곳은 줄이는 것. 그 정도만 되어도 대화는 충분히 열린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미국식으로 발음을 바꾸는 5단계 시스템을 익힌다면, 조금은 발음이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각 레슨의 핵심 발음 규칙을 단어 단위로 체계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음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기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아듣는 영어'를 '전달 되는 영어'로 바꾸는 그날까지, 열심히 공부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관리국
캘리앤 브래들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렇다면 그 이주자들은 어디서......?"

"역사 속에서 왔어요."

"뭐라고요?"

아델라는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할 줄 알거든요." 말투가 꼭 무슨 커피 머신을 설명하는 사람 같았다. "시간관리국에 온 걸 환영해요."               p.14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정부는 시간을 넘나들어 이동하는 수단을 개발했지만, 그것이 아직 상용화된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시간관리국'을 설립해 과거에서 넘어온 '이주자'를 관찰하며 연구 중이다. 역사의 경로를 바꿔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이주자'들은 역사에 남은 큰 전쟁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따위의 현장에서 원래라면 죽을 목숨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1665년 페스트가 런던을 휩쓴 대역병 시대에서, 1645년 네이즈비 전투 현장에서, 1916년 솜 전투에서, 프랑드 대혁명 시기인 1793년에서, 그리고 1847년 북극탐험 현장에서 각각 이주자들이 현재로 온다. 과거에서 온 그들은 미래에서 살아가야 했기에 감시원이 늘 곁에 붙어 있으면서 그들을 안전한 삶으로 이끌어야 했다. 그러한 감시원을 '가교'라 칭했고, 이야기는 국방부 언어 담당부서에서 통역사로 일하다 가교가 된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해군 장교와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가 현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1845년에서 추출된 그레이엄 고어는 여성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매우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영국 젠틀맨이자 지독한 애연가이기도 하다. 그는 북극 탐험 중 고립되어 죽을 뻔했다가 현대로 오게 된 케이스였다. 그는 폐렴과 심한 동상, 괴혈병 초기 증세, 부러진 발가락 등을 치료받았다. 그리고 시간관리국 병동에서 세 번이나 탈출하려 했던 적이 있고, 반항을 멈추고 나서는 오히려 이주자 중 가장 높은 적응 수준을 보이고 있다. 모든 이주자는 일 년 동안 가교와 함께 지내도록 했다. 세탁기와 가스레인지, 라디오, 진공청소기 따위에 관해 설명을 들은 뒤 "당신네는 번개의 힘까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러고는 단지 하인을 고용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 힘을 사용하는군요."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고어가 현대문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과연 19세기의 신사와 21세기의 공무원,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어떻게 진행될까. 




인생이란 문을 쾅 닫는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날마다 돌이키지 못할 결정을 내린다. 고작 십이 초 늦은 지각 때문에,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삶은 느닷없이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만약 시멜리아를 화나게 하지 않았다면, 또는 퀜틴에 대한 의심을 덜 품었다면 내가 가교였던 해의 겨울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내 손으로 그레이엄을 어떻게 바꿔놨는지는 감히 곰곰이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p.258


자, 여기 과거에서 갑작스럽게 현대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들이 있다. 길게는 361년 전에서, 짧게는 110년 전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21세기에 무사히 적응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에서 온 사람과 1년 365일 24시간 내내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서로 작성하면서,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민자들은 무사히 현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오로지 건물과 사람들로 지평선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고, 여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숨을 쉬는 거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마음이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시대가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이주자와 가교가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관리국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과연 시간 여행에 숨겨진 정부의 음모는 뭘까. 애초에 이 극비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펭귄 클래식에서 일하는 작가 캘리엔 브래들리의 장편 데뷔작이다. SF적인 설정을 블랙코미디와 로맨스로 가볍게 풀어 나가다가 흡입력있는 스파이 스릴러로 마무리되는 페이지터너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읽었다. 이런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시간여행을 통해 현대에 오게 된 사람들을 '난민'으로 대하는 것이나, 이민자 가정 출신의 화자를 통해 그들을 적응시킨다는 설정, 문화적 맥락이 부재하는 자리에 순진무구한 풋풋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색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두 사람의 로맨스도 재미있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스릴 넘치는 스토리도 탄탄하게 흘러간다. 몇 줄의 기록과 낡은 사진 한 장으로만 남아 있던 실존 인물에 상상력을 더해 캐릭터로 탄생시킨 것과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서사를 만들어 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게다가 일단 너무 재미있다. 현재 6부작 드라마로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영상화된 버전도 기대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은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 더 나은 매일을 위한 희망의 철학
라르스 스벤센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다면 희망하지 않는 사람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미래를 향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에 갇혀 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즉, 가능한 것들 가운데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원함으로써 미래의 가능성과 관계 맺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는 아무 생각과 의도가 없어 보인다.                 p.35


노르웨이의 철학자 라르스 스벤센은 전쟁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보며 '희망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다. 전쟁을 겪으며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는 분노, 절망,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이 존재했지만, 가장 두드러진 감정은 그것을 이겨내고 자유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수준의 용기와 저항을 낳는다. 인간의 삶에서 희망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불가능한 것을 이겨내도록 만드는 것일까. 


저자는 희망을 단순한 감정이나 낙관으로 보지 않고,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선택이 결합된 태도로 정의한다. 희망이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더 나은 가능성을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준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해 신학, 근대 철학, 현대 정치사상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희망이 어떤 방식으로 사유되고 사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홉스, 스피노자, 칸트, 니체 등 다양한 철학자들이 등장해 희망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탐구했는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사는 삶의 본질인 고통을 피하는 것이지만 고통을 막으면 삶은 지루해진다. 지루함을 깨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고통이 되돌아올 것이다. 이 악순환에서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으며 희망이라도 갖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도리어 파괴적이다. 고통을 막았을 때의 만족이란 일시적인 자유 외에는 없는 것이고 희망은 우리를 혼란과 고통에 몰아넣는다는 쇼펜하우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희망을 품은 한 가지가 있다.               p.178


오직 인간만이 희망을 갖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니 희망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신은 생존하기 위해 희망을 필요로 한다.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지리라는 희망, 삶이 어떻게든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왜 뭔가를 하겠는가. 희망은 우리가 자신보다 대단하다고 믿는 대상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게 너무 근본적이기 때문에, 또 우리가 마주하는 거의 모든 것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쉽게 그것에 대해 잊어 버리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울증과 불안을 겪고 방황을 하며 절망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희망은 그렇게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신화를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뚜껑을 열지 말라는 경고를 어긴 판도라로 인해 인간 세상에 온갖 악이 퍼지게 된다. 자신이 세상에 풀어놓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판도라가 서둘러 뚜껑을 닫았지만, 상자에 남은 것은 딱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어쩌면 상자 속의 희망은 좋은 것인 척 위장한 악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 마음으로 희망에 이끌리지만 그 희망 속의 악은 대부분 실망으로 이어지곤 하니 말이다. 물론 희망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와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과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희망이 인간 삶에서 하는 역할을 광범위하게 탐구하는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종일관 '희망'에 대해 사유하는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희망에는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오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일이 보다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세계를 보다 희망차게 바라보는 방식을 찾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