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울어져 걷지 창비청소년시선 53
김물 지음 / 창비교육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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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상 좀 치우자/책상 구경 좀 하자/참 많은 게 놓여 있구나//

둥둥 떠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뒤적이다가/모서리가 없어 굴러다니던 작은/고민을 떨어뜨렸어요/휘적휘적 아래를 더듬는 내 손길에/물결치는 책상이 부드러운 몸을 휘어요//

빛이 일렁거리며/내 것들이 함께 반짝여요                - '내 책상' 중에서, p.14~15


시는 학창 시절에 자주 썼던 편지에서, 그 시절을 위로해주던 책과 만화로부터, 이곳 저곳에 붙였던 귀여운 스티커와 어느 소풍날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놀이터의 빈 그네에 앉아서, 어지러운 책상을 치우다가, 한 발 한 발 언덕을 오르면서, 마트에 수족관을 지켜보다가도 만날 수 있는 것이 시이다. 시인들은 그렇게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을 모아 시를 빚어낸다. ‘창비청소년시선’은 청소년도 동시대의 좋은 시를 읽고 즐겨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쉰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김물 시인은 청소년이라는 과도기적 존재를 헤아리는 따듯한 시선으로 그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의 결을 따라간다. 친구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던 내 사진을 보며, 코인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책을 읽으며 마음의 부피가 늘어나는 상상을 한다. 친구와의 관계와 어른이 되어 가면서 겪는 혼란,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청소년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섬세하게 담겨 있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울어져 걷'는다는 제목부터 청소년들의 불안정한 삶을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에 대해 알만한 건 다 아는 상태, 몸은 성인처럼 자랐지만 아직 정신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가 바로 청소년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감정의 변화가 많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당연한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각자의 속도대로 천천히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주변의 어른들이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거미줄이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바람 끝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고 있는/어떤 것의 날개 조각//

바람 때문에 보이는 것이 있다/게양대에 온몸이 휘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는/태극기와 골목 안 바람 빠진 풍선의/소리 없는 걸음걸음//

바람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 있다/앞머리에 덮여 있던 그 애의 이마가/희고 반듯하다는 것을                - '바람은 가려지지 않는다' 중에서, p.105


‘창비청소년시선’은 청소년도 동시대의 좋은 시를 읽고 즐겨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어린이는 ‘동시’로 시를 향유한 것에 반해, 청소년은 교과서에 실린 정전, 그것도 그들의 삶과 감각에 맞지 않은 어른의 시를 읽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난 10년간 ‘창비청소년시선’은 대부분의 시집이 올해의 청소년 도서, 문학나눔 등에 선정되었으며, 2025년부터는 중1 새 교과서에만 7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으니 엄청난 성과다. 다시 또 10년, 20년 이어지며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시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창비청소년시선은 지난 40번째 기념 특별 시집인 <도넛을 나누는 기분>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황인찬, 박소란, 양안다, 박준, 유희경 등 자신만의 고유하고 개성 넘치는 시 세계를 구축한 20명의 젊은 시인들이 저마다의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쓴 창작 시 60편을 모은 시집이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꼭 청소년뿐만 아니라 초심자들이 읽기에도 너무 좋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집 시리즈는 표지도 아주 예쁜 편인데, 이번에 만난 <나는 기울어져 걷지>는 빛의 방향에 따라 컬러가 변하는 홀로그램 느낌이라 더욱 예쁘다. 청소년들이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도, 선물로 주기에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시가 뭔지 잘 모르겠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어렵게만 느껴졌었다면 청소년 시집부터 만나보면 어떨까. 아직은 시가 낯선 청소년들에게도, 여전히 시가 어려운 어른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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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기쁨에 대하여
한은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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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몽글몽글한 유백색의 토란이 냄비 안에서 끓여질 때의 기분이란. 어디 경치 좋은 노천탕에 가서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익어가는 것처럼 기분 좋게 노곤해졌던 것이다. 토란이 나, 내가 토란, 뭐 이런 물아일체의 시간을 가지며 익어가는 토란을 보았다... 몽글몽글하되 절대 뭉글뭉글해지지 않는 그 잔잔한 절도라니. 아아(작게 탄식). 과하지 않은 점성은 보일 듯 안 보일 듯 멋을 부린 멋쟁이 같았고.                p.68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름 미식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맛집 투어를 다니고, 요리 학원에 다니고, 각종 레시피를 찾아가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보면서 먹는 기쁨을 제대로 누렸던 시간들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쉽게 소홀해지는 것이 음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무슨 장을 볼까? 가족들의 끼니는 챙기지만, 정작 혼자 있는 시간에 나 스스로를 위해 음식을 챙기는 것이 가장 귀찮아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먹을 만하고, 적당히 배가 부를 수 있는 음식, 그러니까 끼니의 개념으로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것 말고도 신경써야 하고,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포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먹는 기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치 모노톤의 세계에 알록달록한 색채가 들어오면서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랄까. 먹는 데 진심인 소설가의 느긋한 음식 탐닉기를 따라 가다 보니 이 음식 먹고 싶다부터 이런 음식은 무슨 맛이 날까? 왜 내가 이런 기쁨을 잊고 살았을까. 나도 이런 추억의 음식이 있는데... 등등 책과 대화하며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음식을 먹다보면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이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화가 나온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던 그 주방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마멀레이드샌드위치에 감격하며 먹는 걸 보고는 말이다. "뱃속에서 따뜻하고 가려운 뭔가가 느껴져." 패딩턴이 말한다. "뿌듯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햇빛의 기운으로 충만한 오렌지마멀레이드처럼 그늘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화였다.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이런 것들에 마냥 빠져들고 싶은 날이 있다.                 p.297


한은형 작가는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식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음식에 관련된 작품도 썼고, 술에 관한 에세이도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다정하고, 맛있는 책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간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이 책은 작가가 오랫동안 쓰고자 했던 제철 음식과 슬로푸드, 소울푸드에 대한 이야기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한은형의 상상식당'을 비롯해 여러 지면에 발표해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미식 서평단으로 책과 함께 스페셜 굿즈 세트도 받았다. 일러스트 엽서 6종 세트, 독서 맛집 한줄평 카드, 그리고 감자칩 일러스트 띠부씰 5종 세트인데 너무 귀엽다. 이 중에 엽서 6종은 책 구매시에도 받을 수 있다. 일러스트 엽서 중에 두 장은 레시피 카드인데, 내가 제일 궁금했던 음식들이 담겨 있어 붙여 두고 언젠가 만들어 보리라 생각하는 중이다. 




이 책은 'S'로 시작되는 네 개의 키워드-Season(시즌 푸드), Soul(소울푸드), Slow(슬로푸드), Story(푸드 스토리)-를 따라 음식의 세계를 여행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인도인 파인다이닝 셰프의 말을 빌려 '5S'에 대해 썼다고 한다. Sweet, Salty, Sour, Spicy, Surprise, 이렇게 서프라이즈까지 있어야 파인다이닝이라고 셰프는 말했다. 저자가 만든 4S에 나머지 'S'를 더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Smile'을 포함시키고 싶다. 나를 웃게 만드는 음식, 먹으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음식, 누구라도 음식을 통해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S를 더하면 그제야 책이 비로소 5S를 갖춘 완전체가 될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어떤 S를 포함시켰을지 궁금해진다. 


맛있는 음식이 세상을 잠시나마 괜찮아 보이게 해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게 해주기도 하고, 지친 영혼을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라 읽는 내내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음식은 도대체 무슨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씀바귀김밥'과 '레몬국수'다. 대부분의 음식은 이름만 들어도 우리가 아는 맛이다. 그런데 이 두 음식은 조합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말 궁금했다. 자, 사는 일에도 감칠맛이 돌게 만들어주는 책이 궁금하다면, 생생하게 이 삶을 맛보고 싶은 허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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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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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종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바로 그곳, 그 베인 자리, 그 상처, 염증이 생긴 그 자리에 통로가 생겨 나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야기,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늘 어떤 맹점이나 잠깐의 공백, 약점,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상실했거나 일어난 적도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것들이 나를 안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어두운 방으로 끌어당겼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런 비밀스러운 방과 통로가 있었다.                p.118~119


<타임 셸터>로 부커상을 수상했던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대표작이다. 기억과 시간에 대한 독창적인 탐구를 보여주었던 <타임 셸터>가 독특한 구성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조금 난해한 편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슬픔의 물리학>은 그에 비해 굉장히 잘 읽힌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선형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궁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전개로 펼쳐지지만 이상하게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일반적인 소설의 구조가 아니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대로 흘러가는 서사이기 때문에 여러 인물의 기억들과 역사와 환상의 조각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잘 읽히는 이유는 문장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문장은 시처럼 아름답지만 모호하지 않고,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지만 세심하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 곧 페이지 가득 빽빽해지고 마는 그런 책이었다. 


책 속에 '독서의 양자물리학에서 비롯된 질문'이 특히 흥미로웠다. 문학에서 관찰자가 없을 때 온갖 경우의 수가 열려 있다고 가정하면 소설의 소립자들 사이에서 어떤 난장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고. 아무도 그 책을 읽지 않는 동안 표지 안쪽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상상해보자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설레이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전적인 서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능성을 소거해나가는 것'이라며, '경계를 확정하기 전 세상은 평행한 버전들과 옆길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양자물리학을 문학에 대입해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난생 처음으로 양자물리학과 문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말해지지 않은 것과 일어나지 않은 건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것이 일어나거나 말해지는 방식의 변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독특한 구성과 형식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도 짐작이 될수밖에 없다. '슬픔의 물리학'이라는 인상적인 제목도 그렇고 말이다. 




쓰고, 쓰고, 또 쓰게 하라.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라. 노아의 방주처럼 되게 하라. 내가 아니라 이 책을. 오직 책만이 영원하다. 오직 책의 표지만이 파도 위로 떠오르며, 오직 책의 페이지 사이에서 들끓는 생명만이 살아남으리라. 그리고 새로운 땅을 보게 되면 그들은 나아가 번성하리라. 그리하여 글로 쓰인 것은 살과 피를 얻어 온전한 형상으로 살아나리라. '사자'는 사자가 되고, '말'은 말처럼 힝힝거리고, '까마귀'는 시끄럽게 우짖으며 지면에서 날아오르리라...... 미노타우로스는 대낮의 빛으로 걸어나오리라.             p.220~221


이 작품의 화자는 독특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사가 병적 공감, 혹은 강박적 공감이라는 희귀한 진단명을 내놓았을 정도로 이것은 병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몰입하게 되면, 호흡이 자동 조절 모드로 넘어가면서 타인의 기억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화자는 '어떤 이들에게 공감은 고통을 통해 열리는데 내 경우는 슬픔을 통해 열릴 때가 더 많다'고 말한다. 그래서 슬픔의 물리학이 수년 동안 탐구 주제였다는 것이다. 슬픔에는 냄새도 색도 있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다양한 색과 냄새가 슬픔을 쉽게 활성화한다는 비유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아홉 개 장 중에서 슬픔의 기초 물리학이라는 장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파편화된 타인의 기억들이 신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끊임없이 방향을 틀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식으로 책 전체가 하나의 미로를 이루고 있어 정말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정말 온갖 종류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우주는 도서관이다'라는 말이 더이상 은유가 아니라고,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해력이 필요할 거라는 문장이 있었다. 앞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작도 끝도 없는 도서관의 끝없는 서가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게 했다. 빼곡하게 쌓여진 이야기들의 서가에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하나씩 이야기들이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대단히 특별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와 함께 이야기의 미궁 속을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은 어디서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타임 셸터>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면, 이 작품을 먼저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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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행복 톤 텔레헨의 어른을 위한 철학 동화
톤 텔레헨 지음, 김고둥 그림, 유동익 옮김 / arte(아르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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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는 동물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길 원하지 않았고 동물들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고슴도치는 덤불이 때때로 가시에 달라붙듯이 동물들이 가시에 달라붙을까 봐 두려웠다.

그중 최악의 경우는 그러한 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다.              p.93


톤 텔레헨의 어른을 위한 철학동화 시리즈 신작이다. 그는 작은 숲 속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해 일상의 고민들을 하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본다. <고슴도치의 소원>, <코끼리의 마음>, <다람쥐의 위로>등의 작품을 읽어 봤었는데, 이번에 나온 것은 <고슴도치의 소원>에 이은 후속작이다. 전작들을 읽으면서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안쓰러워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다들 그런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고슴도치의 소원>에서는 혼자 사는 외로운 고슴도치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편지를 써놓고는 계속 고민을 했었다.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기가 너무도 두렵고, 어렵기만 했다. 소심한 고슴도치에 이어 <코끼리의 마음>에서는 대책 없이 무모한 코끼리가 등장했다. 상처받고 놀림당하고 결국엔 후회하더라도, 그저 나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상한 코끼리의 끊임없는 도전에 이어 <잘 지내니>, <잘 다녀와>에서는 언젠가 숲속 일상을 떠나볼 생각을 품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다람쥐의 위로>에서는 다람쥐와 숲속 동물 친구들이 각자의 걱정거리를 안고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고슴도치는 한숨을 쉬며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마. 그게 최고야. 불필요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고, 부수적이지도 않고, 어떤 것도 아닌 것.

고슴도치는 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강물을 보았다. 내가 갈 곳은 저기야, 고슴도치는 생각했다.            p.171


이번 작품에서 고슴도치는 자신의 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동물들에게 팔려고 내놓기도 하고, 늘 생각과 상상을 너무 많이 한다는 생각에 생각하기를 금지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생일에 무리는 싫고 한 마리만 초대하고 싶어 고민한다. 혼자 사는 고슴도치는 외롭지만 막상 방문을 받는 건 부담스럽다. 누군가를 초대하려 해도 거절당할까 두렵고, 혼자 있는 건 심심하지만, 함께 있는 건 또 피곤하다. 뾰족뾰족 가시 때문에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동물로 상징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너무도 천연덕스럽고, 진지하게 그려지고 있어 아이도, 어른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슴도치는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우유부단하며,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해질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도 충분한, 굳이 행복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우리가 뭔가를 하든, 하지 않든 인생은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어도, 반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도, 오늘이 가면 내일은 오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새로운 길이 두려워 망설이면서 늘 안전한 길로만 가거나,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도전해 보거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흘러가 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니 말이다. 


누구나 가끔은 혼자이고 싶지만, 또 절대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먼저 다가가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손 내밀어주기를 바라기도 하고, 혹시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톤 텔레헨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법한 사소한 순간들과 작은 마음들에 귀를 기울여주는 이야기라서 더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삶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철학적이며 보편적인 질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해나가는 귀여운 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사랑스러운 일러스트들이 함께 서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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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나는 텃밭에 간다 - 판다 할부지 강철원의 다정한 식물 수업
강철원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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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을 키우면서 귀엽고 올챙이같이 생긴 꽃을 처음으로 보았다. 콩을 반쪽으로 나눈 듯 양쪽으로 갈라지며 피어나는 하얀 꽃. 내가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두콩꽃도 함께 고개를 갸웃갸웃 하며 나를 보는 듯했다. 그런 앙증맞은 꽃이 지고 나면 콩꼬투리에서 열매들이 차오르는데, 점점 통통해지는 꼬투리를 보니 반가웠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완두콩! 그들의 폭풍 성장은 루이, 후이 쌍둥이 판다의 성장처럼 기특하고 감동적이었다.          p.86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자신만의 작은 텃밭을 하나 일구고 싶다는 로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귀농과 귀촌을 할 수도 없고, 도심에서 전원생활을 꿈꿀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나 역시 오랜 시간 식집사로 식물들을 돌보고 나니 텃밭에 대한 로망이 조금씩 생기고 있던 참이다. 내가 수확해서 먹는 채소의 맛이 궁금했고, 씨앗부터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은 얼마나 힐링이 될까 기대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면서 텃밭이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이번에 그런 로망을 해소시켜줄만한 책을 만났다.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바오패밀리를 돌보며 덩달아 우리에게 친근해진 에버랜드의 베테랑 주키퍼 강철원이 텃밭 농부로 변신했다. 동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동물학과 동물번식학을, 그들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조경학을 공부했을 정도로 매사에 진심인 그라 텃밭일기도 수준급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옥수수를 심어서 수확하고, 가난한 시절 배를 채워 주던 찐 감자의 기억으로 씨감자를 심고, 쌈채소를 좋아해 들깨도 식재한다. 들깨를 수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깻잎을 먹기 위해서 말이다. 각각의 에피소드 뒤에는 남바할의 농사 팁이라고 해서 실제 농사를 할 때의 경험을 담은 노하우를 수록했다.  들깨를 심을 때는 두 포기씩 함께 심어야 한다는 것, 옥수수는 햇볕을 차단해 다른 작물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입지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 부추는 겨울에 퇴비를 두툼하게 덮어 줘야 봄에 더 튼튼하고 향 좋게 자란다는 것 등등 실제로 텃밭을 가꾸게 되면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로 가득하다.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텃밭 생명들. 그들을 돌보는 건 인간이 아니라 해와 바람과 흙과 물이다. 자연의 생명체들은 모두 그 돌봄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그렇다면 자연 속 일부인 나는 어떤가? 햇살과 땅의 기운과 바람의 돌봄에 감사하고 있는지, 주어진 삶에 성실히 임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저 거름을 내고, 밭을 갈아 흙을 뒤섞으며, 식물들에게 농부의 발소리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면, 나는 매일 텃밭을 찾을 것이다.               p.250


살면서 되도록 입에 올리지 않는 단어가 '실패'와 '포기'라는 저자에게도 쉽게 통하지 않는 것이 텃밭이다. 수확해 보관해 두었던 아주까리 씨앗을 김고 기대를 품고 기다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 싹이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종묘상 사장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더니 씨앗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발아에 필요한 에너지를 소실한 것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씨 뿌리고 물 주변 다 잘 자랄 것 같지만, 식물은 사람 못지않게 예민하고, 세심한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그 일을 통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동물원의 동물들도, 텃밭의 식물들도 진심과 정성으로 돌봐야 탈 없이 건강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애정을 듬뿍 쏟아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던 딸기 재배에 대한 이야기, 아이바오와 푸바오가 엄청나게 좋아했던 당근에 대한 사연, 부이, 후이 쌍둥이 판다의 성장처럼 기특하고 감동적이었던 완두콩의 폭풍 성장기, 각자의 역할을 하는 쪽파와 대파 에피소드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텃밭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어, 수확한 채소로 만들어 먹는 음식들에 대한 팁도 배울 수 있다. 텃밭 레시피는 소박하고 건강한 식탁을 채워주는 남바할 여사의 노하우이다. 


텃밭의 사계절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름다운 세밀화와 사진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더 생생하게 텃밭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더 좋았다. 텃밭 농부로서의 삶이 만만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텃밭을 가꾸며 살아보고 싶다. 나만의 텃밭을 꿈꿔 본 적이 있거나, 식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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