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사람을 위한 것
슬론 크로슬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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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얼마나 그리울지 예측하고 미리 애도하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회피하고자, 삶을 이루는 요소들이 지닌 가치를 잘 안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 한다. 우리가 하는 선택과 우선순위 결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믿음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얄팍하다.                p.38


가까운 사람의 예기치 못한 죽음, 그리고 그것이 촉발시킨 부채감과 죄책감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남겨진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불가능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날들에 사실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 사건은 늘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출판사 빈티지북스에서 홍보 일을 하던 시절, 직장 상사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러셀의 죽음을 겪고 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실제 모습 둘 다를 봐주는 사람이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가장 너그러운 믿음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벌어졌다. 게다가 러셀은 가장 폭력적이고도 잔혹한 방식의 죽음, 자살로 곁을 떠나갔다. 사람들은 벌어진 일을 남겨진 이들이 눈치챘을 거라고 추측하고는 한다. 중요한 징조를 무시했느냐고, 타인을 살피는 일을 소홀히 한 건 아니냐고. 하지만 삶은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 친구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 했지만, 내가 듣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에게 죄책감은 가장 잘못된 형태의 애도가 아닐까. 



"전 살면서 행복한 사람들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어요.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데요?" 나는 러셀을 생각할 때 그 질문을 떠올린다... 삶이 기적인 건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매일 잠에서 깨어나 삶을 지키고자 싸우기로 한다는 사실,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삶을 품에 꼭 끌어안는다는 사실이다. 그 정반대의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기적, 순전한 기적이다.                      p.77


이 책은 도난 사건으로 시작된다. 단 한 시간 아파트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보석들이 전부 없어진 것이다. 도둑은 침실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더러운 부츠로 침대 위 새하얀 이불을 밟으며 물건을 가져가 버렸다. 모두 꽤 값나가는 물건임에도 보험을 들기 위한 보석 감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값어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자신이 공간이 안전하다는 감각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그 자리에 불안이라는 감정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난 사건으로부터 한 달 뒤, 가장 친한 친구가 잔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일 역시 갑작스럽게 벌어졌고, 먼저 일어난 사건의 불안에 깃든 상실감이 친구의 죽음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상실을 경험하게 만든 이 두 사건은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슬픔과 애도를 다룬 글들을 꽤 읽어 왔지만,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식을 비껴가며 상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문장이 너무도 수려해서 온통 밑줄과 포스트잇 플래그로 가득 차버렸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얼마나 그리울지 예측하고 미리 애도하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고, 괜찮아지는 법을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이해해보려는 애틋한 시도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 상실은 살다 보면 누구라도, 언젠가는 겪을 수 있는 과정이기에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슬론 크로슬리는 동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관계를 예리하게 관찰해온 작가다. 이 책은 사라진 이를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슬픔과 애도, 우정과 사랑의 본질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깊이 있게 그려낸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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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싫을 때 읽는 책 - 마감과 고갈 사이에서 건진 스물네 개의 문장들
금정연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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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리고 책은 계속해서 늘어난다.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연비 (연료 대 거리의 비율), 아니 '책비' (읽은 책 대 쓴 책의 비율)도 덩달아 떨어지는 듯하다. 자도 자도 풀리지 않는 피로처럼, 써도 써도 끝내지 못하는 '만성 마감'이 늘어나고 제때 읽지 못한 책들이 무덤처럼 쌓인다. 너무 많은 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다시 책을 주문한다.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것처럼, 책을 사는 것이다.              p.66

  

<서서비행>,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외에 수많은 앤솔러지에서 금정연 작가의 글을 많이 읽어 왔다. 처음에는 인터넷 서점 MD에서 전문 서평가가 되었다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한 권 두 권 읽다보니 글을 너무 잘 쓰셔서 계속 챙겨서 읽게 되었다. 이제는 서평가보다는 완전히 작가로 자리 잡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여전히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16년 차 전업 작가로 수십 권의 책을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그는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울까.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2년 동안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한 것들이다. 매달 책에서 한 문장을 골라 거기서 출발해 자신의 일상으로 걸어 나가는 방식으로 쓰였다. 사실 그가 싫다고 말하는 건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글쓰기의 주변부일 가능성이 높다. 마감과 수정과 거절과 기다림. 혹은 글을 잘 쓰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고통같은 것들 말이다. 쓰는걸 최대한 미루기 위해 다른 책을 읽고,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하루가 가고 그런 날이 쌓이면 글쓰기가 싫어지고,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 진다고. 그래서 이 책은 '당신이 무언가를 너무 하고 싶지만 하기 싫을 때 펼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한다. 서문부터 너무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너무 하고 싶지만, 막상 하려니 또 너무 하기 싫은 것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다반사로 겪는 현상이니 말이다. 



두려움은 재능의 반대말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두려움은, 내가 여전히 이 일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표시다. 재능은 막힘없이 술술 쓰는 게 아니라, 두려운데도 돌아오는 것이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들 하지만, 실은 허리로 쓴다. 막막해도 허리를 세우고 다시 앉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도대체 어떡해야 하냐고? 일단은 도망쳐도 된다. 단,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결국 돌아올 것. 그리고 하얀 화면 앞에서, 백지가 된 스스로를 받아들일 것. 그런 다음 우리는 쓰기 시작한다.               p.185


이 책의 모든 챕터는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레너드 코페트 <야구란 무엇인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프란츠 카프카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커트 보니것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 로베르트 발저 <연필로 쓴 작은 글씨> 등 저자가 글쓰기 싫을 때마다 들춰 본 책들의 리스트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그 책들의 문장을 가져 왔지만, 작품 분석을 하는 건 아니고 연결되는 것은 그의 일상과 글쓰기에 관련된 고민들이다. 통장 잔고가 줄어들수록 왜 책은 늘어나는 것인지.... 제때 읽지 못한 책들이 무덤처럼 쌓이는 와중에 그는 결단을 내린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바로 너무 많은 책을 정리하기. 한 500권 정도 덜어 내고 나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다고, 과연 그는 계획대로 책들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문제는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아무리 버려도 도무지 티가 나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게 책으로 사방 벽을 쌓은 작업실에 앉아 그는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책을 버릴 수도 없고 안 버릴 수도 없는 딜레마 사이에서 그가 내린 결정은 종이책을 스캔해서 PDF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7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북스캐너와 재단기를 주문하기에 이르는데.... 한때 내가 심각하게 고민했던 상황과 똑 같아서 너무 공감하며 읽었다. 북스캐너가 생각보다 고가인데다, 책을 먼저 재단기로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가 않아서 포기했던 계획인데, 똑같은 고민을 하고 실제로 현실로 구현시킨 저자에게 매우 공감하며 읽었던 챕터이다. 그 외에도 웹소설에 푹 빠져 허우적댔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챗GPT 앱을 설치하고 한 시간 넘게 붙잡고 질문을 던져댔던 일, 기대하고, 실망하고, 마음 졸이게 하는 야구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글등 재미있는 글들이 많았다. 끊임없이 삶 속에서 글쓰기를 고민하지만, 정작 내용은 글쓰기보다 '딴짓'을 권장하는 듯 흘러가서 그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그런 작품이었다. 자,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딴짓이 절실하게 필요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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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아오사키 유고 외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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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탐정 역을 맡는 캐릭터도 그래. 직업이나 성격으로 차별화하기는 하지만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 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그렇기에 복각과 재현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에서 독창성이란 무엇일까?               - 아오사키 유고, 〈끈, 밧줄, 로프〉 중에서, p.36


한 아파트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시체는 아파트 근처 바다에 면한 운송 회사 창고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산책로 아래에서 발견한다. 여러 정황 증거상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사건이 있었던 날 밤 아파트 안에 있던 사람은 29명이었다. 그 중에서 구속에 사용된 로프 도구에 착안해 아파트 쓰레기 배출 상황을 조사했고, 의심이 가는 인물 세 명이 용의자로 좁혀 진다. 셋 중에 어떤 것이 범행에 사용된 증거품인지 알 수 없어, 후보 세개를 순서대로 끈, 밧줄, 로프라고 정하고 조사가 시작된다. 추리소설가인 아리스와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의 케미와 논리적으로 추리를 해나가나는 과정이 돋보이는 아오사키 유고의 작품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는 '나'는 사년 만에 대학 시절 미스터리 연구회에서 함께했던 친구 에이지의 연락을 받게 된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내가 쓴 소설을 발견했다며, 제사가 있어서 도쿄에 가는데 잠깐 보자는 거였다. 대학 시절 에이지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던터라 먼저 만나자는 약속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잠깐 얼굴을 보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 뒤, 회사로 경찰 두 명이 찾아온다. 그들은 미우라 해안 별장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며, 에이지를 아느냐고 묻는다. 살해당한 사람은 에이지와 호적상 부자관계로,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 에이지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던 거다. 동기는 분명한데, 완벽한 알리바이를 깰 수가 없어서 경찰이 찾아온 거였다. 과연 에이지는 '나'를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이용한 걸까. 알리바이 트릭을 테마로 한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수수께끼를 고민하는 과정이나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하지 못하면 즐거움이 반감하는 모양이다. 

물론 독서는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행위지만 미스터리는 작가가 곳곳에 설치한 복선을 찾아내거나 논리적 해결을 끌어내기 위해 작품에 설정된 현실성의 수준을 해석하는 등, 그 작품에서는 신이라 할 수 있는 작가와 사고의 캐치볼을 즐기는 측면이 있다. 혼자서 하는 것 같지만 거울 뒤편에 존재하는 작가와 추리의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 이마무라 마사히로,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중에서, p.418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 35주년 기념 헌정 작품집에 엄청난 작가들이 모였다. <지뢰 글리코>의 아오사키 유고, <창궐>의 이치호 미치, <기억술사>의 오리가미 교야, <엘리펀트 헤드>의 시라이 도모유키, <방주>의 유키 하루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의 아쓰카와 다쓰미, 그리고 <시인장의 살인>을 쓴 이마무라 마사히로까지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일곱 명이 참여해 그야말로 미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이 기획 자체나 멤버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것은 완성된 작품을 읽었을 때였습니다.”라며 "기예가 뛰어난 작가들이 작정하고 유희를 즐기면 이런 작품이 나오는구나." 하고 작품에 대한 찬사를 남겼다.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표현해 온 캐릭터나 다양한 설정, 세계관을 사용해 각자의 스타일대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 최근에 읽었던 앤솔러지 중에서 가장 퀄리티가 훌륭한 작품집이었다. 지금의 미스터리 시장을 주도하는 젊은 작가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대작가에게 바치는 헌사로 쓴 작품들이기에 수준 높은 미스터리들이 탄생하게 된 것 같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소재로 활용한 작품들이 많아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일상 미스터리, 괴담이라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알리바이 트릭, 다잉 메시지의 비밀 등 여러 종류의 미스터리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직접 작품 해설을 썼는데, 원작자의 시점에서 들려주는 감상도 매우 흥미로웠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을 잘 모르더라도 이야기를 즐기는 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추리, 미스터리 물을 좋아한다면 이 멋진 기획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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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텔레패스
가미조 가즈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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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보이세요?"

"안 보이는데."

"유령을 믿으시는 건가요?"

"몰라. 그러니까 조사하는 거지."

내 질문에 하루코 씨는 그늘 한 점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           p.58


금요일 밤, 퇴근 준비를 하던 카렌에게 직장 동료가 말을 건다. “이상한 괴담 들으러 가실래요?” 남동생이 대학교 오컬트 연구회 소속인데, 동아리에서 괴담을 들려주는 이벤트를 일요일에 한다는 거였다. 무서운 걸 보러 혼자 가기 싫다는 말에 함께 가기로 하고, 괴담 발표회에 참석하게 된다. 다른 괴담들은 평범했지만, 한 여학생이 홀로 등장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괴담은 오싹했다. 오직 카렌에게 들려주는 괴담인 것처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로, 그녀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 후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 거실에 있는데 침실 쪽에서 '철퍽'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비릿한 개골창 냄새가 난 것이다. 그렇게 엿새가 지나는 동안 매일 밤 이상한 소리와 냄새가 시작된다. 


그렇게 시달리다 해결할 방법이 없자, 초자연현상으로 고민하는 분들의 제보를 받는다는 ‘아시야 초자연현상 조사’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아시야 초자연현상 조사’라는 곳은 대학교 초심리학 연구실과 제휴해 초자연현상의 실태를 조상한다는 유튜브 채널이었다. 한편 의뢰를 받은 고시노와 하루코는 조그만 영화 마케팅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퇴근 후에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초자연현상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취미라고 하기엔 꽤나 전문적이었는데, 전직 형사인 탐정과 한때 초능력 소년으로 유명했던 초능력자와 친분이 있었고, 대학교 연구실과도 소통하며 초자연현상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카렌의 의뢰를 받아 조사를 해나가면서, 그 동안 괴담 발표회에서 카렌처럼 지목당해 괴담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실종된 다섯 명은 모두 실종되기 전에 카렌과 똑같은 현상을 체험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상황이었던 거다. 괴담을 듣는 것만으로 사람이 실종되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나는 뭔가가 마음에 걸려서 속이 탔다.

아까 대화하다가 뭔가 알아차릴 뻔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뭐였는지, 머릿속을 맴도는 정보의 조각을 잘 짜맞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발상의 꼬리를 붙잡기 위해 고전적인 방법에 의지하기로 했다.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다.

"저기, 죄송한데요, 그, ESP 능력은 '보잘것없지만' 존재하는 거죠?"                p.173


이 작품은 일본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도쿄소겐샤’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21세기 일본에 걸맞은 걸작’을 발굴하겠다는 취지로 개최한 '소겐 호러 장편상' 수상작이다. 작품을 쓴 가미조 가즈키는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로 호러문학에 빠진 후 호러 기사와 단편소설을 써왔다. 그러다 사와무라 이치가 심사위원이라는 이유로, 난생처음 장편소설을 집필하여 소겐 호러 장편상에 응모해 수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호러로서도 오락소설로서도 아주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심사위원 전원의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각종 미스터리 차트를 휩쓸며 최고의 호러소설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초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검증하려는 학문인 초심리학이 이 작품의 주요 소재이다. 괴담과 초자연능력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추리 과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이 특히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유령이 정말 존재하는지, 저주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그걸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사건을 대하는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유령이나 저주가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것을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과학적인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초자연현상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증명해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주요 스토리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다각도로 들여다보고, 해결할 방법은 없는지, 굉장히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매우 논리적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느껴졌다. 그 과정이 재미도 있거니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오싹함도 갖추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겼던 작품이었다. 현지에선 후속편 <폴터가이스트의 죄수>가 출간되었고, 작가는 현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집필 중이라고 하니 국내에서도 어서 빨리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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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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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원래 사는 게 연기에 가까운 거라고 일러주었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사랑도 듬뿍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여사는 자신이 연기를 아주 지독하게 못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매번 사는 것이 어렵기만 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너희는 말이야. 지금 혼란스럽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돼."                  p.107


이중일은 어릴 때부터 경찰관이나 소방관을 꿈꿨지만, 지방의 응급구조학과를 나와 여섯 번째 고시에 실패하면서 노력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은 사설 구급대원으로 일하며 온갖 환자를 대형 병원으로, 요양 병원으로, 정신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사설 구급차를 타려는 사람들은 아주 절실했고 치열했기 때문에, 그런 환자와 보호자들을 이송하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응대하거나, 싸움을 중재하며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현장에 있다가 집에 오면 모든 게 허무했다. 잔뜩 사다 놓은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웠고, 별다른 취미도 없어 통장에는 푼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가끔 절연한 부모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는 지금의 이상한 평화에 만족했다. 


그날도 환자와 보호자를 이송하는 일을 하는 중이었고, 두 사람은 기필코 휴게소에 들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가 통증이 심해 공황 증세를 보인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들은 휴게소에서 잎담배를 말아 피우고 있었고, 그는 놀라 아연실색해 그들에게 말한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그 얘기를 듣다 보니 보호자가 환자의 차를 10년 넘게 몰았다고, 구급차를 몰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다 그들에게 구급차를 빼앗기게 되는데, 어쩌다 보니 도망치려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휘말려 구급차를 자신의 의지로 내어주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완벽하게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이중일은 환자의 탈출에 공범이 되기로 한 걸까. 




그리고 근정에게 물었다. 너는 이 모든 게 진심인 거냐고. 근정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는 보통 이런 걸 진심이라고 하지 않아? 근정의 물음은 너무나 간결했고, 그래서인지 더욱 명백하게 느껴졌다. 문주는 도대체 이런 걸 진심이 아니면 무엇을 진심이라 하겠느냐고, 응당 그렇게 생각하고자 하면서도 자꾸 미심쩍었다. 또한 자신이 그 미심쩍은 마음을 결코 지울 수 없다 는 것이 너무 의아했다.              p.282~283


함께 사는 가족이든, 영원을 약속한 연인이든, 뭐든 해주고 싶은 친구이든, 믿고 의지되는 동료이든 간에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상대를 믿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소연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한패가 되고 마는 사람들이 나온다.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차마 관계를 끊지는 못하며, 상대의 말에 불만과 분열을 경험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그의 편에 서기로 한다. 어딘가 수상하고 불가피해 보이는 이들의 연대를 우리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돌보는 행동이 되고, 누군가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결정하는 것이 결국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극중 시터로서 극진하게 할머니들을 돌보는 희지에게 한 보호자가 한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적이 나 역시 있었기에 마냥 소설 속 이야기 같지 않게 느껴졌다. 동시대의 가장 최전선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소연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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