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관 TURN 10
유진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가 무슨 기준으로 누구를 살릴지를 결정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나는 어떤 결정이 나오더라도 공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

주승우의 말에 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정은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편하게 사용하는 말이야. 모두가 만족하는 방법은 없는 법이지. 어떤 사람이 제 가족을 살릴 기회를 포기하냐고.               p.57~58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 죽은 인간을 부활시키는 형벌이 집행되는 시대이다. '전환형'은 살인자를 희생해 살인 피해자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그로 인해 살인 범죄가 80퍼센트 이상 줄었다. 하지만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경찰로 일했던 주승우는 전환기관의 특수감찰부 소속 요원으로 경찰과 검찰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과정을 검증하는 일을 했다. 전환형이란 피해자에게는 부활이지만 살인자에게는 죽음을 의미했기에, 전환형을 잘못 집행했을 경우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피의자의 80퍼센트가 남성이었고,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전환기관에 남자가 들어가 죽고 여자가 살아서 나온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환기관이라는 독재 기관이 매년 남성 수백 명을 살해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생겼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 이게 현대 사회에서 나올 말이냐고, 한 사람을 희생해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다. 물론 살인자들의 목소리다.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될 것을, 자신도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거다. 하지만 피해자의 시신 훼손 정도가 심할 경우 전환을 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전환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훼손시키는 경우도 생기는 것을 보며 인간의 음습한 악의는 그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전환'이라는 것이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SF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현실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이 많다보니 실제로 이런 법집행이 가능하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제대로 심판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이 들 것이다. 




누군가가 부조리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살아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바라보는 것도 고통스러워 죽은 자를 외면하기에 바빴다. 인간은 그런 부조리함에 해결책을 찾으려 했고, 죄를 심판하는 신과 사후 세계를 만들었다. 주승우는 전환과 전환형도 살아남은 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전한 해결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왔다. 여태껏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임무라고 여겼다. 그 임무를 위해서 타협하고 공모했다. 이제는 부딪치고 싸울 때였다.              p.269


이 작품은 죽여 마땅한 사람과 살려 마땅한 사람이 제대로 전환될 수 있도록, 정의를 집행하는 한 요원의 사투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피해자가 여러 명일 때 벌어지는 유족 간의 갈등, 전환이라는 부활을 이용하기 위해 계획된 끔찍한 범죄 등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다른 사건이 펼쳐지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여러 명의 피해자가 발생할 사건의 경우 누구를 전환해 부활시킬지에 관해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가 없다는 점이 여러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재산, 나이, 성별, 가족 등 어떤 것도 기준이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생명은 존귀한 것이니까. 죽은 피해자를 두고 누가 더 가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공정해야 할 일이지만, 그 공정이라는 것 또한 사람이 정해야 하는 기준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부분들 때문에 소설은 더 재미있어진다. 매우 흡입력 있는 이야기였다. 


가장 새로운 이야기로의 가뿐한 귀환, 턴(TURN) 시리즈 열 번째 작품이다. 한국과학문학상, 문윤성 SF문학상 등을 수상했던 유진상 작가의 <전환기관>은 죽은 인간을 되살릴 수 있다는 기발한 설정을 탄탄한 서사와 스릴 넘치는 구성으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이미지가 전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두 사람이 양쪽 전환기에 누워 이어진 호스를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되고, 점차 생명 활동이 멈춘 전환자의 세포가 재생되는 것이다. 딱딱한 제목과 표지 이미지 덕분에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작품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막상 페이지를 넘겨 보면 매우 현실감 넘치는 추리 미스터리 물이라 호불호 없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욕망과 거짓의 진창 속에서 진실을 꺼내고 최상의 정의를 집행하는 과정 속에서 매번 고민하게 만드는 삶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마음,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자, 한계 없는 턴의 이야기, 지금 바로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 뇌를 설계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다중언어의 놀라운 힘
비오리카 마리안 지음, 신견식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본질적으로 언어는 사람들을 다르게 만든다. 언어가 달라지면 자신 안에 잠재된 또 다른 측면이 전면에 드러나고 꺼졌던 다른 정체성이 켜진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외국어를 쓰면 모국어 안에 잠자던 또 다른 자신이 깨어날 수 있다. 또 다른 언어를 배우면 정체성, 기억, 인간관계를 넘어 우주를 구성하는 새로운 방법이 생긴다.              p.30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언어를 만들어 의사소통에 사용해왔다. 현재 세계에는 70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하는데, 놀랍게도 세계 인구는 대부분 둘 이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영어와 중국어는 사용자가 각각 10억 명 이상이며, 힌디어와 스페인어도 각각 5억 명이 넘는다. 인류에게 다중언어 사용은 예외가 아닌 표준이다. 유럽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2가 최소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며, 다중언어 사용이 국가 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도 많다. 우리도 역시 의무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제2외국어를 익혀왔다. 그럼에도 인류는 이제 막 다중언어적 사고를 이해하기 시작한 단계다. 왜 그럴까? 


'심리언어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비오리카 마리안은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다중언어'의 놀라운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 역시 10여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다중언어 사용자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 본래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코드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해준다고 말한다. 언어는 우리 주변 세계의 정보를 처리하고 정리하는 데 쓰는 매우 강력한 도구이다. 현실 인식은 언어체계로 걸러지고, 다른 언어를 배우면 단일언어의 한계에 따른 제약 없이 주변 환경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니 언어가 의사소통과 성찰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부수적인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착각이다. 사실 '현실 세계'는 상당 부분 부의식적으로 집단의 언어 습관 위에 세워져 있으니 말이다. 




다중언어 사용이 우리의 뇌, 지각, 기억, 의사결정, 감정, 창의성에 미치는 강력한 변화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일부 독자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자녀에게 새 언어를 배우게 하기로 마음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 어떻게 단일언어의 장막 뒤편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다른 언어를 배울 최적의 시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다. 두 번째로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p.231


19세기 이탈리아 사제이자 대학 교수였던 주세페 메초판티는 볼로냐 목수의 아들로, 72개 언어를 알고 2주 만에 새 언어를 유창하게 익힐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홍콩의 전 총독 존 보링 경은 200개 언어를 알고 100개는 말할 수 있었다고 하며, 1986년 타계한 프랑스 언어학자 조르주 뒤메질은 200개 이상의 언어를 다양한 수준의 실력으로 말하거나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였던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경은 29개 언어와 수많은 방언을 알았고, 탐험 중에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현대로 오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언어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이다. 그도 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에 통달하고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모국어를 제외하고 한두개 외국어만 할 수 있어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야 늘 갖고 있었지만 막상 실천이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이렇게나 수많은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다중언어' 능력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알게 해주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운동이 몸을 바꿀 수 있듯이 다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정신 활동도 뇌의 물리적 구조를 빚을 수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이중언어 사용자는 전두엽 영역에서 회백질 밀도가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하니 말이다. 이중언어 화자의 제2언어 숙달 정도가 높고 습득 연령이 이를수록 여러 피질 영역에서 회백질 밀도가 더 높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두 개 이상의 언어를 하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연구 결과부터 다중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능력에, 외국어를 사용할 때와 모국어를 쓸 때 달라지는 점 등 언어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너무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드디어 밝혀지는 다중언어의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귀 요정 뿡뿌 1 - 복수의 독방귀 방귀 요정 뿡뿌 1
최도영 지음, 윤담요 그림 / 다산어린이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나는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까부터 배가 아팠기 때문이다. 방귀라면 뀌면 시원할 것 같은데 영 나오질 않아 고민이다. 그러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방귀를 뀌게 된다. 그때였다. '우리 하나, 뱃속에 독가스가 가득하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안녕? 난 뿡뿌루 뿌붕 뿡뿡! 뿌루뿌루 뿌붕 뿡뿡! 이야. 네 뱃속에 살고 있는 방귀 요정이지." 


너무 길고 웃긴 이름이라 대번에 따라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방귀 요정이 그렇게 등장한다. '그냥 뿡뿌라고 불러.'





아무리 봐도 강아지나 토끼처럼 생겼는데, 요정이라니... 궁금해하는 하나에게 뿡뿌는 방굿봉을 신나게 돌리면서 주문을 외운다. 


“뿡뿌루 뿌붕 뿡뿡! 뿌루뿌루 뿌붕 뿡뿡!”


사실 방귀 요정은 방귀를 통해 어린이의 마음속에 쌓인 감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감정 상태에 따라 방귀가 노랑 연기로도, 주황 연기로도 보여지며 고민의 원인이 된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에게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나의 고민을 방귀 요정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긴장되는 일이 있을 때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배가 아팠던 경험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어른들도 이렇게 감정 상태가 몸으로 나타나는데, 아이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해소하지 못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면 몸과 마음에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방귀 수련과 방귀 요가라는 엉뚱하고도 재미있는 설정으로 이야기는 보여지고 있지만, 그 속에 친구에게 받은 상처, 엄마에게 서운했던 마음 등이 쌓여 있었다. 방귀 요정은 그 과정을 통해 감정은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차리고, 적절하게 조절해야 하는 거라는 것을 알려준다. 




공포의 독방귀 수련부터 방귀 복수를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엽게 그려져 있어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이었다. 초등 입학 전후 아이들이 겪는 갈등과 속마음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냈기에 특히 저학년 아이들이 공감하며 읽을 것 같다. 독서의 즐거움과 정서 교육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설정으로 탄생한 감정 동화이기에,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는 또 어떤 아이들의 고민을 담아낼 지 궁금해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가장 재미있어 하는 소리가 방귀 소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작품 속에서 그야말로 원없이 방귀 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몰입이 되고, 이야기에 동화가 되어야 공감하고 깨닫게 될테니 말이다. '세계 최초 냄새 나는 감정 동화'라는 설명이 아주 사랑스러운 이 작품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시간을 가져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약 세상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
마쓰바라 하지메 지음, 정한뉘 옮김 / 나무의마음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는 까마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물론 자유다. 하지만 당당하게 "저런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마저 있다. 물론 까마귀가 인간에게 직접적인 도움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생태계에서 맡은 역할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까마귀는 야생 동물이고, 당연히 생태계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생태학적 지위란 생태계를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서비스라고 생각할 수 있다.             p.25


언젠가 삿포로에 여행을 갔을 때 공원에 까마귀를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Please beware of the crows inside the park. 실제로 까마귀가 시내에서 자주 보였고, 음식을 들고 있으면 따라오거나 물건을 가져간다는 말도 있었다. 까마귀를 가까이서 보게 되면 정말 새카맣고, 몸집도 꽤 큰 편이라 오싹하다. 왜 수많은 문학작품들에서 까마귀를 불길함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렸는지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시 곳곳에서 비둘기를 자주 볼 수 있다면, 일본에는 까마귀가 많은 편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일본의 '까마귀 덕후'인 조류학자가 까마귀가 미움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까마귀는 그 모습때문인지 불길한 이미지로 익숙하고, 사람들에게 기피 동물 취급을 받는 편이다. 이 책은 '만약 까마귀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생태계에서,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 사회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여전히 그대로일까? 아니면 뭔가 크게 변화가 있을까. 까마귀가 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은 수년에 걸쳐 완성한 탐조와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웬만한 공상 과학 영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생태계 속에서 까마귀의 역할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까마귀의 식성과 행동이 수많은 신화와 속설 속에서 인간이 까마귀를 인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짚어 본다. 까마귀가 지붕에 앉으면 불길하다는 믿음은 까마귀가 죽은 고기를 먹이로 삼는 습성과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인상은 고대에서 신화로, 오늘날에는 까마귀에 대한 보편적인 이미지로 단단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저 '까마귀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했을 뿐이다. '까마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 다른 새가 까마귀와 비슷하게 진화한 세상'이라면 어떨까. 그 새도 까마귀처럼 인지 능력이 발달했을까?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동일한 생태적 지위에 적응하고 동일한 진화 과정을 거쳐 동일한 능력을 지닌 생물은 탄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종이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하면서 외형과 생활사가 비슷해지는 현상인 수렴 진화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p.211


문학 작품에도 종종 까마귀가 등장한다. 특히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 유명한데, 그의 시에서 까마귀는 불길한 현실을 냉철하게 알리는 사자로 등장한다. 당시 포는 앵무새를 등장시켜도 상관없었지만, 까마귀는 불길한 새라서 어울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현대의 우리들은 그의 작품 덕분에 까마귀가 불길하게 느껴지는데, 애초에 그런 이유로 등장시킨거라니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사실 까마귀는 잘생겼다, 못생겼다를 떠나서 두렵고 위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 외에 <포켓몬스터>, <귀멸의 칼날>, <고양이의 보은> 등의 작품에서도 까마귀가 중요한 역할을 등장하고 있으니 새삼 까마귀의 존재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백미는 4장에 수록된 '까마귀의 대역 오디션'이 아닐까 싶다. 애초에 이 책의 시작이 '만약 까마귀가 없어진다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럴 경우 까마귀의 대역이 필요해진 것이다.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4장에서는 다양한 조류들이 등장한다. 청소동물이라는 까마귀의 특징을 대신할 콘도르, 독수리, 솔개, 카라카라, 도시에서 사는 동물 중에서 대역으로 찌르레기, 바다직박구리, 머리가 좋은 새 중에서 대역이 나온다면 앵무새... 이런 식으로 까마귀의 특성을 대신할 다른 조류들의 이야기가 쭉 이어져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 문학, 엔터테인먼트, 이름, 학문 등 꽤 많은 영역에서 까마귀가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까마귀의 대역 오디션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펼쳐지는 다양한 새들의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어떤 생물이 사라지면 생태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그 주변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미움받는 조류 한 종'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자연을 향한 시각을 좀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경 쓰이는 사람 - 달달북다 앤솔러지
김화진 외 지음 / 북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반복적인 삶은 괴롭지만, 변화 또한 괴롭다. 그럼에도 그런 괴로움은 한번 겪어볼 만한 것 같다...... 환경을 뒤집을 수 없다면 내면을 뒤집어보면 된다.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요즘 사랑 생각을 많이 한다. 티튀루스 때문이겠지. 철없어 보이겠지만 그래도, 사랑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 지반을 뒤흔드는 듯한 굉장한 변화로서의 사랑은 3개월이면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다른 사랑이 온다. 광기가 잦아든 뒤의 사랑, 또다시 일상이 되는 사랑이.              - 김화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중에서, p.39


서울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 모림은 일에도, 사랑에도 좀처럼 열정을 가질 수가 없다. 회사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다 보면 다들 무언가에 열중해 있고 집중할 일이 있는데, 자신만 그곳에서 동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해 여름 모림의 습관은 아침 8시, 출근길에 떡집에 들르는 거였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떡집이었고, 주로 인절미, 무지개떡, 절편을 돌아가며 샀다. 저녁에 공원 걷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역류성 식도염 증상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생활 습관을 고쳐보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귀여운 혀, 다부진 다리, 그림 같은 꼬리, 너그럽게 접힌 귀까지 개와 함께 산다면 저런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런 개였던 것이다. 개가 너무 귀여워서 남자에게 말을 걸었고, 이름이 약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자가 거의 매일 가던 떡집 사람이었던 거다. 그는 스물여덟이었고, 모림은 서른한 살이었다. 두 사람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감이 없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상태로 떡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공원에서 만난다.  만남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는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김화진 작가님의 작품은 평소에도 즐겨 읽었던 터라 기대하며 읽었다. '이 시대에 사는 곤란과 알 수 없는 사랑의 막막함에 대해, 그런 걸로 켜켜이 쌓인 현재라는 시간에 단단히 눌려 있는 시루떡 속 팥 같은 나'라는 문장처럼 공감되는 대목들이 많아 이번에도 아주 좋았다. 




이 빌어먹을 놈의 연애. 나는 쿠션을 끌어안고 뒤척거리며 곱씹었다. 안 하면 그게 제일 마음 편하련만 또 그건 너무 외로울 것 같으니까. 이다음에 또 누군가를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거기엔 어떤 기대도, 설렘도 없었다. 어릴 땐 그런 과정도 재미있고 투닥투닥 지지고 볶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던 것 같은데, 이젠 나이가 들어 그런가 마냥 피곤하기만 했다. 그냥 어디 가서 돈 주고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서로 맞춰가는 귀찮은 과정 없이 서로 알 거 다 아는 편안한 연인 같은 걸.                - 이유리, '하트 세이버' 중에서, p.362


작은 판형에 컴팩트한 디자인으로 단편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 '달달북다' 시리즈는 가격도 착해서 몇 권 구매해서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시리즈는 2024년 여름부터 1년 동안 12편의 로맨스 단편소설이 나왔었다. 이 책은 그렇게 매달 한 편씩 소개되었던 로맨스 단편소설 시리즈를 한데 묶은 소설집이다. 로맨스×칙릿, 로맨스×퀴어, 로맨스×하이틴, 로맨스×비일상이라는 키워드로 각각 세 편씩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보여 주었다. 김화진, 한정현, 이희주, 예소연, 백온유,이유리, 이미상 등 지금 가장 핫한 12인의 젊은 작가들이 쓴 작품이라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 나온 <신경 쓰이는 사람>은 그렇게 따로 구매해서 읽어야 했던 책 12권이 함께 수록된 거라 종합선물세트같은 느낌이었다. 달달북다 시리즈를 읽어본 적이 있다면, 꼭 이 책으로 소장하길 권해주고 싶다.


김화진 작가님의 작품을 비롯해서 사내연애 이야기를 다룬 장진영 작가님의 작품도 재미있었고, 유령을 보게 된 소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나는 이야기인 이희주 작가님의 사랑도 흥미로웠다. 열일곱 소년 소녀의 사랑을 그린 백온유 작가님의 작품도 좋았고, 삶 대신 잠을 선택해온 스무 살 '잠보'의 첫사랑을 보여준 이미상 작가님의 캐릭터도 기억에 남는다. 각각의 작품에는 이야기 시작 전에 '사랑'에 대한 제각각의 정의가 쓰여 있다. 김화진 작가님은 '경솔하게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 중 가장 경솔하게 선택(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고, 한정현 작가님은 '자꾸만 멈춰 건너온 곳을 돌아보게 되지만 그 시작점을 잊지도 못하는 이미 지나온 횡단보도'라고 썼다. 이선진 작가님은 '뭉근한 온기로 서로의 마음과 마음 사이가 몽글몽글해지는 것'이라 했고, 예소연 작가님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꾸 하게 만듦'이라고 표현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예소연 작가님의 정의에 아주 공감했다. 그러게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애써 자꾸 하게 되는 거냔 말이다. 하핫. 사랑의 모양과 의미는 개인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빛깔이 되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열두 명의 작가들이 풀어내는 사랑 이야기 또한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자, 지금 곁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