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는 되살아난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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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연구소 건물을 본 순간 마키하타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그것은 피로 얼룩진 살해 현장이나 시신이 묻혀 있던 자리에 서 있을 때 느끼는 섬뜩한 감각과 비슷했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그 감각을 분명 '불길함'이라고 표현했으리라. 평소 영혼이나 영적인 기운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 마키하타였지만 오랜 세월 경험을 쌓으며 몸에 밴 육감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p.22


국도변에 있는 마을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늪지에 유기된 시신이 발견된다. 단순히 머리와 사지가 잘린 정도가 아니라, 살점과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코트와 셔츠의 잔해마저 없었다면 도저히 사람의 시신이라고 유추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1월이라 부패한 시신에서 나는 악취는 덜했지만, 늪에서 피어오르는 썩은 진흙 냄새와 어우러져 또 다른 끔찍한 악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현장에 수많은 검은 깃털이 함께 흩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끔찍한 광경에 기묘한 색채를 더해주었다. 과거의 늪지를 중심으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고, 그래서 주변이 까마귀들의 서식지였던 것이다. 


조각조각 해체되어 보란 듯이 방치된 시신, 자신의 범행을 마치 예술작품인 양 연출해 최대한 많은 사람의 눈에 띄게 한 것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살인은 아니었다. 경찰은 코트 주머니에 있던 소지품을 토대로 그 시신이 근처 제약회사에 다니던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기류 다카시라는 그 인물은 독일의 스턴버그 제약회사가 일본에 만든 자사 연구소에서 다녔던 것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 연구소는 두 달 전에 문을 닫은 상태였고, 연구소가 폐쇄된 뒤로는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사방을 성벽 같은 담으로 둘러싸고 철저하게 보안을 지켰던 그곳은 자물쇠로 잠긴 상태였다. 선량하고 성실했던 연구원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된 것일까. 이야기는 제약회사에서 개발하던 신종 마약을 중심으로 폐쇄된 연구소의 비밀을 파헤치는 구성으로 전개된다. 사건 현장과 연구소를 맴도는 불길한 까마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류 다카시는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착한 사람이 맞았던 건지, 그가 스스로를 마녀의 후예라고 했던 말의 뜻은 뭔지 이야기는 불길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조성하며 끝까지 휘몰아치듯 달려간다. 




우직한 사람을 비웃기란 쉽다. 그러나 우직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과 와타세가 구조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그 어려운 길 위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한시라도 빨리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p.238


이 작품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초기작이다. 그의 데뷔작인 <안녕, 드뷔시>보다 더 이른 시점에 스인 작품이라고 하니, 그가 미스터리 작가로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된 초석이 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은 국내에 꽤나 많이 출간되어 있는데, 최근작들 몇몇 빼고는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와타세 경부 시리즈,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비웃는 숙녀 시리즈,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등 시리즈 작품들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미스터리를 쓰는 법>이라는 글쓰기 책도 있었다. 법의학 교실, 법정 미스터리, 사회파 미스터리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미스터리 장르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는데, 미스터리가 아닌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도 있어 매번 놀라웠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탄탄한 구성과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빠른 전개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작가이다. 48세의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해서, 그 후 7년간 이야기를 28편이나 써내는 왕성한 집필 속도를 보자면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제는 히가시노 게이고만큼이나 믿고 보는 작가가 된 것 같다. 게다가 본격 미스터리, 서스펜스물, 법정 미스터리, 경찰 소설, 안락의자 탐정 소설에 이어 코미디물까지 그야말로 장르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쓰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그 동안 나카아먀 시치리의 작품들을 읽어 왔다면 이번 작품에서 와타세 경부와 고테가와의 등장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을 것 같다. <테미스의 검>을 비롯한 와타세 경부 시리즈를 통해서, 그리고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를 비롯해서 <속죄의 소나타>, <히포크라테스 선서> 등 다양한 작품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내내 감탄했다. 대체 나카야마 시치리는 첫 작품부터 이렇게 몰입도 높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걸까. 거장의 초기작이 가진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작품이니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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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 - 기후 붕괴 현장에서 마주친 인간과 비인간동물들
남종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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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30 대 6 경기가 왜 기후 변화의 참사라는 거죠?”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가 친다고 합시다. 그때 그 공이 홈런이 될지, 플라이 아웃이 될지는 물리학적으로 2가지 영향을 받아요. 하나는 공의 탄성력, 다른 하나는 대기라는 매질이요. 그런데 대기 온도가 오르면 공기의 밀도가 낮아집니다. 밀도가 낮아진 공기에서는? 공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겠죠. 지구 온난화 시대에는 홈런이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p.120


우리는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온난화는 계속될 것이고, 해수면 상승은 이어질 것이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들을 피할 길이 없어질 것이다. 과학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해 인류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예측한 것이 이십 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대응은 미진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많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기후 변화를 비롯해 지구 환경 문제가 심각해 진 상황이다. 우리는 멸종으로 내몰리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인 환경 저널리스트 남종영은 세계의 기후 변화 대응이 미진한 이유 중 하나로 서사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서사의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홈스와 왓슨이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을 차려 각종 제보를 통해 북극과 남극, 태평양과 동해, 아마존과 다카를 오가며 조사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목표는 '엉망진창이 된 지구를 자유롭고 조화로운 행성으로 바꾸는 것'이다. 각각의 장은 이들이 제안받은 사건 파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다이어트약 먹는 북극곰 사건이다. 캐나다 북극권의 작은 마을 처칠의 북극곰들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제보다. 비쩍 마른 북극곰들이 떠난 자리에서 다이어트약이 발견되고 있다는데 어떻게 된 영문일까? 북극권은 북위 66.5도 북쪽의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남극은 육지이지만 북극은 바다이다. 깨지고 부서지고 다시 붙어서 얼고.. 시시각각, 그리고 계절마다 움직이는 얼음의 바다이다. 그런데 바다가 얼지 않는다면, 북극곰들이 사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젠가 삐쩍 마른 북극곰이 곧 죽을 것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며 느리게 걷고 있던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걸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북극곰이 바다에 나가 사냥할 수 있는 날이 매년 하루씩 줄어들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자꾸 북극에서 제보가 오는 거죠?"

"기후를 움직이는 핵심 엔진이기 때문 아닐까? 그린란드의 빙하와 북극해의 바다얼음이 녹을수록 지구의 바다와 대기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지금의 기상 이변도 생기는 거고."

홈스와 왓슨은 짐을 챙겼습니다.

"근데 어디로 가죠?"

"북극의 가장 안쪽, 도달불능점에 가 보세. 등허리로 팔을 뻗어봐. 팔이 닿을락 말락 한 그 지점이야.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곳."                  p.204~205


전국이 열대야로 신음하던 7월 말의 어느 밤, 백두산 타이거즈와 지리산 베어스의 야구 경기가 한창이다. 더위에 지친 투수들은 도무지 아웃 하나를 잡지 못했고, 결국 6대 30이라는 사상 최다 득점패라는 아쉬운 성적을 내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다 기후 변화가 부른 참사라면 어떨까. 메이저리그에 홈런이 늘고 있고, 한국에서도 타고투저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이렇게 홈런이 많아지고 대량 득점 경기가 많아지는 것이 폭염 때문이라는 거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대기 온도가 오르면 공기의 밀도가 낮아지고, 밀도가 낮아진 공기에서는 공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지구 온난화 시대에는 홈런이 많아지는 게 당연하다는 것. 돔 구장이 아닌 야외 구장에서 하루 최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홈런 수가 1.95% 늘어난다는 통계 결과도 있다고 하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기후 변화가 일상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거다. 전례 없는 온실가스 증가로 지구의 기후 시스템은 교란되고 있고, 한여름 폭염도 매년 잦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지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북극곰들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전 세계 기후 시민을 배신한다고? 슈퍼 저탄소 소를 만들기 위해 아마존의 열대 우림을 파괴하다니 말이 되나? 기후 변화로 인해 이번 세기 안에 60억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데, 기후 재난을 막을 방법을 과학자들이 찾을 수 있을까? 등 바로 지금의 기후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지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었다. 그 밖에도 지구에 곧 빙하기가 도래할 거라는 주장, 아이슬란드의 북극곰 사냥 열풍, 동해에 명태가 사라진 이유, 바나나가 완전히 멸종될 거라는 설 등 과학적 근거 위에 상상력을 더해 기후 불평등과 동물권, 기술과 자본의 문제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부터 어른까지 기후 문해력과 생태적 감수성을 함께 키울 수 있도록 쓰인 이 책은 '기후 픽션'이라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누구나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 장점이다. 기후 변화를 둘러싼 진실과 과장,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 자본, 권력의 역학 관계를 재미있는 삽화와 사진 자료들을 통해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고 있어 기후 변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다. 환경 위기 최전선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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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의 어둠
사와무라 이치 지음, 김진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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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죄송한데 어머님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아까부터 혼자 있었는데요."

"고, 고객님, 무슨 농담을 하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계속 같이 계셨잖아요."

"네에?"

"왜 그렇게 놀라세요? 지금도 옆에 계시는데. 보세요, 분명히 계시잖아요."                  - '부동산 임장' 중에서, p.100


나는 중개인과 함께 집을 보러 다니는 중이다. 집에서는 잠만 자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까다롭게 볼 생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죄다 '사연 있어 보이는 집'들 뿐이다. 복층 난간에 누가 긁어놓은 것 같은 흠집이 있다거나, 벽장 내부를 새하얗게 칠해두었다거나, 한쪽 마룻바닥만 쑥 들어가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피 매물처럼 보이는 집들이다. 그러다 드디어 가격대에 맞고, 마음에 드는 집을 찾게 된다. 묘지 옆인데 괜찮냐는 중개인의 말에 집이 넓고 깔끔해서 상관없다고 계약서를 작성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중개인이 어머님도 동의하시냐고 묻는다. 자신은 처음부터 혼자 나왔는데, 대체 무슨 소리일까. 중개인은 상복같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지금도 옆에서 방글방글 웃고 있다고 처음부터 같이 오지 않았냐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중학교 3학년 무렵에 가족들과 2박 3일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부모님과 나, 남동생까지 해서 네 명이 서일본의 어느 산간에 있는 작은 호텔에 갔다. 30년 전이라 당시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할일이 없어 방에서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볼 수 있다고 해서 동물이 나오는 모험 영화와 고질라를 빌려 온다. 그런데 기기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자, 갑자기 화면이 확 밝아지더니 객실과 똑같은 형태의 일본식 방이 나왔다. 화면 속 누워 있던 여자가 이불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얘, 사토루. 라고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얼굴이 부딪칠 정도로 카메라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는 계속 사토루를 부른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화면 속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동생까지 고질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족들은 내가 봤던 영상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영화를 보다 내가 잠이 든 것일까? 대체 그 이상한 영상의 정체는 뭐였을까. 




"죄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으셔서요.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안 되고. 이런 시간이라 정말 무슨 일이 생긴 줄만 알고......"

"장난치지 마세요. 늘 가던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갔잖아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드님은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그게 무슨......"                  - '다리 아래' 중에서, p.140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내는 작품을 보여주었던 사와무라 이치의 신작은 초단편 괴담집이다. <보기왕이 온다>, <즈우노메 인형>, 《시시리바의 집》으로 이어지는 히가 자매 시리즈로 만났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신작이라 기대하며 읽었다. 사와무라 이치의 전작들이 꽤나 오싹하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는데, 초단편으로 만나는 호러는 또 어떤 느낌일지, 이번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냈던 <보기왕이 온다>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파괴해가는 정체불명의 괴물 ‘보기왕’이라는 존재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틈'에서 비롯된 공포를 그려냈었다. <즈우노메 인형>도 전작만큼이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어 준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중반 이후 '저주로 사람을 죽이는 도시전설'이라는 것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더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시시리바의 집>은 고딕 호러 장르의 대표적인 소재인 ‘귀신 들린 집’을 사와무라 이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히가 자매 시리즈는 두 편이 더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같이 오싹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짧게는 2-3쪽, 길게는 20쪽 내외의 초단편 21편을 통해 일상 속 평범한 공간을 한순간에 오싹한 장소로 바꿔 버린다. 서사가 완벽한 구성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가 갑작스럽게 끝나 버리는 초단편이기 때문에 '진짜'처럼 느껴지는 공포가 있다. 잘 만든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짧은 이야기라 그만큼 몰입도도 뛰어나고, 여운도 길게 남는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은 혼란이, 그 후에는 자꾸만 생각나면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누군가 실제로 겪었던 경험이나 나에게도 일어날 법한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초단편으로 쓰인 괴담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출퇴근길 전철에서 목격한 이상한 현상,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경험,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 어느 날부터 조금씩 다르게 보였던 일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낯설고 기묘한 일들은 순식간에 무서운 상상 속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등줄기를 따라 오싹한 한기가 지나가고,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진짜 무서운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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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 - 탄자니아 여행그림책
나태주 지음 / 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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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보지 않은 사람과는 말하지 못한다/더구나 보지 않고 들어보지 않고/느껴보지 않은 사람과는/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백두산이 그러하고/그랜드캐니언이 그러하고/데스밸리가 그러하고/시베리아 들판이 그러하듯이//정이나 궁금하시면 21시간 비행기 타고/한번 와보시라              - '정이나 궁금하면' 중에서, p.68


달 출판사의 여행그림책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이었던 <좋아서 그래>는 이병률 시인의 파리 편이었고, 이번에 만난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는 나태주 시인의 탄자니아 편이다. 이 책에는 나태주 시인의 신작 시 134편과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화 62점이 수록되어 있다. 시인이 직접 그린 산과 나무, 꽃과 마을의 풍경들도 너무 좋고, 윤문영 화백의 인물화 들도 시와 근사하게 잘 어울린다. 시인이 지구 반대편 탄자니아로 간 것은 단순한 관광여행이 아니라 오랜 시간 후원해온 탄자니아의 한 소녀를 만나러 간 것이다. 월드비전 시찰단의 일원으로 함께 간 것이라 식수시설을 방문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하기도 하며 일곱 날을 보낸다. 


나태주 시인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살포시 가져와 시로 써 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그는 시를 통해서 세상 곳곳에 높여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애틋한 사랑에게 안녕을 전하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제나 참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는 '우리네 인생을 바꾸는 터닝 포인트를 질병, 실패, 독서, 여행 네 가지로 본다'고 말한다. 질병과 실패는 위험한 일이라서 권할 만한 것이 못 되고, 독서와 여행을 좋은 방법이라 권한다고 말한다. 이번에 다녀온 탄자니아여행 또한 그랬는데, 좀 더 일찍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과 느낌이 강했다고, 그만큼 깊이 있는 여행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여행 그림책 속에 그러한 마음들이 페이지마다 묻어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돌아보면 금방 떠나온 그곳이 천국이 아니었을까? 느껴진다는 시인의 말은 그래서 우리네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겪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름다운 추억, 좋았던 기억들이 있기에, 또 언젠가 떠날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에 어떻게든 하루를 버티고, 또 내일을 살아가는 것일테니 말이다. 




누군가는 자기가 자기한테 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인도에 오래 머물다 왔노라 고백했지만/나는 나를 버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아프리카/먼 나라 땅 탄자니아에 왔다고 말하고 싶다/나도 이제 꽉 찬 나이 80/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비탈진 언덕/찌꺼기를 너무 많이 남기지 말고 떠나야지/그러려면 더 많이 버려야지/버리는 것만이 진정 내가 갖는 것이지             - '마음에 새긴다' 중에서, p.100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이 탄자니아에서 보낸 시간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붉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흙먼지와 그 속에서도 예쁘고 싱싱하고 깨끗하게 피어난 꽃들, 선인장도 말라죽는 땅에서도 견디며 사는 바오밥나무들, 가시나무 우거진 산 비탈길을 넘어 만난 소와 염소와 당나귀 떼,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벌판 사막길에 느닷없이 열린 샘물... 그리고 먼지와 바람과 햇빛,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 직접 와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낸 시와 담백한 그림들 덕분에 꼬박 21시간을 날아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로 가든 여행을 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여기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은 마음. 그런데 시인의 말처럼 여행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네 인생 자체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모두 그렇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도서 구입 시 필사 노트도 받을 수 있으니 놓치지 말아야겠다. 필사 노트가 제법 두툼한 편인데다, 중간 중간 연필화들도 삽입되어 있어 시를 필사하며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와 짧은 분량으로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어 시를 잘 모르더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투도 시만큼이나 다정해서 노시인이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가 담백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필사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어렵지 않고, 직관적으로 쉽게 와 닿는 시의 언어들이 필사를 하는 동안 마음 속에 여운처럼 남을 테니 말이다. 여행그림책 시리즈는 천선란 작가의 뉴욕, 정세랑 작가의 방콕, 고선경 시인의 도쿄 편이 예정되어 있다. 시리즈로 모아두고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고선경 시인의 도쿄 편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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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천사 같은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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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은 사진들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갑작스레 우울한 감정이 치밀어 동작이 느려졌다. 그 사진을 찬찬히 보기 전까지는 오고먼은 그에게 실체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오고먼이 인간으로 다가왔다. 아내와 아이들, 집과 개를 사랑했으며 자기 일을 열심히 한 남자, 마음이 너무 여려서 비 오는 밤길에 서 있는 히치하이커를 외면하지 못했지만 강도에 저항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했던 남자.               p.109


2월 중순, 폭풍우가 치던 밤이었다. 겨울 내내 비가 많이 내렸던 터라 마을에 있던 강도 수위가 많이 올라간 상태였다. 한 남자의 차가 다리의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강으로 떨어졌는데, 이틀 후 물이 빠지고 나서야 발견됐다. 문에 걸려 있던 천조각에 핏자국이 있었고, 그걸로 남자의 신원이 판명된다. 남자는 정유회사 경리부에서 일하는 오고먼이었고, 그날 밤에 자신이 장부에 실수를 해서 현장 사무실에 확인하러 가야한다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아내가 남편이 집을 나설 때 입고 있던 셔츠 조각을 확인했고, 경찰은 오고먼이 외지인을 도우려다 살해당한 게 아닌가 추측한다. 하지만 범인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고, 오고먼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도, 피해자도 완전히 사라져버렸기에, 사건은 미해결로 남게 된다. 




이야기는 도박으로 일자리, 차, 옷, 여자친구도 다 잃어버린 채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남게 된 사립탐정 퀸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저귀는 새 한 마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하나 없는 황야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근처에 있는 신흥종교단체로부터 도움을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종교단체에 있던 축복 자매는 그를 기꺼이 맞이해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우연히 퀸이 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외부인과 교류를 금지한다’는 교단의 규율을 어기고 그에게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퀸 씨가 거기 가서 패트릭 오고먼이라는 남자를 찾아줬으면 좋겠어요." 축복 자매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내 달라고, 몰래 숨겨둔 백이십 달러를 그에게 지불한다. 


그렇게 퀸은 오고먼을 찾아 그의 주소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전화로 나눈 첫 대화는 오고먼이 오 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퀸은 오고먼의 행적을 찾기 시작하고, 단순한 실종 사건처럼 보였던 의뢰는 점점 충격적인 진실들이 밝혀지며 복잡해진다. 과연 오고먼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실종된 남자와 축복 자매는 어떤 관계일까? 오고먼은 이미 죽은 사람인 걸까? 축복 자매는 왜 퀸에게 이런 의뢰를 한 것일까? 




자매는 갑자기 고통인지 항의인지 모를 비명을 내뱉었다. 

"그 사람이 참회했다고 믿으셨죠, 자매님. 그래서 다시는 살인하지 않을 거라고."

또 한 번의 비명. 처음보다 더 격렬한 이 비명은 불의한 일에 분노한 아이의 울음 같았다. 분노는 오해일 리가 없었지만, 퀸은 그 감정이 이런 질문을 하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배신을 한 살인자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제삼자를 향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p.372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 40번째 작품이다. 2012년에 시작되어 꽤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오고 있는 시리즈라 개인적으로 좋아하며 챙겨보고 있다. 본격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서스펜스, 스릴러, 유머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와 다채로운 걸작들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로 소개되었다. 로런스 블록, 로스 맥도널드, 셜리 잭슨, 조지핀 테이, 존 딕슨 카 등 세계 미스터리 거장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아주 귀한 시리즈이다. 심리 스릴러의 대가이자 20세기 최고의 여성 범죄소설가 마거릿 밀러의 작품도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로 두 권이 소개되었다. 마거릿 밀러가 전성기 때 쓴 두 작품 <엿듣는 벽>과 <내 무덤에 묻힌 사람>이다.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 덕분에 고전 미스터리 작품들을 꾸준히 만날 수 있어 참 좋다. 



책의 뒷 날개에 '미스터리를 쓰는 커플들'이라는 부분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마거릿 밀러의 남편은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대가인 로스 맥도널드이다. 20세기 중반 미국 추리소설계의 거장 부부에 이어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집필한 스웨덴의 작가 커플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도 있다. 그리고 일본의 장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부부인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마성의 아이> 등을 쓴 오노 후유미도 있다. 부부가 둘 다 유명 작가라는 점은 정말 부럽기도 하고, 특별한 것 같다. 두 작가의 작품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재미있고 말이다. 


이번에 만난 <얼마나 천사 같은가>는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폐쇄적인 종교단체를 배경으로 오래된 실종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사립 탐정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워낙 심리 묘사에 뛰어난 작가이다보니 심리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맹목적인 믿음과 숨겨진 광기, 불안한 마음과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이 어우러져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감이 은근하게 깔려 있는 이야기라 숨죽이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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