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 여행자-되기 둘이서 3
백가경.황유지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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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집으로부터 독립한 나는 예산에 맞춰 적당히 괜찮은 집(이라고 말하지만 방)을 빌리고 그 안에 적당히 어울리는 가구와 소품을 사서 넣었다. 6개월에 한 번씩 집 근처 요가원 정기권을 구매하고 매달 공과금을 이체하며 시간이 없어서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부지런히 주문해 쌓아 둔다. 나의 빌린 집에선 세상의 속도보다 비교적 내게 맞추어 돌아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시계가 조용히 돌아간다. 샀던 것을 뜯고 살 것을 궁리하며 살 수 있는 것을 꿈꾸는, 내가 빌린 집.               p.82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열린책들의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의 세 번째 책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시인 이훤의 <고상하고 천박하게>,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의 <우리 같은 방>은 에 이어 세 번째 책은 시인 백가경과 문학평론가 황유지의 <관내 여행자-되기>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시인으로, 또 문학평론가로 첫발을 떼게 되는 순간을 함께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좋은 동료이자 속 깊은 친구가 된다. 


이번 작품의 주제는 <도시-관통>이다. 여기에서 <관>은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자 공간/현장을 의미한다. 두 저자는 인천, 의정부, 안산, 이태원, 광주, 서대문 등의 장소를 방문하고, 각자의 감상을 글로 남긴다. 함께 걷고 따로 사유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섞었다. 덕분에 각 장소마다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사색이 담긴 두 편의 글을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사회와 개인이라는 공동의 기억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관계된 것에 대한 사유는 넓고, 깊고, 진지하다. 사회적 참사와 재난의 현장 등 우리가 잊고 지냈던 아픔의 공간에서 슬픔을 마주하며 공간을 기록하기도 한다. 우리는 많은 <관>으로 삶을 지탱하고, 어떤 땅에 서든 시간은 우리를 통과한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를 통과하고 관통한 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일으킴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유년을 지나며 구멍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게 결핍이란 단어와 동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제 나는 구멍을 결핍과 치환하지 않는다. 세계의 틈을 메우려는 인간의 욕망이 낭만주의를 탄생시켰듯, 구멍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복원하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애초에 구멍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구멍을 메우면 구멍은 존재할 수 없다. 어딘가 뻥 뚫린 구멍을 가졌다는 것은 완벽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신 그쪽으로 난 깊은 마음, 깊숙이 듣는 귀, 오래 들여다보는 눈과 같이 내 안의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낸다.             p.266


시간을 죽이기 위해 두루 다녔던 도서관, 미술관, 영화관, 박물관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는 시인은 도시의 건축물에 유달리 관심이 있다. 발아래 축적된 것에 골똘한 문학평론가에게 <관>은 상자일 때도 있고, 건물일 때도 있으며, 수로나 지하도의 형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위해 새운 관 건축, 지하 아래로 흐르는 지하철도 관, 수도관, 가스관, 마지막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관들이 있는 곳까지 걸으며 공기 속에 흩어진 고통의 미립자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살아간다. 


이 책은 수도권 권역이면서 바다를 품고 있는 곳인 인천에서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여성이었던 성냥 공장과 2백여 명의 여성이 한날한시에 기업과 공권력으로부터 당했던 동일방직 사건에 대해 사유한다. 한여름의 의정부에서는 미군들을 상대로 성매매업에 종사하던 여성들의 성병 진료소였던 두레방에 가보고,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안산에서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는 낭독회에 참석하고, 이태원 골목에서 159명의 이름을 기억한다. 두 저자가 각자 사는 집과 동네에 대한 사유도 있었고, 일하는 공간인 사무실에 대한 글도 있었다. 찰나의 지옥과 찰나의 천국이 번갈아 일상을 뒤흔드는 곳, 매번 좋은 마음으로 나섰다가 언짢은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산책길, 사람의 손이 닿은 곳마다 추레하고 조악해지는 집 앞 공원의 걷어낸 자리, 무언가를 몰아붙이는 마감의 공간, 이태원에서 새벽에 택시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오해 받았던 심야 택시, 폭력과 욕망이 뒤섞인 사무실이라는 공간 등 다양한 장소에 대한 사유로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쓰였음에도 결코 가볍지 않아서 더 좋았던 책이다.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쓰는 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는 또 어떤 사유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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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합성 인간 - 낮과 밤이 바뀐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생체리듬과 빛의 과학
린 피플스 지음, 김초원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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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생명체는 인공 시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적해왔다. 생명은 하늘을 가르는 태양의 하루 궤적, 계절의 변화, 달의 위상, 조수 등 일정한 환경 주기와 조화를 이루며 성장했고, 그 결과 생명체는 진화를 거쳐 이 주기에 한발 앞설 수 있는 생물학적 시간 유지 장치를 만들어냈다. 생명체는 이를 통해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대비하게 되었고, 본능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에 유리한 때와 불리한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p.54


약 45억 년 전, 태양계가 형성되는 동안 수많은 충돌과 붕괴가 일어나면서 지구는 규칙적인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를 갖게 되었다. 지구는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하게 되었고, 달이 형성되고 지구의 축이 기울어지면서 북반구와 남반구에 계절이 생기게 되었다.. 달의 중력은 지구의 기울어진 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고, 음력에 따라 조류를 바꾸며 규칙적으로 밀물과 썰물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구가 출현한 지 10억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생명체는 이 피할 수 없는 하루, 보름, 계절, 한 해 주기에 맞춰 진화하기 시작했다. 생존하려면 지구의 주기적인 변화를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유기체는 규칙적인 리듬을 생성할 수 있는 내부 시계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바로 그 우리 몸 속의 작고 놀라운 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의 과학 전문 기자 린 피플스는 인간 세포에 있는 작은 시계와 그것을 조율하는 햇빛의 놀라운 역할에 대해 주목한다. 생체시계는 우리가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휴식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 단서를 찾아 우리 몸의 내부 시계를 태양에 동기화하려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인공조명, 시차, 인위적인 시간 조작, 대기오염, 야식 같은 여러 요소로 생체시계를 끊임없이 교란시켜 우리 몸이 가진 본래의 리듬을 잃게 한다. 이는 수면을 방해하고, 생산성을 떨어뜨리며 비만, 심장병, 탈모, 소화기 장애, 우울증 같은 질병의 위험을 높인다. 그래서 저자는 일주기 과학 연구를 위해 땅속 깊이 묻힌 창문 하나 없는 벙커에서 열흘간 실험에 나선다. 그 어떤 외부 장치를 통해 시간의 경과를 알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온전히 몸 안의 시간 유지 시스템에 기대보기로 한 것이다. 과연 저자의 생체시계들은 40년 넘게 유지해온 하루의 경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책은 벙커에서의 첫 번째 날부터 시작해 저자가 직접 경험한 일주기 과학의 흥미로운 실험으로 포문을 연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몸속 시계를 방치하여 오늘날의 위험을 자초했다. 계절과 달과 태양의 주기 같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자연적 리듬과의 연결은 끊어졌고, 이 아름다운 푸른 별에서 우리와 미래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의 양과 질은 위태로워졌다.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연결할 때가 왔다. 이제 우리 안의 생체시계를 재설정하고 회복할 시간이다.              p.468


저자는 말한다. 현대사회가 생체시계에 가하는 공격은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생체시계와 반대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야 그 결과를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일주기 교란의 여파는 비만, 심장병, 탈모, 소화기 장애, 우울증 같은 질병의 위험을 높이는 것을 물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주기 리듬의 영향이 이토록 크다면 왜 지금껏 아무도 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왜 학교에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 곳곳에서는 작은 시계들의 똑딱거림이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흐트러진 생체리듬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모든 생체시계는 각기 다른 리듬을 연주하기 때문에, 좋고 나쁜 시간은 사람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자신의 생체시계 읽는 법을 익히면 수면을 개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또한 일주기 과학을 이용해 하루 일정을 조정해 생산성과 능률을 높일 수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실제 일상 속에서 실천 가능한 방법들을 제시해준다. 우리 몸의 어긋나 있는 시계를 재설정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이삼십 분이라도 집중적으로 햇볕을 쬐는 것을 시작으로 규칙적인 식사 시간을 지키고, 디지털 화면이나 인공조명에 노출되는 시간을 줄이고, 멜라토닌 보충제 등 영양제를 활용하거나, 카페인을 줄이는 등의 작은 방법들이 생체리듬을 되살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놀고, 먹고, 일하기 좋은 시간이 따로 있듯이 인체가 약물을 처리하고, 바이러스와 싸우고, 면역력을 키우고, 수술을 견뎌내기 좋은 시간도 따로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한 일주기 과학이 결국 인류 보건과 환경의 지속 가능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생체리듬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발해지고,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도 조금씩 실천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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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 우울증 걸린 런던 정신과 의사의 마음 소생 일지
벤지 워터하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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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에서는 어떤 것에도 100퍼센트 확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정신과 의사는 항상 회색 구름 속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가끔 사이키델릭한 광기의 색이 주변을 밝히곤 한다. 정신 질환 사례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상만 해도 수천 가지 조합이 존재한다. 데이미언의 '비전형적인 증상'은 이상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을 전문으로 하는 게 우리 직업 아닌가?             p.176~177


영국 NHS 정신과 의사 벤지 워터하우스는 어느 날 병원에 가서 항우울제를 처방받는다. 처방전에는 '플루옥세틴 20밀리그램 1일 1회 복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신이 날마다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바로 그 약이다. 극적으로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상황에서 전천후, 다목적으로 쓰는 정신의학계의 아스피린 같은 약이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가 어쩌다 우울증에 걸린 걸까. 이 책은 벤지 워터하우스가 영국의 공공 의료 기관 NHS의 정신과 의사로 일한 10년을 담은 회고록이다. 


날마다 수백 명의 정신과 의사가 런던 동서남북 전역에서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돌본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달라진다. 영국 수도의 세 자치구에 사는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커버하는 관할 구역에서 밤 근무를 하는 의사는 다섯 명뿐이다. 저자는 그날 당직 근무를 서던 중이었다. 새벽 4시, 무선호출기가 울린다. 저자는 호출기에 뜬 번호를 전화기 다이얼에 찍는다. 환자를 하나 보내겠다는 응급실 수간호사의 연락이었는데, '35세, '자살 다리'에서 뛰어내림'이라는 정보를 가진 환자였다. 운 좋게 가시덤불에 떨어져 얕은 자상을 입고 성형외과에서 처치 후, 손목 골절은 정형외과에서 치료했고, 이제 정신과 차례라는 거였다. 문제는 NHS 번호를 확인했더니 이름이 떴고, 자신이 아는 이름이었다는 거다. 저자는 자신의 환자가 자살 미수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정신과 수련의로 일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우울증을 진단받는다. 




"조지프, 정신 질환이 감염병처럼 옮는 병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뭔가를 흡수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혈관 외과에서 일할 때는 근무가 끝나고 나면 매일 수술복을 빨았어요. 썩은 생선 냄새가 났거든요. 소화기 내과에서 일할 때는 냄새가 어땠을지 짐작하시겠죠. 하지만 정신과에서는 공기 중에 사람들의 고통이 떠다녀요. 그런 고통은 세탁기에 옷을 빤다고 사라지지 않고 늘 따라다녀요."

조지프는 내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고통을 일부 흡수하는 게 다른 사람을 돕는 대가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말한다.             p.359


이 책은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 체계부터 다양한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에피소드와 스스로 우울증을 앓으면서 겪게 된 내밀한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날마다 환자에게 처방하던 약을 처방받고 나서야 마음의 고통이란 뇌의 신경학적 불균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근원이 남아 있는 한 항우울제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의사로서 환자와 교감하는 동시에 환자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펼쳐지는 고뇌와 딜레마의 여정은 깊이 있는 공감과 이해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우울증은 '화학적 불균형'이 원인이고, 양극성 장애는 창의적 천재를 낳고, 조현병은 '분열된 뇌를 가진' 도끼를 휘두르는 살인자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가 말한 그대로 생각했었다. 정신 질환은 다리 골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정신 질환은 어쩐지 골치 아프고, 꺼림칙하고, 숨겨야 하거나 피해야 하는 두려운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나서야 진단명에 가려진 환자들의 복잡한 사연과 상처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컨베이어 벨트 위 과일에 스티커를 붙이듯이 환자들의 증상만 보고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같은 진단을 내렸던 과거와는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신 병동이라는 가장 특수한 공간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의 살피게 된다. 이 책이 더욱 특별한 것은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약물 남용 장애 등 심각한 질환을 앓는 중증 환자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어둡고 무겁지 않고 일종의 블랙코미디처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로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거나, 불안한 일이 생기면 마약이나 알코올, 자해를 시도하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 등 대부분 강제 입원하거나 여러 번 응급실을 들락 거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이 등장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연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정신의학의 실제 현장을 생생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 있고, 그것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정신과 의사의 유쾌하고, 신랄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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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에다마처럼 모시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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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에다마님을 모시는 건 망것을 잠재우기 위해서야."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 뒤에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작은 목소시로 가르쳐주었다.

"마을을 굶주림에서 구해주시는 당식선 주위에도 실은 망것이 우글우글 달라붙어 헤엄치고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야 된다."

마을 사람 누구에게 물어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너는 명심해두라고 할아버지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좋게만 들리는 이야기도 때로 그 뒤엔 다른 면이 있는 법이야."              p.20


괴기소설이나 변격 탐정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인 도조 겐야는 일본 각지에 전해지는 괴담과 기담에 사족을 못 쓰는 인물로 괴이담 수집을 위해 거의 항상 여행 중이다. 어쩌다보니 방문하는 곳에서 기괴한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과 관련된 괴이담에 얽힌 살인사건이 대부분이라 자연스럽게 아마추어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로 이끌어 왔다. 이번에는 같은 대학 출신 대학 후배인 편집자 오가키 히데쓰구가를 통해 그의 고향에 전해지는 괴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조사해보기 위해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창해의 목>, <망루의 환영>, <대숲의 마>라고 겐야가 명명한 세 가지 괴담은 에도시대와 메이지시대와 전전의 괴이담이었다. 나머지 하나인 <뱀길의 요괴>는 히데쓰구가 나고 자란 유리아게촌에서 닛쇼방적 공장이 있는 헤이베이 정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무대로 요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무척 불가해한 체험담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현재진행중인 이야기라 더욱 겐야의 관심을 이끈다.


도조 겐야를 담당하는 여성 편집자 소후에 시노와 괴담에 대해 알려준 히데쓰구가 이번 여행을 함께 하게 된다. 그들은 험난한 길을 뚫고 마을에 도착하지만, 그들은 곧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도조 겐야처럼 민속학을 연구 중인 민속학자 노조키 렌야가 현지에서 먼저 조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바로 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미로처럼 펼쳐진 대숲 한가운데서, 굶어죽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상태였다는 거다. 특별히 묶여 있지도 않았고, 두 다리 중 어느 쪽을 다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대숲 신사 한가운데서 아사한 것이다. 평범하게 걸어서 나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노조키 렌야는 무엇을 조사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어떠한 연유로 신사 안에서 아사한 것일까. 대숲 신사의 열린 공간에서 일어난 괴상한 아사에 이어 살인사건은 연이어 벌어진다. 망루의 시선으로 인한 밀실에서 일어난 수수께끼의 실종, 다루미 동굴의 모래땅 경내에서 일어난 발자국 없는 살인, 큰 헛간에서 일어난 위장 사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액사까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연쇄살인을 관철하는 동기는 무엇이며, 사건의 진범은 과연 누구일까. 겐야는 이번에도 네 가지 괴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을까. 




그 순간 겐야는 왠지 섬뜩했다. 어선에 당연히 불은 켜져 있지만, 진행 방향 일부를 비출 뿐이다. 배 주변은 압도적인 어둠에 싸여 있어서 그야말로 망선에 쫓기고 있어도 전혀 모를 정도다. 하늘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빛은 북쪽에 이치한 이시노리 촌 인가의 불빛뿐이었다. 그런 희망의 빛도 마을 해안선을 지나고 나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이소미 촌에 도착할 때까지 어선 주위는 완전한 어둠에 지배당한다. 대자연의 공포...... 산속에 있을 때도 이따금 문득 느낀 두려움과 똑같은 것이 별안간 겐야를 덮쳤다.               p.450~451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 일본 번째 작품이다. 국내에는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산마처럼 비웃는 것>,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네 권이 소개되었는데, 그로부터 무려 11년 만에 신작이 나온 것이라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참고로 시리즈 중에 번역되지 않았던 <흉조처럼 꺼리는 것>과 <기명처럼 바치는 것>도 계약이 되었다고 하니, 곧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리즈는 고립된 마을의 집단적 공포에 기반을 둔 오싹한 호러와 곳곳에 포진해 있는 복선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본격 미스터리를 방랑 소설가 도조 겐야를 화자로 풀어낸다. 특히나 이 시리즈가 재미있는 건 정교한 트릭이 돋보이는 본격추리 방식에, 비현실적인 괴담을 접목시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종종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들기도 하면서 종횡무진으로 달려나간다. 미스터리미스 요소가 돋보이면서도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괴기스러운 배경은 극에 더욱 매력을 부여해준다. 도조 겐야 만큼이나 엉뚱한 매력을 보여주는 여성 편집자 소후에 시노와의 에피소드도 유쾌하게 극을 이끌어 준다.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 도라 할 수 있는데, 책의 서두에 고라 지방 지도와 함께 주요 등장 인물이 마을 별로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속도를 더해가는 스토리가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미스터리 고유의 수수께끼 풀이라는 것도 재미있지만, 특히나 돋보이는 것은 바로 장면마다 배어있는 으스스한 분위기와 공포라는 감정이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은 절대 밤에는 읽지 말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험난한 산과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왕래조차 쉽지 않은 바닷가의 다섯 마을에 전해지는 시대도, 배경도, 각기 전혀 다른 네 가지 괴담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도조 겐야와 일행들이 고생 끝에 도착한 마을에서 괴담을 모방한 것만 같은 '열린 밀실'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는데, 그는 이번에도 괴담 살인사건을 해결해낼 수 있을까에 기대를 모으고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충격적인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도조 겐야' 시리즈는 밀실살인으로 대표되는 본격추리의 틀에 토속적이고 민속학적인 괴담을 접목시킨 독특한 작풍으로 읽다 보면 호러인지 미스터리인지 알 수 없는 그 독특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아직까지 이 시리즈를 만난 적이 없다면, 이번 작품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호러 미스터리의 고수가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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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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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반질거리는 흰 벽 뒤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위한 성스러운 오아시스를 지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사기극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쓸데없이 기웃거리지 말고 꺼지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난 어떻게든 이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더 굳게 마음먹었다.

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을.            p.26


난해한 현대 미술 앞에서 당황스러웠던 적 있을 것이다. 이게 대체 왜 아름다운 건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 앞에서 예술가들과 큐레이터,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낸다. 왜 예술은 대중을 따돌리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비앙카 보스커는 문화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팔고, 작업실에서 작가들을 돕고,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몇 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유는 단 하나, 현대 미술을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었고, 동시대 미술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장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정 분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가장 깊은 곳까지 완벽하게 들어가서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비앙크 보스커는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낸다. 철옹성 같은 ‘순수 예술계’에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신세계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그간 살아왔던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이 어디까지 지저분해질 수 있는지 목격한다. 우선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으로 갤러리에서 일해보기로 한다. 예술 작품을 노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에. 경험상 이런 일은 몸으로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작은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첫 업무는 아홉 겹의 페인트칠이었다. 그렇게 브루클린의 작은 갤러리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마이애미 아트 페어에서 그림 판매에 열을 올리고, 전시회 큐레이터와 신진 예술가의 작업실 조수를 거쳐,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기 까지의 여정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때까지 나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관객으로만 미술관을 경험했지 배지를 달고 출입 통제 구역을 드나든 적은 없었기에 미술계의 최상층이요, 궁극의 지향점이라는 이 공간의 내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도망갈 곳 없이 매일 몇 시간씩 예술 작품 옆에 있는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나는 줄리의 작업실에서 예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미술관 경비원 업무로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들 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 오래 작품을 보는 사람이 경비원일 것이다. 경비원은 컬렉터보다도 오래 본다.             p.382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위해 수년간 부단히 애를 쓴 저자의 이야기는 예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서, 예술 작품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예술 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한 작품에 할당하는 평균 시간은 17초라고 한다. 이 또한 작품 앞에 멈춰 선 경우만을 계산한 것이라, 실제 평균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한 작품을 40분간 노려보는 일 따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15대의 보안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휴대폰을 꺼내면 해고당한다는 위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구역을 지키는 40분 동안 단 한 작품만 바라보는 실험을 하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예술 작품과 관계를 맺을 때, 작품이 달라지고 자신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깨닫는다. 미술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있는 모든 작품을 꾸역꾸역 삼킬 필요없이, 원하는 몇 가지만 집중에서 보면 된다고 말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몇 주 동안 같은 작품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고, 관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예술은 선택이다. 안일함을 거부하는 선택이고, 더 풍요롭고 더 불편하고, 더 영혼을 강타하고, 더 불확실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다. 무엇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은밀한 진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 완전히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자신만의 미학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해 굉장히 흥미로웠다. 무언가를 이론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동시대 미술에서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날 것 그대로의 예술계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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